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9권, 영조 43년 1767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1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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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신유

과거의 등수를 매기는 일로 입시했는데, 수석을 차지한 생원 조정(趙晸)을 직부 전시케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3일 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음악을 거두어 두라고 한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또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제사를 조문보(趙文普)의 7촌 친척이 받들도록 정할 것을 청하였다. 대개 조문보는 조광조의 봉사손(奉祀孫)이었는데, 무신년168)  의 역옥에 청형되었기 때문에 선정의 위패(位牌)를 그의 노비 집에 맡겨 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제사 받드는 후손을 채용하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대신이 건의하였는데,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보고한 뒤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고산(高山) 전 찰방 권영(權穎)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12월 4일 갑자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의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을 가지고 입시하라 명하였다.

 

12월 5일 을축

비국에서 입시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제보부(祭報府)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에 제관(祭官)들이 특히 심하게 일을 핑계로 빠지고 있다. 만약 법을 정한다면 이것 말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근래에 《고려사(高麗史)》의 제사에 대한 의식을 보니, ‘일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직책이 있는 자는 본사(本司)에서 재계하고, 직책이 없는 자는 모여서 재계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늦게 도착하는 폐단이 있겠는가? 이뒤로 일을 담당한 관리는 크고 작은 제사를 막론하고, 향을 받기 하루 전에 각각 본사(本司) 및 공청(公廳)에서 재계하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12월 7일 정묘

제주 목사 남익상(南益祥)의 장계로 인하여, 제주에서 진상하는 삭선(朔膳)169)  을 보리가 익는 철 이전까지는 반으로 줄이고, 공마(貢馬) 역시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12월 9일 기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청천강(淸川江)의 형편에 관해 도신과 수신(帥臣)에게 물었더니 의론이 각기 달랐다.’고 아뢰었다. 우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안주(安州)의 병영은 이괄(李适)의 변란 뒤에 처음 설치했는데, 지금은 성곽이나 백성들이 매우 성대해졌습니다. 그런데 수로(水路)가 전과 달라졌기 때문에 금장(禁將)이 일찍이 뚝을 쌓으려고 계획하였는데, 지난날 쌓은 곳이 상당히 손상되었습니다. 신이 전(前) 영부사 홍봉한(洪鳳漢)을 만나 보았는데, 매우 개연(慨然)히 생각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이 강에다 만약 뚝을 잘 쌓는다면 변경의 방어에 큰 이로움이 있을 것이고, 국가에 보답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홍봉한이 처음부터 담당했었다. 금장이 지금 막 입시했으니, 상세히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장오(李章吾)가 말하기를,
"변방 방어의 중요한 지역에 뚝을 잘 쌓지 못하여 무너졌으므로 신은 황공하여 처벌을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원통(原筒)은 무너지지 않았으니, 신의 생각에는 상류의 연탄(燕灘)을 막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지금은 국가에서 재력(財力)을 소비할 필요가 없으니, 본도의 수신으로 하여금 굴착하여 소통시키게 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쌓았다가 도로 무너지면 민력(民力)을 많이 소비할 것 또한 걱정입니다."
하자, 상세하게 적어 장계를 올리도록 비국에서 수신에게 분부하라고 명하였다. 전 대사간 안표(安杓)를 풀어주라고 명하였는데, 대신들이 건의하였기 때문이다.

 

성천주(成天柱)를 대사헌으로, 이중호(李重祜)를 대사간으로, 심이지(沈履之)를 부제조으로, 채제공(蔡濟恭)을 예조 참판으로, 이정오(李正吾)를 집의로, 이홍직(李弘稷)을 사간으로, 김기대(金基大)를 정언으로, 이치중(李致中)을 교리로, 서호수(徐浩修)·송재경(宋載經)을 부수찬으로, 박지원(朴志源)을 겸 보덕으로, 이휘중(李徽中)을 겸 필선으로 삼았다.

 

12월 10일 경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한익모가 홍만조(洪萬朝)의 봉사손(奉祀孫)을 임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판서 홍만조는 일찍이 8도의 도신을 거쳤다. 그런데 지금 대신이 아뢴 말을 들어보건대, 집에 쌀 한 섬도 없다고 하니 참으로 고귀하다. 그의 증손 홍규한(洪奎漢)을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즉시 의망에 넣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제주(濟州)의 공인(貢人)을 불러 보고 각각 유의(襦衣)170)   한 벌씩 주고, 돌아갈 때 필요한 양식 이외에 쌀 두 말을 더 주라고 명하였다. 표신(標信)을 내려 보내 금군장(禁軍將)에게 금군(禁軍)을 데리고 들어와서 죽을 끊여 먹이라고 명하였다.

 

12월 12일 임신

이에 앞서 춘추관의 당상과 낭관에게 건국 초기의 정해년171)   실록(實錄)을 찾아 오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명(復命)하였다. 기사관(記事官) 유강(柳焵)이 《실록》을 읽어 아뢰었는데, 덕수궁(德壽宮)의 대목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덕수궁이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유강이 말하기를,
"상고해 볼 만한 문헌이 없습니다."
하였다. 읽어가다가 ‘동짓날에 하례드리는 것을 중지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임금이 손으로 문지방을 치며 말하기를,
"사전에 보지 않았는데도 같구나."
하였다. 읽어가다가 ‘술을 권하여 취기가 돌자 피리를 불고 싶다.’는 등의 말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게 어느 때에 있었던 일인가? 마치 그때의 광경을 보는 것과 같다."
하니, 유강이 말하기를,
"9월 20일입니다."
하였다. 읽어가다가 ‘12월 16일 잔치를 열었다’는 대목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 12월 16일이 입춘인데, 정말 우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였다.

 

대신과 비국의 유사·당상·예조의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기사관 유강에게 다시 읽으라고 명하여 ‘피리를 불었다.’는 대목에 이르자, 장악원(掌樂院)의 적공(笛工) 1명을 불러들여 여민락(與民樂)·보허사(步虛詞)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왕위에 오른지 40년이 되었다만, 어떤 일로 뜻을 계승했으며 어떤 일로 일을 기술했는가? 더구나 금년을 맞이하니 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실록을 상고해 보라고 명한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다. 내년은 건국 초기의 무자년172)  이다. 지금 정해년 섣달 16일의 기사를 보니, 편전(便殿)에서 조그마한 술자리를 열었다. 이 얘기를 듣고 나니 추모하는 마음이 곱절이나 간절하다. 옛날 16일은 바로 이달 16일이다. 연도는 비록 전과 다르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해년은 한가지이다. 병술년173)  에도 이미 계술(繼述)하였는데, 더구나 정해년이겠는가? 그해에 이미 조그마한 술자리를 열었으니, 나도 이날 마땅히 세손 및 대신·국구(國舅)와 함께 덕유당에서 소찬(小饌)을 베풀어야겠다. 그러나 악기를 불고 두드리는 등의 일은 그만둘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 실록을 살펴보니, 그 가운데 ‘큰 말[斗]로 과중하게 거두어들이는 것을 금한다.’고 하였으니, 〈지금이나〉 한가지다. 아! 큰 말로 받아들이고서 작은 말로 나누어 준다면 어찌 상평창(常平倉)의 도리라고 하겠는가? 이 뒤로 이를 범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장오(贓汚)의 법을 시행하겠으니, 여러 도에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 김응순(金應淳)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12월 13일 계유

왕세손 빈궁의 탄일이었으므로 승정원에서 문안을 드렸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내일은 바로 효성스러운 며느리의 생일이니, 한번 보았으면 한다. 오늘은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야 하니 들어와서 곧바로 거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에 거둥하여 밤이 깊도록 어가를 돌리지 않았다. 연희방(燕喜坊)의 덕수궁 터를 알아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는데, 상세하게 안 뒤에 어가를 돌리겠다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자 약방에서 청대(請對)하여, 또 아뢰기를,
"연희방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덕수궁은 당일의 시어소(時御所)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널리 찾아보면 혹시 알아 낼 수 있는 길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만, 결코 심야의 짧은 시간에 찾아낼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잠깐 입시하도록 허락하시길 바랍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과 우의정        김상철이 청대하였다.

 

하교하기를,
"친경(親耕)한 뒤 음식을 나누어 줄 때 술을 하사할 뿐 다른 의주(儀註)가 없었고, 기사(耆社)에 조그마한 술자리를 열었을 때도 의주가 없었는데, 지금도 매한가지이다. 건국 초기에 피리를 불게 하고 싶다고 하교한 것을 본받아, 《모시(毛詩)》에 따라 다만 거문고를 타고 생황(笙篁)을 불도록 하겠는데, 또한 국풍(國風)의 당시(唐詩)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의주를 참고할 것 없이 문관(文官)과 남행(南行) 가운데에 외손자가 된 자들을 연석(連席)에 참석하도록 하여 거문고 타는 자와 생황 부는 자는 뜰에 들어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그날 문신들의 정시(庭試)를 근정전(勤政殿)에서 시행할 것이다. 중시(重試)의 사례에 의거해 마땅히 급제(及第)를 내리겠으니, 무신의 대거(對擧)174)   역시 같은 날 실시하겠다."
하였다.

 

12월 14일 갑술

왕세손이 궁관(宮官)을 보내 문안드렸다.

 

조정의 2품 이상, 6조 당상들이 문안을 드렸다.

 

왕세손이 궁관을 보내 저녁 문안드렸다.

 

군병(軍兵)에게 죽을 쑤어 먹이라고 명하였다.

 

12월 15일 을해

왕세손이 궁관을 보내 문안을 드렸다.

 

조정의 2품 이상과 6조 당상들이 문안을 드렸다.

 

약방 도제조 한익모가 처분을 기다리니, 처분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과 우의정 김상철이 청대(請對)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자, 또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께서는 조상에 대한 지극한 효성에서 반드시 덕수궁의 옛터를 알고자 옛날의 사저(私邸)에서 밤을 새우기까지 하셨습니다. 지금은 실록(實錄)에 실려 있는 것과 보첩(譜牒)에 기록돼 있는 것이 서로 꽉 들어맞아 역력하므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옛자취를 믿을 수 있어 성상의 마음이 풀릴 만도 한데 여전히 수레를 돌리라는 명을 내리지 않으시니, 신 등은 근심과 조바심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연희방의 이름은 지금 비록 잘 알고 있으나 그 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덕수궁은 필시 창덕궁과 창경궁의 사이에 있었을 터인데, 그 역시 알 수 없다. 내일 수응(酬應)할 일이 있으므로 억지로 돌아가겠다."
하고, 드디어 환궁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입시하였다. 여러 도에서 올린 전최(殿最)175)  를 뜯어 보았다.

 

12월 16일 병자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작은 술상을 받았다. 왕세손이 예를 행하고 나자 옆에 앉으라고 명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종친·국구(國舅)·도위(都尉), 6조의 판서, 의정부의 서벽(西壁)176)  이 모두 축수하자, 악공(樂工)에게 피리를 불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돌아보고, ‘임금이 경복궁에 나아가 여러 신하와 함께 음복(飮福)하고서 선조의 뜻을 계술하고, 피리를 불게 하여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上詣景福宮與諸臣飮福述先志令吹笛上聞隨涕下]’라는 21자(字)를 쓰라고 명하였다.

 

문신에게 중시(重試)를 보여 이지회(李之晦) 등 6명을 뽑았다. 갑산 부사(甲山府使) 서명응(徐命膺)을 내직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그의 동생 서명선(徐命善)이 과거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환궁하여 숭정전으로 나아가 문·무과의 합격자들을 불러 보았다.

 

오현주(吳鉉胄)를 정언으로, 이치중(李致中)·남현로(南玄老)를 교리로, 송지연(宋志淵)·홍경안(洪景顔)을 수찬으로, 정후겸(鄭厚謙)을 문학으로, 서명응(徐命膺)을 동춘추로,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17일 정축

경복궁 연추계(延秋契) 사람과 창덕궁 동구(洞口) 사람과 흥덕동(興德洞) 사람 중, 나이 80이 된 사람에게 품계를 올려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17일 정축

함흥(咸興)·영흥(永興)의 전세(田稅)를 내년까지 특별히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함흥(咸興)·영흥(永興)과 삼동(三洞)의 무사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이고 나서 합격한 여덟 사람을 직부 전시(直赴殿試)케 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어사 유언호(兪彦鎬)가 입시하였다. 포천 현감(抱川縣監) 이세규(李世珪)를 잡아다 문초하라고 명하였는데, 낙인(烙印)하지 않은 새 곡(斛)을 사용하여 서되씩 더 받았기 때문이다.

 

12월 18일 무인

임금이 영수각(靈壽閣)에 행차하여 예를 행하고 봉심(奉審)을 마치자, 왕세손(王世孫)이 곁에 앉았다. 기당(耆堂)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나이 많은 신하가 많았는데, 오늘은 입시한 사람이 네 명 밖에 안되니 내 애석한 생각이 든다. 김시영(金始煐)·심성진(沈星鎭)·남유용(南有容)·김상익(金尙翼)에게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라."
하였다.

 

환궁한 뒤, 내년에 기사(耆社)에 들어갈 이익정(李益炡)·남태제(南泰齊)·이지억(李之億)·이길보(李吉輔)를 불러 보았다. 승지를 보내어 고 봉조하 유척기(兪拓基)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2월 19일 기묘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함흥·영흥의 유생 및 삼동(三洞)  【동구(洞口) 안은 파자(把子)와 석교(石橋)까지, 연추문계(延秋門契)는 연춘문(延春門)에서 흥덕문(興德門)까지이다.】 의 유생에게 제술 시험을 보이고 나서, 수석을 차지한 전 군수 어석정(魚錫定)을 직부 전시케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충청 감사 이유수(李惟秀)를 불러 보고 격려하여 보냈다.

 

12월 20일 경진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친히 도목 정사를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홍낙성과 병조 판서 이경호가 나아갔다. 이경옥(李敬玉)을 부교리로, 이해중(李海重)을 대사성으로, 이윤덕(李潤德)을 충청 병사로, 심관지(沈觀之)·민홍렬(閔弘烈)을 부수찬으로, 유언민(兪彦民)을 동의금으로, 홍상직(洪相直)을 헌납으로, 김재순(金載順)을 응교로, 이미(李瀰)를 부제학으로, 김관주(金觀柱)를 문학으로 삼았다.

 

합격한 유생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조준(趙㻐)을 향리로 내쫓으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라고 명하였는데, 그의 동생 조원(趙瑗)이 과거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12월 21일 신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이업(李墣)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이 막 1백 살에 봄을 보지 못하고 죽으니, 내가 애석하게 여긴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서울에서 부의(賻儀)하는 사례에 의거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고 판서 윤봉구(尹鳳九)는 비록 벼슬하지는 않았으나, 옛날 나의 사부(師傅)이다. 지금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 서글프다. 본도로 하여금 전례에 의거해 거행하게 하라."
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군문(軍門)에 오래 근무한 사람들을 고르게 추천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병조 판서 이경호(李景祜)를 추고할 것을 청하고 또, ‘과거도 거치지 않은 무리를 수령에 의망하였다.’면서 이조 판서 홍낙성을 추고할 것을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헌납 홍상직(洪相直)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임금께 과감한 말을 올리는 선비를 관대히 처분할 것과 전형(銓衡)을 맡고 있는 관리를 신칙할 것을 주청하니, ‘대각에서 이와 같이 하는데, 누워 있으니까 스스로 부끄럽다.’고 비답하였다. 홍상직이 인피(引避)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시건(李蓍建)을 대사간으로, 남현로(南玄老)를 집의로, 이동태(李東泰)를 사간으로, 강지환(姜趾煥)을 헌납으로, 신일청(申一淸)·이정렬(李廷烈)을 장령으로, 이형원(李亨元)·심이지(沈頣之)를 정언으로, 이사조(李思祚)·윤정렬(尹正烈)을 지평으로, 박취원(朴取源)을 응교로, 윤승렬(尹承烈)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12월 23일 계미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사민(四民)을 불러 쌀을 하사하였다.

 

12월 24일 갑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에 맥구(麥丘)의 노인177)  의 말이 있었다. 금년 실시한 구휼을 어찌 전년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일찍이 이미 시행한 법이 있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양도(兩都)와 팔도의 사민(四民)에게 구례에 의거해 은혜를 베풀고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동돈녕 김효대(金孝大)의 어머니와 감사 김기대(金器大)의 어머니는 모두 자성(慈聖)의 동기간들이니, 세찬(歲饌)을 특별히 더 주도록 하라."
하였다. 또 고 봉조하 유척기의 부인에게 옷감과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5일 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평안 병사 원중회(元重會)가 표류한 백성들을 조사하여 올린 장계 가운데 대신(大臣)의 이름을 쓰지 않고 성(姓)만 썼으니, 일의 체모가 해괴하다.’고 하면서 파직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구선행(具善行)을 특별히 제수하여 평안 병사로 삼았다.
내년 삼명일(三名日)에 바치는 토산물을 특별히 중지하여, 백성을 위하는 뜻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시건(李蓍建)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6일 병술

이방수(李邦綏)를 황해 병사로 삼았다.

 

부제학 이미(李瀰)가 상소하여, ‘지난번 남에게서 무증(誣證)을 당하였다.’면서 스스로 인책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여러 도의 증열미(拯劣米)178)   중에 가장 오래된 1년 치를 특별히 탕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28일 무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이번 도목 정사에서 유원 첨사(柔遠僉使) 나춘형(羅春炯)은 타도(他道)의 사람으로 수원(水原)에 오래 근무한 자의 이름을 빌려 현임(見任)에 제수되었는데, 수원부에서 거짓으로 병조에 보고한 것은 해괴하다.’면서 수원부의 부사 이은춘(李殷春)을 파직하고, 나춘형은 그냥 둘 수 없으니 고신(告身)을 회수하며, 병조 판서 이경호는 추고하라고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삼양(三陽)이 돌아와 만물이 모두 봄을 누리고 있으니, 이때가 바로 임금이 원(元)의 뜻을 체득하여 인(仁)을 행할 때이다. 아! 부덕한 내가 40년 동안 재위하여 백성에게 은혜를 입힌 정사가 하나도 없었다. 근래에 갈수록 쇠약해지고 있으므로 부탁의 중요함을 돌아볼 때 곱절이나 더 두려워진다. 임금의 정령(政令)은 어느 것이나 중요하지만,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는 그 얼마나 중요한가? 아!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농사에 의지하니, 그 중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매년 초에 농사를 권장하는 하교가 있었으나, 형식적인 겉치례가 되고 말았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작년 봄에는 이미 오추지전(五推之典)179)  을 시행하였으나, 내가 정성이 얕아 구경거리만 되고 말았다. 이것도 그러한데 다른 것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아! 작년 농사 또한 처음에 예상했던 것에 어긋났다. 엊그제 친히 물어 본 것으로 본다면, 여느 해와 비교해 한 섬이 줄었다고 한다. 그러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옛날의 풍년을 축하하며 지은 왕들의 시를 읊조려 보니, 농사가 처음 생각한 것과 어긋난 것은 또한 나의 부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 지금은 비록 피곤하여 누워 있지만, 마음만은 백성에게 있다. 만일 그 요점을 말하자면, 도신과 수령에게 하유한 것에 다 갖추어져 있다. 방죽을 쌓아 물을 대게 하는 것은 가뭄을 막는 훌륭한 방법이고, 종자와 식량을 찾아가 지급하는 것은 돌보아 주는 실질적인 혜택이다. 어찌 감히 스스로 덕이 없다고 여겨 말없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게으름을 경계하고 신칙하는 것은 수령의 직책이다. 한 명의 수령이 부지런히 하면 한 고을이 본받게 되고, 한 명의 도신이 부지런히 하면 한 도가 본받는 것이다. 비록 큰 풍년이 든 해에도 힘써야 하는데, 더구나 올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말로 하는 하교라고 말하지 말고 힘쓰고 힘쓰도록 하라. 아! 내가 올해와 같은 해를 만나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이 하교를 듣는 자는 예전 임금의 덕의(德意)를 체득하여 오늘날의 백성을 권면하라. 방백(方伯)이나 수령(守令)이 되어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남을 꾸짖을 때는 현명하고, 비록 나약한 자라도 다른 사람은 강하기를 요구한다.’는 말이 성인의 교훈에 실려 있다. 사람마다 눈이 나라에 있고 마음이 백성에 있어서 마음을 정성껏 한다면, 어떤 일인들 못하겠는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히 힘써 감히 소홀히 하지 말아서, 여든 살을 바라보는 임금의 간절한 하교에 부응할 것을 팔도와 양도(兩都)에 하유한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시건(李蓍建)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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