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8권, 영조 43년 1767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13.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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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갑자

임금이 육상궁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 창의궁(彰義宮)에 들렀는데, 이날은 바로 임금이 경자년071)  에 복제(服制)을 벗고 예궐(詣闕)한 날이었다.

 

판부사 서지수가 상소하여 인죄하니, 온화한 비답을 내려 전유(傳諭)하였다.

 

5월 2일 을축

봉조하 이철보(李喆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기로소(耆老所)의 수직관이 와서 성지(聖旨)를 선포하고 누에고치를 전해 주었습니다. 은사(恩賜)한 물건은 비록 예사로운 포백(布帛)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귀중한 것인데, 더군다나 이 세 그릇의 누에고치는 바로 우리 중궁 전하께서 고례(古禮)를 닦아 친히 잠공(蠶功)을 이룬 나머지의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퇴산(退散)한 자취로서 귀한 반사(頒賜)를 받았고, 또 더군다나 종이 겉봉에 어필(御筆)로써 내린 것이 13자(字)나 되니, 정중하고 정성스러움이 상례(常例)에서 벗어났습니다. 아! 신이 천안(天顔)을 바라보지 못한 지 1년 4개월이 되었는데, 한낱 목숨이 겨우 붙어 있어 모든 생각이 모조리 사라졌으나, 오직 이 견마(犬馬)의 사모하는 마음만이 다 사그러지지 않아서 매양 ‘꿈속에서 임금에게 가까이한다.[夢裏君王近]’라는 구절을 외면서 모르는 사이에 맑은 눈물이 옷깃을 적셨습니다. 일전에 신의 조카 광주 부윤(廣州府尹) 신 이성원(李性源)이 전석(前席)에서 돌아와 자세히 성교를 전하였는데, 보고 싶다는 유시와 잘 조섭하라는 경계의 말씀은 덕의(德意)가 애연하여 집안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무상한 천신(賤臣)을 어찌 족히 기억할 만한 것이 있기에 성상의 정성은 가면 갈수록 더욱 부지런하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어 결초 보은(結草報恩)하려는 마음은 오직 내생(來生)을 기약할 뿐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경의 글을 보니, 경을 만나본 듯하다. 누에고치를 내릴 때에 대략 내 뜻을 전하였는데, 어찌 사례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언 이종영(李宗榮)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목전의 가뭄은 근래에 없던 바로서 기호(畿湖)와 영남(嶺南)은 우물과 연못이 거의 말라서 들판에서의 망망(望望)한 형상과 도로에서의 흉흉한 소리가 우레와 같습니다. 〈하늘의〉 인애(仁愛)하심으로도 경계를 보이시니 실로 이를 믿기 어려우나, 덕(德)을 닦아 재앙을 소멸시키는 것은 오로지 전하께서 어떻게 반성하여 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그윽이 보건대 전하의 근래 정령(政令)과 거조는 오로지 격노하심을 숭상하여 중화(中和)에 흠이 됩니다. 위노(威怒)가 겹치어 조야(朝野)가 창황하고, 불시에 동가(動駕)하여 군병(軍兵)이 전도(顚倒)됩니다. 처분하심이 혹 엄급함을 면치 못하며, 상벌 역시 신중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남쪽에서 온 이래 듣건대 유지양(柳知養)이 상소하자 연충(淵衷)이 격노하여 연일 거둥하시며, 찬배(竄配)가 서로 잇달아 온 조정이 초조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아! 지난번 여러 초선(抄選)들을 처분한 것은 참으로 3백 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만약 머지 않아 회복해서 일찍이 뉘우치셨던들, 어찌 반드시 정후겸(鄭厚謙)의 상소가 있었겠으며 또한 어찌 유지양의 말이 있었겠습니까? 대신(大臣)과 대각이 전후해 진언(進言)하여 바로잡지 못하자, 연소한 신진(新進)이 부득이 상소하였는데, 그 말 때문에 쓰인 것이 아니라 특별히 공의(公議)를 따라서 처분한 것이라고 하면 저 대신(臺臣)이 어찌 말을 하겠습니까? 조정 형상이 공평을 잃은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나라의 빛남을 보니, 왕(王)에게 빈(賓)이 됨이 이롭다.[觀國之光利用賓于王]’라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수많은 왕(王)이 길사(吉士)가 많다.[藹藹王多吉士]’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기왕의 뉘우침을 깊이 밝히시고 먼저 개석(開釋)하는 유시를 내리시며, 전후의 격노하신 윤음을 하나같이 모두 환수하시어 목이 마른 듯한 뜻을 보이시고 선비를 대우하는 정성을 다하신다면, 비록 개석(介石)072)  의 지조를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기꺼이 조정에 나올 것입니다. 혹은 빈사(賓師)의 자리에 두기도 하고, 혹은 보도(輔導)의 직임을 주어, 경석(經席)에서 도를 논하고 주연(胄筵)에서 학문을 강(講)하게 하면, 이는 참으로 상하가 교수(交修)하고 천지가 통태(通泰)073)  하는 기상(氣象)이며 또한 금일의 구재(救災)하는 도리입니다.
또 삼가 듣건대 전 영상(領相)이 윤구연(尹九淵)의 억울함을 말하다가 견삭(譴削)되었다고 합니다. 아! 대신에게 결코 다른 마음이 없음은 성명께서도 이미 허여하신 바이고 온 세상이 또한 알고서 성대하게 태산 북두(泰山北斗)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직 적심(赤心)으로 나라를 위하는 상신(相臣)이 결코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라는 논의는 하지 않았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 그 본정(本情)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원보(元輔)를 물리치는 것을 이처럼 어렵지 않게 하십니까? 옥서(玉署)의 관원은 논사(論思)하는 신하이니, 예로부터 극진히 가려 책임이 가볍지 않은 것입니다.
저 이진복(李鎭復)은 선파(璿派)의 가까운 종족(宗族)이니 청환(淸宦)에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만, 나이가 어린데다가 학문이 거칠고 재능이 맞지 않아서 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실로 배양하는 길이므로, 신은 이제 잠시 개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시종이란 자는 말을 의논하는 반열이어서 만일 흠이나 잘못이 있다면, 무릅쓰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저 심익운(沈翼雲)은 재학(才學)이 걸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고(無故)하다고 할 수 없으니 사람을 논하는 직책은 그에게 있어서 불안할 것이며, 명기(名器)074)  를 더럽혀서는 안되므로 공의(公議)를 마땅히 따라야 하니, 신의 생각에는 개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장오(李章吾) 형제는 처지가 남다른데 탐음(貪淫)스럽고 법을 무시하기를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장오는 10년 동안 금영(禁營)에 있으면서 오로지 사복(私腹)을 살찌우기만 일삼았고, 한 동네의 좌우를 그 집이 절반 이상이나 차지했으며, 근교의 동서에 6, 7채의 큰 집을 지었습니다. 본영(本營)의 주전(鑄錢)과 외읍(外邑)의 둔곡(屯穀)이 반은 개인의 자루로 들어가고, 제도(諸道)의 군포(軍布)를 순전(純錢)으로 받아들여 거친 쌀로 바꾸어서 그 남은 이익을 차지하였습니다. 그가 서곤(西閫)에 있을 때에도 구습(舊習)을 고치지 않아 온 영(營)에 원망이 자자하였고, 열읍이 두려워하여 서쪽에서 오는 소문이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명오(李明吾)는 6년 동안 영덕(盈德)에 있으면서 불법을 저질렀고, 팔선녀(八仙女)의 말은 바로 통인(通引)이 장난삼아 지은 노래인데도 음녀(淫女)라고 말하여 마음대로 뇌물을 받았음은 도신(道臣)이 낸 관문(關文)이나 겸관(兼官)의 사장(査狀)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쓴 채 권농(勸農)하였다는 대답으로 감히 임금을 속였은즉, 그 죄상을 논하면 난형 난제(難兄難弟)라고 할 수 있으니, 유사로 하여금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신이 지난번 엄체(淹滯)된 사람을 떨치게 하라는 한 소장을 올렸었는데, 그때 비국에서 회계하기를, ‘현명하고 재주가 있는 자를 등용하면 어리석고 불초한 자는 저절로 물러간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바꿀 수 없는 논의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으로 수천 명의 적체된 자가 모두 어리석고 불초하여 물러가 있는 것입니까? 해와 달은 치우치게 비추지 않고, 비와 이슬은 땅을 가리지 않습니다. 억울한 기운은 위로 천화(天和)를 해치는 것이니, 다시 묘당에 물어서 갖가지로 강구해 반드시 엄체된 자를 소통할 방도를 생각하여 하늘에 응답하는 실제를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근래에 대각이 적적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때에 이런 상소를 하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곤궐(袞闕)에 있어서는 비록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없지 않으나, 대체는 모두 옳다. 아! 천만 뜻밖에도 늙은 나이에 다시 정사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비록 기력과 마음이 쇠퇴한 가운데라고 하나 내 허물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조급한 한 글자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번에 진달한 바는 만년의 양약(良藥)이라 하겠다. 이미 지난 일을 비록 뒤좇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 오는 일은 어찌 더욱 맹성(猛省)을 더하지 않겠는가?
이진복(李鎭復)에 대해서는 지금 네 소장이 그 사람을 옥성(玉成)075)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구어(句語)가 야비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제 잠시[今姑]’란 두 글자는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니, 어찌 오늘날에 처음으로 시행하겠는가?
심익운(沈翼雲)의 일은 그를 곡호(曲護)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행할 것인지 못할 것인지는 오직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아! 이 사람이 어찌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일을 했겠는가? 지난번 송영(宋鍈)의 계사는 단지 그 아우만을 들었는데, 지금 네 글에서는 그의 형까지 아울러 거론했으니, 비록 현직에 있다 하더라도 한 붓으로 형제를 논박한 것은 이미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이명오의 일을 네 글로 보건대 도신이 이미 조사했다면 풍문은 아닌 듯 싶으나, 임금이 노쇠한 때에는 올바른 것이 아니면 아뢰어서는 안된다. 팔선녀의 칭호가 통인의 노래라고 하였는데, 도리에 어그러짐이 심하다. 네가 지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을 때이나, 어찌 네 글에 수긍이 가겠느냐? 너를 위해 애석하게 여긴다. 그 밖의 일은 이미 체직한 관원을 추론(追論)할 필요가 없다.
이장오의 일은 송영의 계사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였다. 아! 그 사람이 나라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데, 어찌 그렇게 하였겠는가? 장신(將臣)이 된 몸으로 주전(鑄錢)을 과연 그렇게 했다면 어찌 다만 삭판(削版)만 하겠는가? 지난번 ‘청천강(淸川江)’이란 세 글자는 생각이 쇠퇴하지 않았더라면 그 본사(本事)가 저절로 헛되이 되었을 것인데, 내가 헤아린 바 역시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앞으로의 일을 보면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인재는 다른 세대에서 빌려 오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부질없이 방안[牖下]에서 늙어 가고 있음에랴? 내가 항상 깊이 탄식하는 바이다. 그때 비국의 회계(回啓)가 외면으로는 비록 진부한 말인 듯하나, 내면으로는 과연 그럴 이치가 있다. 네가 청한 바는 바로 경장(更張)인데, 엄체된 자를 떨치게 하는 정사는 비록 행할 수 있겠으나, 경장하는 일은 내가 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자(孔夫子)께서 민자건(閔子騫)이 항상 성훈(聖訓)을 외운 것을 칭찬하신 것이다."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전교하기를,
"이장오(李章吾)의 일은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냈고 중곤(重閫)이 되었는데, 이런 불법의 지목을 받았으니, 국체(國體)로 보아 결코 흐리멍덩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 비답에서 윤허하지 않은 것은 형제를 모두 거론함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장오를 잡아다 국문하라."
하였다. 도제조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삼가 대비(臺批)가 내린 것을 보건대 흠앙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종영(李宗榮)은 소활한 신하에 불과하나 성상의 비답이 이러하니, 그 누가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5월 4일 정묘

임금이 각 능전(陵殿)의 단오제(端午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윤시동(尹蓍東)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정존겸(鄭存謙)의 체직을 허락하였는데, 방금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의 직책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故) 판서 서종급(徐宗伋)의 아내에게 특별히 미포(米布)를 하사하였다. 경잠례(耕蠶禮) 후에 나이 80세인 사람에게 미포를 하사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서종급의 처는 ‘미망인(未亡人)이 함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단자(單子)를 올리지 않았는데, 대신(大臣)이 연석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5월 6일 기사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제조 이사관(李思觀)의 체직을 허락하고 이창수(李昌壽)로 대신하라 명하였다.

 

5월 7일 경오

헌납 채위하(蔡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시험삼아 오늘의 대소 신료들을 보시면, 바른말을 하는 풍도를 지니고서 뇌정(雷霆)의 위엄에 흔들리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단지 근일에 윤사국(尹師國)·홍억(洪檍)의 일로 논하더라도 그때에 대신(臺臣)인 자는 말을 할 만하면 말해야 하고 말을 하지 않아야 했으면 말을 하지 말았어야 됩니다. 양사의 대관이 거개 두려워 벌벌 떨면서 감히 좌우에 서지 못하고, 서울에 있는 자도 혹 외방에 있다고 일컬으면서 나오지 않았으며, 향리에 있는 자는 향리에 있다고 일컬으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윤사국을 위하면 전하께 죄를 얻을까 두렵고 홍억을 위하면 대간의 체면이 손상될까 염려하여, 윤사국과 홍억의 중간에 있으면서 한때 구차스레 피하려는 계책을 삼고자 해서였습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이러하니, 큰 일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대신(臺臣)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칙려(飭勵)하고자 한다면 너를 버려 두고 누구를 먼저 하겠는가?’라고 비답하고, 체직을 허락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을 대사헌으로, 박사해(朴師海)를 대사간으로, 이헌묵(李憲默)을 사간(司諫)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掌令)으로, 이보온(李普溫)·이명훈(李命勳)을 지평으로, 송재경(宋載經)을 헌납(獻納)으로, 서유린(徐有隣)·이규위(李奎緯)를 정언(正言)으로, 이적보(李迪輔)를 집의(執義)로, 민홍렬(閔弘烈)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송형중(宋瑩中)을 특별히 예조 참판에 제수(除授)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송형중에게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니, 살피지 못하고서 승품(陞品)한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옛날에도 동엽(桐葉)의 희롱076)  이 있었다."
하고는, 마침내 전의 하교에 따라 승품하여 발탁한 것이다.

 

전 동돈녕부사(同敦寧府事) 김시교(金時敎)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들의 시조(始祖)인 고려(高麗)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은 태사 권행(權幸), 태사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조에 큰 훈로(勳勞)가 있어 안동부(安東府)에서 묘식(廟食)하고 있어 백세(百世) 동안 그 위차(位次)를 바꾸지 않고 작헌(酌獻)하는 데 스스로 일정한 차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권씨(權氏)의 자손들이 억지로 그릇된 의논을 창작(創作)해 내어 권공의 덕(德)이 두 공보다 우월하다고 하여 항상 행하던 예를 마음대로 고쳐 마침내 제2위 중앙에 있던 권태사에게 차례를 건너뛰어 먼저 헌작하였으니, 일의 체면이 전도되고 어진 백성들이 못내 한탄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신의 족조(族祖) 고(故)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신 김상헌(金尙憲)이 고 참판 권태일(權泰一)에게 편지를 보내어 논변한 것이 매우 자세하며, 옛날 선조(先朝) 임술년077)  에 신의 할아버지 고 돈녕 도정(敦寧都正) 신 김수일(金壽一)이 상소하여 첨지(僉知) 권열(權說)과 서로 논변하였습니다. 그때에 예당(禮堂)이 조목을 들어 회계하니, 우리 숙종 대왕께서 특별히 처분을 내려 신들의 시조를 수향(首享)으로 삼아 먼저 헌작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사년078)  에 이르러 권유(權愈) 등이 환설(幻說)을 상소하고 역적 민암(閔黯)이 또 종백(宗伯)079)  으로서 꾸며서 복계(覆啓)하여, 마침내 이미 바로 된 예로 하여금 다시 잘못을 답습하는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심지어 묘비(廟碑)는 ‘권태사묘정비(權太師廟庭碑)’라 쓰고 제축(祭祝)은 ‘몇대손 헌작’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한 고을의 조두(俎豆)하는 곳이요, 또 공전(公田)을 특별히 내린 전례(典禮)가 있어 체계가 자별한데, 천년 가까이 사민(士民)이 공적으로 받들던 사원을 갑자기 변경하여 권씨 성들이 독단하는 사묘(私廟)를 삼았으니, 잘못된 일치고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고 판서 권이진(權以鎭)은 비록 그 자손 중의 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본부에 부임했을 때에 이런 잘못된 풍습을 보고는 축연히 부끄럽고 두려워하여 즉시 첩(帖)을 내려 계칙(戒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권씨 성이 마음대로 공묘(公廟)를 변경하여 사묘(私廟)로 삼았으니, 함께 향사(享祀)하는 뜻을 모조리 잃게 되었고, 축문에 손(孫)이라고 일컫는 데에 이르러서는 예절과 사체가 당초 사당을 세운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김씨·장씨 두 태사(太師)가 어찌 사리(事理)에 어긋난 제사를 기꺼이 흠향하겠으며, 이미 기꺼이 함께 흠향하지 않는다면 우리 권 태사 역시 어찌 기꺼이 홀로 흠향하겠는가? 그 예의(禮義)에 있어서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실로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인데도 여러 권씨들은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병오년080)   봄에 신들이 여러 권씨들과 더불어 각기 변소(辨疏)를 진달하여 해부(該府)로 하여금 품재(稟裁)하라는 비답을 받았으나, 해조에서 복계를 아직껏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해조로 하여금 속히 회계(回啓)하게 하고 인하여 바로잡아 주소서."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침나절 기분(氣分)이 조금 나았는데, 또 세 태사(太師)의 싸움을 만나게 되었다."
하고, 전교하기를,
"무릇 자손된 자는 그 조상을 귀히 여기고 옛것을 존숭하면 되는 것이지, 어찌 한 헌작의 앞뒤를 가지고 쟁변할 것이 있겠는가? 머리가 흰 늘그막에 아침에는 김씨의 상소에 수답(酬答)해야 하고 저녁에는 권씨의 상소에 수답하려니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그 글을 돌려주어라."
하였다.

 

5월 9일 임신

임금이 헌릉(獻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5월 10일 계유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황명(皇明) 효릉(孝陵)의 기신(忌辰)에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승지에게 황단(皇壇)을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다. 내국 도제조 김상철(金尙喆)의 체직을 허락하고 김양택(金陽澤)으로 대신하였다.

 

5월 11일 갑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장령 박규수(朴奎壽)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궁료(宮僚)를 가리고 언로(言路)를 열기를 진계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5월 14일 정축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서북 부료 군관(西北付料軍官)을 시사(試射)하였다. 수원(水原)에 가서 적간(摘奸)한 선전관(宣傳官)이 회주(回奏)하기를,
"마군(馬軍)으로서 인마(人馬)가 모두 없는 자가 8명이고, 등자(鐙子)081)  가 없는 자가 4명이며, 새끼줄로 등자를 맨 자가 11명이요, 활이 없는 자가 1명이며, 편곤(鞭棍)이 없는 자가 4명이요, 통개(筒介)가 없는 자가 1명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놀랍구나."
하고, 전교하기를,
"수원(水原)의 마병(馬兵)은 서울의 훈련 도감(訓鍊都監)과 같은데, 근래에 허술함이 막심하다고 하기 때문에 선전관으로 하여금 적간하게 하였더니, 비단 점고에 빠진 자가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새끼로 등자를 맨 자가 그 얼마인지 알지 못하며 또 말이 없는 자와 편곤이 없는 자까지 있으니, 놀라운 일치고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전 부사 이미(李瀰)·홍지해(洪趾海)와 시임 부사(時任府使) 이명식(李命植)을 먼저 파직한 후, 잡아오도록 하라. 별장(別將)이 된 몸으로 검칙하지 못하였으니, 나무 인형과 무엇이 다른가? 훈장(訓將)으로 하여금 사장(沙場)에서 조리돌린 후에 곤장 열 대를 치라."
하고, 수원 부사의 비국(備局) 천망(薦望)을 지체시켰다 하여 비변사 낭청을 병조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하였다. 삼상(三相)이 차자를 을려 견책을 청하니, 신칙한 데 불과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조제태(趙濟泰)를 수원 부사로, 서명응(徐命膺)을 대사헌으로, 이규징(李奎徵)·이심해(李心海)를 장령으로, 이겸빈(李謙彬)을 지평으로, 서유원(徐有元)을 헌납으로, 조창규(趙昌逵)·안성빈(安聖彬)을 정언으로, 김재록(金載祿)을 사서(司書)로, 유언호(兪彦鎬)를 부교리로, 원중회(元重會)를 평안 병사로 삼았다. 재차 정사(政事)에서 이정렬(李廷烈)·신오청(申五淸)을 장령으로, 신상권(申尙權)·송제로(宋濟魯)를 지평으로, 윤득양(尹得養)을 대사헌으로, 구상(具庠)을 헌납으로, 이명훈(李命勳)을 정언으로 삼았다. 여러 대간이 외방에 있는 것으로써 전관(銓官)을 추고하고, 다시 개정(開政)하기를 명하였다.

 

5월 15일 무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원점 유생(圓點儒生)의 시강(試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김봉현(金鳳顯)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5월 16일 기묘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행행하여 금군(禁軍)·훈국(訓局)·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기사(騎士)에게 편곤(鞭棍)을 시예(試藝)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편곤에서 여섯 번을 맞힌 홍기창(洪起昌)·최중태(崔重泰)에게 가자하기를 명하였다. 이동백(李東白)에게 적량 첨사(赤梁僉使)를 제수하였다. 기백(畿伯)과 총융사(摠戎使)를 잡아들이라 명하여, 수원 마군의 일로써 엄히 신칙하고 나출(拿出)하였다. 환궁할 때에 김포(金浦) 백성 가운데 범필(犯蹕)한 자가 있어, 응교 서명선(徐命善) 등이 청대하여 고훤 도사(考喧都事)의 정배(定配)를 청하고, 협련장(挾輦將)은 군율(軍律)에 의해 시행하기를 청하며, 범필한 사람은 형을 가하여 멀리 정배하기를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금오 당상이 수원의 전 부사 홍지해(洪趾海)·이미(李瀰)·이명식(李命植)의 공초를 초하여 입시하니, 홍지해는 나주목(羅州牧)으로, 이미는 진잠현(鎭岑縣)으로, 이명식은 울산부(蔚山府)로 충군(充軍)하라 명하고, 이조 참판 조엄(趙曮)과 참의 홍낙순(洪樂純)은 삭직을 명하였는데, 밤이 깊어 위패(違牌)한 것 때문이었다.

 

5월 17일 경진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참판으로, 윤시동(尹蓍東)을 이조 참의로, 임해(任瑎)를 장령으로, 송담(宋霮)을 지평으로, 이수일(李秀逸)을 헌납으로 삼았다.

 

임금이 모화관에 행행하여 무예(武藝)를 시험하여, 병판(兵判)과 삼군문 대장에게는 각기 표피(豹皮) 1령(令)씩을 주고, 용호장(龍虎將)에게는 호피(虎皮) 1령을 주었다. 금군장(禁軍將) 한광제(韓光濟)에게 창성 현감(昌城縣監)을 특제하였는데, 한광제는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의 13대손이며, 기사(騎射)에 정숙(精熟)하므로 불러서 묻고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훈련 대장 정여직(鄭汝稷)의 파직을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이 어제 향민(鄕民)이 범필(犯蹕)한 일로 인해 연석에서 죄주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5월 18일 신사

정언 이명훈(李命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람을 등용하는 한 부분은 실로 나라의 흥망이 관련되는 것이어서, 청현(淸顯)의 자리와 명덕(命德)의 벼슬은 더욱 가벼이 함부로 제수해서는 안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은(李溵)은 부잣집에서 생장하였는데, 본디 지식이 없고 속에는 탐욕이 치열하여 여러가지 더러운 행동이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기에 미쳐 갑자기 재열(宰列)에 올라 전형(銓衡)에 참좌(參佐)하고 묘모(廟謨)에 참여하였으니, 이미 물정(物情)082)  을 놀라게 하였고 명기(名器)를 더럽혔습니다. 일찍이 해서(海西)를 안찰하면서는 추잡한 비방이 낭자하였고 순행하는 길에서 백성들의 소첩(訴牒)에 스스로 제사(題辭)를 쓰지 못해 싣고서 영(營)으로 왔으니, 보고 듣는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보장(保障)의 중임을 맡고 있으면서 보효(報效)할 책임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탐욕만을 일삼았음은 낱낱이 다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비석(碑石) 50여 개를 벌취(伐取)하여 뜨고 뚫는 즈음에 오로지 연호 민정(煙戶民丁)을 사용하였고, 갈고 다듬는 공역(公役)은 심지어 선무 군관(選武軍官)에게까지 미쳤으므로,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고 전파하는 소문이 시끄럽게 떠들썩하였습니다. 재신(宰臣)인 몸으로서 우리 성상께서 군민(軍民)을 돌보시는 성대한 뜻을 본받지 않고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유수(留守)의 진무(鎭撫)하는 도리가 이래야 하겠습니까?
전라 감사 원인손(元仁孫)은 사람됨이 사악하고 몸가짐이 비천하여, 남몰래 꾸미는 일은 말을 만들어 사람을 해치는 데에 벗어나지 않았고,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변명하며 번번이 추악한 말로 스스로 맹세하였습니다. 복식(服飾)과 행동이 전혀 사대부의 모양이 없고, 정신과 의태(意態)는 오직 청관(淸官)·미직(美職)에만 있으며, 방정맞고 경박하여 바라보기에 꼴같잖아서 저자 거리의 아이들까지도 모두 비웃고 있습니다. 문학(文學)과 재주가 별로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니, 주당(籌堂)의 유사(有司)와 옥서(玉署)의 장석(長席)이 어찌 일찍이 털끝만큼도 방불할까마는 좌우로 거머쥐어 오직 제멋대로 하였습니다. 비록 전조(銓曹)의 주의(注擬)로 말하더라도 한번의 정사(政事)와 한 망(望)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앞뒤로 돌아보며 곳에 따라 흔들렸습니다. 웅번(雄藩)을 차지하기에 이르러서는 암열(暗劣)함이 모조리 드러나 스스로 위망(威望)이 진압하지 못하고 시조(施措)가 압복(壓服)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오로지 명예 낚는 것만을 일삼았으며, 영(營)에 도착한 초두에 창고에 남아 있던 전목(錢木)을 까닭없이 영속(營屬)에게 흩어 빌려 주어 부고(府庫)가 거의 탕갈되기에 이르고, 위미(委靡)됨이 극단에 다다라 수습할 수가 없으니, 이 역시 나라의 작은 우려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는 모두 견척(譴斥)을 가해 개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니, 하교하기를,
"아! 백수(白首)의 늙은 나이에 한결같은 마음이 종사와 국가에 있는데, 여러 이목지신(耳目之臣)의 글에 조란(鳥卵)을 아끼듯이 하는 뜻이 있으니, 더욱 부장(扶奬)함이 마땅하다. 지난번 이종영(李宗榮)의 비답으로 보더라도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연소한 자가 새로 대간에 들어와서 무슨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억제하겠는가마는, 이것은 그렇지 않다. 하나는 비석을 50개 만들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전목(錢木)을 흩어 빌려 주었다는 것인데, 이 두 가지 일이 허사(虛事)로 돌아갔으니 그밖의 일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옛날 사람이 보궤 불식(簠簋不飾)083)  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각박한 말을 하는가? 아! 그 두 신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충성을 하고 있었으나 세상에 부합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 또 그 아비를 본받아서 늙은 나를 섬기는데, 어찌 나라를 등지고 임금을 저버리겠는가? 그 상소를 보니, 역시 구습(舊習)의 남은 투식이다. 내가 비록 늙었으나 매경(魅鏡)이 이마에 비추인다면, 어찌 감히 도피하겠는가? 그 할아비를 돌아보아 비록 보첩(譜牒)에서 빼버리지 않았더라도 청선(淸選)을 어찌 말하겠는가? 그 상소를 돌려주고 영원히 시종안(侍從案)에서 지워버리라."
하고, 인하여 이명훈의 입시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대직(臺職)을 체직하였으니, 너는 대신(臺臣)이 아니다. 조목에 따라 물어 보더라도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백성들의 소첩(訴牒)에 스스로 제사(題辭)를 쓰지 못했다 하였고 빗돌 캐낸 것이 자그마치 50개나 된다고 하였는데, 그 일을 과연 목견하였는가?"
하니, 이명훈이 말하기를,
"단지 풍문에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척(咫尺)의 전석(前席)에서 감히 곧바로 진달하지 않고 오히려 풍문을 핑계대는가? 풍문을 어찌 족히 빙신(憑信)하겠는가? 비석이 한두 개라고 말하면 가하거니와, 50여 개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원인손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스스로 맹세를 하였고 전목(錢木)을 흩어 빌려 주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가?"
하니, 이명훈이 말하기를,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과 전주(全州) 사람에게서 들었으니, 어찌 목견한 것과 다르겠습니까?"
하였다. 이명훈의 숙부(叔父)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의 입시를 명하매, 이연이 앞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손을 잡고 오열(嗚咽)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우리 종족(宗族)에서 이처럼 경박하고 조경(躁競)하는 무리가 있을 줄을 생각하였겠는가?"
하니, 이연이 눈물을 흘리고 이명훈도 또한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명훈이 이제 비로소 후회하는 마음이 있으니, 바야흐로 자라는 것을 아끼는 뜻으로써 비록 보첩에서 빼지는 않겠으나, 지금 이후에는 두 신하가 모함을 입은 것은 스스로 판별될 것이다. 어찌 버티고 승강이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5월 19일 임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고 종신(宗臣)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은 바로 목릉(穆陵)의 왕손(王孫)으로 나이가 90을 넘도록 충성심이 빛났음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찌 오늘에 그 손자가 본분(本分)을 잊어버리고 밖으로 치달을 줄을 뜻하였겠는가? 어제 하교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밤중에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회포를 풀겠는가?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오늘 안에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전 정언(正言) 임정원(林鼎遠)에게 직첩을 주어 서용하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거센 바람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난리를 겪어야 충성(忠誠)된 신하를 알 수 있다. 아직도 지금껏 잊지 못한 자는 오직 임석헌(林錫憲)이니, 그 아들을 주(註)를 달아서 조용(調用)하라."
하였는데, 임석헌은 바로 임정원의 숙부이다.

 

성천주(成天柱)를 승지로 삼았다.

 

5월 20일 계미

장령 신오청(申五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그윽이 보건대 우리 전하께서 검소함을 숭상하는 덕은 백왕(百王) 가운데서 으뜸이시어 무늬 있는 비단을 금하고 익제(弋綈)084)  를 쓰는 검소함은 후손에게 물려주고 백세(百世)를 풍동(風動)시키기에 족합니다. 그러나 삼가 보건대 북청(北靑)의 공포(貢布)가 전의 품질과 다르다는 것으로써 하교가 베의 너비와 거친 데에 미치셨으니, 진실로 성상의 뜻이 베에 있지 않음은 알겠습니다만, 애석한 점이 있습니다. 혹 이런 하교가 한번 반포되면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우리 전하께서 국체(國體)를 보존하고자 하신 것은 알지 못하고서 이에 말하기를, ‘베가 거칠어서 그렇다.’고 할 것이니, 신은 못내 애석하게 여깁니다. 빨리 환수하라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초의 초식(草衣草食)하겠다는 전교를 50세 전에 이미 유시하였는데, 더군다나 80세를 바라보는 늘그막이겠는가? 이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데, 어찌 가는 베를 구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는 3백 년 동안 공납(貢納)해 오던 것이며, 이번 북청에서 바친 것도 역시 3백 년 동안에 없던 바였다. 하교로 유시한 것은 베를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국체를 위한 것이었으니, 만약 ‘검소함을 숭상하던 마음이 조금 쇠하였다.’ 하고 말한다면, 내가 마땅히 올바른 말에 절을 하겠다. 그런데 강시현(姜始顯)을 신칙하라는 명을 도리어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분의(分義)인가? 본직의 체직을 허락하여 말세를 격려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하교하기를,
"북청의 공포는 바로 의대(衣襨) 감인데, 금년에 공납한 바는 매우 거칠다. 북청 부사 강시현에게 서용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기 때문에, 신오청이 상소하여 논한 것이다.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어가(御駕)를 따르는 군병(軍兵)을 시사(試射)하고 시상하였다. 연신(筵臣)이 선정(先正) 성혼(成渾)의 사판(祠版)이 입성하였다고 앙달하니, 선정(先正) 이이(李珥)의 예에 따라 도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전 훈장(訓將) 정여직(鄭汝稷)을 서용하여 다시 장임(將任)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법성창(法聖倉)의 조선(漕船) 20척이 파선되었는데, 고의로 파선시켰을 염려가 없지 않다면서 엄히 조사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을 것을 청하니, 해당 첨사(僉使)를 〈조선(漕船)을〉 영솔해 운반하기를 기다려 나문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무신(武臣) 가운데 잘 달리는 말을 둔 자가 전혀 없다고 하면서 각 영에 신칙하기를 청하니, 장관(將官)으로서 말이 없는 자는 적발되는 대로 초기(草記)하여 태거(汰去)하라고 명하였다. 김치인이, 선정신 이이(李珥)의 봉사손(奉祀孫) 이인림(李仁霖)이 방금 안기 찰방(安奇察訪)으로 있어 사판(祠版)을 받들고 가지 못한다고 하여 전조(銓曹)에 분부하여 한 고을 수령에 차제(差除)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선정이 아들이 없어 서자(庶子)가 승적(承嫡)하였으나, 그 봉사손을 대대로 녹용함에 있어 교관(敎官)이나 금부 도사(禁府都事)는 모두 구애되지 않게 하였으니, 대개 큰 현인의 적통을 이을 자손은 다른 사람과 다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전관(銓官)이 범연하게 차례에 따라 이인림을 찰방으로 천전(遷轉)시켰는데, 자못 조정에서 관향(官享)으로 향화(香火)를 받들도록 한 뜻이 아니기 때문에 대신이 연석에서 아뢴 것이었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에게 한어(漢語) 강독을 행하여 순통(純通)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불통(不通)한 사람은 금추(禁推)하였다. 또 역관(譯官)의 진강(進講)을 명하였는데, 불통이 많으므로 본원(本院)에 모아 잘 왼 후에 아뢰도록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전수음(前受音)으로 〈《소학》 명륜편(明倫篇)에〉 ‘부모와 구고의 처소에 있어서[在父母舅姑之所]’에서부터 ‘다 이 예를 따른다.[共帥時]’까지 읽고 또 신수음(新受音)으로 읽기를 마쳤는데, 상번·하번이 대략 글의 뜻을 진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의금(衣衾)의 안쪽이 보이지 않게 하고 가래침과 콧물을 감히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 잗달은 데 가까운 듯하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니, 이에 학문을 하는 방도를 볼 수 있다."
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무신(武臣)을 시강하였다. 선전관 이인빈(李仁彬)이 연소자로서 능통하다 하여 후궁(帿弓) 하나를 하사하고, 불통한 사람은 입직(入直)케 하여 능통한 후 초기(草記)하여 체직(替直)하도록 하였다.

 

5월 22일 을유

내국에서 입시하니, 유신(儒臣)도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에 나누어 준 누에씨가 거의 모두 나왔는가?"
하니, 부수찬 이재간(李在簡)이 말하기를,
"지금은 모두 나방[蛾]이 생겼습니다."
하였고, 도승지 성천주(成天柱)가 말하기를,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 것이 북채에 따라 북[鼓]이 울리는 것보다 빠릅니다. 옛날에 누에씨를 저장하였다가 누에고치를 받아가는 의식이 있었는데, 바로 제왕의 성대한 의절(義節)이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 글이 어디에 실려 있는가?"
하니, 성천주가 말하기를,
"《주례(周禮)》에 실려 있습니다."
하매, 유신에게 상고하여 가지고 들어오라 명하였다. 성천주가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누에씨에도 절차가 있는가?"
하니, 성천주가 말하기를,
"단지 욕천(浴川)이란 글만 있습니다."
하였고, 이재간이 말하기를,
"친잠(親蠶)은 인군(人君)이 마땅히 친히 할 바가 아니나, 반드시 피변(皮弁)차림으로 하는 것은 역시 왕후(王后)와 함께 씨를 보관하였다가 종자를 바치는 뜻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왕후가 친경(親耕)하는 일과 상관이 없는데도 반드시 씨앗을 보관하는 것은 자성(粢盛)을 중히 여기는 뜻이며, 임금이 누에 치는 일과 상관이 없는데도 반드시 시잠(視蠶)을 하는 것은 역시 현담(玄紞)을 중히 여기는 뜻이다. 이런 의문(儀文)을 마땅히 갖추어야 하니, 지신사(知申事)는 이 전교를 가지고 시임·원임 대신에게 물어서 내일 아침 입진 때 와서 아뢰라."
하였다.

 

5월 23일 병술

임금이 건원릉(健元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유신에게 《예기(禮記)》를 가지고 입시하라 명하고, 봉조하(奉朝賀) 홍계희(洪啓禧)에게 명하여 여러 예조 당상과 함께 수맥의주(受麥儀註)를 교검(校檢)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친경은 열조(列朝)에서 이미 행하였으나, 관예(觀刈)에 이르러서는 우리 나라에는 이것이 없으므로 감히 황명(皇明) 선종(宣宗)의 고사를 이끌어 행한 것이다. 오늘날에 임오년085)  ·을유년086)   양년의 예에 의해서 수맥(受麥)하는 일을 하명하였고, 지신사(知申事)의 아룀을 인하여 헌종(獻種)·장종(藏種)의 일을 유신으로 하여금 《주례》와 《예기》를 널리 상고하게 하여 이에 과연 고례(古禮)가 있었음을 알았다. 이번의 친경·친잠은 바로 3백 년 만에 두 번 있는 일이니, 의문(儀文)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친잠의주는 《속오례의(續五禮儀)》에 추록(追錄)되어 있으니, 이미 상고한 후에는 고례를 마땅히 회복하게 된다. 이로써 친경을 미루어 보면, 장종(藏種)은 바로 이때이고 헌종(獻種)은 명년 봄에 하는 일이다. 친잠은 바로 궁중(宮中)의 일이기 때문에 누에고치를 보관한다는 글이 없고 단지 종자를 물에 씻는 일만 있는데, 이미 종자를 씻는다면 누에고치를 보관하는 것은 저절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또 《예기》의 누에고치를 바치는 의례로써 보건대 임금과 왕후(王后)가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서로 함께 하는 것이다. 친경·친잠 후에 임금이 보리[麥]를 받고, 왕후가 누에고치를 받는 것은 그 뜻이 한가지이다. 《주례》는 주공(周公)이 지은 것인데, 아! 주공이 아니면 어찌 이런 예(禮)가 있었겠는가? 이는 바로 물을 담아도 새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 그 임금은 종자를 보관하고 그 왕후는 누에고치를 보는 것이니, 어찌 한갓 의문(儀文)을 위해서이겠으며, 또 어찌 구경거리를 위해서이겠는가? 이는 바로 자성(粢盛)을 중히 하고 제사를 중히 하는 뜻이며, 또 백성들에게 농상(農桑)의 중요함을 보이려는 뜻이다. 아! 80세를 바라보는 늘그막에 이에 3백 년 만에 성대한 일을 좇아서 삼가 이 예를 행하니, 의문이 마땅히 갖추어져야 한다. 헌종(獻種)과 욕잠(浴蠶)은 비록 명년에 해야 할 일이나, 종자를 보관하고 누에고치를 보는 것은 바로 오늘의 일이다. 이번에 내가 마땅히 보리를 받을 것이며, 내전(內殿)도 마땅히 누에고치를 받아야 한다. 의주를 장차 하교할 것이니, 이로써 우선 반포하라."
하였다.

 

5월 24일 정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의주(儀註)의 일을 여러 신하에게 물어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였는데, 병조 판서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이미 친경하였으니, 마땅히 장종(藏種)의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정훙순(鄭弘淳)이 말하기를,
"예의(禮儀)에는 금성 옥진(金聲玉振)이 있는데, 이는 종시(終始)의 조리(條理)입니다."
하였다. 내국 제조 이창수(李昌壽)의 체직을 허락하고, 행 사직(行司直) 조명정(趙明鼎)으로 대신하였다.

 

유신에게 《소학지남(小學指南)》을 가지고 입시하여, 윤독(輪讀)하라고 명하였다.

 

5월 25일 무자

임금이 저경궁(儲慶宮)과 육상궁(毓祥宮)의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쓸 향을 숭정전 뜰에서 친히 전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여 《소학(小學)》을 강하니, 상·하번(上下番)이 글의 뜻을 대략 진달하였다. 왕세손에게 궁료(宮僚)를 거느리고 입시하여 《시전(詩傳)》 절남산장(節南山章)을 강하라 명하고, 또 정월장(正月章)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까마귀의 자웅(雌雄)을 알겠는가? [誰知烏之雌雄]’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소인(小人)이 모두 스스로 성인(聖人)이라 하기 때문에 마치 까마귀를 구별하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새는 말하지 않고 반드시 까마귀를 일컬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모든 새의 자웅은 다 구별하기가 쉬우나, 오직 까마귀는 검은 바탕이어서 구별하기가 어려운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혁혁(赫赫)한 종주(宗周)를 포사(褒姒)087)  가 망친다.[赫赫宗周褒姒威之]’라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왕세손이 답하기를,
"이는 종주가 이미 멸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포사 때문에 종주가 장차 멸망하기에 이르른다는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포사의 허물인가? 유왕(幽王)의 허물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비록 백 명의 포사가 있다 하더라도 만약 유왕이 아니라면 포사가 어떻게 종주를 멸망시키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저 높은 남산(南山)에 바위가 우뚝하네.[節彼南山維石巖巖]’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바위가 쌓인 모습으로 사윤(師尹)088)  의 위망(位望)이 아주 성한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대답한 바가 좋았다."
하였다.

 

5월 26일 기축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보리를 받았는데, 왕세손이 시좌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어제(御製)를 써서 내리게 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즉석에서 화답하여 올리라 명하여 서첩을 만들어서 어보(御寶)를 찍어 나누어 주었다. 전교하기를,
"오늘의 이 일은 몇 천년 만에 다시 행하는 일이니,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의 가벼운 죄수를 오늘 안으로 석방하고, 예조 판서 이창수(李昌壽), 호조 판서 정홍순(鄭弘淳), 도승지 성천주(成天柱), 봉조하 홍계희(洪啓禧)에게 각기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사급하라."
하고, 홍지해(洪趾海)·이미(李瀰)·이명식(李命植)의 석방(釋放)을 명하였는데, 홍계희를 도와 《의주(儀註)》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5월 27일 경인

이영중(李永中)을 집의(執義)로, 신상권(申尙權)을 장령으로, 송덕상(宋德相)·박사륜(朴師崙)을 지평(持平)으로, 황간(黃榦)을 필선(弼善)으로, 황경원(黃景源)을 대사헌으로, 이시건(李蓍建)을 대사간으로, 정창성(鄭昌聖)을 응교(應敎)로, 조엄(趙曮)을 호조 참판으로, 이득종(李得宗)을 형조 참판으로, 윤급(尹汲)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삼았다.

 

강화 유수 이은(李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재식(才識)이 가장 남의 아래에 있으나 이력(履歷)이 남보다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여 분수에 넘친 것을 신도 스스로 알고 있으니, 전패(顚沛)가 올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지난번에 사람의 말이 또 나왔는데, 종이에 가득히 나열해 있어 읽다가 얼굴이 붉어졌으니, 아! 너무나 심합니다. 다행히 천감(天鑑)이 밝게 보시고 남김없이 굽어 살피시어 생각이 선신(先臣)에게까지 미치고 은유(恩諭)가 정중하셨으니, 비록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게 하더라도 이에서 어찌 더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한 편(篇)에서 성토한 죄가 지극히 낭자하여 혹은 ‘탐욕스럽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추잡한 비방이 있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백성들의 소첩(訴牒)에 스스로 제사(題辭)를 쓰지 못한다.’라고까지 말하면서도 유독 무슨 일이 탐욕스럽고 추잡하였는지는 말하지 않고 한갓 추하고 더럽다는 지목만을 떠벌려 구덩이에 빠뜨리려고 하였으니, 오직 웃으면서 변명하지 않고 〈얼굴에 뱉은〉 침을 씻으라는 경계를 간직할 뿐입니다. 그 맨끝에서 죄안을 삼은 것은 바로 비석을 채취(採取)했다는 한 가지 일인데, 50개라는 설은 아주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받지 못할 것이 애석합니다. 비석을 채취한 일은 신이 과연 있었으니, 천일(天日)이 위에 있는데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신의 고조(高祖)·증조(曾祖) 두 할아버지의 묘에 표(表)만 있고 갈(碣)이 없었는데, 신이 다행히 은혜를 입어서 돌이 나오는 곳에 부임하게 되어 돌을 떠서 비석을 만든 것입니다. 이미 나라의 금법(禁法)이 없었고 선배 관원이 이 땅에서 선영의 비를 만든 자가 전후에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만, 역시 이로써 누(累)를 입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늠료(廩料)를 덜어서 도모하였는데, 이제 말을 한 자가 또한 이로써 신의 죄를 삼는다면, 신은 본디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자그만치 50개에 이르러서는 신이 감히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의 형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무릇 인가(人家)에서 돌을 채취하는 자는 문득 강도(江都)에서 가져오는데, 강도에서 나오는 돌을 또한 마땅히 신에게 죄를 돌리겠습니까? 연호군(煙戶軍)·선무군(選武軍)을 동원했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신이 대소 공역(公役)에도 모두 사람을 고용해서 하고 있는데, 유독 사적인 일에만 도리어 백성을 부리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강도에는 본래 선무군이란 명색(名色)이 없는데,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함이 이미 이와 같으니, 적은 것을 많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이 족히 괴이하겠습니까? 몸과 이름이 욕되어 스스로 정성을 다하여 봉공(奉公)할 길이 없으니, 관직의 거취는 처음부터 논할 바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먼저 신의 직명(職名)을 체차하고, 인하여 전리(田里)로 내치기를 허락하시어 여생(餘生)을 보전하는 은택을 이루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뜬소문을 듣고 사람을 논박한 사람이 전후하여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마는, 어찌 이명훈(李命勳) 같은 자가 있었겠는가? 50개의 비석을 채취했다는 말은 경이 비록 구족(九族)을 다하더라도 채취한 돌이 어찌 50개에 이르겠는가? 더군다나 본부에는 이미 선무 군관(選武軍官)이 없으니, 이 역시 ‘털이 장차 어디에 붙겠느냐089)  ?’는 격이다. 그러나 내가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그가 어찌 한갓 선파(璿派)일 뿐만이겠는가? 이 사람이 누구의 손자인가? 그 임금의 고심(苦心)을 본받지 않고, 또 그의 할아버지를 본받지 않고서 이처럼 어긋나는 일을 하였다. 내가 만약 돈어(豚魚)090)  를 감동시키는 정성이 있었다면, 이명훈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이것이 내가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이미 통촉하고 있는데 경에게 무슨 혐의쩍은 일이 있겠는가? 경은 너무 과히 사양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과 예조 당상이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의 예를 이룬 후에 고묘(告廟)·진하(陳賀)하기를 번갈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에 고하고 아래로 반포하는 절차는 실로 그만둘 수 없다."
하고, 전교하기를,
"내가 진하(陳賀)에 대해서는 마음이 금석(金石)과 같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비록 청하더라도 전후해서 굳게 거절하였었다. 그러나 친경·친잠은 나라의 근본이다. 친경·친잠은 시조리(始條理)이고, 장종(藏種)·수견(受繭)은 종조리(終條理)인데, 어찌 금년 하루에 이 예를 겸하여 행할 줄을 뜻하였으랴? 장종은 자성(粢盛)을 위한 것이며 수견은 현담(玄紞)을 중히 여겨서이다. 아! 친경·친잠을 함께 행한 것은 3백 년에 두 번 있게 된 일이요, 장종·수견 역시 몇 천년 만에 처음으로 행한 예이다. 이미 이 전례(典禮)를 행했으니, 세월이 흘러가는 데에 맡겨 둔다면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이겠는가? 처음에는 삭제(朔祭)에서 겸하여 고유하고자 하였다. 아! 다음달에 무슨 마음으로 하례를 받겠는가? 또 이미 달을 넘긴다면,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마땅히 29일 첫새벽에 먼저 묘사(廟社)에 고유(告由)하고, 그날 전(殿)에 임하여 중외에 반시(頒示)하겠으니,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휘령전(徽寧殿)의 고유도 일체로 거행하라. 당일에 내전(內殿)의 하례(賀禮) 역시 전례에 의해서 하고, 세손(世孫)이 백관을 거느리고 예를 행하되 수하(受賀)는 그만두라. 반사(頒赦)와 백관의 가자(加資) 등의 절차는 의식(儀式)대로 거행하고, 경과(慶科) 역시 정시(庭試)로 설행하되 알성(謁聖)을 겸행하라."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판부사 서지수(徐志修)에게 돈유(敦諭)하여 들어오도록 하고, 참반(參班)할 때에 직명(職名)이 없는 자는 2품 이상의 당상·당하를 물론하고 해조로 하여금 일체 군직(軍職)에 부치게 하였다.

 

5월 28일 신묘

임금이 태묘의 고유제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하였다.

 

5월 29일 임진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하였다. 【반사문(頒赦文)은 친경조(親耕條)에 보인다.】


【태백산사고본】 73책 108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25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농업-권농(勸農)

 

오늘 입시한 예방 승지에게 숙마(熟馬) 1필을 사급(賜給)하고, 선교관(宣敎官)        김한기(金漢耆)에게는 준직(準職)을 제수하며, 선전관(宣箋官) 서호수(徐浩修)는 승서(陞敍)하고, 경흥군(慶興君) 이전(李栴), 낙성군(樂城君) 이단(李壇), 낙림군(樂林君) 이연(李埏),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는 모두 백관과 아울러 가자(加資)를 친수(親授)하겠다고 명하였다.

 

이방(吏房)·병방(兵房) 승지가 세초(歲抄)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전교하기를,
"재작년에 장의(掌議)를 처분하였었다. 아! 임금이 나라를 위해 마음을 쓰는데 그때 태학(太學)의 장의의 직임(職任)을 맡을 사람이 모면(謀免)하는 것만 일삼았다. 예전에는 경알(傾軋)을 하였고 지금은 모면을 일삼으며, 예전에는 표표(表表)091)  하였는데 지금은 겨우 갖추어져 심지어는 스스로 그의 이름을 삭제까지 하였다. 지난번 특별히 고규(古規)를 회복한 것은 뜻이 대개 있었던 것인데, 오늘의 거조가 한심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장의를 특별히 정거(停擧)하게 하고 지난번의 하교 역시 시행하지 말라. 금후에는 스스로 그 이름을 삭제하는 자는 다시는 청금(靑衿)으로 대우하지 말고, 비록 석채(釋菜)092)  라 하더라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며, 대과(大科)·소과(小科)에도 부시(赴試)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정식하여 시행하라."
하였는데, 태학에서 진전(進箋)할 때에 장의가 전문(箋文)을 배행하지 않고, 색장(色掌)으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했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게 된 것이다.

 

전라 감사 원인손(元仁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신 같은 무사(無似)093)  가 외람되이 큰 은혜를 입어 청관(淸官)·요직(要職)을 두루 지내서 복에 넘치는 재앙과 회벽(懷璧)094)  의 죄를 신이 실로 자초한 것이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다만 저 사람이 신의 죄를 나열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고 오직 제멋대로 헐뜯고 꾸짖은 것이 거리에서 입씨름을 하는 것과 거의 다름이 없어, 말하는 자는 명백하지 않고 당한 자는 폭백(暴白)하기 어려운데, 이는 마땅히 한 세상의 공의(公議)가 있을 것이니, 신은 수다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목(錢木)을 흩어서 빌려 주었다는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본영(本營)에 전해 오는 사례로 본디 신을 모함하는 자료를 삼기에 부족한데, 이로써 죄안을 삼았으니, 그가 모함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음을 대략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신이 부앙(俯仰)하면서 스스로 애도하는 바가 있으니, 신이 석갈(釋褐)095)  하여 전하를 섬긴 지 이제 15년이 되었은즉, 본말(本末)·장단(長短)을 마땅히 연감(淵鑑) 아래에서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신부(臣父)의 아들이라 하여 전후해서 인도해 주시고 감싸 주시어 치우친 은총을 입었습니다. 신은 선신(先臣)이 다 마치지 못한 뜻과 일을 품고서 평탄하지 못한 위기(危機)의 세상 길을 맞이하여 정성을 다해 달리면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한결같은 고심(苦心)이 오직 만에 하나라도 효과를 이루려는 데에 있었는데, 성내고 미워함은 명예를 다투는 곳에서 쉽게 생기고 풍파가 또한 빈 배에 미쳐서 마침내는 사대부로서 씻지 못할 수욕(羞辱)을 입었으니, 신이 바야흐로 몸을 어루만지며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아! 저 일을 겪어 보지 못하고 주견(主見)이 없는 자에게 어찌 성을 내어 말할 필요가 있겠으며, 현직의 거취를 어느 겨를에 논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체직을 허락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예로부터 인신(人臣)으로서 참소를 입은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만, 어찌 경과 강화 유수와 같은 자가 있었겠는가? 아! 지난해에 경이 장전(帳殿)에서 아뢴 바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이미 연석에서 유시하였다. 구습을 버리지 않은 무리들이 어찌 그 마음을 고치지 않고 이명훈(李命勳)을 시켜서 비방하게 하는가? 비록 종이에 가득하더라도 경에게는 하나도 비슷하지 않다. 이 비답 후에 경이 비록 열 번 상소하더라도 결코 다시 답하지 않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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