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3.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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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임진

번개가 쳤다.

 

약방(藥房)의 문안에 답하기를,
"지금 이 달을 맞았는데 육아편(蓼莪篇)138)  만 외운다면, 어떻게 수응(酬應)하겠는가?"
하였는데, 탄신일(誕辰日)이 가까왔기 때문이다.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참판으로, 윤득양(尹得養)을 대사헌으로, 윤학동(尹學東)을 대사간으로, 정상인(鄭象仁)을 집의로, 정언섬(鄭彦暹)을 장령으로, 이동현(李東顯)을 지평으로, 윤승렬(尹承烈)을 수찬으로 삼았다.

 

효장궁(孝章宮)으로 거둥하여 13일에 돌아오겠다는 명을 내렸다. 정원·옥당·약방과 시·원임 대신들이 뵙기를 구하여 그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감시관(監試官) 이영중(李永中)·안정인(安正仁)·이세연(李世演)을 영남의 해안으로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성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9월 2일 계사

비로소 내국에 입시하라 명하고, 탕제를 들었다.

 

9월 3일 갑오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4일 을미

비와 눈이 내리면서,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윤득양(尹得養)·윤학동(尹學東)·홍재(洪梓)·윤면동(尹冕東)·권도(權噵)·신대현(申大顯)을 승지로 삼았다.

 

우참찬 이창수(李昌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규위(李奎緯)의 참담한 무함을 옛날 사람이 당하였더라면, 반드시 목이나 가슴을 찔러 자살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두려워하며 멍한 채로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신은 무딘 사람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신은 본디 이름과 품행이 없는데 벼슬이 너무 높아 재앙을 초래한 점입니다. 말년에 이르러 갑자기 추한 멸시를 당하고 나니 몸을 어루만지며 슬피 울다 당장 죽고 싶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조정의 사적에서 신의 이름을 삭제하라고 명하여 생성(生成)해 주신 은택을 끝마치도록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미관 말직이라 하더라도 우리 나라는 예의가 있는 나라인만큼 결코 이렇게 하지 않는데, 더구나 중신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이는 내가 예로써 이끌지 못한 소치이다. 경에게 관계된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있겠는가? 경은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속히 공무를 보도록 하라."

 

평안 감사 정실(鄭宲)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이 있고 보면, 비록 중신(重臣)이라 하더라도 관례에 따라 사직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찌 가납할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해당 승지를 체차하라."
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제수하는 전교를 불러주며 쓰게 하다가 윤면헌(尹勉憲)에게 이르자, 도제조 김양택이 말하기를,
"그는 죽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윤면헌이 죽었단 말인가? 애석하다 애석하다."
하고, 규정된 부의(賻儀) 외에 특별히 더 지급할 것과 그 형 윤면원(尹勉遠)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6품으로 올려 채용할 것을 명하였다. 판부사 서지수(徐志修)가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입시하라 명하였다. 농사 작황에 대하여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간혹 적지(赤地)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서지수가 물러간 뒤에 임금이 말하기를,
"이 원임(原任)은 매번 이같은 점이 많다. 적지란 말은 어찌 지나치지 않는가?"
하였다.

 

9월 5일 병신

정원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에 관상감의 보고를 보니, 천둥하고 번개가 친 이변(異變)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 이게 무슨 이변입니까? 천둥 소리가 들어갈 달이 지났고, 온갖 만물이 수렴할 계절이 되었고 보면, 《시경》의 주시(周詩)에 이른바, ‘편안치 않고 착하지 않다.’라고 탄식한 것과 불행하게도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일심(一心)은 하늘과 서로 통하여,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더 빠르게 호응하므로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눈앞의 한두 가지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동작이 혹 지나쳐 요양의 방도에 흠이 있기도하고 성심(聖心)을 번뇌하시어 충화(沖和)의 체모를 쉽게 잃습니다. 이로 인해 정사와 명령을 실시할 때나 하교하실 때에 성급하거나 폭발하는 적이 많습니다. 곤수(閫帥)의 신하를 빨리 부임하라고 독촉하는 것이 본래 큰일이 아닌데, 번거롭게 교외의 객관(客館)에까지 몸소 나가시고, 신하들에게 죄가 있으면 처분하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진귀한 탕제을 던져 버리신단 말입니까? 특별히 제수하는 은혜가 또한 읍·진(邑鎭)에까지 미치고, 조흘강(照訖講)을 친히 시험보이는 것도 꺼리지 않으시니, 이 몇 가지는 아마도 하늘을 공경히 대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신 등의 직책이 주상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므로 차마 잊지 못하여 근심하고 아끼는 마음을 대략 말씀드리니, 성명께서는 살펴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처럼 권면하는데, 맹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교리 김상집(金尙集)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새벽의 종소리가 울린 뒤에 갑자기 은은한 우레소리를 듣고는 놀라 서로 돌아보면서 무엇 때문에 이를 초래하였는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해마다 의례적으로 가을과 겨울에 천둥을 쳤습니다. 매년 재앙을 당할 때마다 전하께서는 다만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라는 하교를 내려 수성(修省)하는 방도로 삼아 왔으며, 대신들은 단지 사임하겠다는 글을 올리고서 재앙을 막는 계책으로 여겼는가 하면, 승정원의 계사나 옥당의 차자는 대충 책임이나 때웠으니, 요컨대 결국 모양새나 갖추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비록 근래에 일로 말하더라도 유생들에게 보였던 조흘강(照訖講)은 유사에게 넘겨야 하는데도 번거롭게 친히 시험을 보이기까지 하였으며, 대관(臺官)이 밖에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도 지나치게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관작은 아껴야 하는데도 벼슬에 발탁함에 조금도 신중하지 않았으며, 가까이 지내고 총애하는 신하는 억제해야 하는데도 읍(邑)·진(鎭)에 특별히 제수하여 결국 저절로 지나치고 잗달아지고 말았으니, 이 몇 가지는 바로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기에 알맞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더 두려워하고 조심하시어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에 유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승정원에 내린 비답에서 하유하였는데, 지금 매우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있다.
하였다.

 

형조 판서 홍낙성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건대 신은 분수에 넘치게도 재상의 반열에 끼어 아침 저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오늘 형조 판서의 직책에 발탁되었으므로 놀랍고 황공하며 부끄러워서 오장(五臟)이 타는 듯합니다. 신의 가문은 대대로 은혜를 입어 높은 관직을 계속 이어와 팔좌(八座)139)  에 부자가 함께 있어 문벌이 혁혁하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됨이 있으니, 사람의 시기와 귀신의 꾸짖음은 이치상 꼭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신이 움츠려 피할 것을 생각지 않고 거들먹거리며 무릅쓰고 나간다면, 분수에 넘은 데에 따른 재앙이 금방 닥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하신 성상께서는 신에게 새로 내린 관작을 빨리 거두시어, 벼슬이 가벼워지지 않고 번다한 업무가 폐지되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승진시켜서 발탁한 것을 어찌 그리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부응교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신의 형제와 숙질(叔姪)은 연이어 조정에 나아가 화려한 요직과 청직을 앞뒤로 두루 거쳤습니다. 분수에 넘치면 시기와 질투를 반드시 받게 마련인데, 과연 조창규(趙昌逵)의 상소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가 마구 공격을 가하고 그 말한 바가 도리를 잃은 것이니, 신을 거칠고 어긋났다고 지목한 것은 다만 사소한 일일 뿐입니다. 만약 그가 사사로운 유감을 품고 몰래 보복하려고 꾀한 것이라면, 온 세상이 다 아는 데 그 누구를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직책은 대각이고 그의 상소는 탄핵하는 글이니, 신이 스스로 처신하는 의리에 있어서 어찌 띠를 매고 관을 쓰고 출사하여 깨끗한 조정의 염치의 한계를 어긋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관직을 빨리 삭제하여 사람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형이 치사(致仕)를 청한 것도 매우 지나쳤는데, 그대의 이 상소는 왜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가 곧바로 현임을 체차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대신들이 모두 천둥의 이변을 들어 인책(引責)하였다. 우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신의 관작은 예전 그대로인데, 말한 사람들은 아직도 섬에 있으므로 매우 불안합니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 역시 언관(言官)이 아직까지 섬에 있으니, 매우 어떠한 데 관계된다고 아뢰었으며, 좌의정 한익모가 또 임관주(任觀周)가 아직 제주도에 있는데, 그에게 칠순된 늙은 아비가 있다고 들었다며 정리상 불쌍하다고 말하니, 이규위(李奎緯)·임관주를 특별히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이동현(李東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마침 천둥과 번개가 치는 이변을 보니, 걱정스런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아! 재앙은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초래되는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신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건대, 전하께서는 진작과 격려에 급하다 보니 너그러움이 부족하시고, 독촉과 신칙을 엄격히 하다 보니 화평한 생각이 적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을 시행할 때 매번 촉박한 경우가 많고, 유시를 내릴 때에도 간혹 격노(激怒)하십니다. 신이 듣건대 급히 달릴 때엔 좋은 발자취가 없고, 안주(雁柱)140)  가 촉급한 현악기에서는 온화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하찮으나 큰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함양(涵養)의 공부에 더욱 유념하여 중화(中和)의 덕을 힘써 쌓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권면하는데, 맹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의 사임을 허락하고, 김치인(金致仁)으로 대임하게 하였다.

 

9월 8일 기해

안집(安集)을 대사간으로, 임정원(林鼎遠)을 지평으로, 이형규(李亨逵)를 부응교로, 민홍열(閔弘烈)을 교리로, 이택수(李澤遂)를 수찬으로, 이유수(李惟秀)를 예조 참판으로, 이은(李溵)을 동경연으로 삼았다.

 

9월 8일 기해

설서(說書) 이병정(李秉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아비가 무함을 당한 이후부터 지극한 통분이 마음에 가득 차 갈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아! 저 이규위(李奎緯)도 사람의 자제(子弟)인데, 신의 집안에 앙갚음하기에 급한 나머지 잔인하게도 이렇게 전혀 어긋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만약 지극히 현명하고 지극히 자애로운 우리 전하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물귀신의 정상을 밝혀서 신의 가문의 억울함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 놀랍고 통분한 나머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의 관직을 강등하여 체차해주소서."
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9월 9일 경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였다. 등급을 매기고 나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신광리(申光履)에게 직부 전시를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주서(注書)와 설서(說書)는 시종(侍從)이 되나, 한림(翰林)은 시종이 아닙니다. 그런데 재작년에 한림 안성빈(安聖彬)에게 잔치 비용을 지급한 뒤, 전형의 부서에서 이로 인해 시종으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그뒤에 은택을 받은 사람이 여러 명이 되는데, 일전에 신인명(愼認明)의 아비 역시 가자(加資)하였습니다. 전형의 관원을 추고하고 가자를 무시해 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좌상과 우상에게 하문하고 나서 윤허하였다.

 

9월 11일 임인

승지가 입시하였다. 장령 신일청(申一淸)이 여쭈어 보지 않고 같이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국에서 입시할 터인데 감히 무턱대고 들어온단 말인가? 오늘 입시한 대각의 신하에게 도년(徒年)의 율(律)141)  을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예를 거행하고 나서 풍월헌(風月軒)으로 갔다. 시·원임 대신과 2품 이상의 기사(耆社), 종신(宗臣)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환궁할 때에 연령군(延齡君)의 집에 들리려고 하였는데, 병조 판서 남태회(南泰會)가 안국동(安國洞)의 길은 매우 좁다고 하면서 종루(鍾樓)를 거쳐 갈 것을 청하니, 특별히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직책을 제대로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또 홍상한(洪象漢)에게 가자하라고 명하였는데, 연령군 궁가(宮家)의 옛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9월 12일 계묘

지의금 이경호(李景祜)가 상소하여 새로 내려준 품계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승진·발탁된 것은 실로 공론을 따른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도총관 한광회(韓光會)가 상소하여 새로 내려 준 품계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승진·발탁한 것은 대개 생각이 있어서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9월 13일 갑진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이었다. 정원·옥당, 조정의 2품 이상의 육조 당상관, 봉조하·대사간이 문안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금년에 이날을 만나다니, 정말로 뜻밖이다. 《시경》의 육아장(蓼莪章)만 외어 나의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50, 60에도 심회가 배나 되었는데, 더구나 이 나이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몸은 비록 여기에 있으나 옛날이 꿈만 같다. 이 삶과 이 세상에 이것이 어찌된 인사(人事)인가? 오늘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하였다.

 

9월 14일 을사

임금이 숭정전 뜰에서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무엇 때문에 들어왔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제의 탄일을 보내고 나니, 아랫사람의 마음이 못내 아쉬워서입니다."
하자,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엊그제 이미 만났는데, 다시 볼 필요가 뭐 있는가?"
하였다. 경은 부원군(慶恩府阮君)·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의 사당에 내시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여선덕(呂善德)을 정언으로, 윤승렬(尹承烈)을 부응교로, 서명선(徐命善)을 필선으로, 조명정(趙明鼎)을 홍문 제학으로, 이심원(李心源)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15일 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연평 부원군(延平府阮君) 이귀(李貴)는 국가에 큰 업적과 공로가 있습니다. 지난번 이명숙(李命肅)의 옥사 때 성상께서 내린 처분이 비록 매우 미워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만약 재물을 다투거나 적통(嫡統)을 빼앗으려 하였다고 돌려버리신 것으로 말하면, 실상과 다릅니다. 또 이로 인하여 그의 지친(至親) 여러 사람들을 아울러 금고시키셨으니,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동료 재상들에게 하문하여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하문하고 나서 이명석(李命奭)과 이명록(李命祿)의 직첩을 주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탄신일을 막 지났으므로 규계하고 축하하는 말을 대략 본받는다.’면서 중화(中和)의 공부에 뜻을 기울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한익모가 또 연례(宴禮)·하례(賀禮)를 끝내 거부한 일을 들어 상하가 서로 마음을 통하는 의의에 유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서형수(徐逈修)가 당초 연좌되었던 것은 상소로 윤시동(尹蓍東)을 구원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윤시동은 지금 수용하고 있는데, 서형수는 여전히 채용하지 않고 있어서 형정(刑政)이 고르지 못하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똑같이 채용하라."
하였다. 대사간 안집(安集), 좌부승지 조영순(趙榮順)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들이 이미 문안드리는 반열에 참여하였다가 바로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6일 정미

병조 판서 남태회가 상소하여 은혜로 가자된 것을 도로 거두어 줄 것을 청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경묘(景廟)께서 입학(入學)했을 때 대제학으로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니, 제조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박태상(朴泰尙)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였다. 또 선왕께서 입학했을 때 누가 대제학이었는지 묻자, 신회가 조복양(趙復陽)이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입학할 때는 조태억(趙泰億)이 대제학이었다. 나는 조태억에게는 참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니, 도제조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그때 처분에서 조태억은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과 비교해 참작한 바가 있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관직을 삭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광좌·최석항은 관작을 소급해서 삭탈하였고 조태억은 첩지만 환수했으니, 애초에 참작한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9월 17일 무신

임금이 창덕궁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손이 수행하였다.

 

9월 18일 기유

문묘(文廟)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임금은 공자(孔子)의 위패 앞으로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고, 왕세손은 배향의 위패 앞에서 작헌례를 행하였다. 동무(東廡)·서무(西廡)에도 일제히 술잔을 올려 들쭉날쭉함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예를 마치고 어가를 돌려 춘당대(春塘臺)로 나아가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면 바로 임인년142)  에 스믈아홉 살로 입학하던 날이다. 작년 이후로 할아비와 손자가 함께 대성전(大成殿)에서 예(禮)를 행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마땅히 기쁨을 나타내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방 승지·예의사(禮儀使)에게는 숙마(熟馬) 1필을 면급(面給)하고, 예모관(禮貌官)에게는 숙마 1필을 하사하고, 찬의(贊儀)는 수령에 제수하고, 사지 수복(事知守僕)은 을유년143)  과 금년에 연이어서 대령했으니, 특별히 품계 한 등급을 올려 주도록 하라. 공자의 위패 앞에 제물을 차려 놓았던 유생(儒生)에게는 각각 삼경(三經) 가운데 한 경서를, 배향의 위패 앞에 제물을 차려 놓았던 유생에게는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의 책을 하사하라."
하였다. 시험의 점수를 매겨 들여오자, 김광묵(金光默) 등 10명을 뽑고, 문방(文榜)과 무방(武榜)을 게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의 아들 김인서(金麟瑞)가 춘당시에 합격하였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참상(參上)의 선전관 자리가 비면 채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5경(更)에 대궐로 돌아왔다.

 

정순검(鄭純儉)을 대사간으로, 홍낙명(洪樂命)을 부제학으로, 황최언(黃彦)을 집의로, 이보온(李普溫)을 장령으로, 이혜조(李惠祚)를 지평으로 삼았다.

 

이날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임금이 환궁한 다음날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사람들아 가을 비바람 이상하다 하지 마오, 일십당에 물고기가 용으로 변신했네.[傍人莫怪秋風風雨 一十塘魚變作龍]"
하였다. 호조로 하여금 새겨서 시험 점수를 매기러 들어왔던 신하들 및 당일 입시한 신하들에게 주라고 명하였다.

 

9월 19일 경술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도승지 윤득양(尹得養)이 ‘이조 참판 서명응(徐命膺)의 상소가 승정원에 도착하였는데, 전에 청했던 것을 거듭 청하였기 때문에 되돌려 주었었고, 오늘 또 상소하여 승정원을 침척(侵斥)하였기 때문에 동부승지를 제외한 모든 승지가 소를 올리고는 곧장 나가 버렸다.’고 아뢰니, 서명응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특별히 시행함과 아울러 그의 소장을 되돌려주고, 여러 승지를 패초(牌招)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문과에 합격한 사람 및 무과 중 일찍이 선전관을 거친 자와 육진(六鎭)의 서북인(西北人)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과거에 응시한 수령들을 입시하라 명하여 각기 농사의 작황에 대해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전(內殿)에서 직접 친 누에의 실로 대대(大帶)를 짜서 만들었는데, 내가 어제 대성전의 제사 때 그 띠를 띠었다. 그리고 환궁할 때 강사포(絳紗袍)를 착용했을 때도 그 띠를 띠었었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는 삼대(三代)144)   이후의 성대한 일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신회가 말하기를,
"이는 《예경(禮經)》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궐 안에서는 또 목면대(木綿帶)를 띤다. 생일 날에도 직접 친 누에의 실로 띠를 만들기 때문에 나는 하루만 띠고 즉시 간직해 두었다."
하였다.

 

9월 20일 신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내국 제조 신회(申晦)의 체직을 허락하고, 홍낙성(洪樂性)으로 대임시키도록 하였다. 이세연(李世演)·이영중(李永中)을 방면하라고 명하였는데, 영상이 건의하였기 때문이다.

 

9월 21일 임자

잡과(雜科)에 합격한 사람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경과(慶科)를 어찌 해를 거를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한림(翰林) 중에 소시(召試)를 거친 사람이 이제 하나도 없고 3일이 이미 지났으니, 오늘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한 교리 김상집(金尙集)에게 털로 짠 마장(馬裝) 한 벌을 하사하였다.

 

9월 22일 계축

서명신(徐命臣)을 이조 참판으로, 박사륜(朴師崙)을 지평으로, 김상묵(金尙默)을 응교로, 윤승렬(尹承烈)을 겸 보덕으로, 이경호(李景祜)를 판윤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지경연으로 삼았다.

 

9월 25일 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표류민(漂流民)을 보내겠다는 성경(盛京)의 예부(禮部) 자문(咨文)이 막 도착했습니다. 절사(節使)가 갈 때에 이에 대해 사례하겠다는 뜻으로 회답의 자문을 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문은 금군(禁軍)을 정하여 만부(灣府)145)  로 내려 보냈다가, 봉성(鳳城)에 전하여 성경에 전달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장령 정언섬(鄭彦暹)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중효(洪重孝)를 대사헌으로,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으로, 박종량(朴宗亮)을 장령으로, 안성빈(安聖彬)을 정언으로, 이재간(李在簡)을 필선으로, 이응협(李應協)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28일 기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경기 감사 남태제(南泰齊)의 장계로 인하여 재해지 1천 5백 결(結)의 세금을 더 면제해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한림 권점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대교 강혼(姜俒), 검열 정호인(鄭好仁)·이극생(李克生)·신인명(愼認明) 등이 회권(會圈)할 때, 관료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글을 올리고 곧장 나가버렸는데, 모두 의금부에서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9월 29일 경신

임금이 숭정전의 뜰에서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9월 29일 경신

의금부에서 추고 받은 한림(翰林)들을 우선 해임하고, 한림 권점을 의정부에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장락전(長樂殿)에 나아갔다. 이어 광명전(光明殿)에 나아가 어제(御製)를 불러 주어 베끼게 하고 끝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아! 비록 이 날을 만났으나 불효 불초(不孝不肖)한 것만 한탄하고 있으니, 광명전에 앉았다고 해서 어떻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옛날 동조(東朝)의 나인(內人) 중 지금 생존해 있는 자가 많다. 마땅히 세 등급으로 나누어 써서 내려주되, 1등급 상궁(尙宮)에게는 비단과 목면(木綿) 각각 세 필씩 하사하고, 2등급 상궁에게는 비단과 목면 각각 두 필씩 하사하고, 3등급 상궁에게는 비단과 목면 각각 한 필씩 하사하게 하여 나의 뜻을 표시하라. 그 가운데 나이 70이 넘은 자에게는 비단과 목면을 각각 한 필씩 더 주고, 옛날의 내시 중 경묘(景廟) 때 내시에게는 각각 쌀과 베를 지급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승지가 입시하였다. 여러 한림들의 공초를 읽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 무리가 어찌 감히 이와 같단 말인가? 특히 무상(無狀)한 것은 그들이 감히 ‘한둘의 의논이 들쭉날쭉하였고, 갑(甲)이니 을(乙)이니 하였다.’고 한 점이니, 그 공초는 물시(勿施)하라."
하였다. 강혼 등을 다시 공초하자, 어쩔 수 없이 각각 자수하였다. 임금이 보기를 마치고 나서 말하기를,
"이는 정호인·이극생이 이기려고 다툰 소치이다."
하고, 한림원에 그들의 이름을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서명응(徐命膺)을 좌천시켜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삼았는데, 명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문 제학 서명신(徐命臣)과 예문 제학 정존겸(鄭存謙)이 모여서 한림 권점을 하여 홍낙신(洪樂信) 등 22명을 뽑았다. 권점을 한 뒤에 서명신 등이 즉시 패초에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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