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1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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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신유

한림 소시(翰林召試)에서 유강(柳焵) 등 2명을 뽑았다.

 

10월 1일 신유

서명신을 마량 첨사(馬梁僉使)로, 정존겸(鄭存謙)을 평신 첨사(平薪僉使)에 보임하고 나서,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부임하라고 하였다. 정호인(鄭好仁)·이극생(李克生)을 영원히 시종안(侍從案)에서 삭제하되, 교서관(校書官)에서 시행하라 하였다. 정상인(鄭象仁)은 그의 아우를 가르치지 못했다고 하여 옥당의 의망에서 빼라고 하였다.

 

10월 2일 임술

내국에서 들어가 진찰하였다. 지난 정해년146)   10월의 일기(日記)를 가지고 들어오라고 하여 승지에게 읽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올해도 거의 다 지나가고 있으니, 이 마음이 배나 더 쓸쓸하다. 오늘 예전의 이달 오늘치 일기를 다시 보니, 삼동(三冬)에도 강연(講筵)을 자주 열었고, 심지어는 하루 안에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으며, 기축년147)  에도 강연을 폐지하지 않았다. 아! 그해 겨울에 몸이 편치 않았다가 그 다음 해에 건강이 회복되었는데, 그때의 일이 마치 어제와 같다. 지난번 어제(御製) 가운데 ‘대궐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초여름에 잔치를 열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이 뒤로도 강연을 더욱 부지런히 열었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었다. 아! 불초한 사람이 비록 올해를 맞이하였으나 자리에 누워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감히 옛날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글자를 분별할 수 없으므로, 억지로라도 강연을 열고 싶지만 지금은 도리가 없다. 멀리 서쪽 교외를 바라보니, 이 마음이 곱절이나 쓸쓸하다. 그 지위에 있으면서 그 예를 행하기를 이제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이것을 훑어보고서도 그냥 누워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효도라고 하겠는가? 오늘은 구례(舊例)에 따라 주강 대신 상참(常參)을 거행해야 할 것이니, 이는 보통 날의 상참과는 다르다. 그러니 일상의 격식을 벗어나 시·원임 대신과 비국의 여러 당상만 참여하게 하라. 각사(各司)의 낭관도 역시 그대로 두라."
하였다. 사간 구수국(具壽國)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을 거행하였다. 또 《소학(小學)》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시독관 김상집(金尙集), 검토관 남현로(南玄老)가 입시하였다. 임금이 《소학》의 편제(篇題)를 강하였는데,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이 계속해서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옛날의 일에 감회가 일어나 이렇게 한 것이니 이 마음이 곱절이나 더 쓸쓸하다."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공인(貢人)과 시인(市人)의 폐단이 없지 않다고 아뢰니, 신칙할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공인과 시인의 담당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폐막(弊瘼)에 대해 물으니 아뢰었다.
좌의정 한익모가 ‘대사성 조엄(趙曮)이 여러 차례의 과시(課試)에서 선비의 습관을 바로잡을 희망이 없지 않았는데, 그의 사직 단자를 이미 올렸다고 들린다.’면서 사직 단자를 받아들인 승지를 추고하고 사직 단자를 물시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고 사직 단자를 받아들였던 승지를 특별히 체차하였다. 형조 판서 한광회(韓光會)가 말하기를,
"인물(人物)을 초인(招引)하는 것을 법으로 매우 엄하게 금지하고 있는데, 북로(北路)로 꾀여 끌어들이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엄한 법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근래 북쪽 사람들이 서울의 인물을 끌어들이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전후 도신과 찰방을 엄중히 추고하고, 거행할 조목을 내어서 엄히 신칙하소서."
하니, 5년 안에 도신을 지냈던 자는 추고하고, 고산 찰방을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총융사 김시묵(金時默)이 ‘북한 산성 안의 나무를 남한 산성의 예에 의거해 비국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은 뒤에 취해 쓰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김시묵이 또 ‘공인과 시인을 불러서 물어 보았더니,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은 은전(銀廛)에 폐단을 끼치었고, 사궁(四宮)에서는 약간씩 쌀 가게[米廛]에서 멋대로 거두어들였다.’고 우러러 아뢰니, 심능건은 파직하고, 차지 중관(次知中官)은 급료를 감하고, 임장(任掌)은 곤장을 치라고 명하였다. 강혼(姜俒)·신인명(愼認明)을 승륙(陞六)하라고 명하였다.

 

10월 5일 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충청 감사 이중호(李重祜)가 재해지의 등급을 메겨 올린 장계로 인하여, 5천 결(結)의 세금을 더 면제해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이복원(李福源)·유언민(兪彦民)을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이복원은 영의정의 건의로, 유언민은 차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똑같이 가자하라고 특별히 명한 것이다.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조덕성(趙德成)을 대사간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10월 6일 병인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서북(西北)의 무사들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이고,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꿈에 조상을 뵈인 일이 있었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이를 말한 바가 있다. 경흥(慶興)의 부료 군관(府料軍官) 유몽윤(兪夢允)에게 어찌 상례(常例)를 따를 수 있겠는가? 특별히 직부 전시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서북 유생들에게 강경과 제술 시험을 보였다. 어제(御製)는 ‘심(心)’ 자 운(韻)이었는데,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의 시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오늘 이 일을 거행하는 뜻이 어찌 깊지 않겠는가? 경흥 사람은 무과를 하고 함흥 사람은 문과를 한 것은 진실로 꿈에서 바랐던 일이니, 올해는 유감이 없다. 제술 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한석대(韓錫大)에게 직부 전시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7일 정묘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함흥·경흥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꿈에서 두루 돌아다녀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다. 문과·무과에 합격한 사람이 모두 이 두 고을 사람인데다가, 한석대는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148)  의 후손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하니, 도제조 김치인이 참으로 그렇다고 하였다. 도승지 유언민(兪彦民)이 상소하여 가자하라고 한 명을 거둘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오늘 승진·발탁한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10월 9일 기사

임금이 숭정전의 뜰에서 태묘의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10월 10일 경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황해 감사 이담(李潭)이 재해지의 등급을 나누어 아뢴 장계로 인하여, 1천 결의 세금을 더 면제해 줄 것을 청하니, 1천 결 이외에 2백 결을 더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또 강원 감사 김귀주(金龜柱)가 재해지의 등급을 나누어 아뢴 장계로 인하여, 1백 10결의 세금을 더 면제해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당나라 양성(陽城)이 국자사업(國子司業)이 되어, 생도들에게 부모를 찾아뵙는 것을 허락하면서 3년 동안 찾아뵙지 않는 자는 배척하였는데, 이것은 《소학》에 실려 있다. 지금 들으니, 어느 중관(中官)이 부모를 찾아뵙겠다고 청하기에 그 부모의 나이를 물었더니, 여든 한 살이라고 하였다. 아! 옛날 사람들은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다.’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80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수안(遂安)은 5일 길이라고 하였다. 비록 여든 살이라고 하나 5백 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꿈속에도 안정되지 않을 터인데, 두 살이나 더 먹었으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윤리에 너무나도 결여되었다. 중관 김호성(金好性)의 이름을 내부(內府)에서 삭제하여, 풍속의 교화를 바로 잡으려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황합(黃柙)을 부총관(副摠管)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그의 증조부 황흠(黃欽)은 곧 임금이 관례(冠禮)를 치를 때 빈찬관(賓贊官)이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1일 신미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으며, 관 위에는 배(背)가 있었다.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어제(御製)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나는 스스로 괴롭다.’라는 말에 이르자, 도제조 김치인이 말하기를,
"하교에 이와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나이가 일흔 살이 되었다고 위에 고할 수 있겠는가?"
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는 즉위한 햇수가 오래 된 경사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즉위한 지 40여 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청하더라도 나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나이가 일흔 다섯 살이 되었다는 이유로 청하더라도 나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증손(曾孫)에 경사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증손자를 본다면 허락할 것이다."
하였다.

 

10월 14일 갑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에게 강경 시험을 보이는데, 생원 어필명(魚必溟)에 이르자, 하문하기를,
"나이가 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여든 살입니다."
하자, 전조(銓曹)에 명하여 오늘 안으로 구전(口傳)하여 채용하라고 명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유학 김광신(金光藎)에게 직부 전시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나라에 이목(耳目)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대신(臺臣)이 단문(丹門) 안에서 편복(便服)을 착용하지 못하게 할 것을 신칙하라고 청하였는데, 그뒤 제사를 지낸 뒤에 염찰(廉察)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에 그 일을 보았는데, 요즘 들어 너무나 심하게 태연히 편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염찰하게 한 것이다. 대체로 금직(禁直)하는 사람도 공적인 일로 왕래할 경우 예로부터 감히 편복을 착용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비석을 세운 뒤에는 홍마목(紅馬木)이나 다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김상집(金尙集) 한 사람 외에 헌관(獻官)으로부터 주시관(奏時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단문 밖에서 편복을 입고 있었다 하니, 방자하기 그지없다. 한심한 일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으니, 일체 의금부로 하달하여 추고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거행하였다. 뜰에 들어온 대소 신료들에게 하유하는 글을 쓰라고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아! 초장왕(楚莊王)은 오패(五覇)149)   중의 하나인데도 비장 명장(蜚將鳴將)이라는 말150)  이 있었기 때문에 패자가 된 것이다. 아!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3백 년 조종(祖宗)의 강토를 이어받았으며,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 역시 그들의 할아비와 그들의 아비가 대대로 녹을 먹은 신하들이므로, 아침에는 초(楚)나라 신하가 되었다가 저녁에는 제(齊)나라 신하가 되었던 자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마음이 안일에 젖어 만사가 잗달아졌다. 아! 몇 년간의 고심을 저 하늘에 증거댈 수 있는데, 밤낮으로 경영(經營)하는 자들은 임금의 명은 소홀히 하고 당시의 돌아가는 형편만 따름으로써, 임금의 명을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고 당시의 돌아가는 형편에 어긋나기라도 할까 염려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큰 것을 말한다면, 날과 달로 심하게 떠들면서 알력을 부린 바람에 조정에 거의 사람이 없다시피 되어서 팔순을 바라보는 그의 임금이 위에서 이처럼 날마다 고심하고 있다. 이와 같은데 어떤 일을 할 수 있겠으며, 이와 같은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쌀밥도 달지 않다.’는 말도 형용하기에 부족하다. 아! 올해가 무슨 해인가? 지난 정해년151)  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 것 같다. 아! 지금까지 지탱한 것은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바로 선왕의 영령이 보살펴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해동(海東)의 신하로 관을 쓰고 띠를 띤 자들이 진실로 병이(秉彛)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비록 꿈속에서라도 흐느껴 울어야 할 것이다. 어찌 큰 것만 그러하겠는가? 비록 절목(節目)에 해당하는 세부적인 일도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한림원의 권점만 해도 그렇다. 비록 왕실의 외손이라도 이기기만 힘쓰면서 임금에게는 고하지 않고, 비록 옥엽(玉葉)의 대수(代數)가 끊어진 자라도 임금은 생각지 않고 오직 쫓아다니는 것만 일삼고 있다. 이는 선왕을 저버린 것이다. 이는 선왕을 저버린 것이다. 무슨 얼굴로 선왕을 뵈일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만년의 일심(一心)은 오직 선조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제사지내는 것도 소홀히 하고 있으니, 어찌 신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역시 임금이 불초하기 때문이고 보면, 임금이 어찌 교화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신하 역시 감화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를 다스리고 이와 같이 임금 노릇을 한다는 것은 내 모르겠다. 아! 유신(儒臣)들이 어제는 입직(入直)해 놓고 오늘은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아! 이목(耳目)의 역할을 하는 신하들이 오직 내가 잘 들을까 염려하고, 내가 잘 살필까 걱정하고 있다. 임금이 비록 늙었지만 경악(經幄)의 신하들이 이와 같이 하니 누구와 같이 소일(消日)을 하겠으며, 이목의 역할을 하는 신하들이 이와 같이 하니 내가 비록 눈이 멀지 않았지만 보는 것이 어느 때에나 밝아지겠는가? 아! 나이 팔순이 가까워지니 자연히 귀머거리가 된 자나 다름이 없고 아! 쇠약한 나이가 되니 곱절이나 혼미해졌다.
단문(丹門) 안에서 편복을 착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옛날 어떤 대신이 주의시키자고 요청하였는데, 그 역시 궐내에서 널리 물어보시던 것을 내 이미 우러러보았었다. 그러나 어제의 일로 보더라도 그 해이함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신칙하여 격려하도록 명한 것이다. 단문은 비록 문밖이나 문의 섬돌에도 그들이 앉을 돌이 아니다. 이미 돌을 세워 놓았으니, 하마비(下馬碑) 안쪽은 바로 하나의 단문인 셈이다. 아! 그런데 지난해에 말에서 내리는 것을 꺼려하여 이 비석을 진흙 속에다 방치해 둔 채 의기 양양하게 단문 밖에서 말을 달렸기 때문에 특별히 명하여 다시 세우도록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조금도 기탄하지 않았으니, 지난번 진흙 속에 방치했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이 관복(冠服)을 입기 싫어하면서 애당초 무엇 때문에 입신하여 임금을 섬겼단 말인가? 이는 정말로 한 사람이 부르짖자 백 사람이 본받은 것으로서, 대궐 문 밖에서 관복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막중한 단문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임금에게 기강이 있다면 신하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엄하게 신칙한다 하더라도 속담에, ‘고려의 정령(政令)이 자주 바뀐다.[高麗公事三日]’라고 했다시피, 비록 오늘 약간 힘쓰더라도 내일이면 반드시 전과 같아질 것이다. 아! 내 비록 쇠약해졌지만 날마다 신칙하여 면려하고 수시로 신칙하여 면려해야 하겠다. 옛날에는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듯이 백성의 교화가 임금에게 달려 있었는데, 지금은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듯이 백성의 교화가 신하에게 달려 있으니, 이는 갓과 신발이 뒤바뀐 꼴이다. 아! 갓과 신발이 뒤바뀌어 버린 시대에 편복을 입은 것이 무어 그리 이상한 일이겠는가? 이와 같이 마지않고 나간다면 오직 대궐 문 안에서만 관복을 입을 터이니, 이러고도 나라가 다스려지고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막중한 단문에서 이미 관복을 입기 싫어하였으니 이러한 마음으로 왜 관복을 입고 억지로 임금에게 절한단 말인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한 마디 말로 방자한 것이고 태만한 것이다. 오늘 뜰에 들어온 신하들이 만약 구습(舊習)을 고치려는 마음이 없다면, 조정에서 신발을 고쳐 신고 집에 가 몸편히 있어야 할 것이다. 아! 공문(公門) 앞에서는 수레에서 내리고, 임금의 말을 보면 예의를 표하는 것이 바로 널리 공경하는 것이다. 내 비록 배우지 못하고 다리도 비록 거북스럽지만 태실(太室)이 있는 동구 밖에 이르면 발이 〈땅을〉 밟지 못할 것처럼 하는데, 방자하고 태만한 사람들은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이는 《소학(小學)》의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을 모른 소치이다. 애석하게도 대관(大官)이나 밤낮으로 같이 있는 승지 이외에 이 도리를 아는 자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이 후로 사사로이 다니는 것 이외에 대궐로 나아오는 자는 편복을 입지 못하도록 법 조문을 엄히 세울 것이다."
하였다.

 

김시묵(金時默)을 이조 참판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대사헌으로, 홍양한(洪良漢)을 대사간으로, 이헌묵(李憲默)을 집의로, 신사운(申思運)을 사간으로, 여선형(呂善亨)을 지평으로, 김관주(金觀柱)·홍상성(洪相聖)을 정언으로, 이치중(李致中)을 헌납으로, 이영중(李永中)을 필선으로 삼았다.

 

10월 17일 정축

유학(幼學) 박희원(朴喜源)이 북을 치고 상언(上言)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아비의 상을 당하여 양주(楊州)의 해등촌(海等村) 마산리(馬山里)에 겨우 장지를 마련하였습니다. 장지의 일을 겨우 끝내고 상여가 산에 도착했는데, 전 승지 이상지(李商芝)가 그 집의 정자(亭子)와 가깝다고 하여 사사로이 백성을 동원해 몽둥이를 가지고 들이닥쳐 횟가루로 이겨 만든 무덤 속을 깨버렸습니다. 대체로 그 묘지와 이가(李家)의 정자와는 멀리 네 개의 산고개가 가로막혀 1천여 보나 되는데도 억지로 장사를 못 치르게 금한 것입니다. 그의 부형과 친구 패거리들이 조정의 반열에 포진하고 있어 기염이 두려우므로, 관아의 우두머리들도 모두 아첨하며 보호하는 바람에 송사가 제대로 판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궐에 머리를 부수면서 지극히 억울한 사정을 아뢰려고 하였으나, 병조에서 저지한 통에 호소할 길이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상세히 조사하고 엄히 결단하여, 자식된 자의 지극한 원한이 풀리게 해주소서."
하였다. 전 승지 이상지가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묘지를 다투는 일은 옛날부터 매우 많았습니다마는, 저 박희원처럼 전혀 허황된 거짓말로 과장하여 이처럼 참혹하게 했던 자가 어디 있었단 말입니까? 이번에 다투는 땅은 바로 신의 증조 이유(李濡)가 살았던 땅으로, 자손이 묘역이나 다름없이 대대로 지키면서 애호하여 온 곳이므로 길가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손가락질 하면서, ‘녹천(鹿川) 일대는 이씨 집안에서 백 년부터 소유한 옛땅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박희원은 거짓말을 하여 주상의 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시원스럽게 처분을 내려 주소서."
하였다. 글을 아뢰자, 임금이 다 보고 나서 말하기를,
"이상지는 남의 장례를 망쳐 놓고 이제 도리어 상소하여 자신의 잘못을 엄폐하려고 하였으니, 너무나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다. 내가 친히 심문하겠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법관(法官)이 있는데, 성상께서 수고하실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법관도 세력 있는 가문은 두려워하는데, 내가 직접 결단하지 않으면 어떻게 징계하고 격려할 수 있겠는가?"
하고, 친히 국별장청(局別將廳)으로 나아가 박희원과 이상지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상지가 마침 병을 심하게 앓아 잡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그의 아비 이시중(李時中)을 잡아 왔다. 임금이 꼬치꼬치 문초하여 자백하게 했으나, 이시중의 대답이 이랬다 저랬다하자, 임금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에 노하여 18도(度)의 형벌을 주고 면위서인(免爲庶人)152)  하였다. 그당시 입직했던 병조의 당상 서명신(徐命臣)을, 박희원을 저지했다는 이유로 남해(南海)로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남현로(南玄老)를 집의로, 이형규(李亨逵)를 사간으로, 서명선(徐命善)을 부교리로, 강지환(姜趾煥)·송영(宋鍈)을 장령으로, 이지승(李祉承)·최민(崔)을 지평으로, 서호수(徐浩修)를 헌납으로, 이인묵(李仁默)을 정언으로, 조준(趙㻐)을 부교리로, 김응순(金應淳)을 부수찬으로, 신회(申晦)를 좌참찬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우참찬으로, 민백흥(閔百興)을 동의금으로 삼았다.

 

부총관 황합(黃柙)이 상소하여 새로 제수한 품계를 환수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승진·발탁한 것은 대개 깊은 의도가 있어서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18일 무인

임금이 전설사(典設司)로 나아가, 박희원을 저지하였다는 이유로 병조의 낭관 조수검(趙守儉)에게 곤장을 쳤다.

 

10월 19일 기묘

이조 참판 김시묵(金時默)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9일 기묘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0일 경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시묵의 상소에 고집한 바가 있던가?"
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홍봉한(洪鳳漢)이 전조(銓曹)에서 공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김시묵 역시 꼭 체직되려고 합니다."
하자, 체차를 허락하고, 조엄(趙曮)으로 대임하라고 명하였다.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奉祀孫)을 채용하라고 명하였다. 문정공의 후손 조문보(趙文普)가 무신년153)  에 반역으로 죽어 그 가문이 폐기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문정공을 생각하여 이 명을 내린 것이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홍주만(洪周萬) 등 2명을 뽑았다.

 

10월 20일 경진

채제공(蔡濟恭)을 대사간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집의로, 이치중(李致中)을 부수찬으로, 이홍제(李弘濟)·이보온(李普溫)을 장령으로, 신익빈(申益彬)·이동현(李東顯)을 지평으로, 이겸빈(李謙彬)·박사륜(朴師崙)을 정언으로, 김상묵(金尙默)을 검상(檢詳)으로, 심수(沈鏽)를 판윤으로 삼았다.

 

10월 22일 임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갔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 부사(副使) 이심원(李心源), 서장관(書狀官) 이수봉(李壽鳳)이 입시하였다. 상사와 부사를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친히 어필(御筆)을 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사의 숙부는 내년이면 나이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심원이 말하기를,
"신의 숙부는 내년이면 일흔 살이 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봉조하의 참된 충성을 내 익히 알고 있다. 더구나 그의 조카가 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갔으니, 내가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길보(李吉輔)의 순수한 마음도 알고 있다. 그가 내년에 일흔 살이 되니 특별히 지중추를 제수하여 그의 조카를 위로하라."
하였다.

 

10월 23일 계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신익빈(申益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작년 정이환(鄭履煥)의 상소는 오로지 충성과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가납(嘉納)하지 않으셨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신하들로 하여금 대궐 뜰에 나와 그의 죄를 성토하게 하였습니다. 가사 정이환에게 정말 죄가 있다 하더라도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한 뒤에 백관이 대궐의 뜰에 나와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상하고 지나친 방법으로 대관(大官)을 핍박하여 격례(格例)를 무시하고 대뜸 이처럼 대궐 뜰에 나와 호소하게 함으로써 뒷사람들의 끝없는 폐단을 열어 놓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살피기 좋아하는 기풍이 결여되었단 말입니까? 사당에 구두로 아뢰신 일은 진실로 우리 전하의 도타운 효성의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만, 이는 바로 이른바 예(禮)에 없는 예입니다. 혹시나 설독(褻瀆)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성천 부사(成川府使) 이복상(李復祥)은 실로 서읍(西邑)에 나아가지 않아야 할 의리가 없었으니, 이게 어찌 막중한 자리에서 아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근래의 일로 말하더라도 제학(提學)의 임무는 청현직(淸顯職)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두 제학이 부름에 나오지 않은 것이 오만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보면 이것으로 처벌한다는 것은 예로써 부리는 도리가 결여된 것은 아닙니까? 이시중(李時中)의 일은 일개 묘지의 송사에 불과합니다. 설사 저지한 일이 있더라도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그에 대한 죄로 처벌하면 넉넉합니다. 그런데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전(殿)에 납시어 친히 신문함으로써 당당한 천승(千乘)의 지존이신데 아래로 내려가 유사가 해야 할 일을 하셨으므로 신은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예기(禮記)》에 ‘상대부(上大夫)에게는 형벌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고, 공자는 ‘상복 입은 사람을 보면 반드시 허리 굽혀 예를 차렸다.’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는 ‘후손에게까지 형벌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식의 일로 인하여 그의 아비에게 형벌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 홍문관이나 승정원에서 바로잡아 구제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신은 더욱 개연(慨然)히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다. 상소를 아뢰자, 사적(仕籍)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탕제(湯劑)를 드리겠다고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여든을 바라보는 만년에 신익빈에게 곤욕을 당했는데 무슨 마음으로 탕제를 복용하겠는가?"
하였다. 도제조 한익모가 말하기를,
"일개 대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처럼 정도에 지나친 일을 하시니, 이는 전하의 학력(學力)이 아직 지극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옛날 계문자(季文子)154)  가 말하기를, ‘그의 임금에게 무례한 자를 보면, 매가 참새를 쫓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경들은 왜 매처럼 할 의지가 없단 말인가?"
하고, 여러 승지들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신익빈의 상소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0월 25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명릉(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경건히 맞이하였다.

 

10월 25일 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경상 감사 조돈(趙暾)이 재해지의 등급을 나누어 올린 장계로 인하여, 4천 5백 결(結)의 세금을 더 면제해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이경호(李景祜)가 은언군(恩彦君)의 혼례 때 어느 품계로 사자(使者)를 정할 것인가를 품의하니, 당상관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6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30일 경인

봉조하 유척기(兪拓基)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연석(筵席)에서 애석해 한탄하고 꿈에서 보았다는 하교까지 하면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시호(諡號)를 의논하라고 하였다. 문익(文翼)이란 시호를 내렸다. 유척기는 너그럽고 후덕하여 대신다운 도량이 있었으므로, 위 아래가 의지하며 중히 여겨 온 지 거의 수십 년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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