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13.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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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신묘

이조 판서 이익보(李益輔)가 졸(卒)하였다. 이익보는 이정보(李鼎輔)의 동생이다. 재주 있는 사람으로 일컬어졌으며, 지위는 1품에 올랐다.

 

11월 2일 임진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동짓날의 윤음(綸音)을 쓰라고 명하였는데, 그 윤음에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 이미 하유하였다만, 고 상신 풍원군(豊原君)155)  의 춘첩시(春帖詩)에, ‘동짓날에 능히 윤음(綸音)을 내리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어찌 칠순을 넘어 양(陽)이 회복하는 날을 맞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로 인해서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공자가 말씀하신 ‘춘왕 정월(春王正月)’이 이것이다. 이는 만세(萬歲)토록 바뀌지 않는 상도(常道)이고, 또한 하(夏)나라의 역서를 시행하는 의의이다. 주(周)나라에서는 자월(子月)156)  을 새해의 첫달로 삼았는데, 그 뜻이 역시 깊다. 음기(陰氣)로 차 있는 가운데 오히려 일양(一陽)이 처음 생기는 이치가 있으니, 성인이 아니면 어느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어느 누가 또한 원(元)을 체득하여 인(仁)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선왕께서 동짓날에 양을 부지했던 뜻은 지극하고도 극진하였다. 어찌 다만 양이 현응(玄凝)의 가운데에서 생길 뿐이겠는가? 그 양이 처음으로 아래에서 생기는 것이나, 임금이 인(仁)을 체득하여 정사를 실행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임금으로 말한다면 제일 먼저 이 뜻을 체득하여 백성들을 부축해야 한다.
옛날 고황제(高皇帝)가 고려 공민왕(恭愍王)에게 백성을 사랑하라고 권면하였던 교시(敎示)를 지금까지도 외우고 있는데, 더구나 이런 때에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진부한 말이라고 하지 말라. 그 속에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다. 지금 백성들은 어떠한가? 왕위를 물려받았던 초기에는 융성했던 때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그래도 부지런히 하면 되었다만, 지금은 그때와의 사이가 거의 50년이나 되어서 몇 백 층이나 떨어졌으니, 임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심하게 쇠약해졌고, 백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극도로 곤궁해졌다. 이러한 때에는 비록 백 배의 공력을 들이더라도 따라갈 수 없다고 탄식을 할 것인데, 더구나 이 때의 임금과 이 때의 백성이야 말할 것이었겠는가? 지난해에 유시를 내렸는데도 효과가 없었는데, 더구나 이러한 때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와 같은 때에 임금과 신하가 한가하고 부질없게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이미 어찌 옛날의 명철한 임금들이 양(陽)을 부축했던 의의이겠는가? 한(漢)·당(唐) 이후로 이미 하(夏)나라의 역법을 따랐다만, 주나라 역법으로 계산해 말한다면, 나는 한 살 더 먹은 것이다. 일양(一陽)과 이양(二陽) 그리고 삼양(三陽)에 이르기까지 이치 역시 그러한 것이다. 덕이 부족한 내가 삼양(三陽)이 비록 돌아오더라도 어떻게 백성들을 부축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일양(一陽)이 막 생기는 때이겠는가? 아! 대소 신하들은 그대의 임금이 이미 쇠약해졌다고 말하지 말라. 그대의 임금은 비록 쇠약해졌더라도 건도(乾道)는 쇠약해지지 않았고, 내 나이는 비록 늙었지만 마음은 쇠약해지지 않았다. 지금 양이 회복되는 때에 사람의 일을 미루어 행할 수 있으니, 왕도 정치를 실행하여 백성을 부축할 때가 이때 말고 어느 때이겠는가? 이때가 바로 구습(舊習)을 씻고 새해와 함께 새롭게 할 하나의 기회이니, 더욱 스스로 힘써 순수한 일심으로 우리의 나라를 도와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신칙이 만약 물에 돌을 던진 것처럼 되어 버린다면, 어찌 여든 살을 바라보는 그대의 임금만 신하들을 볼 얼굴이 없겠는가? 아! 신하들도 대대로 녹을 먹는 의리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힘쓰고 힘써서 내가 동짓날에 거듭거듭 하유하는 것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11월 3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전라 감영의 성루(城樓)·성첩(城堞)·관아(官衙)를 모두 다시 쌓거나 건립해야 하는데 재력이 부족하다고 하여, 돈·쌀·베를 더 떼어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11월 6일 병신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는데, 좌의정 한익모가 날이 이와 같이 추우니 예를 행한 뒤에 즉시 돌아갈 것을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도 부모가 있는데, 나의 추모하는 마음을 모른단 말인가?"
하였다. 이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고 좌상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손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파루(罷漏) 뒤에 비로소 연달아 세 번의 엄(嚴)157)  이 울리자, 임금이 묘문(廟門)으로 걸어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금년의 이 예를 거행할 줄은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금년도 그러한데, 더구나 내년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제갈양(諸葛亮)의 표문(表文)158)  을 보고도 감동하지 않으면 충성스럽지 않은 것이고, 이밀(李密)의 표문159)  을 보고도 감동하지 않으면 효성스럽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다. 아! 신축년160)   8월 20일에 만약 우리 자성(慈聖)의 피붙이에 대한 하교와 우리 황형(皇兄)의 지극한 우애의 인(仁)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겨울철의 종묘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오늘에야 겨우 와서 절하면서 마치 담소(談笑)하며 대하듯이 하고 있으니, 어찌 효도라고 하겠는가? 아! 파란 하늘이 나의 불초한 마음을 알 것이다. 아! 삼군(三軍)이 덕 없는 나의 마음을 민망해 하고 있구나."
하였다. 어가를 세우고 글을 불러주어 쓰게 하였는데, 그 글에,
"닭이 꼬끼오 하고 우는구나. 닭이 울지마는 어디에 가서 문안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오장이 무너지는 것 같구나."
하였다. 이어서 곧장 환궁하였다.

 

11월 7일 정유

육상궁(毓祥宮)에서 예를 행할 때에 대신이 백관들도 예를 행하게 하자고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한 하교를 연달아 내렸다. 영의정 김치인, 우의정 김상철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처벌해 달라고 청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11월 8일 무술

한익모(韓翼謨)를 다시 좌의정에 제수하고, 이어서 내국 도제조를 겸하도록 명하였다.

 

홍낙성(洪樂性)을 이조 판서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이재간(李在簡)을 응교로, 김시묵(金時默)을 호조 참판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예조 참판으로, 황합(黃柙)을 공조 참판으로, 윤시동(尹蓍東)을 대사성으로, 유운익(柳雲翼)·조석목(趙錫穆)을 지평으로, 이일증(李一曾)을 헌납으로, 김용(金容)을 정언으로, 남현로(南玄老)·심관지(沈觀之)를 수찬으로, 김익(金熤)을 부수찬으로, 강지환(姜趾煥)을 필선으로, 이치중(李致中)을 문학으로, 윤석렬(尹錫烈)을 사서로, 신회(申晦)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지사 이길보(李吉輔)가 상소하여 새로 내린 품계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승진 발탁한 것은 생각이 있어서 한 것이다. 역시 한달이 지나서 형제가 함께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하였다.

 

장령 이홍제(李弘濟)가 상소하여 신익빈을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하지 않았다.

 

11월 9일 기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전(內殿)이 궁으로 들어 온 지 내년이면 10년이고, 나도 내년이면 일흔 다섯 살이다. 조선에 어찌 이런 일이 다시 있겠는가? 그러나 다만 경 등이 또 나를 괴롭힐까 걱정된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신 등이 다행스럽게도 우리 조정에 없었던 경사를 만났는데, 어찌 기쁨을 기념하는 도리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 김상철이 전조(銓曹)의 일이 민망하다고 우러러 아뢰니, 특별히 이조 참판 조엄(趙曮)을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조엄의 형 조돈(趙暾)이 일찍이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의 아비를 논박했기 때문이다.

 

좌의정 한익모가 상소하여 처벌해 달라고 청하니, 비답을 내려 도타이 권면하였다.

 

11월 10일 경자

중궁전(中宮殿)의 탄일이었다. 조정의 2품 이상, 육조(六曹)의 당상관들이 문안하였다.

 

11월 11일 신축

호조에서 아뢰기를,
"은언군의 부인(夫人)에게 바칠 것과, 유모(乳母)·보모(保姆) 이하 사람들에게 하사할 식사에 쓰일 각종 물건을 가례일(嘉禮日)부터 정식(定式)에 의거해 마련하여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한익모가 송구하고 부끄럽다면서 간절히 진언하니, 임금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은언군의 부인에게 3일 후에 와서 절하라고 명하고, 이어 내구마(內廐馬)를 보내 주라고 명하였다.

 

11월 12일 임인

호조 참의 김화택(金和澤)이 상소하여, 자기의 노모가 금년에 나이 여든 셋이라고 하면서 봉양하게 해 달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허락하였으나 이번에 다시 의망되었기에 임명한 것인데, 아직도 어머니가 생존해 있다는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옮겨 제수하였던 것이다. 지금 그대의 글을 보니 그대의 정리가 어찌 옛날과 지금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나이가 여든 살을 넘었으니, 처음에 이미 허락해 놓고 이제 어찌 강권하겠는가? 다시 청한 바를 허락하여 자식된 효도를 온전히 이루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화택이 부모를 위하여 봉양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특별히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전조(銓曹)에서 관례에 따라 병조의 당상에 의망하였는데, 낙점을 받은 후에 다른 부서로 옮겨 제수했다가 또 특별히 소청에 따라 허락한 것이다.

 

11월 14일 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선혜청(宣惠廳)의 당상 정홍순(鄭弘淳)이 끝내 공무를 행하지 않는다면서 신칙하여 공무를 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승지에게 수도안(囚徒案)161)  을 가져오라고 명하여 열람하고는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고, 숙위 군사(宿衛軍士)에게는 빈 가마니를 더 지급하며, 떠돌아다니는 거지들에게는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죽을 끓여서 먹이라고 하였는데, 날씨가 추웠기 때문이다. 또 하교하기를,
"나는 늘 ‘강중의 물은 차갑다.[江中水氣寒]’라는 시를 암송하고 있는데, 서북(西北)의 파수군(把守軍)은 어떻게 견디어내는지 모르겠다. 승정원으로 하여금 서북의 수신(帥臣)에게 하유하여 위문하게 하라."
하였다.

 

황경원(黃景源)을 이조 참판으로, 김응순(金應淳)을 이조 참의로, 원인손(元仁孫)을 대사헌으로, 심관(沈鑧)을 대사간으로, 박지원(朴志源)을 응교로, 이익정(李益炡)을 판돈녕으로 삼았다. 고 봉조하        김흥경(金興慶)에게는 정헌(靖獻)이라는 시호를, 고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에게는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고 중추원 부사        박연(朴堧)에게는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고 증 영의정        한준(韓準)에게는 정익(靖翼)이라는 시호를, 고 좌의정        허욱(許頊)에게는 정목(貞穆)이라는 시호를, 고 좌참찬        김찬(金瓚)에게는 효헌(孝獻)이라는 시호를, 고 공조 판서        윤돈(尹墩)에게는 효정(孝貞)이라는 시호를, 고 증 영의정        김기종(金起宗)에게는 충선(忠宣)이라는 시호를, 고 판돈녕        권시경(權是經)에게는 정간(靖簡)이라는 시호를, 고 한성 판윤        이의만(李宜晩)에게는 정정(靖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유수(李惟秀)를 충청 감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 홍낙성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이조 판서를 경은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하였다.

 

11월 16일 병오

임금이 효장문(孝章門)에 행차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병조 판서 남태회(南泰會)가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추고할 것을 청하니, 병조 판서를 체차하고 이경호(李景祜)로 대임하라고 명하였다. 조운규(趙雲逵)를 형조 판서로, 남태희를 우참찬으로 제수하였다.

 

11월 18일 무신

병조 판서 이경호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이 임무를 임명한 것은 오직 경의 아비에게 뜻이 있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어제(御題) 중, 남은 편들의 존산(存刪)으로 인해 그 가운데 독서록(讀書錄)을 보았는데, 이 기록이 나에게는 후세에 보일 만한 것이라고 여기었다. 옛날에 설문청(薛文淸)162)  의 독서록이 있었는데, 이 독서록은 설문청의 뜻을 본받은 것이다. 사자관(寫字官)으로 하여금 《홍무정운(洪武正韻)》 글체로 정하게 써서 운각(芸閣)으로 하여금 간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9일 기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내국 제조 이경호(李景祜)의 체직을 허락하고, 신회(申晦)로 대임시켰다.

 

11월 20일 경술

이조 참의 김응순(金應淳)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이조에 임명한 것은 내가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충청 감사 이유수(李惟秀)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여기에 임명한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하였다.

 

11월 21일 신해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행차하여 밤이 되어도 어가를 돌리지 않자, 대신 이하의 관리들이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엄히 하교하기를,
"내 장차 북한 산성으로 가겠다."
하고, 창의궁의 문 닫는 것을 유보하라는 표신(標信)을 내렸는데, 승지 윤면동(尹冕東)이 표신을 받지 않자,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여러 승지들을 모두 체차하고 특별히 이재간(李在簡)을 승지에 제수하였다. 영의정 김치인 등이 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와서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무슨 일로 이렇게 중도에 지나친 일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는 무자년은 바로 태조 대왕이 승하하신 해이므로, 1년 동안 음악을 거두어 두려고 하였다. 그런데 경들이 꼭 하례를 드리고자 하여 나의 고심을 체득하지 않기 때문에 이 행차를 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김치인 등이 말하기를,
"예를 행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본디 성왕의 대경(大經)이고 보면, 전하의 겸손하시는 덕으로써 비록 경사의 의식은 치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음악을 거두는 것에 있어서는 성상께서 너무 지나치게 추모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음을 체득하지 못하니, 나는 가야겠다."
하였다. 김치인 등이 굳이 간쟁해도 되지 않자 말하기를,
"신 등이 성상의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환궁하였다.

 

11월 22일 임자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시·원임 대신들이 함께 입시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음악을 거두어 둔다는 하교를 취소할 것을 극력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23일 계축

유언민(兪彦民)을 대사헌으로, 안표(安杓)를 대사간으로, 박취원(朴取源)·송지연(宋志淵)을 교리로, 이동태(李東泰)를 집의로, 구수국(具壽國)을 사간으로, 홍경안(洪景顔)을 헌납으로, 최민(崔)·김치공(金致恭)을 정언으로, 이택수(李澤遂)를 수찬으로, 신사운(申思運)을 보덕으로, 홍구서(洪九瑞)를 사서로, 홍찬해(洪纘海)를 문학으로, 이익정(李益炡)을 판의금으로, 조엄(趙曮)을 우윤으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는데, 형조 판서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임금이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163)  의 후손을 찾아 보라고 하였는데, 나주(羅州)의 송익량(宋翼良)이 거짓으로 여량 부원군의 후손이라고 상언(上言)하였다. 임금이 거짓임을 상세히 조사하고 나서, 곤장 60대를 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상철이 종반(從班)에 벼슬이 침체된 자가 많다면서 전형의 부서에 신칙하여 외직에 빈 자리가 나는 대로 시험해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정관(政官)164)  에게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4일 갑인

형조 판서에게 북한산 살인 사건의 문안(文案)을 가지고 입시하라 명하였다. 공초를 읽어 아뢰고 나자, 작처하여 정배라고 명하였다.

 

11월 25일 을묘

부교리 조준(趙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전에 전하께서 비상(非常)의 지나친 거조가 있셨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그지없이 놀라 근심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아! 우리 전하께서는 보령(寶齡)이 높아질수록 큰 덕이 더욱 빛나고 있으시니,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기뻐서 서로 손뼉을 치며 경사의 하례를 드리고자 하는 것은 정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추모하는 효성이 간절하여 애써 따르려고 하지 않으시니, 그 겸손한 덕을 누가 우러러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하들이 정성으로 청하는데 전하께서는 정성으로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청하고 그쳐야 할 것을 그쳐서, 정의를 서로 미덥게 하고 서로 주고받음을 메아리처럼 한다면, 이것이 어찌 화평한 기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의중을 짐작해 보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의심하여, 없는 일을 있는 것으로 알아 사건마다 파란을 일으킴으로써, 결국에는 옛날의 사저(私邸)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고 행전(行殿)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습니다. 북한성으로 가겠다는 하교와 승지를 잡아들이라는 명은 모두 노하셔서 나온 것이니, 성덕(聖德)에 끼친 누가 크지 않겠습니까? 공자는 말하기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역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설령 여러 신하들이 정말 전하의 고심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공자의 말씀을 법으로 삼아야 하며 화를 내서는 안되는데, 더구나 이렇게 거듭 진노하시면서 거조를 급박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비록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장래를 위해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이 깊이 근심하는 것은 전하께서는 전하의 마음을 알아주는 신하가 없고 신하들도 전하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여, 상하가 서로 막혀서 걸핏하면 서로 반복한다는 점입니다. 아!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이 삼가 《주역(周易)》을 상고하건대 하늘은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다는 것이 이치로는 어긋났다고 하겠으나, 그 상(象)이 태괘(泰卦)가 됩니다. 전하께서는 총명을 믿고 혼자 세상을 이끌어가시면서 신하들을 얕잡아보시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면 대뜸 엄한 하교를 내리시므로, 신하들이 두려워 떨면서 오직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에 군도(君道)는 날로 높아지고 신도(臣道)는 날로 낮아지니, 점점 더 서로 격동되어 어느 곳에 이를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묘당에서는 감히 바로잡지 못하고 대각에서는 감히 거역하지 못하니, 땅과 하늘에 태평한 기운이 서로 통하는 것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옛날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일찍이 ‘지위가 높아 도울 것이 없다.’는 건괘(乾卦)의 뜻을 인용하여 임금의 덕이 너무 높은 것을 경계하였는데, 우리 선조(宣祖)께서 가상히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거울삼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그를 사적(仕籍)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형조의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한 고조(漢高祖)의 삼장(三章)165)  에 살인 조목이 맨 처음에 있었으나, 죄인을 세 번 심리하는 법 또한 중요한 것이다. 아! 옛날 당(唐)나라 임금은 심지어 재계를 하고 나서 결정했다고 하였다. 수원(水原)의 전유복(全有卜) 사건을 법으로 따져 보면 용서하기 어렵지만, 그 정상을 따져 보면 매우 불쌍하다. 계복(啓覆)의 뜻은 바로 인정과 법을 참작하여 궁구해 보자는 것인데, 전유복의 아내로 말하자면 그 여자 때문에 그 전 남편의 아들이 피살되었고, 그의 남편 또한 살인죄로 사형당했으니, 이는 한 사람이 남편과 아들을 죽인 것이다.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참작해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6일 병진

춘첩자(春帖子)166)  와 연상시(延祥詩)167)  를 모두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경상 감사 조돈(趙暾)을 특별히 체직시켰는데, 그는 조준(趙㻐)의 사촌형이기 때문이었다. 이은(李溵)으로 대임시켰다.

 

약방에서 구두로 일곱 번 아뢰었으나, 탕약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임·원임 대신들이 청대(請對)하고 입시하여 약을 들 것을 극력 청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자, 시임·원임 대신들이 계단 아래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부제학 홍명한(洪名漢)이 말하기를,
"직책이 임금을 보호하는 데 있는데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여 대신들이 처분을 기다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로소 불러 보고 탕제를 들었다.

 

11월 27일 정사

조준을 한강 밖으로 축출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우의정 김상철이, 조준의 상소 가운데 말로 인해 차자를 올려 처벌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한익모가 문안을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경만 빠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신의 마음이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을 보호하는 자리에 있으므로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이 차자를 올리지 않았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하였다. 영상의 차자에 답하기를,
"그의 임금이 비록 억지로 탕약을 마셨지만, 이와 같이 차자를 계속 올린단 말인가? 이미 좌상에게 하유하여 개연(慨然)한 마음을 표시하였다."
하고, 우상의 차자에 답하기를,
"이미 영의정의 비답에 하유하였다."
하였다.

 

11월 28일 무오

영의정 김치인과 우의정 김상철이 처분을 기다렸는데, 처분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11월 29일 기미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으로 나아가 조참(朝參)을 거행하였다. 대사간 안표(安杓)를 해남현(海南縣)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는데, 반열(班列)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준을 시골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귤을 올리고 나서 곧장 환궁하였다.

 

11월 30일 경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뜰에서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전(殿)으로 나아가 귤을 나누어 주고 선비들을 시험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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