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정사
약방에서 문안하였는데, 답하기를,
"옛날을 본받아 건명문에서 농사 형편을 물어 보아야겠는데, 이 역시 뜻을 표시한 것이다. 어제는 천담복(淺淡服)을 입었고 오늘은 평상복을 입었으니, 그 뜻이 어찌 깊지 않겠는가?"
하였다. 태조 대왕이 75세를 살았는데, 5월은 승하한 달이었다. 임금이 추모함을 그치지 않아 정월부터 장악(藏樂)하였고 5월에 또 천담복을 입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평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비답 가운데 언급한 것이다.
임금이 건명문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농민들을 불러 농사에 대해 하문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이렇게 고금에도 없는 해를 만났다. 아! 75세를 살다 보니 꿈속에서도 목이 메인다. 지난달이 지나가고 지금 이달을 만났으니, 이것이 어찌 효도이겠는가? 장악한 기한은 이달을 제외하고 6개월 밖에 안된다. 아! 오는 봄의 고취(鼓吹)를 어제서야 다시 듣게 되었다. 천담복으로 경건히 맞이하여 내가 기한을 끝마쳤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이달 초에 곤룡포를 입고 문에 나온 것은 뜻이 깊은 것이다."
하였다.
6월 2일 무오
약방에 내린 비답 가운데 8일 뒤에 입시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약방에서 구두로 네 차례나 아뢰자 비로소 환침(還寢)하였다.
6월 5일 신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내국 제조 이경호(李景祜)의 체직(遞職)을 허락하고 정홍순(鄭弘淳)으로 대임시켰다. 의금부와 형조에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송영중(宋瑩中)을 승지로 삼았다.
6월 6일 임술
정후겸(鄭厚謙)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 20세였다.
6월 7일 계해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명릉 기신제에 쓸 향을 직접 전하고 나서 창덕궁의 재전(齋殿)에 나아갔다.
6월 8일 갑자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서 예를 마치고 나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이어서 여경방(餘慶坊)에 두루 들리고 어가를 되돌릴 때에 중관(中官)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는데, 용호영(龍虎營)의 장교가 그 즉시 대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 조운규를 잡아들이라고 하여 해임시키고 특별히 이경호(李景祜)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숭정전에 나아가 금루관(禁漏官)이 신시(申時)를 너무 일찍 알렸다고 하여 관상감 제조 조운규(趙雲逵)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교리 이득신(李得臣) 등이 구대(求對)하니, 모두 해임하고 의금부에 회부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신은 여러 유신이 구대(求對)한 것은 체통을 얻었다고 봅니다."
하니, 그를 해임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송영중이 말하기를,
"영상의 말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변명한다는 이유로 체차(遞差)하라고 명하고 채제공(蔡濟恭)으로 대임시켰다. 채제공이 일찍이 대각의 탄핵을 입었다는 이유로 명을 따르지 않자, 특별히 삼수 부사(三水府使)에 보외하였다.
서지수(徐志修)를 영의정에, 김택양(金澤陽)을 좌의정에 제수하였다. 이때 승지의 자리가 비었는데, 임금이 묻기를,
"승지를 거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하니, 승지 정창성(鄭昌聖)이 말하기를,
"이휘중(李徽中)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한 사람의 이름만 들어 아뢰었으니, 경솔하다. 또 누가 있는가?"
하니, 승지 홍양한(洪良漢)이 말하기를,
"조태명(趙台命)입니다."
하자, 조태명을 승지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조태상(趙台祥)을 조태명(趙台命)으로 알고 있었다."
하고, 특별히 조태상을 발탁하여 병조 참지로 삼았다.
엄인(嚴璘)을 대사간으로, 이수훈(李壽勛)을 집의로, 한집(韓鏶)·이수일(李秀逸)을 장령으로, 이사조(李思祚)·김서구(金敍九)를 지평으로, 김용(金容)·박필순(朴弼淳)을 정언으로, 김문순(金文淳)을 교리로, 서유린(徐有隣)을 부교리로, 조재준(趙載俊)을 수찬으로, 김관주(金觀柱)·남현로(南玄老)를 부교리로, 서호수(徐浩修)를 보덕으로, 김종수(金鍾秀)를 필선으로, 이현영(李顯永)을 사서로, 정존겸(鄭存謙)을 동경연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예조 판서로, 김치인(金致仁)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6월 9일 을축
우의정 한익모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성상께서 격노하시어 지나친 처분을 내리셨습니다. 유신(儒臣)이 뵙기를 청하였다가 금추(禁推)를 받았고, 재신(宰臣)이 관장하는 군무(軍務)가 아닌데 잡아들였습니다. 수레를 멈추고 말을 듣는 것과 높은 궁궐의 계단은 땅과 멀다는 의의로 비추어 볼 때 그 누가 걱정하고 한탄하는 마음이 없겠으며, 그 누가 바로잡으려는 정성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신은 외반(外班)에서 먼저 물러가 한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영상만 견책을 받게 하였으니, 사적인 의리로 반성해 볼 때 황공하고도 부끄럽습니다."
하였는데,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김양택(金陽澤)도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김상철(金尙喆)을 내국 도제조로, 구윤옥(具允鈺)·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김상철(金尙喆)의 청을 허락하고 김양택(金陽澤)으로 대임시켰다.
6월 10일 병인
영의정 서지수(徐志修)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해시(該寺)의 제조를 군무가 아닌데도 잡아들였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전 영상이 연석(筵席)에서 말씀드린 것은 그의 직책상 할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노하시어 엄한 분부를 그 즉시 내려 영상의 중한 임무를 한 번에 체차하고 신(臣)처럼 보잘것없는 것으로 구차하게 대임시키셨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니 어떻게 물정(物情)을 수긍시키고 백성의 뜻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전지(前旨)를 회수하라 명령하심으로써 성상의 덕을 빛내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의 나라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으로 지금 어찌 망설이고 나아가지 아니하는가?"
하였다.
정언 김용(金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논사(論思)의 신하가 품고 있는 생각을 말씀드렸다가 죄가 그 일신에 더해졌고 동당(同堂)의 친척에게까지 미쳤으며, 이목의 관원이 일에 따라 진언(盡言)하자 귀양을 보내고 또 가장 가까운 일족(一族)에게까지 벌을 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끝내 추천한 전관(銓官)까지도 파직의 중한 벌을 당하였으며, 혹은 대각의 신하로 하여금 일에 대해 말하는 신하를 반박하기도 하였습니다. 저 전관(銓官)은 못난 부류들만 구하여 언로의 임무를 구차하게 채우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에서 대각을 설치한 뜻이겠습니까? 임금에게 비위를 거슬리는 말을 하면 지나치게 격노하시고, 당시 재상을 논핵하면 협잡으로 지목하여 작으면 내쫓고 크면 귀양을 보내고 있으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전년에 한 명의 간관(諫官)을 내쫓고 금년에 한 명의 어사를 내쫓는다.’고 한 말과 불행히도 비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높은 반열의 자리에 들어가면 지위와 명망이 저절로 다른 것인데, 이사관(李思觀)과 같이 속이 텅텅 빈 일개 비루한 사람이 호조의 장관으로 앉아 있으니, 신은 관작을 삭탈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변방의 중한 곳은 책임이 매우 긴요한데 이성묵(李性默)과 같은 어리석고 경력이 없는 것이 분수넘게 방어의 임무를 맡았으니, 신은 빨리 다시 차출해야 옳다고 여깁니다. 엊그제 이겸빈(李謙彬)이 올린 상소는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여 과실을 바로잡으려는 정성에서 나왔는데, 이는 이겸빈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온 세상의 공공한 논의입니다. 이겸빈이 감히 온 조정이 침묵만 지키고 있는 때에 말하였으니, 이는 권장해야지 죄를 주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런데 한마디 말씀을 올리자마자 갑자기 우레같은 위엄을 가하시어 허겁지겁 멀리 내쫓기어 사기가 상실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성상께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그리고 엊그제 영의정의 사직을 허락해 준 것은 구경(九經)의 〈대신을 공경히 대하는〉 의리에 위배되었으며, 중신(重臣)을 잡아들인 것에 있어서는 실로 예로 부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바라건대 기쁨이나 노여움이 발로될 때에 더욱 화평의 도리를 생각하시어 자주 되풀이하는 후회를 하지 마소서."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에 나아가 상참을 거행하고, 아울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소학(小學)》 제사(題辭)의 강(講)을 마치고 말하기를,
"김용(金容)이 무슨 일을 말하였는가?"
하니, 좌부승지 조덕성(趙德成)이 말하기를,
"호조 판서 이사관(李思觀)은 관직을 삭탈하고 이산 부사(理山府使) 이성묵(李性默)은 체차할 것을 청하고, 끝에 가서는 이겸빈(李謙彬)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논하는 말은 무어라고 하였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사관은 비루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이성묵(李性默)은 어리석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김용을 갑산부(甲山府)로 정배하되, 배도 압송(倍道押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신은 지금 세손 부(世孫傅) 임무로 강등되었습니다. 이미 마땅히 겸해야 할 좌상이 있으니, 신이 그냥 그 임무를 띠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다. 한익모가 또 말하기를,
"병조 판서의 상소는 성상께서 보시지 않았으니, 언로가 막힌 것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만, 지금에 있어서는 두 번째 가는 일입니다. 24자의 휘호는 위로는 자전(慈殿)의 분부를 받들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소원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마치 일시의 비망기(備忘記)를 환수한 것처럼 하였으니, 사체(事體)의 손상이 적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문신에게 전강(殿講)을 시행하였다. 사관(史官)을 판부사 김치인(金致仁)에게 보내어 유시를 전하고 함께 오라고 하였다.
6월 11일 정묘
승정원에서 계사(啓辭)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24자의 휘호의 선양은 만백성들의 똑같은 심정일 뿐만이 아니라, 사실 주위에 오르내리는 영령(英靈)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 위에 고하고 아래에 반포한 뒤인데, 어떻게 이것을 논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윤허를 내리시어 사람들의 심정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재계(再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교리 서호수(徐浩修)가 소를 올리고, 교리 신광집(申光緝)·수찬 조재준(趙載俊)도 차자를 올렸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김약행(金若行)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숭정 갑신년139) 의 뒤로는 천하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었고,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모두 우리 동방에 있으니, 청컨대 교체(郊禘)의 예140) 를 행하고 태묘에는 구헌(九獻)과 팔일(八佾)141) 의 의절을 행하소서. 그리고 인조(仁祖) 이하 오묘(五廟)에 휘호(徽號)를 소급해 올리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올린 올린 장주(章奏)를 보지 않고, 여러 신하들이 말한 일에 대해 임금이 승지에게 물으면 승지가 어떤 일을 논하였다고 대답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임금의 마음에 24자의 휘호를 보지 않고 싶어서였다. 전후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극력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승정원이 먼저 계사를 올린 것이었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입직한 금군에게 음식을 베풀었다. 내국 제조 정홍순(鄭弘淳)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도제조와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출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입직 금군에게 활쏘기를 시험보였다. 특별히 이사관을 내국 제조에 임명하였는데, 이사관(李思觀)이 새로 사람들의 논핵을 입었다고 하여 명을 따르지 않자 충청 수사로 보외하고, 한광회(韓光會)를 내국 제조에 임명하였다.
조태상(趙台祥)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2일 무진
판부사 김치인(金致仁)이 차자를 올려 견책할 것을 청하였는데, 온유한 비답을 내려 승지를 보내 전유하고 함께 오도록 하였다.
전 예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을 서용하여 다시 전임(前任)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승정원이 재계(再啓)하고 옥당(玉堂)의 상하번이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우리 성상(聖上)의 하늘로부터 타고난 지극한 행실은 오르내리는 영령께서 감동하시었으며, 세상의 모범이 되는 성공(聖功)은 신하들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드러난 휘호를 빛나게 응하여 이미 온 나라 인정을 따랐으며, 반드시 그 이름을 얻고야 말았으니 과연 큰 덕에 들어맞았다는 것을 징험하였습니다. 설령 한때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신하들의 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갑자기 스스로 박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어찌 위대한 성인(聖人)께서 막힘없이 사물에 응하는 도리에 손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고 관계된 바가 막대(莫大)하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앞서 내린 명을 취소하시어 성덕(聖德)을 빛내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빈청은 나가고 승지를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비답하기를,
"덕과 능력이 없는 내가 외람되게 어려운 업을 이어받은 지 지금 이미 40여 년이 되었으므로 아침부터 밤까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 올해는 어떤 해인가? 이것이 어찌 꿈에도 상상했던 일인가? 국초(國初)의 〈무자년〉 이 해를 더듬어 생각해 보건대, 가슴이 내려앉을 것만 같은데, 더구나 한 해를 더한 것이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꿈속에서도 울먹인다. 한 해 동안 장악(藏樂)하였지만 어떻게 마음을 펼 수 있겠으며, 추모하느라 한 달 동안 천담복을 입었으나, 또한 어떻게 조그만 정성이나마 펼 수 있겠는가? 전달 기신일을 보냈으니 이것만도 불초한 것이고, 그 달이 지나가자마자 또 이 달을 만나 역시 차마 기신일을 보내고 말았으니, 이 역시 불효이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한결같이 모질단 말인가? 두 달 안에 이처럼 마음이 내려앉았다. 아! 문답에 이미 유시하였거니와 세상에 어찌 길이길이 감회를 가진 자가 없겠는가마는, 어찌 나와 같은 자야 있겠는가? 《시경(詩經)》에 ‘나를 낳고 나를 길렀다.’고 하였는데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25세 동안 무사(無事)한 세계에서 살다가 그해 늦봄에 이 마음이 이미 차거워져 버렸었다. 그 이듬해 경자년142) 에 담제(禫祭)의 달이 지나가자마자 선왕을 따라가지 못하였는데, 이로부터 이미 오갈데 없는 외로운 사람이 되어 버렸다. 비록 그렇지만 우리 자성(慈聖)과 황형(皇兄)을 모시고 있었으므로 그래도 의지할 수 있었다. 아! 임인년에 겨우 삼년상이 끝나자 그 이듬해 갑진년143) 에 황형을 잃었는데, 따라가지 못하였다. 또 의릉(懿陵)144) 의 삼년상을 보내고 3년이 지난 경술년145) 에 황수(皇嫂)께서 승하하시었으므로 외로운 내가 의지할 곳이라곤 오직 자성(慈聖)뿐이었다. 아! 정축년146) 늦봄에 약을 잘 쓰지 못하여 영모당(永慕堂)에서 또 자전(慈殿)을 작별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외로운 자가 없겠는가마는, 나와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 나의 막내 아우는 어디에서 이 말을 들을 것인가? 이러한데도 40년 동안 모질게 살아 나이가 75세가 되었는데, ‘오(五)’라는 한 글자는 내 올해 꿈속에서도 놀라곤 하였다.
건국 초기의 을해년과 갑술년을 말하지 말라. 아! 나 같은 불초(不肖)가 어떻게 감히 부합되겠는가? 을유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신축년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연갑(年甲) 또한 을해와 갑술과 같은데, 옛날 기축년을 생각하면 더욱더 가슴이 내려앉는다. 아! 비록 이러한 가운데 한 가지 일이라도 계술하고 만에 하나라도 몸받았다 하더라도 이 마음을 억누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일도 계술하지 못하였고 만에 하나도 몸받지 못하였으므로 24자의 휘호에 대해 40년 동안 밤낮으로 두려워하였다. 이 해와 이 달을 만나니 이 마음이 배나 되는데, 어찌 해괴한 김약행(金若行)으로 인해 이 일을 하겠는가? 그렇지만 이 일에 대해 불초한 내가 저절로 두려움을 느끼나 이미 말씀을 받았으니,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다만 지금 이 뜻은 단지 내 마음이 이렇게 해야만 자식의 도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지 말라고 명하지 않고 이렇게만 한 것은 구차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한 조각 마음이 이렇게 해야만 조그만 정성이나마 조금 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들과 이에 대해 조용히 개진한데 불과할 뿐인데, 지금의 행동 거지를 보건대 중외에서 청문하고 어찌하여 내 마음을 모르는 자는 무식한 백성들과 필시 ‘우리 임금이 도리어 이러하다.’고 할 것이다. 나는 과장하지 않는데 경들은 왜 이렇게도 과장하는가? 금년 이 달은 비록 조용하더라도 요양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이번 24자의 휘호는 경들이 오늘 비로소 청하였는데, 내가 지나치게 사양하였는가? 이 때문에 내가 나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진 것이다.
아! 옛날 공자께서 ‘네 가지를 하지 못한다147) .’고 한 것은 곧 성인이 스스로 겸손해서 한 말로서, 나는 성인이 스스로 성인인 체하지 않았다고 말하겠으나, 공자가 이른바 ‘네 가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성인이 결코 스스로 겸손해서 한 말이 아니라고 본다. 성인도 그러한데, 더구나 나이겠는가? 옛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성(聖)’ 자 하나를 거절하였는데, 이로 본다면 그때 여러 신하들의 상소 가운데 필시 군상(君上)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것도 뜻을 받들어 따랐으니, 이것이 바로 공자가 이른바 ‘그 아름다운 것은 받들어 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경들이 나에게 소망하는 것이 어찌 한(漢)·당(唐)의 임금에게 있겠는가? 그런데 동한(東漢)의 신하들이 한 일을 경들이 왜 하지 않는단 말인가? 또 성(聖) 자를 거절한 것과는 크게 다르고, 또 이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한 말은 그 의도가 있는 것이다. 만약 쓰지 말라고 명령할 경우 경들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경들에게 있어선 너무나 지나치고, 나에게 있어선 너무나 괴로운 것이다. 지나치는 것은 견디어 낼 수 있으나, 괴로움은 어떻게 견디어 내겠는가? 올해와 이달을 만났으니, 나는 이렇게 해야만 만배나 되는 추모의 마음을 조금 펼 수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건공탕(建功湯)을 복용한다고 수응한 것 이 역시 불초이고 이 역시 불초이다. 그 즉석에서 크게 깨달아 건공탕을 과감히 거절하였으나, 나의 마음을 모르는 자는 이를 위해 거절하였다고 할 것이다만 이는 나의 마음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억지로 받았다 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어찌 한갓 오늘의 뜻이 되겠는가? 특별히 승선(承宣)을 불러 내 마음을 시원하게 유시하니, 앞으로는 그 답이 ‘이미 유시하였다.[已諭]’는 두 글자에 불과할 것이다. 비록 열흘간 빈계(賓啓)하고 백 일간 정청(庭請)한다 해도 나의 뜻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국사는 흩어지고 나의 마음은 뜬구름과 같으니, 이것이 무슨 빈계(賓啓)할 것이며, 이것이 무슨 정청(庭請)할 것이겠는가? 보는 사람만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체통에 크게 손상될 것이다. 내 이미 모두 유시하였는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청하지 말라. 청하지 말라."
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누누이 번갈아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창의(李昌誼)를 호조 판서로, 이복원(李福源)을 대사간으로, 강윤(姜潤)을 사간으로, 홍윤(洪錀)을 헌납으로, 노성중(盧聖中)·이득화(李得華)를 정언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집의로, 서유린(徐有隣)을 부교리로, 조종현(趙宗鉉)을 수찬으로, 심이지(沈履之)를 부수찬으로, 신광리(申光履)를 필선으로, 민홍렬(閔弘烈)을 겸 필선으로, 김종수(金鍾秀)를 겸 사서로, 이득종(李得宗)을 형조 참판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6월 13일 기사
유성이 하고성(河鼓星)의 밑에서 나와 남쪽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았으며 꼬리는 3, 4척쯤 되었고 색깔은 붉었다.
대사간 이복원(李福源)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인의 덕이 하늘처럼 존엄하고 땅처럼 광대하여 비록 바람·우레·서리·눈이 그 사이에 번갈아 왔다갔다 하지만 본체(本體)는 응고되어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만일 사물이 지나간 뒤에도 마음에 남거나 사물이 중하고 나[我]는 가벼울 경우 존엄한 체(體)는 퇴색되고 광대한 의(義)는 희미해질 것입니다. 아! 우리 전하께서는 학문이 고명하고 널리 사서를 보셨거니와, 어찌 일찍이 성스럽고 밝은 임금이 위에 계시면서 오늘날 성상께서 하신 것처럼 한마디 말에 노하여 모든 건의를 물리치거나 한 명의 신하에게 죄를 주면서 간신(諫臣)까지 거절하는 것이 오늘과 같이 하였습니까? 그리고 마치 하늘에 해가 떠 있듯이 드높이 이름이 드날려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 보고 백세에 질정(質正)할 수 있는데, 말하는 자의 득실이 우리 성상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대뜸 격노하시어 가볍게 스스로를 경박하게 여긴단 말입니까? 이는 겸손에는 맞지 않고 위엄에 손상만 되는 것이니, 언로가 막히고 아랫사람이 울적한 것은 그 외의 일입니다. 임금의 말이 한 번 나오면 나라의 체통이 크게 손상되니, 아마도 사방에 보이고 후손에게 남길 법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대신(大臣)과 근신(近臣)이 온종일 호소하여도 성상께서는 갈수록 못 들은 체하시므로 대소 신료들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임금을 잘못이 없게 인도하는 것은 간신(諫臣)의 직책인데, 지금 전하께서는 지나치신 것입니다. 신들이 이미 그 직책에 있으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특별히 여러 신하들의 청을 윤허하고 빨리 전교(前敎)를 취소함으로써 천지 같은 덕을 더욱 넓히고 영구히 화평한 복을 맞이하소서. 그러면 국사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승정원 계사와 비국의 차자에도 모두 비답이 없었다. 지돈령 이익정(李益炡), 지사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이날 시임 대신, 원임 대신과 2품 이상 관원이 또 빈청에 일제히 모여 초안을 작성해 놓고 미처 아뢰지 못하였는데 시간이 조금 늦어지자, 하교하기를,
"할려면 하고 하지 않으려면 하지 말 것이지, 2품 이상이 모여서 해가 높이 뜨도록 아무 소식이 없단 말인가? 8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런 일은 처음 보는데,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승정원은 이를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엄한 전교를 연달아 내리고 아울러 여섯 승지와 유신(儒臣)·대신(臺臣)을 체차한 다음 남소 위장(南所衛將)을 가승지(假承旨)로 차출하였는데, 대신(大臣) 이하가 황공하여 물러나 명을 기다렸다. 임금이 보련(步輦)을 타고 창의궁(彰義宮)으로 거둥하자, 시위들이 모두 도보로 따라갔다. 대신(大臣) 이하를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니, 조정이 텅텅 비어버렸다. 석양 무렵에 유수(柳脩)를 승지로 제수하였다. 이때 궁문을 열지 않았는데, 유수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대신(大臣)을 그대로 유임시키라고 명하였다.
홍명한(洪明漢)·이성원(李性源)·한필수(韓必壽)·김광국(金光國)·홍낙인(洪樂仁)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4일 경오
영의정 서지수(徐志修)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미 하교하였는데, 이처럼 소를 올린단 말인가? 영상 서지수를 중도 부처(中道付處)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서지수는 한심스럽지만 내국이 이러한 것은 그 또한 옳은 일인가? 아! 그의 임금이 건공탕(建功湯)을 마시지 않은 지 며칠인데, 이것이 어찌 할 일인가? 좌상 김양택(金陽澤)의 정승 직과 내국의 일체를 면부(勉副)하라. 지금은 신하가 없는 때라고 하겠다."
하였다. 영부사 윤동도(尹東度), 판부사 김치인(金致仁)·김상철(金尙喆)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어가를 돌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상신(相臣)이기는 하나, 내가 어찌 답하겠는가?"
하고, 판부사 김치인을 다시 영의정에 제수하고 호조 판서 이창의(李昌誼)를 우의정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치인과 우의정 이창의 등이 궁문에 나아가 청대(請對)하고 왕세손이 궁관(宮官)을 보내 환궁할 것을 청하였다. 또 궁관을 보내 잠시 나아가 문안을 드리겠다고 청하니, 답하기를,
"볼 때가 있을 것이니, 그만두라."
하였다. 약방에서 구두로 재차 아뢰었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임금이 일한재(日閑齋)에 나아가 시임 대신, 원임 대신 2품 이상과 승지·옥당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가 환궁을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이경호(李景祜)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시지만 바야흐로 뜨거운 태양이 땅을 태울 정도이니, 삼군(三軍)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궁으로 돌아가겠다."
하고, 이어 탕약을 들었다. 우승지 한필수(韓必壽)가 말하기를,
"김약행(金若行)의 상소는 다른 단서가 없습니다. 숭정 갑신년 이후로 중국에 임금이 없었으니, ‘오묘(五廟)에 휘호(徽號)를 올리라.’고 한 것은 존호를 올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뜻은 명나라의 대통(大統)이 끊어진 뒤로 우리 나라만 예악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자연히 돌아올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지(天地)에 제사지낼 때 제호(帝號)를 썼으면 한다는 것은 그의 말이 허탄하고 망령되므로 꾸짖을 것조차도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한가? 김약행의 뜻이 과연 그러하다면 내가 왜 24자의 휘호를 보지 않을 것이 있겠는가? 이제부터 들어가서 상소를 보겠다."
하였다. 한필수가 안팎에 시원스럽게 보일 것을 청하니,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그 전교에 이르기를
"이번 일은 김약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심(苦心)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승선(承宣)이 아뢴 말을 들어보니, 크게 깨달은 것 같다. 이미 승선에게 유시하였으니 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개의하겠는가? 대소 신료는 모두 나의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옥당의 신하에게 육아편(蓼莪篇)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2장을 외우고 나서 여러 신하들에게 돌아가며 읽으라고 명한 다음 환궁하였다.
어석정(魚錫定)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5일 신미
영의정 김치인과 좌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신이 전 영상과 똑같이 죄를 지었는데 벌은 다르게 받았습니다."
하고, 모두 성 밖으로 나가 차자를 올렸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영상과 좌상이 들어올 경우 비록 밤이 깊더라도 차대(次對)를 하겠다."
하였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과 우부승지 홍낙인(洪樂仁)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정실(鄭宲), 충청 감사 이유수(李惟秀), 경기 감사 남태제(南泰齊), 교동 수사(喬桐水使) 이인강(李仁康), 황해 병사 이방수(李邦綏), 경상 좌수사 전득우(田得雨), 충청 수사 이언희(李彦熙), 남병사(南兵使) 김범로(金範魯)를 추고(推考)하소서."
하였다. 이는 수령과 변장(邊將)이 한 사람도 하등[下考]을 맞은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모두 윤허하였다.
6월 16일 임신
특별히 한필수(韓必壽)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영상과 좌상이 명에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연달아 엄한 하교를 내렸다. 약방에서 재차 아뢰어 탕약을 드실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승지와 옥당이 청대(請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와 원임 대신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특별히 조운규(趙雲逵)를 호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6월 17일 계유
도정(都政)을 거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신회(申晦), 참판 김종정(金鍾正), 참의 이해중(李海重), 도승지 이담(李潭), 병조 판서 이경호(李景祜), 참판 남태저(南泰著), 참의 이의로(李宜老), 참지 조태상(趙台祥), 좌부승지 홍낙인(洪樂仁)이 나아갔다. 이경호·이담을 동경연으로, 정존겸(鄭存謙)을 홍문관 제학으로, 정홍순(鄭弘淳)을 동성균(同成均)으로, 김기대(金器大)를 동돈녕(同敦寧)으로, 남태저를 병조 참판으로, 권진(權禛)을 설서로, 김종정(金鍾正)을 부제학으로, 유한소(兪漢蕭)를 대사헌으로, 강유(姜游)를 정언으로, 김치공(金致恭)을 집의로, 정환유(鄭煥猷)를 헌납으로,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烜)을 동지사은 정사로, 구윤옥(具允鈺)을 부사로, 이영중(李永中)을 서장관으로, 정후겸(鄭厚謙)을 호조 참의로, 이산두(李山斗)·남태회(南泰會)를 지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의 체차를 허락해 주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이창의(李昌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잘못된 은혜를 내리심이 마침 거처를 옮기시어 하룻밤을 보내시어 온 나라가 경황이 없을 때였으니, 염치없이 사은 숙배하려고 바쁘게 대궐로 나왔으나, 거취가 전도되고 체모가 손상되었습니다. 고어(古語)에 ‘임금의 직책은 오직 정승을 논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정승이 어진가의 여부에 따라 치화(治化)의 성쇠와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중의 찬성도 거치지 않은 채 스스로 단안을 내려 불초한 신에게 맡기셨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거듭해서 생각해 보아도 명을 받들 만한 길이 없습니다.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과실을 초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명을 어긴 죄를 받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에게 새로 제수한 의정(議政)의 직명을 즉시 환수하시고 다시 훌륭한 덕이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서 국가의 체통을 중히 하고 신의 분수를 편안히 지킬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이 나라를 위하는 충심과 일을 두루 잘 처리하는 것에 대해 마음에 항상 탄복하였다. 구저(舊邸) 때 사람을 특별히 제수한 것은 내 뜻이 깊다. 이왕 명을 따랐으니 마음을 가라앉혀 사양하지 말고 내일 차대할 때 같이 입시하여 노년에 소자가 권고(眷顧)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담(李潭)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8일 갑술
이날은 혜빈궁(惠嬪宮)의 탄일(誕日)이었으므로 승정원과 옥당이 뜰에서 문안을 드렸다.
정실(鄭宲)을 이조 판서로, 한광회(韓光會)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도정(都政)에서 새로 제수한 수령과 변장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웅천 현감(熊川縣監) 박하윤(朴河潤), 단성 현감(丹城縣監) 심원지(沈元之)는 3년 동안 금고(禁錮)하고, 진동 만호(鎭東萬戶) 김홍운(金弘運)은 도태하라고 명하였는데, 주대(奏對)를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이비(吏批)148) 는 10월 과(窠)에 아울러 썼고 병비(兵批)는 박한 자리를 가지고 훈국에 차임하여 오랫동안 일을 보게 하였다고 하여, 전 이조 판서 신회(申晦)와 전 병조 판서 이경호(李景祜)를 모두 중하게 추고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이 친진(親盡)하여 조묘(祧廟)149) 송상현(宋象賢)의 예에 따라 특별히 부조(不祧)를 허락할 것을 청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훈신(勳臣)은 조묘하지 않으나 충신은 이러한 예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조정에서 충신을 포상하는 도리는 조묘나 부조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적장손(嫡長孫)을 등용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이 아뢴 뜻은 충신을 포상하는 데에 있는데, 영상의 아뢴 바를 듣고 보니 나의 뜻도 그러하다. 그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을 특별히 등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법성 첨사(法聖僉使) 조엄(趙曮)과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 윤시동(尹蓍東)을 모두 내직에 의망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아뢰었기 때문이다. 한익모가 또 평안 감사 정실(鄭宲)을 그대로 유임시킬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대사간 한필수(韓必壽)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중용(中庸)’ 두 자를 가지고 품고 있는 바를 진달하였는데, 정문 일침(頂門一針)이라고 비답하였다. 집의 김치공(金致恭)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지금 제주 목사가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백성들이 사는 상황을 눈으로 보는 것 같다. 청한 것 중 절미(折米) 2천 석은 나리포(羅里舖)에 유치해 둔 것을 그 지방 배로 착실히 수송해 주되 비국으로 하여금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실어간 뒤에 보고하게끔 하라."
하였다.
6월 19일 을해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소를 올려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유시를 전하고 함께 오도록 하였다. 병조 판서 한광회(韓光會)와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6월 20일 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이창의가 철따라 생활을 신중히 하여 정력을 기르고 마음을 편안히 가져 중화(中和)를 이룩하며, 몸으로 가르치는 것을 신중히 하여 덕을 양성하고 명검(名檢)을 돈독히 하여 선비의 추향을 바르게 하며, 책임을 높이어 여러 업적이 성취되게 할 것을 아뢰었는데, 가납(嘉納)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삼수 부사(三水府使)에 외보하는 것을 취소하라고 명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아뢰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융무당에 나아가 중일(中日)150) 의 활쏘기를 시험보인 다음 상을 주었다.
정홍순(鄭弘淳)을 이조 판서로, 신회(申晦)를 예조 판서로, 이경호(李景祜)를 판윤으로, 민백흥(閔百興)을 좌윤으로, 조엄(趙曮)을 동경연으로 삼았다.
공조 참의 심이지(沈履之)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진맥(眞麥)과 가옥에 관한 두 건은 미천한 신하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국법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빨리 본도(本道)에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고 또한 경조(京兆)로 하여금 다시 적간(摘奸)하게 함으로써 말하는 자의 뜻에 납득이 가게 하고, 범한 자는 죄를 징계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맥의 일은 지금 그대를 비난하고 있으나, 일을 맡은 자의 폐단이 없지 않으니, 그대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가옥을 지은 일은 말하는 자의 처지가 높아서 이목을 일신(一新)한다고 하지 말라. 이 글은 내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듣지 못하였다. 이것이 알력을 부린 것도 아니고 들뜬 소문도 아니고 보면 그대가 비록 자세히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이것이나 저것에서 나는 이미 살피고 있다."
하였다.
6월 21일 정축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옥당의 상하번에게 명하여 《소학지남(小學指南)》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임금이 삿갓을 쓰고 일어나 앉아, 친히 서제(書題)를 외우고, 또 동생행(董生行)과 도잠(陶潛)의 계자서(戒子書)를 외었다. 그리고 어제 독서록(御製讀書錄) 한 권을 인쇄해서 들여보내라고 명하였다. 도제조 김치인(金致仁)의 체차를 허락하고, 이창의(李昌誼)로 대임시키라고 명하였다.
6월 23일 기묘
하교하기를,
"옛날의 임금으로 66세에 친영(親迎)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공묵합(恭默閤)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글로 써서 보인 뜻으로 특별히 효소전(孝昭殿)에 고하도록 하라. 이는 종국(宗國)을 위한 것이다. 기억하건대 옛날 임오년151) 부터 경자년152) 까지는 아! 19년인데, 그때도 전(殿)에 고하였었다. 〈정순 왕후를 맞이하여〉 건도(乾道)를 행한 지 10년을 지금 내가 지났으니, 이는 진실로 천만 뜻밖이었다. 지금 집경당(集慶堂)에서 화락차담(和樂且湛)의 글153) 만 외고 있다. 아침 햇살이 창에 비추는데, 의릉(懿陵)154) 에도 또한 비치는가? 오늘은 또한 무슨 날인가? 곧 기묘년155) 에 통명전(通明殿)에서 알현을 받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하례를 받았던 날이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과연 기억하고 있는가?"
하였다.
송문재(宋文載)를 대사간으로, 홍검(洪檢)을 집의로, 이택수(李澤遂)를 지평으로, 심관지(沈觀之)를 헌납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6월 25일 신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삼가 어제 비망기를 보니, 성상께서 이미 뭇 사람들의 마음을 통촉하셨습니다. 기묘년 이후로 지금 몇 년이 되었습니까만 한 가지 일도 정성을 펴지 못하였으니, 신들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66세에 가례(嘉禮)한 일이 어찌 옛날에 있었겠는가? 지금 이미 10년이 되었는데, 또한 복악(復樂)하는 것이 어찌 나의 마음이겠는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는 정말 희귀한 일이기에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복악(復樂)을 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건원릉(建元陵) 제문에 ‘1년 동안 장악(藏樂)한다.’는 말이 있으니, 지금 고치기는 어렵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일찍이 태묘(太廟)에도 고친다고 고유(告由)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왜 이를 가지고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갑술생(甲戌生)이기 때문에 마음에 이러한 것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태조와 일갑(一甲) 사이이기 때문에 이처럼 추모하십니다마는 또한 지나쳐도 아니됩니다."
하였다. 한익모가 말하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갑인년에 태어나고 광무제(光武帝)는 을묘년에 태어났어도 이처럼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 중에 혹 의종 황제(毅宗皇帝)와 동갑(同甲)인 사람이 있는데, 갑신년을 만나도 감읍(感泣)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찌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직접 동생행(董生行)과 부모기순의호장(父母其順矣乎章)156) 을 외우고, 하교하기를,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말라. 먼저 복악(復樂)을 청하는 것을 바로 조기(祖己)가 말한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157) .’는 뜻이니, 경들이 올해에 청한 것이 옳다. 그러므로 마땅히 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예를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마는, 나는 마땅히 권정(權停)하겠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전(殿)에 나오지 않으신다면 신하들의 마음에 섭섭할 것입니다."
하고, 이어 극력 복악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며느리를 데려온 집은 3일 동안 거악(擧樂)하지 않는 것은 사친(嗣親)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가례(嘉禮)를 치른 뒤 10년 만에 경사를 치룬다고 하면서 도리어 장악(張樂)한단 말인가? 경들의 이 청은 독서한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한익모가 말하기를,
"신들이 독서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청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글을 잘못 읽었다."
하고, 이어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그저께 하교한 것은 전혀 생각 밖의 일이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이러한 청이 있게 된 것이다. 아! 66세에 혼례를 치른 임금이 옛날의 역사에 있었는가? 이미 효소전(孝昭殿)에 아뢰었고, 연(輦)을 모시고 종묘에 나아갈 때에도 아뢰었었다. 이미 자성(慈聖)께 아뢰었으니, 반드시 태실(太室)에도 아뢰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10년의 돌을 만났는데, 어찌 위에 고하고 아래에 포고하는 의식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효소전에 아뢰는 것이겠는가? 이 마음으로 재작년과 작년 두 해를 생각해 보건대, 나의 마음에 비록 기쁘고 위로되는 것이 갑절이나 더하지만, 자식은 어버이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이 누가 내려 준 것인가? 그 뜻이 또한 깊다. 어떻게 신료들의 두려워하고 아끼는 뜻에 부응할 수 있겠는가?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등의 의절을 거행하도록 하라. 아! 이것이 어찌 나를 위한 것이겠는가? 의도는 우러러 고하는 데에 있으니, 그 명칭을 반사(頒赦)라고 하라.
헌가(軒架)158) 의 절차는 지금 거론할 것이 없으니, 이에 의거하여 행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우러러 몸받는 도리를 펴고 한편으로는 추모의 뜻을 펴도록 하라. 이는 위에 고하고 아래에 포고하는 것에 불과하니, 전문(箋文)159) 만 봉하도록 하고 서울이나 지방의 방물과 물선은 일체 올리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세손은 백관을 거느리고 예를 거행하되 관례에 따라 거행하고, 종묘에 고하는 것도 초하루 삭제(朔祭) 때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부사 서지수(徐志修)가 소를 올려 벌을 내려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6월 26일 임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옛날을 우러러 생각건대, 전(殿)에 나갔었던가? 거악(擧樂)하였던가? 즉 이 두 가지 일은 국초(國初)를 추모하는 것이니, 나는 한 번의 일로 두 아름다운 일이 되었다고 여긴다. 아! 올해의 이 일은 나에게 과분한데, 이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곧 우러러 사례하는 것이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과장되게 하면 그것이 어찌 효도이겠는가? 옛날 도잠(陶潛)이 줄이 없는 거문고를 가지고 놀았다. 도잠도 그러한데, 하물며 나이겠는가? 한 전정(殿庭)에서 조복을 입고 예를 거행하는데, 어찌 줄이 없는 거문고를 가지고 노는 것에다 비할 수 있겠는가? 충자(冲子)가 예를 행하는 것도 과장된다. 예조 판서를 불러 크고 작은 것들을 다시 청하도록 하라. 아! 옛날 내가 살았던 집이 지척에 있구나."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는데,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그들이 모두 힘써 전(殿)에 나올 것과 복악(復樂)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동궁이 하례를 드리게 할 것인가를 여쭙자,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정부 육조에서 물선을 예에 따라 봉진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6월 27일 계미
영부사 윤동도(尹東度),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판부사 김양택(金陽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 판부사 김상철(金尙喆), 우의정 이창의(李昌誼) 등이 연달아 차자를 올려 악(樂)을 쓸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렸는데, 비답의 말이 수백 마디나 되었다.
유신이 입시하였다. 승지를 명하여 경자년 일기를 상고한 다음 반사(頒赦)를 반교(頒敎)로 고쳤다가 대신들이 힘써 청함으로 인해 다시 반사로 고쳤다. 예문관 제학 조명정(趙明鼎)이 지어 올린 교문(敎文)을 읽으라고 명한 다음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예라고 하지만 옥백(玉帛)을 말하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셨는데, 문(文)은 말단적인 일이고 바탕은 근본인 것이다. 지금 교문을 보니 오늘날 신하로서 지어 올린 교문이니만큼 사세상 정말로 이렇게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의 예에 의하여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고 대략만 존속해 두어야 하니, 지금 지어서 내린 것으로 거행하라."
하였다.
이중호(李重祜)를 발탁하여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28일 갑신
하교하기를,
"오늘 처음 비가 내렸다가 곧바로 그쳤는데, 그 이유를 헤아려 보니 나 때문이었다. 나 때문이었다. 이러한데 어떻게 흠뻑 젖는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경자년의 전례를 지금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옛날에는 한 마리의 청둥오리도 애긍하게 여기셨고, 술편(述編)에도 ‘한 마리 물고기나 한 주먹의 채소는 마땅히 바치는 것이므로 받기는 하나, 60마리의 꿩과 생선은 어찌 공연(公然)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다. 태양이 다시 비치니 매우 민망스러운 마음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물선은 그저께 하교한 대로 올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직접 나가 선비들을 시험보일 것이니, 9월에 날을 가려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들이 전(殿)에 나갈 것과 악(樂)을 사용할 것을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29일 을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판부사 서지수(徐志修),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같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비로소 전(殿)에 나가기를 허락하고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예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대신이 조복(朝服)을 사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패옥(佩玉)의 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왼쪽에는 치각(徵角)의 소리가 나고 오른쪽에는 궁우(宮羽)의 소리가 난데다가 조복의 차림으로 예를 거행하면 음악을 즐기는 것에 비근한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소리가 율(律)이 되고 몸이 법도가 되는 것입니다. 설령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이런 일을 당하더라도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원임 대신의 말이 옳다."
하고, 조복의 차림으로 예를 거행하겠다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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