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병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다. 반사(頒赦)하였는데, 그 사유문(赦宥文)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금년은 어느 해인가? 지난달은 어느 달인가? 경자년160) ·갑진년161) ·경술년162) ·정축년163) 을 우러러 생각하며 4기(四紀)164) 동안을 임어(臨御)하였고, 내 나이 75세가 된 것을 생각해 보면, 진실로 이는 대단히 뜻밖이다. 만약 옛일을 물으면 한(漢)나라에는 갑인년165) ·을묘년166) 이 있었고, 또 지금을 물으면 우리 나라에는 을해년167) ·갑술년168) 이다. 한 해를 장악(藏樂)한 것은 추모(追慕)에 불과한데, 어찌 작은 정성을 펴겠는가? 한 달 동안 담복(淡服)을 입는 것은 또한 의문(儀文)이나, 이것이 어찌 효(孝)이겠는가? 지난달이 비록 지나갔을지라도 내 마음은 새로운 것 같다. 이미 의(義)에서 일어났으니, 또 어찌 옛 법이 있겠는가? 이때 이 예(禮)는 즐거워한 것도 억지로 한 것도 아니었다.
아! 기묘년169) 에 효소전(孝昭殿)에 아뢰었으니, 이는 진실로 자성(慈聖)의 뜻을 우러러 체득함이다. 단지 순의(順矣)의 글만 외고 기뻐하시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또한 전(殿)에 아룀이 있었으나 그 뒤 이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뜻밖인데, 이제 10년에 이르렀으니 어찌 꿈엔들 생각하였겠는가?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집지(執贄)170) 하여 건곤(乾坤)171) 이 다시 원만하니, 늙은 나이에 종국(宗國)의 의지하는 바가 됨은 오로지 적의(翟衣)172) 를 다시 보는 데 있다. 곤의(壼儀)173) 가 궁중에서 협찬(叶贊)하고 충자(冲子)174) 가 색동옷을 입고 앞에서 모시니, 이는 종사(宗社)의 경사이며 만백성의 행복이다. 비록 이러할 즈음에도 갑절로 감회가 일어난다. 감회가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임오년175) ·신묘년176) 의 일이다. 오히려 기이한 것은 옛 곤돈(困敦)177) 이 바로 10년 안에 있었는데, 지금의 곤돈이 또 10년 가운데 있으니, 일에 따라 감회가 일어난다. 해[歲]를 외면서 우러러 사모하니, 이것이 어찌 내가 하는 것이겠는가? 이는 선령(先靈)의 도움을 입은 것이다. 이미 내리심을 받았으니, 어찌 우러러 사례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미 우러러 사례하려고자 하면서 어찌 이 해를 넘기겠는가? 그리고 이 가운데에도 깊은 뜻이 있다. 내가 거절함으로써 여러 신하가 한갓 억울함을 품은 지 이제 15년에 이르렀는데, 한결같이 고집하면 신료의 정례(情禮)와 의문(儀文)을 장차 어느 날에 펴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오직 우러러 사례함을 펼 것이다.
종고(鍾鼓)를 장악원(藏樂院)에 간직해 두고 옛날을 멀리 생각하니, 차마 숭정전에 올라가 앉지 못하겠다. 다만 여기서 거행하여 이 정성을 조금 펴려고 한다. 전궐(殿闕)은 일반인데 정례(情禮)에 모자람이 없다. 이에 금년 맹추(孟秋) 초길일(初吉日)의 새벽에 먼저 종묘 사직에 고하고, 그날 아침에 대정에서 중외(中外)에 포고하여 장차 한 구역 안에 다스림을 같이하려고 하니, 어찌 절목(節目)을 아끼겠는가? 이미 하늘에서 내리는 경사를 받았으니, 백성과 경사로움을 함께함이 마땅하다. 백관(百官)의 가자(加資)와 중외의 사전(赦典)은 구례(舊例)에 의하여 거행하고 대가(代加)178) 도 모두 행할 것이다. 아! 이것이 어찌 하기를 즐거워함이겠는가? 우러러 옛날을 생각함이다. 패택(霈澤)179) 을 나라 가운데에 동일하게 내리어, 풍년이 팔도에 들기를 깊이 빈다. 이를 유시(諭示)하니, 모름지기 모두 자세히 알지어다."
하였으니, 임금이 지은 것이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유수(柳脩)에게 가자하도록 명하고, 선전관(宣箋官) 박지원(朴志源)에게는 숙마(熟馬)를 하사하였으며, 입시(入侍)한 승지에게는 호피(虎皮)를, 춘방 관원(春坊官員)에게는 녹비(鹿皮)를 하사하였고, 치사관(致詞官) 김동람(金東覽)을 승륙(陞六)하게 했다.
하교하기를,
"이미 전(殿)에 임하여 예(禮)를 행하였는데, 만일 태묘(太廟)에 배례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과연 효(孝)이겠는가? 가을 전알(展謁)을 마땅히 15일에 행할 것이니, 의조(儀曹)180) 에 분부하라."
하였다.
명하여 전정(殿庭)에 시위(侍衛)한 금군(禁軍)·호위 군관(護衛軍官)·유청군(有廳軍)은 내일 총부(摠府)와 병조(兵曹)로 하여금 중일제(中日製)의 규례에 의하여 시사(試射)하게 하였다.
홍양한(洪良漢)을 대사간으로, 이병정(李秉鼎)을 지평으로, 윤양후(尹養厚)를 사서로, 홍낙성(洪樂性)을 지춘추로 삼았다.
옥당 상하번(玉堂上下番)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맹자(孟子)》의 오릉 중자장(於陵仲子章)181) 을 읽고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거위[鴉]를 먹고 토하였으니, 청렴하다."
하니, 부교리 서유린(徐有隣)이 말하기를,
"형(兄)을 피하고 어머니를 떠났으니 인륜(人倫)에 어긋남이 있기 때문에 성문(聖門)182) 에서 이를 비난하였습니다."
하고, 수찬 조재준(趙載俊)은 말하기를,
"온 세상이 그의 청렴한 지조(志操)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맹자가 세도(世道)를 위하여 근심한 것입니다."
하였다. 금오(金吾)183) 와 추조(秋曹)184) 에 명하여 도년(徒年)185) 이하의 죄를 지은 자는 먼저 풀어주도록 하였다.
7월 2일 정해
임금이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서 승지를 보내어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였다.
이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진소(陳疏)하여 체임(遞任)하기를 빌었는데,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정홍순이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했는데도 전직(銓職)을 제수하였기 때문이었다. 병조 참판 이중호(李重祜)가 진소하여 새로 제수한 직질(職秩)을 거두기를 청하니,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판부사 서지수(徐志修)가 이미 하반(賀班)에 참여하였으나, ‘죄가 있는데 아직도 감죄(勘罪)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성(城)에 나가서 진차(陳箚)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사관(史官)과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7월 3일 무자
비가 내릴 때까지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산(傘)을 버리고 걸어서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갔다가 돌아와서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부복(俯伏)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만약 비가 내리기를 기한하면 이는 고필(固必)에 가까우니, 마땅히 오각(午刻)까지만 기한하겠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대내(大內)로 돌아가기를 힘써 청하였다. 이때 비가 약간 내려서 용포(龍袍)가 모두 젖었는데, 도승지 유수(柳脩)가 말하기를,
"성체(聖體)가 이처럼 젖었으니, 신은 이 비가 내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의 말이 괴이하다."
하고, 곧 걸어서 자정문(資政門)에 나아가니 마침내 비가 한 식경 크게 내렸다. 김치인과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기우제를 미처 행하지 않았는데 비가 내렸다고 하여 상선(常膳)의 회복을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재협(李在協)·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이제 호남 도신(湖南道臣)의 장문(狀聞)을 보건대, 2천 석의 쌀을 다섯 척의 배에 실어서 운반해 들여보냈다고 하니, 그것이 도착해 정박(碇泊)했다는 것을 들은 뒤에야 옥식(玉食)을 대하여 숟가락을 내릴 수 있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장문하도록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탐라(眈羅)에 곡식을 운송하라는 성명(成命)이 이미 있었으므로 도신이 장문한 것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함경 감사(咸鏡監司) 심수(沈鏽)의 장계(狀啓)에 ‘회령부(會寧府)의 금년 개시(開市) 때에 우마료(牛馬料)가 거의 천여 석에 가까운데, 본부(本府)의 귀보리[耳麥]가 이미 다하여 추이(推移)할 수 없습니다.’ 한 것으로 인하여 상진청(常賑廳) 소관의 귀보리를 무산(茂山)·종성(鍾城)에 각각 4백 석씩 나눠주어 수용(需用)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영종(永宗)·경기(京畿)·해서(海西)의 수조(水操)186) 를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대신(大臣)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7월 4일 기축
해 밑에 이(履)187) 가 있고 유성(流星)이 사보성(四輔星) 아래에 나타나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고 꼬리 길이가 서너 자 가량이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기우제(祈雨祭) 헌관(獻官) 이하 여러 집사(執事)에게 각각 시상(施賞)하도록 명하였다. 이날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금오(金吾)와 추조(秋曹) 당상관(堂上官)에게 입시(入侍)를 명하여 친히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상묵(金尙默)이 상소하여 이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을 논하자 임금이 모함한다고 하여 그를 죄주었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이번 소결할 때를 당하여 경사를 같이 하는 은전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우러러 아뢰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부교리 서유린(徐有隣)이 말하기를,
"전에 없었던 나라의 경사에 혜택이 널리 미쳐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려 파면하여 서인(庶人)을 만들어 호서(湖西)로 내쫓았다. 이겸빈(李謙彬)의 출륙(出陸)을 명함에 이르러서는 문득 묻기를,
"이겸빈이 말한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유곤록(裕昆錄)》의 일입니다."
하자, 그대로 두도록 명하고 조돈(趙暾)·이흥종(李興宗)·강지환(姜趾煥)을 석방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창의(李昌誼)의 사임을 허락하고 서지수(徐志修)로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7월 5일 경인
임금이 태묘 추향(太廟秋享)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때 비가 퍼붓는 것과 같이 내렸는데, 산(傘)을 버리고 향을 따라 흥화문 동협(興化門東夾)에 걸어 나가서 승지에게 명하여 태묘(太廟)를 봉심(奉審)하게 하고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승지가 복명(復命)하기를 기다렸다가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추조(秋曹) 삼당(三堂)188) 에게 명하여 본조(本曹)에 직숙(直宿)하면서 옥수 문안(獄囚文案)을 자세히 상고하여 경중(輕重)을 나누어 헌주(獻奏)하게 하였다.
임금이 제문(祭文)을 지어서 보사제(報謝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청한 것이었다.
7월 6일 신묘
경상도 유생 성형(成泂) 등이 상소하여 중묘조(中廟朝)의 교리 정붕(鄭鵬)에게 증직(贈職)과 역명(易名)189) 의 은전을 내릴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일이 오래 되었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황해도 유생 양응중(梁應重)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은 초야(草野)에 엎드려서 뒤늦게 들었는데, 김약행(金若行)이 흉소(凶疏)를 올려서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무욕(誣辱)함이 더할 수 없다고 하니, 신 등의 분함이 격동하여 마음이 싸늘하고 뼈가 떨립니다. 서로 이끌어 발을 싸매고 와서 같은 소리로 성토(聲討)하게 되었는데, 비록 때늦은 한탄이 있습니다만 가만히 신포(申暴)하는 의(義)를 붙였으니, 삼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살피소서.
선정신 문순공은 도학(道學)의 순정(醇正)함과 사공(事功)의 높고 우뚝함이 살아서는 한 세대의 사표(師表)가 되고 죽어서는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아니함을 성상께서 이미 밝게 아셨었고 나라 사람이 모두 공송(公頌)하였으니, 어리석고 무지한 신 등과 같은 사람이 거듭 말하는 것을 기다릴 것이 없었는데, 뜻밖에 모독하는 말이 장주(章奏)에 오르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아! 통분(痛憤)합니다. 말에 이르기를, ‘사람을 살필 때는 반드시 그 윤(倫)190) 으로 한다.’고 하니 선정(先正)의 언어(言語)와 행사(行事)가 방책(方冊)에 밝게 실려 있어서 사람의 귀와 눈에 밝게 비치는데, 어찌 일찍이 조금이라도 그들이 말하는 바 ‘소변(蘇卞)의 유(類)’에 영향(影響)을 미치겠습니까?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만약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가깝지 않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이에 사사로운 꾀를 이룩하기에 급하여 시작과 끝이 없고 순서와 조리가 없는 단서를 갑자기 일으켜서 거짓으로 말을 만들어 선정(先正)의 칭호를 마음대로 버리면서 ‘아! 저 박상(朴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로 3백 년 동안 듣지 못한 일입니다. 진실로 그 근원을 살피면 황극(皇極)을 도운 한 가지 일에 불만을 품고서 감히 선정(先正)을 해독(害毒)하는 주둥이를 놀리는 것입니다. 그도 우리 성상의 40년 동안의 교화를 받은 한 미물(微物)인데, 감히 ‘진실로 전하의 황극(皇極)의 도(道)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선정(先正)을 무함하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황극(皇極)의 대도(大道)’를 비난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귀매(鬼魅)의 정상(情狀)이 하늘의 태양 밑에서 도망할 수 없으므로 처분이 엄정(嚴正)하고 국법이 용서하지 아니하였으니, 신 등이 먼 외방에서 듣고는 백 번 절하고 공경히 외면서 대성인(大聖人)의 하시는 일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심이 있음을 우러러보며, 방벽(放闢)191) 의 공이 추성(鄒聖)192) 의 밑에 있지 않으니, 무릇 보고 들음에 있어서 누가 흠탄(欽歎)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김약행(金若行)의 무리와 더불어 우리 성상께서 토죄(討罪)하신 뒤에 입을 더럽히면서 다투어 변명하지만, 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선정(先正)은 세상에 드문 영특(英特)한 자질(資質)로서 그 자신이 사우(師友)의 중임(重任)을 맡았는데, 나면서 불행한 때를 만나 붕당(朋黨)의 나누어짐을 눈으로 보고는 후일에 세상의 화(禍)의 시초가 될 것을 밝게 알고 문을 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차 ‘머리를 풀어헤친 채 갓끈을 매고서 불에 타는 사람을 구제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과 같이 하여 그 위를 힘쓰게 하고 아래를 꾸짖어 지극한 정성으로 보합(保合)하는 뜻은 귀신이 증명할 만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함은 거울처럼 밝고 저울처럼 공평하여 홀로 소광(昭曠)의 경지에 서서 조금도 사사로움에 치우치는 것이 없었으니, 그 이치를 보는 밝음과 일을 생각하는 먼 식견은 천고(千古)에 높이 뛰어났는데, 세상 운수에 관계되어 비록 당시에는 그 효과를 보지 못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또한 그 마음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하거나 그 말이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서 거의 모두가 믿기를 시귀(蓍龜)193) 처럼 하고 우러러보기를 태산(泰山)·북두(北斗)와 같이 하였으니, 지금 제가(諸家)에서 간행한 유고(遺稿)와 문경공(文敬公) 박필주(朴弼周)가 지은 선정신(先正臣)의 묘표(墓表)를 한번 보면 밝게 알 것인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세급(世級)이 한번 떨어지자 노성(老成)의 논의는 점점 멀어져 황구(黃口)194) 가 덕행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풍속이 없고 청금(靑衿)195) 이 선현(先賢)을 본받는 버릇이 희박하여, 선정신의 도덕과 사공(事功)에는 완전히 어둡고 여러 유언(儒彦)196) 을 흠복(欽服)·추장(推奬)할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망령스럽게 서로 더욱 의혹하고 점점 괴격(乖激)하여 조제(調劑)197) 하는 시론(時論)에 유감을 가지고 대공(大公)의 법문(法門)에 의심을 두었습니다. 심지어 행동이 이미 추하고 패려(悖戾)하여 사류(士類)에게 버림을 당한 김약행과 같은 자는 방자한 뜻으로 침해하고 꾸짖으며 반성하여 삼가는 것이 없어서 반드시 모호하고 뒤섞인 말로써 더하니, 어찌하여 그릇되고 어긋남이 여기까지 이르렀습니까? 억지로 제목(題目)을 만들어 말할 것을 은밀히 약정하여 마땅한지의 여부는 계교하지 않고 오직 더럽게 욕하는 것만 주로 삼으니, 아! 어진이를 모욕하고 바른 사람을 해독(害毒)하는 것을 그는 어찌 즐거이 하고 있습니까? 인정(人情)으로 헤아려보더라도 반드시 이런 이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선정(先正)이 이미 성상을 아침저녁으로 만나시는 은혜를 입어 송(宋)나라가 이미 행한 법을 모방하고 넓은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의식(儀式)을 거행하여, 거의 인심이 안정되고 선비의 추향(趨向)이 일치되었었는데, 일종(一種)의 꺼리고 해치는 무리가 이에 감히 선정에게 노(怒)함을 옮겨서 시기하고 헐뜯으매 빌붙은 무리가 많게 되었으니, 식자(識者)의 한심스러워함이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김약행이 더럽게 욕하는 것은 진실로 사론(邪論)에 의탁하여 공을 세워 출세를 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그의 계획적인 마음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현관(賢關)198) 에 이르러서는 많은 선비가 장수(藏修)하는 곳이며 청재(淸裁)를 주장하는 곳이니,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마땅히 멸렬(滅裂)에 이르지 않아야 할 것인데, 종사(從祀)하는 선정(先正)이 근거없이 무함을 당하였은즉, 한 번 신포(伸暴)하는 것이 일의 체면에 당연한데도 여러 달을 엿들었으나 아직 들은 것이 없으니, 성상이 배양(培養)하신 공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풍습이 괴려(乖戾)한 날에 김약행 한 사람의 말은 진실로 그 사이에서 경중(輕重)할 것이 못되나, 화(禍)를 즐거워하고 일을 좋아하는 무리가 얼굴을 숨기고 혀를 번득이며 연달아 일어날 것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또 장차 몇 명의 김약행이 다시 어떤 모양의 말을 만들어 낼지 걱정입니다. 우리 전하를 일찍이 시험하였으나 또 어떤 격돌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를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늠연(凛然)하여 마음을 놀라게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신 등이 피눈물을 머금고서 흉금을 터놓고 글을 드러내어 우러러 구혼(九閽)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굽어 밝게 살피심을 내려 더욱 성상의 결단을 발휘하시어 망령되고 해괴한 무리로 하여금 다시는 함부로 날뜀을 일삼지 못하게 하여, 치우치고 거짓된 말을 영구히 막고 부리를 끊어서 사문(斯文)199) 을 붙들고 세도(世道)를 편안하게 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말세(末世)에 초야(草野)에서 헌근(獻芹)200) 하는 글을 듣지 못하여 마음으로 애석함이 간절하더니, 너희들이 선정(先正)의 무고(誣告)를 분별하기 위하여 도보로 먼 길을 와서 고요히 조섭(調攝)하는 가운데 글을 올리니, 그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요즈음 비록 공도(公道)는 듣지 못하여 침침한 긴 밤과 같을지라도 이미 성무(聖廡)201) 에 종향(從享)하여 조두 석채(俎豆釋菜)202) 하고 있으니, 지금 성균관에서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은 자 가운데 누가 감히 이의(異議)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해괴한 상소가 이미 올라오자 처분이 엄정하였으니, 어찌 날을 넘기지 않았을 뿐이겠는가? 때를 넘기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이와 같이 한 뒤에 성균관의 많은 선비가 어찌 필두(筆頭)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 무고를 분별하는 너희들은 초야(草野)에 있으면서 단지 풍전(風傳)만 듣고 허둥지둥 이 거사(擧事)를 하였으니, 그 형세가 진실로 그러하다. 도깨비[魍魎]의 말을 어찌 다시 제기할 것이 있겠는가? 김약행은 지금 흑산도(黑山島)의 한 도깨비가 되었으니, 비록 귀신이 되고 물여우가 되려고 할지라도 그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그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이제 비답(批答)에 환하게 유시하노니, 너희들이 만약 선정(先正)을 위한다면 더욱 마음을 닦고 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7월 7일 임진
해 위에 관(冠)203) 이 있었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칠석제(七夕製)를 행하여 서울과 시골에서 각각 한 사람을 뽑아 생원(生員) 홍이건(洪履健)과 진사(進士) 신우상(申禹相)을 모두 전시 직부(殿試直赴)하도록 명하였다.
7월 8일 계사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출신(出身)한 절충(折衝) 전필욱(全弼郁)은 그 어미를 구타하여 온 몸에 성한 살이 없으니, 청컨대 의금부(義禁府)에 옮겨서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들으니, 몹시 해괴하고 참혹하다. 세상에 어찌 이같은 사람이 있는가? 이것은 삼성(三省)204) 에 관계되는 것이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곧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엄인(嚴璘)을 승지로 삼았다.
정언 이명훈(李命勳)이 패초(牌招)를 어기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패초를 어기는 것은 윤리(倫理)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만하니, 이명훈을 갑산부(甲山府)에 귀양 보내라."
하였다. 이경옥(李敬玉)을 집의로, 여선형(呂善亨)을 지평으로, 이사증(李師曾)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살옥 죄인(殺獄罪人) 박명금(朴命金)·김우철(金友喆)의 완결(完決)이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해당 추당(秋堂)205) 의 파직을 명하였는데, 북백(北伯)206) 심수(沈鏽), 병조 판서 한광회(韓光會)의 현고(現告)로 인하여 영의정·좌의정이 진차(陳箚)하여 유임시키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조운규(趙雲逵)를 내국 제조(內局提調)로 삼았다.
삼성 죄인(三省罪人) 전필욱(全弼郁)을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하였다.
7월 9일 갑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도제조 서지수(徐志修)가 근래에 삼현(三絃)이 너무 촉급하다는 것을 우러러 주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악(樂)이 예전의 악과 같으나 한 장(章)을 아홉 번 연주[九成]하되 일어나서 절한 뒤에 하니, 지묘(至妙)함이 여기에 있다. 친히 제사할 때에 더디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천신(天神)은 칠성(七成)이고 지기(地祇)는 육성(六成)이며 인신(人神)은 구성(九成)이다."
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신의 생각은 구성(九成)의 곡(曲)을 다한 뒤에 용광장(龍光章)을 뒤에 따라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으나, 금년 안에는 할 수 없다."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각도(各道)·각영(各營)의 합조(合操)·윤조(輪操)·순조(巡操)·순점(巡點)과 무사 도시(武士都試)를 모두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태묘 전알(太廟展謁)을 8월 초1일로 물려서 정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大臣)의 요청으로 인해서였다.
7월 10일 을미
임금이 친히 석우(石隅)에 나아가 농사를 보았다. 기백(畿伯)207) 에게 명하여 농민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각각 농사 형편을 물으니, 모두 풍년이라고 대답하였다. 환궁(還宮)할 때에 남관 왕묘(南關王廟)에 들렀다. 임금이 더위 때문에 편치 못한 증세가 있어 종을 칠 때에 이르러 약방에 입진(入診)하도록 명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내가 지나친 거둥은 하지 않겠다."
하니, 도제조 서지수가 말하기를,
"뉘우치는 것은 길(吉)한 기미(機微)입니다. 사관(史官)이 써서 기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향귤다(香橘茶), 여곽탕(茹藿湯)을 연달아 올리니, 새벽이 되자 비로소 평상을 회복하였다. 날이 밝아서야 물러나갔다.
홍성(洪晟)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1일 병신
조정 2품 이상과 육조 당상(六曹堂上)이 정후(庭候)하니, 하교하기를,
"한때의 기운은 관계되는 것이 심하지 않으니, 조정의 문안은 그만두어라."
하였다.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서지수(徐志修)가 윤직(輪直)하기를 청하니,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7월 12일 정유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안주(安州)에 달려가서 청천강 수도(淸川江水道)를 살펴보게 하였다.
제도(諸道)의 충재(蟲災) 때문에 포제(酺祭)208) 를 행하도록 명하고, 향축(香祝)을 나누어 내렸다.
하교하기를,
"한 달이 가깝도록 가뭄이 든 것은 진실로 뜻밖이다. 심도(沁都)209) 에 비가 내렸다는 형상을 비록 가까스로 들었으나 영남은 어떤지 바야흐로 초조함이 간절하다. 또 북관(北關)의 한건(旱乾)도 심한데, 이럴 때에 또 충식(蟲蝕)의 보고가 있으니, 그 벌레로 인한 피해의 크고 작음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가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가뭄을 입은 것은 비가 내리면 그래도 미칠 수 있겠지만, 벌레가 먹은 것은 어찌 가망이 있겠는가? 예전의 당태종(唐太宗)은 황충(蝗蟲)을 잡아 먹었는데, 그 마음이 오직 정성스러웠기 때문에 효험이 있었으나 〈나는〉 부덕(否德)하고 또 노쇠하였으며 가뭄과 해충(害蟲)이 이와 같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그 벌레의 모양과 그 벌레의 먹는 것이 보는 것 같고 보이는 것 같다. 벼알 하나하나가 모두 신고(辛苦)한 곡식인데, 이삭을 먹고 줄기를 먹었으니 장차 남음이 없을 것이다. 아! 나의 부덕으로 인하였으니 곡식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해충(害蟲)이 그치게 되면 남는 것은 희망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혹독함이 가뭄보다 심하다. 아! 이 벌레는 어찌하여 내 살을 빨아먹지 않고 백성의 곡식을 먹는가? 만약 정성이 있다면 벌레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벌레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부른 것이다. 만약 정성이 있으면 호랑이도 강을 건너가는데 어찌 해충이 그치지 않겠는가? 아! 유수(留守)와 도신(道臣)·수령(守令)은 그 임금의 부덕함을 말하지 말고 반드시 그 정성을 다 하라."
하였다.
7월 13일 무술
임금이 친히 문신(文臣)에게 한학(漢學)의 강(講)을 시험하였다.
전 찬선 송명흠(宋明欽)이 졸(卒)하였다. 송명흠의 자(字)는 회가(晦可), 호(號)는 역천(櫟泉)인데,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이다. 천자(天姿)가 수미(粹美)하고 천리(踐履)가 순독(純篤)하여 젊어서는 중한 명망을 가졌는데, 중간에 임금의 돈독한 부름으로 인하여 도성에 나아가서 연중(筵中)의 대답과 상소로 진달한 것은 모두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은례(恩禮)를 다 끝마치지 못하고 처분이 더욱 엄하여졌는데도, 평일의 문하(門下)에 있던 무리가 한 사람도 조정에 항거해 말하는 이가 없었다. 사풍(士風)이 이에 이르니 슬프다.
이성원(李聖源)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4일 기해
예조 참판(禮曹參判) 서명응(徐命膺)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북로(北路)에 왕래할 때에 두 건(件)의 일이 있어서 모두 진문(陳聞)하려고 합니다. 신이 갑산(甲山)에서 대죄(待罪)할 때에 들었는데, 백두산 제각(祭閣)이 경내(境內)에 있어 몸소 가서 살펴보니, 경영하던 처음에는 도신(道臣)이 먼저 단유(壇壝)를 설치하고 다음에 각우(閣宇)를 세워서 무릇 그 포치(布置)가 예(禮)의 뜻에 암합(暗合)하였는데, 문득 예조(禮曹)에서 관문(關文)210) 을 보냄으로 인하여 한결같이 비백(鼻白)의 글에 따라 이미 이룩한 단(壇)를 철거하고 새로이 각(閣)을 세웠습니다. 또 도신(道臣)이 처음에 백두산을 마주 바라보는 곳의 녹반치(綠礬峙)라고 이름을 일컫는 데를 얻게 된 것은 우뚝하게 높이 솟았기 때문이었는데, 이를 버리고 다시 망산평(望山坪)을 찾아서 그 평탄함을 좋아하여 드디어 정한 것이 지금 세운 제각의 터라고 합니다. 신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도신이 처음 본 것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송(宋)나라 유학자(儒學者) 장식(張栻)이 ‘산천(山川)에 제사할 때 반드시 단유를 만드는 것은 도사(禱祀)의 실상을 이루고 은미(隱微)한 때에 성실히 하고자 하는 것인데, 후세에 그 신(神)을 사람으로 하고 그 땅을 집으로 하니 〈그 예를〉 잃음이 오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비백의 제도는 반드시 때에 인하여 처음 창설한 것이고 애초에 후세의 예(例)로 삼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의문(儀文)의 경신(更新)을 당하여 어찌 당연한 제도를 굽히고 도리어 권의(權宜)의 법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망산평에 이르러서는 운총(雲寵)·혜산(惠山)이 20리(里) 사이에 끼어 있어서 황야(荒野)가 한눈에 바라보이고 사람 사는 곳이 없으며 제각(祭閣)만 외롭게 세워져 있으니 신중한 도리가 아닙니다. 녹반치는 우뚝하게 높이 솟아서 비록 도신이 본 것과 같으나 금천(黔川)의 인후(咽喉)를 점거하고 운총의 앞산이 되어 인가(人家)가 연달아서 서로 바라보이며, 또 녹반치에서 가로로 나온 한 봉우리가 높이가 길[仞]이 될 만하여 백두산과 대치(對峙)하니, 비록 하늘과 땅이 마련하여 망제(望祭)하도록 준비하였다고 이를지라도 옳습니다. 이제 만약 녹반치에서 가로 나온 봉(峯)에다가 위에는 단유를 설치하고 아래에는 신실(神室)과 재청(齋廳)을 세워서 운총 만호(雲寵萬戶)로 하여금 지키게 하면 그 숭보(崇報)의 예법에 있어서 또한 거의 정문(情文)이 함께 갖추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조에 분부하여 그 적당한지의 여부를 상확(商確)하여 만대(萬代)에 변하지 않는 법으로 삼게 하소서.
일찍이 을해년211) 에 주상이 교제창(交濟倉)의 편부(便否)를 내려 물으시고, 이어서 남관(南關)의 교제곡(交濟穀)을 모두 북관(北關)의 예(例)에 의하여 연해(沿海)의 여러 창고에 나누어 저장하였으니 매우 큰 은혜입니다. 신이 갑산(甲山)으로부터 은혜를 입어 돌아올 때에 겨우 후치(後峙)를 넘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교제곡 조적(糶糴)212) 이 먼 것은 혹 3백 리(里)이고 가까운 것은 혹은 2백 리여서 왕래하기가 어렵고 소비도 많다.’고 합니다. 신이 을해년의 하교로써 말하고 순영(巡營)에 이르러 도신과 더불어 이를 말하였는데,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니, 대개 그 뒤에 새로운 절목(節目)을 반포함이 있음으로 인하여 다른 창고에 나누어 두지 못하게 하고 이전의 명령을 정지하여 행하지 않았습니다. 교제곡이란 것은 예전 숙묘조(肅廟朝)에 북관(北關)을 진념(軫念)하시어 내노(內奴)의 포(布)를 감하고 쌀을 거두어서 남북관(南北關)의 흉년에 대비하는 자본으로 삼았으니, 백성을 이롭게 한 남아 있는 혜택을 이제까지 잊지 못하는데, 당저(當宁)213) 에 이르러 또 덕정(德政)을 미루어 넓혀서 남관(南關)까지 두루 미치게 하여 비로소 원산 교제창(元山交濟倉)을 설치하는 명령이 있어 이때 신의 아비가 도백(道伯)으로서 실로 경영을 관장하였기 때문에 이 일의 전말(顚末)을 신이 자못 자세히 압니다. 대저 그 창고를 만든 것은 본래 널리 설치하려고 하여 어지럽게 펴두었기 때문에 신의 아비가 경영한 뒤에 또 함흥 운전창(咸興雲田倉)이 있고 또 이성(利城)의 자외창(者外倉)이 있는데, 이와 같이 하여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속대전(續大典)》 가운데 처음에 교제창이 고원(高原)에는 없었는데, ‘교제창’에 주(註)한 것은 대저 여기에 다시 설치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전의 삼창(三倉)이 지금은 허다한 창이 되었는데, 남관(南關)의 몇 만 생령(生靈)이 해마다 왕래하는 허비를 하루아침에 제거하면 조정에 있어서는 창사(倉舍)를 더함이 되고 북도 백성에 있어서는 허비를 줄이는 것이 되니, 좋은 계책으로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창사를 더 짓지 못하고 또 변통하여 분치(分置)하지 못하니, 남관 백성이 조정에서 고생으로 경영한 뜻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왕명이 한갓 종이 위의 글이 되니, 이것이 또 신이 애석해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라건대 비국(備局)에 분부하여 적당한지의 여부를 상확(商確)하게 하여 북도 백성의 무궁한 은혜가 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첫 번째 건(件)의 진달한 것은 뜻이 비록 있으나 이미 본산(本山)214) 에서 제사를 행하지 못하니 녹반치이든 망산평이든 나는 심히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건의 일은 대신과 비국 당상으로 하여금 소상하게 아뢰게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저 충재(蟲災)를 장차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일전의 하교가 글자마다 간측(懇惻)하시어 신 등이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이 한 전교로써 충분히 충재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 태종(唐太宗)이 황충(蝗蟲)을 삼킨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정관(貞觀)의 정치215) 에 비록 초년과 만년(晩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대체로 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내국 도제조 서지수(徐志修)의 사임을 허락한다 명하고, 김양택(金陽澤)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경원 부사(慶源府使)를 강계(江界) 부사의 예(例)에 의하여 선발하여 차임(差任)하고, 훈융 첨사(訓戎僉使)도 선발하여 차임하라 명하니, 전 북백(北伯) 김기대(金器大)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7월 16일 신축
고(故) 화산 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아들인 고 중신(重臣) 권자신(權自愼)에게 역명(易命)의 은전을 추시(追施)하도록 명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청한 바로 인한 것이었다.
7월 17일 임인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니, 하교하기를,
"몇 십 년을 임어(臨御)하였으나 다스림이 뜻과 같지 않아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었다. 비록 그렇지만 한 조각의 이 마음은 오직 선왕(先王)에 있는데, 근년 이래로 여름 제사와 가을 제사에 모두 불참하였고 서리와 이슬이 내려 감회가 일어날 때 단문(丹門)의 전알(展謁)도 하지 못하였으니 슬프다. 금년을 당하여 멀리 국초(國初)를 바라보매 이 마음이 견디기 어려운 중에 마땅히 행할 전알을 작년에 한 차례 행하고 금년은 아직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효(孝)이겠는가? 아! 이 중년(中年)에 만약 풍년이 들면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의지할 수 있을 것인데, 영남에 비가 내렸다는 장계가 또한 이르렀으나 고르게 내리지 않은 곳이 많으니 마음으로 가만히 민망해 한다. 누에 같은 벌레가 어느 때에 없어졌다고 듣게 되겠는가? 임금이 기대하는 것은 삼대(三代)216) 가 마땅한데, 어찌 한(漢)·당(唐)을 말하겠는가만, 나의 정성이 이와 같이 얕으니, 옛날 당(唐)나라 태종(太宗)에게 매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다. 아! 선왕을 위하는 정성이 이와 같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이와 같으면서 몇 십 년을 왕위에 임하여 나이가 또 팔십을 바라보니, 속으로 반성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 외에 무엇을 말하겠는가?"
하였다.
홍낙순(洪樂純)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9일 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근래에 예조 참판 서명응(徐命膺)의 상소에 교제창(交濟倉)의 일을 논하였는데, 이미 ‘대신과 비국 당상으로 하여금 소상하게 아뢰게 하라.’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전후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니, 을해년217) 에 과연 교제곡(交濟穀)을 각 해창(海倉)에 나누어 저장하라는 성명(成命)이 있었으나 곧 도신(道臣)이 불편하다는 뜻을 장계(狀啓)에 갖추어 진달함으로 인하여 곧 정지하였는데, 그 뒤에 원산(元山)·운전(雲田)·자외(者外) 세 본창(本倉)의 곡물이 점점 많아서 5년에 한 번씩 개색(改色)218) 할 무렵에 민폐(民弊)가 심히 많기 때문에 갑신년219) 에 묘당(廟堂)220) 에서 이 상황을 진달하여 품(稟)하니, 고쳐서 정식으로 삼아 ‘교제곡’ 원수(元數) 24만 석 중에 6만 석은 세 본창에 남겨 머물러 두고 3분의 1은 조적(糶糴)하되 반모(半耗)만 받으며, 12만 석은 남관(南關) 11읍(邑)과 북관(北關) 9읍의 각창(各倉)에 나누어 두되 반(半)은 남겨두고 반은 나누게 하며, 그 나머지 6만 석은 옮겨서 원회곡(元會穀)으로 만들게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이전의 세 본창(本倉)에 항상 두는 15만 석의 수량을 감하여 6만 석으로 하고 5년에 한 번 개색하는 법을 바꾸어 3년에 한 번 개색하게 하였으니, 계유년221) 이전에 비하여 먼 지방 백성이 운반하는 폐단의 3분의 1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비록 삼남(三南)을 접제(接濟)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마땅히 세 본창에 남겨 둔 곡식 가운데 적당함에 따라 취해 쓰며, 민폐를 생각하고 곡물을 저축하는 방도에 있어 참작해 헤아려서 조치하면 두 가지가 마땅함을 얻을 것이니, 영구히 준행할 법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신의 생각으로 다시 의논할 것이 없으니, 예전대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김치인이 또 아뢰기를,
"종성(鍾城)은 6진(六鎭)에 있으나 문과(文窠)로 만든 것은 법의 뜻이 있으므로 자주 바꾸어서는 안되는데, 근래에는 열 달이 겨우 지나면 문득 중고(中考)222) 로써 체임되어 오니, 이 뒤로는 청컨대 각별히 신칙하여 그릇된 폐단을 방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것은 해당 도신(道臣)을 이목(耳目)223) 에 부치고, 해당 모면한 수령을 바로 그 지역에 귀양 보내라."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6진의 공통된 폐단으로, 비록 내지(內地)의 여러 고을이라도 그 관(官)의 박함을 혹시 싫어하여 그 달수[朔數]에 준하지 않고서 체임을 도모하는 자가 간혹 많이 있습니다. 청컨대 이를 신칙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한익모가 말하기를,
"우리 조정의 사람 쓰는 것은 오직 과목(科目)만으로 하기 때문에 과목 외의 재주를 가진 자가 부질없이 늙는 것이 애석하다 하겠습니다. 양한(兩漢)224)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힘써 농사를 지으면 먼 나라에서도 천거하게 하여 구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취하기를 널리 함이 있었으니, 후세에서 본받을 만합니다. 이제 만약 보거(保擧)를 엄하게 하여 널리 찾아서 비록 한 가지 재예(才藝)라도 모두 천거해 아뢰게 하면 거의 사람을 얻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의논해 절목(節目)을 만들어 아뢰게 하였는데, 뒤에 드디어 정지하고 행하지 아니하였다.
명하여 필선(弼善) 신광리(申光履)를 교리로 제수하여 패초(牌招)로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춘방(春坊)225) 에서 왔으니, 세손(世孫)이 방금 무슨 책을 강(講)하였느냐?"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서연(書筵)에서는 《시전(詩傳)》의 ‘비궁장(閟宮章)’이고, 소대(召對)에서는 《강목(綱目)》의 ‘한 원제권(漢元帝卷)’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관(講官)은 누구인가?"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신과 설서(說書) 권진(權禛)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빈객(賓客)은 들어오지 않는가?"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모두 탈품(頉稟)226) 하였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유신(儒臣)이 춘방(春坊)에서 왔으므로 인하여 들으니, 요즘 빈객이 입시(入侍)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데, 아! 유유(悠悠)한 오늘의 일은, 원량(元良)227) 을 보도(輔導)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다. 예조 판서는 이미 알고 입시(入侍)하였는데, 황경원(黃景源)은 그가 비록 이 직(職)에 시애(撕挂)할지라도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윤급(尹汲)은 늙은 옛 신하라고 이르지 말라. 노쇠하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으며 또 지나간 일이 밝게 드러나서 남음이 없는데, 내게 줄곧 시애하니 오히려 지나치다. 늙은 옛 신하로 빈객이 되어 원량을 보도하면서 어찌 차마 이와 같겠는가? 상견례(相見禮)를 곧 행하기를 신칙하고, 이어서 뜻을 붙여서 강(講)을 권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전》의 강을 마친 뒤 어느 책을 이어서 강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사부(師傅)가 《맹자(孟子)》로 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심경(心經)》을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상하번(上下番)이 번갈아 가며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부념(浮念)이 없는가?"
하니, 교리 신광리(申光履)가 말하기를,
"성인은 조존(操存)·함양(涵養)의 공부를 다하였으니, 부념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가 이르기를, ‘비부(鄙夫)는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성인이 인정(人情)과 물태(物態)에 곡진(曲盡)함이 이처럼 밝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성인의 한마음은 모든 변화에 대응하니, 함양·조존은 바로 발하기 전의 일이고 부념은 바로 이미 발한 뒤이기 때문에 그것을 압니다."
하였다. 우부승지 홍낙순(洪樂純)이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본체가 밝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아서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인정(人情)을 잘 헤아려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부념(浮念)을 알지 못하는가?"
하니, 홍낙순이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참으로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출입(出入)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晉)나라 혜제(惠帝)가 ‘어찌하여 고기와 죽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느냐?’고 한 것과 ‘화림원(華林園)의 개구리 우는 것은 공(公)을 위한 것인가, 사(私)를 위한 것인가?’라고 물은 것도 부념(浮念)이 있는 것인가?"
하니, 홍낙순이 말하기를,
"이는 무지한 벌레와는 다름이 있으나, 또한 식색(食色)의 마음이 있는 것이니, 어찌 부념(浮念)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내가 쇠하였다.’는 탄식이 있었으니, 성인도 쇠하는가?"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성인의 혈기(血氣)도 때로 쇠함이 있습니다. ‘다시 꿈에 주공(周公)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또한 쇠하였다고 이를 만합니다."
하였다. 홍낙순이 말하기를,
"이는 쇠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탄식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봉조(鳳鳥)의 응(應)함과 하도(河圖)의 징험은 있는데, 노(魯)나라 들에 〈사는〉 기린(麒麟)이 사람에게 상해를 당했으니, 천재(千載) 후에 한탄함을 억제하지 못하겠다. 만약 부자(夫子)228) 가 《시경(詩經)》·《서경(書經)》을 산정(刪定)하지 않았다면, 후세에 어찌 이를 알 수 있겠는가? 나는 공자의 공(功)이 삼대(三代)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요순(堯舜)의 공은 일세(一世)에 그치고 부자(夫子)의 공은 만세에 드리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닭이 울면 부모에게 문안하고, 무왕(武王)은 아버지인 문왕이 병이 들자 문왕이 한 번 먹으면 같이 한 번 먹고 두 번 먹으면 같이 두 번 먹었으므로 공자가 이를 찬미하였으니, 대개 깊은 뜻이 있다. 왕상(王祥)229) 은 효(孝)하되 충(忠)에는 부족하고, 혜소(嵇紹)230) 는 충하되 효에는 부족하니, 오륜(五倫)에 모두 완전한 것은 옛부터 어렵다. 한(漢)·당(唐) 이래로 충과 효가 함께 완전한 이는 누구인가?"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충·효는 본래 두 가지 다 이룰 수 없겠으나, 능히 어버이에게 효도하면서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신은 왕상의 효도가 오히려 극진하지 못한 것이 있는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왕상이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신이 이르는 것은 일절(一節)의 효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갈양(諸葛亮)은 어렵다."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기상(氣像)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악비(岳飛)231) 는 몸이 충·효를 겸하였고, 무후(武侯)232) 에 이르러서는 충·효 뿐만 아니라 그 지혜가 신(神)과 같고 또한 송(宋)나라 조빈(曹彬)의 일이 있을 것을 알았다. 방사원(龐士元)233) 은 공명(孔明)234) 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서림(東西林)을 기백(箕伯)의 장계(狀啓)로 수호하기를 청하였으니, 나는 말하노라. ‘덕(德)에 있고 지세의 험(險)함에 있지 아니하다.’고. 의주(義州)에 성(城)이 있는가?"
하니, 홍낙순이 말하기를
"있습니다만 중원(中原)235) 과 달라서 성이 견고(堅固)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촉(蜀)나라는 검각(劍閣)의 험함이 있었으나, 등애(鄧艾)236) 가 음평(陰平)으로부터 쳐들어왔다."
하니, 홍낙순이 말하기를,
"‘사람에 있지 〈지세의〉 험함에 있지 않다.’는 것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신이 전에 만상(灣上)237) 에 있을 적에 부노(父老)들에게 물으니, 모두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병자년238) ·정축년 【1637 인조 15년.】 의 호란(胡亂) 때의 것이 보존된 곳으로, 무릇 위급하면 반드시 장차 달려가서 들어간다.’고 하는데, 신이 본 바로는 역시 지킬 만한 곳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철옹(鐵瓮)은 어떠한가?"
하니, 홍낙순이 말하기를,
"참으로 철옹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라에 한 사건도 없으므로 인심이 모두 익숙해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으니, 내가 안타깝게 여긴다. 여름이 있으면 가을이 있는데, 지금 인재(人材)·군정(軍政)·양향(糧餉)을 믿을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위급한 일이 발생한다면 마땅히 와해될 것이다. 명나라 말기에 충신(忠臣)이 매우 많았으니, 이는 고황제(高皇帝)239) 가 부식(扶植)한 힘이었으나, 홍광(弘光)240) 은 진실로 나라를 일으킬 이치가 없다. 송(宋)나라 고종(高宗)도 중흥(中興)하지 못하여 항상 연영(延英)에 세 번 아뢸 것을 생각하였는데도, 다시 천어(天語)241) 를 듣지 못하였으니, 족히 천년 후의 사람으로 하여금 슬픔을 금하지 못하게 한다. 중흥(中興)하는 것은 이것이 천운(天運)이다. 진(晉)나라의 동도(東渡)와 송나라의 남천(南遷)으로 중흥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이는 기수(氣數)242) 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명종(明宗)이 분향(焚香)하며 성인(聖人)이 나기를 빌었음은 훌륭하다고 이를 만한데,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마침 그때에 났으니, 이는 과연 송나라를 개국(開國)할 조짐이었는가?"
하니, 신광리가 말하기를,
"이는 운(運)이 갔다가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7월 20일 을사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명하여 제조 한광회(韓光會)의 체임(遞任)을 허락하고, 홍낙성(洪樂性)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전 교리 이헌묵(李憲默)을 특별히 제수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현(五賢) 가운데 문순(文純)243) 의 후손 이세택(李世澤)은 이미 하대부(下大夫)에 이르렀고, 문원(文元)244) 의 후손 이헌묵(李憲默)은 이제 승자(陞資)하였으며, 문정(文正)245) 의 후손도 이미 녹용(錄用)되었는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은 조정에 있는 자가 없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곧 널리 물어서 봉사(奉祀)하는 사람을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문신 삭시사(文臣朔試射)를 행하고 겸하여 종신 시사(宗臣試射)를 행하였다. 안창군(安昌君) 이경(李燝)을 가자(加資)하고,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에게 말[馬]을 면급(面給)하였다.
7월 21일 병오
임금이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니, 곧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었다. 승지에게 명하여 황단(皇壇)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명사(明史)》 신종 본기(神宗本紀)를 가져다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종 황제는 50년을 임어(臨御)하여 강(綱)을 들면 목(目)이 펴지는 것과 같이 기강(紀綱)이 있었으나, 동림당(東林黨)246) 의 표방(標榜)이 이미 이무렵에 일어나서 말년(末年)에 조서(詔書)를 내려 이를 근심한 것이 대개 지극하였는데, 뒤에 신종이 승하하자 진신(搢紳)이 어육(魚肉)의 화(禍)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오늘날 해동(海東)의 신하는 당(黨)이 없는가, 당이 있는가? 그 폐단은 명(明)나라 세대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건극(建極)의 정치는 내가 비록 스스로 부끄러워하나 교목 세신(喬木世臣)247) 은 그 할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숙위(宿衛)하는 향군(鄕軍)을 불러서 농사(農事)의 형편과 시장 값을 묻고 특별히 이훈(李薰)을 제수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삼았다. 이훈은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의 아들인 이여매(李如梅)의 오대손(五代孫)인데, 별군직(別軍職)으로서 바야흐로 시위(侍衛)했었기 때문이었다.
금위영 상번군(禁衛營上番軍)이 기총(旗總)248) 이 수렴(收斂)하는 일로써 언문(諺文)으로 쓴 작은 종이를 건명문(建明門)에 붙였는데, 회시(回示)하기를 명하여 곤장(棍杖) 50도(度)를 치고, 그 영(營)의 대장(大將) 이장오(李章吾)를 금오(金吾)에 내려서 추고(推考)하게 하였다가 곧 석방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한서(漢書)》·《송사(宋史)》·《고려사(高麗史)》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제왕기(帝王紀)와 찬(贊)을 각각 두어 판(板)을 읽고 아뢰게 하였다.
7월 23일 무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에게 묻기를,
"경은 《고려사(高麗史)》를 보았는가? ‘봉황(鳳凰)이 뭇 새를 쫓았다.’고 하였으니, ‘나는 말하노라. 이것은 봉황이 아니다.’라고, 비록 봉황이라고 하더라도 때를 알지 못하고서 왔을 것이다."
하였다. 명하여 호남 도신(湖南道臣)의 충재 장계(蟲災狀啓)를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요숭(姚崇)249) 이 황충(蝗蟲)을 불에 태운 것은 비록 눈 앞의 급함을 구하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노회신(盧懷愼)의 말은 의견이 없지 않다. 벌레가 곡식을 먹는 것은 진실로 임금의 부덕(否德)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저것이 비록 미물(微物)이라 하더라도 나로 말미암아 생겨 났으니, 한번 호령하였다 하여 불에 태운다면 이는 사람에게 살인하기를 권하고 또 법으로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뒤로는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잡은 벌레를 구덩이를 파서 묻고 불에 태우지 말게 하라."
하였다. 제주(濟州)에 옮겨 보낼 곡식을 포장해 싣는 것이 지체(遲滯)되었다 하여 도신을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문신(文臣)에게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으뜸을 차지한 사람 정내겸(鄭來謙)에게 반숙마(半熟馬)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명하여 내국 제조 홍낙성(洪樂性)을 체임하고, 이경호(李景祜)로 대신하게 하였다.
7월 24일 기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태묘 전알(太廟展謁)의 날짜를 늦추어서 정하기를 청하니, 8월 15일로 늦추어 정하도록 명하였다.
김치인이 제도(諸道)가 충재(蟲災)로 흉년을 입었으므로 수조(水操)·육조(陸操)를 모두 정지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사제(趙思齊)가 격쟁(擊錚)한 일을 경은 아는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미처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바로 조덕보(趙德普)를 신원(伸冤)하는 일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들으니 조덕보는 그때 호남 고을 수령으로 왕래한 날짜가 적(賊)의 초사(招辭)와 서로 어긋났음이 도신(道臣)의 사계(査啓)에서 모두 근거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작처(酌處)의 법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판의금(判義禁)이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후일 등대할 때에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81세, 82세, 89세 노인을 불러들이게 하여 각각 명주 한 필과 쌀 5두(斗)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노인들이 들어올 때에 지팡이를 집도록 허락하고, 또 그 자제(子弟)가 따라 들어오도록 명하였으며, 임금이 판위(版位)에 일어나 서서 기다렸다. 그 가운데 사대부(士大夫)로 나이가 늙은 사람에게는 각각 한 귀(句)의 시(詩)를 지어 올리게 하고 임금이 각각 손으로 ‘유회(諭懷)’ 두 글자를 써서 답하였다.
7월 25일 경술
팔도(八道)·양도(兩都)에 명하여 108세 노인에게는 각각 옷감[表裏] 한 필과 고기 열 근을 내려 주고 1백 세와 99세 노인에게는 어제 하사한 81세, 82세 노인의 예(例)와 같이 하였으며, 부인(婦人)은 단지 82세, 99세 노인만 주었다. 대저 성상의 마음이 옛일을 추모(追慕)하여 신축생(辛丑生)·무진생(戊辰生)·정묘생(丁卯生)·경술생(庚戌生) 노인에게 느낌이 있어서 이 명령이 있었다.
7월 27일 임자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5군문(五軍門) 대장(大將)과 중군(中軍) 이하 여러 장교(將校)에게 시사(試射)하였다.
7월 28일 계축
임금이 융무당에 나가 활쏘기를 시험하였는데,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장오(李章吾)가 유엽전(柳葉箭)과 편전(片箭)이 각각 과녁에 적중하였으므로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인하여 상(賞)을 내렸다.
이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명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보외(補外)하게 하였다가 도로 정지하였다.
친히 정사(政事)를 행하여 조명정(趙明鼎)을 이조 판서로, 황갑(黃柙)을 대사헌으로, 안집(安集)을 대사간으로, 이수훈(李壽勛)을 집의로, 정언섬(鄭彦暹)을 장령으로, 이종영(李宗榮)을 지평으로, 정환유(鄭煥猷)를 헌납으로, 안성빈(安聖彬)을 정언으로, 이득신(李得臣)·이치중(李致中)을 부교리로, 조종현(趙宗鉉)·홍윤(洪錀)을 부수찬으로, 홍억(洪檍)을 보덕으로, 남현로(南玄老)를 필선으로, 김재순(金載順)을 겸 보덕으로, 김익(金熤)을 겸 필선으로, 홍낙신(洪樂信)을 겸 문학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우윤으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송이(松茸)·생복(生鰒)·아치(兒雉)·고초장(苦椒醬)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로써 보면 입맛이 영구히 늙은 것은 아니다."
하니,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그러시면 생복(生鰒)을 복정(卜定)250)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 두라. ‘〈공자는 꿩고기를〉 세 번 냄새만 맡고 일어났다.’고 하였으니, 때로는 혹 향당편(鄕黨篇)251) 에 성인(聖人)의 기상(氣像)을 묘사하였음을 상상하였다. 적복(摘鰒)하기는 공이 많이 들므로 영상(領相)이 어사(御史)로 있을 때에 한 마리 큰 복어(鰒魚)로써 나에게 민폐(民弊)가 된다는 뜻을 보였다. 방금 충재(蟲災)가 민간에 몹시 지독한데, 정당한 공물(貢物) 외에 때가 아닌 물건을 어찌 반드시 구하여 구복(口腹)을 위하겠는가? 마땅히 바칠 것 외에는 내가 받지 아니하겠다."
하였다.
7월 29일 갑인
하교하기를,
"《자성편(自省編)》에 이미 이르기를, ‘한 마리의 물고기와 한 움큼의 나물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찌 어공(御供)을 위하여 백성에게서 피곤함을 받게 하겠는가? 기영(畿營)252) 의 대봉(代捧)253) 을 즉시 정지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대사간과 정언(正言)의 두 천망(薦望)에 부자(父子)를 비의(備擬)하여 모두 천점(天點)을 받는데 이르렀으니, 청컨대 전관(銓官)을 중하게 추고(推考)하소서. 또 병비(兵批)254) 의 복직(復職)에 있어 선후의 차례를 잃고 기타 주의(注擬)도 살피지 아니한 곳이 있으니, 청컨대 정관(政官)을 추고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어제의 정치에서 안집(安𠍱)을 대사간으로 첫머리에 의입(擬入)하고, 그 아들 안성빈(安聖彬)을 정언으로 첫머리에 의입하였기 때문이었다.
7월 30일 을묘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동부승지 정언충(鄭彦忠)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특별히 제수하고, 전(前) 통례(通禮) 구상(具庠)을 승지로 발탁하였다. 정언충은 전에 태묘령(太廟令)이 되어 집안 사람이 번육(膰肉)을 판 것을 듣고는 크게 놀라서 급히 찾아오게 하였고, 두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자못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는데, 정승 서지수(徐志修)가 일찍이 추천하여 품계가 올랐다가 이에 이르러 나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하교하기를,
"번육을 팔지 않은 것으로써 보면, 관(官)에 있으면서 의당 법을 굽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비변랑(備邊郞) 구이겸(具以謙)을 나주(羅州)로 급히 보내어 목장(牧場)을 적간(摘奸)하고 여러 섬을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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