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8권, 영조 43년 1767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1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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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병인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휘지(李徽之)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재순(金載順)을 응교(應敎)로, 남태제(南泰齊)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영의정 서지수가 또 차자를 진달하여 면직을 비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고 좌윤(左尹) 윤면교(尹勉敎)를 치제(致祭)하고, 그 아들 윤동절(尹東晢)에게 존문(存問)하여 복제(服制)를 마치기를 기다려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도록 명하고, 전 군수(郡守) 이보상(李普祥)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는데, 윤면교의 처는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동기(同氣)이며, 이보상의 처는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동기이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종신(宗臣)·문신(文臣)·무신(武臣)을 시강(試講)하고 시상하였다. 입시한 여러 시관(試官)과 승지·사관에게 십운 배율(十韻排律)을 제진(製進)하라 명하였다.

 

3월 3일 정묘

예문 제학(藝文提學) 서명응(徐命膺)의 입시를 명하여 응제시(應製詩)의 과차(科次)를 매기게 하였는데, 탁명(坼名)042)  하여 김시영(金始煐)에 이르자 하교하기를,
"칠순의 나이에 삼하(三下)를 받음은 드물게 있는 일이니, 특별히 삼상(三上)에 두라."
하고, 표피(豹皮) 1령(令)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서명응을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 말하기를,
"지난번 경의 글이 한번 들어오자 13인의 시종(侍從)이 아직도 시애(撕捱)하고 있으니, 매우 고민스럽다."
하니, 서명응이 대답하기를,
"비록 신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더라도 통청(通淸)043)  이 이 13인에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이 논한 것은 정격(政格)044)  을 보존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추후에 생각해 보니, 신 역시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습니다. 만약 칙교(飭敎)가 계시면 어찌 한결같이 시애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잠단(先蠶壇) 제보부(祭報府)045)  를 가지고 들어오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번 친잠은 3백 년 후에 처음 있는 일이며 곤전(坤殿)이 작헌례(酌獻禮)를 친행한 것은 바로 국조(國朝)에서 처음으로 행한 것이다. 악무(樂舞)가 구애되어 먼저 제례(祭禮)를 지냈으니, 비록 작헌례를 행하였더라도 사실은 친제인 것이다. 이제 여러 집사(執事)를 보건대 아주 해괴하니,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나와 다르겠는가? 해당 낭청을 금추(禁推)하고 예조 판서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며, 대신을 보내어 거행하라."
하였다.

 

3월 4일 무진

임금이 선잠단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승지가 입시하니, 사학(四學)의 역관(譯官)을 불러들이라 명하여 시강(試講)하고 시상하였다. 동지사(冬至使)의 선래 군관(先來軍官) 두 명과 역관 한 명을 호남 해도(海島)에 나누어 유배하라 명하였으니, 군관은 가산(嘉山)·곽산(郭山)에서 뒤떨어졌으며, 역관은 겨우 고양(高陽)에 당도한 때문이었다.

 

3월 5일 기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에게 말하기를,
"영상이 아직도 인혐하고 들어가 있으니, 민망스럽다. 지난 일을 내가 지금에 후회하고 있다."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영상이 이 하교를 들으면 반드시 감읍(感泣)할 것이니, 이로써 개석(開釋)하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각사 낭관(郞官)의 입시를 명하여 쓰고 남아 있는 것과 폐막(弊瘼)을 하문하였다.

 

3월 6일 경오

임금이 광릉(光陵)의 한식제(寒食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3월 7일 신미

임금이 태실(太室)·각 능전(陵殿)·궁원(宮園)의 한식제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친잠례(親蠶禮)를 초10일로 당겨 정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서지수가 또 차자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한때의 과중한 하교가 경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비록 열 번 차자를 올리더라도 내가 어찌 사직을 허락하겠는가?"
하였다.

 

전 찬선(贊善) 윤봉구(尹鳳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의 선사(先師)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의 온천(溫泉)에서 있었던 일은 변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선사는 깊고 견고한 자질과 근밀(謹密)한 공부로서 사도(斯道)의 맹주(盟主)가 되고 세상의 모범이 되었으니,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 예우(禮遇)와 총애하심이 시종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어제(御題) 유곤록(裕昆錄)에 이르기를, ‘안자(顔子)가 누항(陋巷)에 있었으나 어찌 음식을 보내왔던가?’라 하고, 또 말하기를, ‘초래(招來)하기를 청하고 출행(出行)을 권하여 내가 온천에서 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사께서 당시의 대로(大老)로서 마침 여행 중이므로 가까운 고을에 있던 친지들이 객지(客地)의 수용(需用)을 돕기 위하여 보내 온 것은 찬물(饌物)과 술병 등속에 불과하였으니, 보내 온 것을 사양하였으나 어떻게 물리치기야 하겠습니까? 맹자(孟子)도 설(薛)과 송(宋)에서 모두 받은 일046)  이 있었으니, 안자나 맹자도 그 도(道)는 하나입니다. 맹자가 받은 바는 안자 역시 반드시 받았을 것이니, 선사의 받은 바가 어찌 안자의 도에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행전(行殿)에서 입대(入對)하였다가 상소하여 먼저 돌아간 데는 다 곡절이 있습니다. 선사는 가까운 온천에 나가서 문후(問候)할 계획으로 행조(行朝)에 나아갔는데, 은례(恩禮)가 융숭하여 손을 잡고 돈면(敦勉)하시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 권하거나 저지함을 인해서 나오게 하고 물러가게 하였겠습니까? 설령 어떤 사람이 불러오게 하고 가기를 권하였다면 그 사람이 성의가 없는 것이니, 선사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또 천안(天安)·직산(稷山) 사이에서 장차 배호(陪扈)하고 돌아갈 계획을 하였는데, 불행히도 아들의 병이 위독하여 처음 마음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침내는 인자(仁慈)의 해량(解諒)하심을 보게 되었고 대도(大度)로써 매복(枚卜)047)  의 명까지 계셨음은 삼가 생각하건대 연충(淵衷)에 지금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신의 선사의 진퇴(進退)와 사수(辭受)에는 처음부터 흠잡아 말할 만한 것과 특별히 추구(追咎)048)  함을 보일 뜻이 없었음을 생각하시어 마침내 처음을 이어가지 못하였다는 탄식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전하의 계술(繼述)하는 도리가 크게 빛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지난해 놀라운 글을 온천 행행 때 이미 보았기 때문에 이번의 직명(職名)이 없는 상소 역시 의아스러운 데 관계된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어제(御製)의 구어(句語)를 인해서 이처럼 장황하게 한 것이다. 한 가지 일은 윤봉구 역시 가리워서 숨길 수 없는 것이었고, 한 가지 일은 그 글에서 말한 바가 그의 스승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의 유신(儒臣)을 개탄하여 말한 것인데, 이제 어찌 번갈아가며 이처럼 변명하는가? 아! 내가 비록 노쇠하였지만 사문(斯文)049)  에 대하여는 즉위한 처음부터 엄칙(嚴飭)함이 깊었다. 이른바 제방(隄防)을 엄히 한 유곤록(裕昆錄)이란 지난번 신경(申暻)의 놀라운 거조를 인하여 지은 것인데, 더군다나 백수(白首)의 늙은 나이에 이제 몇년이 지난 후 이런 일을 어찌 감히 오늘날 다시 제기하는가? 한심한 일 치고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어찌 온천에서 올린 상소에 비하겠는가? 마땅히 엄히 처리해야 할 일이나, 일찍이 노쇠하여 혼미하다고 들었고 이 글이 결코 스스로 변명한 것이 아님을 이미 알았으니, 그것을 비록 참작하더라도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도리를 엄히 함에 있어서 예(例)에 따라 답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 글을 내려 보내라."
하니, 승지 이휘지(李徽之)가 아뢰기를,
"윤봉구는 나이가 80세에 가깝고 고(故) 상신(相臣)은 선조(先朝)에서 예우(禮遇)한 신하이니, 만약 우악한 비답을 내리시면 성덕(聖德)에 빛이 날 것입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도리를 엄히 해야 한다는 하교는 참으로 과중(過中)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과 서로 맞서서 스승을 위해 변무(辯誣)한 것이 어찌 그르지 않은가?"
하고는, 이휘지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3월 8일 임신

임금이 소녕원(昭寧園)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고, 인하여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부복(俯伏)하여 윤봉구의 일을 상세히 입으로 아뢰었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탕제(湯劑) 들기를 청하니, 받아서 땅에 엎질러버렸다.

 

3월 10일 갑술

임금이 경복궁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수가(隨駕)하고, 내전이 경복궁에 나아가니 혜빈(惠嬪)과 왕세손빈(王世孫嬪) 역시 같이 나아갔다. 채상례(採桑禮)를 행한 후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하였다. 조현례(朝見禮) 후에 조정의 2품 이상과 육조 당상(六曹堂上), 봉조하(奉朝賀)가 문안하였다. 영의정 서지수, 좌의정 한익모, 우의정 김상철, 영부사 윤동도(尹東度), 판부사 김양택(金陽澤)이 대례(大禮)가 순조롭게 잘 이루어지고 구궐(舊闕)에서 하례를 받은 것으로써 각기 기쁨의 정성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이 들어온 것은 참으로 체모를 얻은 것이다."
하고, 명일에 정시(庭試)를 실시하되 경잠과(耕蠶科)로 이름하고 무신년050)  의 예에 의해서 3인을 뽑으며, 예방 승지(禮房承旨) 유한소(兪漢蕭)에게 가자(加資)하고,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의 가벼운 죄수를 당일 안에 석방하고, 제도(諸道)의 도년(徒年) 이하도 일체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윤득맹(尹得孟)을 대사간으로, 윤면헌(尹勉憲)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친잠의(親蠶儀)는 다음과 같다.〉 2일 전에 예조에서 내외에 선섭(宣攝)하여 각기 그 직책을 수행하게 한다. 하루 전에 액정서에서 전하의 대차(大次)를 근정전에, 소차(小次)는 사정전(思政殿)에, 악차(幄次)는 강녕전(康寧殿)에 설치하는데, 모두 남향으로 한다. 왕비의 차(次)는 제단(祭壇) 서북쪽에 남향으로, 소차는 채상단(採桑壇) 길에 서남향으로 설치하고, 혜빈의 차(次)는 왕비 차의 동쪽, 소차는 왕비 소차의 서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남쪽 근처에 서향으로 한다. 왕세손의 차는 근정전 대차 동쪽 및 강녕전 악차의 동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서향으로 한다. 왕세손빈의 차를 혜빈 차의 동쪽에, 소차는 혜빈 소차의 서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남쪽 근처에 서향으로 한다. 대가(大駕)가 궁을 나서면 왕세손과 백관이 지영(祗迎)하여 대가를 따르며, 전하가 대차에 평상시의 의식대로 들어간다. 그날에 병조에서 왕비의 장위(仗衛)를 의식대로 베풀고 사복시 관원이 합외(閤外)에 연(輦)을 올린다. 장악원에서 전부 고취(前部鼓吹)를 의식대로 하고, 궁을 나갈 시각이 이르면 왕비가 여를 타고 나가는데, 산선(繖扇)·시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한다. 흥화문(興化門) 밖에 이르면 시위와 백관이 국궁(鞠躬)하고, 다 지나가면 평신(平身)하여 차례로 시위한다. 광화문(光化門) 밖에 이르면 먼저 가 있던 백관이 동서로 나누어 차례로 서고, 왕세손이 차에서 나와 서향하여 서서 왕비가 이르면 국궁하고 지나가면 평신하며, 왕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차로 들어간다. 시각이 이르면 작헌례(酌獻禮) 및 친잠 진하례(親蠶陳賀禮)·조현 행례(朝見行禮)를 상시의 의식대로 한다. 대가와 거가의 환궁은 올 때의 의식대로 한다. 환궁할 시각이 되면 왕비의 시위 백관이 광화문 밖의 시립(侍立)하는 자리로 나가는데, 동서로 나누어 차례로 선다. 왕비가 여를 타고 나가면 산선·시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한다. 광화문 밖에 이르면 시위 백관이 국궁하고, 지나가면 평신하여 시위한다. 흥화문 밖에 이르면 먼저 가 있던 백관이 국궁하여 의식대로 지영하고, 올 때의 의식대로 환궁한다.

 

왕비가 친잠 때에 경복궁으로 가는 의식(儀式)은 다음과 같다. 기일 전에 해사에서 단(壇) 안팎을 소제하고 차(次)의 설치는 의식 때와 같다. 찬만(饌幔)을 동유문(東壝門) 밖에 설치한다. 하루 전에 전사관(典祀官)이 신좌(神座)를 단상 북쪽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완석(莞席)을 펴놓는다. 왕비의 판위(版位)를 단 아래 동남쪽에 서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혜빈·왕세손빈 및 응당 참여해야 할 명부(命婦)의 배위(拜位)를 남유문(南壝門) 안 남쪽 가까운 곳에 자리를 달리하여 겹줄로 설치하는데, 북향으로 한다. 제집사(諸執事)의 자리를 단 아래에 의식대로 설치하고, 집례(執禮) 【여관(女官)이다. ○찬인(贊引)·집준(執尊)·대축(大祝)·찬자(贊者)도 모두 같다.】 의 자리는 동쪽 계단 아래에 설치한다. 또 제집사의 외위(外位)를 서문 밖에 설치하는데,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 하되, 북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혜빈·왕세손빈 및 응당 참여하여야 할 명부의 외위(外位)를 단의 남문 밖에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 하되, 북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그날 행사를 하기 전에 전사관(典祀官)이 전축판(奠祝版)을 신위의 오른쪽에 들여놓고, 향로(香爐)·향합(香盒)과 초[燭]를 신위 앞에 설치하고, 그 다음 제기(祭器)를 설치한다. 전사관이 들어와서 찬(饌)을 담기를 다 마치고, 전사관이 올라가 신위판(神位版)을 자리에 설치한다.
찬인(贊引)이 혜빈·왕세손빈 및 응당 참여해야 할 명부를 인도하면 각기 입고 있는 차림으로 외위(外位)로 나간다. 제집사가 외위로 나가면 상의(尙儀)가 대차(大次)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을 계청한다. 제집사가 배위(拜位)로 들어가 집례가 ‘사배(四拜)’라고 말하면, 제집사가 모두 사배를 마친다. 찬인(贊引)이 제집사를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 관세를 마치고 각기 자리로 나간다. 찬인이 혜빈·왕세손빈 및 참여한 명부를 인도하여 배위로 들어가면, 집사가 작세위(爵洗位)로 나아가 술잔을 씻어 닦기를 마쳐 광주리에 담아 준소(尊所)로 받들고 가서 점(坫) 위에 놓는다.
집례가 말하기를, ‘상의(尙儀)는 행사(行事)를 계청하라.’ 하고, 상의가 대차 앞으로 가서 꿇어앉아 작헌례를 행하기를 계청하면, 왕비가 예복을 갖추어 수식(首飾)을 가하고 관세(盥洗)하고 나온다. 상의가 왕비를 인도하여 장차 동문 밖에 이르면 상의가 부복하여 꿇어앉아 집규(執圭)를 계청한다. 상궁(尙宮)이 꿇어앉아 규를 올리면 상의가 왕비를 인도하여 판위로 들어가 서향하여 선다. 집례가 ‘사배’라고 말하고 상의가 ‘국궁(鞠躬)·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을 계청하면 왕비가 국궁·사배·흥·평신을 하고, 혜빈 이하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사배한다.
집례가 ‘상의는 왕비를 인도하여 작헌례를 행하라.’고 말하면, 상의가 왕비를 인도하여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준소(尊所)에 가서 서향하여 선다. 집준자(執尊者)가 멱(冪)을 들면 상궁 한 사람이 술을 따르고, 한 사람이 잔에다 술을 받는다. 상의가 왕비를 인도해 신위(神位) 앞으로 가 북향하여 선다. 집례가 ‘꿇어앉으라.’고 말하고, 상의가 꿇어앉아 진규(搢圭)를 계청하면 왕비가 꿇어앉아 진규하고, 혜빈 이하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꿇어앉는다. 상궁 한 사람이 향합(香盒)을 받들고, 한 사람은 향로를 받들어 꿇어앉아 올리면 상의가 세 번 향을 올리라고 계청한다. 왕비가 세 번 향을 올리면 상궁이 향로를 신위 앞에 놓는다. 상궁이 잔을 받들어 꿇어앉아 올리면 상의가 잔을 잡아 헌작(獻爵)하기를 계청한다. 왕비가 잔을 잡아 헌작하여 잔을 상궁에게 주어 신위 앞에 올린다. 상의가 집규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조금 물러나 북향하여 꿇어앉기를 계청하면, 왕비가 규를 잡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조금 물러나 북향하여 꿇어앉는다. 대축(大祝)이 신위 오른쪽에 나아가 동향하여 꿇어앉아 축문을 읽기를 마치면, 상의가 ‘부복·흥·평신’을 계청한다. 왕비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평신하면, 혜빈 이하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평신한다.
상의가 왕비를 인도하여 내려가 자리로 돌아가면. 집례가 ‘사배’라고 말한다. 상의가 ‘국궁·사배·흥·평신’을 계청하면, 왕비가 국궁·사배·흥·평신하고 혜빈 이하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사배한다. 조금 후 집례가 ‘사배’라고 하면, 상의가 ‘국궁·사배·흥·평신’을 계청한다. 왕비가 국궁·사배·흥·평신을 하면, 혜빈 이하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사배한다.
상의가 꿇어앉아 예필(禮畢)을 아뢰면, 상의가 왕비를 인도하여 돌아가 동문 밖에 이르러 상의가 석규(釋圭)를 계청한다. 왕비가 규를 놓으면 상궁이 규를 받는다. 상의가 왕비를 인도하여 대차로 돌아오면, 집례가 ‘망료(望燎)’라고 말한다. 찬인이 혜빈을 인도하여 망료로 가면 대축이 축판(祝版)을 가지고 요소(燎所)로 가서 요시(燎柴) 위에 둔다. 집례가 ‘불태우라.’고 하면 땔감을 반쯤 태운다. 찬인이 혜빈 이하를 인도하여 나오고, 찬인이 여러 집사를 인도하여 배위로 나아가 사배하고 나온다. 전축관(典祝官)이 예찬(禮饌)을 치우고 판위를 넣어두고 내려와 이어 물러 나온다.

 

왕비가 선잠(先蠶)에 작헌(酌獻)하는 의식은 다음과 같다. 기일 전에 액정서에서 채상단(採桑壇) 밖에 유악(帷幄)을 설치하는데, 사면에 문을 연다. 왕비의 악차를 단의 동북쪽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혜빈의 차(次)를 악차 남쪽에 조금 동쪽으로 서향하여 설치하며, 왕세손빈의 차를 혜빈 차의 남쪽에 서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차를 단의 서남쪽에 동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그날에 상침이 왕비의 채상 욕위(採桑褥位)를 단 위 조금 동쪽에 동향으로 하여 설치하고 혜빈과 왕세손빈의 채상위를 단 아래 북쪽 가까이 남향으로 하여 설치하며, 또 채상하는 내·외 명부의 채상위를 단 아래 남쪽 가까이 북향으로 설치하는데, 모두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 하되, 서쪽이 위가 되게 한다. 왕비의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는 자의 자리를 혜빈위의 서쪽 조금 남쪽에 설치하는데, 서쪽이 위가 되게 한다. 또 단 위에 왕비의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는 자의 자리를 왕비 채상위의 북쪽의 조금 동쪽으로 남향하여 설치하는데, 서쪽이 위가 되게 한다. 혜빈 이하의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는 자의 자리를 각 자리의 뒤에 설치한다. 여시(女侍)가 잠종(蠶種)·갈고리·박(箔)·광주리·시렁 및 양잠에 필요한 기물을 상전(尙傳)에게 주고, 상전이 받아서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는 자 및 잠모(蠶母)에게 주어 기다리게 한다. 왕비가 작헌례를 행하여 예를 마치고 다시 악차로 들어오면, 상궁 이하가 각기 그 복장을 입고 상기(尙記)가 보(寶)를 받들고 모두 악차 앞으로 가서 사후(伺候)한다. 채상할 시각이 이르면 상의가 악차 앞으로 나아가 부복하여 꿇어앉아 중엄(中嚴)을 계청한다. 혜빈·왕세손빈 및 채상하는 내·외 명부가 각기 그 복장을 입는다. 전빈(典賓)이 혜빈·왕세손빈 및 채상하는 내·외 명부를 인도하여 모두 단하의 자리로 가면,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은 모든 자가 각기 자리로 나아간다.
상의가 부복하여 꿇어앉아 예를 행하기를 계청하면, 왕비가 상복(常服)으로 바꿔 입고 나간다.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채상단으로 나아가 남쪽 계단으로 올라가 채상위로 가서 동향하여 선다.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은 자가 북쪽 계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나가면 전빈이 상공(尙功)과 전제(典製)를 인도하여 채상위에 나아가 서향으로 선다. 상공이 갈고리를 받들어 올리면 왕비가 갈고리를 받아서 뽕을 따고, 전제가 광주리를 받들어 올리면 받아서 뽕을 담는다. 왕비는 다섯 가지[條]의 뽕을 따는 데 그치고, 갈고리를 상공에게 주면 상공이 갈고리를 받으며, 전제는 광주리를 받들고 모두 내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상궁이 왕비를 인도하여 단의 남쪽 자리로 가서 혜빈 이하의 뽕 따는 것을 구경한다. 처음에 왕비와 채상 여사(採桑女史)가 각기 갈고리를 혜빈·왕세손빈 및 채상하는 내·외 명부에게 준다. 왕비가 뽕따는 것을 마치면 전빈이 혜빈·왕세손빈, 내·외 명부를 인도하여 차례로 뽕을 따면, 광주리를 잡은 자가 받는다. 혜빈·왕세손빈이 각기 일곱 가지를 따고 내·외 명부가 각기 아홉 가지를 따면, 여사(女史)는 갈고리를 받아 광주리를 잡은 자에게 주고 물러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전빈은 혜빈·왕세손빈, 내·외 명부를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간다.
전빈이 혜빈·왕세손빈 및 내·외 명부를 인도하여 잠실(蠶室)로 나아가면, 상공이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은 자를 거느리고 차례로 따라서 잠실에 도착한다. 상공이 뽕을 잠모에게 주면 잠모는 뽕을 받아서 잘게 썰어서 내명부에게 주고 한 잠박(蠶箔)의 누에에다 뿌려주어 먹게 하고, 이를 마치면 전빈이 혜빈·왕세손빈·내·외 명부를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간다. 잠모가 단 아래로 내려가 먼저 고두례(叩頭禮)를 행하고 반상(頒賞)을 마치면, 잠모가 다시 고두례를 행한다. 상의가 왕비 앞으로 나아가 부복하여 꿇어앉아 예필을 아뢴다.
왕비가 소차로 들어가 예복으로 갈아입고 수식(首飾)을 가하여 자리에 오르면, 전빈이 혜빈·왕세손빈 및 내·외 명부 이하를 인도하여 예복으로 갈아입고 배위(拜位)로 나간다. 전찬이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하면, 혜빈 이하가 국궁·사배·흥·평신한다. 전빈이 혜빈 이하를 인도하여 단에 올라 시좌(侍座)한 후 잠모 등이 단 아래에 열지어 앉으면 음식을 내리고, 먹기를 마치면 물러가 선다. 상의가 꿇어앉아 예필(禮畢)을 아뢰면 왕비가 자리에서 내려오고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악차로 들어가며, 전빈이 혜빈 이하를 인도하여 각기 자리로 돌아간다. 조현례(朝見禮) 시각이 이르면 의식대로 행례한다. 【친잠의(親蠶儀)이다. ○친경 전에 헌종(獻種)하는 예(例)가 있으니, 친잠 전에도 마땅히 욕종(浴種)하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행할 만한 의식이 없어서 빠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3책 108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24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농업-권농(勸農) / 농업-양잠(養蠶)

 

하루 전에 액정서에서 악차를 강녕전(康寧殿)에 설치한다. 상침(尙寢)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어좌를 악차 안 조금 동쪽에 남향으로, 왕비의 자리는 악차 안 조금 서쪽에 남향으로 하여 설치한다. 보안(寶案)을 어좌 앞 동쪽 가까이에 설치하고, 또 보안을 왕비의 자리 앞 서쪽 가까이에 설치하며, 향안(香案) 두 개를 전외(殿外) 좌우에 설치한다. 내시부(內侍府)에서 의장(儀仗)을 전정(殿庭) 동서쪽에 의식대로 진열한다. 그날에 전찬(典贊)이 혜빈의 배위(拜位)를 전정 중앙에 북향으로 설치하고, 또 왕세손빈의 배위를 혜빈의 자리 동쪽에 조금 남쪽으로 북향하여 설치한다. 또 명부(命婦)의 반수(班首) 이하의 배위를 왕세손빈의 배위 뒤에 설치하는데, 모두 매 등(等)마다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 하되, 북향으로 한다. 사찬(司贊)·전빈(典賓)의 자리는 동서 계단 아래에 있고, 전언(典言)·전찬(典贊)의 자리는 남쪽으로 조금 물러서 있다.
상궁 이하가 각기 예복을 갖추고 상전(尙傳)·상기(尙記)는 보(寶)를 받들고 함께 악차 앞으로 가서 사후(伺候)한다. 여집사(女執事)가 들어와 자리에 나아가면, 상전이 부복하여 꿇어앉아 전하에게 중엄(中嚴)을 계청하고, 상의가 꿇어앉아 왕비에게 중엄을 계청하며, 수칙(守則)이 꿇어앉아 혜빈에게 내엄(內嚴)을 아뢰고, 얼마 후에 또 외비(外備)를 아뢴다. 혜빈이 적의(翟衣)를 갖추고 수식(首飾)을 가하면 수규(守閨)가 앞에서 인도하여 나가 길 동쪽의 남쪽 가까이에 서향하여 서는데, 배위(陪衛)는 의식대로 한다. 수칙이 꿇어앉아서 왕세손빈에게 내엄(內嚴)을 아뢰고, 조금 후에 또 외비(外備)를 아뢴다. 왕세손빈이 적의를 갖추고 수식을 가하면 수규가 앞에서 인도하여 나가 길 서쪽에 서는데 혜빈의 자리 조금 남쪽에 동향한 데 당하고, 배위(陪衛)는 의식대로 한다. 전빈이 명부의 반수 이하를 인도하여 들어가 길 남쪽에 북향하여 서는데,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 하되, 서쪽이 위가 되게 한다.
상전(尙傳)이 꿇어앉아 전하에게 외판(外辦)을 아뢰면, 전하께서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나와 자리에 오른다. 향로의 연기가 피어 오르면 상전이 보(寶)를 받들고 안상에 두는데, 산선(繖扇)·시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한다. 상의(尙儀)가 부복하여 꿇어앉아서 왕비에게 외판을 아뢰면, 왕비가 적의를 갖추고 수식을 가하고 나와 자리에 오른다. 상기(尙記)가 보를 받들어 안상에 두는데, 산선·시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한다.
수규가 혜빈을 인도하여 배위로 들어오면 사찬(司贊)이 말하기를, ‘사배(四拜)’라고 하고 전찬이 사배를 창하면 혜빈이 국궁·사배·흥·평신을 한다. 전언(典言)이 동쪽 계단으로 올라 자리 앞에 나아가 부복하여 꿇어앉고, 전찬이 ‘궤(跪)’를 창하면 혜빈이 꿇어앉는다. 전언이 대신 치사(致詞)하기를, ‘혜빈 첩(妾) 모씨(某氏) 운운(云云)’이라 한다. 하례를 마치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내려와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전찬이 ‘부복·흥·사배’를 창하면, 혜빈이 부복·흥·사배를 한다. 상의가 자리 앞에 나아가 부복하여 꿇어앉아서 전지(傳旨)를 열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나와 계단에 이르러 서향하여 서서 전지가 있음을 일컬으면, 전찬이 ‘궤’를 창하고 혜빈이 꿇어앉는다. 상의(尙儀)가 선지(宣旨)하기를, ‘혜빈과 함께 경하한다.’라고 한다. 전찬이 ‘부복·흥·사배’를 창하면, 혜빈이 부복·흥·사배하고 전빈이 혜빈을 인도하여 나간다.
전빈이 왕세손빈을 인도하여 배위로 들어가 전찬이 ‘사배’를 창하면, 왕세손빈이 국궁·사배·흥·평신한다. 전언(典言)이 동쪽 계단으로 올라와 자리 앞에 나아가 부복하여 꿇어앉고, 전찬이 ‘궤’를 창하면 왕세손빈이 꿇어앉는다. 전언이 대신하여 치사(致詞)하기를, ‘왕세손빈 첩(妾) 모씨(某氏) 운운(云云)’이라고 한다. 하례를 마치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전찬이 ‘부복·흥·사배’를 창하면 왕세손빈이 부복·흥·사배하고, 상의가 자리 앞에 나아가 부복하여 꿇어앉아 전지(傳旨)를 열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나가 계단에서 서향하여 서서 전지가 있음을 일컬으면, 전찬이 ‘궤’를 창하고 왕세손빈이 꿇어앉는다. 상의가 선지(宣旨)하기를, ‘세손빈과 같이 경하한다.’고 한다. 전찬이 ‘부복·흥·사배’를 창하면 왕세손빈이 부복·흥·사배하고 전빈이 왕세손빈을 인도하여 나간다.
전빈이 명부(命婦)의 반수(班首) 이하를 인도하여 배위로 나아가면 전찬이 ‘사배’를 창하고, 명부의 반수 이하가 국궁·사배·흥·평신한다. 전언이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자리 앞에 나아가 부복하여 꿇어앉고, 전찬이 ‘궤’라 창하면 명부의 반수 이하가 꿇어앉는다. 전언이 대신 치사하기를, ‘명부 첩(妾) 모 옹주(某翁主) 등 운운(云云)’이라고 한다. 하례를 마치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전찬이 ‘부복·흥·사배’를 창하면, 명부의 반수 이하가 부복·흥·사배하고 상의가 자리 앞에 나아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전지를 열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나가 계단에서 서향하여 서서 전지가 있음을 일컬으면, 전찬이 ‘궤’를 창하고 명부의 반수 이하가 꿇어앉는다. 상의가 선지(宣旨)하기를, ‘명부 등과 함께 경하한다.’라고 하면, 전찬이 ‘부복·흥·사배’를 창하고 명부의 반수 이하가 부복·흥·사배한다. 상의가 자리 앞에 나아가 부복하여 예필을 아뢰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나가면, 전하께서 자리에서 내려와 상의가 앞에서 인도해 악차로 들어간다. 왕비가 자리에서 내려오면, 상의가 앞에서 인도하여 악차로 들어가고 명부 이하가 각기 차로 들어간다.

 

친잠 후 조현의(朝見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상침이 전하의 자리를 편전 북쪽 벽 조금 동쪽에, 왕비의 자리는 전내(殿內) 북쪽 벽 조금 서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남향으로 한다. 향안(香案) 두 개를 전외(殿外) 좌우에 설치하고 혜빈의 배위는 전정(前庭) 길 서쪽에, 왕세손의 배위는 길 동쪽 조금 남쪽에, 왕세손빈의 배위는 혜빈의 자리 뒤에, 명부의 배위는 그 뒤에 설치하는데, 모두 동쪽이 위가 되게 하며,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 하되, 모두 북향으로 한다. 그날에 상공(尙功)이 대나무 상자에 누에고치를 담아 안상에 둔다. 3각(三刻) 전에 명부가 각기 예복을 갖추고 모여오며, 2각 전에 혜빈이 예복을 갖추면 수규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나아간다. 왕세손이 익선관·곤룡포를 갖추면 전빈이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나아가고, 왕세손빈이 예복을 갖추면 수규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나아가며, 전빈이 명부를 인도하여 자리로 나아간다.
시각이 이르면 상의가 꿇어앉아 중엄을 계청하고 조금 후에 외판(外辦)을 계청한다. 전하가 익선관·곤룡포를 갖추면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나가 자리에 오르고, 왕비가 예복을 갖추면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나가 자리에 오른다. 향로의 연기가 피어 오르면 산선(繖扇)·시위는 평상시의 의식대로 한다. 사찬이 ‘사배’라고 하고 전찬이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하면, 혜빈·왕세손·왕세손빈 이하 명부가 국궁·사배·흥·평신한다. 상공(尙功)이 상자(箱子)를 받들고 전하의 좌전(座前)으로 가면 전하께서 일어선다. 상공이 받들어 보인 후 왕비의 좌전으로 가서 올리면 왕비가 서서 받아 상의에게 주고, 상의가 꿇어앉아서 받아 상복(尙服)에게 준다. 전하가 자리에 오르고 왕비도 자리에 오른다. 사찬이 ‘사배’라고 하고 전찬이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하면, 혜빈·왕세손·왕세손빈 이하 명부가 국궁·사배·흥·평신한다. 상의가 좌전으로 나가 부복하여 꿇어앉아 예필을 아뢰면, 전하가 자리에서 내려오고 왕비도 자리에서 내려와 안으로 들어간다. 수규와 전빈이 각기 혜빈·왕세손·왕세손빈 이하의 명부를 인도하여 나간다. 【수견의(受繭儀)이다. ○반사문(頒赦文)은 위의 친경조(親耕條)에 보인다.】


【태백산사고본】 73책 108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24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농업-권농(勸農) / 농업-양잠(養蠶)

 

3월 11일 을해

임금이 숭정문에 나아가 정시(庭試)를 베풀어 김문순(金文淳) 등 세 사람을 뽑았다.

 

부수찬 정후겸(鄭厚謙)이 상소하기를,
"신은 정이환(鄭履煥)과 더불어 사실을 말한 것은 같았는데 죄명은 달랐습니다. 신은 치우치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정이환은 아직도 위리 안치(圍籬安置) 중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상소를 읽으라 명하고, 말하기를,
"연소배(年少輩)의 마음가짐이 비록 가상하나, ‘정이환과 더불어 사실을 말한 것이 같았다.’고 한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고는 ‘계(啓)’ 자를 찍으라 명하였다.

 

3월 12일 병자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시사(試射)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나라의 경사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다같이 패택(霈澤)의 은전이 있어야 한다. 시종 가운데 피적(被謫)된 사람인 정이환(鄭履煥)·황최언(黃最彦)·이해진(李海鎭)·윤광례(尹光禮)·장정(張淀)은 아울러 석방하되 영원히 대망(臺望)에서 제외하고, 서형수(徐逈修)·유당(柳戇)·이진항(李鎭恒)·이헌경(李獻慶)·임정원(林鼎遠)·최익남(崔益男)·구상(具庠)은 아울러 탕척하라."
하였다. 여러 시관(試官)이 입시하여 과차(科次)를 매기라고 명하고, 임금이 친히 탁명(坼名)하였다. 김문순(金文淳)에 이르러 도승지 유한소(兪漢蕭)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가? 귀하구나."
하였다. 문과에 합격한 3인의 입시를 명하고 문과 3인과 무과 갑(甲)·을(乙)에 든 사람에게 무동(舞童)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이택징(李澤徵)을 장령(掌令)으로, 홍응보(洪應輔)를 헌납(獻納)으로, 서명선(徐命善)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내국 도제조 김치인(金致仁)의 사직을 허락하고 판부사 김양택(金陽澤)으로 대신하였는데, 김치인이 차자를 올려 병을 일컬었기 때문이다.

 

3월 13일 정축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 나라의 경사는 3백 년 후에 두 번 있는 일인데, 어찌 팔도에 혜택을 베풀지 않겠는가? 가장 오래 된 1년 조(條) 포흠을 특별히 탕감하고, 시민(市民)·공인(貢人)의 가장 오래 된 1년조 역시 탕척하여, 나의 함께 경하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판의금 이익정(李益炡), 형조 판서 윤급(尹汲)의 체직을 허락하고, 신회(申晦)를 판의금으로, 남태제(南泰齊)를 형조 판서로 특제(特除)하였다.

 

대사헌 이응협(李應協), 사간 황간(黃榦)이 모두 상소하여 대변(對辨)하니, 아울러 체직을 허락하였다.

 

3월 14일 무인

대신(大臣)·금오(金吾)·추조(秋曹)의 당상과 대신(臺臣)이 입시하였다. 도류안(徒流案)을 읽으라고 명하였는데, 유무(柳懋)에 이르러서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억울하다고 말하니 석방을 명하고, 김주태(金柱泰)는 감등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신경(申暻)의 소행은 참으로 말할 수 없고, 박치륭(朴致隆)의 소행은 아주 무상하였으나, 이제 도류안을 보건대 이미 모두 물고(物故)되었으니, 세도(世道)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이제 오늘날을 당했으니, 모두 사유(赦宥)하라."
하였다. 장령 이택징(李澤徵)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김주태는 바로 역적 김윤(金潤)의 아들인데, 감등하면 도년(徒年)이 되며, 도년은 사유(赦宥)를 만나면 바로 석방됩니다. 김윤의 아들을 갑자기 아무 일 없는 평인(平人)이 되게 하여 안연(晏然)히 행세(行世)하게 한다면,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김주태를 감등하라는 명을 도로 중지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서지수가, 윤광천(尹光天)이 대훈(大訓)051)  의 일 때문에 죄를 입어 귀양갔음을 앙주(仰奏)하자, 형조 판서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윤광천은 80세가 넘어서 그때에 귀양을 갔다가 석방되었습니다."
하니, 남태제를 파직하였는데, 직분을 넘어서 일을 아뢴 것 때문이었다. 서지수가 또 윤구연(尹九淵)의 신설(伸雪)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서지수가 또 말하기를,
"일전에 밀부(密符)의 일을 앙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밀갑(密匣)을 이미 내렸기 때문에 신이 과연 서명(署名)하여 바치고 치부책(置簿冊)을 본즉, 처음부터 치부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마침 신이 다시 상직(相職)에 무릅쓰고 응하였고 그때 승지도 역시 정원(政院)에 있기 때문에 추후로 수납(修納)하게 되었는데, 이런 잘못된 예(例)를 이루는 것인즉 매우 미안합니다. 그때의 승지를 청컨대 파직하고, 이러한 때에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수정(修整)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실(鄭實)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송문재(宋文載)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성억(李聖檍)을 사간(司諫)으로, 유지양(柳知養)을 정언(正言)으로, 김상묵(金尙默)을 교리(校理)로, 이익보(李益輔)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조명정(趙明鼎)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3월 15일 기묘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문무과(文武科)를 방방(放榜)하고, 무과는 부방(赴防)을 면제할 것과 제도(諸道)의 증렬미(拯劣米)052)   중 가장 많은 2년조를 아울러 탕척할 것을 명하였다.

 

수찬 윤사국(尹師國)이 늙은 어버이 때문에 걸군(乞郡)053)  하니, ‘오직 그의 아비를 생각하면 밤중에도 서글프고, 이제 그의 글을 보니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이 매우 가상하다. 어찌 회계(回啓)를 기다리겠는가? 특별히 청한 바를 윤허한다.’고 비답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이극생(李克生) 등 두 사람을 뽑았다.

 

정언 유지양(柳知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제주(祭酒)를 다시 쓰고 산림(山林)을 사유(赦宥)하는 일로써 전후하여 대신과 유신(儒臣)이 말한 자가 많았으나 끝내 채용되지 않았다가, 지난번 척리(戚里)의 소신(小臣)이 한번 글을 진달하자 차례로 시행되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후겸(鄭厚謙)은 나이가 약관(弱冠)이 못되어 학문이 통방(通方)하지 못한데도 외람되이 과거에 급제하고 곧바로 강서원(講書院)에 등용되었습니다. 성왕(聖王)은 사(私)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공성(孔聖)의 교훈이요, 동자(童子)가 벼슬을 갖춘다는 것은 경강(敬姜)의 경계한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비답을 내리지 않고 먼저 유지양을 체직하였다. 하교하기를,
"제향(祭享)에 술을 쓰지 않은 지 이제 이미 10년이 되었다. 내가 송다(松茶)를 마시는데, 소민(小民)이 술을 쓰는 것이 어찌 효(孝)라 하겠는가? 세 신하의 일은 3백 년 동안 없던 일이다. 비록 나라를 위한 것이라 하나, 마음에 매우 개탄스러웠다. 이로 인해서 대신에게 물어서 하교한 것이니, 이는 사의(私意)가 아니었다. 상소 가운데 ‘척신(戚臣)’이란 두 글자는 면목(面目)이 이미 놀랍고, 그 전편(全篇)을 논하자면, 임금을 협사(挾私)한 죄과로 돌렸으니, 지극히 무엄하다. 이런 하찮은 자를 어찌 족히 깊이 다스리랴?"
하였다.

 

3월 16일 경진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김양택이 문후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고 탕제(湯劑)를 물리쳤다. 유지양의 일을 구주(口奏)하니, 연달아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다. 부제조 유한소(兪漢蕭)가 환수하기를 청하니 파직을 명하고, 홍명한(洪名漢)으로 대신하였다.

 

3월 17일 신사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갔다가 근정전(勤政殿) 구기(舊基)에 들러 오랫동안 부복(俯伏)하고 있었다. 시임·원임 대신과 옥당(玉堂)의 상·하번, 국구(國舅)가 청대 입시하여 번갈아 애타는 정성을 진달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의 광경을 보고 삼사(三司)의 신하는 어찌 감히 편안히 집안에 있는가? 수가(隨駕)한 이외의 삼사는 모두 삭판(削版)하라."
하고, 수찬 윤사국(尹師國)을 장령으로 제수하였다. 인하여 육상궁으로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한 후, 윤사국에게 먼저 입시한 후 사은하라 명하였다. 윤사국이 재소(再召)해서야 비로소 명에 응하여 단지 전계(前啓)만을 전하니,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하라 명하였다. 응교 홍억(洪檍)을 집의(執義)로 제수하였는데, 홍억이 유지양을 찬축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처분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대청(臺請)을 기다리겠는가? 이는 내 뜻이 아니다. 스스로 해당되는 율이 있으니, 유지양을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지워 진신(搢紳)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하라."
하니, 홍억이 의율(擬律)을 잘 살피지 못한 것으로써 인피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사국은 어제 상소의 비답이 내릴 때 만약 그 어버이를 위한다면 어찌 감히 임금을 저버리겠는가? 이미 처분하였으나, 홍억(洪檍)의 전계(傳啓)는 아주 모호하니, 거제부(巨濟府)로 정배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근정전에서의 거조는 조선에 대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입시한 대신을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삼가 신은 어제 유지양(柳知養)이 천만 놀라운 거조의 소를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성심이 이로 인해 번뇌하시어 탕제를 드시지 않으시니, 신의 마음이 타는 듯한 박절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오늘 근정전 구기(舊基)에 입시한 대신은 한 사람도 눈물을 흘리면서 진청한 자가 없었으니, 신은 더욱 개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럴 때에 건공탕(建功湯)을 하루라도 드시지 않는다면, 어찌 크게 가슴 졸여 애태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번독(煩瀆)함을 불구하고 미천한 정성을 앙달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신이 밤낮으로 의지하여 우러르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빨리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탕제 올리기를 허락하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간절한 글을 보고 너의 정성에 감격하였다. 아! 지금의 일이 어찌 유지양 때문만이라고 하겠는가? 네 할아비가 40년 동안 도솔(導率)하지 못한 소치이다. 비록 그러하나 재작일 이후 무슨 마음으로 탕제를 복용하겠느냐? 내가 입자(笠子)를 쓰고 아룀이 있다 하여 3일이 못되어 어찌 감히 억지로 복용하겠는가만, 네 정성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진맥하는 자리에서 삼령다(蔘苓茶)를 복용하는 것을 허락하겠다. 아! 청구(靑丘) 한쪽 구석에서 할아비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를 의지하고 있는데, 이제 네 글을 본즉 주창(主鬯)054)  이 제대로 될 것 같으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얼굴을 적신다."
하였다.

 

왕세손이 다시 상소하기를,
"삼가 외람되이 미미한 정성을 진달하여 윤허를 바랐었는데, 비지(批旨)를 받들고 보니, 비록 삼령다를 달여서 들이는 것은 허락하셨으나 아직도 건공탕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탕제를 하루에 두 번 드신 나머지에 이제 정지한 지 이미 하루가 지났으니, 신의 타는 듯한 절박한 마음이 다시 어떻겠습니까? 오늘 안에 비록 세 번, 네 번의 상소에 이르더라도 소청을 들어주기 전에는 신이 어찌 감히 심정을 억제하여 중지하겠습니까? 번거롭게 함이 비록 매우 미안하오나 충정(衷情)을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어서 이에 감히 다시 전청(前請)을 거듭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쾌히 유음을 내리시고 즉시 소청을 허락하시어 신의 답답해 하는 정성을 위로해 주시기를 천만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네 글을 보았는데, 80을 바라보는 네 할아비를 민박하게 함이 한결같이 어찌 이에 이르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제 어린 나이에 지극한 정성으로 말미암아 당장 삿갓[笠]을 쓰고 다시 아뢰고자 하니, 네 청을 윤허하겠다. 세 번, 네 번 상소하겠다고 하였는데, 이런 글은 언제 배웠느냐? 바야흐로 자라나는 기운을 조금 억제하는 것이 네 할아비의 바람이다."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여 탕제를 올렸다. 밖에 있는 대신(臺臣)을 모두 체직시키고, 밖에 있는 옥당(玉堂)도 역시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서명신(徐命臣)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득배(李得培)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사간(司諫)으로, 남현로(南玄老)를 헌납(獻納)으로, 정경인(鄭景仁)·이익선(李益烍)을 정언(正言)으로, 정상인(鄭象仁)·정창순(鄭昌順)을 교리(校理)로, 서호수(徐浩修)를 부교리(副校理)로, 서유녕(徐有寧)·이재간(李在簡)을 수찬(修撰)으로, 김상집(金尙集)·홍경안(洪景顔)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제수하였다.

 

승지가 입시하니, 하교하기를,
"윤사국은 불충(不忠)·불효(不孝)하다고 하겠다. 그가 효도를 하지 못하는데 임금이 어찌 후회하랴만, 지난번 그 상소를 보니, 어버이의 나이가 74세라고 하였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마땅히 참작하여 해남현(海南縣)으로 정배하라."
하고, 홍억(洪檍)은 첫 패초(牌招)의 명에 응하여 직무를 잘 수행했다는 것으로 특별히 정배하라는 명을 중지하였다. 전 영상 서지수(徐志修), 전 형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를 아울러 삭직하라 명하였는데, 서지수는 윤광천(尹光天)·윤구연(尹九淵)의 일을 제기하여 아뢰었고, 남태제는 윤광천의 일을 변명했기 때문이다.

 

3월 18일 임오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 남짓이었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하라 명하여, 시강(試講)한 후 지필묵을 상으로 주었다.

 

3월 19일 계미

달이 심후성(心後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황단(皇壇)에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전 영부사 윤동도(尹東度), 전 판부사 김치인(金致仁)·김양택(金陽澤), 전 좌의정 한익모(韓翼謨), 전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을 아울러 서용하고, 김치인·한익모·김상철은 다시 삼공(三公)을 제수하며,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는 판윤(判尹)을 제수하고, 사직(司直) 이사관(李思觀)은 호조 판서를 제수하며, 사직 조돈(趙暾)은 형조 판서를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정항령(鄭恒齡)을 집의(執義)로, 이종영(李宗榮)을 정언(正言)으로, 윤면헌(尹勉憲)을 부응교(副應敎)로, 송영(宋鍈)·이태정(李台鼎)을 장령(掌令)으로, 이지승(李祉承)·홍구서(洪九瑞)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임금이 보여(步輿)로 전설사(典設司) 앞에 나아가 잠시 부복하니,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여 궐내로 들기를 힘써 청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삼사에서 청대 입시하여 ‘오랫동안 습한 땅에 계시면 성체를 상할까 염려된다’ 하여 번갈아 진달하니, 임금이 울면서 하교하기를,
"황조(皇朝)의 망극한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데 갑자기 이날을 당했으니, 저물기를 기다려 돌아가야겠다."
하고는, 유신(儒臣)에게 《명사(明史)》 의종기(毅宗紀)를 읽으라 명하였다. 신시(申時)에 전설사로 들어갔다가 날이 저문 후에 궐내로 돌아왔다. 어공미(御供米)를 내일은 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우승지 이미(李瀰)가 어공미를 감해서는 안 된다고 앙품하니, 하교를 기다렸다가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바야흐로 날씨가 가문 것을 민망히 여겨서였다.

 

3월 20일 갑신

정상순(鄭尙淳)을 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이미 감선(減膳)하였으니, 승지가 반드시 구대(求對)하는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지금까지 조용하니, 신하의 분의(分義)가 있다고 하겠는가? 감선 제조(監膳提調)가 받아들이기를 청하여 그는 직무를 거행하였으니 숙마(熟馬) 1필을 내려 주고, 밤새도록 묵묵히 있었던 예방 승지(禮房承旨)와 하교를 들은 도승지(都承旨)는 서용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상소하고 인죄(引罪)하여 상직(相職)을 해면하기를 비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인하여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영부사 윤동도(尹東度), 판부사 김양택(金陽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차자를 올려 인죄(引罪)하니,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지사(知事)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대우(大禹)의 〈술이〉 나라를 망친다는 경계055)  를 생각하시어 영원히 어온(御醞)을 파하셨다가 〈《서경》 주고(酒誥)에 제사에만 술을 쓰라고 한〉 주왕(周王)056)  의 사주(祀酒)의 훈계를 따라서 경건히 〈제주(祭酒)를〉 회복하기를 고하셨으니, 전후 변통한 지극한 뜻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유지양(柳知養)이 상소한 말은 전혀 우러러 본받지 않았으니, 그 역시 망발입니다. 성상께서 곧바로 처분을 내려 그에 대한 죄로 죄를 주신다면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특히 언관(言官)에게 명하여 억지로 논계(論啓)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전고에 없었던 바로서 크게 후폐와 관계되며, 더욱이 오늘날 후손에게 물려주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의 위노(威怒)가 너무 갑작스럽고, 사기(辭氣)를 지나치게 부리시니, 자못 옛 성인께서 성색(聲色)을 크게 하지 않으신 뜻에 어긋납니다."
하였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고 그 글을 돌려주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환곡을 분(分)·유(留)하는 법을 엄히 하도록 제도에 신칙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3월 21일 을유

영의정 김치인이 상소하여 면직을 비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승지에게 김치인과 함께 오기를 명하니, 즉시 명에 응하여 입시하였다.

 

3월 22일 병술

이육(李堉)을 사간(司諫)으로, 임희증(任希曾)을 지평(持平)으로, 김노순(金魯淳)을 교리(校理)로, 황경원(黃景源)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이섭원(李燮元)을 좌윤(左尹)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우윤(右尹)으로, 조영순(趙榮順)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3월 23일 정해

채위하(蔡緯夏)를 헌납(獻納)으로, 심관지(沈觀之)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춘방(春坊) 입직(入直)이 누구인가를 물으니, 도승지 정상순이 대답하기를,
"이세연(李世演)입니다."
하매, 이세연을 지평으로 특제(特除)하여 먼저 입시하고 뒤에 사은(謝恩)하라 명하였다. 중관(中官)이 이세연의 위패(違牌)를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라. 그가 고집을 부려 오지 않는데 묶어 둘 수는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 이 사람의 이런 마음이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고, 나는 사람을 쓴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평안 감사 박상덕(朴相德)의 장계에 ‘평양부 민가에 불이 나서 5백 12호(戶)나 연소(延燒)되었고, 공해(公廨)와 고사(庫舍)의 곡물이 모조리 탄 것도 역시 많으며 사람 역시 불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진휼하는 일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아니 되겠으니, 청컨대 관향미(管餉米) 5백 12석을 제급(題給)하여 호구마다 나누어 주고, 신역(身役)은 1년을 한하여 견감해 주며, 타 죽은 사람은 특별히 휼전(恤典)을 거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4일 무자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청대하여 입시하니, 영의정 김치인의 입시를 명하였다. 전라 감사 원인손(元仁孫)의 장계를 읽으라 명하였는데, 전주성(全州城) 안에 불이 나서 2천 3백여 호가 불탔으며, 화염이 경기전(慶基殿)에 미치지는 않았으나 어용(御容)은 향교(鄕校)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임금이 신회에게 명하여 급히 향축(香祝)을 받들고 가서 고유(告由)하고 다시 봉안하라 하였다.

 

3월 25일 기축

임금이 명릉(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3월 26일 경인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경조(京兆)의 단자(單子)를 읽건대 고(故) 부사(府使) 김득대(金得大)의 처와 고 판관(判官) 이세담(李世聃)의 처는 나이가 80을 넘거나 혹 80이 차기도 하였다. 아! 그저께 이 단자를 보았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겠는가? 원래 거행하려는 것 중에서 특별히 더 주어 내 뜻을 표시하도록 하라. 고 충신 이봉상(李鳳祥)의 집에는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그 처에게 음식물을 더 주며, 해부로 하여금 존문(存問)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전경 문신 전강(專經文臣殿講)을 시험하였다.

 

3월 28일 임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부교리 서호수(徐浩修)를 전주 선유 어사(全州宣諭御史)로 삼아 전주의 화재를 입은 백성에게 선유하라 명하고, 인하여 쌀 2천 3백 34석을 제급하고 돈 1만 냥을 빌려 줄 것을 명하였는데, 도신(道臣)이 청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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