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0권, 영조 44년 1768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1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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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무자

임금이 영릉(寧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나의 올해 마음으로 특별히 관록(館錄)을 하라고 명한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윤시동(尹蓍東)이 지난번 명을 받고도 막연히 망각하였다. 만약 오늘날 부제학에 임명할 자를 묻는다면 이 사람 말고 누구를 먼저 하겠는가? 그런데 하는 일이 적합하지 아니하니, 부제학 윤시동을 의금부에 회부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124)  를 행하여 권진(權禛) 한 명을 뽑았다.

 

부제학 윤시동(尹蓍東)을 특별히 참작하여 패초(牌招)한 다음 이어 관록(館錄)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5월 2일 기축

본관록(本館錄)을 시행하여 황최언(黃最彦) 등 32명을 뽑았다.

 

하교하기를,
"관록을 이미 시행하였다. 내 비록 노쇠했지만 나라의 기강은 지켜야 한다. 그런데 윤시동(尹蓍東)의 한 짓은 적합하지 않았으니 분수로 보아 한심스럽다. 비록 강행은 하였으나, 기강에는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그리고 관록이 끝나자마자 관례에 따라 사직 단자를 올렸는데, 어찌 이 사람이 이럴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윤시동을 사도 첨사(蛇渡僉使)에 제수하여 조정을 하직하고 배도 부임(倍道赴任)케 하라."
하였다. 그런데 이윽고 사도는 법성 첨사 조엄(趙曮)과 인근 지역이라고 하여 윤시동을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로 옮겼다.

 

대신과 이조 당상, 홍문관 제학을 입시하라고 명한 다음 도당록(都堂錄)125)  을 시행하여 황최언(黃最彦) 등 32명을 뽑았다.

 

하교하기를,
"이번 국가의 체통은 어쩔 수 없다고 할 만하다. 모년(暮年)에 국사를 위해 관록과 도당록을 하였으나, 어찌 임금과 신하가 있다고 하겠는가? 새벽에 하유하고 싶었으나 도당록의 명을 내렸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대신에게 하유하였는데도 유당(柳戇)이 제일 먼저 권점을 받았으니, 한심스럽다고 하겠다. 어찌 윤시동뿐이겠는가? 도당록에 참여된 여러 신하들도 일체 관직을 삭제 하는 법을 시행하여 국가의 체통을 조금이라도 존속케 하라."
하였다.

 

숭정전에 입직한 금군(禁軍)으로 동서교(東西郊)에 사는 자 각각 한 명을 불러 들이라고 명하여 농사의 상황을 하문하였다.

 

박취원(朴取源)을 부응교로, 김치공(金致恭)·이득신(李得臣)을 교리로, 민종렬(閔鍾烈)·홍낙신(洪樂信)을 부교리로, 김관주(金觀柱)·이세연(李世演)을 수찬으로, 이상악(李商岳)·김종수(金鍾秀)를 부수찬으로, 정항령(鄭恒齡)을 집의로, 서병덕(徐秉德)을 장령으로, 정범조(丁範祖)를 지평으로, 김문순(金文淳)을 겸 문학으로, 윤득양(尹得養)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특별히 김치공(金致恭)을 직강(直講)으로 제수하였는데, 즉시 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채제공(蔡濟恭)·유수(柳脩)를 승지로 삼고, 또 구윤옥(具允鈺)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講)하였다. 시독관 이득신(李得臣)이 말하기를,
"이 잠의 뜻은 모두 ‘성경(誠敬)’ 두 글자에 있는데, 임금의 일신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 홍낙신(洪樂信)이 말하기를,
"‘숙흥야매’ 네 글자는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합니다."
하고, 동부승지 이재간(李在簡)이 말하기를,
"‘사물에 순응하고 이미 끝나면 나는 전처럼 그대로이다.’라고 한 훈계는 임금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물에 대한 수응이 끝나면 나는 전처럼 그대로 이다.’라고 한 말은 간략하면서 뜻을 다 갖추었다고 하겠다. 권면하는 바가 절실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5월 3일 경인

함경도 남북관(南北關) 여러 고을에 환곡(還穀)이 부족한 곳에는 교제창(交濟倉)의 곡물을 적당히 가분(加分)하여 백성들의 굶주림을 구제하라고 명하였는데, 도신(道臣)이 상소를 올려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무신에게 능마아강(能麽兒講)을 시험 보였다.

 

5월 4일 신묘

임금이 태묘와 각능·전(陵殿)의 단오제(端午祭)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당하 문신에게 이문 제술(吏文製述)을 시험 보였다. 장원을 한 오준근(吳濬根)에게 반숙마(半熟馬)를 하사하였다.

 

5월 5일 임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조운 차원(漕運差員)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운철(李運喆)이 3년 동안 납부하면서 한번도 취재(臭載)126)  하지 않았다고 하여 승진하여 서용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5월 6일 계사

임금이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의 중삭제(仲朔祭)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하였다.

 

5월 7일 갑오

대사성에게 명하여 잠·명·송(箴銘頌)을 잘 외우는 유생을 데리고 입시하라고 하였다. 진사 송상은(宋相殷)이 십잠(十箴)을 외었는데, 대록비(大鹿皮) 1령(令)을 하사하였다.

 

5월 8일 을미

이인배(李仁培)를 대사간으로, 김약행(金若行)을 정언으로, 이경옥(李敬玉)을 필선으로, 홍구서(洪九瑞)를 문학으로, 박취원(朴取源)을 겸 보덕으로, 이담(李潭)을 부제학으로, 김선행(金善行)을 좌윤으로 삼았다.

 

부수찬 김종수(金鍾秀)가 소를 올려 사직하고 끝에 가서 관록을 할 때에 내린 전교를 환수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새로 영관(瀛館)에 올라 소견을 숨기지 않고 말하니, 임금을 보필하겠다는 정성을 볼 수 있다."
하고, 그때 윤시동(尹蓍東)에게 내린 하교를 특별히 지우도록 하였다.

 

동몽 교관에게 명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입시하라 하였다. 강(講)을 시험해 본 뒤에 차등 있게 지필묵(紙筆墨)을 하사하였다.

 

5월 9일 병신

임금이 헌릉(獻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패초(牌招)를 어긴 양사(兩司)에게 모두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5월 10일 정유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는데, 이날은 명(明)나라 태조(太祖)의 기신이었고 또한 우리 태종 대왕의 기신이었다. 유신(儒臣)을 명하여 《명사(明史)》를 읽도록 하고, 또 《태종조보감(太宗朝寶鑑)》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보감(寶鑑) 가운데 신하들로 하여금 잘잘못에 대해 직언(直言)토록 하고, 또 경연에서 간관(諫官)이 입시하여 일에 따라 바르게 간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한 대목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대간(臺諫)이 직언은 하지 않고 알력을 부리는 것을 일삼고 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차대(次對)에 양사가 같이 입시하는 것은 이 예를 모방한 것인데, 고지(故紙)를 베껴 전하는 것마저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관료끼리 서로 규계하는 말을 또한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 조선은 모두 이 뜻을 몸받도록 하라."
하였다. 길재(吉再)의 일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길재는 어진데 자손이 없다. 그의 서원(書院)은 있는가?"
하니, 도승지 구윤옥(具允鈺)이 대답하기를,
"선산(善山)에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집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책 한 권이 있는데, 그의 아들로 하여금 우리 조정에 벼슬하게 할 때에 ‘내가 고려를 섬겼던 마음으로 너의 임금을 섬기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고려 문하 주서(門下注書) 길재의 사적을 일찍이 《삼강행실(三綱行實)》에서 보았는데, 대종과는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를 하였으며, 두 차례 올린 상소에는 그의 마음이 우주에 뻗어 있었다. 두 성상께서 특별히 그의 요청을 허락하신 것과 그가 기풍을 세워 세속을 권면한 훌륭한 덕이야말로 몇 백 년의 뒤에도 모르는 사이에 존경심을 자아낸다. 어찌 고려 때의 충신만 되겠는가? 우리 헌릉 【태종.】 의 태학 옛 친구였다. 오늘날 이를 듣고 어찌 뜻을 표하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예관을 보내어 특별히 금오 서원(金烏書院)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제문(祭文)을 지어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등용하도록 하고 그의 문집도 들여오도록 하라."
하였다.

 

여러 유신을 명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입시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고황제(高皇帝)가 《대학연의》를 전랑(殿廊)에서 썼었는데, 내가 이날을 만났으니, 《대학(大學)》을 강론하여야겠다."
하고, 이어 친히 경 일장(經一章)을 외었다. 하교하기를,
"지금 《대학연의》를 강하면서 직접 본문을 외운 것은 옛날을 뒤따라 추모하는 뜻이다. 입시한 다섯 유신에게 모두 아마(兒馬) 한 필씩을 특별히 하사하라."
하였다.

 

내시 교관(內侍敎官)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내시 교관을 설치한 것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동몽 교관(童蒙敎官)은 말세에 와서 겉치레가 되어버렸는데, 근래에 신칙함으로써 그 효과가 있게 되었다. 더구나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시이겠는가? 옛날에는 내시 교관이 춘당(春塘)을 들어올 때에 이 무리들이 호위를 하고 간소한 찬으로 대접하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너무나 지나쳐서 열 명의 학도가 유건(儒巾)을 쓰고 대궐문에서부터 맞이하여 들이니 이들의 이름은 비록 내시(內侍)이지만 실은 난입(欄入)한 것이다. 한번 내시 기정일(奇精一)이 들어온 뒤로 이 폐단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엄히 금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생각해 보니 제사지낼 때 내시와 집사에게 패옥(佩玉)을 허락한 것으로 인해 제용감(濟用監)127)  의 제복(祭服)을 입지 않고 너무나 지나치게 패옥을 찼었다. 그때 하교하기를, ‘이 길이 한번 열리면 조복(朝服)을 입고 싶어하는 것은 사세상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금지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이 무리들은 요즘 들어 너무나 무지하여 신칙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달마다 세 번 강론하라고 하였던 뜻은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 시험해 보고자 먼저 교관을 부르고 다음 학도를 불렀는데, 청금(靑衿)도 아니고 동몽(童蒙)도 아니며, 일부러 승사(承史)를 갖추어 강(講)을 시험하는 것이 가까이 있는 자들을 엄히 하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내시부터 강을 시험보이고 난 다음 교관을 부른 것이니, 그 의도가 깊은 것이다. 그런데 비록 세 번을 강론하였으나, 그전처럼 무식하여 열 명의 학도 중에 한 명만 통(通)을 맞았다. 더구나 편리할 대로 하고자 대부분 경(經) 1장과 전(傳) 2장 정도로 하고 있으니, 이처럼 강독할 경우 매월 열 번을 강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내시 교관을 월봉 일등(越俸一等)하라."
하였다. 임금이 서울에 있는 대간과 지방에 있는 대간에 대해 하문하니, 도승지 구윤옥(具允鈺)이 대답하기를,
"정언 김약행(金若行) 만 서울에 있는데, 상소를 올리려고 승정원에 왔었습니다."
하니, 그 상소를 가지고 와서 읽으라고 명하였는데, ‘사공(司空) 이하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괴이하고 너무나 사정과 거리가 멀다."
하였다. 박세채(朴世采)의 일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심하다."
하고, 전교를 쓰라 명하고 이르기를,
"막중한 일을 그가 청하였으니, 불경(不敬)에 가깝다. 내가 비록 불초(不肖)하나 어찌 김약행이 청하기를 기다려서 하겠는가? 하나는 옛날에 시골 선비들에게 엄히 처분을 내린 것을 소급해 말하였고, 하나는 감히 신이진(愼爾晉)의 터무니없는 요청을 답습하였다. 한 번 붓을 들어 이처럼 열성조(列聖朝)들을 거론하였으니, 어찌 한심스러울 뿐이겠는가? 무엄하기 그지없다. 선정(先正)에 이르러서도 박 정승이라고 일컬었으니 말이 버릇이 없다. 그리고 기타의 말들도 이랬다 저랬다 하여 종이 가득히 황당하고 잡스러우니, 더더욱 말할 것이 있겠는가? 국시(國是)를 정하여 사특한 설을 배척하는 도리에 있어서 예사롭게 처리할 수 없다. 김약행을 특별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어서 전리(田里)로 돌려보냄으로써 내가 이러한 자들과 조정에 같이 있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1일 무술

임금이 자정전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약행(金若行)의 상소는 어떠하던가?"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너무나 황당하고 잡스러워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불효하고 불초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들은 것이다."
하고, 탕제를 들지 않겠다고 물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약행의 상소를 각사(各司)에서 베껴 갔는가? 그 상소 초본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가주서 이사렴(李師濂)이 상소 초본이 승정원에 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주서(注書)는 잡아다 추국하고 여러 승지는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김약행의 상소를 불태우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연석(筵席)에서 하교한 것으로 보면 대체로 사공(司空) 이하에게 제사를 지내자고 청하면서 천자의 예악(禮樂)을 사용하자고 하였고, 또 선정 박세채(朴世采)를 비방 배척하였을 것이다.
김치인(金致仁)이 왕세손이 어떤 책을 강할 것인지 여쭙자 《맹자(孟子)》를 거듭 강하라고 명하였다.

 

채제공(蔡濟恭)·김광국(金光國)·홍자(洪梓)·이중호(李重祜)·이수봉(李壽鳳)을 승지로 삼았다. 그리고 김약행(金若行)에게 설서(說書)128)  의 벼슬길을 열어준 전형의 관원에게 현고(現告)를 받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태학의 장의와 동서 반수(東西班首)를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약행(金若行)이 선정(先正)을 모함하여 욕하였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장의 김낙원(金樂元)이 말하기를,
"잘못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모함을 분변하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니, 김낙원이 말하기를,
"사론(士論)이 하나로 일치된 연후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감히 사론(士論)이라는 두 글자로 말한단 말인가? 매우 놀라운 말이다."
하니, 반수(班首) 남궁철(南宮澈)이 말하기를,
"지금 비로소 듣고 그지없이 놀랐습니다. 재(齋)에 있을 뜻이 없어졌습니다."
하자, 김낙원에게 1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고, 남궁철에게는 대록비(大鹿皮) 1령(令)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5월 12일 기해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2품 이상 관원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김약행(金若行)의 일에 대해 누누이 하교하고, 또 태학 유생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내가 내린 처분이 지나쳤는가? 숨김없이 아뢰도록 하라."
하니, 남궁철(南宮澈)이 대답하기를,
"광패(狂悖)한 김약행에게 내린 처분은 지당합니다. 누가 지나치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적간(摘奸)한 선전관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문하기를,
"김약행을 어느 곳에서 만났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제 오전에 한강을 건넜습니다."
하자, 김약행을 흑산도로 삼배도 압송(三倍道押送)하라고 명하였다.

 

홍명한(洪明漢)·이성원(李性源)·한필수(韓必壽)를 승지로 삼았다.

 

5월 13일 경자

달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5월 14일 신축

임금이 태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하였다. 임금이 몸을 굽히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엎드렸다. 효장묘(孝章廟)에 이르러 하향(下香)한 신하들이 압존(壓尊)129)  된다는 이유로 감히 엎드리지 못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비록 맞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태연히 서 있단 말인가?"
하고, 승사(承史)를 파직하고 당상과 시위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효장은 명칭과 지위가 이미 정해졌고 또 이 수은묘(垂恩廟)는 오늘날 신하들 중에 10년 동안 섬긴 자들이 많다. 의소(懿昭)가 누구의 아들이며, 누구의 손자인가? ‘무심(無心)’이라는 두 글자가 이러한 경우에는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병조 참의 안표(安杓)는 교만하다는 이유로 곤장 일곱 대를 치고, 특별히 조운규(趙雲逵)를 병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이조 판서 신회(申晦)는 효장묘(孝章廟)에, 사직 남태회(南泰會)는 수은묘(垂恩廟)에, 전 참판 이응협(李應協)은 의소묘(懿昭廟)에 보내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고, 제문을 지어 내렸다.

 

송영중(宋瑩中)·조중회(趙重晦)·정창성(鄭昌聖)·이재간(李在簡)·홍낙순(洪樂純)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자정전에 나아가 태학의 유생들에게 제술과 강경 시험을 보였다. 제술에 장원한 생원 남육(南堉)과 강경에 순통(純通)의 비교에서 합격한 최대항(崔大恒)·김상현(金尙顯)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부교리 민종렬(閔鍾烈)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초야의 신하들이 한 번 건의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해 동안 금고시켜 놓고 용서해 주고자 아니하시며, 어제(御製)의 가운데 본원을 끝까지 따져 선대 조정에서 예우하던 신하들에까지 소급(溯及)하면서 싫어하는 뜻을 현저히 보이시니, 신이 늘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배회하며 상심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지금 당적(黨籍)에 걸려들어 세상에 기휘(忌諱)된 자들은 또 모두 신의 조부가 사랑하고 허여했던 자들입니다. 굴신(屈伸)과 영욕(榮辱)을 의리상 그들과 달리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그의 상소를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민종렬은 고 대사헌 민우수(閔遇洙)의 손자이다.

 

5월 16일 계묘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다가 연화문(延和門)으로 나갔다. 왕세손이 궁관을 보내어 수행해 효장묘(孝章廟)를 참배하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인정이나 예절상 그러겠다고 하여 허락하였다. 궁으로 돌아올 때에 어가가 궁문을 나가니, 부제조 송영중이 말하기를,
"도제조가 삼령다(蔘苓茶)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약원의 세 제조를 모두 해임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전 병조 판서 이경호(李景祜), 전 유수 김선행(金善行)으로 대임시켰다.

 

어석정(魚錫定)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7일 갑진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어가를 수행하는 병사에게 활쏘기를 시험 보였다.

 

5월 18일 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지난번 선비들에게 시험 보일 때 탐욕을 징계하고 염치를 권장한다는 것으로 시제(試題)를 내셨습니다. 참으로 탐욕을 징계하려면 먼저 염치 있는 사람을 장려해야 되니, 양전(兩銓)을 신칙하여 특별히 수용하게끔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상을 주었다.

 

정존겸(鄭存謙)을 이조 참판으로, 이담(李潭)을 대사헌으로, 심관(沈鑧)을 대사간으로, 박필규(朴弼逵)를 응교로, 이양수(李養遂)·이겸빈(李謙彬)을 정언으로, 홍찬해(洪纘海)를 부교리로, 이경호(李景祜)를 예조 판서로, 조명정(趙明鼎)을 우참찬으로, 이심원(李心源)을 형조 참판으로, 이정철(李廷喆)을 좌윤으로 삼았다.

 

이응협(李應協)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9일 병오

각사(各司)에 오래 재임한 낭청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직장(職掌)에 대한 생각을 하문하였다. 하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위(衛)나라 문공(文公)을 일컬어 내빈(騋牝)이 3천 마리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아! 기강이 해이해졌으나 그 임금이 신칙하지 않아 생각이 깊고 성실함의 본보기가 없는 것이다. 제주도의 체임(遞任)되는 말(馬)로 말하더라도 이를 어렸을 적에 이미 보았는데, 지금은 복마(卜馬)와 다름이 없이 되었으니, 한심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외방은 비록 분양(分養)의 명목이 있으나 소나 양처럼 보고 있다. 지금 집수자(執瘐者)로 통해 들어 보건대, 몇 백 필이었던 말이 십 수도 차지 않는다고 하니, 형식적인 겉치레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시(該寺)에 신칙하여 구전(舊典)을 엄히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함흥(咸興)·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에 준 노비에게는 올해의 신공(身貢)을 감해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본도는 삼명일(三名日)의 물선(物膳)을 올해까지 받지 말고 삭선(朔膳)도 올해까지 반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제주는 삼명일 방물과 물선을 올해까지 받지 말고 감귤 이외의 삭선도 올해까지 반으로 줄이라고 명하였는데, 북로와 제주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 정미

승지를 입시하라고 명하여 친히 24일 건원릉의 기신제(忌辰祭) 제문을 지었다. 제보부(祭報府)를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는데,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을 헌관으로 차출해 주기를 청한 그 마음이 가상하다고 하여 특별히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고 이어 전설사(典設司)에서 재숙(齋宿)하겠다고 명을 내렸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의 사판(祠版)이 시골에서 강교(江郊)로 올라오는데 그의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몇 칸의 초가집 대금도 치르지 못한다.’고 아뢰니, 지조(地曹)130)  에서 집 값을 보조해 주라고 명한 다음 친히 제문을 지어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특별히 이명훈(李命勳)을 부교리에 제수하였는데, 이명훈은 해운군 연의 조카였다. 대사간 심관(沈鑧)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1일 무신

공시 당상(貢市堂上) 김시묵(金時默)과 김종정(金鍾正)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공시(貢市)의 백성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각각 폐막에 대해 하문하였다.

 

5월 22일 기유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삼동(三洞)의 노인에게 쌀을 하사하였다. 한인(漢人)의 자손과 나이 80이 된 자에게는 한 말[斗]을 가급(加給)하라고 명하였다. 하번(下番)의 한림에게 명하여 건국 초기에 누각을 건립하였던 터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하고, 하교하기를,
"덕수궁(德壽宮)은 지금의 시민당(時敏堂)이고 연희방(燕喜坊)은 지금의 흥덕동(興德洞)이다."
하였다.

 

김기대(金器大)를 승지로 삼았다.

 

형조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방면하였는데, 한창 가물었기 때문이다.

 

5월 23일 경술

임금이 건원릉 기신제에 쓸 향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소여(小輿)를 타고 총부(摠府)로 나아가 어첩(御牒)을 봉심하였다. 이때 비가 한창 내리고 있었는데, 임금이 길가에 한참 동안 엎드려 있다가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재숙하였다.

 

5월 24일 신해

건원릉 헌관 해운군 이연이 복명(復命)하자, 임금이 비로소 궁으로 돌아왔다.

 

5월 25일 임자

정언 이겸빈(李謙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상에 간행된 어제(御製)는 모두 이전(二典)131)  ·삼모(三謨)132)  ·은반(殷盤)133)  ·주고(周誥)134)  와 서로 안팎이 될 만합니다. 그러나 유독 제방(隄防)을 엄히 한 《유곤록(裕昆錄)》 일편에 대해서만은 어리석은 의견을 다 말씀드려 재택(裁擇)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도(世道)가 불행하여 유자(儒者)가 떠난 뒤로부터 사단(事端)이 첩첩히 생기고 바른 말을 건의하면 엄한 벌이 거듭 내렸습니다. 이렇게 점차로 확대되고 격동되다가 심지어는 여러 방책(方冊)에다 기록하고 금석에다 새기어 성명(姓名)을 두루 열거한 다음 죄상(罪狀)을 나열하였는데, 혹은 붕당(朋黨)의 근본이라고도 하고, 혹 난역(亂逆)의 부류라고 몰아부쳐 확고한 일부(一副)의 죄안을 삼아 놓고 이를 ‘제방’이라고 명명하여 전혀 깨뜨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신은 감히 구제하지 못하고 대각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처럼 소천(踈賤)한 것이 비록 주자(朱子)처럼 이치를 분석하고 자공(子貢)처럼 변론을 하더라도 어떻게 성상의 마음을 돌릴 가망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하의 성명(聖明)으로도 또한 감히 그들을 비호하지 않은 것으로 보시기를 바라기 어려우니, 이것이 바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청컨대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유곤록》에 대해 조목별로 변론하겠습니다.
어제(御製)에 ‘무신년135)  의 난을 감단한 것에 징계되지 않았으므로 또 소감(昭鑑)을 편수하였다.’고 하였고, 또 ‘지금 이 유시는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일대 기회이다.’라고 하고는 ‘스스로 도학(道學)을 하였다고 한 사람이 이렇게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맹수나 홍수보다도 더 심한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대체로 난을 감조한 것에 대한 서책은 단서(丹書)나 철권(鐵卷) 같은 것이고, 이 글의 사람들은 성조(聖朝)에서 일찍이 예우하던 자들인데 왜 갑자기 하루아침에 하나의 구투(舊套)로 몰아부치십니까? 이는 충신과 역적을 싸잡아 똑같이 취급하고 향풀과 악취 나는 풀을 한 그릇에 담아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한 건은 비록 한마디의 말로 나라를 망친다고 해도 신은 지나친 줄을 모르겠습니다. 또 ‘적불(赤芾)의 비난136)  을 받고 고심하며 진정시켰다.’고 하였는데, 아! 후인 사장(侯人四章)은 시인(詩人)이 이른바 그의 임금을 풍자한 말입니다. 지금 만약 이 장의 뜻으로 성명(聖明)의 시대에 비교할 경우 말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전하께서 예우한 신하와 초야에서 독서하는 선비들이 어떻게 감히 이러한 말을 하겠습니까? 이는 관작을 넓게 논할 때 그 장(章)을 따다 뜻만 취하여 사용하다가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 대충 보아야지 깊이 해석해서는 아니됩니다. 이 책은 비록 성상께서 고충을 겪으셔서 노여움이 한창 나실 때에 편찬되었으나, 신은 왕의 말씀이 한 번 전파되면 사방에서 외어 전하여, 의리가 어두어지고 일세가 휩쓸리어 초야의 선비로 하여금 서로 이끌고 멀리 떠나 깊숙이 입산하지 못한 것을 염려할까 두렵습니다. 또 동궁 저하께서 나이가 어리어 보고 듣는 데에 익숙해져 혹시 유자(儒者)를 경시하는 우려가 있을 두려우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가법(家法)을 잘 계술(繼述)하여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본의이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이 《유곤록》을 하루 유행(遊行)하게 놓아 두면 성덕에 하루의 누를 끼치고, 이틀 유행하게 놓아 두면 성덕에 이틀의 누를 끼칠 것이며, 백세에 전하면 백세의 비난 거리를 남길 것이라 여겨지니, 이것이 신이 매우 분개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아! 촛불을 가져다 조서(詔書)를 불태우고137)   묵칙(墨勅)을 봉해 도로 올리는 것은 옛날 대신의 일이므로 지금 사람에게 요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좌우에서 보필하는 신하들과 논사(論思)·이목(耳目)의 관원들 중에 전하를 위해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신은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임금을 사랑하는 일단의 마음이 적다고 봅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고 충신 홍임(洪霖)의 손자 홍경(洪儆)을 수용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지난번 향을 맞이할 때 승지와 시위가 묘소(廟所)의 향을 지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하라고 명하셨는데, 이는 한번 여쭈어서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묘소에 향을 전달하는 길이 판위(版位)의 왼쪽에 있으니, 승지와 시위가 서 있는 곳은 향을 전달하는 길의 뒤이므로 지영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 뒤로 비록 묘소의 향이 앞으로 지나갈 때 압존(壓尊)의 자리에 있더라도 반열로 돌아올 것이 아니라 서 있는 곳에서 그냥 몸만 구부리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어 그때 승지와 시위의 신하들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헌납 이수일(李秀逸)이 해가 높이 떠 패(牌)를 거둔 뒤에야 입시하였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유신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승지가 곧바로 먼저 나갔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대각의 상소를 보았는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대략 보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유곤록(裕昆錄)》에 대해 말한 자가 누구인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임관주(任觀周)였습니다. 신들이 늘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만, 두려워서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겸빈(李謙彬)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 개략적인 것을 들어보니, 선비들을 역적 가운데다 싸잡아 넣었다고 말하였는데, 신들도 일찍이 개연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들은 본디 선비들이 아닌가? 경들은 물러가라. 나는 결코 24자의 휘호는 받지 않겠다."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에 나아가 2품 이상의 관원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이겸빈(李謙彬)을 추자도(楸子島)에 천극(栫棘)138)  하되, 배도 압송(倍道押送)하고 지레 먼저 나간 유신은 사판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5월 26일 계축

약방에서 문안하였는데, 답하기를,
"고금에 물어보라. 조선에 임금이 있는지 신하가 있는지 말이다. 하루를 지내고 나면 김약행(金若行)이 있고 이틀을 지내고 나면 이겸빈(李謙彬)이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탕약을 복용한단 말인가? 문안을 그만 청하도록 하라."
하니, 약방에서 구두로 재차 아뢰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뵙기를 청하여 입시하였는데, 탕약을 들겠다고 허락하였다.

 

홍양한(洪良漢)을 승지로 삼았다.

 

5월 29일 병진

임금이 태묘 초하루 제사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북도에서 상정(詳定)한 것보다 더 거두어들이는 폐단을 엄히 주의시킬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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