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계해
내국에서 숙직을 시작한 지 이미 이틀이 되었는데도 조정에서 문안을 드리지 않자 엄한 하교를 내렸다. 세 정승이 처분이 내리기를 기다리자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날부터 계속해서 정반(庭班)109) 을 세웠다.
대정(大政)에서 새로 제수된 수령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직책과 이름을 각각 물어 보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제조 이사관(李思觀)의 체차를 허락하고 조명정(趙明鼎)으로 대임시켰다. 영의정 김치인이 대정 때 승진될 수령의 의망에 순전히 삼망(三望)으로 추천된 수령만을 채웠다고 하여 이조 판서를 추고할 것을 청하고, 또 곤망(閫望)에 무려 5명이나 신규로 추천하였다고 하여 병조 판서를 추고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7월 2일 갑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이 청대(請對)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자 함께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보자고 요청한다는 말을 듣고 수상하게 생각하였다. 경 등은 먼저 창문 위에 붙어 있는 글을 보라."
하였는데, 그것은 곧 ‘어찌 식양의 맹세 정도이겠는가? 내 마음은 마치 쇠와 같다.[豈云息壤予心若鐵]’는 여덟 글자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 명을 거두어 들일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장녕전(長寧殿) 안에 벌레와 뱀이 들어온 이변이 있었다고 강화 유수 정상순(鄭尙淳)이 치계(馳啓)하니, 임금이 매우 놀라 예조 판서 신회(申晦)에게 봉심(奉審)하고 이어 수리할 것을 명하였다. 열흘 동안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이튿날부터 약원(藥院)의 숙직을 철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숭정전 뜰에서 장녕전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7월 4일 병인
윤학동(尹學東)을 대사간으로, 정창성(鄭昌聖)을 사간으로, 박규수(朴奎壽)·이항조(李恒祚)를 장령으로, 임덕제(林德躋)·이지승(李祉承)을 지평으로, 송재경(宋載經)을 헌납으로, 홍구서(洪九瑞)·이규위(李奎緯)를 정언으로, 김상집(金尙集)을 수찬으로, 홍경안(洪景顔)을 겸 문학으로, 정창순(鄭昌順)을 겸 사서로, 김효대(金孝大)를 동돈녕으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강화도에 갔다가 돌아온 선전관(宣傳官)·금군(禁軍)을 잡아들이도록 명하였는데, 지체했기 때문이었다. 또 병조의 낭관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는데, 말이 잘 달리지 못했다고 앙주하였기 때문이었다.
7월 5일 정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였다. 금위 대장 이윤성(李潤成)의 체차를 허락하고, 총융사 구선행(具善行)으로 대임시켰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근래 재상 중에서 탄핵을 받으면 번번이 교외로 나가 혹 해가 바뀌도록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칙하여 들어오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대사간 윤학동(尹學東)과 사간 정창성(鄭昌聖)이 서로 잇달아 글을 올리면서 차대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수령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고산 현감(高山縣監) 유광익(柳光翼)이 농사의 이치를 익히 안다고 자칭하면서 비가 적당히 왔기 때문에 풍년의 징조가 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금년의 농사는 비가 아주 적게 내렸는데, 이런 말은 앞으로 도신과 조정을 기만할 조짐이다. 고산 현감 유광익을 체차하라."
하였다. 장령 박규수(朴奎壽)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심관(沈鑧)을 대사간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사간으로, 신오청(申五淸)을 장령으로, 홍경안(洪景顔)을 헌납으로, 정경인(鄭景仁)을 정언으로, 조명정(趙明鼎)을 판윤으로, 유언술(兪彦述)을 우윤으로 삼았다.
정언 이규위(李奎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하고 있습니다. 비록 충직하고 강개한 선비라 할지라도 영해(嶺海)로 내쫓겨 금고(禁錮)당할까 두려워하여 자기 집에서 근심만 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한 두 명의 간관(諫官)들에게 내린 처분은 여지없이 그들의 기를 꺾어 버렸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그들에게 은혜의 사면을 내리고 더욱 애써 신하들의 말을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소서. 계사를 올리거나 계사를 중지하는 것은 일세의 공론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대성(臺省)을 독책하여 말한 사람을 죄줄 것을 청한 것은 대각의 체모를 남김없이 추락시켜 뒷날의 폐단이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훗날 지금의 일을 선례(先例)로 끌어대어 온갖 방법으로 대신(臺臣)들을 몰아부친다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찌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깊이 경계하소서.
오늘날의 큰 근본과 급선무는 동궁을 지도 육성하는 일보다 더 중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서연(書筵)은 여전히 이틀 간격으로 열고 소대(召對)는 하루에 단 한 차례밖에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비록 성상께서 동궁의 몸을 걱정하셔서겠지만, 부지런히 배우는 것이 몸을 요양하는 데에 보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경연과 서연의 옛 규례를 회복하소서.
신이 듣자하니 천지(天地)가 만물을 기르는 것은 오직 성실 하나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보살핌이 지극하시지만 허물을 적게 하지 못하고, 나라를 부지런히 다스리시지만 뜻과 같이 다스려지지 않으니, 성실의 공부가 아직 충분한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삼가 바라건대 더욱더 면려 하소서. 전하께서 일념으로 주력하시는 것은 반드시 풍속의 교화를 먼저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도(世道)가 날로 무너지고 풍속이 날로 더러워진 것은 예의 염치가 없어지고 이욕이 치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대부들은 이끗을 이치로 여기어 원수는 잊을 망정 이끗은 잊지 않으며, 골육(骨肉)은 버릴 망정 이끗은 저버리지 않는데, 그 원인을 따져 보면 전하께서 지조 있는 자는 싫어하고 모나지 않은 자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부형(父兄)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없는데, 부형의 은혜를 배반하고 부형의 원수를 잊어도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형규(李亨逵)가 할아버지의 원한을 숨기면서 원수의 가문과 친하게 지내고, 이창수(李昌壽)가 형의 팔을 비틀고서 대제학을 빼앗은 것에 있어서는 어찌 하늘에서 품부한 본성(本性)을 지킴이 저 무리에게만 인색해서이겠습니까? 사욕에 골몰하여 본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이 두 사람을 사방의 먼곳으로 내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용납하여 둔다면 임금을 뒤로 하고 어버이를 버리는 무리가 장차 뒤따라 생길 것으로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몸소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하시나, 나라의 용도는 날로 고갈되고 민력(民力)이 날로 지치는 것은,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탐욕의 풍조가 성행하기 때문입니다.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막론하고 일단 풍요한 자리에 앉으면, 화려한 누각(樓閣)을 겹쳐서 짓고 사방의 이웃을 겸병(兼倂)하여 넓은 들판에 좋은 전지를 차지하고 또 재화를 나누어서 권력 있는 사람과 귀한 사람들을 섬기므로 재상의 풍요는 가렴주구하는 자들보다도 열 배나 더 됩니다. 백성이 곤궁해지고 나면 나라 역시 따라서 고갈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이 생기면 온갖 방법으로 요리하므로 부세(賦稅)를 관장하는 관아가 시장으로 변하고 있으니,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110) 가 아! 역시 상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농토와 주택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는 자들을 찾아내어 중한 법으로 다스리되, 내직이나 외직을 막론하고 현재 요직(要職)에 있는 자 중에 농토와 주택을 많이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장률(贓律)로 처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도 솔선 수범하여 상을 내리고 선물을 주되, 10분에 9는 줄여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평소 유도(儒道)를 매우 높이 장려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지난 해엔 수많은 유자들이 죄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곧바로 마음을 돌리시어 밝고 공정하게 처분을 내리셨습니다. 다만 지금 죄명(罪名)은 풀어졌으나 여전히 폐기(廢枳)되어 있으므로 신은 마음속으로 애석해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전조(銓曹)에서 올린 차자는 진실로 뜻밖이었습니다. 이미 죄를 씻어 주었고 보면 전조에서는 단지 전례에 따라 의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오랫동안 자기들 주장만을 고집하며 질질 끌다가 불쑥 차자를 올려 은연중 근래 대각에서 올린 글이 모두 산림(山林)의 유자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라 전형의 관원이 그들의 견제와 핍박을 받아 청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청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범인지 모르면서 허물을 유자(儒者)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하였는지의 여부는 신이 알 수 없으나, 임금을 현혹시킨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옛날의 유자들은 조정에서 예우하였기 때문에, 관료들이 존경했고 유생들이 추앙했던 것입니다. 나라에 큰 정사가 있으면 그들에게 가서 시정을 받고 조정에 큰 논의가 있으면 그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했기 때문에, 몸은 등용되지 않았으나 그들의 말이 항상 시행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자는 믿을 데가 있고 소인은 두려워하여 윤리가 무너지지 않고 기강이 실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유자들을 전하께서 이미 높이 예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관료들이 가벼이 여기고 유생들이 멸시합니다. 비록 그들이 시론(時論)에 참여하고 싶더라도 막연히 서로 관계가 없는데 어찌 하겠습니까? 따라서 군자는 믿을 곳이 없고 소인은 두려워할 바가 없으니, 앞서 말한 이욕의 치성과 탐욕의 풍조가 성행한다는 것이 꼭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반대로 그들이 시론을 주장하고 있지나 않은가 의심하고 계시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관직에 나아가고 안 나가는 일이 산림에 숨어 있는 몸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전형의 관원이 자신들을 의망하지 않을까 근심하여 대신을 사주해서 공격해 내쫓는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 깊숙이 계시므로 이런 사정을 모르실 만도 합니다만, 또한 지나친 우려가 이처럼 극도에 달할 줄은 예상하지도 못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이 항상 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서 간하는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저 귀양가 금고된 신하들의 허물을 모두 깨끗이 용서해 주셨는데, 오직 두 세 명의 유신(儒臣)만 갈수록 심하게 의심하고 노여워하여 여전히 폐기시킨 바람에 여파(餘波)가 넘쳐 근원에까지 소급되어 수사(收司)의 처벌이 기로(耆老)들에게까지 뻗치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난역(亂逆)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시비가 명확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선비들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화란(禍亂)이 격화된 것을 선정신(先正臣)에게 떠넘긴단 말이며, 사실을 밝히는 상소는 오로지 스승을 위한 고심에서 나온 것인데, 나라의 법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은혜로운 한 글자의 비답을 내려 원로에게 애써 응답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전하의 잘못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종신토록 금고되더라도 여러 유신에게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마는, 천년이 되도록 전하께서 유독 도학(道學)을 억눌렀다고 할 것이니 어찌 성덕(聖德)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동궁의 나이가 어리니, 만약 한 때의 억양(抑揚)을 가지고 변경할 수 없는 금석(金石)의 법으로 인식한다면 나라의 걱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간절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멀리 생각하여 유자를 배척한 유시를 모두 환수하소서. 아! 공자(孔子)는 만세토록 존경하는 분이므로 한 마디라도 불경스러운 말을 한다면 그 죄는 역적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관료들이 연명으로 상소할 때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제창하기를, ‘주상께서 이처럼 노하시니 비록 공자라고 하더라도 처벌하자고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 외에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을 모욕하고 주상을 업신여긴 그의 죄로 보아 결코 빨리 먼 곳으로 귀양보내어 선비들 사이에 끼이지 못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지난번 청주(淸州)의 음란한 옥사 때문에 친히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어사가 돌아오자 남쪽의 분분한 이야기가 배나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익현(李益炫)이 사실의 여부를 규명해 보지 않고 원범(元犯)을 서둘러 죽였다는 것은 의심할 만합니다. 신은 이익현에게 이를 문초하여 실정을 알아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듣자하니 어사가 실상을 염탐해보고 나서, 장계를 작성했다가 출도(出道)한 뒤에 그 초고를 온통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일도의 사람들 모두가 ‘어사가 이익현보다도 더 심하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러니 다시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이규위를 입시하라고 명하여 하문하기를,
"이형규와 원수진 집안이 누구인가?"
하니, 이 규위가 대답하기를,
"구상(具庠)·정창성(鄭昌聖)입니다."
하였다. 또 하문하기를,
"김상철의 말은 어디에서 들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미(李瀰)에게 들었습니다."
하였는데, 이미는 이규위의 가까운 외척이었다. 일개 대각의 신하가 대신을 귀양보내자고 청한 일은 3백 년간 없었던 일이라고 하여 이규위를 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고, 그의 상소를 되돌려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일은 이미 하교하였으니, 안심하고 즉시 함께 들어오라.’는 뜻을 입시한 승지로 하여금 우의정 김상철에게 전유(傳諭)하라고 명하였다.
7월 6일 무진
이미(李瀰)를 엄히 문초하여 공초를 받아 아뢰라고 명하였다.
의금부 당상이 입시하자, 이미의 공초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모른다고 대답했는가?"
하니, 지의금(知義禁) 남태제(南泰齊)가 대답하기를,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규위(李奎緯)의 말은 더욱더 근거가 없다."
하고, 이미를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윤시동(尹蓍東)·유수(柳脩)를 승지로 삼았다.
7월 7일 기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태묘의 가을 제사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예조 판서가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처음에는 밤낮으로 신경을 썼는데, 이제 이미 봉안(奉安)하고 나니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하다. 멀리 강화도를 바라보니 곧장 날아가고만 싶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는 특별히 가자(加資)하고, 강화 유수 정상순(鄭相淳)에게는 숙마 1필을 하사하라."
하였다.
이장오(李章吾)를 총융사로 삼았다.
원임 세 대신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가 금방 취소하였는데, 문안을 지체하였기 때문이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성 밖으로 나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갑자기 재앙을 만났으니 진실로 천만 이상한 일입니다. 그가 4년이 지난 뒤에 신의 죄상을 논하였는데, 하나는 성문(聖門)을 침범해 업신여겼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상을 거만하게 깔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허망하여 변론할 것조차도 없습니다만, 사람으로서 성인에게 죄를 짓고 신하로서 임금에게 죄를 얻었으니, 이러한 죄명을 지고서는 장차 천지의 사이에서 자립할 수 없습니다. 영해(嶺海)로 귀양보내는 가벼운 처벌과 선비들 사이에 끼이지 못하게 되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지은 죄를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성명께서 노하시어 그 말을 한 사람에게 물어 보아 충분하지 않자, 끝내 그 말을 한 자가 거명(擧名)한 사람에게 물으심으로써 정상이 모조리 드러나 남김없이 환하게 풀어졌습니다. 비록 신이 자신을 위해 하였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니, 결초 보은(結草報恩)하더라도 어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이 띠고 있는 직책은 조정이 모두 우러러보는 자리이고, 신이 탄핵을 당한 말은 신하의 끝없는 죄입니다. 만약 그 말을 한 사람이 터무니없고 성상의 권고가 보통이 아니라고 하여 갓끈을 휘날리고 띠를 매고서 정승의 자리에 의기 양양하게 나간다면, 이는 거리낌이 없는 것이며 염치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관직을 삭제하고 죄를 바르게 처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신의 천한 분수에 편안하도록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도타이 권면하고 싶기는 하나 지금 할 말이 없다. 경의 사양하는 글이 어찌 그리도 한결같이 지나친가? 경이 탄핵을 받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곧 한 가지 일이다. 한 가지 일에 대해 지금 말할 것이 없고 보면 한번 염치를 편 것이니, 경에게 지금 말할 것이 없다.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하여 사직하지 말고 즉시 승지와 함께 들어와서 나라의 체모를 안정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0일 임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창수(李昌壽)·신회(申晦)·심수(沈鏽)·정홍순(鄭弘淳)·이은(李溵)·윤급(尹汲)에게 신칙하여 즉시 들어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상소하여 처벌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전에 이미 시원하게 유시하였으니, 안심하고 승지와 같이 들어와 내가 직접 유시하는 말을 들어보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1일 계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동몽 교관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지사 박치화(朴致和)가 졸(卒)하였다. 상(喪)이 끝나는 대로 그의 손자를 채용하라고 특별히 명하고, 기로소(耆老所)로 하여금 제수(祭需)를 실어 보내도록 하였다.
왕손(王孫)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의 혼사(婚事)를 유학(幼學) 송낙휴(宋樂休)의 집에 정하라고 명하고, 송낙휴에게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7월 12일 갑술
왕손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의 혼사(婚事)를 유학 홍대현(洪大顯)의 집에 정하라고 명하고, 홍대현에게 벼슬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왕손 형제를 사제(私第)에 나아가라고 명하였다.
경기 감사 김종정(金鍾正)이 그의 어머니 병 때문에 상소하여 해임(解任)해 달라고 청하니, 체직을 허락하였다.
7월 13일 을해
이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를 경기 감사로, 병조 판서 조운규(趙雲逵)를 교동 수사(喬桐水使)로 특별히 제수하고, 시임 수사를 서울의 관직으로 보냈다. 대정 이후로 이조와 병조의 판서가 모두 인피하고 들어와 공사를 보지 않았고, 이날 임금이 직접 인사 행정을 보겠다는 명이 있었으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실(鄭宲)을 이조 판서로, 남태회(南泰會)를 병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7월 13일 을해
우의정 김상철이 연달아 글을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말이 더욱 간곡하였다. 임금이 사직을 허락하고, 또 입시하여 직접 유시를 들으라고 명하였다. 김상철이 명에 응하지 않고 또 처분이 내리기를 기다리자, 처분을 기다리지 말고 입시하라고 하여 여러모로 간곡하게 위로하고 이해시켰다.
조돈(趙暾)을 대사헌으로, 이헌묵(李憲默)을 집의로, 홍응보(洪應輔)를 헌납으로, 이형원(李亨元)을 정언으로, 이재간(李在簡)을 부응교로, 정상인(鄭象仁)을 수찬으로, 윤홍렬(尹弘烈)을 부수찬으로, 조영순(趙榮順)을 대사성으로, 정실(鄭宲)을 지경연으로, 이방엽(李邦燁)을 북병사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열흘 동안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기도 하였는데, 오늘이 그 기한입니다. 내일부터는 예전처럼 올리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한창 무더운 때를 당하였다고 하여 형조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7월 14일 병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뜰에서 보사제(報謝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우리 성상의 보령이 80세에 다다랐고 나라를 다스린 지도 40여 년에 이르렀습니다. 융성한 덕화와 깊은 사랑이 뭇 생명들에게 두루 젖어들었고, 큰 복과 아름다운 상서는 실로 과거 역사에 드물게 있었습니다. 온 동방의 백성치고 그 누가 고무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가까이 모시고 있으니, 그 기쁨이 곱절이나 됩니다. 이어 생각건대 금년은 어떤 해입니까? 기묘년111) 에서 금년까지는 실로 선왕조의 임오년112) 부터 경인년113) 까지와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므로 대소 신료들만 서로 고하며 기뻐하고 경축할 뿐 아니라, 성상께서도 옛날의 일을 끌어다 지금과 비교해 보신다면, 반드시 마음속에 억누를 수 없는 감회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왕조의 성대한 의식을 전하께서 따라 하지 않으실 수 없을 것이며, 경인년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올해 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들이 탑전에서 간절히 말씀드린 적이 한두 번 뿐만이 아니었는데도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 하실 말씀이 계십니까? 선왕조에서 경인년에 행한 일을 성상께서 정해년에 행하지 않으신다면, 성상의 마음이 편안하시겠습니까? 선왕조의 신하들이 경인년에 허락을 받았었는데, 오늘날 신하들이 전하에게 허락을 받지 못할 경우, 신하의 분의로 헤아려 볼 때에 또한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경인년에 술 자리를 베풀어 즐거워하셨던 것은 신이 오늘날 잔치를 열자고 청하는 심정입니다. 자신을 미루어 생각하는 위대한 성인의 어진 마음에 있어서 또한 어찌 아랫사람을 이해하는 도리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충정에 복받쳐 삼가 이렇게 호소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허락을 내려주시어 구구한 신의 바라는 바에 부응해 주소서."
하였다. 이날 빈계(賓啓)를 올려 잔치를 열 것을 청할려고 하였다. 그런데 임금이 향을 맞이하고 나서 땅에 엎드려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을 말로 아뢴 다음,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모시고 앉아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왕세손이 상소를 읽어가다가 경인년이란 구절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마음이 장하다."
하니,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입을 모아 일제히 대답하기를,
"글자마다 혈침(血忱)114) 이고, 구절마다 지성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너의 글을 살피고 너의 정성을 돌아보니, 본 일과는 상관없이 너의 글을 가상히 여긴다. 이미 선영에게 아뢰었고 내 마음은 돌과 같으니, 네가 백 번 글을 올려 보았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그렇기는 하나 그 정리를 저버릴 수 없다. 내국으로 하여금 차를 끓이게 하여 오늘 아침 식사 때에 반주(飯酒)를 대신하여 차를 내오도록 하라. 내가 안에서 꿀차를 내전(內殿)에 올리어, 할아비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는 나의 뜻을 보이겠다."
하였다.
7월 15일 정축
임금의 건강이 담후(痰候) 때문에 좋지 않았으므로, 조정 2품 이상의 봉조하·육조의 당상·대사간이 문안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어제 새벽에 어떤 도둑이 포도 대장 이태상(李泰祥)의 배를 칼로 찔렀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웃 나라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어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한(漢)나라에 잠팽(岑彭)과 내흡(來歙)의 사건115) 이 있었는데, 적국과 대치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고, 당(唐)나라에는 무원형(武元衡)의 사건116) 이 있었는데, 그게 비록 회서(淮西)의 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일이지만 그 사실 역시 특별한 기록이다. 오늘날 비록 기강이 없다고 하지마는 어찌 3백 년 동안 없었던 망측한 일이 있단 말인가? 그를 잡지 못하면 나라의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좌·우 포도청으로 하여금 현상금을 걸어 금일 안으로 잡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 좌수사 이한창(李漢昌), 대구 영장 이한정(李漢鼎), 길주 목사 이한풍(李漢豊)의 체차를 모두 허락하였다. 이들은 이태상의 세 아들인데, 대신이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이태상의 포도 대장 직임도 체차를 허락하고, 약물(藥物)을 하사하여 치료하도록 하였으며, 김성우(金聖遇)로 대임시켰다. 또 우포도 대장 윤태연(尹泰淵)을 파직시키고 구선행(具善行)으로 대임시켰다. 그뒤 포도청에서 이태상의 집 종 이남(二男)이 어떤 비첩(婢妾)을 놓고 주인과 다투다가 틈이 생겨 해치고자 한 실상을 알아냈는데, 그날로 이남을 효시(梟示)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또 김지묵(金持默)·구현겸(具顯謙)의 집 종이 작당하여 포졸을 구타하고 대장의 이름을 불러대며 비난했다고 아뢰자, 두 사람을 엄히 문초하여 구두의 공초를 받고 말하지 않은 대각의 신하들은 모두 관직을 삭제하라고 하였다.
이유수(李惟秀)를 발탁하여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이은(李溵)을 대사헌으로, 신경준(申景濬)을 사간으로, 서유원(徐有元)을 수찬으로, 민홍열(閔弘烈)을 겸 문학으로, 유세복(柳世復)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내국의 세 제조에게 명하여 본원(本院)에 숙직하도록 하였다.
7월 16일 무인
조재준(趙載俊)을 지평으로, 김종정(金鍾正)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윤희동(尹僖東)을 전라 좌수사로 특별히 제수하여 즉시 부임하도록 하였다.
7월 17일 기묘
이날부터 뜰에서 문안드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면헌(尹勉憲)을 승지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외방에 있는 신하들이 들어왔는지의 여부를 하문하고 나서, 신회(申晦)·원인손(元仁孫)·심수(沈鏽)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정홍순(鄭弘淳)을 충주 목사로, 이은(李溵)을 삭령 군수로 특별히 보외하였는데, 정홍순은 숙직하라는 말을 듣고도 도성에 들어왔다가 바로 나갔고, 이은은 애초부터 도성에 들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7월 19일 신사
심수(沈鏽)를 대사헌으로, 유운익(柳雲翼)을 정언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지돈녕으로 삼았다.
7월 19일 신사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임금의 환후가 이틀 만에 나았다고 하여 축하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7월 20일 임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평안 감사 박상덕(朴相德)의 장계로 인하여 곽산(郭山)의 읍 터가 매우 좁고 우물이 부족하다고 하여 옛터로 다시 옮기기를 청하니, 비변사의 낭관을 보내어 적간(摘奸)한 후에 품처하라고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여주(驪州)의 여덟 개 큰 숲에 대한 일로 아뢰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그 숲은 여지도(輿地圖)에 실려 있습니다. 비록 두 능의 화소(火巢)117) 밖이기는 하나 경작해서는 미안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 실상을 모르고 다만 내수사에 속해 있다고 들었을 뿐인데, 아마도 모리배의 짓인 듯하다. 이성규(李聖圭)는 측근의 신하로서 수령이 되었다면 소를 올려야 옳을 터인데 얼어붙은 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잘못이다."
하였다. 이성규는 여주 목사로서 여덟 개 큰 숲에 관한 일로 상경했다가 오랫동안 직임에 복귀하지 않았는데, 막 서용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에 언급한 것이다.
7월 21일 계미
유신(儒臣)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시경》의 비풍(匪風)·하천장(下泉章)을 강하였는데, 이날이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이었기 때문이다.
7월 22일 갑신
약원에 명하여 숙직을 철폐하라고 하였다. 예조의 관례에 따라 올리는 초기(草記)는 정원에서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유수(李惟秀)를 승지로 삼았다.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돌보시고 선왕의 영령이 도우시어 우리 성상의 환후가 며칠 안에 회복되셨으니, 이는 실로 팔도의 모든 백성들이 다같이 기뻐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더구나 신은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애일(愛日)의 효성은 병이(秉彛)에 뿌리하여 장수를 비는 소원이 경사를 당하니 더욱 간절해집니다. 신이 이미 지극한 정(情)을 품고 있으면서 두려워 머뭇거리며 말하지 않는다면 효도가 아닐 것입니다. 대체로 신이 저번의 상소에서 청한 것은 진실로 올 정해년이 옛날의 경인년118) 과 딱 들어맞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의 일에 느끼고 지금의 일을 기뻐하여 예전대로 따라 할 것을 우러러 기대했으나, 효성이 얕고 언사가 졸열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바람에 윤허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성상의 뜻을 신이 모르지는 않지만, 신의 억울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만 갑니다. 성상께서는 80을 바라보는 보령으로 큰 복을 누리시고 계십니다. 성상께서는 시험삼아 스스로 생각해 보소서. 요(堯)·순(舜)·문(文)·무(武) 이후로 어느 성인이 이런 장수를 누렸으며 어느 제왕이 이런 녹을 받았습니까? 오늘날 신하들이 역사에 드문 좋은 때를 만나 전례(典禮)상 그만둘 수 없는 성대한 일을 따라서 하고자 하는데, 어찌 겸양의 덕만 고수한 채 한결같이 거부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전년도에 성상의 건강이 회복되었을 때 마땅히 경축의 잔치를 열었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그럭저럭 넘기고 있으므로 신의 마음이 섭섭하여 스스로 풀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틀 만에 병이 나은 뒤이니, 하늘이 도와주신 경사를 선양하지 않을 수 없고, 조종(祖宗)이 돌보아 주신 아름다움을 꾸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하들이 미처 청하지 못했더라도 전하의 마음에는 필시 감회가 일어나실 것이고, 전하께서 비록 허락하고 싶지 않더라도 신하들은 반드시 청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의 성격상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이고 정리상 막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하건대 숙직을 철폐하라는 명이 있었고 나라의 경사가 겹치고 있으니, 더욱 마땅히 기쁨을 기념하는 도리가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신의 정리상 어찌 헛되이 성상을 번거롭게 해드리기만 하고 소청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소이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번거롭고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다시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빨리 깊이 헤아리는 어진 마음을 넓게 가지시어 특별히 윤허한다는 명을 내리시어 못난 신의 지극한 정성을 펴게 하시고 뭇신하들의 큰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약원에서 숙직을 철폐한 뒤에 신하들이 하례 드릴 일로 빈청(賓廳)에 모여 막 계사를 올릴 것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내국에서 입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이 약원에 내린 비답을 보고는 또 움직일 기색이 있다. 만약 글을 올리려고 할 경우 궁관(宮官)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궁관이 입대할지의 여부를 물어보라고 하였다. 궁관에게 명하여 왕세손의 상소를 가지고 들어오라고 하였는데, 보덕 정상인(鄭象仁), 문학 구상(具祥), 겸 문학 민홍열(閔弘烈), 겸 사서 정창순(鄭昌淳), 설서 홍낙신(洪樂信)이 상소를 받들고 나아가 엎드렸다. 설서에게 명하여 읽어 아뢰라고 했는데, 경인년에 경하의 잔치를 열었다는 부분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잔치를 열자고 청한 것인가, 하례를 드리겠다고 청하는 것인가?"
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하례를 드리자고 청했었는데, 지난번 상소에서는 지극한 정으로 두 가지를 아울러 청하였습니다."
하자, 왕세손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네가 진달한 정성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것만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
하니, 왕세손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성상의 마음을 번독(煩瀆)하였으나 굽어 통촉하심을 받지 못하였는데, 또 이 경사를 만났으므로 감히 미미한 정성이나마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니, 실로 억울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7월 23일 을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영의정 김 치인이 말하기를,
"왕세손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아직까지 내리지 않으셨기에 감히 우러러 말씀드립니다."
하니, 임금이 도승지 이유수(李惟秀)로 하여금 비답을 쓰게 하기를,
"너는 왜 이 글을 올렸는가? 너는 왜 이 글을 올렸는가? 해동(海東)의 한쪽 귀퉁이 나라에서 할아비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고 있다. 너에게 바라는 것은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니, 너의 마음에 나의 고심을 깊이 체득해야 할 것이다. 어제의 일은 어린 나이에 나의 뜻에 감동하여 양지(養志)119) 를 크게 깨달은 데에 말미암은 것으로 여긴다. 지금 이후로 믿는 것은 오직 너 뿐이다. 이제 듣건대 비답이 아직 하달되지 않았다고 하니, 세손의 체면이 중하므로 특별히 비답을 내려 안팎으로 하여금 모두 너와 나의 마음을 알게 한다."
하고, 도승지에게 명하여 동궁에 가서 전달하라고 하였다.
여주(驪州)에 적간(摘奸)하러 갔던 선전관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서계(書啓)를 보건대 백성들이 이익을 볼 곳은 아니니, 여덟 개의 큰 숲을 측량하는 것은 그만두도록 하라. 이 하교 뒤에 마땅히 참작이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전 목사에게 ‘기한을 정하여 서용하지 않는다.’는 명도 분간(分揀)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7월 25일 정해
대신과 비국의 유사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전라 감사 홍낙인(洪樂仁)의 장계에 관해 말하기를,
"본영의 서남쪽 성루(城樓) 및 수백 칸의 창고를 시설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본도에 있는 군작미(軍作米) 1천 석, 여군목(餘軍木) 30동, 기부전(記簿錢) 4천 냥(兩)을 떼어주어 속히 일을 완결 짓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치인이 경상 감사 조돈(趙暾)을 신칙하여 하루 이틀 안으로 내려보낼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상 감사 김응순(金應淳)이 늙은 부모 때문에 면직해 달라고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김치인이 대답하기를,
"조돈을 이미 내직에 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외직에 시험해 보소서."
하였다. 이때 조돈이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임금이 사헌부의 직을 체차시키고 특별히 영남 도백에 제수했던 것이다.
7월 27일 기축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이조 판서 정실(鄭宲)을 입시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인사 행정을 열라고 명하였다. 이득종(李得宗)을 대사헌으로, 임계(任瑎)를 장령으로, 한집(韓鏶)·서유린(徐有隣)을 지평으로, 송재경(宋載經)을 수찬으로, 이재간(李在簡)을 필선으로, 이사증(李師曾)을 정언으로, 정존겸(鄭存謙)을 부제학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동경연으로 삼았다.
7월 28일 경인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9일 신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순제군(順齊君) 이달(李炟)을 엄히 문초하여 구두의 공초를 받으라고 명하였다. 이어 남해현(南海縣)에 귀양보내라고 명하고, 말하지 않은 대관(臺官)의 관직을 모두 삭제하였다. 순제군 달이 ‘도망한 노비를 추심하다가 사람을 죽여 우물 속에 집어 넣었다.’고 형조에서 논계(論啓)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중한 것이다. 속칭 ‘종친(宗親)의 반열은 물금첩(勿禁帖)120) 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는데, 어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이어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액예(掖隷)가 밤을 틈타 길거리에서 의녀(醫女)를 묶어 놓고 치마를 벗기고서 추행하였다고 하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주모자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중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장령 임계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홍응보(洪應輔)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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