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신유
임금이 효장묘(孝章廟)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손이 수행하였다. 이는 효장의 탄생한 날이 15일이기 때문이었다. 초경(初更)에 비로소 궁으로 돌아왔다.
특별히 윤붕거(尹鵬擧)·구수국(具壽國)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임준(任㻐)을 대사간으로, 이적보(李迪輔)를 집의로, 이육(李堉)을 사간으로, 박취원(朴取源)·최몽암(崔夢嵒)을 장령으로, 홍수보(洪秀輔)·이진복(李鎭復)을 지평으로, 홍경안(洪景顔)을 헌납으로, 신광집(申光緝)·안성빈(安聖彬)을 정언으로, 윤시동(尹蓍東)을 부제학으로, 서호수(徐浩修)를 부교리로, 조돈(趙暾)을 형조 판서로, 김종정(金鍾正)을 예조 참판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2월 4일 임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황해 병영의 군사 조련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개성 유수 김선행(金善行)에게 체직(遞職)을 허락하였는데, 대신이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 관찰사 홍낙인(洪樂仁)이 상소하여 조운선(漕運船)을 편대(編隊)로 만든 폐단에 대해 아뢰고 구례(舊例)에 따를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도신이 이와 같이 폐단에 대해 아뢰었으니, 혜당(惠堂)에게 하문하신 다음 처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신법(新法)의 폐단이 과연 상소에 말한 대로라면 어찌 혁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자주 혁파를 하면 폐단이 더욱 심해지리라고 여깁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편대를 만드는 법은 누가 주관하고 있는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익보(李益輔)가 주관하고 있습니다."
하자, 비답하기를,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그 상황을 그림으로 그린 것 같다. 그러나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새겼던 인(印)을 녹여 버린 것과 장양(張良)이 앞에서 젓가락을 빌린 것055) 은 상황이 뚜렷한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고조가 한번 듣고 깨달았으니 그의 도량이 깊고 원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나는 날마다 더욱 쇠약해지고 있으니,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어떻게 경솔하게 의논할 수 있겠는가? 비록 이러하지만 나는 민자건(閔子蹇)056) 의 말처럼 옛날의 제도대로 하는 것이 깊은 도량이라고 본다.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자세히 여쭈게 하라."
하였다.
2월 6일 계해
부사직 채제공(蔡濟恭)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망극한 모함을 받아 이름과 행실이 땅에 떨어졌기에 눈물을 지으며 짧은 글을 올려 대략 아픈 심정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내린 열 줄의 비답(批答)이 정녕 간곡하고 측은하셨으니 흠 많은 천한 것이 무엇으로 인해 이런 총애를 받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홍상직(洪相直)의 상소가 또 나왔습니다. 신의 고요하게 숨너머가는 듯한 소리는 신의 입장으로 보면 가엾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신(臺臣)은 이를 분박(噴薄)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분박한 것은 물론 좋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력이 적과 맞설 만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신은 나그네입니다. 외로운 일신으로 사방에 장벽이 없는데, 누구를 믿고 분박한 말을 하여 한창 부풀어오르는 노여움을 건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의 언행(言行)을 점검해 보건대,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에게 죄를 얻을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입조(入朝)한 지 거의 30년이 되어가지만 위험과 모욕으로 핍박 받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왼쪽에서 주먹으로 치고, 오른쪽에서 발로 걷어차며 앞에서 막고 뒤에서 당기는 등 번갈아 나서서 공격하여 반드시 마음에 상쾌하게 하고야 말려고 합니다. 이는 첫째도 문임(文任) 때문이고 둘째도 문임 때문입니다.
신이 앞서 올린 상소는 오로지 세도가 매우 험악함을 걱정하고, 신의 집안이 몹시 위태로운 것을 생각하여 올린 것인데, 반대로 그것이 트집거리가 되어 분박하였다고 지목할 줄은 참으로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어찌 그들과 따져 거듭 조정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사리에 크게 어긋나는 말로 강지환(姜趾煥)의 말을 주어모아 이륜(彛倫)을 손상한 것에 있어서는 눈물을 지으며 자세히 변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입은 심제(心制)의 두 돌은 사실 갑신년 3월이었고, 후생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은 그 해 5월이었습니다. 신이 그때 추조 좌이(秋曹佐貳)에서 도헌(都憲)으로 제수되었는데, 비록 담제(禫祭)의 달이 다 가지 않아 은명(恩命)을 숙배(肅拜)하지 않았으나, 선왕께서 제정한 기한이 이미 끝난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삼년상이 끝나 관직에 제수된 사람이 자제들의 글을 고교(考較)하는 것이 성인의 예율(禮律)을 어긴 것이 됩니까? 시왕(時王)의 법헌(法憲)을 어긴 것이 됩니까? 이것이 알 수 없습니다. 아직도 그때 기억이 납니다. 고 중신 이익보(李益輔)가 마침 신을 찾아와서 연소한 무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칭찬을 하고 갔습니다. 만약 말하는 자의 말대로 신이 과연 여막의 곁에서 재주를 시험하였다면 어찌 중신이 보고 놀라지 않고 반대로 칭찬하였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차마 말을 늘여 변명하지 못하고 단지 갑신년 여름의 심제(心制)만 말하였던 것은, 대체로 아는 사람이 보면 그 달이 담제를 지내는 달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마련이고, 비록 모르는 자가 보더라도 본디 예율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臺臣)들이 숨은 것을 끄집어 내어 강지환의 말을 입증시키려고 하니, 주위의 공론은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범중엄(范仲淹)은 송(宋)나라의 어진 신하였습니다. 그가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안수(晏殊)가 남경 유수(南京留守)로 있으면서 범중엄에게 임시 부학(府學)을 맡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범중엄은 항상 학교 안에서 유숙하면서 학도들을 가르치고, 밤이면 생도들에게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끔 몰래 재사(齋舍)로 가 살펴보다가 먼저 자는 사람을 보면 꾸짖었고 과제를 내어 생도들로 하여금 부(賦)를 짓게 하였는데, 반드시 스스로 먼저 지어 난이(難易)를 알고자 하였으며, 마땅히 마음을 써야 할 곳에 미쳐서는 또한 생도들로 하여금 이를 기준으로 법을 삼게 하였습니다. 대체로 상중(喪中)에 후학들의 문자를 고과(考課)하는 것이 정말 예율에 마땅한 바가 아니라면, 범중엄 같은 어진 이에게 어찌 이러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주자(朱子)와 같은 대현인이 이를 따다가 편집해 기록하여 명신 언행(名臣言行)으로 훤히 드러내 놓은 것은 또 무슨 이유란 말입니까? 범중엄은 상중에 있었던 일이었으나 대현인에게 허여(許與)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은 처음부터 범중엄과 같은 일이 없었고, 더구나 상을 끝마친 뒤에 한 일었는데도 이를 가지고 번거롭게 말하는 것은 아마도 오늘날 사람들이 고서(古書)를 읽지 않은 데에 말미암았을 것이니, 신은 이 때문에 한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북을 던졌다.[投杼]’는 두 글자로 죄목을 삼은 것에 있어서는 더더욱 조밀한 법망(法網)에 속합니다. 감무(甘茂)가 왕에게 고하기를, ‘대왕께서 북을 던지실까 염려스럽습니다.’고 하였는데, 감무는 진왕(秦王)에 대해서만은 군신 사이가 아니란 말입니까? 송(宋)나라 신하 소식(蘇軾)이 등보(滕甫)에게 대신 지어준 글에 ‘자꾸 사람이 말하면 북을 던지게 된다.’고 하였는데, 소식의 재주와 식견이 과연 오늘날 대신의 식견보다 못해서 이를 상소에다 썼단 말입니까? 신은 고인의 진언(陳言)을 그대로 따른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저들은 무턱대고 써서 신의 죄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신의 입을 막고 신의 마음을 굴복시키기에는 부족할 듯합니다. 만약 이것으로 고금의 사의(事宜)가 다르다고 한다면 근래의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 봉조하 신 원경하(元景夏)가 올린 전후의 상소에 북을 던진다는 두 글자를 두서너 번만 쓰지 않았었는데, 그때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내가 어찌 북을 던지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신이 직접 연석(筵席)에서 들었습니다만, 중신이 이 말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신에게는 ‘매진(媒進)하는 계책’ 이라고 하였으니, 너무나 급하게 과실을 찾다가 자세히 헤아려 볼 틈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수십 년 사이에 인심이 더욱 험악해지고 세로(世路)가 더욱 위태로워져서 전에는 없던 일이 오늘날 있는 것입니까?
추운 절기를 만나 구묘(丘墓)에 일이 있으나, 이처럼 위태로움에 처한 종적으로 감히 관례에 따라 말미를 청해 속대(束帶)하고 하직 인사를 드릴 수 없었는데, 이 역혈(瀝血)한 상소에다 마음대로 행동한 벌을 아울러 청합니다.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피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엊그제 강지환(姜趾煥)의 상소에 내가 비록 속았으나 세도를 위해 개탄하였는데, 그뒤에 듣고 나서 너무나 몰랐다는 것을 크게 느끼었다. 홍상직(洪相直)이 강지환의 편을 들고 나선 것은 정말 생각 밖이었다. 처음에는 강지환에게 속고 두 번째는 홍상직에게 속아넘어갔다만, 이것이 어찌 두 사람의 과실이겠는가? 이는 내가 40년 동안 제대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지환은 그래도 용서할 수 있지마는, 홍상직은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당(私黨)을 끼고 돌았으니 어찌 그 임금을 저버렸다고만 말하겠는가? 곧 그의 아비를 잊어버린 것이다. 아! 문임 중 모욕을 당한 자가 몇 사람인가? 심하도다. 인심이 옛날같지 못함이여! 사람들은 그럴지라도 나는 경을 버리지 않겠다. 아! 고인이 말하기를,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057) 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효자가 아니다.’고 하였는데, 지금 경의 상소가 어찌 진정표 정도뿐이겠는가? 매번 이러한 글을 읽을 때마다 늘 눈물을 닦았는데,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경의 마음을 본 것 같다. 경의 마음이 비록 이와 같으나, 팔순을 바라보는 임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는 바로 경이 지난날 어버이를 위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겨야 할 때이니 경은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제사가 지난 뒤에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이진복(李鎭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구수국(具壽國)에게 씻기 어려운 과오가 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수부(水部)058) 와 은대(銀臺)059) 에 관직을 제수한 것은 물정(物情)을 놀라게 하였으니, 그가 마땅히 스스로 처신해야 됩니다. 그런데 의기 양양하게 무릅쓰고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처럼 염치를 모두 잃고 전혀 꺼리는 바가 없으니, 신은 빨리 개정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비답을 내려 이진복의 관직을 체차(遞差)하였다.
대신·선혜청 당상·호조 판서·비국 유사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엊그제 호남의 방백에게 내린 비지(批旨)에 이미 유시하였지만, 인(印)을 새겼다가 인을 녹여버린 일에다가 비교할 것이 아니고 또한 수년의 일에 불과하다. 조용히 생각해 보니 백성에게 유익하면 비록 백 명이 말하더라도 계속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며, 백성에게 폐단을 끼친다면 비록 백 명이 만류하더라도 어찌 한 달을 넘길 수 있겠는가? 일언 폐지(一言蔽之)하고 옛 제도대로 하되, 특히 작대(作隊)를 혁파하고 예전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선혜청 당상 정홍순(鄭弘淳)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명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월 7일 을축
박사해(朴師海)를 대사간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사간으로, 이태정(李台鼎)을 장령으로, 이세연(李世演)을 지평으로, 김관주(金觀柱)를 정언으로, 김재순(金載順)을 부응교로, 구상(具庠)을 교리로, 송지연(宋志淵)을 부교리로, 남현로(南玄老)를 수찬으로, 윤승렬(尹承烈)을 부수찬으로, 이영중(李永中)을 필선으로, 이보관(李普觀)을 겸 필선으로, 이상악(李商岳)을 사서로, 홍검(洪檢)을 겸 사서로, 윤양후(尹養厚)를 겸 문학으로, 김약행(金若行)을 설서(說書)로, 홍지해(洪趾海)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9일 정묘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다시 앞서 청하였던 일을 거듭 아뢰기를,
"옛날 송(宋)나라 고종(高宗)은 송나라 고조(高祖)와 똑같이 정해생(丁亥生)이었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을묘생(乙卯生)이었으며 한나라 고조(高祖)는 갑인생(甲寅生)이었습니다. 두 임금이 모두 중흥한 어진 임금이었으나, 전하처럼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이를 상고해 냈는가?"
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좌상(左相)이 상고해 냈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지난날 전하께서 이미 고례(古例)를 취하여 가지고 오라고 하셨는데, 성상께서 무슨 마음으로 하교하셨는지 쾌히 알았기 때문에 신이 상고한 바가 있어서 아뢴 것입니다."
하자,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통감찬요(通鑑纂要)》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승지에게 상고해 낼 것을 명한 다음 임금이 말하기를,
"정말 교묘하고 희귀한 일이지만 나의 뜻은 변하기 어렵다. 내년까지 장악(藏樂)하는 것은 지나치겠다."
하였다.
대사헌 남태회(南泰會), 대사간 박사해(朴師海)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패초(牌招)060) 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김치인이 더 엄히 신칙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신경준(申景濬)을 방면하고 우윤 조엄(趙曮)을 선혜청 당상에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아뢰었기 때문이다. 우빈객 신회(申晦)가 날마다 두 번씩 서연(書筵)을 열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내국 제조 김양택(金陽澤)이 차자를 올려 병이 났다고 아뢰자, 예사로운 비답을 내려 허락하고, 윤동도(尹東度)로 대신하게 하였다.
2월 11일 기사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서한(西漢)이 동한(東漢)으로 되고 북송(北宋)이 남송(南宋)으로 된 것은 한나라와 송나라의 관건이라고 하겠다. 한나라는 어찌 중흥한 것뿐이겠는가? 즉 다시 창업(創業)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나라 고조와 광무제의 갑인년과 을묘년은 바로 마원(馬援)이 이른바, 한나라 고조와 똑같이 부합된다.’는 것이지만, 고종의 연갑(年甲)에 있어서는 들어맞지 않는다.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임안(臨安)으로 거둥한 것은 눈앞의 일을 살피지 못한 것이니, 어떻게 고종에게 비할 수 있겠는가? 비록 불초하지만 결코 이를 본받지는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빙그레 웃은 것이다."
하였다.
생원·진사의 복시를 실시하여 생원 이노술(李魯述) 등 1백 명과 진사 이태원(李太源) 등 1백 명을 뽑았다.
2월 13일 신미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2월 14일 임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날 해동(海東)의 신하들이 그 임금을 젊었다고 보는가, 늙었다고 보는가? 세록(世祿)의 의리로 볼 때 조선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가? 문신(文臣)은 이목이 줏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요행히 모면하는 것으로 고상한 풍치를 삼고, 유신(儒臣)은 관직(館職)을〈서로 멀리 떨어져 상관이 없는〉 초월(楚越)처럼 보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들이 잘못한 것이겠는가? 8순을 바라보는 늙은 임금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비국 당상만 가지고 차대(次對)를 거행한 일이 있었는가? 양사(兩司)는 문을 걸어 잠근 지 이미 오래되었고, 홍문관의 관리는 장방(長房)061) 에만 누워 있으니, 이것이 무슨 모양이며 이것이 무슨 나라의 체통이란 말인가?"
하였다. 이날은 홍릉(弘陵)062) 의 기신(忌辰)으로 재계하였는데, 내국 제조 윤동도(尹東度)가 영상(領相)이 전달한 ‘기신의 재계와 상치되어 감히 관례에 따라 차대할 수 없다.’는 말을 아뢰었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다.
2월 15일 계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합격한 생원·진사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각자의 시험지를 외우도록 하였다. 민급(閔汲)에 이르러 원로방지(圓顱方趾) 등의 말이 있자, 임금이 말하기를,
"‘원로방지’ 네 글자를 어찌 감히 함부로 과거의 글에 쓴단 말인가."
하고, 〈방목(榜目)에서〉 민급의 이름을 버리고 과거의 응시를 정지시키게 하였으며,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시관(試官)을 모두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원로방지는 흉측한 역적이 올린 상소에 있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후옥(李厚玉)·한흥상(韓興相)·이익영(李翊永)·윤흠렬(尹欽烈)·곽세첨(郭世瞻)·최수도(崔守度)·이덕양(李德養)·양현춘(楊顯春)을 모두 방목에서 빼 버리라고 명하였는데, 시험지를 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2월 16일 갑술
안윤행(安允行)을 대사헌으로, 윤학동(尹學東)을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이심해(李心海)를 장령으로, 정범조(丁範祖)·여선형(呂善亨)을 지평으로, 이수일(李秀逸)을 헌납으로, 심중규(沈重奎)를 정언으로, 홍수보(洪秀輔)를 수찬으로, 서유린(徐有隣)을 문학으로, 김재인(金載人)을 사서로, 윤승렬(尹承烈)을 겸 필선으로, 윤급(尹汲)을 좌참찬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예조 판서로, 홍명한(洪名漢)을 형조 참판으로, 이휘지(李徽之)를 대사성으로, 조명정(趙明鼎)을 홍문 제학으로, 유최기(兪最基)를 판의금으로, 남태저(南泰著)를 동의금으로, 조운규(趙雲逵)·민백흥(閔百興)을 동경연으로 삼았다.
정언 안성빈(安聖彬)이 상소하여, ‘도성 안에 도적이 성행하여 행인을 때려 눕히고 의복을 빼앗아 가고 있는데도 포도청에서 살피고 있지 않다.’면서 좌우 포도 대장에게 견파를 실시하라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어제 방목(榜目)에서 빼 버린 유생들은 듣건대 모두 글을 잘하는데, 갑자기 입시하게 되어 놀라 겁이 나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잘못하게 되었다 하니, 용서해 주는 방도가 있어야 될 듯하다.’고 우러러 아뢰자, 하교하기를,
"아! 노년에 어찌 차마 악착스러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일체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7일 을해
대신과 비국의 유사 당상과 제언 당상(堤堰堂上)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평안 병사 구선행(具善行)의 장계를 읽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구선행이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은 기색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장계의 내용을 들으니 담당할 뜻이 있구나."
하였다. 이어 ‘청천강의 옛길을 복구하는 일을 전적으로 경에게 맡기니, 신경을 써 거행하라.’는 내용으로 승정원에서 하유(下諭)하라고 명하였다. 제언 당상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물의 저장을 잘 하라고 엄히 신칙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헌 안윤행(安允行)은 나이가 몇인가?"
하니, 도승지 윤득양(尹得養)이 말하기를,
"77세라고 합니다."
하자, 특별히 지중추를 제수하였다.
2월 18일 병자
임금이 태묘(太廟)와 각 능전(陵殿)의 한식(寒食) 제사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병이 있다고 차자를 올려 고하였는데, 잘 조리하라고 비답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김귀주(金龜柱)가 상소하여 체차(遞差)해 줄 것을 청하니, 특별히 소청을 허락한다고 비답하였다.
2월 20일 무인
김선행(金善行)을 대사헌으로, 이인배(李仁培)를 대사간으로, 이동태(李東泰)를 집의로, 박사륜(朴師崙)·이사조(李思祚)를 정언으로, 윤승렬(尹承烈)을 교리로, 이보관(李普觀)을 겸 필선으로, 서호수(徐浩修)를 부교리로, 윤양후(尹養厚)를 겸 사서로, 윤홍렬(尹弘烈)을 겸 문학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좌참찬으로, 민백흥(閔百興)을 동춘추로, 신회(申晦)를 우빈객으로, 이언형(李彦衡)을 강원 감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이 상소하여 ‘겸보덕 윤승렬(尹承烈)을 겸 필선으로 부망(副望)063) 에 넣어 성상의 낙점(落點)을 받기까지 하였는데, 겸직으로 겸직을 갖는 것은 규례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스스로 인책하니, 비답하기를,
"일시 착오한 일을 가지고 어찌 그토록 지나치게 승강이질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성 이휘지(李徽之)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적격자를 얻었다고 본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여러 시관(試官)들을 모두 서용하라 명하고 전 수어사 신회(申晦)에게 다시 장수의 임무를 제수하였으며, 전 혜당 정홍순(鄭弘淳)을 다시 혜당으로 차출하였다.
2월 21일 기묘
부사직 신회(申晦)가 과거 시험의 일로 소(疏)를 올려 잘못을 들어 말하고 또 청하기를,
"신방 진사(新榜進士) 조상오(趙相五)를 원방(原榜)에서 빼 버렸는데, 비록 금령(禁令)은 없으나 수상합니다."
하니 빼 버리라고 비답하였다. 조상오는 무신년064) 의 흉악한 역적 조필기(趙弼夔)의 외손이었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첫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경을 위해 깊이 걱정하였었는데, 신명(神明)이 도와서 〈병이〉 빨리 나았으니, 그 기쁨을 무어라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차자의 답을 내리자마자 경의 단자가 갑자기 올라왔으므로 구례(舊例)를 버리고 승선(承宣)을 보내어 전유(傳諭)한다. 이는 경에게 억지로 일을 보라는 것이 아니고 또한 지나치게 재촉하는 것도 아니니, 빨리 사직(辭職)의 단자를 중지하고 마음 편안히 잘 조섭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는데, 유신(儒臣)도 같이 입시하여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이간(呂夷簡)은 송(宋)나라의 명신이지만 또한 소인이다. 역사에 ‘인종(仁宗)이 나중에야 자기가 이신비(李宸妃)의 소생인 줄을 깨닫고 관(棺)을 뜯어 보니, 왕후의 옷을 사용하여 염을 하였고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여이간이 미리 후환을 염려하여 수은(水銀)을 사용하여 염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종의 노여움도 풀어졌다고 한다. 또 《사기(史記)》에 적미(赤眉)가 여후(呂后)의 무덤을 파보니065) 얼굴이 살았을 때와 같았다고 하였는데, 나는 수은을 사용하여 장사지내면 살았을 때의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하고, 이어 시신(侍臣)들에게 묻자 모두 대답하기를,
"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믿을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 역시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본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후세에서는 더러 장양(張良)이 불러온 네 사람은 진짜 사호(四皓)066) 가 아니라 가짜 사호라고 하는데, 이는 필시 후인(後人)이 장양을 모함한 것일 것이다. 가짜 사호라는 말은 필시 그럴 리가 없다."
하였다.
2월 22일 경진
영의정 김치인(金致仁)과 예조 판서 이창의(李昌誼)가 헌릉(獻陵)을 봉심(奉審)하였는데, 석물(石物)에 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심하고 와서 입시하니 갑자년의 관례에 따라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창의가 도감의 호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여쭙자, 중수 도감(重修都監)으로 이름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도감 당상은 예조 판서와 공조 판서로 삼고, 낭청은 구례(舊例)에 따라 예조의 낭청과 선공감의 감역으로 삼아 3월 21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또 차자를 올렸는데, 비답하기를,
"영상(領相)의 아뢴 바를 들으니, 나의 비답에 감격하여 다시는 사직 단자를 올리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경의 차자를 보니 경의 마음을 알겠다. 더욱더 잘 요양하도록 하라."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유지를 전하라고 하였다.
김한기(金漢耆)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이기경(李基敬)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홍검(洪檢)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3일 신사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생원·진사의 방목(榜目)을 내걸었다. 유생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각자의 시험지를 외우도록 하였는데, 봉산(鳳山)의 유생 김사술(金思述)의 시험지 중에 ‘일치 일난(一治一亂)’이라는 말이 있자, 임금이 이르기를,
"시험지에 ‘원로방지(圓顱方趾)’의 문구를 사용한 자를 이미 방목에서 이름을 빼 버렸는데, 네가 이 네 글자를 사용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하고, 알성(謁聖)하지 말고 속히 하향(下鄕)하라고 명하였다. 네 글자는 임징하(任徵夏)의 상소 중에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2월 24일 임오
사방이 마치 먼지가 내리는 것처럼 어두컴컴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밖에 나가 있는 양사(兩司)의 체차를 허락하였다. 특별히 권도(權噵)를 대사간으로, 김상묵(金尙默)을 헌납으로, 이치중(李致中)·이득복(李得福)을 지평으로 삼았다.
2월 26일 갑신
승지가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식년 무과의 강경(講經) 규례가 매우 엄중하여 과거보는 자들이 이 때문에 많이 낙방한다고 하는데, 이후로 이러한 말이 들릴 경우에는 시관(試官)을 군역(軍役)에 충당하겠으니, 이 뜻을 신칙하라."
하였다. 이는 대체로 시관이 늘 서울의 과거보는 선비를 위해 시골의 응시자들에게 고강(考講)을 준엄하게 하여 글 뜻을 곡진하게 물어서 기어코 떨어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서북 별부료 군관(西北別付料軍官)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였는데, 기(旗)만 들고 징과 북을 사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2월 27일 을유
송재경(宋載經)을 교리로, 박취원(朴取源)을 응교로 삼았다.
부사직 조운규(趙雲逵)가 상소하여 대변(對辨)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헌납 김상묵(金尙默)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혐의와 원한이 있는 집안은 사세(事勢)상 구차히 용납될 수 없습니다. 만일 동료 관원이 되었을 경우 양쪽 다 인피(引避)하는 것은 본디 인정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염치상으로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미관 말직도 모두 다 그러한데, 천관(天官)의 높은 직품에 있는 신분으로 통행(通行)하는 예(例)를 하찮은 것으로 보았으니, 사대부의 수치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즉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이 제배되었을 때 그때의 아전(亞銓)과는 여러 사람이 다 아는 혐의가 있어서 의정(議政)이 연석에서 말씀드리기까지 하였으니, 아윤(亞尹)에 제수한 명으로 그 흔적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마치 낫으로 눈을 가린 것처럼 의기 양양하게 염치를 무릅쓰고 출사하여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어 주위 사람이 침을 뱉으며 욕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너무나 우매합니다. 그러고 나와서 정사(政事)를 보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는데, 저 최익남(崔益男)의 본말에 대해 유신 구상(具庠)이 그의 요망하고 사특한 심술과 추악하고 어긋난 종적을 모두 말씀드리면서 세도(世道)에 화를 끼칠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러자 성명(聖明)께서 그 정상(情狀)을 굽어 통촉하여 소인(宵人)으로 단정하시었고, 또 일찍이 전석(前席)에서 물으셨을 때 유신 김재순(金載順)과 이재간(李在簡)이 분명히 소인이라고 아뢰었습니다. 이는 여염에서만 전해가며 외우는 말일 뿐만이 아니라, 국승(國乘)에도 기록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소인라는 것은 곧 군신 상하가 이미 결론지은 공안(公案)인데도 불구하고, 방자하게 검의(檢擬)067) 하여 점차 올려서 쓸 계제로 삼았습니다. 공론과 대항해 싸우는 것이 얼마나 무엄한 짓인데 전형의 붓을 마음대로 더럽혔으니,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대정(大政)을 하게 되자, 국가에서 중히 의지하고 있는 바를 저버리고 자기 한 사람의 사적인 호오(好惡)에 따라 정대한 사람을 미워하는 무리를 재랑(齋郞)으로 제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자 성균관에서 권당(捲堂)하자는 의논이 제기되었으며, 재물을 쌓은 부류들이 마구 수령에 제수되었으므로 태사(台司)에서 하리(下吏)를 가두는 일이 있었습니다.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데도, 태연히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혹시라도 잃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스스로 반드시 체차될 것으로 여기어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서 초망(草望)068) 을 쓰는가 하면, 막 사직하는 소(疏)를 들여 놓고 그 비답을 받기도 전에 빈대(賓對)에 참석하는 등 그의 허둥지둥한 마음과 전도(顚倒)된 행동이 한결같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한가한 부서와 긴급하지 않은 직책도 감당할 수 없는데, 사람을 전형하는 임무에 어찌 이러한 사람이 털끝만큼이라도 가당이나 하겠습니까?
신은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에게 빨리 관작을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여 관방(官方)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지난 겨울 대정(大政)이 있은 뒤로 물의(物議)가 들끓어 너나없이 놀라며 분개해 하였는데, 전 지평 김재인(金載人)의 지론(持論)이 매우 엄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조만간에 그가 말을 할 것이라며 파다하게 소문이 나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언로에 제수되어 끝내 한마디 말도 없자, 온 세상이 이상하게 여겨 갖가지 말이 있었는데, 필경에는 장전(長銓)069) 이 다시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의 형 김재구(金載久)를 의금부 도사의 의망에다 넣으려다 공론에 저지를 당해 결국 전랑(殿郞)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과연 사람들의 말처럼 사람에게 협박을 하여 형에게 벼슬을 시켰으니, 벼슬을 팔고 자리를 보존하는 것보다도 더 심한 짓입니다. 조정을 욕되게 하고 대각(臺閣)을 부끄럽게 한 것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신은 전 지평 김재인의 관작을 개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근래에 관리들이 서로 규간(規諫)한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알력을 부리지 않으면 협잡을 부린다 하니, 마음이 항상 개연하였다. 소회(所懷)가 있으면 숨김없이 말하는 것은 비록 가상하지만, 해당되는 일에 관해서만 논해야지 어찌하여 이로 인해 조절(操切)하려고 하는가? 이것이 공심(公心)인가? 그대의 조부가 누구인가? 지금 입으로 떠들어대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상소 내용을 듣건대 필시 들뜬 논의와 쓸데없는 비방을 하는 자들이 선동한 것이니, 수많은 사람은 믿을지라도 그대는 왜 속는단 말인가? 설사 이러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라 각각 정해진 법이 있으니, 지금 그대가 청한 것은 너무나 지나치다.
최익남(崔益男)은 구상(具庠)의 아룀으로 인해 입시한 유신(儒臣)에게 물어 본 것이니, 임금의 말은 중한 것이다. 만약 내가 먼저 소인(宵人)이라는 말을 끄집어냈다면 사체(事體)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최익남이 비록 이러하더라도 ‘버릴 물건이 없다.’는 옛말도 있다. 그가 오랫동안 길이 막혔었으니, 전랑(銓郞)에 비망(備望)된 것을 나는 옳다고 여기는데, 어찌 과하다고 여기는가? 바야흐로 그대는 이목(耳目)의 구실을 하는 관직에 있으면서 왜 이어(俚語)를 사용하는가? ‘낫으로 눈을 가린다.’는 말은 잠곡(潛谷)070) 의 자손이 할말이 아니다. 김재인(金載人)의 건에 대해서는 그 용의(用意)를 보니, 마치 김재인이 논하려고 할 경우 아무 말없이 보복을 받는 자처럼 하였는데, 나는 이것이 이조 판서의 용의가 아니라, 그대의 용의라고 본다. 재물을 쌓은 무리를 의망(擬望)하였다는 것은 누구인지 모르겠고, 이것이 혹시 잘못 의망하였더라도 이는 전관(銓官)에 대한 추함(推緘)이 상자에 가득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 왜 재물을 쌓았다는 말로 이조 판서를 견제하는 칼자루로 삼으려 하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나는 총재(冢宰)071) 를 위해 애석하게 여긴다. 왜 그런가 하면 지난해에 그의 아비가 좌이(佐貳)로 있을 때에 맹랑한 일로 배척 당하였던 일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며, 그때의 함문(緘問)도 잊지 않고 있다. 나도 이러한데 더구나 그의 아들이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총재를 위해 마음 속으로 애석히 여기는 것이다. 그 나머지 일 중 일깨워주지 않는 것은 또한 많이 유시할 것도 아니므로 생략한다마는, 내가 매우 개탄해 하는 것은 그대가 이러한 짓을 하기 때문이다. 할아비도 생각지 않고 노쇠한 임금의 뜻도 몸받지 않았으니, 신칙하려면 그대 말고 누구를 먼저 하겠는가? 새 알을 아끼는 뜻으로 그대의 말만 허용한다."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과 좌의정 한익모가 최익남을 검의(檢擬)할 때 참여했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스스로의 잘못을 들어 말하였는데, 특별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유지를 전하라고 명하였다.
2월 28일 병술
정환유(鄭煥猷)를 헌납으로, 홍경안(洪景顔)을 교리로, 김재순(金載順)을 겸 보덕으로, 조운규(趙雲逵)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김상묵(金尙默)은 겉으로 볼 때 숨김이 없는 것 같지만 속은 사실 협잡을 부리고 있으니, 이조 판서를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청한 것은 자신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하겠다. 김상묵을 영원히 사판에서 삭제하여 진신안(搢紳案)072) 에 끼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의 할아비에게 사과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조 판서의 인사 행정에 대해 신(臣)도 거론하였었는데, 이조 판서가 지금 이 때문에 비방을 받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인(伯仁)이 나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재구(金載久)를 어찌 금오랑(金吾郞)으로 삼지 않는가?"
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일찍이 〈왕손의 사부인〉 교부(敎傅)를 겪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물을 쌓은 무리를 제수하였다는 말이 괴이하다. 반드시 헛 비방을 들을 것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관방(官方)을 맑게 해야 한다는 말은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부교리 윤승렬(尹承烈)이 ‘김상묵에게 처분을 내릴 때에 하신 말씀은 실로 사물이 오면 순응하는 도리가 아니고, 또한 큰 목소리와 안색을 변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과도 다르다.’고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한 신하가 있기 때문에 늘 이러한 일이 생긴다."
하고, 윤승렬을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파루(罷漏)073) 한 뒤에 철폐하여 보내는 것은 너무 일렀기 때문에 전에 포도청에 신칙하여 조정해 시간을 정하라는 뜻으로 말씀드려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명이 내린 뒤에 전혀 아무런 동정(動靜)이 없으니, 포도 대장을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엊그제 아룀으로 인해 허락하기는 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진(秦)나라의 법이 비록 엄하였지만 이미 정식(定式)이 있었기 때문에 맹상군(孟嘗君)의 문객(門客)이 닭 울음 소리를 흉내내어 모든 닭이 울자 관문을 활짝 열었던 것074) 이다. 지금 이렇게 하면 진나라 법보다 배(倍)나 엄하기 때문에 하교하려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유시하기 전에는 마땅히 거행해야 할 터인데, 지금 그 말을 듣고 보니 놀랍다. 말한 대로 추고를 시행하라. 그리고 야간 통행 금지령을 곧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전 포도 대장 이장오(李章吾)를 서용하여 다시 장임(將任)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좌포도 대장 김성우(金聖遇)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경솔하게 중장(重杖)을 시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집의 이동태(李東泰)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9일 정해
교리 송재경(宋載經)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대정(大政)을 행한 뒤마다 말썽이 많았으나, 이번처럼 사람들을 크게 놀래고 사람들의 말을 많이 초래한 적은 없었습니다. 온 세상에 소문이 나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만 개인적으로 비호하고 덮어주는 습관이 날로 심해지고 강개하고 곧은 풍속이 날로 쇠퇴해짐으로 인하여 아직도 성명(聖明)을 위해 숨김없이 직간(直諫)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김상묵(金尙默)이 올린 한 장의 상소 몇 줄이 조양 일명(朝陽一鳴)075) 이 되었으므로 세상이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찌 그리도 다행히 성명(聖明)께서 통촉하고 상당히 후한 비답을 내리셨으므로, 간신(諫臣)의 바람을 비록 쾌히 윤허하지 않으셨으나 전관(銓官)의 무상함을 거의 다 통촉하셨을 줄로 여기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낸 뒤에 처분을 갑자기 바꾸어 엄한 벌을 내릴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또 우로(雨露)와 같은 은택을 내렸다가 상설(霜雪)과 같은 효령으로 잠깐 사이에 변하고 무릎이라도 맞대듯이 하다가 연못에라도 떨어뜨리는 것처럼 갑자기 전후(前後)의 하교가 전연 다르니, 신(臣)은 가만히 성명(聖明)께서 이런 일을 하신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글자의 지목에 이르러서는 대성인(大聖人)의 사령(辭令)에 흠이 있습니다. 성지(聖旨)가 한번 전파되자 잃은 바가 적지 않으므로 신은 실로 개연히 걱정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또 삼가 들으니 오늘 빈대(賓對)한 대신(大臣)이 상당히 극력 변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 부잣집 사람과 돈 많은 것들이 수없이 일정(一政)에 끼어 관직을 사고 판다는 말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대신이 이처럼 누누이 말한다고 해서 전관(銓官)을 위해 미봉(彌縫)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내 비록 불초하지만 마음에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선조를 위하는 것이다. 헌릉(獻陵)에 일이 있어서 직접 가려고 하는데, 나의 기(氣)에 뜻이 있어도 여태 묵묵히 지내 왔었다. 특별히 도제거(都提擧)를 명한 뜻도 모두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송재경(宋載經)의 상소를 보니 내일 아침 조정을 하직할 대신에게 소란을 피우려는 모양인데, 이 역시 내가 불초하여 그런 것이다. 그날 내가 직접 가서 마땅히 갑자년의 관례에 따라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고 올 것이니, 의조(儀曹)076) 로 하여금 먼저 잘 알고 있게끔 하라."
하였다. 또 엄한 분부를 내려 송재경의 상소를 되돌려 주고, 영원히 사판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고 시종안(侍從案)을 개정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잇따라 엄한 분부를 내리고 탕제를 엎지르며 목메인 소리로 말하기를,
"그의 조부 송상기(宋相琦)가 옛날에 동궁을 보호하라는 비답을 받았으니, 그가 오늘날은 그 임금을 보호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김상묵(金尙默)이 이미 잠곡(潛谷)을 잊어버렸으니, 송재경이 어찌 송상기를 알겠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 마땅히 확실히 말하겠다. 홍낙성(洪樂性)도 어찌 잘못이 없겠는가? 대신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던 것은 유시(諭示)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어찌 대신으로 하여금 차자를 올리게 하고 싶었겠는가? 시험삼아 ‘하룻밤을 지낸 뒤……운운’한 말을 보건대, 교묘하고도 정밀하구나. 내 갑자기 스스로 생각하여 다시 처분을 내린 것인데, 그의 상소의 뜻에는 마치 김상묵이 차자를 올린 바람에 격앙되어 그런 것처럼 여기었다"
하였다. 약방에서 세 번 아뢰었으나, 탕제를 올리지 말라 하고 하교하기를,
"그의 형에게 지금 이러한 분부를 내렸는데, 그의 아우가 어떻게 감히 하대부(下大夫)가 될 수 있겠는가? 병조의 김광묵(金光默)을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차자를 올려 스스로 잘못을 들어 말하고, 또 당일 헌릉(獻陵)에 몸소 간다는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하교하였는데, 경(卿)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김상묵(金尙默)이 이미 해괴하였는데, 더구나 송재경(宋載經)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 뜻이 정해졌는데, 지금 왜 논하는가? 도감(都監)에 있어서는 더없이 중대한 일인데, 경은 왜 이러하는가? 내 스스로 갈 것이니 안심하라."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차자를 올려 스스로의 잘못을 들어 말하고 아울러 탕제를 들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영상에게 하유하였는데, 경은 왜 이러는가? 내 정해진 뜻이 있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이사조(李思祚)가 어버이에게 병이 났다는 이유로 상소하고 나서 곧장 떠났는데,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2월 30일 무자
영의정 김치인, 좌의정 한익모가 뵙기를 청하였는데, 이때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당(玉堂)이 뵙기를 청하고, 약방이 말로 네 번 아뢰자,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명하였다. 또 김상묵(金尙默)을 일체 시골로 내쫓고 윤승렬(尹承烈)도 똑같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영상과 좌상이 처분이 내리기를 기다렸는데,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사서 김재인(金載人)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 이르기를,
"신은 전 승지 이득배(李得培)와 인척의 사이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 대정(大政)이 있은 뒤로 이득배가 신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하더니, 부제학 심이지(沈履之)의 편지를 보이면서 신에게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을 논핵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신에게 말하기를, ‘백우(伯愚)가 이 일을 하려고 초안을 이미 다 지어 놓았는데 어떤 사람의 만류로 그만두었으니, 그대가 아니면 이 일을 할 수 없다. 덕기(德器)의 뜻도 이와 같으니, 내가 덕기와 함께 초안을 만들어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백우는 김상묵(金尙默)의 자(字)이고, 덕기는 심이지의 자입니다. 신이 물론 나약하지만 또한 긍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말해야 될 일이라도 사주를 받아서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신은 마침내 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 무리들이 신에게 가진 유감이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이에 그들이 쓸데없는 말을 선동하여 마치 수컷이 울면 암컷이 호응하듯이 아무개는 누구를 논핵할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함정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필경에는 김상묵이 신을 논핵할 때에 이를 트집잡아 말하였는데, 그들이 미리 배포해 놓은 함정을 사람들이 모를 것으로 여기더라도 마음에는 부끄러움도 없단 말입니까?
아! 사람을 사주하여 사람을 탄핵하려다 그 사람이 사주를 받아들이지 않자 거꾸로 이를 가지고 넘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염으로 한세상을 몰고가며 제압하니 어느 누가 견디어내겠습니까? 또한 두렵기만 합니다. 그들이 이른바 ‘사람에게 위협을 가하여 형에게 벼슬을 시켰다.’고 한 말은 문자가 생긴 이후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 심하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차마 이토록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마다 형이 있고 아우가 있는데, 형제들이 벼슬하는 일이 어느 사람인들 없겠습니까? 그들의 집안에서 얻은 벼슬도 또한 사람을 협박하여 얻은 것입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되돌려 주라 명하고, 봉입(捧入)한 승지와 김재인을 모두 파직하였다.
판부사 서지수(徐志修)가 차자를 올려 병이 있다고 말하면서 또 즉시 윤음(兪音)을 내려 달라고 청하고,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차자를 올려 앞서 내린 분부를 환수하고 탕제를 들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사양하지 말고 잘 조리하라고 답하였다.
집의 이동태(李東泰)가 송재경(宋載經)의 일로 인해 소를 올려 스스로 잘못을 들어 말하였는데, 그의 상소를 되돌려주고 도성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밤이 깊어진 뒤에 비로소 접견을 명하였다. 영상과 좌상이 탕제를 들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파의 습관이 이미 고질화되었으니, 이것은 하나의 기(氣) 자가 나를 괴롭힌 것이 아닌가?"
하고, 일어나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장차 걸어서 궁문(宮門)을 나가겠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이 결국에는 강하(江河)에 이르는 것처럼 모든 일도 작았다가 커지는 것이다. 이 같은 자를 경들은 왜 귀양보내자고 청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때에 능역(陵役)077) 을 방해하였다. 옛날 정난(丁蘭)이 목상(木像)을 만들었는데, 목상이 눈물을 흘렸으니078) , 이로 미루어 보건대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사신(史臣)을 돌아보며 차마 듣지 못할 말로 하교하기를,
"너는 이렇게 크게 쓰도록 하라"
하였다. 또 19일의 고유제(告由祭)와 21일 거둥한다는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였다. 능에 행차가 이미 정해졌다고 하여 삼령차(蔘苓茶)를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조운규(趙運逵)을 특별히 판의금에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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