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8권, 영조 43년 1767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1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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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인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였으며,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행례를 마치고 환궁하였다.

 

권농(勸農)하는 전교(傳敎)를 내려 제도(諸道)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시종신(侍從臣)의 아버지로 나이 70, 80인 사람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命)하였다.

 

1월 2일 정묘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수찬 최익남(崔益男)에게 사판(仕版)에서 삭거하는 율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 서지수(徐志修)의 아룀으로 인해서였다. 처음에 최익남이 상소하여 윤동도(尹東度)·김치인(金致仁)·한익모(韓翼謨)를 논핵하였는데, 송재경(宋載經)이 상소한 후에 최익남이 세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 상소하여 대변(對辨)하면서, 심지어 말하기를, ‘연소(年少)한 무리를 길러내어 멋대로 흔극(釁隙)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후원(喉院)에서 비록 퇴각하고 받지 않았으나 좌의정 한익모는 곧바로 출성(出城)하였는데, 서지수가 최익남의 논핵한 바는 모두 군자(君子)쪽 사람이라고 앙달하니, 임금의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서지수가 또 좌상이 출성한 때에 명소패(命召牌)001)  를 반납하였는데 정원에서 명을 기다리지 않고서 반납한 명소패를 퇴각하였으니 사체가 미안하다 하여 해당 승지를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윤허하고, 승정원에 있던 승지의 현임(現任)을 모두 해면시켰다. 서지수가 또 말하기를,
"여러 옥당(玉堂)들이 다른 사람을 따라서 거취(去就)함은 참으로 용렬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이미 말하였으니, 유신들이 반드시 시애(撕捱)002)  할 것이다."
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황희(黃喜)는 여러 유신으로 하여금 모두 패(牌)를 받들어 입궐하도록 하였으나, 이제 신의 말이 장차 시애(撕捱)하게 했다면 신이 참으로 실언(失言)한 것입니다."
하니, 여러 유신을 모두 현임(現任)에서 해면하라 명하였다.

 

1월 3일 무진

이창수(李昌壽)를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송영(宋鍈)을 장령으로, 이수일(李秀逸)을 헌납(獻納)으로, 이인묵(李仁默)을 지평(持平)으로, 정상순(鄭尙淳)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창의(李昌誼)를 판돈녕(判敦寧)으로, 신회(申晦)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정홍순(鄭弘淳)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김시영(金始煐)을 판윤(判尹)으로, 정여직(鄭汝稷)을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1월 4일 기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도감(都監)과 금영(禁營)의 신·구번(新舊番) 장사(將士)를 호궤(犒饋)하였다. 서지수의 내국(內局) 도제거(都提擧)의 사직을 허락하고, 한익모로서 대신하라고 명하였으며, 전 영의정 윤동도, 전 좌의정 김치인, 전 우의정 김양택(金陽澤)을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상소하여 진변(陳辨)하니, 비답하기를,
"그 말이 해괴하니, 어찌 족히 개의하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또 사본(辭本)을 올리니, 수서(手書)로 비답을 내리고, 승지에게 명하여 유시를 전하게 하였다.

 

1월 5일 경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전 참판 이산두(李山斗)를 특별히 지중추로 발탁하고, 본도로 하여금 고기와 비단을 주도록 하였다. 이산두는 영남 사람인데, 영의정 서지수의 아룀을 인해서였다.

 

사직(司直) 남유용(南有容)이 상소하여 휴퇴(休退)하기를 비니, 비답하기를,
"지난해에 충자(沖子)를 부탁한 것은 박성원(朴聖源)과 마찬가지였으니, 차마 한 사람은 허락하고 한 사람은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어 한 번의 청에 즉시 윤허한다. 비록 그러하나 경은 본디 집안이 가난하고 월름(月廩)이 적으니, 경을 위해 민망스럽게 여긴다."
하고, 인하여 해조로 하여금 원래의 세찬(歲饌) 이외에 더 주라고 명하였다.

 

제언(堤堰) 및 환곡(還穀)의 유치와 방출을 신칙하도록 명하였다.

 

1월 7일 임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원점 유생(圓點儒生)의 인일제(人日製)003)  를 시험하고 수석을 차지한 생원(生員) 유덕신(柳德申)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예조(禮曹)에 날짜를 가려 친경(親耕)·친잠(親蠶)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74세에 충자(沖子)와 함께 친경을 하고, 내전(內殿)에 친잠을 명하였으니, 이런 일이 어찌 나라의 사첩(史牒)에 있었겠는가? 친잠은 삼조(三朝)에서 이미 행한 고례(古例)가 있었고, 황조(皇朝)에서도 이미 이런 예가 있었다. 《오례의(五禮儀)》에 없는 것을 이번에 의기(義起)하여 하교하니, 이에 의해 거행하라. 내집사(內執事)의 삼헌(三獻)은 내전(內殿)·혜빈(惠嬪)·빈궁(嬪宮)이 하고, 예의사(禮儀使)·집례(執禮)·집준(執尊)·대축(大祝)·축사(祝史)·재랑(齋郞)은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가 하며, 친잠 때는 기악(妓樂)을 사용하지 말라."
하고, 춘추관 당상·낭청이 강도(江都)에 가서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1월 9일 갑술

우의정 김상철이 세 번째 사소(辭疏)를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김상철이 나와 숙배(肅拜)하고 입시하자, 임금이 손을 잡고 돈면(敦勉)하였다.

 

사직(司直) 김상익(金尙翼)이 상소하여 휴퇴(休退)를 비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월 10일 을해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상철이 춘방(春坊) 관원을 오래 유임시켜 효과를 이루기를 책임지우고, 빈객(賓客)을 신칙하여 윤번제로 서연(書筵)에 들어오게 하며, 작상(爵賞)과 수령의 선택을 신중히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친경(親耕)하는 의절(儀節)은 왕세손은 마땅히 일곱 번 밀고, 종실(宗室)과 대신은 마땅히 아홉 번 밀어야 한다고 앙달하니, 총재(冢宰) 이하는 모두 아홉 번 미는 것으로 마련하고, 태실(太室)의 고유(告由)는 당일에 거행하되, 친경 때 흑우(黑牛)를 사용하며, 습의(習儀)는 한 번씩만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1월 13일 무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봉조하(奉朝賀) 남유용(南有容)·김상익(金尙翼)·박성원(朴聖源)에게 선마(宣麻)004)  하였다.

 

수찬 정후겸(鄭厚謙)이 상소하여 태묘(太廟)에 술 쓰기를 청하고, 또 아직까지 죄에 얽매어 있는 산림(山林)과 말 때문에 죄를 입은 대신(臺臣)에게 모두 은유(恩宥)를 내릴 것을 청하였으며, 말미(末尾)에 형조 판서 심수(沈鏽)가 불법(不法)을 행하여 사복(私腹)을 채운 것을 논하고, 두 전관(銓官)과 탁지(度支)의 의망(擬望)을 개정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연소배가 숨김이 없으니 뜻은 가상하나, 이미 면칙(面飭)을 받고도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 끝의 일은 이러한 자들이 참섭(參涉)할 것이 아닌데, 이런 상소를 한 후에만 명관(名官)이라 할 수 있는가? 이 글을 돌려주고 영원히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정후겸은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의 아들인데, 교리 서유량(徐有良) 등이 차자를 올려 구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하도록 권한 것이니, 빨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문후(問候)하지 말라 명하고, 탕제(湯劑)를 물리쳤다. 약방(藥房)이 구대(求對)하고 영의정과 우의정이 청대하니, 닭이 울 무렵에야 비로소 입시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사(逸士)가 견책을 받은 것은 본디 그들이 스스로 취한 것이지만, 마침내는 나라의 복은 아니다."
하니, 영의정 서지수(徐志修)가 말하기를,
"그들이 어질다고 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배양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렇게 해서는 안될 듯 싶습니다."
하였다.

 

1월 15일 경진

김상중(金尙重)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사해(朴師海)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진항(李鎭恒)을 집의(執義)로, 정창성(鄭昌聖)을 부응교(副應敎)로, 이행원(李行源)을 사간(司諫)으로, 신일청(申一淸)·홍상직(洪相直)을 장령(掌令)으로, 이치중(李致中)·조준(趙㻐)을 교리(校理)로, 심관지(沈觀之)·유언호(兪彦鎬)를 부교리(副校理)로, 서호수(徐浩修)·김노순(金魯淳)을 수찬(修撰)으로, 윤사국(尹師國)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중해(李重海)·이겸빈(李謙彬)을 지평(持平)으로, 채위하(蔡緯夏)를 헌납(獻納)으로, 윤석렬(尹錫烈)을 문학(文學)으로, 이상악(李商岳)·홍찬해(洪纘海)를 정언(正言)으로, 이명빈(李命彬)을 사서(司書)로, 원경렴(元景濂)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삼았는데, 이 정사(政事)는 무릇 13통(通)이었다.

 

이조 참판 서명응(徐命膺)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소리(小吏)가 간통(簡通)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여 주었는데, 신이 바야흐로 인입(引入)한 처지였기에 봉함을 뜯지 않고 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안(政眼)을 보니, 통의(通擬)가 난만(爛漫)하고 모두 신이 참여해 듣지 않은 바였습니다. 통의하는 법은 외방에 있는 자에게는 간통(簡通)하지 않으며, 숙배(肅拜)하지 않으면 간통은 하되 ‘근실(謹悉)’이라고 쓰지 않으며, 사정과 병으로 인입(引入)한 자는 비록 가부를 말하지 않더라도 통의를 허락하면 통의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 가부가 없으면 통의하지 못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이제 신은 이미 외방에 있는 자도 아니요, 또 숙배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두 동료가 신이 참여해 들었는지 참여하여 듣지 않았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신이 무상(無狀)하여 요당(僚堂)에게 중히 여김을 받지 못해서 이처럼 실격(失格)하게 되었으니, 신이 진실로 스스로 탓을 했지만 또한 어찌 이러한 통의(通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어제 정사에서 통의한 여러 사람을 모두 우선은 시행하지 말고 후일의 정사를 기다려 다시 통의하여 격례(格例)를 보존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번 전관(銓官)의 일은 모두 칙려(飭勵)함이 없지 않다. 서명응의 상소는 옳으나, 끝의 결어(結語)는 곧 내가 처음 듣는 말이다. 판서 윤급(尹汲), 참의 홍낙인(洪樂仁)은 청환(淸宦)에 통의함이 지극히 난만하니, 아울러 파직하라."
하고, 이최중(李最中)을 참판으로, 이미(李瀰)를 참의로 제수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임준(任㻐)에게 예경(禮經) 가운데서 오제(五齊)005)  에 대한 문의(文義)를 상고하여 아뢰라 명하고, 태묘에 술을 쓰는 일을 여러 신하에게 두루 묻고 나서 하교하기를,
"을해년006)  의 금주령(禁酒令)은 이에 조선(朝鮮)을 위한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덕이 없어 아래에 행하지 못하고 막중한 태실(太室)에 예주(醴酒)007)  를 쓰니, 내 뜻은 실로 종국(宗國)을 위한 것이었으나 마음이 매우 죄송스러웠다. 더군다나 작년 봄·여름 이후에는 송절다(松節茶)를 복용하고 지금까지 걸어다닐 수가 있으니, 참으로 선조의 영혼(靈魂)께서 내려 주신 바이다. 이런데도 태실에 예주(醴酒)를 써서 고례(古禮)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효(不孝)이다. 오늘 특별히 대신(大臣)을 불러서 밤새도록 문난(問難)하여 늦은 후에야 크게 깨달았다. 오제(五齊)의 예(醴)는 예주(醴酒)의 ‘예(醴)’자와 글자는 같으나 뜻은 같지 않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 감히 날짜를 넘기겠는가? 먼저 태상시(太常寺)에 명하여 미리 준비해 내달 초 길일(吉日)에는 종묘 사직에 옛것을 회복하는 것을 고유(告由)하는 일로 예조에 분부하라."
하고, 또 명하기를,
"제주(祭酒)는 너무 많이 봉하지 말고 남은 것은 전사관(典祀官)이 깨끗한 곳에 붓고, 음복(飮福)하고 남은 술은 종묘의 유사(有司)가 깨끗한 곳에 부으라."
하였다. 수찬 조준(趙㻐)이 말하기를,
"이미 정후겸(鄭厚謙)의 말을 채용하여 묘주(廟酒)를 복구하였으니, 두 번째 일도 역시 윤허를 내려 따르소서."
하고, 여러 신하가 번갈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명흠(宋明欽) 등의 율명(律名)이 어떠한가?"
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영원히 서인(庶人)으로 삼았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림을 서인으로 만든 것은 3백 년 동안 없던 바이고, 사림(士林)을 부식(扶植)하는 것은 바로 우리 나라에 전해 오는 법이니, 특별히 서인을 삼으라는 명을 정지하라."
하고, 인하여 정후겸 등의 처분을 분간(分揀)하라 명하였다.

 

1월 17일 임오

정홍순(鄭弘淳)을 이조 판서로, 한광회(韓光會)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정순검(鄭純儉)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득일(李得一)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수찬 구상(具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최익남(崔益男)의 관철되지 않은 소는 하나의 변괴입니다. 종이 가득히 부르짖은 것은 바로 하나의 탄핵하는 상소이니, 그런 조짐은 결코 키워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 제수하는 명이 뜻밖에 나와서 빙함(冰銜)008)  의 한 조목을 실로 남김없이 더럽혔다는 탄식이 있으며, 청명한 조정의 학사(學士)들이 모두 같은 줄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계(啓)’자를 찍었다. 도승지 윤득우(尹得雨)가 비답이 없이 도로 내려 줄 것을 아뢰니, 비답하기를,
"최익남의 상소는 비단 그 말이 놀랍고 패만할 뿐만 아니라, 소인이란 지목을 그가 어찌 감히 모면하겠는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을 나는 최익남을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 여긴다."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동부승지 강필리(姜必履)가 말하기를,
"신경(申暻)은 이제 이미 죽어 백골(白骨)이 되었으니, 마땅히 아울러서 광탕(曠蕩)의 은전(恩典)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파직을 명하였다가 곧 중지하였다. 도승지 윤득우(尹得雨)가 말하기를,
"한림(翰林) 이사조(李思祚)를 주서(注書)로 이배(移拜)하면 한원(翰苑)009)  에서 회부(回付)시키고, 한원에 넘기면 당후(堂后)010)  에서 또 회부시키니, 이는 참으로 처리하기가 어려운데, 한번 품정(稟定)을 거쳐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하번(下番) 한림이면 추이(推移)해서는 안 되고, 상번이면 추이함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1월 18일 계미

집의 이진항(李鎭恒)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서인(庶人)을 삼으라는 명을 이미 정지하였으니, 전후의 언관(言官)으로서 이 일에 관련되어 견책을 입은 자는 마땅히 탕척(蕩滌)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지우고 시종안(侍從案)에 부첨(付籤)하라고 명하고, 여러 승지들이 논하여 구원하자 아울러 체직을 명하였다.

 

동춘추(同春秋) 조엄(趙曮)이 실록(實錄)을 상고한 뒤에 복명(復命)하였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승지에게 친잠 의주(親蠶儀註)를 읽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잠(先蠶)011)  은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의 황후인 서릉씨(西陵氏)이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왕후(王后)와 명부(命婦)는 모두국의(鞠衣)012)  인가?"
하니, 도제조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매,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지금 상고하여 가져온 《실록》을 보건대 마치 그때의 성대한 의식(儀式)을 보는 것 같다. 이제는 그 의절이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같으니, 조신(朝臣)과 명부(命婦)는 이제 논할 것이 없다. 이번에 혜빈(惠嬪)·세손빈(世孫嬪) 및 내명부(內命婦)·외명부(外命婦), 여러 옹주(翁主)·군주(郡主), 당저(當宁)의 왕손부(王孫婦)는 입참하고, 치사(致詞)는 혜빈 및 내명부 반수(班首)와 외명부 반수인 자만 하라. 우리 나라에는 이미 친향(親享)하는 예(禮)가 없으니, 그날 축시(丑時) 초(初) 1각(刻)에 선잠단(先蠶壇)013)  에 예관(禮官)을 보내 먼저 행하고, 뽕을 따는 것은 시임(時任) 집사(執事)와 잠모(蠶母)가 예문에 의해서 거행하며, 왕비는 다섯 가지[條], 혜빈과 세손빈은 일곱 가지, 내명부는 아홉 가지, 외명부와 부부인(府夫人)·옹주·군주는 열 한 가지씩이고, 구광(鉤筐)014)  도 역시 예문에 의해서 거행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배례(拜禮)하는 의례가 있으니, 예를 마친 후에 왕비의 자리를 잠단(蠶壇)015)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조하례(朝賀禮)에 의해 행례하는 일을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지난날 예관이 ‘친경·친잠 후에 하의(賀儀)가 있다’고 말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내가 어찌 사양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중종(中宗) 때에는 단지 내하(內賀)만을 행하였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가례(嘉禮)를 행한 지 이미 9년이 되었으니, 3백 년 된 옛일을 따라서 이 예를 행하고자 한다. 성종(成宗) 때의 고사를 생각하고 그 당시의 성심(聖心)을 추념하니, 예는 비록 행하지만 어찌 차마 크게 벌이겠는가? 그날 마땅히 내전과 함께 경복궁에 가서 그 예를 보겠으니, 이렇게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1월 20일 을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는데, 여러 대신 및 예조 판서와 비국 당상이 번갈아가며 친경·친잠한 후에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전교를 쓰라 명하고 이르기를,
"기묘년016)  에 종국(宗國)을 위하여 효소전(孝昭殿)에 아뢰고 가례를 올린 지 이미 9년이 되었는데, 또 이런 예를 행하고자 하니, 이는 누가 내려 준 것인가? 친경·친잠을 행한 후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서 마땅히 진하를 받을 것이니, 이로써 의조에 분부하라."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대명회전》을 읽도록 하였다. 전교를 쓰라 명하고 이르기를,
"경복궁에 단(壇) 두 개를 설치하여 하나는 유문(壝門)017)  을 설치해 내전이 친제(親祭)를 행하고, 그 아래의 단은 관경대(觀耕臺)의 예에 의해서 내전이 내·외 명부를 거느리고 채상(採桑)하라. 하루 전날 내전이 혜빈과 내외 명부와 함께 먼저 가서 재숙(齋宿)하고 이튿날 아침에 채상례를 행하며, 환궁하여 하는 헌례(獻禮)는 한결같이 황조(皇朝)의 고사에 의하여 하라. 내전은 모두 삼헌례(三獻禮)를 행하고, 예의사(禮儀使) 이하 여러 집사는 여관(女官)으로서 한다. 다만 진폐찬작관(進幣瓚爵官)과 전폐찬작관(奠幣瓚爵官)은 내·외 명부로서 하되 안에서 차출하여 채울 것이니, 이렇게 분부하라. 옛날에는 음악을 썼으나 기악(妓樂)은 지금 쓸 수 없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물어서 품처하게 하라. 친잠례는 3월 상사일(上巳日)018)  에 거행하고, 습의(習儀)는 단지 한 번만 행하되 광명전(光明殿)에서 하라."
하였다. 영의정 서지수(徐志修)가 말하기를,
"균청(均廳)의 급대미(給代米)가 3만여 석인데, 2만 석은 공물조(貢物條)로 옮겨 납부하였고, 1만여 석은 나올 곳이 없어 부득이 쌀을 무역(貿易)해 들이는 정사를 하니, 남쪽 백성들의 원망이 뼈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균청의 당초 사목(事目)은 연해(沿海) 고을은 매 결(結)마다 쌀 2두(斗)씩을 받되 돈으로 대신 받는 것이 백성들에게 편리하다 하여 마침내 결전(結錢)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전을 받아서 도로 그 돈으로 백성들을 수탈(收奪)하고 있으니, 청컨대 사목(事目)에 의해서 결미(結米)로 받아 가록(加錄)하여 저치하였다가 신대동미(新大同米)와 같이 숫자를 조사하여 균청으로 옮겨 보내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갈고 다듬기를 마땅히 백련금(百鍊金)처럼 해야 하니, 경 등이 비국 당상과 함께 상확(商確)하여 후일에 다시 품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진전(陳田)을 경작하도록 권하는 일은 거행 조목을 내어 엄히 신칙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제향(祭享)에 이미 술을 쓰기로 하였으니 외방에도 일체로 거행하는 것으로 지위(知委)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백관을 독려하여 신칙하였다. 대사헌 한광회(韓光會)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참(朝參)에 참여하지 않은 2품 이상은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2품으로 파직에 현고된 사람은 누구인가?"
하매, 동부승지 최태형(崔台衡)이, 병조 판서·훈련 대장·수어사·총융사라고 우러러 대답하니, 훈련 대장과 총융사는 출대(出代)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호조 판서는 마땅히 현고(現告)에 들어야 할 듯합니다. 정경(正卿)인 사람이 부족하니, 청컨대 종2품으로 비의(備擬)하소서."
하니, 가망(加望)하라고 명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종2품 가운데서는 정실(鄭實)이 가하고, 그 다음은 조돈(趙暾)이며, 그 다음은 이경호(李景祜)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임 대신(原任大臣)은 방금 어디에 있는가?"
하니, 서지수가 모두 강변의 교외(郊外)에 있다고 앙대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안심하고 입성(入城)하여 곧 서추(西樞)에서 숙사(肅謝)하라는 것으로 영부사 윤동도(尹東度), 판부사 김치인(金致仁)·김양택(金陽澤)에게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특지(特旨)로 이미(李瀰)·이성수(李性遂)·윤시동(尹蓍東)·최태형(崔台衡)을 제수하여 승지로 삼았다.

 

1월 21일 병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대사헌 한광회(韓光會)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한 계사(啓辭)에서 이조 판서·호조 판서·병조 판서와 수어사를 배척한 것 때문이었다. 정상순(鄭尙淳)을 이조 참판으로, 홍지해(洪趾海)를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이창의(李昌誼)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남태제(南泰齊)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정실(鄭實)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안윤행(安允行)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재순(金載順)을 부응교(副應敎)로, 김시묵(金時默)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1월 22일 정해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전강(殿講)을 시험하여 유학(幼學) 김이권(金履權)·방종거(方宗擧)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영의정 서지수가 헌의(獻議)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만약 악(樂)을 사용한다면, 기악(妓樂)은 쓰지 말라고 이미 명하였으니 몽수(矇瞍)019)  는 단지 관현(管絃)만 할 줄 알고 종경(鐘磬)은 익히지 못하였으며, 악생(樂生)은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이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비록 뜰 밖에서 행하더라도 오히려 미안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악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사전(祀典)에 선잠(先蠶)은 중사(中祀)에 해당하고 중사에는 반드시 악장(樂章)이 있으며 오직 소사(小祀)에만 악이 없습니다. 선잠단 상사일(上巳日)의 제사는 원래 악장이 있어 아악(雅樂)을 사용했으나 곤전(坤殿)이 친제(親祭)할 때에는 바로 소사(小祀)를 써서 악이 없었으니, 의문(儀文)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세 성상께서 친잠을 행하였으나, 실록에는 모두 친제(親祭)한 일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는 모두 친히 뽕을 따는 것을 말하였으나, 왕후(王后)가 선잠에 제사하는 것은 실려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만약 세 성상의 구례(舊禮)를 따르려면, 선잠제는 유사에게 섭행(攝行)하기를 명하고, 곤전께서 친히 뽕을 따고 대차(大次)로 나올 때는 몽수(矇瞍)로 하여금 이 악장을 연주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우의정 김상철의 의논은 영의정의 의논과 같았으며, 영부사 윤동도(尹東度)와 판부사 김치인(金致仁)·김양택(金陽澤)은 헌의(獻議)하지 않았다.

 

1월 23일 무자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유신에게 명하여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읽게 하였는데, ‘소소(宵小)’란 두 글자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최익남(崔益男)의 일을 나는 내가 자초(自招)한 것으로 여긴다. ‘소소’란 것은 형체 없는 데에 숨어서 모르는 곳에서 남을 얽는 것을 말한다. 만약 그 마음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옳지만, ‘소소’란 두 글자로 지목하기까지 한 것은 내가 비답 가운데서 말한 것이 지나치지 않은가?"
하니, 응교 김재순(金載順), 수찬 이재간(李在簡)이 말하기를,
"소인은 모르는 곳에서 규합하여 결성하는 자가 있고 정상이 현저한 자도 있으니, 지난번의 성비(聖批)는 실로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능마아(能麼兒) 당상과 낭청을 시강(試講)에 입시하라고 명하였고, 선전관(宣傳官) 이식(李烒)은 복제(服制) 마치기를 기다려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1월 24일 기축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친경(親耕)이 몇 번째인가?"
하니, 부제조 윤득우(尹得雨)가 말하기를,
"세 번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백(文伯)의 어머니는 왕후(王后)도 친히 현담(玄紞)을 짰다020)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근래에 잠상(蠶桑)의 도를 듣지 못해 마음속으로 항상 개탄하여 곤전으로 하여금 친잠하게 하고자 한 것이니, 뜻이 대개 깊은 것이다. 의문(儀文)을 갖추지 않을 수 없는데, 단지 채상(采桑)만 행하는 것은 구경거리에 가깝다고 하겠다. 서릉씨(西陵氏)는 선잠의 주인으로 만년 가까이 이를 행하였는데, 곤전으로 하여금 만약 친사(親祀)하지 못하게 하면 어찌 경강(敬姜)의 뜻이겠는가? 11일에 거행할 것을 명한다. 그날 내가 미리 경복궁에 가서 예를 마치고, 근정전에 앉아서 세손(世孫)과 백관의 하례를 받을 것이며, 근정전 내정(內庭)에서는 곤전이 백관의 하례를 받는다. 그런 후 내가 강녕전(康寧殿)에 앉아 곤전과 함께 혜빈과 세손빈, 내·외 명부의 조현(朝見)을 받고 회가(回駕)한다. 11일에 먼저 서릉씨의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전할 것이니, 내전·혜빈·세손빈·내·외 명부는 마땅히 수행해야 하며, 축문(祝文)의 두사(頭辭)에는 ‘조선국 왕비 김씨(朝鮮國王妃金氏)’라고 일컬어야 한다. 잠모(蠶母)에게는 각기 면포(綿布) 1필 씩을 하사하고, 친잠례를 마친 후 친경례에 의하여 잠모로 하여금 먼저 머리를 조아리게 하고 면포를 나누어 준 후에도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내집사(內執事) 이하는 그때를 당하여 시상(施賞)할 것이니, 이에 의해 거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서지수(徐志修)가 말하기를,
"이식(李烒)은 그 아비의 병을 듣고 정사(呈辭)할 길이 막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간호(看護)할 도리가 없자, 이에 밀부(密符)를 빼앗는 행차에 차임되어 역로(歷路)에 살필 계획을 하다가 중로에서 분상(奔喪)으로 밀부를 맡겨 두는 근심이 있게 하였으니, 벌을 주어야 하고 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복제(服制) 마치기를 기다려 조용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후원(喉院)은 체면이 중하여 여섯 승지가 일시에 죄를 입어도 하위(下位)에 있는 자가 정원에 머물러 있으면 새로 제수된 승지와 만나보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번에 정원을 비운 것은 후폐와 관계가 있으니, 청컨대 경계를 보이고 일체로 파직을 명하소서."
하였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진하(陳賀)할 때에 외방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은 규례에 따라서 봉진(封進)하기를 청하니, 단지 전문(箋文)만 올리고 방물과 물선은 아울러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또 왕세손궁(王世孫宮)의 하례(賀禮)는 환궁하기를 기다려 거행하기를 청하니,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또 친잠 때의 고유(告由)는 친경의 예에 의해서 종묘에 고유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친잠 때 외명부는 열 한 가지[條]를 따라고 명하셨는데, 친경 때에 이미 다섯 번 밀고, 일곱 번 밀고, 아홉 번 미는 것으로 마련하였으니, 채상(採桑) 때에도 역시 다섯 가지, 일곱 가지로 마련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사궁(四宮)에 분부하여 잠모를 택정(擇定)하되 의녀(醫女)로써 충당해 차출하고 의장(儀仗)을 봉직(捧持)토록 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이득화(李得華) 등 세 사람을 뽑았다.

 

1월 27일 임진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불공평하여 이미 처분하였으나, 현고(現告)를 살피지 않은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조참(朝參) 때 파직한 경재(卿宰)를 아울러 서용하고, 전 훈장(訓將) 정여직(鄭汝稷)·전 총융사(摠戎使) 구선행(具善行)은 다시 전임(前任)을 제수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군신(君臣)의 분의(分義)와 관계된 하나의 큰 기관(機關)임을 영부사 윤동도(尹東度), 판부사 김치인(金致仁)·김양택(金陽澤)에게 전유하도록 명하였다.

 

1월 28일 계사

자의(諮議) 김종후(金鍾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시강원(侍講院)에 이 관직을 둔 것은 장차 재주를 품고도 나오려 하지 않은 선비를 기다려 예덕(睿德)을 보양(輔養)하는 데 있다 하니, 그 임무가 돌아보건대 중하지 않겠습니까? 신 같은 자는 자질이 본디 노둔하고 지식이 없는데 돌아보건대 세록(世祿)의 집안이기 때문에 역시 사람들을 따라서 과시(科試)에 응하여 음사(蔭仕)에 종사(從事)하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거듭 상고(喪故)를 당하여 마음이 상하고 일이 어긋나매, 이에 편모(偏母)와 함께 선영(先塋)에 가까운 시골로 옮겨 갔는데, 또 몸에 기질(奇疾)에 걸려 마침내 방폐(放廢)되게 되었으니, 다만 하나의 낭패스럽고 무료(無聊)한 자취입니다. 어찌 초택(草澤) 사이에 있는 고상한 무리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전관(銓官)이 살피지 못하여 그릇되이 성은(聖恩)을 입게 하였으니, 관을 설치하여 사람을 뽑는 뜻이 매우 아닙니다. 사림(士林)을 부끄럽게 하고 물정(物情)을 놀라게 함에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선비는 어려서 배우고 장성해서는 행하는 것인데, 원량(元良)의 보도(輔導)를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하였다.

 

1월 29일 갑오

임금이 목릉(穆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祗迎)하고 궁전으로 돌아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부사 윤동도, 판부사 김치인·김양택의 집에 치제(致祭)하라는 명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세 원임 대신을 돈면(敦勉)한 후에도 즉시 명에 응하지 않자 여러 차례 엄교(嚴敎)를 내리고 치제까지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서지수에게 묻기를,
"경들은 치제함이 지나치다고 하는가? 소하(蕭何)를 잡아 가둔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지나쳤지만021)  , 나는 지나치지 않다. 한나라 고조가 기관(機關)을 썼기 때문에 나 역시 기관을 쓴 것인데, 세 대신의 도리에 있어서 치제를 받아들이겠는가?"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어찌 감히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만두라."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이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는 이미 삼전(三銓)022)  과 아전(亞銓)023)  을 거쳤고, 또 문임(文任)과 서전(西銓)을 거쳤는데, 이번 진달한 글 가운데 ‘우로(雨露)는 땅을 가리지 않고 내린다.’라고 말하였으니, 매우 잘못입니다."
하니,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정홍순(鄭弘淳)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심발(沈墢)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홍응보(洪應輔)를 장령(掌令)으로, 조재준(趙載俊)을 정언(正言)으로, 이재간(李在簡)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승지에게 입시를 명하고, 원례(院隷)에게 단문(丹門)에 가서 삭제(朔祭)에 변두(籩豆)를 철(撤)하였는지 여부를 살펴 회주(回奏)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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