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기미
판부사 김양택(金陽澤)이 소를 올려 자신의 잘못을 들어 말하였는데,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유지를 전하라 명하였다.
병조 참지 이상지(李商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명을 듣고 온 종일 기다리지 않고 그 즉시 나왔던 것은 참으로 임금의 은혜가 크고 아비의 말을 어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 은사(恩赦)가 내린 뒤로 신의 아비가 하늘을 향해 손을 모우고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천은이 망극하고 성덕이 망극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 준 것이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하였으며, 온 집안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부여잡으며 감읍(感泣)하였습니다. 이어서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지어 내리신 제문(祭文)을 삼가 보고 신의 아비가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조부께서도 지하에서 감읍(感泣)하실 것인데, 더구나 산 사람이겠는가? 결초 보은(結草報恩)을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갚을 길이 없으니, 너는 힘써야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수하신 유지를 받들게 되자 신의 아비가 또 말하기를 ‘성은이 한결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차마 다시 아비의 마음을 서글프게 할 수 없어서 허둥지둥 들어와 숙배(肅拜)하였는데, 이는 아비가 사적(私的)으로 감축(感祝)한 것을 대신 말씀드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신의 불충하고 불효한 죄는 진실로 그대로 입니다. 아비에게 죄를 전가하고 병으로 요행히 면하였으니, 이것이 어떤 사람입니까? 천지(天地)는 나를 용납해 주었으나 신은 갈수록 스스로 용납할 수 없으며, 부모는 나를 돌보아 주었으나 신은 갈수록 자립할 수 없으며, 은혜로운 포상은 갈수록 융숭해지고 있으나 신의 죄는 갈수록 깊어만지고 있으니, 신과 같은 처지는 옛날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적인 깊은 은혜에 감격하여 또 다시 사람인 양 자처한다면 윤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임금과 어버이는 본디 내외(內外)가 없고 충효는 똑같이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돌아볼 때 무상(無狀)한 것이 영구히 윤리의 죄인이 되었으니, 어떻게 효를 옮기어 충을 삼아 조금이나마 망극한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러러 축수하는 것은 단지 나라의 법에 따라 물러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외에 다시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너의 마음을 내가 잘 통찰하고 있는데 너는 왜 이처럼 하는가."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관학 도기 유생(館學到記儒生)에게 제술과 강경을 시험 보였는데, 강경에 장원한 유학(幼學) 유숙(柳橚)과 제술에 장원한 생원 임제원(林濟遠)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임금이 전(殿)에 나와 앉아 있은 지 잠시 동안에도 유생들이 정돈하여 대기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해당 승지와 대사성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내국 제조 정홍순(鄭弘淳)의 체직을 허락하고 이창수(李昌壽)로 대임시켰다. 이조 판서 김창흡(金昌翕)의 봉사손(奉祀孫)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이재간(李在簡)을 승지로 삼았다.
4월 3일 경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조돈(趙暾)을 제천현(堤川縣)에 부처(付處)하라고 명하였는데, 조돈이 명을 받은 뒤에 이어서 시골길로 떠났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그의 관직 삭탈을 청하자, 처음에는 의금부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가 곧바로 부처하라고 명하였다. 내국 제조 이창수(李昌壽)의 관직을 삭제하라고 명하였는데, 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치인이 황해 감사 이담(李潭)이 올린 장계(狀啓)로 인하여 창고에 둔 곡식 가운데 3분의 1까지 가분(加分)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장령 박규수(朴奎壽)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생각한 바로써 조돈과 이창수를 논해 구원하면서 ‘작록(爵祿)을 사양할 수 있으며, 칼날도 밟을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박규수를 단양군(丹陽郡)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사간 이현조(李顯祚)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현조는 고지(故紙)나 베껴 전한다는 이유로 그의 삭직(削職)을 명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을 내국 제조로, 신회(申晦)를 이조 판서로, 이세택(李世澤)을 승지로 제수하였다.
4월 4일 신유
이수훈(李壽勛)을 사간으로, 성윤검(成胤儉)을 장령으로, 강이복(姜彛福)·송담(宋霮)을 지평으로, 기언관(奇彦觀)을 헌납으로, 이계(李溎)·박사륜(朴師崙)을 정언으로, 김재순(金載順)을 교리로, 민종렬(閔鍾烈)을 문학으로, 김익(金熤)을 겸 문학으로, 김응순(金應淳)을 대사간으로, 신회(申晦)를 지경연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동경연으로, 이한응(李漢膺)을 통제사로, 조제태(趙濟泰)를 충청 병사로 삼았다.
4월 5일 임술
교리 김재순(金載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엊그제 중신(重臣)에게 내린 처분에 대해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에는 분의(分義)가 중대한데, 떠나거나 나아갈 적에 냉난(冷煖)을 스스로 아는 것 또한 일례(一例)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향민중(向敏中)097) 이 관직에서 크게 견디어 낸 것이나 전약수(錢若水)098) 가 세차게 흘러가는 대세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난 것은 본디 치세(治世)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조정 신하들 중에 이러한 기풍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직 저 중신은 물론 꼭 사양해야 될 의리가 없지만 또한 본디 빼앗지 못할 뜻이 있으므로, 성명(聖明)의 조정에서 마땅히 물러가려는 하나의 인사를 용납하여 세상을 격려하는 도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도 체양(體諒)하지 않은 채 갑자기 귀양을 보내셨으니, 어찌 형정(刑政)의 중도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창수(李昌壽)가 감히 갑자기 나오지 않은 것에 있어서는 본디 이유가 없지 않으며, 박규수(朴奎壽)가 생각한 것을 숨김이 없이 말한 것 또한 대간(臺諫)의 체통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쫓거나 귀양보내는 등 견책의 벌이 너무나 지나쳤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더 깊이 생각하시어 모두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이르기를,
"조돈(趙暾)과 이창수(李昌壽)의 일에 대해 내린 처분의 경중은 그 뜻이 있었다. 그런데 반드시 규각(圭角)하려는 것을 지금의 고상한 정취로 여기는가 하면 박규수(朴奎壽)까지 아울러 비호하려고 하니 이미 놀라운 일이다. 특히 한심한 것은 부처(付處)된 자를 감히 중신(重臣)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의 상소를 되돌려 주도록 하고, 김재순(金載順)은 관직 삭탈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윤시동(尹蓍東)을 승지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고요히 누워 잠이 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고인의 말이 생각났다. 왜냐하면 이는 《소학(小學)》에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글에 ‘도연명(陶淵明)이 팽택령(彭澤令)이 되어099) 가솔(家率)을 데리고 가지 않았는데, 아들에게 한 노복(奴僕)을 보내면서 편지에, 「네가 조석의 비용을 자급하기에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노복을 보내어 네가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노고를 돕게 한다. 이 또한 사람의 자식이니 잘 대해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자양(紫陽)이 이미 도잠(陶潛)을 일컬었고, 《강목(綱目)》에는 특별히 진처사(晉處士)라 썼으며, 칭찬하는 말이 또한 《사기(史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나 역시 일찍이 이 사람을 사랑하였다. 이 글은 한 가지 일로 세 가지 좋은 일을 한 의의가 담긴 것 같다. 한 문장에 세 가지 좋은 일이 구비되어 있는데, 어째서 세 가지 좋은 일이라고 하는가? 비록 일꾼을 보내었지만 돕는다[助]는 한 글자의 뜻은 노고를 나누어서 하라는 뜻이 있으니 이것이 하나이고, 이 또한 사람의 자식이다고 한 말은 장자(張子)의 서명(西銘)100) 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둘이고, 지극히 자애로운 마음과 동포(同胞)의 뜻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세 가지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외우는 것은 그 일뿐만이 아니라,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노복이라는 명칭이 없었으나, 정절(靖節)101) 의 이 말은 노복으로 하여금 빌리는 것처럼 한다는 뜻과 같은 것이니, 내가 비록 물건이 없더라도 내가 주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사람이 수고함을 아끼는 뜻은 한결같이 하였다. 비록 사저(私邸)에 있을 때에도 노복들이 적지 않았으니, 이 자리에 있은 뒤로 어찌 다소를 따질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사람이 혹시라도 난감해 할까 염려하는 것은 나의 평소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펼 때 1리를 백 리처럼 여기어 협연(挾輦)하는 군사들에게 반드시 서행하라고 명하였다. 비록 추모하여 날아가고 싶은 마음으로써 이렇게 하지만, 이 역시 내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옛날을 몸받은 뜻이다. 이로 인해 힘써 신칙해야 할 것은 수재(守宰)는 백 리를 다스리고 방백(方伯)은 일도(一道)를 다스리는데, 하물며 그 임금은 천승(千乘)의 자리에 앉아 팔도의 백성 위에 임해 있는 것이겠는가? 아! 나의 한결 같은 마음이 이미 술편(述編)에 기록되었거니와 비록 구중 궁궐의 속에서도 안이한 와내(窩內)에 거처하는 것같이 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원숭이었고, 뜻은 말[馬]과 같아서 일념(一念)이 빗나감에 따라 성·광(聖狂)이 저절로 판별되므로 평소에 두렵게 여겼다. 더구나 늘 경복전(景福殿) 가운데 걸려 있는 여덟 글자를 외웠으니, 즉치심인데, 절용애인 사민이시(節用愛人使民以時)로, 이것은 바로 공자의 가르치심인데, 옛날에 이를 걸어 놓고 또 서소재(西小齋)의 합명(閤名)을 환성(喚醒)이라 하고 동소재(東小齋)의 합명을 임연(臨淵)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할 경우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노쇠하였으나 어떻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아! 백리(百里)의 적자(赤子)를 하나의 수령에게 맡겨 놓았고, 일도(一道)의 인민(人民)은 도신(道臣)에게 맡겨 놓았다. 도신이나 수령이 된 자들은 어떻게 감히 자나깨나 소홀히 지나칠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소홀히 한다면 이는 그 임금만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저 높고 높은 푸른 하늘을 저버린 것이다.
아! 예로부터 임금을 만든 것은 임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곧 억조(億兆)의 생민(生民)을 위해서이다. 이로써 생각건대 임금도 그러한데 더구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그런데 마음을 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법(不法)을 저지르기도 한다니, 이것이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이게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대체로 시체(時體)의 병이 이미 고질화되어 비록 크게 탐욕을 부린 자는 없으나 거문고와 학이 저절로 따른다는 말은 들어보기 드물다. 아! 구중 궁궐과 초가집은 곧 하늘과 땅과 같다. 아! 백성들이 비록 가슴 가득히 원망을 안고 있더라도, 어떻게 구중 궁궐에 전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 상신(相臣)이 아뢰었을 때에 이미 하교를 하였지만 모년(暮年)에 감회가 일어나는데, 어떻게 묵묵히 있겠는가? 번거로움을 꺼려하지 않고 거듭 신칙하여 유시하니, 모름지기 마음속에 깊이 새겨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춘대(春臺)에 있게 하라.
아! 옛날에 동해의 일개 부인으로 인하여 가뭄을 초래하였는데, 이미 바람이 민망스럽다는 뜻을 유시하였다. 근래에 이러한 징조가 없지 않으니, 이는 임금이 쇠하고 정사가 해이해져서 그런 것인가 또한 서명(西銘)의 의의를 소홀히 여겨서 그런 것인가? 내가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은 비록 노쇠했어도 마땅히 노력해야 하겠다. 아! 방백과 수령들은 나의 강개한 뜻을 몸받아 힘쓰고 힘쓰도록 하라. 8도의 도신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한다."
하였다. 형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을 체직(遞職)해 주라 명하고 홍중효(洪重孝)로 대임시켰다.
4월 7일 갑자
임금이 태묘(太廟) 여름 제사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비를 맞으며 흥화문까지 걸어 가서 선전관 2명에게 명하여 동서 교외에 비가 얼마나 왔는지 살펴보라고 명하였다.
4월 9일 병인
신상권(申尙權)을 장령으로, 조진형(趙鎭衡)을 지평으로, 김치공(金致恭)을 필선으로, 박지원(朴志源)을 보덕으로, 홍경안(洪景顔)을 교리로, 김상익(金相翊)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집의 김회원(金會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심이지(沈履之)의 일에 대해 이미 구초(口招)하여 아뢰라는 명이 있었고, 또 문서와 장부를 상고해 내어 가옥을 적간(摘奸)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은 악을 미워하는 성세(聖世)의 정사를 다시 보게 되었고 말세의 탐욕부리는 풍조가 이로부터 경계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구초한 말과 적간한 뒤에 처분한 전교를 보니, 오로지 속이고 숨기기만 일삼아 사실과는 상반되었습니다. 아! 나라에 기강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한낱 심이지를 위해 임금의 명을 행하지 못하고 나라의 법을 펼 수 없단 말입니까? 신이 처음 올린 상소에 단지 그 대략만 논하고 만 것은 대체로 굳이 말하여 충후(忠厚)한 뜻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만약 신이 일의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비록 일월과 같이 밝으신 성상께서도 어떻게 그 정상(情狀)을 모두 통촉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임금을 속이는 습관이 이로 인해 점차로 일어나지나 않을까 염려되니, 어찌 놀랍고 분개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곡식을 청해 일을 처리하는 것도 실로 근세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그러나 혹 더러 곡물이 오래되어 썩을까 염려하여 바꾸는 일도 있으며, 또는 국가의 일을 돕기 위해 발매(發賣)한 일도 있는데, 청하는 것도 명분이 있고 값을 깎는 것도 상례가 있어서 백성의 소원에 따르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그래도 할 말이 있습니다만, 어찌 심이지처럼 나라를 좀먹고 백성들의 고혈을 수탈하여 오로지 개인의 이익만을 일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청컨대 모두 논하겠습니다.
심이지의 공초에 ‘그때 진맥(眞麥)은 하나의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서 백성들이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해 동안 쌓아 두어 날마다 썩고 좀이 먹어갔으므로 억지로 조곡(糶穀)을 나누어 주니, 민폐가 갈수록 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의 이 말은 비록 스스로 벗어나기에 급급하여 다른 것은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임금을 속이는 죄가 탐욕을 부린 것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더욱 통분한 점은 호남 일로(湖南一路)의 곡물 수량이 비국과 본영의 문부(文簿)에 자세히 기록되어 여기저기에서 상고할 수 있었습니다. 임오년102) 참혹한 흉년을 겪은 뒤로 도내의 각종 곡물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느라 모두 바닥이 나자 부족할까 걱정하여 북쪽의 곡물을 옮겨 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비록 그때의 도신 고 판서 원경순(元景淳)의 장계(狀啓)만 보더라도,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들어간 것을 합산하면 거의 1백 20만여 석에 이르는데, 지금 비록 새로 받아들인 곡물과 창고에 유치해 둔 곡물을 다하여도 6, 70만 포(包)에 불과하므로 백급(白給)할 것과 부환(付還)할 것에 부족한 것이 오히려 60여 만 포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도에서 곡물을 옮기는 일이 현재 가장 급선무입니다.’고 하면서 북관(北關)의 곡물을 떼어서 옮기자고 청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만일 진맥(眞麥) 1만 석을 여러 해 동안 쌓아 두어 날마다 썩고 좀먹는 것이 심이지의 말과 같다면, 중신이 그 당시 마음으로 왜 진휼하는 데에 보태 쓰지 않고 이처럼 곡물을 옮기자고 청하였겠습니까? 신은 중신이 결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으로 압니다. 중신의 이 장계(狀啓)는 임오년 겨울에 올렸고 심이지가 관찰사로 나간 것은 계미년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당년(當年)에 새로 받아들인 곡물이 어찌하여 썩고 좀먹을 염려가 있으며, 막 큰 흉년을 겪은 백성들이 어찌하여 조곡 받는 것을 원치 않았겠습니까? 이는 명철한 사람이 아니라도 변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의 공초에 말하기를 ‘선혜청에서도 이 폐단을 알고 군문(軍門)에서부터 쌀로 바꾸었기 때문에 선혜청에 왕복하면서 정해진 규식에 따라 절미(折米)를 바꾸었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말이 교묘하고도 거리낌이 없습니까? 이번 쌀로 바꾸려는 계획은 심이지에게서 제기되어 선혜청이 속임을 당한것입니까? 선혜청에서 알리어 심이지가 거행한 것입니까? 어찌하여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채 우물우물 넘긴단 말입니까? 그가 이른바 ‘정해진 규식에 따라 하였다.’고 한 일은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쌀로 바꾸는 건은 비록 선혜청의 공문이 있다 하더라도 가격의 다소를 조절하는 것은 또한 조정에서 정한 규식을 따른 것입니까? 하물며 진맥 만 석으로 쌀 4천 석과 바꾸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피곡(皮穀) 6두를 쌀로 바꾸는 법입니다. 진맥 1석당 으레 진말(眞末) 7두 5승이나 지화(只火)103) 15두를 내놓는데, 진말은 풍년이나 흉년을 따지지 않고 쌀로 대용하지만, 지화는 별로 다른 곳에 쓸 일이 없어서 누룩을 만드는 데에 씁니다. 그런데 그가 이익을 계책으로 삼아 감히 마음대로 도내의 술 금지령을 늦추어서 보리의 가격이 폭등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이 앞서 올린 상소에 이른바 ‘술 금지령이 조금 해이된 틈을 탓다.’고 한 것은 조정에서 금지령을 늦추었다는 게 아니라, 곧 그가 마음대로 늦춘 것이었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백성을 병들게 한 태도야말로 어찌 오랫동안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맥 1석의 가격을 억지로 5, 6냥으로 정하여 쌀로 바꿀 경우 1석당 2냥을 민간에 내주는데, 거두어들이고 풀 때에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1석당 남은 돈이 거의 3, 4냥이나 되는데, 만 석의 잉여금을 통계내면 3, 4만 냥 정도가 됩니다. 이는 도내의 수령 및 아전과 백성들이 공공연히 말하면서 지금까지 침을 뱉으며 욕하고 있습니다. 이 3, 4만 냥이나 되는 잉여금을 그가 공적인 용도에 보탰겠습니까? 사사로이 호주머니에 넣었겠습니까? 구초(口招)할 때에 어찌하여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 이상도 합니다.
신이 더욱 분개한 점은 가옥을 적간(摘奸)한 일입니다. 몇 집의 터를 차지하여 한 골짜기에 연달아 뻗어 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석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신 역시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적간하였을 때에는 50여 칸에 불과하고 새로 지은 것은 수십여 칸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아! 가옥을 짓는 법은 반드시 새 재목을 사용하여 지은 것이라야만 새로 지었다고 할 수 있고, 묵은 재목을 사용하여 새로 지은 것은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지금 적간한 가운데 어느 칸은 보수했다고 한 것은 그지없이 교활합니다. 더구나 이른바 새로 지었다고 한 것은 처음에는 11칸이라고 하였는데, 대궐에 들어간 뒤에 승정원이 퇴각한 바람에 다시 변경시켜 25칸이라고 하였습니다. 칸수의 다과(多寡)를 금중(禁中)에서 임의로 늘렸다 줄였다 하였고 보면, 이른바 어떻게 적간하였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그의 숙부가 경조(京兆) 판관으로 있자마자 낭관과 하리에게 이미 두려운 세력을 쌓아 왔었습니다. 그래서 낭관에게 눈물을 흘리며 애걸하고 하리에게 공갈을 쳐 위협하는 등 못할 짓이 없었으므로 크나큰 가옥으로 하여금 이처럼 흐지부지 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력이 뻗쳐 감히 임금의 명과 맞서고 있으나 전하를 위해 말씀드린 자가 한 명도 없으니, 신은 실로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한 번 조사하여 사실과 틀린 바가 있을 경우에는 신이 망언(妄言)의 벌을 받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심이지가 어떻게 국법을 요행히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경조(京兆)의 낭관이 총명(聰明)을 속이고 가린 죄 또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우선 도태시키고 잡아다 문초하여 엄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임금이 미워하는 바는 곧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 태무(太武)가 적흑자(翟黑子)를 미워하여 법으로 처리하고104) 고윤(高允)을 가상히 여겨 강직함을 권장하였다. 내 비록 늙었지만 이 마음은 늙지 않았으니, 과연 그대의 상소와 같다면 어찌 애매하게 놔두지 않을 뿐이겠는가? 그렇기는 하나 호남의 일은 본디 정해진 규식이 있는데, 일을 처리한 자가 적임자가 아니어서 혹시 이로 인해 원망을 초래했다고 하면 그만이겠거니와, 그대는 금석처럼 확고히 잘라 심이지(沈履之)가 임금을 속였다고 말하니, 너무나 지나치지 않는가? 가옥의 일이 과연 그대의 상소 내용대로라면 심이지만 임금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해당 낭관이 더욱 무상(無狀)하다. 어찌 도태만 시키겠는가? 그렇지 않을 경우 어찌 먼저 도태시킨 뒤에 문초해서야 되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오늘 안으로 엄히 문초하여 구초(口招)로 아뢰도록 하겠다."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홍낙인(洪樂仁)이 소를 올려 해임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려 체차(遞差)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김회원(金會元)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리기 전에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미 처분을 내리셨습니다. 가옥의 건은 이미 해당 낭관에게 물어 보았으니, 저절로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만, 도신(道臣)의 신분으로 국가의 금지령이 한창 엄할 때에 누룩을 만들려고 일을 처리하였다는 것은 정말 신하로서 절대 감당하기 어려운 죄목이므로 결코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 역시 알고 있다."
하였다. 임금이 한성 판관 정익상(鄭翼祥)의 구두 공초를 읽고 나서 말하기를,
"‘옛날 관례대로 한다[仍舊貫]’는 세 글자를 삭제하였기 때문에 김회원(金會元)이 상소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옛날 관례대로 한다고 하였다가 지금 바꾸어 보수했다고 하였으니, 어찌 수상하지 않겠는가? 미봉(彌縫)한 의도가 뚜렷이 있으니, 매우 잘못된 일이다."
하고, 정 익상을 형률에 의해 처벌한 다음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수찬 이득복(李得福)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이득복이 무엇 때문에 승강이질 하는가?"
하니, 승지 서유대(徐有大)가 말하기를,
"특별히 제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 실로 막연하게 이득일(李得一)로 알고 이번 제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고, 이어 비답하기를,
"그대 형의 아우로 이득일과 같이 영관(瀛館)에 들어갔으니,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다. 지금 특별히 제수한 것이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득복은 이득종(李得宗)의 아우였는데, 중관(中官)이 이득일을 이득복으로 잘못 썼었다.
4월 11일 무진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내삼청(內三廳)의 호위 군관들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였다.
4월 12일 기사
달무리가 목성을 에워쌌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문관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였다.
김귀주(金龜柱)를 승지로 삼았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는데,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학의 생도들에게 내가 십잠(十箴)을 권하였는데, 비록 게으르고 방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책을 펴면 조금 공경의 마음이 생길 것이지만 책을 덮으면 다시 처음과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이 어려운 것이다. 공자께서 자리에 앉아 계시고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가 앞뒤로 앉아 있는 기상을 상상해 보면 자연히 공경의 마음이 생길 것이다."
하였다. 또 《소학지남(小學指南)》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여 윤독(輪讀)하게 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진 서산(眞西山)105) 의 《대학연의(大學衍義)》에 ‘야대(夜對)가 낮에 물어보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리고 《옥서일기(玉署日記)》로 보건대, 경연만 열고 야대를 정지하였을 경우에는 ‘경연만 열고 야대를 정지하였다.’고 쓰고, 경연을 정지하고 야대를 행하였을 경우 ‘경연을 정지하고 야대를 행하였다.’고 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아! 왕위를 이어받은 뒤로 경연을 열었지만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옥서일기》를 보건대, 어떻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아! 동위(銅闈)106) 에 있을 때 정월 초하룻날 요화당(瑤華堂)에서 야대를 하였었다. 그때 춘방(春坊)은 고 상신 송인명(宋寅明)과 고 참판 이광세(李匡世)였었고, 계방(桂坊)은 서종진(徐宗鎭)이었다. 그때 고 상신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보통 이날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소일을 하는데, 지금 야대를 행한다.’고 하면서 더욱 나를 권면하였다. 그뒤 호서의 방백으로 갔을 때에도 다시 정월 초하룻날 야대한 이야기를 외우면서 나를 권면하였다. 어찌 그의 상소만 일기에 기록되어 있겠는가?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아! 지금은 눈이 어두어졌는데, 옛날의 일기에 감동되어 자정전(資政殿)에서 법강(法講)을 하였다. 그날 《소학(小學)》의 제사(題辭)만 외우고 말았으니, 이제부터 중지하였다는 말만 기록하고 나는 고요히 요양하느라 나날을 보내게 되었는데, 아! 더구나 이 해이겠는가? 고요히 누워서 생각해 보니, 경연은 비록 열 수 없으나, 야대를 어찌 한 번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대는 보통의 자세로 앉는데에도 이 역시 어려워서 갓을 쓰고 의자에 기대어 하고 있다. 이 뜻은 나의 올해 마음으로 지금 하지 않는다면 더욱 늙어질 것인데, 무엇을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수년 이래로 처음 행한 것이다. 그 강(講)은 무엇을 하는가 하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이니, 이 뜻 역시 깊은 것이다. 평상시 문답할 때에는 누워서 듣는 것에 불과하였는데, 오늘 밤에 유신(儒臣)들과 토론하니, 지난날처럼 느껴진다. 어찌 75세가 되어 이럴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강(講)이 끝났으나, 남은 뜻을 잊지 못하여 지금 《소학지남(小學指南)》을 가져다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즉 《소학(小學)》이다. 내 나이 13세에 읽었는데, 그 해가 돌아왔다. 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다시 강(講)한 후의 사체(事體)는 다른데 어찌 노쇠한 것을 거리끼겠는가?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詩經)》·《서경(書經)》을 차례로 거듭 강하였다. 아! 80을 바라보면서 《논어》·《맹자》를 거듭 강하는 것만도 기이한 일인데, 더구나 《시경》·《서경》이겠는가? 더러는 《희경(羲經)》을 강하라고 권하기도 하는데, 스스로 기력을 헤아려 보건대, 정말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소학》을 강한 해가 돌아왔으므로 박약 복초(博約復初)107) 의 뜻으로 《소학》을 강하고 싶었으나, 일이 마음과 같이 되지 않아 입교편(立敎篇)만 겨우 강하였다. 아! 몇 년이 지난 뒤에 보면 관리(館吏)가 오늘을 ‘경연은 정지하고 야대를 행하였다.’고 써 놓았을 것이다. 40년 동안 학문을 강하고 남은 뜻을 오늘 밤에 조금 펼 수 있었다. 시각이 이미 깊었으므로 이처럼 불러서 쓰게 하였다. 무릇 해동(海東)의 어진 사대부들은 내가 75세가 되어 올해에 마음쓰는 뜻을 감동하여, 이 하교를 몇 줄의 문구(文具)로 여기지 말라. 그러면 어찌 나의 마음에만 부응하는 것이겠는가? 어찌 세상에 도움이 없겠는가? 힘쓰고 힘쓸지어다."
하였다.
정창성(鄭昌聖)을 승지로 삼았다.
4월 14일 신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갔다. 종신(宗臣) 내외가 입직하고 문신(文臣)이 입직하였는데, 내삼청 무겸(武兼)관과 훈국·금위영의 장관(將官)에게 강(講)을 시험 보였다.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종신(宗臣)이 비록 얼마 안되지만 한번 금권(金圈)한 뒤로 대부분 회피하고 있다. 옛날에는 가마를 탄 사람이면 모두 강(講)을 하였다고 들었는데, 지금 한 사람이 경서 1장을 강하는데도 강하는 장의 언해(諺解)도 잘 알지 못하니, 사체(事體)가 한심스럽다. 종부시 제조를 중하게 추고하라."
하고,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도 똑같이 강에 응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하순(下詢)하기를,
"아들을 어떻게 나았기에 모습이 단정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특한 색깔과 음탕한 소리를 이목에 접하지 않기 때문에 난 아들이 자연 단정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태교(胎敎)가 있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왕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글뜻을 잘 안다고 하여 자급을 올려 주라고 명하였다. 장원한 문신과 무신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4월 15일 임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당상 무신에게 초하루 활쏘기를 시험 보였다. 하교하기를,
"무장(武將)은 옛날에는 무종(武宗)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어찌 화살통에 먼지가 많이 쌓였을 뿐이겠는가? 비록 선전관으로 하여금 적간(摘奸)하라고 해도 화살통을 깊이 감추어 두고 있으니, 어떻게 가지고 오겠는가? 아! 태평의 날이 오래되어 변방에 걱정이 없으니,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어찌 근본을 견고하게 만든다는 뜻이겠는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게을렀기 때문이다. 스스로 힘쓰고 나서 힘써 신칙함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4월 16일 계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문신에게 한학(漢學)의 강(講)을 시험 보였다. 순통(純通)을 맞은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불통(不通)한 사람에게는 공해(公廨)에 모여서 잘 읽게 된 뒤에 아뢰라고 명하였다.
4월 17일 갑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법성 첨사(法聖僉使)는 이미 사면을 받았습니다. 이흥종(李興宗)이 벌을 받아 귀양간 지 지금 해가 넘었으니, 용서해 주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흥종의 영(令)을 첨사가 어찌 감히 거역한단 말인가? 화분(花盆)을 더하여 실은 것은 더욱 잘못하였다. 국가의 곡물을 실은 배에는 의복도 첨가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다른 물건이겠는가? 취재(臭載)한 물건을 상상해 보건대, 악취가 코를 풍기는 것 같다. 이는 마땅히 엄히 신칙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제술(製述) 시험을 보아 장원한 부교리 홍수보(洪秀輔)에게 초피립(貂皮笠)과 이엄(耳掩)을 하사하고, 그 밑으로는 각각 차등 있게 지필묵(紙筆墨)을 하사하였다.
4월 18일 을해
이조 판서 신만(申晩)이 소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지난해 이명환(李明煥)의 일은 그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내가 다시 말하지 않겠고, 임관주(任觀周)의 일은 비록 놀랍기는 하나 왜 이처럼 지나치게 승강이질 하는가? 경은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나의 만년(晩年) 정사를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는데, 돌아온 동지 서장관(冬至書狀官) 이수훈(李壽勛)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청나라의 정사에 대해 하순하니, 대답하기를,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던 것은 처음부터 침해하고 독촉하는 요역이 없기 때문입니다. 농업·상업·공업·장사꾼들이 각기 업(業)을 가지고 있는데, 조금도 간섭하는 것이 없으므로 처음부터 원망하는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큰 일[役]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역군(役軍)을 사서 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 20일 정축
정광한(鄭光漢)을 대사헌으로, 이섭원(李燮元)을 대사간으로, 이보관(李普觀)을 집의로, 이헌묵(李憲默)을 사간으로, 김훤(金煊)·김화중(金和中)을 장령으로, 윤광례(尹光禮)·이사조(李思祚)를 지평으로, 이수일(李秀逸)을 헌납으로, 김종수(金鍾秀)·조종현(趙宗鉉)을 정언으로, 윤시동(尹蓍東)을 부제학으로, 민홍렬(閔弘烈)을 수찬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예조 판서로, 정존겸(鄭存謙)을 형조 참판으로, 윤득양(尹得養)을 좌윤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심수(沈鏽)가 소를 올려 체차(遞差)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 일은 이미 알고 있다. 애걸하며 아우성을 친 것은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숙질(叔姪)을 들어서 이렇게 하였으니, 이미 아름다운 가풍이 아니다. 경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본관록(本館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삼(蔘)의 폐단에 대해 올린 장계(狀啓)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영상과 좌상에게 익히 보고 상확(商確)하고 나서 다시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이어 의관(醫官)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계(江界)의 삼은 몇 근이나 되는가?"
하니, 의관이 대답하기를,
"9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국의 수요에 부족할 염려가 없는가?"
하니, 의관이 대답하기를,
"내국에서 약으로 쓰는 삼은 강원도 삼을 쓰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계의 삼은 건국 초기부터 납부하는 수량이 9근이었는가? 중간에 혹 가감(加減)한 숫자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강계에서 상납하는 삼의 수량은 처음에는 16근이었는데, 중간에 6근으로 줄였고 지금은 9근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용(御用)에는 나삼(羅蔘)을 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삼은 4근이어서 어용(御用)에 부족하기 때문에 가끔 강원도 삼을 쓰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기백(箕伯)108) 이 올린 상소 중에 강계 백성들이 울며 청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생각하면 불쌍하다. 내국에서 받아들인 것을 내가 먼저 견감(蠲減)하겠다. 6근으로도 쓸 수 있는데, 어찌 줄여 주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이미 하교를 받고 나니 과연 자세히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적당히 수량을 감하더라도 또한 삼 값을 더 올려주어야 합니다. 어공(御供)에 있어서는 중요한 점이 있으니, 견제(蠲除)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베 한 필을 감하는 것도 백성을 위하는 측달(惻怛)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내국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내가 먼저 감수(減數)한 연후에 경들도 마땅히 받들어 행하는 도리가 있을 것이다. 송(宋)나라는 화석강(花石綱)109) 때문에, 명(明)나라는 과은(課銀)110)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떠났는데, 어찌 거울로 삼아 경계할 것이 아니겠는가? 16근을 상납할 때에 백성들이 어떻게 견디었겠는가? 지금은 9근인데도 오히려 폐막(弊瘼)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정없이 캐내어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체로 삼(蔘)의 생산이 옛날과 같지 않고, 삼가(蔘價)가 날마다 오르고 있어서 동서의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눈으로 본 것 같기 때문에 관동의 삼읍(蔘邑)에 대해 상정법(詳定法)111) 을 만들게 하였고 또 경공(京貢)하게 하였다.
오늘 관서 방백이 올린 글을 보니, 강계의 백성들이 남녀 할것없이 말을 에워싸고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직접 본 것 같다. 이 말을 듣고 묵묵히 있으면 백성들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이는 옛날을 저버린 것이 된다. 그것을 강정(講定)하고자 하면 먼저 어공(御供)부터 해야 하니 더 정한 3근을 특별히 감하도록 하라. 내국도 그렇게 하는데 더구나 기타(其他)이겠는가? 상소 중에 조목조목 나열한 몇 건(件)은 자못 의견이 있으니, 영상과 좌상, 이조·병조·호조의 판서 김시묵(金時默)·조엄(趙曮)·민백흥(閔百興)은 비국에 모여 소상하게 회계(回啓)하여 같이 등대(登對)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휘지(李徽之)·홍낙명(洪樂命)을 승지로 삼았다.
평안도 관찰사 정실(鄭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감영에 있을 때부터 강계의 인삼 폐단이 매우 심하여 백성들이 떠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경내에 도착하자 남녀 노소들이 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길에 가득히 나와서 수레를 붙잡고 호소하면서 모두 살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청컨대 인삼 폐단의 근원을 대강 논하고 이어서 그 폐단을 구제하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로 강계부에 처음에는 호세삼(戶稅蔘) 45근만 있었는데, 시행한 지 오래되었으나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뒤에 호조에서 이웃 나라와의 교제에 필요하다고 하여 연례삼(年例蔘) 25근을 받았는데, 매 돈쭝[錢]마다 석 냥의 값을 쳐서 대금을 주고받아들였으나, 여전히 부족하여 본부(本府)의 호세삼 10근을 예무조(例貿條)에 옮겨 충당하였습니다. 이밖에 또 미삼(尾蔘) 25근이 있는데, 그 수량이 이미 95근에 이르렀으며, 간혹 별무삼(別貿蔘) 수십 근이 있는데, 모두 계산하면 전후로 납부하는 체삼(體蔘)과 미삼(尾蔘)의 수량이 1백 15근에 이르니, 그 역(役)이 어찌 번거롭고 또한 무겁지 않겠습니까? 수십 년 이후로 인삼이 점차로 더 심하게 귀해지고 봉납(捧納)하는 것은 더욱 많아져서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었는데, 지난해 가을에 이르러 캐내는 것이 더욱 적어졌습니다. 열 사람이 산에 들어가면 여덟 사람은 빈 손으로 돌아옵니다. 상납할 때에는 봉납에 응할 수 있는 수량이 태반이나 부족하므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북로(北路) 및 본도(本道) 중산(中山) 등의 고을에서 구매하고, 동쪽에서 수집하고 서쪽에서 찾아 간신히 채워서 납부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수량은 여전히 수십 근이나 되므로 거의 모두가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을 모릅니다.
신이 봄에 이런 뜻을 비국에 보고하고 또 호조에 공문을 왕복한 끝에 다행히 기한을 넉넉히 늘렸습니다만, 이는 바로 고식적(姑息的)인 계책입니다. 신이 캐낸 인삼이 옛날에 비해 감축되었다는 말을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 산에 들어간 자들의 말을 들으니, 햇수가 오래되어 몸통이 큰 것은 전혀 없고, 캔 것들은 모두 그 몸통이 작으며 가끔 송곳같거나 바늘 같은 것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실로 멸종의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오직 이 강계부는 관방(關防)의 중요함이 만부(灣府)112) 와 다름이 없는데, 지금 만약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 사방으로 가버린다면 십진(十鎭)의 파수(把守)도 장차 폐지되고 말 것이고, 사군(四郡)의 허술함도 그 또한 극도에 달할 것입니다. 변방의 일을 생각할 때 정말로 한심스럽습니다. 이번에 봉납한 것 중 이른바 호삼(戶蔘)은 즉 강계 백성의 대동의 역(役)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싫어서 회피하지는 않습니다만, 예무(例貿)의 체삼과 미삼 및 별무(別貿)하는 인삼에 있어서는 호조에서 지급하는 값이 근래의 가격에 비해 겨우 3분의 1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인삼 값의 폭등이 해마다 증가되고 있는데, 기묘년 이후에는 인삼 종자가 더욱 귀해져 올해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묘년에 3, 4냥하던 값이 지금은 무려 10여 냥에 이르고 있습니다. 만약 별무(別貿)할 때를 당하면 일호(一戶)가 납부할 각종 인삼을 값으로 따질 경우 거의 30냥에 가깝기 때문에 온 경내가 아우성을 치며 모두 짐을 꾸리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신이 본 경내에 들어가자 모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구중 궁궐에 깊숙이 계시니, 어떻게 이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아시겠습니까? 도신(道臣)과 수령들은 왜 이를 보고하여 성상이 불쌍히 여기는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러한 폐단을 감영에서 변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이제부터 떠나겠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안정시키에 급급하여 비유를 들어가며 위로하기를 ‘내가 이미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였으니, 어찌 조정에 보고하지 않겠는가? 잠시 동안 흩어지지 말고 각자가 보존하고 있으라.’는 뜻으로 간곡히 개유(開諭)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잠시라도 살았다가 우리 전하의 덕음(德音)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였는데, 그 정상(情狀)이 정말로 측은하였습니다. 신이 본부에 들어가서 사정을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지난해와 올해에 줄어든 민호(民戶)가 본부(本府)와 열진(列鎭)을 합하면 6백여 호나 되었습니다. 민호가 줄어들면 호구마다 봉납하는 인삼도 따라서 줄어드는 것이 장차 4, 5근에 이르게 됩니다. 만일 반드시 종전에 상납하는 수량을 채우려고 한다면 지극히 피폐하고 궁색한 호구에 대해 차차 등급을 올리게 되어 봉납하는 것이 반드시 배(倍)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신히 살아 남은 백성들이 도산(逃散)하는 것밖에는 다른 계책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어찌 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지금 신이 신의 영내로부터 시작하여 병사(兵使) 및 본부와 상의하여 전일(前日)에 약간 봉납했던 것도 알맞게 제감(除減)하였고, 열읍과 각진에서 사적으로 매매하는 폐단도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별것이 아니어서 한 잔의 물로 땔 나무의 불을 끄는 것과 같습니다. 삼가 백성들이 호소하는 것을 들어 보니 모두 말하기를, ‘내국에 봉진(封進)하는 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힘을 다해 마련하여 납부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호조와 경상사(京上司)에서 봉납하는 것은 그 수량이 적지 않은데다가 또 연례삼(年例蔘)을 첨가하고, 얼마 안되어 또 별무삼(別貿蔘)을 보태어 점차로 증가시키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만약 적당히 헤아려 수량을 감면 받게 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오직 다시 삼계(蔘契)를 만들어 이 폐단을 구제하고 싶습니다.’고 하므로 신이 ‘삼계를 다시 만드는 것은 어렵다. 호조에서 마련한 약간의 돈으로 어떻게 계를 할 사람을 모집하여 담당해 납부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호조와 경상사에서 봉납하는 것과 연례조·별무조 중에 미루어 재감(裁減)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만일 비록 3, 4근을 감하더라도 눈앞의 위로하는 방법은 될 것입니다. 연례삼과 별무삼은 비록 교린하는 데에 쓰이지만 별무삼은 해마다 들어가는 물건이 아니니 조정하여 변통하는 방법이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호조에서 봉납하는 11근은 비록 용처(用處)가 있으나, 만약 긴요하지 않은 수응(酬應)에서 조금씩 절약한다면 불시의 수요에 대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사정이 궁색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오직 헤아려 수량을 감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그 또한 측은합니다. 그리고 신이 들으니 예무삼 중에 25근의 값은 3냥을 지급하고 10근은 본래 예무삼으로 예무조에서 옮겨 채운 것이기 때문에 그 값은 전례에 의거해서 1냥 5전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비록 이것이 호삼(戶蔘)이지만 이미 예무삼에 충당되었으니, 3냥의 가격으로 일체 똑같이 지급하는 것은 사리상 당연한 것인데 반으로 깎아 지급하는 것은 실로 반박(斑駁)의 탄식이 있게 합니다. 지금 예무삼 조에 의거하여 3냥으로 값을 지급할 경우 백성들이 실로 골고루 혜택을 받을 것인데, 그 대금을 계산해 보면 2천 4백 냥이 됩니다. 이처럼 경비가 모자라는 때에 호조에서 지급하기란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신에게는 별도로 생각해 본 것이 있습니다.
신이 이번 행차에 들으니 강계부의 환곡(還穀)이 10여 만 석이 넘고 십진(十鎭)의 환자[還上] 역시 만여 석에 밑돌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강계의 백성이나 열진의 병사 할것없이 적정(糴政)에 시달리다가 이웃과 일가붙이에게 징수하므로 결국 흩어지는 데에 이르고 말았으니, 그 폐단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 대체로 이는 본부(本府)가 가장 변방에 있어서 많은 양의 환곡을 발매하는 일도 없고 다른 곳으로 옮길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매년마다 모곡(耗穀) 천여 석을 제하여 이 2천 4백의 수량을 사서 채우게 한다면 변방 백성에 있어서는 환곡이 불어나는 폐단을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이며, 삼호(蔘戶)에 있어서는 값이 불균(不均)하다는 탄식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일거 양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강계부는 본래부터 곡물이 천(賤)하니, 만약 호조의 1석(一石)당 3냥을 지급하는 관례로 행한다면 결코 시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부에서부터 그 부 내에 시행하는 규례에 따라 발매해야만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호조가 매년마다 본도의 수세미(收稅米)를 발매하여 인삼 값을 강계부로 보내고 또 호조로 운납(運納)해 온 남은 수량이 있을 것이니, 만약 그 남은 수량을 다시 삼값을 올려 주는 수량에다 충당한다면 일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고인이 말하기를 ‘작게 변통시키면 작게 도움이 되고 크게 변통시키면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신이 변통하고자 한 것은 위에 말씀드린 두 건의 일에 불과합니다. 하나는 그 원래 수량을 참작하여 알맞게 줄여 지급하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한 고을을 위로하는 방법이고, 하나는 부족한 수량을 헤아려서 약간 값을 더 올려 주는 것이니 이 역시 일시적으로 급한 것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조목조목 열거해 아룀으로써 재택(裁擇)하시는 데에 대비하였습니다.
이 외에 왜역배(倭譯輩)의 간폐(奸弊)도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당초 예무삼을 지정할 때에 원래 인삼의 품질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조(該曹)에서 헐값에 따라 관문(關文)을 발행하였기 때문에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납부한 대로 봉상(捧上)하였습니다. 대개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데에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왜역배가 체삼·미삼을 붙여 만들어 보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호조의 봉상도 또한 점퇴(點退)113)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전례를 거슬러 올라가 상고해 보면 본조(本曺)의 봉상시에 1근당 줄어든 양이 1, 2전(錢)에 불과하였는데, 근년에 들어서 점퇴와 줄어드는 폐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병술년 조로 논하건대, 점퇴한 삼이 10근이나 되었고, 줄어든 삼은 1근당 9전이 줄어들었으며, 정해년 조의 점퇴한 인삼은 5근이나 되었고 줄어든 삼은 1근당 역시 1냥이 넘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지난날 호조에서 직봉(直捧)할 때에는 이러한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왜역(倭譯)이 농간을 부린 뒤로부터 점퇴를 조종(操縱)하는 것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형편상 점퇴한 수량을 다시 나누어 백성들에게 징수해야 되게끔 되었습니다. 불쌍한 강계의 백성들이 장차 모두 죽게 되었으므로 대소의 민정(民情)이 모두 주원(籌員)114) 이 내려와서 가져가기를 원하는데, 그러면 조종하는 폐단이 조금 느슨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폐단을 끝내 제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조정에서 비록 진휼하여 구제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갖가지로 조절(操切)하여 중간에서 좀먹는 폐단의 해가 반드시 끝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이 상소를 비국에 하달하여 즉시 변통을 품지(稟旨)115) 케 하되, 수량을 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감하고, 값을 올려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올려 주소서. 그리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왜역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엄히 징계하여 변방의 생민으로 하여금 뿔뿔이 흩어지는 우환이 없게 하여 관방 중지(關防重地)가 텅 비는 탄식이 없게끔 하소서. 그러면 그지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백성을 위해 소를 올렸으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옛날 주나라 무왕이 여상(呂尙)116) 의 말을 듣고 차마 밤을 넘기지 못하고 특별히 사민(四民)을 돌보아 주라고 하였다. 아! 강계의 백성들이 구중 궁궐이 깊은 것을 탄식하다니, 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그 다음 날 상확(商確)하여 강정(講定)하게 하겠다. 아! 8근의 인삼과 천 석의 쌀은 넓은 바다 속에 한 좁쌀과 같다. 어찌 다소를 말하겠는가? 다만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또 우리 강계 백성은 내가 준 혜택이 아니라 옛날을 본받은 효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임금의 혜택이 아니라 이는 실로 옛날의 혜택이다고 한다면 내가 조금 선왕을 계술(繼述)하는 뜻을 펴겠으니, 강계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뜻을 잘 알도록 하라.’고 불러주고 쓰게 하다가 여기에 이르자 자리가 눈물로 젖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관동의 인삼은 상정(詳定)하고 경공(京貢)한 뒤에 효과가 있겠는가?"
하니, 좌승지 김귀주(金龜柱)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인삼이 몹시 귀하지만 상정한 값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공에 납부한 인삼의 수량이 전에 비해 3할이 감해졌으니, 그 효과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호조·의정부·종친부·중추부 등 여러 부(府)에서 받아들인 것을 알맞게 감한 것과 내국에서 감한 것 3근까지 합하면 8근이고, 또 천 석의 쌀로 값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리고 들으니 본도의 감영과 병영에서도 제감하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모두 계산하면 수만 금은 될 것 같으니, 강계의 백성들이 필시 소망에 지나쳤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비국의 회계(回啓)를 읽으라고 명한 다음 조금 마음에 든다고 말하였다.
심관(沈鑧)·홍낙순(洪樂純)을 승지로 삼았다.
4월 22일 기묘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제조 조명정(趙明鼎)의 체차(遞差)를 허락하고 이창수(李昌壽)로 대임케 하라고 명하였다.
4월 23일 경진
대사간 이섭원(李燮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감히 고인(古人)의 육잠(六箴)의 의의를 가지고 어리석은 신의 하루의 책임을 대략 본받고자 합니다. 첫째는 정사를 간소화하여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고, 둘째는 교육을 부지런히 하여 나라의 근본을 배양하는 것이고, 셋째는 요행히 진출하는 길을 억제하여 벼슬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청탁을 막아 풍속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전조(銓曹)를 신칙하여 치우치게 등용하는 것을 끊게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판조(版曹)117) 를 경계하여 번다한 경비를 줄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늙은 유생의 평상적인 말에 가깝지만 오늘날의 절실한 일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여섯 조목의 42자(字)118) 의 말은 간략하지만 지금의 폐단을 절실하게 지적하고 있으므로 나는 가상히 여긴다. 승정원으로 하여금 써 들이게 하여 자리의 곁에 두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내국 제조 이창수(李昌壽)를 파직하고 조운규(趙雲逵)로 대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창수(李昌壽)는 제수된 후로 처음 연석(筵席)에 나와서 누누이 사직하겠다고 하자, 승지가 추고하자고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는 도리어 꾸짖어 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여 이 명을 내린 것이다.
대사헌 정광한(鄭光漢)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호남 사람 황응직(黃應直)이 고(告)하기를,
"함열(咸悅)의 조명성(趙明誠)이 기문 감여(奇門堪輿)119) 의 설로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킨다고 하였고, 또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일컬은 말을 하였다."
하였다. 처음에는 포도청에서 구문(究問)하라고 명하였다가 이어 국청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내탕고(內帑庫)에 나아가 조명성(趙明誠)을 국문하였는데, 조명성이 공초하기를,
"저는 본래 퇴직한 하리로 신필주(申弼周)에게 잡술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신필주가 일찍이 역적 김일경을 일컬은 말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황응직이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을 쳐 신문하였다.
4월 24일 신사
임금이 내탕고에 나아가 죄인 신필주(申弼周)에게 곤장을 쳐 신문하고, 이어 조명성(趙明誠)과 대질시키라고 명하였다. 신필주가 말문이 막히자 연달아 엄히 문초하라고 명하였는데, 신 필주가 지레 죽고 말았다. 조명성과 황응직을 모두 귀양보내라고 명하고, 이어 어사 홍검(洪檢)에게 명하여 전주로 달려가 잡술을 절대 숭상하지 말라고 알림과 아울러 금하게 하였다. 대사헌 정광한(鄭光漢)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죄인 황응직을 귀양보내라는 명을 취소하고 바로 왕부(王府)120) 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사실을 캐낼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정언 홍경안(洪景顔)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한음(漢音)은 일체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따라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속음(俗音)으로 고쳐 간행하는 바람에 계속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본음으로 강습하게 하고 곁에다 속음을 기록하여 참고로 하게 하소서."
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속음으로 고쳐 간행한 것은 홍계희(洪啓禧)가 청하였기 때문인데, 지금 비록 속음으로 강습하더라도 정음(正音)을 참고하여 보게 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편리한 방법으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6일 계미
문학 민종렬(閔鍾烈)이 소를 올려 사직하고 여가를 얻어 독서하게끔 해달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나라에 8순을 바라보는 임금이 있으니, 이는 바로 그대가 어버이에게 다하지 못한 것을 나에게 다해야 될 때이다. 옛날 동생(董生)121) 이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자 산에 나무를 하고 물에서 고기를 잡으면서도 아침저녁으로 글을 읽었다. 이로 보건대 어떻게 독서할 시간을 청하겠는가? 더구나 이 임무는 어떤 임무인가? 만약 그대의 조부를 생각한다면 이미 입신(立身)한 뒤에 어떻게 이러한 뜻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비록 춘방(春坊)122) 에 입직할 때라도 쉬지 않고 독서하여 나의 세손을 도와 주도록 하라."
하였다.
유수(柳脩)를 승지로 삼았다.
4월 29일 병술
남태저(南泰著)를 대사헌으로, 이지승(李祉承)을 정언으로, 이미(李瀰)를 부제학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예조 판서로, 서명응(徐命膺)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윤시동(尹蓍東)을 외직에 임명하라고 한 명령을 특별히 취소하고 다시 부제학을 제수하였다. 이때 홍문록(弘文錄)123) 을 즉시 시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부제학 조엄(趙曮)을 법성 첨사(法聖僉使)에 보임하고 윤시동으로 대임시켰는데, 윤시동이 외지에 있다고 하자 안흥 첨사에 보임시키고 이미로 대임시겼다. 이미가 또 패초(牌招)를 어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김치인이, 윤시동이 외지에 있다고 아뢰자, 부제학 이미를 체차하고 다시 윤시동에게 전에 임명한 직책을 제수한 것이다.
4월 30일 정해
임금이 태묘 초하루 제사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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