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13.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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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계사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소학(小學)》조흘강(照訖講)096)  의 서북 교양관(西北敎養官)097)  을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6월 2일 갑오

장령 신상권(申尙權)이 상소하여, 성균관의 옛날 제도를 회복하라는 하교를 시행하지 말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그 상소를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6부(六部)의 장관(長官)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육전(六典)》의 편제(篇題)를 읽게 하였다. 장령 신상권에게는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고 도승지 성천주(成天柱)는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장의(掌議)를 구제하려고 도모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대신(臺臣)이 패초(牌招)를 기다린 뒤에야 들어올 경우는 파직시키고, 해당 승지는 체차(遞差)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책(李策)을 내장(內將)으로 채용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책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손자이다. 호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사축서(司畜署)의 인원을 줄이라는 명이 이미 있었고, 본서(本署)의 인원과 공해(公廨)에서 일하는 등속은 마땅히 구분해서 처리해야 할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청컨대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묘당의 논의를 거친 뒤에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승지가 입시하였다.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에 명하여 효제(孝悌)에 관한 잠(箴)을 지어 올리라고 한 것을 읽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명한 제목은 다만 효제(孝悌)를 강(講)하여 후세의 사람들을 권면하려고 한 것이니, 한 글자 한 구절을 어찌 감히 자기에게서 구하겠는가? 대소를 물론하고 요즘의 습속은 고작 한다는 것이 경치 읊은 것이기 때문에 선비를 뽑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더구나 지금 이 글에 있어서 이따위 내용을 보려고 하였다면, 어찌 이런 제목을 내렸겠는가? 10장 가운데 3장만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빼버리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의 세 당상관에게 살인 사건의 문안(文案)을 가지고 입시하여 복주(覆奏)하라고 명하였다.

 

6월 3일 을미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에게 응제(應製)의 성적 순위를 매기도록 명하고,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6월 4일 병신

성균관에서 아뢰기를,
"재유(齋儒)들이 승선(承宣)의 말을 듣고 이를 혐의로 삼아 권당(捲堂)098)  의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명하기를,
"여러 유생들을 타일러 즉시 들어가게 하라."
하였다. 제술(製述)·전강(殿講) 때에 성균관의 서리(書吏)가 거안(擧案)을 즉시 써서 바치지 않자, 도승지 송형중(宋瑩中)이 성균관 하리들을 불러 꾸짖기를,
"너희들은 서리(書吏)의 일을 하면서 군도목(軍都目)도 일찍이 써 본 적이 없는가?"
하니, 여러 유생들이 이를 혐의로 삼았던 것이다. 임금이 말을 신중히 살펴서 하지 않았다고 하여 송형중을 해임하라고 명하였다.

 

강필리(姜必履)를 대사간으로, 이성억(李聖檍)을 집의로, 이항조(李恒祚)를 장령으로, 박상악(朴相岳)·김문순(金文淳)을 정언으로, 정범조(丁範祖)를 지평으로, 남현로(南玄老)를 부교리로, 이응협(李應協)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각사(各司)에 오래 근무한 낭관(郞官)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그들이 맡고 있는 직무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을 물었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입시하라고 명하여 각각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시험을 보이고 지필묵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6월 5일 정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잔치를 열자고 청하자, 좌의정·우의정이 잇따라 청하고 비국 당상들도 입을 모아 우러러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강화 유수 이은(李溵)과 전라 감사 원인손(元仁孫)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정하언(鄭夏彦)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여선응(呂善應)을 사간으로, 이치중(李致中)을 헌납으로, 이재간(李在簡)을 부응교로, 임관주(任觀周)·이지승(李祉承)을 정언으로, 김상집(金尙集)·이택수(李澤遂)를 교리로, 이진형(李鎭衡)을 보덕으로, 홍낙인(洪樂仁)을 전라 감사로, 정상순(鄭尙淳)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6월 7일 기해

임금이 친히 명릉(明陵)099)  의 제사에 쓸 향(香)을 전하고 진전(眞殿)의 재실로 나아갔다.

 

6월 8일 경자

새벽에 임금이 예를 거행하고 나서 육상궁(毓祥宮)으로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이어 돈의문(敦義門)으로 가서 경기의 백성을 불러 농사의 형편을 물었다. 이때 바야흐로 가뭄이 들었으므로 돈의문에 나아가 비를 기다린 것이다. 저녁때가 되어도 어가를 돌리려고 하지 않자 여러 신하들이 뵙기를 청하였는데,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환궁했다.

 

6월 9일 신축

예조에서 11일부터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것을 아뢰니, 청한 대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정언 임관주(任觀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언로(言路)는 국가에 있어서 사람에게 이목(耳目)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로 귀가 듣는 구실을 하지 못하고 눈이 보는 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 임금의 뜻이 일단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 경우 마치 바람 앞의 풀처럼 일제히 휩쓸릴 것이니, 우뚝하게 송백(松柏)처럼 자립할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상을 주면서 말하게 하더라도 회피할 것인데, 더구나 그렇지 않은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혹시 전지(銓地)를 논하면 서로 알력을 부리는 데로 돌리고, 권력 있는 재상들을 논하면 협잡을 부린다고 지목하여서, 영해(嶺海)에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금고되어 있는 자들이 줄줄이 잇따랐었는데 성상께서 마음을 여시고 뉘우치시어 전후로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을 모두 풀어주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조정과 재야가 서로 축하하니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였습니다. 그러나 풀어주라는 명령만 있었지, 버려두는 것은 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십수 년 이래로 전하께서는 묘당 관리들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을 언제 본 적이 있었습니까? 한번이라도 문비(問備)를 청하면, 뚜렷이 노기를 드러내어 관원들이 서로 규계하기를 원수처럼 여기고 갖은 방법으로 헐뜯어 반드시 해치려고 합니다. 임금께 글을 올린다는 말이 사전에 누설되면 대관(大官)이나 중재(重宰)들이 너나없이 협박하여 저지합니다. 이러고도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께서 지으신 《유곤록(裕昆錄)》에 난역(亂逆)이 생기는 이유에 대하여 두루 서술하셨는데, ‘그 근본을 묻는다면 사문(斯文)100)  이다.’ 하고, 그것을 결론지어 ‘홍수(洪水)와 맹수(猛獸)보다도 심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 그를 사문이라고 말하면서 어찌 난역의 계통과 아울러 논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필하는 정승은 일반 관리와 스스로 구별되는데 잠깐 파면시키자마자 금방 유임시키고 있으니, 너무나 구경(九經)101)  의 의의에 결여되었고,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기고 있으니, 옛날 대신의 기풍이 없습니다. 임금에게 지나친 일이 있으면 바로잡아 구제할 것은 생각지 않은 채 미봉하는 것을 기발한 계책으로 여기며, 국사가 무너지고 분열되면 쇄신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고식적인 것을 묘한 방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책임은 분주히 돌아다니며 시키는 일이나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런 사람은 비록 동정할 가치가 없으나 명색이 대관(大官)인 만큼 전하께서 예로 부리는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이처럼 경멸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상하가 마땅히 서로 힘써야 할 점입니다. 지난번에 수원 부사의 천거를 즉시 거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심지어는 비랑(備郞)에게 곤장을 치라고 명하셨는데, 이는 실로 전에 없었던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번의 차자로 책임을 때우고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 나왔으니, 전하께서 대관들을 경시하는 것이 반드시 이에 연유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렇게 가뭄을 근심하실 때에 기우제를 지낼 것은 청하지 않고 먼저 잔치를 베풀자고 청하였으니, 생각을 못함이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지난날 이명훈(李命勳)이 입시했을 적에는 정도에 지나친 하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언관(言官)을 전석에서 면대해 나무라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전에 없던 책망의 하교까지 있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말씀하실 때에 깊이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금번에 사신이 돌아올 때 가지고 오지 않아야 할 금불상(金佛像)을 가지고 와서 외람되게 연석(筵席)에서 올렸으니, 너무나도 무엄한 일입니다. 신은 세 사신을 한결같이 모두 파직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일전에 성균관 유생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일 때에 도승지 송형중(宋瑩中)이 ‘군도목(軍都目)’의 말로 많은 선비들을 멸시하여 심지어는 권당(捲堂)하는 일이 있었으니, 신은 그에게 빨리 견책하여 파면하는 법을 시행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조 판서는 국가의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윤급(尹汲)이 지난해에 한번 도목 정사를 하자, 연석(筵席)의 관리들이 일시에 시를 지어 비난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다시 제수하자, 그 즉시 무릅쓰고 나왔으므로 사실 온 세상 사람들이 침뱉고 욕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직접 인사 행정을 하는 자리에 입시해서는 전하께서 관천(館薦)·도천(道薦)·어사 천(御史薦)에 대하여 곡진하게 하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의 습관을 고치지 않은 채 사욕을 챙기기에 급급한 끝에 감히 원래는 세 곳에서 추천된 것이 없었다고 대답하였으니, 흰머리의 늙은 몸으로 지척에서 임금을 속였습니다. 차마 견복(甄復)102)  의 자리와 초사(初仕)의 후보자까지도 가까운 인척이 아니면 가까운 친족을 넣었는가 하면, 기름진 고을과 풍성한 역참은 전일 자기를 잘 섬기던 자들이나 송도(松都)의 부자나 중로(中路)의 돈 많은 자들을 죄다 임명해 보냈습니다. 신은 전 이조 판서 윤급에게 개정(改正)하는 법을 빨리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조 판서 신회(申晦)는 전에 서번(西藩)을 맡았을 때 탐욕과 음란에 빠져 한 병영(兵營)에 모아 둔 재산을 거의 탕진하였고, 현직에 임명되자 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론을 어기면서도 감히 무식하고 용렬하며 흉악한 역도인 조동하(趙東夏)의 사위를 방자하게 재랑(齋郞)의 의망에 넣었습니다. 신은 신회에게 빨리 견책하여 파면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장녕전(長寧殿) 참봉 이윤신(李潤臣)도 도태하라고 명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이명운(李明運)은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에 오로지 수탈만 일삼고 단지 윗사람만 잘 섬기려고 애쓰면서 7천 명의 굶주린 백성들이 죽어 가는 것을 서서 보고만 있었습니다. 만약 나라에 기강이 있다면 마땅히 팽아(烹阿)의 법103)  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형의 관원이 어찌 감히 그를 총관(摠管)의 의망에다 넣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이명운을 영원히 금고(禁錮)시키고 그 전형의 관원에게 빨리 파직의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윤태연(尹泰淵)이 교만하고 요망스러우며 탐욕스럽고 잔학하여 장수의 의망에 어울리지 않다는 것에 대해 공론이 일치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그때 비국의 당상 중에도 그가 불가하다고 힘써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내 통과되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평생 발자취를 더듬어 볼 것 같으면, 다만 윗사람의 비위를 잘맞춘다는 이름이 세상에 시끄럽게 떠돌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평안도의 풍요한 곤수(閫帥) 자리에서 재물을 긁어모아 뇌물을 바치느라 본영(本營)에 쌓아 두었던 재물이 모조리 다 탕진되었습니다. 게다가 혹독한 정사를 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데 과감하여 죄없이 억울하게 죽은 자가 수십 명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빨리 윤태연을 장수의 의망에서 빼버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훈련 대장 정여직(鄭汝稷), 총융사 구선행(具善行)은 군사들에 잘못을 저질러서 회시(回示)104)  의 형벌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얼굴을 쳐들고 군영에 나와 삼군(三軍)을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는 성상께서 깊이 유념하소서.
경전(經典)에 ‘3년 먹을 저축이 없으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울과 지방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서 한 해의 수용도 부족할까 근심스러운 지경이니, 나라의 사정이 정말 슬프고 한탄스럽습니다. 신이 삼가 바라건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들은 모두 줄이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처음에는 시종안(侍從案)에서 임관주의 이름을 삭제하고 향리로 쫓아내라고 했다가, 곧바로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보내라고 명하였다. 세 정승이 성밖으로 나가자 승지를 보내 돈유하였는데, 들어오면 직접 유시한 뒤에 저녁 수라를 들겠다는 하교가 있었다.

 

6월 11일 계묘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 정승이 상소하여 자책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도타이 권면하고 모두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고 또 가뭄을 걱정하여 노심 초사했다. 세 정승이 성안으로 들어와서 또 소를 올리자, 처음과 같이 들어오라고 재촉하였다.

 

6월 12일 갑진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라고 명하였는데, 가뭄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대정현에 명하여 유배된 죄인 임관주에게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도록 했다. 그의 상소 가운데, ‘기우제를 지낼 것을 청하지 않고, 먼저 잔치를 베풀자고 청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하여, 원임 대신들이 차자를 올려 인혐(引嫌)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여러 대간들이 그에게 더 처벌하자고 청하지 않았다고 하여 관직을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북청 어사(北靑御史) 홍경안(洪景顔)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서계(書啓)를 읽어 아뢰자 북청 전 부사 강시현(姜始顯)을 잡아다 문초하라고 명하고, 안변 부사(安邊府使) 이경옥(李敬玉)은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6월 13일 을사

예조 판서 이창수(李昌壽)에게 명하여 영의정에게 유지를 전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창수가 패초를 받고 나오지 않자, 전 판윤 남태회(南泰會)에게 명하여 세 정승에게 전하게 하였다. 모두 명을 받들고 입시하여 면직해 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매우 간곡하게 위로하고 타일렀다.

 

6월 14일 병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좌의정 한익모(韓翼謨),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의 사임을 허락했다. 이때 빈대(賓對)를 행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자정전에 나아가 기다렸으나, 세 정승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에 엄한 하교를 내리자 세 정승이 모두 명을 기다렸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조 판서 신회(申晦), 병조 판서 이창의(李昌誼)의 사임을 허락하고, 이창수(李昌壽)를 이조 판서로, 조운규(趙雲逵)를 병조 판서로, 신회를 예조 판서로, 이창의를 판윤으로 특별히 임명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정승의 해직 요청도 이미 허락했는데, 더구나 전형의 장관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현임의 해직을 허락하여 염치를 중히 하겠다."
하였다.

 

원인손(元仁孫)을 대사헌으로, 조숙(趙)을 대사간으로, 김재순(金載順)을 부응교로, 구수국(具壽國)을 집의로, 이익보(李益普)를 장령으로, 정반(鄭槃)을 정언으로, 이치중(李致中)을 부수찬으로, 이수훈(李壽勛)을 보덕으로, 정상인(鄭象仁)을 겸 필선으로, 구상(具庠)을 문학으로, 홍검(洪檢)을 사서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미 단비가 내렸으니, 평상시와 같이 수라를 드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5일 정미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수라를 평상시처럼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이 우러러 청했기 때문이었다.

 

6월 17일 기유

장령 이택징(李澤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에는 사람에게 관직을 임명할 때 오직 재능에 걸맞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침에 이조에 있던 사람이 저녁에는 호조에 있는가 하면, 어제는 문원(文苑)에 있던 사람이 오늘은 융정(戎政)의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늘어지고 나태해져서 모두 요행을 바라 사람의 뜻을 순종하고 아첨을 떨고 있는데, 묘당에 빌붙어 쫓아다니며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주로 여기에서 발생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재능에 따라 등용하여 능력도 없이 요행을 바라는 부류로 하여금 움츠러들게 하소서.
호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은 사납고 독하며 비루하고 잗달아서 평생의 장기가 아부하는 인연을 맺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밤낮으로 계획하고 헤아린 것이 오직 공도를 등지고 사욕을 채우는 것에 있었습니다. 일찍이 서번(西藩)을 맡았을 때는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기를 일삼아 암암리에 재물을 수탈하였으므로 추한 비난이 들끓었습니다. 그리고 전형의 부서에 있으면서 의망할 때는 사사로이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끌어들였으므로 한번 인사 행정에 의망된 사람이 태반이나 결점으로 인해 폐기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의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짓에 어찌 놀라고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결코 그를 전형의 의망에서 삭제하여 관직을 삭탈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이택징을 사적(仕籍)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6월 18일 경술

혜빈궁(惠嬪宮)의 탄일이었으므로, 정원·옥당에서 문안을 드렸다.

 

승지가 입시하였다. 호남 어사 서명선(徐命善)을 불러 보고 서계(書啓)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영광 군수(靈光郡守) 이흥종(李興宗)을 잡아다 문초하라고 명하였는데, 세미(稅米)를 수송하는 배에 잡물(雜物)을 실었기 때문이었다.

 

6월 19일 신해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의 사임을 허락하고 김치인(金致仁)으로 대임하도록 명하였다.

 

원임 대신 및 비국 유사 당상이 입시하였다. 호남의 곡물 수송선이 침몰한 사건에 대하여 묻고 나서, 하교하기를,
"근 2만 석이 침몰되었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았다. 곡식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체모를 엄히 하고자 특별히 어사를 파견한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무고한 격군(格軍)만 효시(梟示)될 뻔했다. 어사의 서계를 보니 모든 광경을 직접 보는 듯하다. 아! 《주서(周書)》에 ‘매서운 바람과 거센 파도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한 귀퉁이 치우친 나라에 부덕한 사람이 임금 자리에 있으니, 우순 풍조(雨順風調)는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어찌 지난번과 같은 바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일전에 치죄한 격군은 수십 명에 불과했었는데, 지금은 근 4백 명의 격군들을 다른 군에다 두루 가두었다. 그들이 비록 무상(無狀)하다 하더라도 몇 백명이나 되는 사람을 어찌 다 치죄할 수 있겠는가? 격군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 역시 나의 백성이며 나의 자식들이다. 범죄를 저질러 처벌된 자도 불쌍한데, 더구나 그들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어사가 아뢴 바를 들어보니 수천 명의 가족들이 북쪽을 바라보고 울부짖으면서 호소한다고 하니, 마치 직접 듣는 것 같다. 어사가 이미 세 차례의 형벌을 시행했다 하기에 특별히 대신들을 불렀다. 내 마음이 이처럼 근심스러운데, 아침밥이 어찌 차마 목에 넘어가겠는가? 상례(常例)대로 처리할 수 없다. 각배의 도사공(都沙工)은 당초에 머뭇거리고 지체했던 죄로 각 도신들로 하여금 한 차례 형벌을 주고 나서 편배(編配)하고, 그 나머지 사공과 격군은 모두 풀어주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법성진(法聖鎭)을 경력자의 벼슬자리로 삼으라고 명하였는데, ‘지체가 낮은 사람은 위엄과 중망이 없어 대뜸 일을 그르친다.’고 어사 서명선(徐命善)이 품계와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차출할 것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영광 전 군수 이흥종(李興宗)을 위도(蝟島)로 귀양보냈다.

 

6월 21일 계축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명훈(李命勳)은 두 사람을 쫓아내고, 임관주(任觀周)는 대신부터 상소를 올려 시작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씀이 매우 교묘하고 주밀하였다. 이조 판서를 쫓아냈는가 하면 병조 판서를 쫓아내기도 하여, 오직 호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 저 이택징(李澤徵)은 무슨 심술을 가졌기에 오직 한 사람을 들어 욕하였단 말인가? 이로 인하여 위계 질서가 흩어지고 조정의 분위기가 한심스럽게 되었다. 이때 내가 그일을 당했더라도 두려울 것인데, 더구나 이조 판서야 말해 뭐하겠는가? 당초 자기 주장을 고집하며 다툰 것에 대해서는 이미 논할 만한 것이 없지만, 여러 번 소명(召命)을 어기고 또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니, 어찌 이러한 분의(分義)가 있으며 어찌 이러한 사체(事體)가 있단 말인가? 그를 중하게 추고하고 나서 다시 패초(牌招)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 이창수(李昌壽)가 사직하는 글을 연이어 올리고 또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이창수가 즉시 명에 따라 입시하였다.

 

6월 23일 을묘

이수훈(李壽勛)을 집의로, 김상집(金尙集)을 헌납으로, 이형규(李亨逵)를 부응교로, 이수일(李秀逸)을 장령으로, 안성빈(安聖彬)·김둔(金鈍)을 지평으로, 이명빈(李命彬)을 정언으로, 민홍렬(閔弘烈)을 부교리로 삼았다.

 

호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외람되게도 재상의 반열에 올라 오랫동안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나, 기국에 차고 분수에 넘쳐 더이상 바랄 것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택징의 상소가 나와 사대부로서 씻기 어려운 수치를 주었고, 신하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정하였습니다. 아! 말꼬리를 찾자니 조정을 욕되게 하겠기에 머뭇거리며 미련을 갖고 연연하다가 휴우(睢盱)가 닥치어 왔으니, 몸은 이미 욕되었고 자취가 이미 이상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물러나 조용히 있으면서 여생을 마치는 길밖에 없습니다. 호조는 일이 매우 많은 곳이니 더욱더 하루라도 헛되이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먼저 신의 직명(職名)을 체차하고 다시 사적에서 신의 성명을 삭제하라고 명하시어 조정의 분위기를 안정시키고 하찮은 신의 소원을 이루게 하소서."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체직을 허락하고 이사관(李思觀)으로 대임시켰다.

 

이조 판서 이창수(李昌壽)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 명의 유신(儒臣)이 금고당한 지 이미 5년이나 되었습니다. 엄한 명령을 곧바로 취소하셨으나, 지금까지 서용하지 않고 계십니다. 신이 만약 말씀드리지 않아 그냥 침체되어 버린다면 신에게 실로 자리만 지키는 죄가 있겠기에 간단한 차자로 말씀드려 재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사체가 그렇지 않고 또한 품주할 일도 아니라고 비답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조 판서가 범범하게 말하였다면 비록 실정에 어둡다고 말하더라도 무엇이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보복에 겁을 먹고 허둥지둥 행동하였으니, 이조 판서 이창수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빨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남태제(南泰齊)를 이조 판서로, 이창의(李昌誼)를 판돈녕으로, 정홍순(鄭弘淳)을 판윤으로 삼았다.

 

6월 24일 병진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임어하여 한림 중소시(翰林重召試)를 설행하였다. 이때 한림 이사조(李思祚)·강혼(姜俒)·홍상간(洪相簡)·정호인(鄭好仁) 등이 예문관의 규정을 들면서 패초에 응하지 않고 시끄럽게 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벌시(罰試)을 보였던 것이다. 합격자의 성적 순위를 매긴 뒤에 장원한 강혼이 연이어 장원하여 선조(先祖)의 기풍을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하여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각각 현궁(弦弓)을 하사하였다.

 

6월 25일 정사

지사(知事) 윤급(尹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개를 숙이고 배회하며 근심에 쌓여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도목 대정 때 집필하였던 낭관이 접때 신의 죄를 성토하였습니다. 그가 극도로 거짓말을 꾸며 오로지 핍박과 욕설을 일삼아 마치 원한이 쌓여 매우 노여워하는 자와 같았습니다. 아!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입니까? 만약 신으로 하여금 일찌감치 스스로 인피(引避)하고 물러나 요지(要地)를 멀리 피하였더라면, 비록 말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신을 어떻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벼슬이 융성했는데도 경계할 줄을 몰랐고 총애에 연연하여 그칠 줄을 몰라서 끝내 이처럼 한없는 추한 욕을 당하였습니다. 이를 조용히 생각해 보면 모두가 스스로 취한 것이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이 스스로 그만두려는 뜻을 헤아리시어 사사로운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주소서."
하니, 온화한 비답으로 위로하고 타일렀다.

 

6월 27일 기미

전 영상 김치인(金致仁)을 영상으로, 전 좌상 한익모(韓翼謨)를 좌상으로, 전 우상 김상철(金尙喆)을 우상으로 임명하고 나서 승지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윤득양(尹得養)을 대사헌으로, 홍준해(洪準海)를 대사간으로, 원인손(元仁孫)을 부제학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지경연으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 흰 옷에 대하여 신칙할 때, 사람들은 간혹 말하기를 ‘기성(箕聖)105)  이 조선에 올 때 그 또한 흰 옷을 입었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의 풍속이다.’고 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아! 저 기성은 성인〈주 무왕(周武王)을〉 만나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조선에 와서 백성에게 팔조(八條)를 가르쳐 인현(仁賢)의 교화가 있었다. 후인(後人)들은 기성의 가르침은 본받지 않고 그 옷만 사모하고 있으니, 어찌 사리에 어두운 것이 아닌가? 《예기(禮記)》의 월령(月令) 편을 보면, 옷의 색깔이 각각 사철에 따라 다르고, 더구나 조선은 동방〈예의의 나라〉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청색을 숭상했겠는가? 아니면 하얀 색을 숭상했겠는가?
경자년106)   이전과 경자년 이후 그 생각에 숭상했던 옷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라. 비록 꼬치꼬치 말하지 않더라도 유식한 자가 있다면, 반드시 개연히 탄식할 것으로 여긴다. 먼 지방의 사람들이 어찌 비단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 저포(苧布)에 지나지 않을 것인즉, 품계가 참하(參下)인 자들이 또한 오각대(烏角帶)에다가 천담복(淺淡服)107)  을 입으니, 한심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옷은 옛것과 새것이 있고 사물은 고르지 않은 것이 사물의 실정이니, 더러는 청색이 있고 더러는 옥색도 있는 것이 또한 어찌 이상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개연히 생각하는 것은 유자(儒者)와 무인(武人)을 막론하고 죄다 천담복으로 만들어 갖춘 점이다. 앞으로 유자가 천담복을 입고 과장(科場)에 들어오면 사관소(四館所)에 분부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8일 경신

임금이 의릉(懿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숭정전 뜰에서 경건히 맞이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상소하여 면직해 달라고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6월 29일 신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세 정승이 명에 응하지 않자, 연달아 엄한 하교를 내리고 심지어는 흥화문(興化門) 밖으로 나아가 세 정승에게 사과하겠다고 하교하였다. 세 정승이 입시하니 친히 명소패(命召牌)를 주었다. 영부사 윤동도(尹東度), 판부사 서지수(徐志修)·김양택(金陽澤)도 입시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또한 잔치를 열자고 입을 모아 일제히 요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다.[息壤在彼]108)  ."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불량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오래 되어 분명치 않은 문기(文記)를 가지고 연줄 닿는 궁방(宮房)이나 아문(衙門)에 몰래 고하여, 심지어 대대로 전해 내려온 땅까지도 무법하게 가로채어 빼앗아 들이고 있습니다. 일찍이 비리(非理)가 있어 팔려고 한 자와 나와서 고한 자는 모두 다 귀양보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차후에는 보고되는 대로 나와 사람과 해당 궁방의 담당자를 전에 내린 하교에 의거해 엄히 형벌하여 정배하고, 각 아문의 관원 중 이를 범한 자는 각별히 엄하게 처벌한다는 뜻으로 거행의 조목을 만들어내어 엄히 신칙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더위와 설사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약원(藥院)으로 하여금 교대로 숙직을 서라고 명하였다.

 

6월 30일 임술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 역시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직접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이조 판서 남태제(南泰齊), 병조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나왔다. 이육(李堉)을 집의로, 홍응보(洪應輔)를 헌납으로, 조준(趙㻐)을 부수찬으로, 김귀주(金龜柱)를 강원 감사로, 조명정(趙明鼎)을 지사(知事)로, 김범로(金範魯)를 남병사(南兵使)로, 황채(黃寀)를 경상 우병사로, 전득우(田得雨)를 경상 좌수사로, 이언희(李彦熙)를 충청 수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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