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7권, 영조 42년 1766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11. 17:58
반응형

12월 3일 기해

예조에서 내년 정해년208)   정조 진하(正朝陳賀)를 계품(啓稟)하니, 권정(權停)을 명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전 병조 참판 박성원(朴聖源)에게 치사(致仕)를 명하였다. 처음에 박성원이 상소하여 치사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몇 해를 보양(保養)한 공을 마땅히 이로써 보답하여 특별히 그 청을 허락한다."
하였다.

 

12월 4일 경자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영의정·우의정이 같이 들어와서 번갈아 정조 진하(正朝陳賀)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2월 5일 신축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선혜청(宣惠廳) 당상 이익보(李益輔)에게 체차(遞差)를 허락한다고 명하니, 이익보가 우의정 김양택(金陽澤)과 친혐(親嫌)이 있어서 상소하여 인혐(引嫌)한 때문이었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대훈(大訓)의 부첨(付籤)한 곳이 아직도 많아 미안스러우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영의정·우의정에게 순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서덕수(徐德修)를 신설(伸雪)하고 김용택(金龍澤)을 신설하지 아니하면, 나에게 부담되는 바가 있을 듯하다. 이들은 모두 나라를 위한 사람이다."
하였다. 영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신이 강교(江郊)에 물러가 있을 때에 듣건대 처분하심이 진실로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좌의정의 말을 들은즉 이미 미안한 곳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니, 굽어 따르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간 해에 이정소(李廷熽)·조성복(趙聖復)으로 인하여 하교하니, 신회(申晦)가 지당하다고 대답하였었다."
하였다.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저궁(儲宮)을 세우는 것으로써 말하면 주고받은 것의 광명 정대(光明正大)함은 비할 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여러 사람은 비록 나라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에 있어서는 정(精)하지 아니할 따름이니, 주고받는 즈음에 무슨 관섭(關涉)이 있었겠습니까만, 세대가 천백대(千百代)가 멀어져서 이 일을 알지 못하는 자는 단지 대훈(大訓)으로만 보면 그 논열(論列)한 바가 참으로 무슨 관섭이 그사이에 있는 것처럼 여길 것이니, 신이 이를 근심하여 반드시 개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한 연후에 내게 더욱 광명(光明)할 것이다. 고 상신(相臣) 조현명(趙顯命)이 매양 말하기를, ‘김용택은 약하다.’고 하였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김용택이 나라 일에 언급하면 문득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하자,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전일의 처분은 만만 뜻밖에 나와서 신의 한 집안이 먼저 구제해 발탁(拔擢)하는 은혜를 입었으므로 의리가 이로 인하여 펴짐을 얻었으니, 온 세상이 흠앙(欽仰)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과 김용택은 이미 법전(法典)에 피혐(避嫌)이 없는데, 하물며 이 일은 관계가 심히 중하니, 어찌 감히 혐의하여 진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때에 급급히 마쳤기 때문에 구어(句語)가 미안한 곳이 많이 있어서, 후세 사람이 보게 되면 어떤 일이 그 사이에 있는 것처럼 인정하게 됩니다. 당일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에게 무고(誣告)를 입은 자가 오히려 쾌히 신설(伸雪)되지 못한 염려가 있으니, 축조(逐條)하여 다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다섯 사람을 아울러 처단하라.’는 문구(文句)를 산삭하였고, 또 ‘위시(僞詩)에 속았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어찌 김일경·목호룡 같은 흉적으로 더불어 한 책에 같이 실을 수 있겠습니까? 대훈 가운데 ‘별달리 분통함이 있다.[別有憤痛]’라는 이하는 모두 삭제해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윤허하시는 하교를 받들면 마땅히 부첨(付籤)하여서 품재(稟裁)를 우러러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윤동도가 말하기를,
"신 등은 마땅히 물러 나가서 상의한 뒤에 들어오겠습니다."
하고, 세 대신(大臣)과 여러 비국 당상이 조금 물러갔다. 임금이 입시한 승지에게 유시하기를,
"어느 곳 어느 구절(句節)에 부첨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곧 입시하자, 승지에게 명하여 대훈에 부첨한 곳을 읽어 아뢰게 하였다. ‘공(功)을 탐하고 이(利)를 바라는 무리’라는 데에 이르자, 임금이 문 난간을 치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가 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을 침욕(侵辱)한 말이 내 귀에 들어왔는데, 이는 공을 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신도 공을 탐하지 아니한다고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만, 불령(不逞)한 가운데 서로 섞어서 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 밖에 별달리 분통(憤痛)이 있다.’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김용택을 이에 두었으니, 썩은 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 이는 마땅히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게 처리할 것이다. 김용택은 이희지(李喜之)·이천기(李天紀)·심상길(沈尙吉)·정인중(鄭麟重)과 같이 말할 수 없는데, 어찌 이 부분을 뽑아낼 수 있는가? 위시(僞詩)는 뽑아 낼 수 있겠는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저번에 ‘이 무리도 속임을 당하였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이미 그가 지어낸 것이 아니면 이 무리에게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그의 지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은 자가 있을 것인데, 이제 이를 뽑아 내면 무슨 얼굴로 저승에 돌아가서 선왕(先王)을 뵙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소리를 높여서 말하기를,
"빨리 대훈을 가지고 물러가라. 내가 어찌 머리를 굽혀 명을 듣겠는가? 하례(賀禮)도 또한 다시 청하지 말라. 대훈을 가지고 말하는 자는 모두 역적이다."
하고 사관(史官)에게 하교하기를,
"오늘 전교를 기휘(忌諱)하지 말고 곧바로 사초(史草)에 쓰라."
하였다. 세 정승을 파면하고 입시한 여러 신하를 아울러 현직을 해임하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궁에 나올 때에 도총부(都摠府)에 임하여 입직(入直)한 총관(摠管) 전춘군(全春君) 이계(李堦)에게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였다. 가마[轎]를 멈추고 어제(御製)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내 마음을 마쳤다.[予心畢矣]’는 데에 이르러, 좌승지(左承旨) 정상순(鄭尙淳)이 붓을 멈추매, 도승지 윤득우(尹得雨)가 말하기를,
"‘필의(畢矣)’ 두 글자를 어찌 감히 쓰겠습니까?"
하자, ‘나의 마음을 이루었다.[予心遂矣]’로 고치기를 명하니, 정상순·윤득우가 같이 말하기를
"‘수(遂)’자는 ‘필(畢)’자와 다름이 없으니, 감히 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도승지와 붓을 잡은 승지에게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고,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문 난간의 벽돌 위에 나아가서 하교하기를,
"오늘의 일은 어찌 신자(臣子)의 마음이겠는가? 단지 하례(賀禮)만 청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대훈을 지을 때에 좌상의 아버지가 찬성(贊成)하였는데, 오늘날에 이와 같으니, 어찌 괴이하지 아니한가? 내가 마땅히 여기 앉아서 돌아가지 아니하겠다."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이휘지(李徽之)가 말하기를,
"뭇 신하가 잘못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처럼 수고로이 기동하십니까? 모두 뭇 신하의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부승지가 착하다."
하고, 앞에 나오게 하여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여러 신하가 대훈을 고치려고 하여 위시(僞詩)까지 삭제해 버리라고 한 것은 말이 되는가?"
하니, 이휘지가 말하기를,
"‘위시’는 결단코 뽑아 버릴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동부승지가 공평하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하교하기를,
"내가 신축년210)  에 저위(儲位)를 받았는데, 오늘 간지(干支)가 또 신축일이다. 내가 장차 구저(舊邸)에 누웠을 것이니, 여러 신하들은 모두 하직하고 가도록 하라."
하였는데, 사교(辭敎)가 지극히 심상하지 아니하였다. 이휘지가 말하기를,
"신이 단폐(丹陛)211)  에 머리를 부딪쳐 부스러뜨릴지라도 만약 하교를 도로 거두시지 아니하시면 결단코 물러가지 아니하겠습니다. 신축년을 당하여 전하께서 비록 백이(伯夷)의 절개가 있을지라도 어찌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은 오직 전하만 계시는데, 전하께서 어찌 사양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니, 답하기를,
"내가 이미 여기 왔으니 돌아가지 아니하려고 한다."
하자, 궁관 정창성(鄭昌聖)이 일어났다가 엎드려 말하기를,
"신이 비록 죽을지라도 감히 이 하교를 받들고 돌아가서 동궁께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러면 ‘알았다[知道]’라고 고치라."
하였다. 여러 신하가 회란(回鑾)하기를 힘써 청하니, 임금이 장차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이휘지가 어의(御衣)를 당기며 말하기를,
"옛사람이 임금의 옷자락을 당긴 자가 있었는데212)  , 신은 죽을 죄를 범하였습니다. 신은 환궁(還宮)하겠다는 하교를 받들지 아니하면 감히 물러가지 아니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이휘지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동부승지가 착하다. 마땅히 동부승지의 요청에 따라 환궁하겠다."
하였다.

 

12월 6일 임인

여러 승지와 여러 옥당(玉堂)과 약방이 합문(閤門)에 나아가 입대(入對)를 청하고, 춘방(春坊) 관원이 왕세손의 뜻으로써 입대를 청하며, 판부사(判府事) 서지수(徐志修)가 입대를 청하였다. 현직을 해임하라는 전교를 정침하라고 명하고, 신시(申時)에 환궁하였다. 윤동도(尹東度)·김치인(金致仁)·김양택(金陽澤)이 모두 서명(胥命)하니, 대명(待命)하지 말기를 명하고 다시 상신(相臣)을 제수하였다.

 

김면행(金勉行)을 대사간으로, 정창성(鄭昌聖)을 집의로, 유선양(柳善養)을 사간으로, 정문주(鄭文柱)·곽진순(郭鎭純)을 장령으로, 구상(具庠)을 헌납으로, 임정원(林鼎遠)·박사륜(朴師崙)을 지평으로, 송재경(宋載經)·임덕제(林德躋)를 정언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7일 계묘

영의정 윤동도(尹東度), 좌의정 김치인(金致仁), 우의정 김양택(金陽澤)이 나아가 숙배(肅拜)하고 입시(入侍)하였다. 동부승지 이휘지(李徽之)에게 입시하기를 명하여 대훈(大訓)을 읽으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동부승지로 하여금 읽게 한 것은 뜻이 있다. 내가 창의궁(彰義宮)에서 위시(僞詩)를 마땅히 둘 것인지 마땅히 삭제해 버릴 것인지를 반복해 생각하였는데, 비로소 삭제해 버리는 것이 마땅함을 깨달았다. 이밖에 삭제할 만한 것은 삭제하고 고칠 만한 것은 고칠 것이다. 지금 내가 삭제하고 고치는 것은 뜻이 있다."
하였다. 윤동도 등이 정조 하례(正朝賀禮)를 거듭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2월 8일 갑진

임금이 탕제(湯劑)를 들지 아니하므로, 약방에서 다섯 번 아뢰었다. 대신이 입대(入對)를 청하니, 입시(入侍)하라 명하고, 하례를 청하는 일로써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교시를 내리기를,
"경 등이 만약 하례를 청하지 아니하면 마땅히 탕제를 들겠다."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감히 다시 청하지 아니하겠습니다."
하였다.

 

12월 9일 을사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여러 대신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라. 경 등의 하례를 청함이 지리(支離)하더니, 과연 이러한 청이 있다. 경 등이 그치지 아니하면 내가 마땅히 창의궁(彰義宮)에 갈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창의궁에 동가(動駕)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가교(駕轎)를 타고 자정문(資政門)에 나가서 승지(承旨)·삼사(三司)·삼공(三公)을 아울러 파직하기를 명하고, 동소(東所)의 위장(衛將) 이언희(李彦熙)를 승지로 제수하였다. 창의궁에 나아가 세 대신(大臣)을 삭직(削職)하기를 명하고, 판부사(判府事) 서지수(徐志修)를 영의정으로, 판돈녕(判敦寧) 한익모(韓翼謨)를 좌의정으로,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상철(金尙喆)을 우의정으로 제배(除拜)하고, 영의정을 내국 도제거(內局都提擧)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육(李堉)을 집의로, 정언섬(鄭彦暹)을 장령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예조 판서로, 홍중효(洪重孝)를 좌윤(左尹)으로, 이경호(李景祜)·권도(權噵)·홍낙임(洪樂任)·윤면동(尹冕東)을 승지로 삼고 특별히 박상덕(朴相德)을 평안 감사로, 이사관(李思觀)을 병조 판서로, 최익남(崔益男)을 수찬으로, 심욱지(沈勗之)를 동부승지로 제수하였다.

 

약방(藥房)에서 구전(口傳)으로 네 번 아뢰고, 여러 승지가 청대(請對)하였으며, 대사헌 조영진(趙榮進), 대사간 김면행(金勉行), 헌납 구상(具庠)이 청대하였다.

 

12월 10일 병오

대신(大臣)이 2품관을 거느리고 구대(求對)하였다. 이때 눈이 많이 내렸는데, 약방과 승정원이 밤을 지새워 합문(閤門)을 지켰다. 전교를 승정원에 내렸는데, 바로 24자(字)의 휘호(徽號)였다. 승지가 작환(繳還)213)  하려고 문을 밀치자 여러 신하가 뒤따라서 문이 부서지는 데 이르렀으니, 뜰에 들어온 대신을 파면시키고 여러 신하를 해임하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연융대(鍊戎臺)에 거둥하니, 어두워질 무렵 눈을 무릅쓰고 가서 엄위(嚴衛)가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왕세손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진현(進見)하기를 청하였다. 밤 삼경(三更)에 성후(聖候)가 편치 못하여 비로소 약원에 입시(入侍)하기를 명하니, 재차 정기산(正氣散)을 올렸다.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회란(回鑾)하기를 힘써 청하였으나, 발락(發落)이 없었다.

 

12월 11일 정미

비로소 환궁(還宮)하였다.

 

승지가 입시(入侍)하였다. 수가(隨駕)한 금군(禁軍), 호위 군관(扈衛軍官), 협련군(挾輦軍)에게 시사(試射)·시방(試放)하여 시상(施賞)하라고 명하였다.

 

봉조하(奉朝賀) 한사득(韓師得)이 졸(卒)하였다.

 

기신(耆臣)에게 보제(補劑)와 식물(食物)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일전에 여러 신하의 뒤를 따라 전석(前席)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주선을 잘못하여 엄중한 하교를 불러 이르게 되었습니다. 공손히 큰 죄를 기다렸는데 뜻하지 아니하여 의정(議政)의 새 임명을 갑자기 받았습니다. 아! 나라에서 사람에게 관직을 주는 데에는 정승을 두는 것이 가장 중합니다. 성명께서는 어찌하여 지극히 용렬하고 우매하며 지극히 둔하고 막힌 천신(賤臣)을 취하여, 이를 맡기면서 조금도 어려워하거나 삼가지 아니하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하건대 신이 사적(仕籍)에 통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특별히 알아주심을 치우치게 입어 차례로 옮겨 숭품(崇品)의 지위를 이루었으니, 매양 한번 반성하매 두렵고 부끄러움이 아울러 더합니다. 지난해 사람들의 말함은 일이 윤리(倫理)에 관계되므로 황량한 교외(郊外)에 자취를 감추어 성세(聖世)의 버린 물건으로 자처(自處)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밝게 분변하시고 또 거두어 주셨으니, 물러가 구학(丘壑)에서 죽더라도 다시 유감이 없습니다. 상신(相臣)에 제수하는 명은 진실로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한 바인데, 마침 일의 기회가 근심스럽고 절박함을 인연하여 창황히 추사(趨謝)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제 저녁에 배명(拜命)하고 오늘 사은 숙배(謝恩肅拜)한다면, 곁의 사람이 비웃고 꾸짖으며 무엇이라고 이르겠습니까? 바라건대 새 직질(職秩)의 명을 거두시고,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다시 골라서 임명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충성스럽고 삼가는 지조(志操)와 너그럽고 넉넉한 국량(局量)이 있는 그대를 늙은 나이에 정승으로 뽑았으니, 나는 사람을 얻었다고 말한다.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안심하고 길에 오르라는 일을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에게 전유(傳諭)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4일 경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임금의 나이가 연만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정성[愛日之誠]은 셋이 있으니, 그 아름다움을 따르고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구원하는 것이 첫째이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본받아 정밀·명백하게 서로 공경하며 협력함이 둘째이고, 나라를 내 집처럼 여겨 우리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셋째이다. 하의(賀儀)가 비록 중할지라도 임금으로 하여금 번뇌(煩惱)하게 하면, 애일(愛日)이 아니요, 비록 차대(次對)를 행할지라도 백성이 은혜를 입지 못하면, 애일이 아니다. 이름을 드날린다고 하면서 형식을 먼저 하면, 이것이 어찌 애일이겠는가? 이 뒤에 이로써 다시 제기해 말하는 자는 사관(史官)이, ‘괴로운 마음을 체득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아첨하기만 생각한다[不體苦心專意諂諛]’는 여덟 글자를 대서 특서(大書特書)하라."
하였다. 팔도(八道)에 명하여 구포(舊逋)의 수봉(收捧)을 정지하게 하였다. 이익보(李益輔)·정홍순(鄭弘淳)을 선혜청(宣惠廳) 당상으로 차임하였다.

 

12월 15일 신해

도승지 이경호(李景祜), 좌부승지 홍낙인(洪樂仁)이 아뢰기를,
"강원 감사 민백흥(閔百興)·평안 감사 신회(申晦)·통제사 이주국(李柱國)·경상 좌수사 이방일(李邦一)·전라 좌수사 남익상(南益祥)·황해 수사 이정수(李廷壽)를 청컨대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이 한 사람도 하고(下考)214)  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를 윤허하였다.

 

12월 16일 임자

지사(知事)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여러 신하가 〈하례를〉 베풀기를 청한 것이 혹시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으면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높이 앉아 죄를 주거나 물리치는 것이 가한데, 도리어 밤에 거둥하기를 명하여 구저(舊邸)에서 밤을 지내시고 불시에 명령을 내려 연(輦)이 북문(北門)으로 나갔습니다.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중주(中主)에 지나지 아니하나 〈말을 타고〉 높은 비탈을 내려오려고 하자 원앙(袁盎)이 고삐를 잡고 만류하였는데, 바야흐로 성명(聖明)의 세대를 당하여 한 사람도 원앙과 같은 이가 없으니, 신은 몹시 개탄(慨歎)스럽습니다."
하였고, 헌납 구상(具庠), 교리 이보관(李普觀)이 모두 상소하여 진계(陳戒)하니, 모두 비답(批答)을 내려 가상히 받아들였다.

 

12월 17일 계축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서지수(徐志修)가 말하기를,
"세손(世孫)의 합례(合禮)215)  의 행사를 지냈으니, 경행(慶幸)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특하고 다행한 마음이야 어찌 사가(私家)와 다르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80을 바라보는 늙은 나이에 이번에 어린 손자가 성례(成禮)하였으니, 실로 이는 만만 뜻밖이다. 예전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비록 마땅히 행할 은전(恩典)은 없을지라도 또한 참작하여 세초(歲抄) 뒤에 패초(牌招)를 어긴 사람은 아울러 서용(敍用)하고, 〈도정(都政)에서〉 거중(居中)·거하(居下)한 자를 모두 탕척(蕩滌)하라."
하였다. 서지수가 김시찬(金時粲)이 이미 작고(作故)하였는데 직첩(職牒)을 주는 은전(恩典)이 없을 수 없다는 뜻을 앙달하니, 임금이 놀라며 말하기를,
"그런가?"
하고, 직첩을 주어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도승지 이경호(李景祜)·이조 판서 윤급(尹汲)·참판 서명응(徐命膺)·좌부승지 김귀주(金龜柱)·병조 판서 이사관(李思觀)·참판 성천주(成天柱)·참의 김주(金霔)·참지(參知) 이득배(李得培)가 입시(入侍)하였다. 이조 참의 홍낙명(洪樂命)의 체직을 허락한다 명하고, 홍낙인(洪樂仁)을 이조 참의로, 이익보(李益輔)를 판돈녕(判敦寧)으로, 김노순(金魯淳)을 부수찬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집의(執義)로, 송덕상(宋德相)을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김종후(金鍾厚)를 자의(諮議)로, 김민재(金敏材)를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으로 삼았다. 김민재는 김용택(金龍澤)의 조카이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2월 20일 병진

정언 송재경(宋載經)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일에 창졸간 거둥하여 구저(舊邸)에 경숙(經宿)하시며 전전(轉輾) 층격(層激)하셨고, 또 연융대(鍊戎臺)에 거둥하셨을 때는 대료(大僚)와 근밀(近密)이 아울러 견척(譴斥)을 입어 심지어는 백의(白衣)로 뒤를 따랐으니, 이것이 무슨 모양입니까? 지나친 거조가 있게 되면 문득 중비(中批)216)  가 있으시니 비록 인망(人望)에 합당하다 하더라도 이미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합당하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최익남(崔益男)을 옥당(玉堂)에 임명한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개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최익남은 선비로 있을 때부터 행동이 비열하고 성질이 뒤틀어져 관문(官門)에서 곤장(棍杖)을 맞는가 하면, 창가(娼家)에서 결박을 당하여 세상에서 버린 바가 되었는데, 일찍이 계방(桂坊)에 제수되자 곧 탄핵하여 바로잡으라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청컨대 새 임명을 거두시고 춘방(春坊)과 대망(臺望)도 개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최익남이 선비 때에 곤장을 맞았는가?
하니, 부제조 이경호(李景祜)가 말하기를,
"산송(山訟)의 일로 양주(楊州) 관아(官衙)에서 곤장을 맞았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비답(批答)하기를,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여러 직임(職任)을 아울러 탄핵 논박하는 것은 내가 취하지 아니한다. 특별히 체직(遞職)을 허락한다."
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일을 담당하지 아니한 대신이 이런 요청이 있어서 마음속으로 취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이미 서덕수(徐德修)를 신설(伸雪)하였는데 김용택(金龍澤)을 신설하지 아니하면, 이는 자성(慈聖)을 저버리는 것이다. 민익수(閔翼洙)는 참으로 대가(大家)의 사람이다. 당습(黨習)에는 비록 몰두하나, 그 사람은 어질다. 김성행(金省行)은 그 사람됨이 심히 약하나 능히 이와 같았으니, 어질다고 이를 만하다."
하니, 영의정 서지수(徐志修)가 말하기를,
"이번 대훈(大訓)은 처분이 지극히 좋습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 박상덕(朴相德)에게 내일 사조(辭朝)하기를 명하였다.

 

12월 22일 무오

전 평안 감사 김상철(金尙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외람되이 범용(凡庸)한 자질로써 임명을 받아 관서(關西)로 내려가게 되어 이에 인(印)을 교부받아 감영(監營)으로 부임하는 길에 갑자기 천만 뜻밖에 감당하지 못할 새로운 임명을 삼가 받았으니, 아!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 거조(擧措)가 있으십니까? 가문(家門)이 대대로 은혜를 받음이 누가 신의 집과 같겠습니까? 부자 숙질(父子叔姪)이 모두 영화롭고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그 덕을 갚으려고 하면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습니다. 신처럼 불초(不肖)한 것이 나서 천재 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만나 가장 세상에 없는 지우(知遇)를 입어, 전후에 받은 벼슬이 이미 몹시 요행스럽게 되고 외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오르기를 그치지 아니하여 있을 수 없는 자리를 맡기시므로, 분수에 넘치는 것을 경계하는 가훈(家訓)에 어긋나고 사람을 알아보는 성상의 밝으심에 누(累)가 되니, 공(公)으로나 사(私)로서나 만에 하나도 가함이 없습니다. 이에 현·도(縣道)를 거쳐 우러러 혈간(血懇)을 드러내오니, 바라건대 간개(刊改)를 명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의 평소(平素)의 마음을 내가 익히 알았고, 경의 아버지의 충실(忠實)한 마음과 경의 숙부(叔父)의 관평(寬平)한 도량(度量)은 내가 안 지 오래이다. 이같은 때에 경을 두고 누구를 먼저 하겠는가? 곧 길을 떠나서 밤낮으로 경을 기다리는 뜻에 부응(副應)하라."
하였다.

 

12월 23일 기미

지제교(知製敎) 장정(張淀)의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장정이〉 봉조하(奉朝賀) 박성원(朴聖源)에게 내리는 교서(敎書)를 지어 올렸는데, 포장(褒奬)함이 너무 지나쳐서 왕언(王言)의 체통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12월 25일 신유

지평 임정원(林鼎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조 판서 조명정(趙明鼎)은 전에 당한 바가 진실로 진신(搢紳)으로서 씻기 어려운 수치인데, 해가 오랜 뒤에 감추어 스스로 가리고 청현(淸顯)의 벼슬에 제수하면 문득 받으니, 청컨대 물리쳐 내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본 사건은 이미 백탈(白脫)되었으니 나는 지나치다고 여긴다.’고 비답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하였다고 하면서 수령을 고르기를 청하였고, 또 성궁(聖躬)을 보호해 아낄 것을 우러러 힘쓰도록 청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장령 정언섬(鄭彦暹)이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2월 26일 임술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지평 임정원(林鼎遠)이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언(王言)을 대찬(代撰)하는 것은 사체가 엄중한데, 박성원(朴聖源)의 치사 교서(致仕敎書)는 전혀 경근(敬謹)한 체제가 없으니, 지제교(知製敎) 장정(張淀)을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또 ‘영암 군수(靈巖郡守) 황간(黃榦)은 불법(不法)을 많이 행하였고, 우윤(右尹) 심각(沈殼)은 비루(鄙陋)한 일을 많이 행하며, 대사헌 이응협(李應協)은 사람됨이 광역(狂易)하고, 무승지(武承旨)는 공기(公器)를 경멸하였다.’고 하면서 논계(論啓)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인피(引避)하여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12월 28일 갑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전 지평 임정원(林鼎遠)을 대망(臺望)에서 뽑아 버리라고 명하였으니, 전후(前後) 무승지(武承旨)를 아울러 논박한 때문이었다. 헌납 구상(具庠)이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