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경인
조정의 2품 이상인 봉조하, 육조의 당상, 대사간이 정월 초하루 아침에 문안을 드렸다.
장악(藏樂)001) 을 명하였는데, 태조가 승하한 해가 〈무자년〉 이해였기 때문이었다.
1월 2일 신묘
내국에서 입시하였는데,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도 같이 입시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앙첨(仰瞻)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앙첨하면서 말하기를,
"용안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차례차례 앞으로 나아가 팔을 어루만지며 모두 흔축(欣祝)하기를, ‘피부가 청년 시절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장령 이정렬(李廷烈), 헌납 강지환(姜趾煥)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중광년(重光年)인 〈신사년002) 에도〉 이미 하교하였거니와, 나는 비록 장악(藏樂)하였지만 백성들에게는 금함이 없었으니,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집에 놓아 둔 악기는 금하지 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삼양(三陽)003) 이 돌아와 초목과 뭇생명들이 모두 봄 기운을 지녔는데, 아! 백성들도 또한 봄 기운이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아! 초목과 뭇생명들이 봄기운을 지니는 것은 춘왕(春王)의 목덕(木德)을 행한 효과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부덕한 나는 40년 동안 임금으로 있었으나, 말할 만한 하나의 일이나 하나의 명령도 없었다. 더구나 기운이 쇠약하고 정신이 시들어져서 봄이 와도 봄이 온 줄을 모르고 따뜻해도 따뜻한 줄을 모른다. 그 임금이 이러한데, 그 백성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가만히 누워서 조용히 생각해 볼 때 나의 몸이 아픈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 대소 신료들은 임금이 이러하다고 말하지 말고 과거 융성한 은택을 우러러 몸받아 더욱 부지런히 힘써 오늘날 늙은 임금의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춘대(春臺)에서 놀게 하라. 비록 가만히 누워 있으나 어찌 이따금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모두 이 말을 알아 듣고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 덕의(德意)를 큰 소리로 외우게 하라."
하였다.
1월 3일 임진
임금이 창덕궁으로 거둥하여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으로 나아가 전배한 뒤에 궁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입직한 군사들을 호궤(犒饋)004) 하였다. 하교하기를,
"백성의 숫자를 왕에게 바치면 왕이 절을 하고 받는 법이니, 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법은 한(漢)나라에서도 있었다. 올해는 식년(式年)005) 이니, 단자를 모두 받아들인 뒤에 지난 식년의 가감(加減)된 숫자를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한필수(韓必壽)를 정언으로 삼았다.
1월 5일 갑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추조(秋曹)006) 와 경조(京兆)007) 에 분부하여 3년 이전의 구채(舊債)는 가을 추수를 하기 전까지 처리하지 말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김치인이 제방 쌓는 것을 신칙하라고 청하니, 윤허하였다. 김치인이 관동(關東)의 봄철 조련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동래부(東萊府)에서 납부할 생숙동(生熟銅)과 단목(丹木)을 기한이 지나도록 납부하지 않기에 누차 공문을 보내어 독촉하였으나, 역관(譯官)들이 대마도에서 보내 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청컨대 동래 부사를 추고(推考)하고 역관들을 치죄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강화 유수 정상순(鄭尙淳)이 말하기를,
"강화도의 군량이 10년 이전만 해도 7만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으로 오면서 각처에 대여해 준 것 중에서 상환되지 않은 것과 민간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뒤로 미룬 것들의 수량이 많아 현재 있는 수량은 각진·보(鎭堡)에 있는 것을 통틀어 겨우 3만 8천여 석 밖에 되지 않습니다. 군량이 이처럼 얼마 되지 않으니, 정말 너무나 소홀하고 잘못되었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헤아려 가장 좋은 방안에 따라 조치하여 군량을 더 늘리게 하소서."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각처에 대여해준 것은 현재 사세(事勢)로 보아 비록 갑자기 상환하라고 재촉할 수는 없으나, 호남의 쌀은 가을 추수를 기다렸다가 즉시 운송하게 하소서. 민간에서 받지 않고 뒤로 미루어 둔 것은 받아들일 만한 해를 만나 마음을 더 써서 거듭 신칙한다면 점차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부에서 급대(給代)해 준 돈으로 수시로 곡식을 사서 군량에 보탠다면 점차 옛날처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윤허하였다. 대사간 이시건(李蓍建)이 생각하였던 것을 말씀드리면서 묘당에 널리 자문을 구하여 백성을 편하게 해줄 방안을 논의할 것을 청하고, 또 몸을 보양하는 방법을 다하여 하늘에 장구한 명을 기원하는 계책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오늘의 차대(次對)는 팔순을 바라보는 정월의 처음 정사이니만큼 입시한 여러 신하들은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말라. 그리고 대신(臺臣)에 있어서도 관료들끼리 서로 규계하여 새해와 같이 새롭게 하고 또한 고지(故紙)나 베껴서 말하지 말도록 하라. 옛날 주(周)나라 때에도 목탁(木鐸)008) 을 치고 돌아다니면서 경계하였으니, 지금 이렇게 하교한 것은 그 뜻이 깊다. 아! 여러 신하들이 만약 나라를 자기 가정처럼 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몸받는다면 오늘날 이 하교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먼저 하교하는 것도 나라를 위하는 고충인 것이다."
하였다. 이어 관서(關西) 병영에서 삼명일(三名日)009) 에 올리는 방물을 올리지 말 것과 서명신(徐命臣)을 방면할 것을 명하였다.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 병조 판서 이경호(李景祜)가 상소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추함(推緘)010) 이 주머니에 가득찬 것은 사실 아름다운 일이다. 한때 신칙을 가지고 무슨 사직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헌납 강지환(姜趾煥)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올해 장악(藏樂)을 명하신 것은 사실 조상을 추모하는 우리 성상의 지극한 효성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인정은 비록 끝이 없으나 예절은 한계가 있습니다만, 이번 장악하신 일은 예경(禮經)에도 거론되지 않았고 열성(列聖)께서도 행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정말 예절에 없는 것으로 마땅함에 지나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새봄에 거둥하실 때에도 종소리와 북소리 그리고 음악의 연주를 들을 수 없어서 〈임금께서 건강하신 것을 보고 기뻐하는〉 백성들의 뜻을 위로할 수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장악(藏樂)의 명을 빨리 거두어 온 나라 사람들의 바람에 부응해 주소서.
삼가 보건대 우리 왕세손 저하께서는 슬기로운 자질을 타고나 학업이 날마다 진취되어 가고 있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의 억만년 무궁한 근본입니다. 그러나 다만 강관(講官)을 설치한 것은 장차 슬기로운 덕을 성취시킬 책임을 맡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적인 겉치레만 하고 인원이나 갖추어서 아침에 제숙하였다가 저녁에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있어서 강론하는 공부가 귀취(歸趣)를 다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인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어떻게 개발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조(銓曹)에 특별히 주의시켜 적합한 사람을 선발하여 오랫동안 임무를 맡기도록 하소서. 그리고 궁료(宮僚)들을 만나는 시간은 적고 부시(婦寺)들과 가까이 지내는 때가 많으니, 일폭 십한(一曝十寒)011) 의 염려를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서경(書經)》에, ‘가까이 시종을 드는 신하가 바르면 그 임금도 바르게 된다.’고 하였으니, 비록 환시(宦侍)같은 부류들이라도 반드시 근신한 노성자(老成者)를 뽑아 심부름을 시키게 한다면 틈을 엿보아 농간을 부리는 우환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유념해 주소서.
임금의 말씀은 마땅히 신중히 하셔야 하는데, 삼가 들으매 전후 연석(筵席)에서 중신과 재신을 ‘묵상(墨商)012) ’이라 이르시고 ‘사두(篩頭)013) ’라고 이르셨다 하니, 두 신하로 하여금 정말로 용렬하고 비루하다고 여겼으면 재상의 자리에다 발탁한 것은 종핵(綜核)하는 정사가 아닐 것이고, 이미 그들을 여기까지 끌어올렸으면 또한 예로 대우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연석에 임하시어 호칭을 부를 때는 전부 속된 말을 쓰고 계시니, 그들을 배우로 기르시고 노복으로 보시는 의도가 말씀 속에서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저 두 신하들이야 물론 돌아볼 것도 없지만 사륜(絲綸)에 끼친 누가 적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시험삼아 지난날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득복(李得福)이 대궐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데, ‘즉시 나와 사은 숙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벌을 내려 파직하라고 하셨고, 이휘중(李徽中)이 이미 향반(享班)에 나아갔으나 ‘관료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한 하교까지 받았는데, 비록 지나간 일이기는 하나 형벌의 정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앞으로 벌을 시행하실 때에는 더욱 신중히 살펴서 다시금 중도를 지나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인심이 날로 야박해져 풍속이 불미스러운데, 이미(李瀰)·이규위(李奎緯)의 일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이규위가 경연에서 아뢴 것은 그것이 떠도는 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고, 이미가 전후로 올린 상소에는 근거없이 날조하여 끌어댄 것이라 하였으니, 곧 의심스러운 안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규위의 말이 옳다면 이미의 변명은 진실로 속인 것을 면하기 어렵고, 이미의 말이 옳다면 이규위가 증거로 끌어댄 것 또한 어찌 너무나 허황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한번 명확히 밝혀 그에 합당한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예조 참판 채제공(蔡濟恭)은 일찍부터 성균관에서 유학하여 문예(文藝)는 조금 있으나, 집에서 하는 행실은 취할 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가 상을 당했을 때에 생도들을 모아 놓고 여막(廬幕)의 곁에서 글솜씨를 시험하면서 이를 ‘사백일장(私白日場)’이라고 명칭을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시험지를 받아들여 축(軸)을 만들기를 한결같이 과거의 규례에 의하여 하고 주필(朱筆)로 등급을 매길 땐 문득 고시관(考試官)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또 즐겁게 음식을 들면서 연회의 집합소처럼 상호 과장하고 칭찬해 주면서 훌륭한 일인 양 여기었으므로 보고 듣는 사람들마다 너나없이 해괴하게 여기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효자의 마음이라면 이러한 일을 편안히 여기겠습니까? 이는 ‘상(喪) 중에는 상사(喪事)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는 고인의 의리가 아니니, 풍속을 손상시키고 조정 관료들에게 수치를 끼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청선(淸選)의 자리를 줄 수 없습니다. 신은 채제공의 제학 임무를 먼저 개정하고 이어서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동부승지 서명선(徐命善)에게 명하여 읽게 하였는데, 묵상(墨商)·사두(篩頭)의 말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사두는 이득종(李得宗) 같은데, 묵상은 중신 중에 얼굴이 검은 자가 있는가?"
하니, 서명선이 말하기를,
"중신 중에 얼굴이 검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는데, 바로 조명정(趙明鼎)이다. 묵장(墨匠)이라고 하면 말뜻이 전부 드러나기 때문에 바꾸어서 묵상이라고 한 것이다. 겉으로는 비록 경계하라는 것 같지마는 사실은 용렬한 곳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하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채제공(蔡濟恭)의 일은, 이 사람이 벼슬길에 오른 초기부터 그 사람 됨됨이를 익히 알고 있는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강지환(姜趾煥)의 이 참소한 것과 비근한 점이 있겠으며, 강지환이 거상(居喪)할 때에도 그 역시 백일장을 열어 시험지를 받아들인 일이 있었는가? 그의 임금에게 만고에도 없는 묵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음은 너무나 심하게 무상하니, 관례에 따라 처리해서는 안되겠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저에 대하여 스스로 제 말을 하였다고 할 수 있으니 강지환을 영구히 사판에서 삭제한 다음 시골로 내쫓아 벼슬아치들 사이에 끼어 있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6일 을미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간원(諫院)의 상소 가운데, ‘동요되어 불안해 하는 자가 있다.’고 한 말이 있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해직(解職)해 줄 것을 청하자, 답하기를,
"경의 마음을 내가 알고 내 마음을 경이 아는데, 비록 온갖 참소가 있더라도 어떻게 꾀를 부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명한(洪名漢)을 승지로 삼았다.
대신, 금오 당상, 양사를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지환(姜趾煥)이 말한 묵상(墨商)이란 ‘상(商)’ 자는 임금의 말을 만들어낸 죄가 없지 않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이는 문자를 잘 쓰지 못한 것에 불과한데 깊이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임금의 말을 만들어낸 죄로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점은 과하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이어 금오 당상을 먼저 물러가라고 명한 다음 대사간 이시건(李蓍建)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장령 이정렬(李廷烈)은 시골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강지환을 논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들이 청토(請討)해야 할 것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을 어떻게 갑자기 청토하자고 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쇠했지마는, 태아(太阿)014) 가 손에 있다. 오늘의 일은 말씨[辭氣]가 아니다."
하고, 강지환(姜趾煥)을 대정현(大靜縣)으로 멀리 귀양보내되 배도 압송(倍道押送)하라 명하고, 강지환을 추천하였던 전관(銓官)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서명신(徐命臣)과 조준(趙㻐)에게 하교하였던 것을 모두 삭제하고, 이택수(李澤遂)를 교리로, 홍검(洪檢)을 부교리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내일 절제(節製) 때에 강지환과 가장 가까운 친척들은 모두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1월 7일 병신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015) 를 설행하고 경향(京鄕)에서 각각 한 명씩 뽑으라 명하였다. 그리고 강지환을 거제부(巨濟府)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과거의 순위를 매기는 일로 입시하였다. 공시 당상(貢市堂上)에게 명하여 공시인(貢市人)들을 불러 폐막(弊瘼)을 물어 보았다. 공시 당상 김시묵(金時默)이 성균관의 종이 대금을 많이 환불하지 않았다고 아뢰자, 탁지(度支)로 하여금 노비공(奴婢貢)을 특별히 실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서울 사람 중에 장원한 유학(幼學) 윤재순(尹在醇)과 시골 사람 중에서 장원한 생원 성덕조(成德朝)를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라고 명하였다.
1월 8일 정유
유성이 정성(井星) 밑에서 나와 남쪽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색깔은 적색이었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인일제(人日製)에 합격한 유생들을 입시시켜 각자 시험지를 외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무자년016) 2월 일기를 읽게 하고는 하교하기를,
"지금 무자년의 일기를 보니, 2월 11일에 이진망(李眞望)이 사부가 되었다. 이 사람은 옛날 내가 배운 스승인데, 어찌 표하는 뜻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제문(祭文)을 지어 내릴 것이니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그의 자손을 조용(調用)토록 하라."
하였다.
1월 9일 무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강화·교동과 경상도 좌병영과 황해의 수영에 봄철 조련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1월 10일 기해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달무리가 토성을 에워쌌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이마 위에 검정 머리털을 경들이 보라."
하니, 도제조 김상철(金尙喆) 이하 여러 신하들이 앞으로 나아가 바라본 뒤에 아뢰기를,
"과연 성상께서 말씀하신 대로이고, 안색이 윤기가 나 새해 이후로 전보다 더 화색이 감도니, 그지없는 경사이고 다행스럽습니다."
하였다.
1월 11일 경자
유성이 누성(婁星) 밑에서 나와 동쪽 하늘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색깔은 적색이었다.
1월 12일 신축
햇무리가 졌는데,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고 배 위에는 관(冠)017) 이 있었다. 초저녁에 달무리가 졌는데, 달무리 위에는 관이 있었고 밑에는 이(履)018) 가 있었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봄갈이할 날이 머지 않았으니, 낙죽(酪粥)을 올리지 말라. 그 소는 본 고을로 내려 보내어 봄갈이에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데, 막 젖을 짰던 소를 도살장에 보낸다면 어찌 옛날 선왕께서 청둥오리를 드시지 않았다는 가르침을 몸받은 것이겠는가? 당일에 봄갈이에 사용할 소를 내려 보내도록 내국(內局)에 보고할 것을 경기 감영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아! 어찌 나이가 많아 기운이 쇠약해졌을 뿐이겠는가? 올해가 무슨 해인가?019) 지난 겨울에 봄이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 마음이 몇 층이나 내려앉은지 모를 정도였다. 목전(目前)의 일로 보건대 삼양(三陽)이 돌아와서 만물이 모두 소생하고 있는데도 나는 봄이 온 줄을 모르겠다. 지난번 예(禮)를 거행한 것은 나에게는 정말로 요행이었다. 약사증상(籥祀烝嘗)020) 의 예를 거행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새해에 전알(展謁)하겠다는 생각도 나지 않으니, 이것이 효도란 말인가? 아! 대소 신료들은 이 마음을 살피어 모든 제사에 정성껏 하고 신중히 하여 대소의 제사에 퇴보하지 말아 나의 이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3일 임인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평안 병사 구선행(具善行)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청천강의 일을 직접 신칙하려는 것이었다.
예조 참판 채제공(蔡濟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건대 신은 무턱대고 올라가기만 하였지,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경계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땅히 조정을 떠나야 되지만 멀리 가 노닐 때가 아니라고 여겨서 서성거리며 있노라니 걱정거리가 많았는데, 문임(文任)이란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금세(今世) 재앙의 빌미가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더구나 신이 위로 마음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으나 아래로는 냉대(冷待)하는 눈초리를 받고, 마음에 세상을 개탄하는 회포를 안고서 망령되이 공도(公道)를 넓히려는 책임을 지는 바람에 덫과 함정이 조밀하게 펼쳐지고 화살이 주위에서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과연 강지환(姜趾煥)의 상소가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게 나왔습니다. 신에게는 아주 가까운 친척의 관자(冠者)와 동자(童子) 4, 5명이 있어 항상 신의 집에 머물면서 구두(句讀)를 신에게 배웠으며, 이웃집 연소한 소년 7, 8명은 신이 나이가 더 먹었다는 이유로 왕래하면서 글을 물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비록 갑신년021) 여름 심제(心制)022) 하던 때일지라도 신의 집에 묵게 하면서 과거 시험의 각 문체(文體)를 가르치고 잘잘못을 논하여 고하를 매겨 써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뒤 상(喪)을 당하여는 3년을 끝마치도록 이러한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명한 선배들이 거상(居喪)할 때에 문자(文字)를 상고하고 교정하는 일이 또한 많이 있었으나, ‘상사(喪事)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리로 의심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차려 놓고 연회를 하였다는 구절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부모가 있고 사람마다 어버이 상이 있는데, 그 역시 성세(聖世)의 풍화 속에 하나의 인물로서 어찌 차마 이런 말을 입에서 꺼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지만 이것이 어찌 강지환 스스로가 만든 말이겠습니까? 신은 지금 세상 사람들 눈 속에 못일 뿐입니다. 이미 그 못을 빼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반드시 그럴싸한 방법으로 속여야만 임금의 귀를 의혹시킬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삼척 동자도 믿지 않을 말로 해와 달 같이 밝은 임금을 속이려고 하였으니, 강지환에게 방안을 가르쳐 준 자의 계략이 허술하다고 하겠습니다. 열 줄의 사륜에 곡진하게 의혹을 풀게 하셨으니, 결초 보은(結草報恩)한다는 말로도 신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부족할 뿐입니다.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세 사람이 말하자 사실로 받아들였고023) , 여러 차례 사람이 와서 말하자 베짜던 북을 던지고 달아났다는데024) , 이는 고인들이 슬퍼하는 바였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넘어뜨리려는 곳에 몇 개의 놀라운 덫이 은밀히 감추어져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전하께서 신을 부모처럼 감싸주시지만 또한 어찌 북을 던지고 일어나지 않을지 알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장차 신의 본직과 겸직을 모두 해임시켜 천지와 같은 생성(生成)의 은택을 끝마치도록 해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옛날 유비(柳玭)025) 의 계자서(戒子書)를 항상 마음속으로 외우고 있다. 자양(紫陽)의 서문(序文)026) 으로 말하건대 송(宋)나라 덕이 융성했을 그 때에도 범질(范質)의 시가 있었으니, 하물며 말세이겠는가? 경의 상소에는 북을 던질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내가 비록 노쇠하였지만 이러한 일은 비록 날마다 백 번 북을 던지려고 해도 어떻게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내가 경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경은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월 14일 계묘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수어영(守禦營)·총융영(摠戎營)·개성부(開城府)·영종진(永宗鎭)의 군사 조련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1월 15일 갑진
햇무리가 졌는데,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고 햇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다.
1월 16일 을사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송문재(宋文載)를 대사간으로, 정항령(鄭恒齡)을 집의로, 이경옥(李敬玉)을 사간으로, 홍상직(洪相直)·임일원(任一源)을 정언으로, 김상익(金相翊)을 부제학으로, 김상묵(金尙默)을 응교로, 박취원(朴取源)을 부응교로, 박지원(朴志源)을 보덕으로, 이진형(李鎭衡)을 필선으로, 김익(金熤)을 겸 필선으로, 이창수(李昌壽)를 형조 판서로, 예문 제학 성천주(成天柱)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무자년의 일기를 가지고 들어와 8월 20일의 차대(次對)를 읽도록 명하였는데, 구만리(具萬里)가 대신(臺臣)으로 먼저 일을 아뢴 다음에 피혐(避嫌)한 내용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의 대신(臺臣)은 이러하였다."
하고, 특별히 구수국(具壽國)을 공조 참의에 제수하였으니, 구수국이 구만리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1월 17일 병오
장령 홍상직(洪相直)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수원에 오랫동안 근무한 타도의 사람을 본 부사나 해당 전관(銓官)에게 알리어 파직하거나 추고하였다면, 중간에서 힘을 부린 자가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전 판서 조운규(趙雲逵)에게는 파직의 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채제공(蔡濟恭)의 변명하는 상소는 기세를 세우고 기염을 토하여 오로지 욕하기만 일삼았습니다. ‘북을 던졌다[投杼]’는 말에 있어서도 또한 아랫사람으로서 성명(聖明)께 말씀드릴 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방자하게 상소에다 써서 매진(媒進)하는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이를 그냥 놓아둘 경우 뒷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삼년상(三年喪)은 누구나 똑같은 것인데, 심제(心制)를 지최(持縗)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을 허비해가며 스스로 변명하려고 꾀하였으니, 이처럼 무식한 사람은 벼슬아치들 사이에 둘 수 없습니다. 신은 마땅히 그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벌을 시행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개성 유수 김선행(金善行)은 지위와 명망이 보잘것 없고 언행이 괴상합니다. 이역(異域)에 명을 받들고 나가 역관의 재화를 빼앗아 이익을 독차지 하고, 구도(舊都)027) 에 나가서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자신을 살찌웠으며, 석전(石錢)을 부지런히 거두어들이고 강송(江松)을 마구 베었는데, 이는 모두 비루하고 어긋난 일입니다. 더구나 외람되이 경연에 추천된 지 10년이나 되었건만 전후의 전형들이 한번도 거론하지 않았으니, 세상 물정에 맞지 않음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신은 김선행에게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였다.
지평 김치공(金致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의 형정(刑政)은 관직이 높거나 낮음을 보아 다르게 시행해서는 안됩니다. 수원에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을 바꾸어 차출하려고 한 것은 이미 연석(筵席)에서 이야기가 되어 본 고을의 수령을 파직시켰습니다. 그런데 전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이 문제로 소(疏)를 올려 사실을 자백하였으니, 이름을 바꾸어 촉탁한 잘못은 책임질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신은 그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멀리 귀양간 죄인 이달(李炟)의 살인한 옥사는 내막과 자취가 숱하게 드러났으니, 상명(償命)028) 의 법을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다시 그를 잡아다 추국하여 법에 따라 처단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때 양사(兩司)가 모두 파직되어 향관(享官)을 가려 차출할 때에 성상께서 여러번 하교하셨는데, 전 오위 장(五衛將) 윤광소(尹光紹)는 감히 과오를 진 몸으로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차출하려고 해당(該堂)에다 부탁하였다가 그의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자 하리들과 같이 암암리에 체결하여 마음대로 입계(入啓)할 단자에 고쳐 써 놓았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이러한 무리들은 도성 안에 놓아둘 수 없습니다. 신은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해야 된다고 봅니다.
병조 좌랑 목조영(睦祖永)은 이미 과오가 있는데, 운관(芸館)029) 에 예속되는 제수(除授)의 명단이 내려지자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신은 즉시 그를 삭탈하고 도태시켜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거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지 않았는가? ‘닭이 울자 조정이 이미 가득히 찼다030) .’고 말이다. 우리 조정의 상참은 즉 이 예(禮)이다. 그런데 오늘날 귀와 눈의 구실을 맡고 있는 신하는 그 임금이 비록 옷을 차려 입고 기다리고 있지만 어느 때에 옷을 차려 입을 것인가? 비국 당상이 묵묵히 있다가 물러나는데 대신(臺臣)이 된 몸으로 어찌하여 규계하지 않는단 말인가? 온갖 일이 고식적이고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으니, 귀와 눈의 구실을 맡고 있는 신하는 이를 듣거나 보면서도 어찌하여 경계하지 않는단 말인가? 옛날에는 갈도(喝導)하는 소리가 들리면 대소의 태도가 변하였었는데, 지금은 갈도하는 소리만 들릴 뿐 대각(臺閣)의 풍채(風采)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러하고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어제 제수한 대신에게 모두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통영(統營)·전라 병영·경상 우병영의 봄철 조련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김치인이 아뢰기를,
"치사(致仕)한 뒤에 올라간 자급(資級)과 치사하기 전에 올라간 자급은 조금 다른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 정사(政事)에서 남유용(南有容)의 선조 양대(兩代)에 대한 추증(追贈)을 곧바로 거행하였으니, 해당 전관(銓官)을 엄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추증을 회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는 오직 성상께서 처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만, 치사(致仕)의 전후는 사실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니, 전관을 추고하지 말고 근래에 있었던 사례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김치인이 여러 도에 허물어진 성지(城池)와 썩고 무디어진 기계(器械)를 제때에 수리하고 고치도록 엄히 신칙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김치공(金致恭)·홍상직(洪相直)의 상소를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조운규(趙雲逵) 일은 신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잠시 파직의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이달(李炟)의 일은 나의 처분이 의도가 있다. 윤광소(尹光紹) 일은 지금 대신에게 들으니 본래의 일과는 달랐다. 목조영(睦祖永)의 일은 무른 땅에다 나무를 심어 놓고 만년(晩年)에 가서는 취하지 않는 격이다. 홍상직(洪相直)의 상소에 거론한 채제공(蔡濟恭)의 일은 사람의 좋지 못한 마음이 어찌하여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김선행(金善行)은 그를 등용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 상소는 보궤 불식(簠簋不飾)031) 의 비방에 크게 부족하다. 너무나 그 간섭이 지나쳤다."
하였다.
승지를 입시하라고 명하여 전교를 쓰라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올해는 무슨 해인가? 사람마다 지나쳤다고들 말하는데, 나 역시 스스로 알고 있다. 〈태조께서 승하하신 무자년이 돌아온〉 360년이 되는 해에 선조를 추모하여 장악(藏樂)한 일은 오르내리는 영령께서 굽어보실 것인데, 이것이 어찌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하기 위해서이겠는가? 국초 을해년032) 은 곧 나의 갑술년033) 과 같다. 몇백 년 뒤에 석년(昔年)034) 과 똑같이 부합되는데, 내 나이는 또한 한살을 더하였으니, 내가 어찌 중광년(重光年)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추모의 마음이 배나 더 간절하다. 더구나 올해는 5월에 감회가 일어날 것이다. 실록을 상고해 본 뒤에야 이달에 덕수궁에 계셨다는 것을 알았으니, 오늘날을 상상해 볼 때 더욱더 부끄러움만 간절한데 다만 장악하는 것이 예에 지나치기라도 할까 두렵기만 하다. 그렇지 않다면 소급해 상복을 입는 예를 어찌 거행하지 않겠는가? 근래에 이로 인해 무자년 일기를 읽도록 하였는데, 8월 20일의 차대(次對)에 이르러서는 강개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상참(常參)을 하라고 명하였는데, 옛날을 생각하는 마음과 추모의 회포가 가슴 속에 더욱 간절하다. 이유인즉, 무자년 이달에 자정전(資政殿)에서 법강(法講)035) 을 많이 하였는데, 나는 책을 펴 놓고 독서할 가망이 이미 없어졌다. 이달에 비록 법강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11일의 간지(干支)는 경자(庚子)이다. 경자년에 전중(殿中)에서 제물을 올리던 일을 더듬어 생각해 보건대, 오장(五臟)이 떨어질 것만 같다.
건국 초기를 추억해 보고 옛날을 생각해 보니, 이 역시 불효이고 이 역시 불초한 것이다. 그리고 3일을 넘으면 하나의 간지가 있는데 즉 갑진(甲辰)이다. 갑진년은 무슨 해인가? 경자년에 〈숙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따라가지 못하였고, 갑진년에도 황형(皇兄)036) 을 따라가지 못하였으므로 금년에는 나의 마음이 몇 번이고 착잡하였었다.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정말로 스스로 억제하기 어려웠다. 아! 사시(謝詩)를 쓴 지 오래되었고 지난 겨울에도 사문(謝文)을 썼는데, 비록 회포를 붙여 보려고 해도 어떻게 되겠는가? 특별히 승선(承宣)을 불러서 분부로 문자를 대신 해서 한 편을 불러 주어 쓰게 하였으나 이는 반포하는 것이 아니니, 다만 사관으로 하여금 기재하여 사기로 간직해 둔다면 후손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또한 주서(注書)로 하여금 일기에다 쓰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어제(御製)에다 기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 자고 이래로 제왕이나 서민 중에 나와 같은 자가 누가 있었는가? 조용히 누워서 생각해 볼 때 만고에 나와 같이 짝할 사람이 없다고 하겠다.
감히 연조(年條)에 따라 중광년(重光年)037) 에 3년, 무술년038) 에 3년, 경자년039) 에 3년, 갑진년040) 에 3년, 경술년041) 에 3년, 정축년042) 에 3년을 기록하여 유시하니, 즉 18년이다. 아! 중광년에는 비록 예와 똑같이 복을 입지 못하였으나, 3년의 제도는 한가지이므로 이 때문에 중광년에 장악한 것이다. 그 사이를 기년(朞年)의 제도로 계산해 보건대, 또한 20년이 넘었으므로 한밤중에 생각해보매 가슴이 내려앉는다. 어찌 전혀 꿈속에도 예상치 못했던 사이에 내 나이가 한결같이 이에 이를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 때문에 8년 사이에 두 차례나 장악하였는데, 이 역시 불효한 것이고 이 역시 불초한 것이다. 세상에 나와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세상에 나와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임금과 신하 사이는 의리라고 하지만, 충효는 본디 두 가지로 상대(相對)를 이룬 것이 아니다. 《목릉보감(穆陵寶鑑)》을 보건대 가정에 팔순(八旬)이 가까운 부형(父兄)이 있고 나와 같은 자가 있었으니, 자제들의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어찌 아까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만 있었겠는가? 만약 순종하고 우애하는 효자의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한 시각이라도 보통 사람과 똑같이 여길 수 있겠는가? 아까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두 번째의 일이다. 그 어버이의 오늘날 마음을 생각해 본다면 자식된 자는 비록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친(至親)이라 하더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할 것이다. 임금과 어버이는 똑같은 것인데 신하 또한 이러한 마음이 없으니, 심하다 그 마음이여! 재작년부터 그 임금이 어떤 상황에 놓였던가? 그런데 고요히 요양하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나은 기미가 있을 경우 틈을 타 도전하였다. 아! 무슨 마음으로 감히 을해년043) 에 불령(不逞)한 하나의 ‘기(氣)’ 자의 마음을 본받으려 한단 말인가? 특히 개탄스러운 것은 기동하지 못하셨던 올해를 만나 그 임금이 추모하여 장악하려 하니, 만약 타고난 이성이 있을 경우 오늘날 신하들은 꿈속에서도 목이 메일 것이므로 옛날의 습관이 얼음처럼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봄 얼음이 머지않아 녹을 것인데, 당인(黨人)의 마음은 여전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시험삼아 지난해와 올해의 기상(氣像)을 보건대, 마음을 깨끗이 씻었는가? 화합을 하였는가? 내가 많이 보아 왔고 내가 익히 들어 왔다. 그 임금에게 도전하기 위해 마음을 쓰면 몸에 무익할 것이다. 어찌 다만 무익으로 끝나고 말겠는가? 전철(前轍)이 숱하게 많는데, 그 전철을 그가 어떻게 감히 피할 수 있겠는가? 그 전철이 이미 무디어졌다고 하지 말라. 전철이 비록 무디어졌다 하더라도 마귀의 거울은 어두어지지 않았다. 아! 어찌 다만 세신(世臣)을 위한 것뿐이겠는가? 또한 이러한 부류들을 위해서이다. 아! 그들이 비록 무상하지만 본래 세신(世臣)이었다. 내가 어찌 그를 아끼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이 신칙한 것을 배반하였단 말인가? 비록 사문(謝文)이라고 하였지만 어찌 교서가 사문이겠는가? 물에다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새해의 초기이므로 강 가운데의 얼음이 녹지 않았으니, 어떻게 돌을 물 가운데다 던질 수 있겠는가? 한밤중에 사관(史官)과 기주관(記注官)에게 구두로 불러 주어 쓰게 한 것은 의도가 깊은 것이다. 의도가 깊은 것이다."
하였다.
1월 19일 무신
달무리가 져 목성(木星)을 에워쌌다.
1월 20일 기유
햇무리가 졌는데, 오른쪽에 이(珥)044) 가 있었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여러 도에 혼사(婚事)나 장사(葬事)를 제때에 치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편리에 따라 돌보아주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였다. 김치인이 또 개인적으로 가축을 도살하는 것을 엄히 신칙하고, 추조(秋曹)와 경조(京兆)의 여러 당상을 일체 중하게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였다.
1월 21일 경술
주강(晝講)하였다. 임금이 삼경(三經)과 사서(四書)의 첫 대문(大文) 및 《소학(小學)》의 편제(篇題)와 동생행(董生行)045) 을 외우고, 유신(儒臣)들은 육아(蓼莪)046) ·체두(杕杜)047) 등의 장을 번갈아 강(講)하였다. 하교하기를,
"명목은 주강(晝講)이지만 오늘의 일은 추모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다."
하고, 경연관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1월 22일 신해
서명신(徐命臣)과 조준(趙㻐)을 앞서 하교한 대로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관학 도기 유생(館學到記儒生)048) 에게 강(講)을 시험 보였다. 수석을 논한 다음 구수온(具修溫)과 계덕신(桂德新)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라고 명하였다.
1월 23일 임자
햇무리가 졌는데, 오른쪽에 이(珥)가 있었다.
입직한 무신 장관(武臣將官)에게 능마아강(能麽兒講)049) 을 강하게 하고 진(陣)을 강한 데에서, 통(通)을 맞은 자에게는 각각 궁시(弓矢)를 하사하였다.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이 상소를 올려 해임해 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지금 양전(兩銓)은 제대로 사람을 얻었다고 나는 보고 있으니, 경은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지사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새해 첫달에 재상들에게 큰 유시를 내려 말을 하게 유도하셨는데, 이는 실로 밝은 운수를 만회하여 태평의 시대를 여는 하나의 큰 계기입니다. 이에 감히 쇠잔한 정신을 집중시켜 외람되게 망령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공자께서 ‘오직 병이 날까 조심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요양을 너무나 소홀히 하시고 빈번하게 거둥하여 바람과 추위를 피하지 않으며 수응(酬應)을 많이 하고 계시므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너나없이 애태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거둥하실 때에는 세손 저하께서 마침 건강이 조금 좋지 않았으므로 혹시라도 더 나빠질까 염려하여 어가를 수행하는 것이나 경건히 맞이하는 일을 모두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동궁을 걱정하는 생각처럼 오르내리는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께서 성상의 몸을 걱정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러러 생각하신다면 필시 두려운 마음으로 되돌아보아 감히 스스로 가볍게 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요순(堯舜)의 도리는 그 중도(中道)를 택하여 견지하는 것이니, 위태롭고 미약한 것을 정밀히 살펴 도심(道心)으로 하여금 주인이 되게 하고 인심(人心)으로 하여금 도심의 지시를 따르게 하여 두 끝을 잡아 중도를 사용하면, 자연히 과하거나 미급한 착오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의가 없으면 실상이 없고 공경이 아니면 이 마음을 견지할 수 없는 것이니, 다시 ‘성경(誠敬)’ 두 글자를 깊이 가슴에 새기소서. 구경(九經)050) 의 의의가 옛날의 훈계에 뚜렷이 드러났으니, 함양의 공부를 더욱더 더하여 분개의 마음을 막고 말씀을 반드시 신중히 하여 되풀이 되는 탄식이 없게 하소서. 모든 것은 오직 화합하고 협동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신하들을 칙려(飭勵)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같이하여 대동 단결의 지역으로 같이 돌아가게 하소서.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진퇴(進退)에 따라 치란(治亂)이 판가름나는 것이니 반드시 잘 살펴서 쓰거나 버리되, 어진 사람을 간택하여 등용해 조정이 맑고 밝아지게 하소서. 사기(士氣)는 나라의 원기이고 기강은 나라의 핏줄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기는 성대함을 생각할 수 없고 기강은 무너지고 해이해지는 걱정이 많으니, 배양하고 진숙(振肅)하는 방법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창고가 부실하여 3년 먹을 곡물이 저축되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자물쇠를 신중히 취급하지 않아 빈 문서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재용(財用)을 절약해야 하며 명실(名實)을 엄히 따져야 할 것 입니다. 그런데 서울과 지방의 요판(料辦)하는 폐단이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있으니, 금령(禁令)을 더욱 엄히 해야 됩니다. 생민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상벌의 권한은 도신(道臣)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큰 관리는 돌아보아 꺼리고 미약한 수령만 좌천시키고 있으니, 전최(殿最)051) 를 엄하고 밝게 하는 뜻이 아닙니다. 모두 교유서(敎諭書)052) 에 경계한 바에 따라 일심으로 받들어 이행하게 하면 팔도가 모두 깨끗해져 서민들이 안정을 찾을 것입니다. 연분(年分)에 재해를 입은 전답은 해조(該曹)에서 모두 정한 다음 도신(道臣)에게 반포해서 마음대로 세금을 더 매기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묵어버린 황폐한 전답에서 모두 세금을 징수하고 있는데, 이는 성왕(聖王)이 백성을 돕는 정사가 아니니, 헤아려 변통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이상 조목조목 아뢴 것들은 모두 신이 마음 속에 잊지 못하고 한번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니, 꿈속에서라도 성상께서 굽어 채택하시어 받아들이신다면 죽음에 임하여 충성을 다하고 싶은 소원에 거의 유감이 없겠습니다. 성명(聖明)께서는 다시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지금 9순이 된 노신(老臣)의 상소를 보니 경을 본 것 같다. 한 편에 쓴 글에서 충성과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었으므로 억지로 앉아서 힘겹게 답을 써서 나의 뜻을 표한다."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지사 정형복(鄭亨復)의 상소를 보니,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말속에 넘쳐 흐르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으므로 나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비국에 하달하여 모레 차대할 때에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4일 계축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무술년053) 일기를 읽으라고 명하였는데, 박치원(朴致遠)이 피혐(避嫌)한 대목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어려운 일을 하였다. 나의 일에 대하여 가상히 여길 만한 것이 있다. 이 사람은 본디 가난하였으니, 제수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는가? 유사(攸司)로 하여금 제수를 도와 주어 나의 뜻을 표하라. 고 봉조하 박성원(朴聖源)은 그 빈한함이 박치원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와 똑같이 도와 주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이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이 끝내 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아뢰니, 의금부에 하달하여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차자를 올려 병이 났다고 아뢰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지신(知申)054) 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고 같이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1월 25일 갑인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좌승지 김한기(金漢耆)를 입시하라고 명하여 《수작연월첩(受爵年月帖)》의 발문(跋文)을 쓰게 하였다.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을 방면하여 입시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좌상(左相)은 어찌하여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는가’라고 하순하고, 다시 유지를 전하라고 명하였다. 한익모가 명(命)을 기다리자,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충청 병영과 북관(北關)의 병사 조련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지사 정형복(鄭亨復)의 상소는 대체가 매우 좋았고 두서너 안건은 지금의 병폐를 지적하고 있으니 노신(老臣)의 충성심은 정말 감탄할 만합니다. 자물쇠를 신중히 취급하고 재용을 절약하는 것은 사실 급선무이고, 서울과 지방의 요판은 더욱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으니, 전최(殿最)할 때 교유서에 말한 뜻을 따라서 할 것을 것은 진실로 간략하면서도 다하였습니다. 수령을 택하는 것은 오로지 전조(銓曹)에 달려 있으니, 특별히 전조를 신칙하여 사목(事目)을 반포할 때에는 ‘어찌 백성에게 잘못함이 있어서야 되겠는가?’하는 뜻을 항상 간직해서, 청컨대 두루 살펴 지나치게 삭제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7일 병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판윤 윤침수(尹沈鏽)의 사직 단자를 되돌려 주고 해당 승지를 추고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개성 유수 김선행(金善行)이 소를 올려 대변(對辨)하였는데,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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