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8권, 영조 43년 1767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13.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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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병신

이조 참판 정상순(鄭尙淳)의 체직을 허락하였는데, 판서 정홍순(鄭弘淳)과 육촌친(六寸親)이기 때문이었다.

 

구성옥(具性玉)의 한권(翰圈)024)   준점(準點)을 시행하라는 명을 정지하라 명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유림(儒林)의 일로 격노하여 반궁(泮宮)025)  에 가행(駕行)했는데, 영남 사람인 구성옥이 유림을 헐뜯었다 하여 제직(除職)하였다. 그후 구성옥이 등과(登科)하였으나 한권에서 누락된 것을 보고 특별히 하교하여 준점(準點)을 시행하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도승지 윤득우(尹得雨)가 정규(定規)에 어긋나 후폐와 관계된다 하여 도로 정지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2월 4일 무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남의 자식된 도리는 귀천이 없이 한가지이다. 한식(寒食)으로부터 사서인(士庶人)에게도 제주(祭酒)를 쓰도록 허락하고, 자신이 사부(士夫)이면서 제사가 아닌데도 사사로이 술을 마시는 자는 청선(淸選)을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2월 5일 기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서지수(徐志修)가 말하기를,
"역관(曆官)이 돌아오면서 강계(江界)의 범월(犯越)을 완결한 자문 1도(度)와 삼수(三水)의 범월을 완결한 자문 1도를 휴대하고 온다 합니다. 두 자문에 대한 회답을 청컨대 전례에 의해서 찬출(撰出)하여 금군(禁軍)을 정해서 의주(義州)로 내려보내어 봉황 성장(鳳凰城將)에게 전해 주어 북경(北京)으로 보내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정실(鄭實)이 사직소를 진달하니, 이번의 승탁(陞擢)은 뜻이 대개 깊은 것이니,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속히 행공(行公)하라고 비답하였다.

 

2월 8일 임인

이적보(李迪輔)를 사간(司諫)으로, 고유(高裕)를 장령(掌令)으로, 윤승렬(尹承烈)을 교리(校理)로, 윤정렬(尹正烈)을 설서(說書)로, 이창수(李昌壽)를 판돈녕(判敦寧)으로, 홍중효(洪重孝)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운규(趙雲逵)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정상순(鄭尙淳)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윤동승(尹東昇)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창수(李昌壽)·신회(申晦)·조운규(趙雲逵)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좌빈객(左賓客)으로, 신회(申晦)를 우빈객(右賓客)으로, 정실(鄭實)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삼았다. 조지 별제(造紙別提) 송덕상(宋德相)은 제수한 후에 기한이 지나도록 숙배(肅拜)하지 않으므로 예에 의해 계체(啓遞)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전교하기를,
"기미년026)  에 있었던 경근거 시취(耕根車試取)027)  는 뜻이 대개 옛날의 경잠(耕蠶)을 친행하던 것을 본받자는 것이니, 곧 3백 년 후 처음이었다. 마침 이런 때 꿈에 선성(先聖)을 배알했고, 또 29세에 입학(入學)하던 달인데 74세가 되어 다시 대성전(大成殿)을 배알하고 이 예를 행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예조에 분부하여 알성(謁聖)할 날짜를 9월 18일로 잡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2월 9일 계묘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0일 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장령 고유(高裕)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고유가 또 성궁(聖宮)을 조호(調護)하고,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며, 염치를 기르고 조경(躁競)을 억누르는 것으로 우러러 힘쓰게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2월 13일 정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형조 판서 심수(沈鏽)의 체직을 허락한다 명하고, 전 판서 윤급(尹汲), 전 참판 서명응(徐命膺), 전 참의 홍낙인(洪樂仁)을 아울러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안윤행(安允行)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심발(沈墢)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봉교(奉敎) 강이복(姜彛福), 대교(待敎) 홍언철(洪彦喆), 검열(檢閱) 안정현(安廷鉉)·이사조(李思祚)·홍상간(洪相簡) 등이 연명(聯名)으로 진소하기를,
"한권인(翰圈人) 이득화(李得華)·우정규(禹禎圭)·권평(權坪)·이제만(李濟萬)·유한신(柳翰申)·윤창혁(尹昌㷜)은 인망(人望)에 맞지 않으니, 청컨대 한권(翰圈) 안에서 빼버리소서."
하였다. 대교(待敎) 이동욱(李東郁)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정규처럼 비미(卑微)하고 하찮은 자도 역시 한권 가운데 들어 있으니, 자체적으로 탄핵하는 논의에 신은 본디 다른 의견이 없으나, 이에 나머지 다른 사람들까지 아울러 논하는 것에는 역시 의견의 차이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모두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2월 14일 무신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신이 《사기(史記)》를 고찰해 보았더니, 순(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전수한 ‘정일(精一)028)  ’의 가르침은 바로 74세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2월 19일 계축

서명응(徐命膺)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조엄(趙曮)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급(尹汲)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남태제(南泰齊)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집의(執義)로, 홍검(洪檢)을 헌납(獻納)으로, 서명응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김상익(金相翊)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전교하기를,
"늘그막에 친경(親耕)을 하는데, 어찌 탁지(度支)가 없을 수 있겠는가? 구차하게 예를 행해서는 안 되니, 호조 판서의 체직을 허락한다. 내전(內殿)에서 지닐 구자(鉤子)029)  는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되, 구자는 석장(錫杖)을 쓰고 용단칠(龍丹漆)로 하라."
하니, 도제조 한익모가 말하기를,
"중궁전의 구자를 용단칠로 하는 것은 너무 박할 듯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질박(質朴)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 방해되겠는가?"
하였고, 친잠 고유제(告由祭)는 다만 태묘(太廟)에만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사관(李思觀)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2월 20일 갑인

호조 판서 이사관의 체직을 허락하고, 조운규(趙雲逵)로 대신하였다. 이사관이 일찍이 병판(兵判)과 예판(禮判)을 지냈는데, 탁지의 천망(薦望)에 누락되었다는 것으로써 엄교를 내려 영상(領相)의 면상(免相)을 명하였고, 또 좌상(左相)과 우상(右相)도 일체로 면상하라고 명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내국 도제조 한익모의 사면(辭免)을 허락하고 김치인(金致仁)으로 대신하였다.

 

2월 21일 을묘

임금이 우제(雩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좌부승지 유한소(兪漢蕭)가, 우사제(雩祀祭)와 사한제(司寒祭)030)  는 모두 현명씨(玄冥氏)031)  를 제사하는 것인데, 우사제 축문(祝文)에는 ‘현명씨’라 쓰고 사한제의 축문에는 단지 ‘현명’이라고만 써서 ‘씨(氏)’자가 없으므로 한번 규식을 정함이 마땅하다고 앙달하니, ‘씨’자를 첨가해 써서 그대로 정식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서지수, 좌의정 한익모, 우의정 김상철이 상소하여 견책을 청하니, 온화한 비답을 내려 전유(傳諭)하라고 명하였다.

 

2월 22일 병진

육상궁(毓祥宮)에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인하여 창의궁(彰義宮)에 가서 양성헌(養性軒)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을 마치고 임금이 말하기를,
"19세 때 《대학(大學)》을 이 양성헌에서 강하였는데, 이제 또 이곳에 와서 거듭 《소학(小學)》을 강할 줄은 실로 뜻밖이다."
하고는, 어용(御容) 세 본(本)을 내어 여러 신하들에게 우러러보게 하고 ‘강(講)’자 운(韻)으로 어제시(御製詩) 한 구를 지어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강녕전(康寧殿)을 들렸다가 이내 환궁하였다.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왕세손(王世孫)이 시좌(侍坐)하고 춘방(春坊)의 상하번이 입시하였다. 왕세손이 칠월편(七月篇)032)  을 읽었는데, ‘이지일(二之日)’에서부터 ‘만수 무강(萬壽無疆)’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또 친히 읽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수 무강은 내가 이제 너를 위해 축수(祝壽)하여 네가 나를 위한 정성에 보답한다."
하고, 인하여 또 소학제사(小學題辭)를 친히 읽고는 말하기를,
"내가 이제 이 글을 읽어 충자(沖子)로 하여금 듣게 하는 것 역시 뜻이 있는 것이다."
하고, 어제(御製)를 내려 왕세손에게 즉석에서 화답하라고 명하니, 왕세손이 화답시를 지어 읽어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잘 지었으며, 대우(對偶) 역시 정미(精微)하다."
하고는, 승지에게 명하여 어제와 함께 장첩(粧帖)하여 들이게 하였다.

 

2월 23일 정사

헌납 홍검(洪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나라에 삼공(三公)을 두는 것은 백료(百僚)의 표솔(表率)이 되는 바이고 만민이 함께 우러러보는 바이니, 일이 혹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오직 마땅히 전석(前席)에서 종용히 가부를 논해야 하는데, 일전 탁지(度支)의 망(望) 때문에 성려(聖慮)의 번거로움을 끼치자 여러 번 전교를 내려 정석(鼎席)이 일체 텅 비었으니, 대성인께서 구경(九經)033)  을 본받는 뜻에 결흠이 있습니다."
하니, ‘일에 따라 광구(匡救)해 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는 것으로 비답하였다.

 

2월 25일 기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경재(卿宰) 및 당상·당하로서 파산(罷散)된 사람을 아울러 서용하여 참반(參班)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니,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아룀을 인해서였다. 하교하기를,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세손과 친경을 하는 것이 어찌 구경거리를 위해서이겠는가? 실로 백성을 위해서이다. 이번에 수령과 변장은 차원(差員)인가의 여부를 논하지 말고 밭두렁에 늘어서게 하여 권농(勸農)에 뜻을 붙이게 하라. 이번 친잠 후에 제도(諸道)를 마땅히 추생(抽栍)하여 그 근만(勤慢)을 볼 것이니, 이로써 제도에 하유하라."
하였다.

 

2월 26일 경신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 인하여 황단(皇壇)에 가서 봉심(奉審)을 마치고 동단(東壇)에 나아가 친경례를 행하였으며, 예를 마치자 친경대(親耕臺)로 돌아와 노주례(勞酒禮)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환궁하여 경현당에 나아가 기백(畿伯)과 여러 수령의 입시를 명하여 경잠(耕蠶)을 신칙하였다. 삭녕 군수(朔寧郡守) 최홍보(崔弘輔), 영평 현령(永平縣令) 유언수(兪彦銖), 연천 현감(漣川縣監) 정재원(丁載遠)의 주대(奏對)가 임금의 뜻에 맞아 각각 대록비(大鹿皮) 1령(令)을 하사하라 명하였다. 양성 현감(陽城縣監) 심이진(沈以鎭)이, ‘백성들의 풍속이 양잠(養蠶)을 일삼지 않은데다가 뽕나무가 토질에 맞지 않는다고 앙대하니, 해부의 여러 당상으로 하여금 왕부(王府)에서 개좌(開坐)하여 문밖에서 장(杖) 1백 대를 치고, 전 현감 김수묵(金守默)은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친경의(親耕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전하의 경적위(耕籍位)를 남유문(南壝門) 밖 동남쪽 10보(步) 되는 곳에 남향으로 땅의 편리한 데 따라 설치하고, 왕세손의 시경위(侍耕位)는 전하의 경적위 뒤 조금 동쪽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전설사(典設司)에서 악좌(幄座)를 친경대(親耕臺) 위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소차(小次)를 서계(西階) 아래 조금 북쪽에 설치하며, 왕세손의 시좌(侍座)는 어좌의 동쪽에 서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편차(便次)는 전하의 소차 뒤에 땅의 편리한 데 따라 설치한다. 봉상시에서 전하의 판위(版位)를 경적소(耕籍所)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왕세손의 종경위(從耕位)를 경적소 판위의 동남쪽에 서향으로 설치하며, 종경(從耕)하는 종친(宗親)·재신(宰臣)·국구(國舅)·의빈(儀賓)의 자리[位]는 왕세손 종경위의 남쪽에 동쪽 가까운 곳에 있고, 여러 판서(判書)·대간의 자리는 그 남쪽에 있는데, 모두 서향으로 하여 북쪽이 위가 되게 하며, 서인(庶人)의 자리는 그 남쪽에 조금 동쪽으로 10보(步) 밖에 있고 기민(耆民)의 배경위(陪耕位)는 또 그 남쪽에 있는데, 모두 서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친경뢰석(親耕耒席)을 종친의 북쪽에 조금 서쪽으로 남향하여 설치한다. 사복시(司僕寺)는 친경우(親耕牛)를 친경위의 서쪽에 조금 북쪽으로 설치하고, 왕세손이 종경(從耕)할 쟁기[耒耜]와 소를 왕세손의 종경위 뒤에 설치한다. 전악(典樂)은 등가악(登歌樂)을 관경대(觀耕臺) 위에 설치하고, 헌가(軒架)는 서인(庶人)의 경위(耕位) 서남쪽에 모두 북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봉상시(奉常寺)는 경적사위(耕籍使位)를 친경위 동쪽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봉상시 정(奉常寺正)은 경적사의 남동쪽에 조금 물러서 있고, 적전령(籍田令)은 봉상시 정의 남쪽에 조금 물러서 있는데, 모두 서향으로 하여 북쪽이 위가 되게 한다. 봉청상자관(奉靑箱子官) 및 분삽(畚鍤)034)  을 잡은 관원의 자리는 그뒤에 있으며,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의 자리는 서인의 자리 앞에 있고, 주부(主簿)의 자리는 판관의 자리 남쪽에 조금 물러서 있는데, 서향으로 하여 북쪽이 위가 되게 한다. 사복시 정의 자리는 친경우(親耕牛)의 동쪽 조금 앞에 남향으로 하고, 경기 관찰사와 읍령(邑令) 및 여러 현령(縣令)의 자리는 서인의 자리 동쪽에 서향으로 하는데, 다른 자리는 겹줄로 하고 서쪽이 상석이 되게 한다. 종경관(從耕官)의 자리는 친경위의 동쪽, 분삽을 잡은 사람의 서쪽에 조금 북쪽으로 하는데 서쪽이 위가 되게 한다. 또 종경뢰사(從耕耒耜) 및 소를 종경관 자리 뒤에 설치하고, 백관이 차례로 서는 자리는 집사(執事)의 뒤 조금 남쪽에 설치한다.
경적(耕籍) 처음에 전하가 대차(大次)에 들고 왕세손이 편차(便次)로 들면 봉상시 정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모든 쟁기[耒耜]를 잡은 자를 인솔하여 먼저 자리로 나가면, 알자(謁者)가 시경(侍耕)·종경(從耕) 등 여러 집사를 인도하고, 문무 백관은 모두 조복 차림으로 차례에 따라 자리로 나가며, 관찰사·읍령(邑令)과 여러 현령은 각기 자리로 나아간다. 좌통례(左通禮)가 대차(大次)로 나아가 부복(俯伏)하여 꿇어앉아 중엄(中嚴)035)  을 계청하면 전하께서는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어 입고 상례(相禮)가 대차에서 나오기를 찬청(贊請)하며, 왕세손이 원유관과 강사포를 갖추고 나오면 상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나아간다. 좌통례(左通禮)가 꿇어앉아 외판(外辦)036)  을 계청하면 전하께서 대차에서 나오고, 좌통례가 꿇어앉아서 여(輿)에 오르기를 계청하면 전하께서 여에 오르고 헌가악을 울린다. 좌·우통례가 옆에서 인도하여 관경대 남쪽 계단 아래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한다. 전하께서 여에서 내리면 예의사(禮儀使)가 꿇어앉아 집규(執圭)를 계청하고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圭)를 올리면 전하께서 규를 잡는다. 예의사가 앞에서 인도하여 경적위에 이르러 남향하여 서면 음악이 그친다. 예의사가 경적례(耕籍禮)를 행하기를 계청하면 적전령(籍田令)이 친경뢰석(親耕耒席) 남쪽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어앉아 부복(俯伏)하여 홀(笏)을 꽂고 도(韜)037)  를 풀어 쟁기[耒]를 내어 동향하여 서서 봉상시 정에게 주면 봉상시 정이 근시(近侍)에게 주어 올리게 하고, 사복시 정이 소를 올린다. 예의사가 진규(搢圭)하고 쟁기[耒耜] 받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진규하고 쟁기를 받으면 음악을 연주한다. 근시 한 사람이 품계가 높은 중관(中官) 두 사람과 함께 쟁기를 잡으면 사복시 정이 고삐를 잡고 다섯 번 미는 예를 마치고 음악이 그친다. 근시가 쟁기를 받아 다시 전해 차례로 적전령에게 주면, 다시 도(韜)에 넣는다. 예의사가 집규를 계청하여, 전하가 집규하면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관경대(觀耕臺)에 오르고 헌가악을 연주하며, 남쪽 계단으로 오르면 음악이 그치고 등가악을 연주하며, 전하께서 자리에 나가 남향하여 앉으면 음악이 그친다.
상례가 왕세손을 인도하여 시경위(侍耕位)로 나아가면 봉상시 판관이 도(韜)를 풀고 쟁기를 내어 궁관(宮官)에게 주어 올리게 하고 사복시 첨정이 소를 올린다. 상례가 진규(搢圭)하고 쟁기 받기를 찬청(贊請)하여 왕세손이 진규하고 쟁기를 받으면 음악을 연주한다. 궁관 한 사람과 중관 두 사람이 함께 쟁기를 잡으면 사복시 첨정이 고삐를 잡고 일곱 번 미는 예를 마치고 음악이 그친다. 궁관이 쟁기를 받아 다시 전해서 봉상시 판관에게 주면 다시 도(韜)에 넣는다. 상례가 집규(執圭)를 찬청하고 왕세손이 집규하면 상례가 왕세손을 인도하여 시좌위(侍座位)로 올라간다.
알자(謁者)가 종경(從耕)하는 재신·대신 및 이조 판서·호조 판서·대사헌을 인도하여 친경위의 동쪽 묘(畝) 조금 북쪽에 있는 각자의 자리로 나아가면 여러 쟁기를 잡은 자가 따라가 각기 쟁기를 주어 잡으면 헌가악을 연주하고, 차례로 아홉 번 미는 예를 마치면 음악이 그친다. 알자가 시경관(侍耕官)·종경관(從耕官) 및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모두 관경대(觀耕臺) 아래로 가서 처음 자리의 차례대로 선다. 봉상시 판관이 서인(庶人)을 이끌고 차례로 1백 묘(畝) 갈기를 마치고 이에 물러난다. 경적사가 동쪽 계단으로 올라 악좌(幄座) 앞 조금 동쪽에 서향하여 서고, 배경(陪耕)하는 늙은이들은 대 아래로 나아가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나서 꿇어앉는다.
도승지가 어좌(御座) 앞으로 나와 북면(北面)하여 전교를 받들고 남계(南階) 동쪽으로 물러가 서향하여 서서 선교(宣敎)하고 물러간다. 좌통례가 전교를 받들어 서면(西面)하여 선교하기를, ‘공경하여 기민(耆民)을 위로한다.’라고 하면, 기민이 사배하고 모두 물러가 제자리로 간다. 예의사가 예필(禮畢)을 아뢰면 전하께서 남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등가악을 연주하며 대 아래에 이르면 음악을 그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서 석규(釋圭)를 계청하면 전하께서 규(圭)를 놓고 근시가 꿇어앉아서 규를 받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서 여(輿)에 오르기를 계청하면 전하께서 여에 오르고 헌가악을 연주하며 대차(大次)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가면 음악이 그친다. 왕세손이 뒤를 따라 편차로 들어가고, 시종·종경관 및 문무 백관은 모두 물러간다. 봉청상관(捧靑箱官)이 동륙(穜稑)의 종자를 봉상시 정에게 전해주면 받아서 경소(耕所)에 이르러 파종(播種)한다. 판관이 주부(主簿)를 거느리고 1백 묘(畝)에 마친 것을 둘러 보며, 봉상시 정이 일 마친 것을 살피고 나서 대차(大次) 앞에 이르러 북면하여 꿇어앉아 일 마쳤음을 아뢰고 마치면 모두 물러난다.

 

왕세손(王世孫)의 시경의(侍耕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봉상시에서 전하의 경적위(耕籍位)를 남유문(南壝門) 밖 동남쪽 10보 되는 곳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왕세손의 시경위를 전하의 경적위 뒤 조금 동쪽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전설사(典設司)에서 전하의 악좌(幄座)를 관경대 위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왕세손의 시좌(侍座)는 어좌 동쪽에 서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전하의 소차를 서쪽 계단 아래 조금 북쪽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왕세손의 편차(便次)를 소차 뒤에 땅의 편리한 데 따라 설치한다. 봉상시가 전하의 판위(版位)를 경적소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왕세손의 종경위를 판위의 동남쪽에 서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종경(從耕)하는 종친(宗親)·재신(宰臣)·국구(國舊)·의빈(儀賓)의 자리는 왕세손위의 남쪽에 동쪽 가까운 데 있고, 여러 판서와 대간의 자리는 그 남쪽에 있는데, 모두 서향으로 하여 북쪽이 위가 되게 한다. 서인의 자리는 그 남쪽에 있고, 기민(耆民)의 자리는 또 그 남쪽에 있는데, 서향으로 한다. 친경뢰석(親耕耒席)을 종친의 북쪽에 설치한다. 사복시에서 친경우(親耕牛)를 친경위의 서쪽에 설치하고, 왕세손의 시경뇌사(侍耕耒耜) 및 시경우(侍耕牛)를 왕세손의 시경위 뒤에 땅의 편리한 데 따라서 설치한다. 전악은 등가악을 관경대 위에 설치하고 헌가는 서인경위(庶人耕位)의 서남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북향으로 한다. 봉상시에서 제집사위를 계단 아래 동서쪽에 평상시의 의식처럼 설치하고, 종경관위(從耕官位)를 친경위 동쪽에 설치하며, 백관이 차례로 서는 자리를 동서쪽에 설치한다.
경적(耕籍)의 처음에 전하가 대차(大次)로 들어가면 왕세손이 편차로 들어가고 시경관(侍耕官)·종경관(從耕官) 등 여러 집사 및 문무 백관 【4품(品) 이상은 조복(朝服)이고, 5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이다.】 은 들어가 자리로 나간다. 궁관(宮官)이 조복을 입고 모두 왕세손 편차 앞으로 나아가 받들어 맞이하고 상례(相禮)가 꿇어앉아 내엄(內嚴)을 찬청한다. 얼마 후 또 출차(出次)하기를 찬청하면 왕세손이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규(圭)를 잡고 나가고 상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종경위로 들어가 서향하여 선다. 친경할 때가 이르면 전하께서 원유관에 강사포를 갖추고 규를 잡고 나가면 음악을 연주한다. 예의사가 앞에서 인도하여 경적위(耕籍位)로 나가 남향하여 서면 음악이 그친다. 적전령(籍田令)이 친경뢰(親耕耒)를 봉상시 정에게 주면 받아서 근시에게 주어서 올리고 사복시 정이 소를 올린다. 전하께서 쟁기를 받으면 음악을 연주하고 근시 한 사람이 중관 두 사람과 함께 쟁기를 잡고, 사복시 정이 고삐를 잡아 다섯 번 밀고서 예를 마치면 음악이 그친다. 근시가 쟁기를 받아 적전령에게 주면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해 관경대에 오르고 등가악을 연주하며 전하가 자리에 나가면 음악이 그친다.
상례가 왕세손을 인도하여 시경위로 나가면 봉상시 판관이 도(韜)를 풀고 쟁기를 내어 궁관(宮官)에게 주면 궁관이 받아 올리고 사복시 첨정이 소를 올린다. 상례가 진규(搢圭)하고 쟁기 받기를 찬청하여 왕세손이 진규하고 쟁기를 받으면 음악을 연주한다. 궁관 한 사람이 품계가 높은 중관 두 사람과 함께 쟁기를 잡고 사복시 첨정이 고삐를 잡아 일곱 번 민 후 예를 마치면 음악이 그친다. 궁관이 쟁기를 받아가지고 다시 차례로 전해주면 받아서 봉상시 첨정이 다시 도(韜)에 넣는다. 상례가 집규(執圭)하기를 찬청하면 왕세손이 집규한다. 상례가 왕세손을 인도하여 동쪽 계단을 거쳐 올라가 시좌위로 나아간다.
알자가 종경(從耕)하는 재신·대신 및 이조 판서·호조 판서·대사헌을 인도하여 동쪽 묘(畝)로 나아가 각기 제자리로 나가고, 또 종경하는 종친 및 국구·의빈·병조 판서·경기 관찰사·대사간(大司諫)을 인도하여 서쪽 묘(畝)로 가서 각기 제자리로 나아가 쟁기를 잡으면 음악을 연주하고 아홉 번 미는 예를 마치면 음악이 그친다. 시경관(侍耕官)은 처음 자리에 의하여 순서대로 서고, 서인은 차례로 1백 묘(畝)를 갈기를 마치고 물러간다. 배경(陪耕)하는 기민(耆民)은 대(臺) 아래로 내려가 사배(四拜)하고 나면 도승지가 어좌(御座) 앞에 나아가 전교를 받들어 남쪽 계단에 나아가 선교(宣敎)하고, 좌통례가 전교를 받들어 선교하기를, ‘공경히 기민(耆民)을 위로한다.’라고 하면, 기민이 사배하고 물러나 제자리로 가고 예의사가 예필(禮畢)을 아뢴다. 전하가 남쪽 계단을 거쳐 내려오면 등가악을 연주하고 대 아래에 이르면 음악이 그친다. 전하께서 도로 대차(大次)로 들어가면 상례(相禮)가 왕세손을 인도하여 다시 편차(便次)로 들어가고 시경관 및 백관이 물러간다. 봉청상관(捧靑箱官)이 동륙(穜稑)의 종자를 봉상시 정에게 주어 파종하고, 판관은 주부를 거느리고 1백 묘를 마친 것을 둘러보고 봉상시 정이 일 마친 것을 살피고 대차에 이르러 꿇어앉아서 일을 마쳤음을 아뢰고 마치면 물러간다.

 

친경한 후의 노주의(勞酒儀)는 다음과 같다. 그날 친경을 끝내면 액정서(掖庭署)에서 이어서 어좌(御座)를 관경대(觀耕臺) 위에 남향으로 설치하고, 왕세손의 시좌(侍座)는 동쪽 가까운 곳에 서향으로 설치한다. 전설사에서는 기민(耆民)과 서인의 자리를 대 아래 동쪽·서쪽에 두 줄로 서로 마주보게 설치하고, 또 배위(拜位)를 대 아래 조금 남쪽에 설치한다. 내자시에서 기민과 서인의 주탁(酒卓)을 계단 아래 동쪽과 서쪽에 설치한다. 기민과 서인은 각기 입고 있는 차림으로써 동서로 나누어 정돈하여 기다린다.
좌통례가 대차 앞에 나아가 외판(外辦)을 계청하면, 전하께서는 원유관에 강사포를 갖추고 나오고,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輿)에 오르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 오르고 산선(繖扇)·시위(侍衛)는 평상시의 의식 때처럼 하고, 헌가악을 연주한다. 좌·우통례가 인도하여 관경대 남쪽 계단 아래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리고 헌가악이 그치고 등가악을 연주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집규(執圭)를 계청하면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집규한다. 좌·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남쪽 계단을 거쳐 대(臺) 위로 나아가 자리로 올라가 남향하여 앉고 산선·시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하고, 음악이 그친다.
왕세손이 시좌위로 나아가면 기민과 서인이 차례로 들어와 배위(拜位)에 나아가 사배를 마치고 각기 자리로 나아간다. 동서쪽 자리의 집사(執事)하는 자는 각기 기민과 서인의 앞에 반찬 그릇을 놓고 내자시 관원이 술을 따라서 집사자에게 주면 집사자가 술잔을 돌리고 기민과 서인은 모두 자리에서 떠나 부복(俯伏)하여 꿇어앉아 술잔을 받아 마시고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두 잔, 세 잔에 이르기까지 위의 의식과 같이 한다. 조금 후에 집사자가 반찬 그릇을 물리면 기민과 서인이 다시 배위에 나아가 사배를 마친다. 좌통례가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어좌(御座) 앞에 나아가 부복해 꿇어앉아 예필(禮畢)을 아뢴다.
전하께서 자리에서 내려오면 등가악을 연주하고 좌·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남쪽 계단을 거쳐 내려와 대 아래에 이르면 음악이 그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석규(釋圭)를 계청하면 전하께서 규를 놓고 근시가 끓어앉아 규를 받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 오르기를 계청하면 전하께서 여에 오르고 산선·시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하고 헌가악을 연주한다. 좌·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도로 대차로 들어가면 음악이 그친다. 왕세손이 편차로 들어가면 기민과 서인이 차례로 나오며, 환궁할 때가 이르면 의례(儀禮)대로 환궁한다.

 

친경 후 노주(勞酒) 때 왕세손의 시좌의(侍座儀)는 다음과 같다. 그날에 친경을 마치면 액정서에서 어좌를 관경대 위에 설치하고, 왕세손의 시좌위를 어좌 동쪽에 서향으로 설치한다. 기민과 서인은 각기 입은 옷차림으로써 동서로 나누어 정돈해서 기다린다. 전하께서 곧 원유관과 강사포를 갖추고 나오면 음악을 연주하고, 상례가 꿇어앉아 대차에서 나오기를 찬청한다. 왕세손이 곧 원유관·강사포를 갖추고 나오면 통례가 앞에서 전하를 인도하여 대(臺) 위에 이르러 자리로 오르면 음악이 그치고, 상례가 왕세손을 인도하여 시좌위로 올라가면 기민과 서인은 배위(拜位)에 나가서 사배를 마치고 각자 제자리로 나간다. 각기 기민과 서인의 앞에 반찬 그릇을 놓고 집사자가 술잔을 돌리면 기민과 서인은 자리를 떠나 꿇어앉아서 술잔을 받아 마시고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두 잔, 세 잔에 이르기까지 모두 위의 의식처럼 한다. 집사자가 반찬 그릇을 거두면 기민과 서인은 사배를 하고 나서 좌통례가 어좌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예필(禮畢)을 아뢴다. 전하께서 자리에서 내려와 도로 대차로 들어가면 음악이 그친다. 상례가 왕세손을 인도하여 편차로 돌아가면 의례대로 환궁한다.

 

왕비(王妃)의 헌종의(獻種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상침(尙寢)이 그 소속을 이끌고 전하의 자리를 편전(便殿) 북쪽 벽 조금 동쪽에 설치하고 왕비의 자리는 전내 북쪽 벽 조금 서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남향으로 한다. 향안(香案) 둘을 전외(殿外) 좌우에 설치하고, 혜빈(惠嬪)의 배위(拜位)를 전정(前庭) 길 서쪽에 설치하며, 왕세손의 배위는 길 동쪽 조금 남쪽에 설치하고, 왕세손빈의 배위는 혜빈의 자리 뒤에 설치하며, 명부(命婦)의 배위는 그 뒤에 설치하는데, 모두 동쪽을 위로 해서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 하되, 모두 북향으로 한다. 그날에 상공(尙功)이 청상(靑箱)에 곡식 씨를 담아서 안상(案床)에 두고 삼각(三刻) 전에 명부(命婦)가 각기 예복(禮服)을 갖추고 모여 온다. 2각 전에 혜빈이 예복을 갖추면 수규(守閨)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간다. 왕세손이 익선관·곤룡포(袞龍袍)를 갖추면 전빈(典賓)이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가고, 왕세손빈이 예복(禮服)을 갖추면 수규(守閨)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가며, 전빈이 명부(命婦)를 인도하며 자리로 들어간다.
때가 이르면 상의(尙儀)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을 계청한다. 조금 있다가 외판(外辦)을 계청하면, 전하께서 익선관·곤룡포를 갖추고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나와서 자리에 오르며, 왕비가 예복을 갖추면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에 오른다. 향로에 연기가 오르면 산선(繖扇)·시위(侍衛)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한다. 사찬(司贊)이 ‘사배(四拜)’라고 말하고 전찬(典贊)이 ‘국궁(鞠窮)·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이라 창(唱)하면, 혜빈·왕세손·왕세손빈 이하 명부가 국궁·사배·흥·평신한다. 상공(尙功)이 상자(箱子)를 받들어 꿇어앉아서 왕비 자리 앞에 올리면 왕비가 자리에서 내려온다. 전찬(典贊)이 ‘궤(跪)’라고 창하고 상궁이 꿇어앉아서 꿇어앉기를 계청하면, 왕비가 꿇어앉아 받아서 상의에게 주고, 상의가 꿇어앉아 받아서 전하의 자리 앞에 바친다. 전하가 자리에 오르면 전찬이 ‘궤’라고 창하고, 상궁이 꿇어앉아 꿇어앉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꿇어앉아 받아 다시 상의에게 주고, 상의가 꿇어앉아 받아 가지고 나간다.
전하가 자리에서 내려오고 왕비는 자리로 오른다. 상의가 내시(內侍)에게 전하면 내시가 꿇어앉아 받아서 승지에게 준다. 승지가 꿇어앉아 받아 경적사에게 전하면 경적사가 꿇어앉아 받아 적전령에게 주고, 상의가 복명(復命)한다. 사찬(司贊)이 ‘사배(四拜)’라고 말하고 전찬이 ‘국궁·사배·흥(興)·평신(平身)’이라고 창하면, 혜빈·왕세손·왕세손빈 이하 명부가 국궁·사배·흥·평신하고, 상의가 어좌(御座) 앞에 나가 부복하여 꿇어앉아 예필(禮畢)을 아뢴다. 전하가 자리에서 내려오고, 왕비가 자리에서 내려와 내전으로 돌아가면 수규(守閨)와 전빈(典賓)이 각기 혜빈·왕세손·왕세손빈 이하 명부를 인도하여 나간다.

 

친수예곡의(親受刈穀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액정서에서 전하의 판위(版位)를 편전(便殿) 뜰 가운데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왕세손의 시좌위를 판위(版位)의 동쪽에 서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그날에 예조 판서 및 경적사·적전령이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동적전(東籍田)에 나가 전민(田民)을 이끌고 곡식을 베어 마치면, 적전령이 감시(監視)하여 청상(靑箱) 두 개에 담아 가자(架子)에 바쳐 청목복(靑木袱)으로 덮는다. 인로(引路)가 앞장서 가고, 다음은 가자요, 다음은 적전령이며, 다음은 경적사요, 다음은 예조 판서가 대궐로 나아간다. 가자가 정문을 거쳐서 들어가 임시로 합외(闔外)에 둔다. 보리를 받을 시각이 이르면 승지·사관(史官) 및 시위관(侍衛官)이 각기 그 복장으로 대궐 합문 밖으로 가면, 좌·우통례가 꿇어앉아서 중엄(中嚴)을 계청한다. 조금 후에 외판(外辦)을 계청하면 전하께서 익선관·곤룡포를 갖추고 나가며, 좌·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뜰 가운데 판위(版位)에 이르러 남향하여 서고, 산선·시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한다. 왕세손이 익선관·곤룡포를 갖추고 뒤따라 나가 시좌위로 나아가 서향하여 선다. 적전령이 자성맥(粢盛麥) 상자를 받들어 꿇어앉아서 경적사에게 주면 경적사가 꿇어앉아 받아 근시에게 주고, 근시가 꿇어앉아 받아서 올린다. 찬의(贊儀)가 ‘궤(跪)’를 창하고 좌통례가 꿇어앉아서 꿇어앉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꿇어앉아 다시 근시에게 주고 근시가 꿇어앉아서 받는다. 찬의가 ‘흥(興)’이라 찬하고 좌통례가 꿇어앉아서 일어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일어난다. 근시가 상자(箱子)를 경적사에게 주고, 경적사가 꿇어앉아 받아서 적전령에게 주면 적전령이 꿇어앉아 받아가지고 나와서 임시로 합문 밖에 둔다. 장종상(藏種箱)이 안으로 들어온 후에 가자(架子)에 담아 태상시에 가서 보관한다. 좌통례가 어좌 앞에 나아가 부복하여 예필을 아뢰면, 전하께서 내전으로 돌아가고 왕세손이 뒤를 따라서 들어가며, 승지·사관 이하가 물러나간다.

 

왕비의 장종의(藏種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상침(尙寢)이 그 소속을 이끌고 전하의 자리를 편전 북쪽 벽 조금 동쪽에 설치하고, 왕비의 자리는 전내(殿內) 북쪽 벽 조금 서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남향으로 한다. 향안(香案) 두 개를 전외(殿外) 좌우에 설치하고, 혜빈의 배위(拜位)를 전정(前庭) 길 서쪽에, 왕세손의 배위는 길 동쪽 조금 남쪽에, 왕세손빈의 배위는 혜빈의 자리 뒤에, 명부의 배위는 그 뒤에 설치하는데, 모두 동쪽을 위로 해서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 하되, 모두 북향으로 한다. 그날 장종(藏種) 때 3각(三刻) 전에 명부는 각기 예복을 갖추고 모여오고, 2각 전에 혜빈이 예복을 갖추면 수규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가고, 왕세손이 익선관·곤룡포를 갖추면 전빈(典賓)이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가며, 왕세손빈이 예복을 갖추면 수규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가고 전빈이 명부를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간다.
시각이 이르면 상의(尙儀)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을 계청하고 조금 후 외판(外辦)을 계청한다. 전하께서 익선관·곤룡포를 갖추면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나와 자리에 오르고, 왕비가 예복을 갖추면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나가 자리에 오른다. 향로의 연기가 오르면 산선·시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한다. 사찬(司贊)이 ‘사배’라고 말하고 전찬이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하면, 혜빈·왕세손·왕세손빈 이하 명부가 국궁·사배·흥·평신한다. 해방(該房) 승지·예조 판서 이하가 맥상(麥箱)을 받들고 모두 합문 밖으로 나아가 승전색(承傳色)을 청하면, 승전색이 나와 합문 밖에 서향하여 선다. 적전령이 꿇어앉아서 상자를 경적사에게 주면 경적사가 꿇어앉아 받아가지고 들어가 승지에게 주고 승지가 꿇어앉아 승전색에게 준다. 승전색이 꿇어앉아 받아가지고 들어가 상의에게 전하고, 상의가 받아 들어와 전하의 자리 앞에 바친다. 전하가 자리에서 내려오면 전찬이 ‘궤’를 창하고 상궁이 꿇어앉아 꿇어앉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꿇어앉아 받아 다시 상의에게 주고, 상의가 꿇어앉아 받아 왕비의 자리 앞에 바친다. 전찬이 ‘궤’를 창하고 상궁이 꿇어앉아서 꿇어앉기를 계청하면 왕비가 꿇어앉아 받아 상공(尙功)에게 주고, 상공이 꿇어앉아 받아 보관한다. 전하께서 자리에 오르고 왕비가 자리에 오르면 사찬이 ‘사배’라 말하고 전찬이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하면, 혜빈·왕세손·왕세손빈 이하 명부가 국궁·사배·흥·평신한다. 상의가 어좌 앞에 나아가 부복하여 꿇어앉아 예필(禮畢)을 아뢴다. 전하가 자리에서 내려오고 왕비가 자리에서 내려와 내전으로 돌아가고, 수규와 전빈이 각기 혜빈·왕세손·왕세손빈 이하 명부를 인도하여 나간다.

 

종외의 대소 신료·기로(耆老)·군민(軍民)·한량(閑良) 등에게 효유한 어제(御製) 반교문(頒敎文)은 이러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아! 80을 바라보는 쇠잔한 나이에 예는 어찌 겹쳐지기만 하는가? 먼저 구궐(舊闕)에서 행하고 이제 시어소(時御所)에서 행한다. 하례를 받는 것은 내 뜻이 비록 굳다 하더라도 농업(農業)의 일이 중요하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이미 동단(東壇)에서 다섯 번 미는 예를 행하였고, 또 북원(北苑)에서 다섯 가지를 따는 예를 행하여 3백 년 이래의 성대한 일을 다시 거행하고, 몇 천년 된 고례(古禮)를 이에 닦게 되었다. 아! 작년 춘하(春夏)의 일을 생각한다면 실로 선조(先祖)의 영혼이 가만히 도와주신 은혜를 힘입었는데, 만약 그 태강(太康)을 경계로 삼는다면 숙식(宿食)에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주례(周禮)》는 바로 주공(周公)이 행하지 못한 예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제 내가 천만 꿈 밖에 예(禮)를 하루 안에 함께 행하고, 충자(沖子)와 유부(幼婦)가 함께 전중(殿中)에서 모실 줄을 어찌 뜻하였으랴? 이에 중하(仲夏) 26일 하지(夏至)날 나와 곤전(坤殿)이 장종(藏種)과 수견(受繭)의 예를 덕유당(德游堂)에서 행하고 본월 29일에는 먼저 묘사(廟社)에 고유하였으며, 특별히 숭정전(崇政殿)에 임어하여 세손과 백관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반포한다. 이날 새벽 이전의 모든 잡범(雜犯) 수금인(囚禁人)과 제도(諸道)의 도류인(徒流人)은 경중을 참작하여 모두 광탕(曠蕩)의 은전(恩典)을 시행한다. 시추인(時推人)은 세초(歲抄)에서 탕척하고 백관을 가자(加資)하는 하비(下批)를 또한 예에 따라 거행하라. 이는 바로 시조리(始條理)·종조리(終條理)하는 것이 금성 옥진(金聲玉振)038)  하는 것의 뜻이니, 이 교문(敎文)은 다른 것에 비해 다름이 있다. 사신(詞臣)에 맡기어 장대(張大)하게 한다면 선양(宣揚)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군다나 경잠(耕蠶) 때 이미 고례를 따랐으니, 친제(親製)하여 포유(布諭)한다. 사륙체(四六體) 제술(製述)은 문(文)이며 마음을 펴 유시하는 것은 성(誠)이니, 글이 비록 졸렬하다 하더라도 대략 농상(農桑)을 중히 여기는 뜻은 빠뜨리지 않았다. 늘그막에 예(禮)를 행하고 경외(京外)에 은택을 같이 시행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에 유시하노니, 모두 이런 뜻을 본받으라."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수석교(守石橋) 북쪽 가를 지나면서 누구의 집인가 했더니, 고(故) 하릉군(夏陵君)의 집이었다. 아! 부자가 높은 품계였고 80세를 넘겼는데 그 집이 초가로서 이처럼 초라하니, 어떻게 제사를 지내겠는가? 사민(四民)과 다름이 없었다. 길에서 감회가 일어난 것은 전에는 한 칸 대문에서 지영(祗迎)하였는데, 어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아들이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우모(羽旄)039)  를 우러러보았겠는가? 내가 매우 서글프다. 해청으로 하여금 제물(祭物)을 특별히 돌보아주어 내 뜻을 보이라."
하였다.

 

2월 28일 임술

임금이 남단(南壇)에 행행하여 성경(省耕)하니,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비국 당상에게 시립(侍立)을 명하고 농민을 불러보고 농사 지을 양식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세손에게 밭두렁에 가서 살펴보라고 명하고, 이어서 춘방(春坊) 관원의 입시를 명하여 하문하기를,
"세손이 농민을 불러서 보았는가?"
하니, 문학(文學) 이규위(李奎緯)가 대답하기를,
"왕세손께서 친히 농사짓는 절기와 노고의 정상을 물으셨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막차에서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민간의 농우(農牛)가 매우 귀하여 가난한 백성으로 소를 가진 자가 매우 적으니, 소를 가진 자로 하여금 빌려 주어 통공(通功)040)  하는 것으로 품앗이를 하여 있고 없고 간에 서로 돕게 하기를 청하고, 우의정 김상철이 중외의 백성을 부리는 폐단을 엄금하여 드러나는 대로 논죄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였다. 대사헌 안윤행(安允行)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이적보(李迪輔)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안윤행, 대사간 심발(沈墢), 사간 이적보를 파직하라 명하였는데, 안윤행과 이적보는 고지(故紙)를 베껴서 전해 주었고, 심발은 어제는 참석했다가 오늘은 불참하였기 때문이었다. 환궁할 때에 교리(校理) 조준(趙㻐)에게 과천(果川)을 염찰(廉察)하라 명하고, 남관왕묘(南關王廟)를 지나는 길에 들려 하교하기를,
"‘평생에 내가 수정공(壽亭公)041)  을 사랑하였네.[平生我愛壽亭公]’라는 옛날 어시(御詩)를 우러러보는구나."
하고,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치제(致祭)하고, 동관왕묘·남관왕묘에 용포(龍袍)를 새로 비치(備置)하라고 명하였다.

 

2월 29일 계해

영의정 서지수가 차자를 진달하여 면직을 비니, 온화한 비답을 내렸다.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동교(東郊)에서 친경(親耕)하고 남교(南郊)에서 성경(省耕)하는 것이 어찌 구경거리를 위해서이겠는가? 옛사람이 봄에 성경(省耕)하여 부족한 것을 보태 주는 뜻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종자와 양식이 떨어진 자에게는 주선하여 구해주고, 농민으로서 게으른 자는 권유하고 경칙(警飭)하게 하였으니, 이는 선유(宣諭)한 가운데 두 가지 일이다. 지금 당장 봄갈이가 한창이니, 종자와 양식을 도와주고, 게으른 자를 경칙하도록 여러 도에 엄히 신칙하라. 아! 천승(千乘)의 임금이 전토(田土)를 밟았으니, 이번의 이 일은 참으로 백성을 위한 것이다. 이윤(伊尹)과 제갈양(諸葛亮)도 오히려 몸소 밭갈이하면서 감히 스스로 편안하려 하지 않았다. 고 상신 김육(金堉)도 몸소 전답을 갈고 밭이랑에서 독서(讀書)하면서 벼슬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찌 백성들을 위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려고 힘썼겠는가? 옛날에 경강(敬姜)은 문백(文伯)의 어머니인데도 오히려 길쌈을 하였는데, 지금은 그런 말이 들리지 않는다. 외방에서 놀면서 입고 먹는 부부(夫婦)는 남편이 밭갈이하지 않는데 아내가 어떻게 누에를 치겠으며, 이것이 어찌 경강이 그 아들을 가르친 뜻이겠는가? 내가 늙은 나이에 영덕 현령(盈德縣令) 이명오(李明吾)가 몸소 농사지은 일을 듣고서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화사(畵師)에게 명하여 관복(官服)을 추종(騶從)에게 넘겨 주고서 도롱이와 삿갓을 착용하고 밭갈이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친히 서문(序文)을 지어 써서 전중(殿中)에 걸어놓고 항상 보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의 비난과 조롱을 받았으니, 고 상신이 비록 지금에 있다 하더라도 어찌 조롱을 받지 않겠는가? 세도를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이 명오가 일찍이 탄핵을 받았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이에 미치었다.

 

대사성에게 유생을 거느리고 입시하라고 명하여 잠·명·송(箴銘頌)을 강하고 지필묵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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