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7월 1일 임진
내국 도제조 김치인의 사직을 허락하고 한익모로 대임시켰다.
윤7월 2일 계사
‘산음현(山陰縣)에 일곱 살 먹은 여자가 잉태해서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경상 감사 김응순(金應淳)이 치계(馳啓)하였는데, 임금이 이는 요괴의 인물 중의 큰 것이라고 하면서 크게 우려하였다. 좌의정 한익모와 좌부 승지 윤면헌(尹勉憲)이 없애버리자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역시 나의 백성 중의 한 아이이다.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문학 구상(具庠)에게 명하여 달려가서 염탐해 보고 오라고 하였다.
윤7월 3일 갑오
김한기(金漢耆)를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장령 신오청(申五淸)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선비들의 습관이 단정치 못하여 시권(試券)을 바칠 때에 감시관(監視官)의 하리들과 결탁하여 뇌물을 많이 주며, ‘연접 삼동(連接三同)’이라는 말이 온 세상에 파다합니다. 과조(科條)를 엄히 세워 간사한 싹을 끊게 하소서."
하고, 또 ‘야간 통금이 엄하지 않다.’면서 우포도 대장 구선행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신오청이 또 사실과 어긋났다고 인피하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윤7월 4일 을미
김응순(金應淳)을 대사간으로, 정언섬(鄭彦暹)·이심해(李心海)를 장령으로, 조준(趙㻐)을 헌납으로, 김상집(金尙集)을 수찬으로, 조창규(趙昌逵)를 지평으로, 윤승열(尹承烈)을 응교로 삼았다.
윤7월 5일 병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산음현(山陰縣)의 일로 대신들에게 하문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세상에는 간혹 괴이한 기운이 모인 곳이 있습니다. 옛날 은(殷)나라의 상상(祥桑)이 아침에 싹이 났다가 저녁에 말라 죽었다고 하는데, 이는 실로 은나라 중종(中宗)이 자신을 되돌아 보고 덕을 닦은 것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음양(陰陽)이 교감하지도 않고 공연히 생겼겠는가? 수령의 도리에 있어서는 그 애의 아비가 있는지의 여부를 상세히 탐문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고한 말 가운데 다만, ‘날과 달로 잘 자란다.’는 등의 말로 장황하게 늘어놓아 먼저 소문을 퍼뜨려 소동을 일으켰으니 매우 잘못하였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러한 괴물은 저절로 소멸될 것입니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시종신(侍從臣)의 양아버지 품계가 더 올라갈 자리가 없게 된 다음에 비로소 생부(生父)의 품계를 올려 주게끔 법전에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한두 명의 시종신의 생부와 양부(養父)가 모두 가자(加資)의 은택을 입은 자가 있기도 합니다. 은전은 매우 중한 것이니, 이것을 거조(擧條)로 내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직접 어제(御題)를 써서 내려 신하들로 하여금 글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점수의 순위를 매기고 나서 직접 상을 내리겠다고 명했다.
지의금 남태회(南泰會)·동의금 유언술(兪彦述)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이달(李炟)은 먼저 작처(酌處)를 겪었다.’면서 잡아다 조사하여 사정을 알아낼 것을 청하니, 팔의(八議)의 법121) 이 법전에 실려 있으니, 다시 제기할 것이 못된다고 비답하였다.
이은춘(李殷春)을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윤7월 6일 정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능마아강(能魔兒講)122) 의 시험 보였는데, 이제독(李提督)123) 의 봉사손(奉祀孫)인 무겸(武兼) 이종윤(李宗胤)을 해조(該曹)에 선전관의 빈 자리가 날 때까지 기록해 두었다가 채용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7일 무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학의 원점 유생(圓點儒生)124) 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수석을 차지한 진사 윤면승(尹勉升)을 직부 전시(直赴殿試)케 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9일 경자
달이 심성(心星) 뒤의 별을 범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백두산(白頭山)의 사전(祀典)에 관해 아뢰니, 시임·원임 대신과 2품 이상이 내일 빈청(賓廳)에 모여 의견을 드려 아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조창규(趙昌逵)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도(世道)가 점점 타락하여 온갖 괴이한 일이 거듭 생기고 있습니다. 관료들 사이에 탄핵이 잇따라 일어나 조정의 벼슬자리가 거의 비어 있으므로, 분위기가 스산하고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정신을 쏟는 곳과 배포(排布)125) 가 있는 바를 요약해 말하면, 전형의 관원이 아닐 경우에는 필시 문형(文衡)의 자리인데, 이게 어찌 그 이유가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전 참판 서명응(徐命膺)은 사납고 간사하며 일 꾸미기를 좋아하고 제멋대로 처리하며 간계를 부려 자신을 자랑합니다. 처음에는 관료들의 상소를 저지하다가 명의(名義)에 버림을 받았고, 끝내는 사류(士類)에게 아부하고 빌붙어 청환(淸宦)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꾀하였습니다. 그의 행실을 추적해 보면 천만 번 변신하였습니다. 그의 명성과 세력이 조금 확장되자 의욕이 점점 높아졌는데, 대사헌이 되자 혼자 사적인 글을 인사 행정을 논하는 자리에 보내 남을 비난하였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 채 도도하게 잘난 척하였습니다. 남 위에 서려는 마음과 승진하려는 생각이 뱃속에 차 있어 매일 더 심해졌습니다. 엄선해야 할 대제학 자리를 온갖 계책으로 뚫어서 통과했고, 전관(銓官) 자리를 기필코 한번 뛰어오르려고 하였습니다. 또 거칠고 패악한 아우와 경솔하고 천박한 아들을 내보내 밤낮으로 돌아다녀 좌우로 결탁하게 하였습니다. 공적인 벼슬자리를 사사로이 이용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청직의 선발을 지목하며 사람들을 꾀였습니다. 냄새나 맡고 쫓아다니는 무리를 불러모아 자기 대신 칼날을 들리어 조그만 원한도 반드시 공격하고 살짝 건드려도 반드시 밀어 제쳤습니다. 홍문관과 전형의 자리를 꼭 독점하려 하고 청요직(淸要職)과 이익이 많은 자리는 마음대로 농간을 부리고 있습니다. 조정을 자신들의 놀이터로 삼아 풍파가 멎을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후로 전형에 참여해서는 오직 사사로움을 챙길 줄만 알아서 성균관의 시험을 치르자마자 많은 물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신은 서명응을 전형의 당상과 문형의 의망에서 먼저 삭제하고, 이어서 무너뜨리고 어지럽힌 죄로 다스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조창규가 대간에 의망한 사람은 서명응이 비난 배척한 자였다. 그런데 감히 그 사람을 논박하였으니, 염치가 없다고 하겠다."
하고, 조창규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10일 신축
시임·원임 대신과 2품 이상의 유신(儒臣)에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가지고 입시하여, 읽고 나서 의견을 수렴하라고 명하였다. 판부사 서지수(徐志修)가 의견을 말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발상(發祥)의 설에 감동되어 이렇게 질문하시니, 아! 지극한 뜻이 매우 훌륭하십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조(國朝)의 발상지는 대략 경흥(慶興)에 있는데, 백두산과 경흥은 서로 4, 5백 리나 떨어져 있고 보면 발상지와 탄생지의 소재로 헤아려 볼 경우 혹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조종(朝宗)이 되는 산에 대한 설에 있어서는, 경전(經典)이나 정사(正史)에도 나타나 있지 않고 몇 사람의 논의에 불과하니, 아마도 근거할 만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오례의(五禮儀)》의 사전(祀典)은 육진(六鎭)을 개척한 뒤에 정했는데, 북방 산악의 제사 차례에 비백산(鼻白山)만 넣고 백두산은 넣지 않은 것은 의의가 있는 듯합니다. 지금 만약 증감(增減)하려고 할 경우, 봉상시(奉常寺)에서 신실(神室)로 받드는 산천(山川)의 차서에 반드시 구애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얕은 견해로는 감히 장담하지 못하겠으니,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예를 잘 아는 신하에게 널리 물으시어 신중한 도리를 다 하소서."
하고, 형조 판서 홍중효(洪重孝)가 의견을 말하기를,
"백두산은 우리 나라 산맥의 근간이니, 이번에 제기된 망사(望祀)126) 의 의론은 진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예기(禮記)》에 ‘제후는 나라 안의 산천에 제사지낸다.’라고 하였는데, 신은 이 산이 과연 나라 안에 있는 산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목극등(穆克登)이 경계를 정할 때에 분수령(分水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는데, 그 산마루에서 백두산과의 거리가 거의 하루 길이나 되니, 아마도 그곳을 나라 안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단을 설치할 장소에 있어서는 어느 고을로 정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오직 무산(茂山)과 갑산(甲山)에서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고을 지대는 일찍 얼어붙었다가 늦게야 해동이 되므로 8월에도 더러 한 길이나 되게 눈이 내리기도 하며, 2월에는 얼음이 한 길도 넘게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편상 백성을 동원하여 길을 정비하고 눈을 쓸고 얼음을 깨낸 이후에야 제사를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바람과 추위 그리고 비나 눈을 만날 경우 아전과 역졸들이 동사(凍死)를 면할 수 있을지도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기》를 고찰해 봐도 맞지 않고 계절로 맞춰 봐도 행하기 어려운데, 풍패(豊沛)127) 의 백성에 대한 폐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점이 또 이와 같으니, 이것을 어찌 그만둘 수 없는 행사라고 하겠습니까? 신의 얕은 견해로는 아마도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나머지는 널리 물어 보고 처리하소서."
하였다. 하교하기를,
"좌상이 그 일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 그 뜻은 아름답다. 그렇지만 막중한 사전(祀典)을 가벼이 의논할 수는 없고 또한 감히 자기의 견해를 옳다고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먼저 유신으로 하여금 〈용비어천가〉 제1장을 읽게 한 것인데, ‘지금 우리 시조는 경흥에 집이 있다.[今我始祖 慶興是宅]’라는 여덟 글자가 내 마음에 더욱 간절히 와닿았다. 이는 특히 백두산이 우리 나라 산이 된다는 더욱 명백한 증험인 것이다. 아무리 우리 나라의 땅이 아니라 하더라도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우리 나라에 있는데 말할 게 있겠는가? 망사(望祀)의 일절(一節)을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되, 제단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곳은 도신에게 물어서 상세하게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김기대(金器大)가 갑산에 자리를 잡았다고 장계를 올렸다. 예조에서 그곳에다 각(閣)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되, 내년 정월부터 시행하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윤7월 11일 임인
사직 서명응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불행하게 문원(文苑)에 천거되었고 또 불행하게도 전형(銓衡)의 장관을 보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 조창규가 상소를 올린 바람에 신이 기미를 일찍 보지 못한 실수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대체로 ‘횡포하게 나를 대하면 스스로 반성한다.’고 맹자(孟子)가 말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지만 일찍이 그 의의는 들었습니다. 조창규가 없는 일을 만들어 극도로 죄를 얽어 짠 것에 있어서는 신이 마땅히 일소(一笑)에 부쳐, 자신에게 침을 뱉더라도 씻고 참아야 한다는 교훈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의 이야기 줄거리가 근래에 신이 탄핵받은 것은 전형과 문임을 차지하려고 다투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신이 세도(世道)를 위해서 크게 걱정하고 있는 바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창규도 이를 걱정한단 말입니까? 신은 조정에 조그만 세력도 없고 세상에 미력한 지원도 없으니, 비록 정신을 쏟고 배포하자 하여도 그 누가 신의 말을 따르려 하겠습니까? 또 더구나 전후로 대간이 올린 상소로 인해 신의 아우와 사촌들이 차례로 비난을 받았는데, 신이 또 신의 아우와 아들을 풀어서 자신을 손상시키고 또 지친(至親)까지 손상시킨단 말입니까? 그가 스스로 교묘하고 치밀하게 치장하여 사람을 모함한 묘책으로 여길 것입니다만, 자신의 헛점을 스스로 드러내기에 알맞은 것입니다. 신이 조정에 나온 지 10여 년에 천력한 것이 많았습니다. 매번 넓고 넓은 하늘과 같은 성은을 생각할 때마다 재주가 없어서 보답할 방법이 없기에 밤중에 일어나 탄식하면서 부끄러워 땀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잘못을 속죄할 수 있는 하나의 일이 있습니다. 현재 벼슬을 하려고 앞다투어 찾아다니는 풍조가 매우 큰 걱정거리이니 만큼, 만약 신과 같은 사람을 물러가 쉬게 하여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얻게 한다면, 또한 넉넉히 세도를 진정시키는 한 가지 단서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은 이로 인하여 저절로 몸과 명예를 보전하여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니, 이른바 ‘은혜를 갚으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은혜를 갚는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요사이 시끄럽게도 벼슬을 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풍조가 성행하는 때에 비난의 화살이 경에게 미쳤으니, 놀라움과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미 하유하여 처분하였는데 경은 왜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하였다.
윤7월 12일 계묘
신사운(申思運)을 장령으로, 이시정(李蓍廷)을 헌납으로, 남현로(南玄老)를 부교리로, 서명신(徐命臣)을 병조 참판으로, 이달해(李達海)를 전라 병사로 삼았다.
윤7월 13일 을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소령원(昭寧園)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태학(太學)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에게 강경(講經) 시험을 보였다.
윤7월 15일 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강원 감사 김귀주(金龜柱)의 장계에 올 가을의 합동 조련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고 하니 윤허하였다. 삭령 군수(朔寧郡守) 이은(李溵)을 내직에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은이 문안(問安)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삭령에 보외하였었는데, 한익모가 ‘삭령은 곧 장단(長湍)의 소관이고 겸영장(兼營將) 이택주(李宅胄)는 일찍이 이은의 막하 비장으로 있었으므로, 군무(軍務)를 거행할 때에 구애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일찍이 이와 같은 관계일 경우에는 비록 외직에 보임하더라도 모두 다 다른 고을로 바꾸어서 임명했었습니다.’라고 아뢰었기 때문에 이 명을 내렸던 것이다.
윤7월 15일 병오
임금이 경복궁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손이 수행하였다. 태학의 도기 유생(到記儒生)에게 제술 시험을 보였다. 수석을 차지한 이사렴(李師濂)에게는 직부 전시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어가를 수행한 군졸들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였다. 14일 전강(殿講) 때 유생(儒生)들 가운데 순통(純通)한 자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차점자를 급제시키려고 하였는데, 명관(命官) 한익모가 정식(定式)에 어긋나므로 안된다고 고집하자 결국 점수만 주었다. 임금이 권장하는 뜻에 부담이 된다고 여겨 옛 궁궐로 나아가 또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이날 비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어서 제출된 시권(試券)이 겨우 15장 밖에 안되었다.
윤7월 16일 정미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활쏘기의 시험을 치른 사람에게 상을 내렸다.
윤7월 17일 무신
임금이 직접 소령원(昭寧園)에 향을 전하였다.
이조 판서 정실(鄭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성상의 환후를 살펴 보건대, 비록 전에 비해 차도가 있기는 하나 여러 가지 기거 동작에 있어 아직 평상시와 같이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오늘 갑자기 비속에 어가의 행차가 있을 줄 예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이는 성상께서 옛날을 추모하여 선비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고 싶은 뜻에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지만 이는 시급한 일이 아니므로 날씨가 개면 거행해도 되고 궁궐의 뜰에 모아 놓고 기예를 시험 보여도 될 터인데, 어찌하여 비바람 속에서 성체(聖體)를 피로하게 하여 요양의 도리를 소홀히 하신단 말입니까? 옛날 무왕(武王)은 춘추 80세에 소공(召公)은 90여 세에 공업(功業)을 이루었고 치화(治化)가 확정되었으니, 어찌 걱정할 만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소공은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끝내 큰 공덕에 누가 된다.’라는 등의 말로 끊임없이 경계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어찌 임금의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고 하여 경계의 말을 올리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명을 내리실 때에는 반드시 대중의 의견을 따라 일체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셔서 포용하는 도량을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금번의 일은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윤7월 19일 경술
황경원(黃景源)을 대사헌으로, 정상인(鄭象仁)을 응교로, 이은(李溵)을 형조 참판으로, 김상집(金尙集)을 부교리로, 이택수(李澤遂)·조준(趙㻐)을 부수찬으로, 이휘중(李徽中)을 보덕으로, 김재순(金載順)을 겸 보덕으로 삼았다.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한성부의 당상과 낭청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원묘(元廟)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의 장적(帳籍)을 경건히 맞이하여 용정(龍亭)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귀하다. 옛날에 말을 매었던 나무가 저기에 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고, 어의궁(於義宮)에 봉안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장적 가운데 쓰여 있는 연호(年號)는 만력(萬曆) 몇 년인가?"
하니, 판윤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43년 을묘년128) 입니다."
하였다. 어의궁에 봉안할 때 세장(細仗)과 고취(鼓吹)를 갖추라고 명하였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그 말씀은 신이 드렸으나 찾아내는 일은 홍계희(洪啓禧)가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러한가?’ 하고 이어 말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20일 신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비국의 낭관이 곽산(郭山)의 새 읍터와 옛 읍터를 적간(摘奸)하고 나서 올린 수본(手本)에 따라 옛터로 다시 옮길 것을 청하니 임금이 입시한 비국 당상에게 물어보고 윤허하였다. 김치인이 또 대사성의 정고(呈告)를 시행치 말고 성균관의 시험을 실시하라고 신칙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공자께서도 나라의 도적(圖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예의를 표시하였는데, 더구나 백 년 전의 어첩(御牒) 봉안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마땅히 왕세손과 함께 봉안각(奉安閣)에 나아갈 것이니, 시위(侍衛)들은 입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복궁의 동구 밖으로 나아가 어첩을 경건히 맞이하여 어의궁으로 가 참배하고 나서, 왕세손에게 명하여 어첩을 경건히 봉안각에 봉안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낭청은 승진시켜 서용하고, 본궁(本宮)의 차지 중관(次知中官)과 예방 승지에게는 각각 숙마 1필을 면급(面給)하고, 여러 승지에게는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하고, 찬의(贊儀)와 춘방(春坊)의 관원(官員), 입시한 사관, 배설(排設)한 사약(司鑰)에게는 각각 어린 말 1필을 하사하고, 세손궁의 사약·상례(相禮)·인의(引儀)에게는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진전(眞殿)으로 나아가 예를 행하고 나서 용흥(龍興)의 옛 궁궐로 나아갔다. 어가를 돌릴 때에 상언(上言)을 받아들이라 명하고, 또 동촌(東村)의 한인(漢人)들 중에 평소 활을 잡아 본 사람을 내일 융무당(戎武堂)에 대명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21일 임자
임금이 융무당에 나아가 동촌의 한인 무사들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이고 나서, 합격한 4명에게 상을 내렸다.
심발(沈墢)을 대사간으로, 심수(沈鏽)를 예조 판서로, 이치중(李致中)을 교리로 삼았다.
윤7월 22일 계축
예조에서 아뢰기를,
"영녕전(永寧殿) 부연(浮椽) 위에 깐 판자가 지난 밤의 비에 젖어 부러졌고 기와도 떨어졌습니다. 날짜를 가릴 것 없이 오는 24일에 위안제(慰安祭)를 설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처음에는 도제도와 예조 당상에게 명하여 봉심하게 했다가, 다시 친히 봉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약방·정원·옥당이 모두 청대(請對)하였는데, 여섯 승지를 해임시키고 유신(儒臣)들은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건공탕(建功湯)도 놔 두라고 명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내국 제조 조명정(趙明鼎)의 체직을 허락하고, 이창의(李昌誼)로 대임하게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의 뜰에서 태묘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이어 태묘에 나아가 참배하고 나서, 영의정 김치인에게 명하여 전내(殿內)에 봉심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영녕전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또 김치인에게 명하여 봉심하게 하였는데, 김치인이 부연 위의 판자 중에 썩은 것이 있다고 아뢰자 예조 판서 심수에게 명하여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피고 예방 승지에게 명하여 제물을 봉심하도록 하고 나서 환궁하였다.
윤7월 23일 갑인
사직(司直) 서명응이 상소하여 휴치(休致)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우 괴이하다. 조돈 한 사람을 내 겨우 달래고 나자마자 서명응이 또 짝맞추어 나왔구나."
하고, ‘마음에 무슨 생각이 생겼기에 붓을 들었단 말인가? 대단히 지나치다.’라고 비답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제조 이창의(李昌誼)의 체직을 허락하고, 신회(申晦)로 대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윤7월 24일 을묘
이유수(李惟秀)·민백흥(閔百興)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의 뜰에서 태묘의 환안제(還安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승지가 연주군 부인(連珠君夫人)의 장적(帳籍) 및 인빈방(仁嬪房)의 가직노(家直奴)의 호적을 조사해서 아뢰었는데, 한성부의 당상과 낭관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송현궁(松峴宮)이 원묘(元廟)의 옛 궁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저경궁(儲慶宮)임을 알았다. 어의궁에 3대의 장적을 봉안한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니다."
하였다. ‘한성부 당상에게 숙마(熟馬)를 내리고, 한성부 낭청은 수령의 빈 자리가 나오면 채용하라.’는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좌승지 민백흥(閔百興)에게 명하여 추기(追記)를 써서 저경궁에 걸게 하고, 도승지 이유수(李惟秀)에게 명하여 어의궁에 봉안할 어첩을 모시고 갈 때 세장(細仗)과 고취(鼓吹)로 앞에서 인도하라고 명하였다.
정존겸(鄭存謙)을 부제학으로, 윤승렬(尹承烈)을 응교로, 김상묵(金尙默)·김재순(金載順)을 교리로, 김상집(金尙集)·민홍렬(閔弘烈)을 수찬으로, 이택수(李澤遂)·이헌묵(李憲默)을 부수찬으로, 정상인(鄭象仁)을 겸 보덕으로, 김상묵(金尙默)을 겸 문학으로, 조준(趙㻐)을 겸 사서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이동현(李東顯)을 대축(大祝)으로 차출하는 일 때문이었다. 낭관 이종영(李宗榮)을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좌의정 한익모가 처분이 과하다고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일개 낭청을 위해서 이와 같이 변명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다. 내국의 제조 신회(申晦)를 파직하라 명하였는데,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이날 패초를 어긴 대각의 신하들에게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을 내국의 제조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가서 판위(板位)로 나아갔다. 도승지 이유수가 이미 어첩(御牒)을 간심(看審)하여 장정(裝幀)했다고 앙주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기특하다. 지금 이 마음을 조금 풀었다. 만약 지신사(知申事)129) 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 문에서 밤을 지새웠을 뻔하였다."
하고, 도승지 이유수, 좌승지 민백흥에게 가자(加資)하는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윤7월 25일 병진
임금이 숭정전의 뜰에서 저경궁(儲慶宮)의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이종영(李宗榮)·김둔(金鈍)을 귀양보내되,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라는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이는 제관(祭官)을 가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전설사(典設司)로 나아가 건공탕(建功湯)을 들이라고 명하니, 제조 조명정이 가지고 들어왔다. 임금이 제조가 가지고 들어온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하문하니, 부제조 민백흥이 말하기를,
"도제조가 낭관에게 처분을 내릴 때 하교하신 말씀 때문에 황송하여 감히 입시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남태회(南泰會)가 ‘부총관(副摠管) 조계태(趙啓泰)가 신병이 위독해져 숙직을 교대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시 차출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입직하지 않은 총관 유한소(兪漢蕭)를 월곶 첨사(月串僉使)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상소하여 인책(引責)하였는데,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윤7월 26일 정사
내국 도제조 한익모의 사직을 허락하고, 김양택(金陽澤)으로 대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윤7월 28일 기미
부수찬 이헌묵(李憲默)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인용해 경계의 말씀을 드렸는데,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비답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처분의 명을 기다리니,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7월 29일 경신
빈대(賓對)를 행할 것을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병이 났다고 차자를 올리자, 의례적인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차대를 하라는 명을 취소하였다.
산음 어사(山陰御史) 구상(具庠)이 입시하여 서계(書啓)를 읽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탐문하였는가?"
하니, 구상이 말하기를,
"여러 방법으로 캐물어 그 정상을 알아냈습니다. 본관(本官) 및 단성 현감(丹城縣監)과 같이 조사하였더니, 종단(終丹)의 오빠 이단(以丹)의 공초가 들은 바와 같았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소금 장사 송지명(宋之命)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종단의 나이가 정말 일곱 살이었는가?"
하니, 구상이 말하기를,
"그 이웃에 같은 시기에 태어난 아이가 있다고 해서 데려다가 물어보았더니, 과연 일곱 살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키는 얼마나 되던가?"
하니, 구상이 말하기를,
"몸이 이미 다 자랐습니다. 송지명을 감영으로 잡아다 도신과 같이 엄히 문초해 보았더니, 한결같이 이단이 고한 말과 같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史官)은 마땅히 사책에 그대로 써야 할 것이다. 일곱 살 아이가 애를 낳았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미 그 지아비를 알아냈으니, 현혹된 영남의 민심이 거의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구상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사의 보고에 간음한 사람이 곤장 한 대도 치지 않아 자백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내가 예상했던 바와 우연히 합치된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 조사를 끝냈다고 나의 마음이 어찌 해이되겠는가? 괴물은 괴물이다. 내 비록 8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나의 덕이 요괴를 이길 것이다. 어찌 사서(史書)에 없는 일을 들을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을 처리하는 것은 별일이 아니다. 비록 은 고종(殷高宗)의 구치(雊雉)130) 와 상상(祥桑)131) 의 일은 없지만, 어찌 스스로를 수양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어사의 서계를 승정원에 두고 조용히 하교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몇 차례 하교했으나, 이목(耳目)의 역할을 하는 신하들이 마치 귀머거리나 장님처럼 한 사람도 논계(論啓)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록 하교하고 싶었으나 이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묵묵히 있었다. 세상에 어찌 아비없는 자식이 있겠는가? ‘날과 달로 무럭무럭 자란다.[日就月將]’는 말을 어찌 종단 같은 자에게 비유할 수 있겠는가? 무식한 면임(面任)132) 은 비록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독서한 사대부가 어찌 그 말을 베껴 쓸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백리를 다스리고 십 리를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말 어렵다. 산음 현감에게 사적(仕籍)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고, 이 장계를 조보(朝報)에 내도록 하라."
하고, 그 여자·어미·간통한 남자·아이를 바다의 섬에다 나누어 귀양보내어 노비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윤7월 30일 신유
임금이 숭정전 뜰에서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하교하기를,
"추로(鄒魯)의 고을과 같은 현(縣)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생각해 보니 바꾸어야 하겠다. 안음(安陰)과 산음(山陰)은 서로 경계가 접해 있는데 불과하나, 전에는 정희량(鄭希亮)이 생겼고 지금은 음부(淫婦)가 생겼다. 아미산(蛾眉山)이 있었기 때문에 삼소(三蘇)133) 가 태어났던 것이니, 이름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현의 이름을 한두 번만 바꾸지 않았다. 안음을 안의(安義)로 고치고 산음을 산청(山淸)으로 고치되, 해조(該曹)로 하여금 표지를 붙여 계하(啓下) 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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