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임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종단(終丹)의 일은 정말 괴이하다. 포사(褒姒)와 견훤(甄萱)의 일134) 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매우 동심(動心)되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필시 이러한 여자가 이러한 사람을 낳을 리는 없기 때문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하였다.
8월 2일 계해
내국 제조 조명정(趙明鼎)의 체직을 허락하고, 신회(申晦)로 대임시켰다.
8월 4일 을축
조운규(趙雲逵)를 대사헌으로, 윤방(尹坊)을 대사간으로, 남현로(南玄老)를 집의로, 유운익(柳雲翼)을 정언으로, 유언호(兪彦鎬)를 부수찬으로, 송재경(宋載經)을 겸 문학으로, 서호수(徐浩修)를 부교리로, 윤시동(尹蓍東)을 대사성으로, 신회(申晦)를 우빈객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지경연으로, 이인강(李仁康)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8월 5일 병인
광흥군(光興君) 이선(李橏)이 상소하여 하례를 행하자고 청하고, 또 중궁전(中宮殿)에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는데, 관직을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 내국 도제조 김양택이 광흥군의 상소로 인하여 축하 잔치를 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축하 잔치하는 것에는 엄격하다."
하였다. 충주 목사 정홍순(鄭弘淳)을 내직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아뢰었기 때문이다. 대사간 윤방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은 《소학(小學)》 서문(序文)을, 시강관 윤영렬(尹永烈)은 어제 서문(御製序文)을, 검토관 김상집(金尙集)은 소지(小識)를 읽었다. 임금이 또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지 않는다.[七歲不同席]’는 구절을 읽고 나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남녀를 일곱 살을 한계로 삼았고 보면, 성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 영남에서 생긴 일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였다.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이 글 뜻을 대략 설명하고 나자, 경연관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참찬관(參贊官) 홍양한(洪良漢)이 말하기를,
"옛날에 명(明)나라 때에도 일곱 살 먹은 아이들이 교간(交奸)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상은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하고, 승지는 고사를 많이 아는 사람이 귀중하다."
하였다. 이득종(李得宗)·조영진(趙榮進)에게는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고, 구선행(具善行)은 의금부에 내려 보내 추고하라고 명하였는데, 특진관(特進官)이 다른 일을 핑계대고 경연에 나오지 않았다고 승지가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8월 6일 정묘
이장오(李章吾)를 금위 대장으로, 김시묵(金時默)을 총융사로, 신회(申晦)를 수어사로, 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화산 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족손(族孫)되는 권상명(權尙明)을 정직(正職)에 채용하라고 명하였다. 또 해조에 명하여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자손이 있는지, 각도(各道)에 찾아보라고 명하였다.
8월 7일 무진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행차하여 수어청과 총융청의 군사들을 사열했는데, 왕세손이 어가를 수행하였다. 수어사와 총융사가 명령에 즉시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잡아들여 엄히 신칙하였다. 사열을 마친 뒤에 환궁하였다.
8월 8일 기사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삼영(三營)의 집사(執事)에게 능마아강(能麽兒講)을 시험 보이고 나서, 통과한 자는 시상하고 통과하지 못한 자는 도태시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를 구차하게 많이 채웠다고 하여 금위 대장을 추고하였다.
8월 9일 경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명릉(明陵)에 거둥한다는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였다. 김상철(金尙喆)을 우의정에 제수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사임 단자를 들여오자, 엄한 하교를 내리면서 친히 가서 병 문안을 하겠다는 하교까지 있었다.
정상인(鄭象仁)을 응교로, 이형규(李亨逵)를 수찬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예조 판서로, 정만순(鄭晩淳)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비바람이 평상시와 다르게 몰아친다고 하여, 5일 동안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어제 비바람으로 인해 대성전(大聖殿) 동쪽 정원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부러졌습니다. 위안제(慰安祭)를 오는 12일에 지내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겠다는 전교 가운데 한 구절의 말씀은 외람되게도 미천한 신의 거취(去就)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신하가 무상(無狀)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게 하였으니, 그 죄는 비록 고요(皐陶)135) 로 하여금 법을 적용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으로 처리할 것입니다. 처분을 내려 주소서."
하였는데, ‘경이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는 비답을 내리고 나서 평상시처럼 수라를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하유한 뒤에도 돌아오지 않은 대각의 신하들에게 모두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신경준(申景濬)은 호남의 물가로 귀양보냈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준천사(濬川司)의 참군(參軍)·패장(牌將)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였다.
8월 11일 임신
우의정 김상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남에게 받은 비난은 실로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신처럼 무상한 것이 전하께서 두 번이나 살려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기어코 신을 영해(嶺海)로 귀양보내고 싶어 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신으로 하여금 도성의 아래에서 살게 하셨으며, 사람들은 기어코 벼슬아치 가운데에서 신을 빼버리려고 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신으로 하여금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이게 하여, 성문(聖門)의 죄인이 성세(聖世)의 평민(平民)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이 죽고 싶을 정도로 감격했던 마음으로 어느 겨를에 일신의 염치와 부끄러움을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세 정승의 직책은 곧 모든 관료를 인솔하는 지위인데, 신이 만약 사람들이 비웃으며 욕하던 말던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릅쓰고 계속 나아갈 경우, 신이야 말할 것조차도 없지만 의정부에 욕을 끼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잘못 베푼 은혜를 빨리 거두고 다시 훌륭한 덕이 있는 사람을 간택하시어 나라 일을 다행하게 하고 신의 분수에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질투하여 간교한 계책으로 남을 모함한 도깨비 같은 것들이 그 정상을 도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왜 다시 그 말을 끄집어내는가?"
하고, 승지에게 전유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과장에 짐 보따리를 가지고 따라 들어가지 못하게 엄히 금지하고 우구(雨具) 만을 가지고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8월 12일 계유
승지로 하여금 우의정 김상철에게 돈유(敦諭)하고 기어코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으나, 김상철이 명을 따르지 않았다. 다시 도승지에게 명하여 김상철에게 가서 돈유하라고 하였는데, 드디어 김상철이 명을 받들고 입시하여 간곡한 심정을 누누이 말하니, 임금이 ‘지나치구나, 지나치구나.’라고 말하였다.
8월 13일 갑술
천둥하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숭정전의 뜰에서 명전(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예조 판서의 체직을 허락하고, 정실(鄭宲)로 대임시켰다.
봉심하고 돌아온 승지 조덕성(趙德成)이 입시하였는데, 그가 향현(香峴)의 길로 왔다고 하여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명하고, 비바람이 거듭 몰아친다고 하여 이날부터 10일 동안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아직 수라를 평상시처럼 회복하지 않았으니, 이번 거둥 때에는 깃털을 꼽거나 취라(吹螺)하는 것을 일체 하지 말라."
하였다.
8월 14일 을해
수찬 이형규(李亨逵)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臺臣)이 열거하여 평한 것은 모두 사람의 도리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므로, 두렵고 상심되어 그 즉시 죽고 싶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신이 작년에 권점(圈點)에 참여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 일을 담당했을 때에는 혼미하였다가 사후에 후회하였으니, 이는 실로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성명을 조정의 사적(仕籍)에서 빨리 삭제하라고 명하여 타락한 풍속을 바로잡고 인심을 시원스럽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상소를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8월 15일 병자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수행하여 진전(眞殿)에서 예를 행하였다. 환궁할 때 수표교(水標橋)에 임하였다가, 이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8월 16일 정축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 좌의정 한익모가 수라를 평상시처럼 회복할 것을 누누이 우러러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김상철이 차자를 올려 면직해 달라고 청하니,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가서 하유하라고 도승지에게 명하였다.
8월 17일 무인
임금이 숭정전 뜰에서 숭릉(崇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선전관(宣傳官)에게 석우(石隅)의 농사 작황을 적간(摘奸)하라 명하고,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기다렸다. 선전관이 돌아와서 ‘지난번의 큰 바람에 쓰러진 곡식이 이번의 동풍에 모두 다시 일어났다’고 우러러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책이 과연 징험이 있다136) ."
하고, 즉시 대궐로 돌아와다.
8월 18일 기묘
새벽에 서리가 내렸다.
8월 19일 경진
감시(監試)를 21일로 물려 실시할 것을 명하였는데, 능(陵)의 행차 날과 서로 겹쳤기 때문이었다.
8월 20일 신사
천둥하고 번개치며 우박이 내렸다.
8월 20일 신사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어가를 수행하였다. 참배의 예를 행하고 이어 익릉(翼陵)으로 나아가 왕세손에게 봉심하라 명하였다. 봉심을 마치자, 경릉(敬陵)으로 가서 영의정 김치인에게 봉심하라고 명하였다. 승지에게 창릉(昌陵)·홍릉(弘陵)을 봉심하라고 명하고, 이어 곧 대궐로 돌아왔다.
8월 21일 임오
경기 감사에게 각종 업무의 차사원(差使員)과 함께 입시하라 명하여 도내의 농사 작황에 대해 하문하였다.
8월 22일 계미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향유(鄕儒)를 입시하라 명하고, 조흘강(照訖講)을 암송하게 하였다. 강장(講章)에 불통(不通)한 자가 있자 발거(拔去)를 명하고, 해소(該所)의 녹명관(錄名官)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 정실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끝내 영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8월 23일 갑신
예조에서 아뢰기를,
"10일을 한정으로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는 일이 오늘로 끝나니, 내일부터 평상시처럼 올리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근년에 농사가 자주 풍년이 드니, 이때 곡식을 저축하는 것이 실로 급선무입니다. 삼남(三南)의 군작미(軍作米)를 4만 석(石)으로 한정해 조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의정과 우의정의 의견을 물었다. 모두 영의정의 말과 같았으므로 윤허하였다.
부교리 서호수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조창규(趙昌逵)가 신의 부자(父子)와 숙질(叔姪)을 무함하고 욕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머리털과 뼈속이 시끈거립니다. 신의 아비가 몇 년 전에 조영진(趙榮進)과 해번(海藩)의 관직을 교대할 적에, 조영진이 탐욕스럽고 비루하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는 결코 청현직(淸顯職)에 의망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작년 겨울 전형에 참여하였을 때에 조정의 관작을 아껴야 한다는 뜻에서 조영진이 경연(經筵)에 진출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이어서 또 그가 제조에 의망된 것에 난색을 표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창규가 갑자기 앞장서서 부르짖으며 극구 욕설을 퍼부은 것입니다. 아! 조정은 우리 임금의 조정인데, 어찌 조창규같은 무리가 사감(私憾)을 갚기 위해 덫을 설치할 곳이겠습니까?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막판의 폐해가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러 그칠지 모를 것입니다. 신이 어찌 다만 일개 가문(家門)을 위하여 걱정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형의 부서로 하여금 다시는 의망하지 말게 하여 무서운 덫을 멀리 피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지난번에 이미 하교하였다.’고 비답하였다.
대사간 정만순(鄭晩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이 수장(收藏)하는 달을 당하여 찬비가 자주 내리니, 양기(陽氣)가 수렴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천둥과 번개가 한여름이나 다름없이 번쩍이며 심하게 쳤는데, 하늘에서 경계를 보임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지난번에 하교한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겠다는 말씀은 간곡하고 측은하여, 위대한 성인(聖人)이 두려워하며 수성(修省)하는 실상이 여러모로 힘을 다 썼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두려워하고 노력하여 어떻게 하면 민생고를 구해낼까 강구한 것을 보지 못했으니, 하늘의 견책에 응하기를 겉치례로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빈대(賓對)의 날짜를 앞당겨 정한 것에서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재앙을 중지시키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에 관한 것을 허심 탄회하게 널리 물어보시어, 안으로는 의정부와 밖으로는 여러 도에서 백성에게 이익이 되어 폐해를 없애고 보완할 만한 것이 있는 것은 조목을 나열해 시행하여 실질적인 혜택이 아래에서 강구된다면, 이 역시 재앙을 중지시킬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비록 수장한 달은 아니지만 직접 대놓고 경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놀랍다.[凛惕]’는 두 글자는 제대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니,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겠다고 명을 내린 의미는 대개 이것이었다. 이때 마침 상소가 이르렀으므로 매우 가상히 여긴다.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가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멀리 동쪽 교외를 바라보니, 이 마음 더욱 간절하다. 오늘의 차대(次對)는 비록 억지로 하였지만, 무슨 마음으로 수응을 태만히 한단 말인가? 대사간이 입시하여 직접 말하는 것이 뭐가 불가하며, 일시에 등대(登對)하는 것이 또한 뭐가 어렵기에 글을 올리고 참석하지 않는단 말인가? 대사간 정만순을 체차하라."
하였다.
8월 24일 을유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의릉(懿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고, 이어서 주원(廚院)137) 으로 나아갔다. 봉심한 승지가 돌아와서 아뢴 후에 대궐로 돌아왔다.
8월 25일 병술
내국에서 입시하여 탕제(湯劑)를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오늘 같은 날을 볼 것이라 헤아렸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탕제를 땅에 집어 던지고 말하기를,
"오늘 어찌 차마 이것을 마시겠는가? 내가 근원을 소급해 하교하겠다. 그 당시 실로 이상한 일이 많아 지척에 계신 자전을 뵙지 못하고, 8월 초여드레에야 비로소 들어가 뵈였다. 황형(皇兄)의 심사(心事)를 내가 다 알고 있었으니, 황형은 참으로 훌륭한 덕이 있었다. 우리 황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날을 볼 수 있겠는가? 그때 모두들 내가 서연(書筵)에 나아가지 않는다고 여겼으나, 황형은 내가 자주 서연에 나아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왔다.’는 하교까지 하셨다. 지필(紙筆)을 찾을 때에 환관들이 끝내 지필을 올리지 않았으니, 그들의 소행은 모양이 아니었다."
하였다. 이어서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형제들이 아들을 몇 명이나 두었는지 물어보고 나서, 채용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8월 27일 무자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의 옛터로 행차하였다. 감시(監試)의 초시(初試)에 합격한 유생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시권(試券)을 외어 보라고 한 다음 환궁하였다.
정실(鄭宲)을 특별히 평안 감사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외직의 보임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감히 지체할 것인가?"
하였다.
8월 28일 기축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합격한 유생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조흘강(照訖講)을 실시했는데, 강에 떨어져 빼버린 사람이 12명이었다.
8월 29일 경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들이 입을 모아 일제히 탄일(誕日)에 축하를 드리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나를 괴롭히려고 들어왔는가?"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그 소(所)의 과장에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우산(雨傘)을 설치하였다고 하여 시관(試官)들을 파직할 것을 청하고, 또 수행한 사람과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엄히 금하지 않았다고 하여 1소와 2소의 금난관(禁亂官)을 잡아다 처리할 것을 청했는데 모두 윤허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이번에 능(陵)에 행차하였을 때 향관(享官) 가운데 나중에 내려간 자가 있었다고 우러러 아뢰자, 전사관(典祀官) 이창임(李昌任)·박규수(朴奎壽)·김시구(金蓍耉)·정창성(鄭昌聖)을 모두 관북(關北)에 나누어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근래 조정에 인재가 모자라 형조 판서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승진·발탁의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합당한가?"
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홍낙성(洪樂性)·이경호(李景祜)도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광회(韓光會)는 가자(加資)된 지 오래되었다."
하고, 홍낙성과 이경호에게 명하여 모두 의망에 넣으라고 하였다. 또 한광회를 도총관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익보(李益輔)를 이조 판서로, 유한소(兪漢蕭)를 대사간으로, 이영중(李永中)을 집의로, 정환유(鄭煥猷)를 헌납으로, 안정인(安正仁)·신일청(申一淸)을 장령으로, 홍구서(洪九瑞)·서유린(徐有隣)을 정언으로, 홍찬해(洪纘海)·이세연(李世演)을 지평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우참찬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지경연으로, 이익보(李益輔)를 동성균(同成均)으로, 우부빈객 홍낙성(洪樂性)을 형조 판서로, 조엄(趙曮)을 대사성으로, 이경호(李景祜)를 지의금으로, 서명선(徐命善)을 응교로 삼았다. 홍낙성과 이경호는 영상의 건의로 승진 발탁되었다.
8월 30일 신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서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탕제(湯劑)를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내국에서 약간 지체하자 임금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향을 맞이한 뒤인데, 탕제를 어찌 지체할 수 있는가? 이후로는 올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니,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이는 곧 신 등의 죄입니다. 신 등은 죄벌을 받기를 원하고, 탕제는 감히 드시기를 청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구차한 물건은 먹지 않겠다"
하였다. 이에 김양택이 물러나와 처분을 기다렸다. 제조 신회가 탕제를 들 것을 굳이 청하니, 임금이 그제야 탕제를 들고 말하기를,
"어찌 경만 위해서겠는가? 경의 형을 생각해서이다."
하였다. 도제조에게 명하여 처분을 기다리지 말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이휘지(李徽之)를 특별히 이조 참의로 제수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30일 신묘
대사성에게 명하여 강경(講經)에 능한 유생을 데리고 입시하라고 하였다. 그들에게 돌아가며 잠(箴)·명(銘)·송(頌)을 읽게 하고 나서,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10월 (1) | 2025.10.13 |
|---|---|
|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9월 (0) | 2025.10.13 |
|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윤7월 (0) | 2025.10.13 |
|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7월 (0) | 2025.10.13 |
|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6월 (0) | 2025.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