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0권, 영조 44년 1768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14.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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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기축

약방(藥房)에 답하기를,
"내 나이 몇이고 올해는 무슨 해인가? 임금은 어떤 임금이고 신하는 어떤 신하인가? 아! 그의 임금은 날마다 늙어가고 있는데, 당인(黨人)은 날마다 강해지고 있다. 감회가 여기까지 미치는데 어찌 차마 건공탕(建功湯)을 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취적(吹笛)의 가르침을 우러러 생각하여 장차 직접 참배할 것인데, 또 충자(冲子)를 데리고 가서 참배하겠다. 내가 무엇을 한(恨)하겠는가?"
하였다.

 

당인(黨人)들의 아들·사위·아우·조카들은 모레의 절제(節製)079)  를 일체 보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에서 합격한 유생들을 입시하라고 명한 다음 그들이 강(講)하였던 칠서(七書)를 외우게 하였다.

 

3월 2일 경인

유당(柳戇)·서형수(徐逈修)·정이환(鄭履煥)·이규위(李奎緯)·이택징(李澤徵)·강지환(姜趾煥)·홍상직(洪相直)·김상묵(金尙默)·윤승렬(尹承烈)·송재경(宋載經)·유지양(柳知養)·신경(申暻)·송명흠(宋明欽)·김양행(金亮行)·이헌경(李獻慶) 등의 아들·사위·아우·조카는 이번 절제(節製)의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사관소(四館所)080)  의 관원을 영남의 해안에다 귀양보내라고 하였는데, 즉시 당인(黨人)을 고(告)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월 3일 신묘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실시하였다. 왕세손이 모시고 앉았고 시강원 관원이 같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소여(小輿)를 타고 돌며 유생들에게 물어 보았다.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1명씩 뽑으라고 명하였다. 서울에서 장원한 사람은 진사 조종현(趙宗鉉)이었고 지방에서 장원한 사람은 유학(幼學) 권영(權偀)이었는데,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3월 4일 임진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권무 군관(勸武軍官)081)  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삼일제에 합격한 유생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3월 5일 계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강경 시관(講經試官) 한광회(韓光會)의 아룀에 따라 합격한 유생 송진운(宋鎭運)을 삭제하라고 명하였는데, 송진운의 아비 송중홍(宋重弘)이 죄인의 명단에 들어 있어 아직 신원 설치(申冤雪恥)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관소 관원을 영남의 연안에 귀양보내라고 한 명령을 환침(還寢)하라고 명하였다.

 

3월 6일 갑오

판의금 조운규(趙雲逵)가 소를 올려 새로 제수된 품계를 거두어줄 것을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번에 승진시킨 것은 어찌 경(卿)만 위한 것이겠는가? 실로 경의 부친을 생각해서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함경 감사 김기대(金器大)가 소를 올려 어머니에게 병이 있다는 이유로 해임해 줄 것을 청하니, 인정과 사리에 당연한 것이므로 특별히 소청을 윤허한다고 비답하였다.

 

생획(生劃)082)  에 합격한 유생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각기 시험지를 읽게 하였다.

 

3월 7일 을미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최익남(崔益男)의 일과 나머지 몇 명의 죄인에 대해 대신(大臣)들이 차자를 올리고 경연에서 말씀을 드렸으므로 다시금 더 할말이 없습니다만, 혐의가 있는 사람과 동료가 되었을 경우 두 사람 다 인혐(引嫌)하는 의리에 대해서 대신(臺臣)만 아는 게 아니라 신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겨울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보다 조금 달랐고, 선배들도 이미 그렇게 한 예가 있습니다. 안으로는 불안한 바가 있었으나 겉으로는 실로 현저하게 인혐할 단서가 없었으므로, 칙교(勅敎)가 거듭 내리셨으며 심지어는 패망(牌望)을 부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무릅쓰고 응하였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책비(責備)한 말들에 대해 신은 실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김재인(金載人)의 일은 의도가 분명하지 않으니 정말 의아심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김재구(金載久)는 글을 읽고 몸을 단정하게 가진 선비로 명망이 크게 나 일찍이 교부(敎傅)로 선발되기도 하였는데, 산직(散職)에 여러해 동안 있자 공론이 억울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처음에는 의금부 도사에다 의망(擬望)하려다가 그에게 늙은 어미가 있어서 사무가 바쁜 곳은 봉양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즉시 전랑(殿郞)으로 옮겨 의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공론에 저지를 당했다는 말은 무슨 근거로 한 말인지 모르겠으며, 김재인이 조석간에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대신(臺臣)이 어디에서 알았단 말입니까? 필경에 가서 말이 없었지만 대신(臺臣)이 어찌 그에게만 화를 낸단 말입니까? 그러다가 계속 제기된 유신(儒臣)의 상소에 오로지 욕하는 것을 일삼아 바로 사람을 애매한 곳으로 몰아갔습니다. 신이 비록 일소(一笑)에 부칠 경우 기탄없음에 가깝고, 애써 스스로 변명하자니 입이 더럽혀지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간에 자연히 조정의 단안이 있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그 상소를 봉납(捧納)하였다는 이유로 출사하지 않은 승지(承旨)를 제외하고 일체 체직할 것과 이조 판서 홍낙성도 맡고 있는 직책을 해임할 것을 명하였다. 서소(西所)의 위장(衛將)에 가승지(假承旨)를 차하(差下)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김치인이 광진(廣津) 이후의 어로(御路)가 모두 전답으로 들어갔다며 조금 정리하자고 청하니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도로에 작물을 심은 자들이 많으니 백성의 습속이 비록 놀라우나, 섭이중(聶夷中)083)  의 전가시(田家詩)를 외울 때 그 파종된 종자가 아깝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3월 8일 병신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는데, 내일이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다.

 

3월 9일 정유

육상궁(毓祥宮)에서 친히 제사를 지내고 궁으로 돌아올 때에 효장묘(孝章廟)와 의소묘(懿昭廟)를 두루 들렸다.

 

3월 10일 무술

해에 왼쪽 이(珥)가 있었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식년 문과 전시를 실시하여 조정(趙晸) 등 57명을 뽑았다.

 

3월 11일 기해

조돈(趙暾)을 이조 판서로, 김기대(金器大)를 대사헌으로, 안표(安杓)를 대사간으로, 김재순(金載順)을 응교로, 김회원(金會元)을 집의로, 남학종(南鶴宗)을 사간으로, 신오청(申五淸)을 장령으로, 이지승(李祉承)·정범조(丁範祖)를 지평으로, 장정(張淀)을 헌납으로, 홍낙신(洪樂信)·이병정(李秉鼎)을 정언으로, 박필규(朴弼逵)를 부응교로, 이치중(李致中)을 교리로, 홍검(洪檢)을 부교리로, 이진규(李晉圭)·서호수(徐浩修)를 수찬으로, 심관지(沈觀之)를 부수찬으로, 이진항(李鎭恒)을 보덕으로, 박취원(朴取源)을 겸 보덕으로, 서유녕(徐有寧)을 사서로, 한광회(韓光會)를 형조 판서로, 안윤행(安允行)을 판윤으로, 정운유(鄭運維)를 우윤으로, 심수(沈鏽)을 함경 감사로 삼았다. 새로 합격한 조영증(趙榮曾)과 조정(趙晸)에게는 통정의 품계로 올려 주었는데, 조정은 갑과(甲科)에서 일등한 사람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통덕랑(通德郞)은 실로 높은 품계인데 더러 순서를 밟지 않고 뛰어 오르는 폐단이 있어, 김종수(金鍾秀)는 유독 그 품계를 나오지 않고 군수로 있다가 낭관이 되었다.’면서 앞으로는 신칙하여 대신 품계를 올려 준[代加] 자는 순서를 밟지 않고 뛰어 오르는 폐단이 없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김종수(金鍾秀)는 그의 지조가 가상하며 옛날의 풍속을 실추하지 않았다고 하여 을과(乙科)의 예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제영(緹縈)084)  이 말하지 않았는가? ‘육형(肉刑)을 받은 사람은 다시는 본래의 형태로 복구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월대(月臺)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곤장의 숫자를 계산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형벌이 혹독하구나. 함부로 시행해서는 아니된다. 사헌부로 하여금 이를 알아 비록 형추(刑推)하는 일이 있더라도 하루에 한 차례를 벗어나지 않게 하되, 일정한 규식을 삼도록 하라. 이로 인해 들었는데 봉명(奉命)한 어사(御史)도 이러한 사례가 있다고 하였다. 관계가 막중한 일은 하루에 두 차례 이상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어사는 연이어 세 차례나 형추한다고 하니, 일체 엄히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왕하(王賀)가 말하기를, ‘천 명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은 반드시 후손이 있다.’고 하였는데, 내가 오늘 내린 전교(傳敎)로 인하여 사람을 살릴 자가 많을 것이다."
하였다. 장령 이태정(李台鼎)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2일 경자

달무리가 졌는데, 목성을 에워쌌다.

 

지평 이지승(李祉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헌릉(獻陵)에 일이 있어 행행(幸行)한다는 명령이 내리셨는데, 신은 참으로 이 일이 우리 성상(聖上)께서 조상을 추모하는 효성과 일을 중히 여기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생각건대 전하의 일신(一身)은 종묘와 사직의 주인으로서 여러 신(神)과 만백성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세가 강릉(岡陵)에 가지런히 오르시어 옥후(玉候)가 오랫동안 고요히 요양하시는 처지에 있는데, 어찌 바람을 쏘이며 가마를 타고 강나루를 건너면서 하룻밤을 지내고 왕복할 때이겠습니까? 아! 끝이 없는 것은 효성이고 억지로 하지 못하는 것은 혈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傳)에 ‘늙은이는 힘든 일을 하는 것을 예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궁전의 계단에 머리를 깨서라도 만류하지 못하는 바람에 우리 임금께서 필경에 거둥하겠다는 명령이 내리게 되었으니,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의리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엊그제 삼일제(三日製)를 열 때에 15명의 아들·사위·아우·조카들은 시험을 보이지 말라고 분부하셨는데, 이 어찌 위대한 성인이 후손을 위하는 계책이라고 하겠습니까? 대체로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하는 것은 본래 우리 조정의 법입니다. 지난번 견책(譴責)이 비록 일시의 처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미 후손을 도우려는 도리를 생각하여 특별히 당적(黨籍)을 풀어주라는 명을 내리셨으므로 사림(士林)들이 흥기할 조짐이 있었고 세도를 전환할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당인(黨人)의 죄과에다 곧바로 몰아붙여 전에 없던 벌을 새로 만들어 내시니, 분위기가 쓸쓸하고 듣는 사람들이 당혹하고 있으므로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일에 대해 말하다가 죄를 얻은 신하들에 있어서도 어찌 모두다 당(黨)을 비호하느라 공사(公事)를 저버린 사람이겠습니까? 만약 그 사람을 벌해야 하더라도 성조(聖朝)의 언로(言路)를 넓히는 도리로써 관대하게 포용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들의 자손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성주(聖主)의 법에 해(害)가 어찌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가납(嘉納)한다는 비답을 내리고, 당인들의 아들·사위·아우·조카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내린 분부를 취소하라고 명하였다.

 

3월 13일 신축

달무리가 졌는데, 목성을 에워쌌다.

 

3월 14일 임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능(陵)에서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석역(石役)은 모두 잘 되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물(石物)의 역사(役事)를 끝마쳤는데, 모두 탈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지승(李祉承)의 일에 대해 경(卿)은 들어 보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난날 이종영(李宗榮)에게 내린 비답과 지금 이지승에게 내린 비답은 모두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교리 홍경안(洪景顔)이 북도의 백성에 대한 걱정을 극구 말하면서 덕음(德音)을 환발(渙發)하여 북도의 백성을 진념(軫念)한다는 뜻을 보이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구제할 계책을 강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하순(下詢)하였다. 김치인이 창고에 유치해 둔 환곡(還穀) 중에서 참작해 가분(加分)하자고 청하니, 윤허하였다. 동래 부사 이기경(李基敬)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명(命)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국 제조 이사관(李思觀)의 체직을 허락하고, 정홍순(鄭弘淳)으로 대임(代任)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이태정(李台鼎)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5일 계묘

해에 오른쪽 이(珥)가 있었다.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문·무과에 합격한 자를 발표하였다. 새로 합격한 사람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어석정(魚錫定)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흥덕동(興德洞)에서 과거를 보일 때에 입시하였으니 귀한 사람이다. 나와 황수(皇嫂)의 사이는 의리로 보면 형수와 시동생 사이이지만 은혜로 보면 어머니와 자식의 사이나 마찬가지이다."
하고, 어제(御製)를 써서 주었는데, 어석정은 선의 왕후(宣懿王后)와 동기간이었다.

 

3월 18일 병오

김기대(金基大)·이양수(李養遂)를 정언으로, 김재순(金載順)을 부응교로, 홍수보(洪秀輔)를 부교리로, 홍검(洪檢)을 겸 필선으로, 김익(金熤)을 부수찬으로, 홍낙성(洪樂性)을 형조 판서로, 신대현(申大顯)을 황해 수사로 삼았다.

 

집의 김회원(金會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대각의 상소로 인해 성상(聖上)의 마음에 번뇌가 일어나 성인(聖人)의 화평한 기상에 많은 흠이 생겼으며, 심지어는 대팽(大烹)085)  의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어야겠다는 뜻으로 ‘팽(烹)’ 자를 ‘정(鼎)’ 자로 고친다고 분부하셨으니, 성상께서 생각하신 바를 신은 실로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가령 신하들에게 죄를 줄 만한 일이 있더라도 마땅히 공평한 마음으로 궁구하여 차분하게 처리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위대한 성인께서 목소리와 안색을 모질게 하지 않는 도리가 될 수 있는 것인데, 심지어 ‘팽’이란 한 글자를 말씀하시는 가운데 끄집어내셨습니다. 대체로 팽이라는 벌은 이미 성왕(聖王)의 형정(刑政)이 아니고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께서도 이미 깊이 통촉하셨으니, 지금 비록 〈정(鼎)자로〉 대신한다고 분부하셨으나 비상(非常)한 말씀이 또한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남기는 데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생각을 넓히셔서 그때 내리신 전교(傳敎)를 모두 거두라고 명하여 성덕(聖德)을 빛나게 하소서.
아! 탐욕을 징계하고 염치를 권면하는 것은 왕도 정사에서 먼저 해야 될 일이고, 어진이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하라는 것은 고인의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런데 전 부제학 심이지(沈履之)는 조그만 재주를 가지고 천유(穿窬)086)  의 버릇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나으면 반드시 중상 모략하고, 마음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죽을 힘을 다해 해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온 세상이 흘겨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탐욕스러운 성질을 가는 곳마다 더욱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가 일찍이 호남의 관찰사로 갔을 때는 마음대로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도내(道內)에 있는 만 석에 가까운 진맥(眞麥)을 거짓으로 진휼청에 보고하여 값을 줄여 얻어 놓았다가 금주령(禁酒令)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서 억지로 가격을 정하여 발매(發賣)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진맥을〉 새것으로 바꾸어 놓는다고 핑계를 대고 줄줄이 실어 나르면서 매질을 낭자하게 하는 바람에 수많은 생령(生靈)들이 마치 끓는 솥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으며, 수만 석의 잉여 곡물이 모두 그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는데, 그의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짓이 여기에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작전(作錢)으로 하라는 관문(關文)에 대해 그가 비록 숨겨 두려고 하였으나, 도내(道內)의 이목(耳目)과 해청(該廳)의 문서가 반드시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특별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명확히 조사해 사실을 캐내어 탐욕을 부린 자를 징계하는 본보기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가 큰 고을에서 체차(遞差)되어 온 뒤로 곧바로 큰 집을 지었는데, 규모가 너무나 거창하여 몇 집의 터를 차지하였고 한 골짜기 안에 연달아 뻗어 있으므로 그 곳에 들어가 본 사람은 마음이 놀라고 눈이 휘둥글어집니다. 만약 그의 안중에 국법(國法)이 있었다면 어떻게 감히 이처럼 방자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부관(部官)을 파견하여 칸수가 지나친 것을 적간(摘奸)하여 법에 의거해 철거하여 간사한 것들을 단속하는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아! 이처럼 공사(公事)를 무시하고 사적인 탐욕을 부린 불법적인 사람들을 만약 청요직(淸要職)과 화려한 벼슬에 의기 양양하게 다니도록 놓아두고 조금도 두려운 마음이 없게 할 경우 악을 미워하고 세상을 권면하는 정사(政事)를 앞으로는 시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가 전형(銓衡)의 좌이(佐貳)와 옥서(玉署)의 장관에 의망(擬望)된 것을 우선 개정하고, 이어 병예(屛裔)087)  의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맨 먼저 말한 일은 세도(世道)가 지금과 같지 않다면 이러한 말을 어찌 하고 싶었겠는가? 그렇지만 그 분부한 말로 보면 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40년 동안 고심한 것을 몸받지 아니하고 이처럼 날뛰어 마치 전교(傳敎)를 부월(斧鉞)로 대신한 뜻인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지금 이 청(請)에 대해서 나는 무엄(無嚴)하다고 본다. 심이지(沈履之)의 일은 지금 너의 상소가 알력(軋轢)을 부리는 태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신을 불러서 이 일을 물어 보아 수상할 경우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또한 사람을 애매하게 놓아 둘 수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오늘 안으로 구초(口招)하고 등대(登對)하여 아뢰게 하고, 그의 집은 경조(京兆)로 하여금 오늘 안으로 적간(摘奸)하여 아뢰게 하며, 진맥(眞麥)을 요청해 얻은 것과 쌀로 바꾼 수량도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오늘 안으로 고찰하여 아뢰도록 하라. 호방(戶房) 승지와 추고방(推考房)088)  은 가지고 와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이번에 능(陵)을 전알(展謁)할 때는 홍전문(紅箭門)에서 소여(小輿)를 탈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자각(丁字閣) 앞에서 내가 감히 소여를 타란 말인가?"
하였다. 김치인이 함경 감사 김기대(金器大)가 올린 장계(狀啓)로 인하여 청하기를,
"조금 농사가 잘된 고을에는 창고에 3분의 1를 남겨 두고, 그 다음과 특히 심한 고을은 창고에 절반을 남겨 두었다가 가분(加分)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치인이 한석대(韓錫大)를 승문원에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였다. 한석대는 함흥 사람인데 부원군(府院君) 한경(韓卿)089)  의 후손이었다. 임금이 김회원(金會元)의 소(疏)를 읽으라고 명한 다음 말하기를,
"심이지(沈履之)의 일은 어떻게 보는가?"
하니,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항(李沆)이 지은 집에다 비교하였으니, 들뜬 비방을 받을 만도 하다. 내가 옛날 고 판서 윤지인(尹趾仁)과 총부(摠府)에서 반직(伴直)하였는데, 그때 마침 거둥에 필요한 제반 도구를 모두 사람들에게 빌렸었다. 내가 곁방에서 들었는데, 지금까지 감탄하고 있다. 그의 상소가 비록 지나치지만 심이지가 어떻게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고 참의 이병태(李秉泰)는 청백하였다."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근래에 이병태의 일을 들은 사람치고 누가 부끄러워서 땀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금오(金吾)에서는 구초(口招)하고 경조(京兆)에서는 집의 칸수를 적간(摘奸)하라고 명하였는데, 경조랑(京兆郞)이 옛집과 새로 지은 집이 도합 50여 칸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이 진맥(眞麥)으로 쌀을 바꾸어 떼어먹은 수량을 혜당(惠堂) 정홍순(鄭弘淳)에게 하순(下詢)하였는데 정홍순이 사실대로 아뢰고 또 심이지(沈履之)뿐만이 아니라 각 고을에도 늘 이러한 요청이 있었으나 선혜청에서 혹 들어주기도 하고 들어주지 않기도 하였다고 아뢰자, 심이지를 파직하여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장령 이태정(李台鼎)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9일 정미

임금이 직접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는데,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사직을 위해 죽은 날이었다.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은 옥당(玉堂)과 춘방(春坊)090)  은 모두 현직을 해임한 뒤 의금부에 하달하여 한 달이 지난 뒤에 법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는데, 거둥할 날을 하루 앞두고 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임금은 팔도를 한 집안처럼 보고 있는데, 어찌 남북이라고 말하는가?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어떻게 문(文)을 숭상하는 정치를 하였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문학을 크게 흥기시켰기 때문에 18학사의 호칭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교지(交趾)에서도 자제들을 보내어 입학시켰는데, 하물며 국중(國中)이겠는가? 더구나 올해는 어떤 해이며, 풍패(豊沛)091)   고향이겠는가? 그 임금이 여전히 취적(吹笛)의 가르침을 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고치지 않고 있다. 상박사(上博士) 이광배(李光培)와 한권(翰圈)092)  의 세 한림(翰林)에게 빨리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여 나로 하여금 능을 참배하는 데에 체면이 있게끔 하라."
하였다. 한석대(韓錫大)가 괴원(槐院)093)  의 분관(分館)과 한권(翰圈)에 누락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3월 20일 무신

임금이 헌릉(獻陵)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또 전 한림 유강(柳焵)·남주로(南柱老)·홍주만(洪周萬)은 교서와 저작에 차하하고, 이광배(李光培)는 율포 권관(栗浦權管)을 제수하며, 한석대(韓錫大)는 특별히 승육(陞六)시키라고 명하였다.

 

3월 21일 기유

임금이 헌릉(獻陵)에 나아가는데, 왕세손이 수행하였다. 먼저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예를 거행하고 나서 용주(龍舟)를 타고 광진(廣津)을 건넜다. 그런데 닻을 제때에 내리지 못하고 먼저 내려 버렸으므로 군기시(軍器寺) 관원을 거제부(巨濟府)에 충군(充軍)하라고 명하고, 대신(臺臣)이 법을 적용하자고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중하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헌릉(獻陵)의 홍전문에 나아가 판위(板位)에서 예를 끝마치고 나서 도감 당상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개수한 곳과 봉심할 능의 석물에 대해 하순(下詢)하였다. 그러고 나서 임금이 말하기를,
"평소에는 걷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여기와서는 행보할 수 있으니, 오르내리는 영령께서 도와 주신 것 같다."
하였다. 사초(莎草)를 보충하고 회를 발랐다. 일을 마친 다음 친히 제사를 지내고 재실(齋室)로 돌아와서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그리고 석수(石手)·사토장(莎土匠)과 모군(募軍) 등에게 진휼청의 쌀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3월 22일 경술

조정 2품 이상과 육조 당상·대사간이 정후(庭候)하였다.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묘소와 고 정승 이유(李濡)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는데, 어가가 지나는 길이었다. 능에 하직하는 예를 거행한 뒤에 어가를 돌렸다.
승지에게 명하여 길가의 농부에게 모맥(牟麥)의 작황을 물어보게 하였다. 주정소(晝停所)에 나아갔는데, 군기(軍旗)와 북을 가지고 영접하라고 명하였다.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려 배례(拜禮)를 거행하고 나서 훈련 도감에 명하여 어영군(御營軍)·협련군(挾輦軍)·협여군(挾輿軍)을 본영으로 하여금 시방(試放)하게 하여 옛날 〈선왕이〉 군병(軍兵)을 아끼었던 뜻을 몸받는 것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숭정문에 들어가 월대에서 가마를 멈추고 나서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여 신료들을 경계하고 신칙하였는데, 광진(廣津)에서 마음을 〈깨끗이〉 씻게 한다는 하교가 있었다.

 

3월 23일 신해

박성원(朴盛源)을 대사간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김교재(金敎材)를 응교로, 심관지(沈觀之)·홍검(洪檢)을 교리로, 이치중(李致中)을 부교리로, 홍경안(洪景顔)을 수찬 겸 문학으로, 서호수(徐浩修)를 부수찬 겸 필선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경기 감사 남태제(南泰齊)가 올린 장계(狀啓)로 인하여 창고에 있는 곡식 17만 석 가운데 4만 석의 가분(加分)을 청하니, 특별히 5만 석을 허락한다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의 소청을 들어주라고 명하였는데, 병이 있다고 간곡히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군기 제조 김양택(金陽澤)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광진(廣津)에서 시기에 맞추어 닻을 내리지 못했다는 잘못을 스스로 말한 차자(箚子)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차자는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하순(下詢)하기를,
"마장(馬場) 주변에 화양정(華陽亭)이 있는데, 무슨 뜻을 취한 것인가?"
하니, 병조 판서 이경호(李景祜)가 말하기를,
"그 정자는 사복(司僕)의 정자인데, 정자의 앞 풀밭에 해마다 말을 방목하므로 화양(華陽)에 말이 돌아간다는 의의를 사용하여 정자의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장(馬場)이 너무 넓지 않는가?"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임금의 부유함은 말의 숫자를 들어 대답하는 것이니, 말이 꽉 차 있으면 크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간 안표(安杓), 장령 이태정(李泰鼎)이 광진(廣津)에서 닻을 제때에 내리지 못하였을 적에 즉시 벌하자고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능에서 돌아와 보고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갑자년094)  에 경의 부친이 능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는데, 올해에 경이 또 이 역사(役事)를 맡았으니, 실로 기이한 일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하교하시니 그지없이 감격스럽고 황송합니다."
하였다. 김치인이 또 말하기를,
"고 정승 이유(李濡)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신 일로 인해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상지(李商芝)가 그의 아비 일을 당한 뒤로 하늘의 해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불쌍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충효는 본디 두 가지가 아니다. 이시중(李時中)이 설령 과연 이런 일이 있더라도, 태무(太武)는 일개 위(魏)나라 임금에 불과하지만 고윤(高允)의 말에 감동하여 직신(直臣)으로 허여하고 용서하였다095)   지금 이상지가 그 아비를 위해 이처럼 하고 그의 임금에 감동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였으니, 어버이에게는 자식의 도리를 얻었으며, 임금에게는 신하의 분수를 다하였다. 아! 지난번 처분을 내릴 때에 두 아우를 위해 참작해서 하였는데, 더구나 그의 아들이겠는가? 이시중에게 내린 금고(禁錮)의 명을 특별히 취소하여 두 아우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이상지의 효성을 권장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5일 계축

임금이 명릉(明陵)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3월 27일 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강원 감사 김귀주(金龜柱)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강릉(江陵) 등 여섯 읍의 춘모(春牟)·이모(耳牟)·당미(糖米)·피직(皮稷) 등 곡식을 그에 상당한 곡물로 바꾸어 회록(會錄)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장령 박규수(朴奎壽)가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9일 정사

특별히 이득복(李得福)을 수찬으로 제수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윤동도(尹東度)의 소청에 따라 사임을 허락하고 좌의정 한익모를 대임시켰다. 전 판부사 김양택(金陽澤)을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조돈(趙暾)이 너무나 집안이 성대하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물러나겠다고 청하고, 또 갑신년096)   5월에 연석에서 ‘그의 아우 조정(趙晸)이 과거에 급제하여 대신 벼슬하게 되면 마땅히 그가 물러가도록 허락하겠다.’는 말을 가지고 누누이 간청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일기를 상고해 보라고 명하였는데, 이러한 전교가 없었다. 경연의 이야기를 맹랑하게 전하였다는 이유로 그때 사관을 엄히 문초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나충좌(羅忠佐)를 장령으로, 조재준(趙載俊)·박필순(朴弼淳)을 지평으로, 홍검(洪檢)을 헌납으로, 이상지(李商芝)를 병조 참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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