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1권, 영조 44년 1768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1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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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병진

판중추부사 서지수(徐志修)가 졸(卒)하였다. 서지수의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고 소박해서 잇따라 태부(台府)255)  에 올랐으나, 충신 염결(忠愼廉潔)함을 스스로 지니는 것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전후로 여러 번 바른 말을 올렸고 이미 정승에 들어가자 중외의 서민이 모두 기뻐하였다. 정승의 자리에 오래 있지 아니하여 비록 시행한 바가 없었으나 여정(輿情)의 신망이 끝까지 쇠하지 아니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니 도성 백성이 시장을 파하고 서로 슬퍼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복악(復樂)할 것을 청하고 여러 비국 당상도 이어서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황갑(黃柙)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안집(安𠍱)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조명정(趙明鼎)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예사로운 비답(批答)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아! 서 판부사(判府事)256)  의 삼대(三代)를 내가 예전과 지금에 모두 보았고 모두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니,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물며 삼대가 옛날에도 섬겼고 나를 섬겼으니, 나라를 위하는 참된 충성을 대대로 전하였다고 이를 만한데, 절혜(節惠)257)  의 법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본가(本家)에 신칙하여 곧 시장(諡狀)을 올리게 하고 바로 시호를 의논하여 석달 안에 거행함으로써 나의 권권(眷眷)한 뜻을 표시하게 하며, 고 좌의정의 시호는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특별히 한결같이 거행하게 하라.
아! 나를 섬긴 두 정승에 대해 늙은 나이에 모두 시호를 의논하게 되니, 또한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창연(愴然)함을 깨닫지 못하겠다. 이제 대신이 아뢴 것을 듣건대 벼슬이 정승 자리에 이르렀으나 청렴하고 가난하다고 하니 숭상할 만하다. 본래의 치부(致賻) 외에 제물(祭物)을 더 주고 그 아들은 복(服)을 마치기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일 정사

예조(禮曹)에서 사릉(思陵)258)  의 능 위에 사초(莎草)가 말랐음을 아뢰니, 내국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에게 명하여 봉심(奉審)한 뒤에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8월 5일 경신

임금이 6품 음관 수령(蔭官守令)에게 강(講)을 친히 시험하였는데, 박항원(朴恒源)은 국구(國舅) 박응복(朴應福)의 후손이고, 이경일(李敬一)은 이항복(李恒福)의 후손이며, 김태주(金泰株)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조카이므로 강을 면제하도록 명하였다.

 

8월 7일 임술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당하관 무신(堂下官武臣)에게 삭사(朔射)를 시험하였다.

 

대사간 안집(安𠍱)을 부총관(副摠管)으로 발탁하였다. 이날에 임금이 장차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려고 하는데, 안집이 패초(牌招)를 기다리지 않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사직(司直) 채제공(蔡濟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 한 번 백성의 근심을 들으시면 성념(聖念)을 지나치게 쓰시어 밤낮으로 애쓰시니, 성궁(聖躬)을 손상하실 염려가 없지 않기 때문에 신하의 천성으로 타고난 심정에서 이를 두려워합니다. 무릇 재해와 흉년에 관계된 것이 밖으로의 장문(狀聞)과 안으로의 연백(筵白)259)  에는 위곡(委曲) 완전(宛轉)한 것이 많고 명백(明白) 직절(直截)한 것이 적습니다.
경기 고을 한 수령은 ‘밤중 사이에 벌레가 간 곳이 없으니 일이 기이(奇異)하다.’고 논보(論報)하여 상청(上聽)의 주달함에 이르렀으니, 신이 보건대 일이 반드시 기이한 것이 아니라, 말을 올려 보낸 것이 기이합니다.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에 마땅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북도(北道)의 흉년은 신이 목격한 것입니다. 신이 6월 보름 사이에 재[嶺]를 넘어 북계(北界)에 들어가니, 지나는 곳의 논바닥이 모두 갈라져서 이미 가을에 성숙할 희망이 없는데, 백성들이 말하기를 ‘4월 초에 먼지를 적실 만한 비가 내린 이후로 석 달 동안 크게 가물었다.’고 합니다. 신이 북청(北靑)에 도착하여 침보(寢補)의 하교를 얻어서 수일 만에 길을 되돌아 왔는데, 그 사이에 독충(毒蟲)이 성하게 발생하여 산과 들을 덮어 조[粟]를 먹기를 다하면 기장[黍]을 먹고 기장이 다하면 콩을 먹으며 심한 것은 잔디 잎까지 먹는 데 이르니, 북청에서 안변(安邊)까지 6백여 리 사이에 잎이 푸른 것이 적습니다. 북도는 작년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아직 소생되지 않았는데, 또 거듭 전에 없던 재해와 흉년을 만나니 여러 고을이 이미 대부분 유산(流散)하였으며, 비록 아직 흩어지지 아니한 자라 하더라도 모두 아침에 저녁거리를 꾀하지 못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신의 행차가 지나감을 듣고 수 없는 사람들이 말[馬]을 막고 손을 모아 말하기를, ‘원하건대 돌아가서 우리 임금님께 아뢰어 우리 억만의 생명을 살리게 하라.’고 하니 그 말이 몹시 비참합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급함을 당하여 늦출 수 없는 것은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다.’라고 하였으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온화한 유시(諭示)를 급히 내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일도(一道)에 반포해 보이게 하고 또한 묘당(廟堂)에 신칙하여 구제할 계책을 강구(講究)하여 사기(事機)를 잃지 말고 풍패(豊沛)260)  의 옛 백성으로 하여금 재생(再生)의 혜택을 입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늙은 나이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왕(先王)의 백성 위한 일을 추모하다가 이제 경의 글을 보매 아픈 것이 몸에 있는 것과 같으나, 헐후(歇後)261)  하게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하물며 금년은 어떤 해이며, 이 도(道)는 어떤 도인가? 이를 들으니 어찌 차마 예사로이 품처(稟處)하겠는가? 마땅히 삼공(三公)과 구관 당상(句管堂上)을 불러서 물을 것이니, 경도 모름지기 같이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도승지로 제수하였다.

 

과천 어사(果川御史) 홍낙신(洪樂信)에게 내일 갔다가 돌아오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경년(頃年)에 김 봉조하(金奉朝賀)가 아뢴 것으로 인하여 삼대 승두선(三臺僧頭扇)을 금하였는데, 요즘은 기교(技巧)의 풍습이 날마다 성하여 심하기로는 부채를 주석으로 장식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한림선(翰林扇)·어두선(魚頭扇)을 예전에는 뿔로 장식하였는데 근래에는 모두 주석으로 장식한다. 일찍이 듣건대 중국에서는 그 돈을 위하여 동석(銅錫) 그릇을 금하여 이제까지 준행한다고 하니 그릇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한때의 집물(什物)에 주석을 쓰겠는가? 이와 같이 그치지 아니하면 앞으로 승두선을 금하는 것도 주석으로 장식할 것이다. ‘하나의 기교인데 무엇이 해롭겠느냐’고 이르지 말라. 그 근본은 역시 우리 백성의 고혈(膏血)이다. 이 뒤로는 삼대선(三臺扇)과 상선(常扇)의 각(角)을 연이어서 대나무에 붙이는 것도 예전에는 뿔로 장식하였는데 지금에 주석으로 장식하는 것은 모두 금하라."
하였다.

 

8월 8일 계해

대신인 전 북백(北伯)과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과천 현감의 보장(報狀)·기백(畿伯)의 농형 장문(農形狀聞)·북백의 전후 농형 장문·남북관 교제곡 문서(南北關交濟穀文書)를 모두 가지고 들어오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밤 사이에 벌레가 간 곳이 없다.’는 말이 진실로 맹랑하며, 북관(北關)의 일이 딱하다. 우리 백성이 반드시 주상에게 고하려고 하던가?"
하니, 도승지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그 경상(景象)의 참혹함을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교제창(交濟倉)은 어떠한가?"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올라올 때에 들으니, 모두 비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북도 어사(北道御史) 이치중(李致中)에게 명하여 달려가서 위유(慰諭)하게 하고, 이어서 북도에서 이바지하는 탄일(誕日)과 동지(冬至)의 물선(物膳)을 견감(蠲減)하도록 명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여 《소학(小學)》을 읽게 하고, 각각 종이와 붓을 내려 주었다. 과천 어사(果川御史) 홍낙신(洪樂信)이 복명(復命)하며 서계(書啓)를 읽기를 마치자, 또 과천 현감의 보장(報狀)과 기백의 장문(狀聞)을 읽도록 명하여, ‘밤 사이에 벌레가 간 곳이 없다.’는 데 이르러,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부덕(否德)할지라도 어찌 할작(曷雀)을 봉조(鳳鳥)라고 일컫는다 하여 마음속으로 만족해 하겠는가? 새벽 누수(漏水)를 걷지 아니하였는데, 입직(入直)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가서 보게 한 것은 뜻이 대체로 깊은 것이다. ‘밤 사이에 벌레가 간 곳이 없다.’고 한 것을 그 자취로 보면, 임금을 위하여 신칙하는 것인가? 표장하는 것인가? 묻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물은 뒤에 어찌 다스리지 않겠는가? 과천 현감 신광건(申光健)을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특별히 시행하고, 어사(御史)는 결어(結語)에 신칙하기를 청하는 것이 마땅한데, 단지 이 일만 들리고 어찌 신칙하라 함이 없는가?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라. 다시 장문(狀聞)의 결어를 보니, 내가 늙은 옛 신하인 기백(畿伯)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한 등(等)을 월봉(越俸)262)  하여 내가 늙은 나이에 근거없는 말을 억제한다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전 부사 박필규(朴弼逵)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8월 9일 갑자

서울에 있는 수령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안동 부사(安東府使) 김화진(金華鎭)을 대사간으로 제수하고, 승지 한필수(韓必壽)를 안동 부사로 제수하였다. 하교하기를,
"수령을 이미 처분하였는데, 하물며 도신(道臣)이겠는가? 기백(畿伯)의 현임(現任)을 특별히 해면한다."
하고 또 김화진(金華鎭)으로 대신할 것을 명하였다.

 

김서구(金敍九)를 지평으로, 이지승(李祉承)을 정언으로, 이담(李潭)을 부제학으로, 이양수(李養遂)를 부수찬으로, 이상악(李商岳)을 문학으로, 홍경안(洪景顔)을 사서로, 송지연(宋志淵)을 겸 필선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좌참찬으로, 심관지(沈觀之)를 부교리로, 박사륜(朴師崙)을 수찬으로, 홍억(洪檍)을 집의로, 민종렬(閔鍾烈)을 교리로, 엄인(嚴璘)을 대사간으로, 정존겸(鄭存謙)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8월 11일 병인

임금이 저경궁(儲慶宮)과 육상궁(毓祥宮)의 추향제(秋享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장락전(長樂殿)에 봉심(奉審)하고 용비루(龍飛樓)를 지나 영월문(映月門) 앞에 여(輿)를 멈추고 상번 한림(上番翰林)에게 명하여 어조당(魚藻堂)·집희당(緝熙堂)·경선당(慶善堂)의 게판(揭板)의 어제(御製)를 등사해 오게 하여 사관(史官)에게 명해 쓰게 하였다. 승지·사관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등이 태묘(太廟)의 전알(展謁)을 늦추어 정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윤사국(尹師國)에게 직첩을 주어 서용(敍用)하도록 명하니, 대신이 아뢴 것이었다. 김치인이 함경 감사(咸鏡監司) 심수(沈鏽)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교제전(交濟錢) 7천 1백 냥과 목(木) 28동(同), 선세(船稅)의 남은 돈 1천 냥, 대동전(大同錢) 1천 5백 냥을 획급(劃給)하여 합당하게 곡식으로 바꾸도록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8월 12일 정묘

번개가 쳤다.

 

8월 13일 무진

임금이 명릉 기신제(明陵忌辰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조영진(趙榮進)을 승지로, 민홍렬(閔弘烈)을 수찬으로 제수하였다.

 

8월 14일 기사

임금이 보련(步輦)으로 돈의문(敦義門)에 나가서 막차(幕次)를 경기 감영(京畿監營)의 앞길에 설치하고 명릉(明陵)을 봉심(奉審)하는 중관(中官)을 기다렸다가 중관이 복명(復命)하자 비로소 환궁하였다.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의 체임(遞任)을 허락하고, 이경호(李景祜)로 이에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8월 15일 경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서 예(禮)를 행하였다. 영상(領相)·국구(國舅)·도위(都尉)·승사(承史)에게 명하여 숙묘 어용(肅廟御容)을 들어와 보게 하였다.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할 때에 도승지 조영진(趙榮進)과 수찬 민홍렬(閔弘烈)이 배종(陪從)하였다. 하교하기를,
"두 신하를 제수한 것은 모두 뜻이 있으니, 최경악(崔景岳)도 선전관으로 제수하라."
하였다. 조영진과 민홍렬은 모두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친속(親屬)이고, 최경악도 육상궁의 친속이다.

 

8월 16일 신미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호조 판서 이경호(李景祜)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예사로운 비답(批答)을 내렸다.

 

8월 17일 임신

임금이 숭릉 기신제(崇陵忌辰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헌 왕후(仁獻王后)께서는 해주(海州)에서 탄강(誕降)하셨는가?"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선전관에게 명하여 부용당(赴蓉堂)과 비각(碑閣)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숭릉 지장(崇陵誌狀)을 읽게 하였는데, ‘각사 노비공(各司奴婢貢)’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비공(婢貢)이 전혀 없다."
하였다.
명하여 북도(北道)263)  의 크고 작은 공선(貢膳)과 갑산(甲山)의 공피(貢皮)는 금년으로 한하여 수납을 정지하게 하였다. 제도 불찰(諸道佛刹)이 궁방(宮房)의 원당(願堂)이 된 것을 혁파(革罷)하고, 팔도(八道)·양도(兩都)로 하여금 효렴(孝廉)·절의(節義)를 찾아서 아뢰게 하였다. 대저 숭릉(崇陵)264)  이 이미 시행한 바로써 지장(誌狀)에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금오(金吾)·추조(秋曹)·포청(捕廳)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고, 한성부에 명하여 시골 백성을 앞에 나오게 하여 농사 형편을 물었으며, 또 종로 거리에 들어온 거지 몇 사람을 불러서 선혜청(宣惠廳)에 보내어 양식을 주게 하였다.

 

문학 이상악(李商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극히 애통한 마음이 있는데, 어찌 관직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의 망부(亡父)인 신(臣) 이존중(李存中)이 간관(諫官)의 이름을 가졌으니,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숨지기 않는 것은 충성을 위한 한 가지 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네 번 바다의 험한 파도를 건너고 아홉 번 죽을 고비를 당했으면서도 후회함이 없었으며, 몰(沒)함에 임해서는 심장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만이지만 너는 힘쓸지어다.’라고 하였으니, 아비와 아들이 죽고 살 즈음에 그 말이 몹시 슬픕니다. 신이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대개 망부(亡父)가 마치지 못한 뜻을 이어서 혹시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도리가 있을까 해서였는데, 벼슬에 처음 올랐을 때에는 어루만져 위로하는 덕의(德意)를 사교(辭敎)에 성대히 나타내시고, 6품에 오를 때에는 전불(剪拂)의 은혜로운 말씀이 전석(前席)에 정중하시니, 신은 감격하여 나오는 눈물이 얼굴에 덮임을 스스로 금할 수 없었습니다. 구원(九原)265)  에 앎이 있으면 또한 마땅히 몸을 바쳐 보답할 것입니다. 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그날 전교에 ‘옛일을 잊고 씻어서 쓴다.’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죽을 죄를 망부의 지나간 일로 돌아보더라도 본래 씻을 단서가 없는데, 신이 등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로써 인한 것이니 진실로 사람의 도리로 편안할 바가 아닙니다. 아! 망부가 생전에 억울함을 품은 것이 비록 더러 신후(身後)에 밝혀짐을 보았으나, 신의 사사로운 마음은 아직 미치지 못하는 통한이 있는데, 하물며 이미 식어진 종적(蹤跡)이라고 하여 차마 그 외로운 아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특별히 불쌍히 여겨서 녹용(錄用)하는 법을 내렸으니, 신이 만약 선부(先父)의 뜻을 밝히기를 생각하지 않고 한갓 은혜의 특별난 것에만 감격하여 의기 양양(意氣揚揚)하게 외람됨을 무릅쓰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평인과 같이하면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나 사람들이 이를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엎드려 빌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의 슬프고 괴로운 간절한 마음을 살피시고 빨리 물리침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이가 젊은 신진(新進)의 무리에게 그 기(氣)를 더하게 할 수 없다. 또 ‘옳지 못한 부모가 없다.’는 의리에 있어 예(例)에 따라 말하면서 억울함을 일컫는 것은 가하겠지만, 어찌 감히 하나의 ‘충(忠)’ 자를 그 상소에 특서(特書)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듯하게 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방자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이상악(李商岳)에게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특별히 시행하여 이 무리의 기를 누르고 그 글을 돌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8일 계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왕세자가 모시고 앉았다. 상참의 명이 내려 참관(參官)이 미처 정제(整齊)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갑자기 먼저 전(殿)에 나와서 연달아 재촉하는 명을 내리고, 훈척(勳戚)·의빈(儀賓) 가운데 마땅히 참여해야 할 자와 김기대(金器大)는 모두 들어오지 말도록 명하였다. 세 대신(大臣)이 늦게 도착하였다 하여 모두 정승을 파면하고, 대사헌        황갑(黃柙)은 즉시 들어오지 않았다 하여 금오(金吾)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이때 명령이 잇따라서 입시(入侍)한 자가 두려워하여 사람의 얼굴 빛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이미 나아가 엎드렸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오늘 세손(世孫)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한 것은 뜻이 있어서 그러하였다. 박필주(朴弼周)가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는 하늘이 낸 역적(逆賊)이다.’라고 말하는데, 조태구의 손자 조영득(趙榮得)이 단서(丹書)에 실렸으니 이는 끝났다고 이를 만하다. 유봉휘는 지금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싸늘하고 뼈가 시리다."
하였다. 또 높은 소리로 하교하기를,
"만약 이광좌(李光佐)가 아니면 누가 감히 문을 닫고 음식을 물리칠 때에 문을 밀고 들어오겠는가?"
하고, 또 손을 들어 책상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최석항(崔錫恒)·이광좌는 조태구의 서열에 두고 조태억(趙泰億)은 최석항의 서열에 두라. 나는 수라(水剌)를 들지 않겠다. 이 뒤로는 동궁(東宮)이 반드시 그 할아버지의 뜻을 받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광좌가 백시구(白時耉)를 혹형(酷刑)하여 죽이고 또 홍계적(洪啓迪)을 죽였으니 잘못이다. 그러나 이광좌가 아니면 내가 오늘날이 있게 되었겠는가?"하고, 연달아 책상을 치면서 옥음(玉音)이 몹시 엄하였다. 도승지        조영진(趙榮進)에게 명하여 최석항·이광좌에게 돌려 줄 직첩(職牒)과 조태억에게 직첩을 주어 서용(敍用)하는 전교를 쓰게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광좌가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이 있겠는가? 만약 이를 저지하는 자가 있으면 임금을 아는 것인가, 당(黨)을 아는 것인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 하교 뒤에 이창수(李昌壽)는 의당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자, 부수찬        이병정(李秉鼎)이 추창해 나가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아들인가? 그가 어찌 감히 오래 엎드리고 있겠는가?"
하였다. 조영진이 전교를 쓰기를 마치고 일어나서 아뢰기를,
"하교하신 처지에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어찌 감히 당습(黨習)을 행하겠습니까? 대신이 지금 들어오지 않았으니, 어찌 두세 중신(重臣)과 더불어 이 중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러 신하가 차례로 그 불가함을 간략하게 말하였다. 수찬        민홍렬(閔弘烈)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의리(義理)의 큰 중요 부분으로써 신의 할아비와 증조(曾祖)는 모두 충(忠)과 역(逆)의 구분에 엄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의리가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가볍게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소리를 높이고 책상을 치면서 말하기를,
"세손(世孫)은 들으라. 민가(閔家)는 모두 치우쳤다. 그 할아비와 증조로부터 그러하였다. 무신년266)                  의 일은 이광좌의 공이 아닌가?"
하매, 민홍렬이 말하기를,
"이광좌가 김일경(金一鏡)을 발탁하여 무신년의 난(亂)을 빚어내게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약원(藥院)의 일을 말하자,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울먹이면서 책상을 치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 차마 역적 신치운(申致雲)의 말을 드러내는가?"
하고,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도록 명하였다. 승지 정창성(鄭昌聖)·구상(具庠), 수찬        박사륜(朴師崙), 장령        정언섬(鄭彦暹), 헌납        정환유(鄭煥猷)와 시위 한광회(韓光會)·정존겸(鄭存謙) 등이 번갈아 불가함을 말하니,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또 금오에 명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하게 하였다가 곧 정지하도록 명하기를,
"민홍렬이 아뢴 바는 매우 놀랍지만, 그저께가 바로 성모(聖母)267)                  의 휘신(諱辰)인데, 어찌 차마 장전(帳殿)에서 친히 국문하겠는가?"
하고, 곧 영남 해변에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

 

윤동도(尹東度)를 내국 도제조로 삼도록 명하였다. 이때 여러 승지가 모두 죄를 입었고, 무승지(武承旨) 서유대(徐有大)가 내린 전교를 두고 나갔는데, 날이 이미 저녁이 되자 다시 승지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세 대신(大臣)을 파면하는 전지(傳旨)를 도로 거두고, 하교하기를,
"이창수(李昌壽)가 조태억(趙泰憶)의 《선원보략(璿源譜略)》 발문(跋文)을 뽑아 내기를 청한 것은 겁내는 것이다. 번거롭게 사과하였으니 무엇을 하려 했겠는가?"
하였다. 명하여 이병정(李秉鼎)을 현임(現任)에서 해면하게 하고, 이어서
"맑은 강은 흰 갈매기 가에 맑고,
흰 갈매기는 언제나 맑은 강 앞에 산다.
모래 빛과 갈매기 빛 모두 희니,
어떤 것이 모래이고 어떤 것이 갈매기인가?
피리 소리에 놀라 갑자기 날아가니,
모래는 모래이고 갈매기는 갈매기일세."
를 외면서 조금 물러나도록 명하였다. 조금 있다가 대신들이 모두 명령을 받고 입시(入侍)하였다. 명하여 북도 위유 어사(北道慰諭御史)의 장계(狀啓)를 읽어 아뢰게 하고서, 하교하기를,
"이제 계문(啓聞)을 보니, 안변(安邊) 고을의 경상(景象)을 눈으로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제 지장(誌狀)을 보았는데,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안변 사노비(寺奴婢)의 공포(貢布)를 일체 모두 견감(蠲減)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문천(文川) 이북을 거의 미루어 알 수 있다. 어사(御史)와 도신(道臣)은 십분 헤아려서 뜻을 다해 구제하여 북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내 뜻을 조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오늘 큰 처분이 있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처분인가?"
하매, 김치인이 말하기를,
"바로 이광좌(李光佐)의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이미 반포했어야 할 것이었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승지가 죄를 입었기 때문에 전교를 애초에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취해 오게 하였다. 김치인이 보기를 마치고 말하기를,
"국시(國是)가 크게 정하여져 세도(世道)가 이에 힘입음이 있는데, 갑자기 이 거조(擧措)가 있으시니 이는 화근(禍根)을 조정에 묻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것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홍렬(閔弘烈)이 잘못이다. 민홍렬이 아뢴 것은 곧 신치운(申致雲)의 말이다."
하매, 김치인이 말하기를,
"그 말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좌가 백시구(白時耉)·홍계적(洪啓迪)을 죽인 것은 잘못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만 말을 찾아 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임금의 뜻이 상참(常參) 때에 비하여 조금 풀렸으나, 김치인 등이 다시 임금의 마음을 격동시킬까 두려워하여 감히 힘써 말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처분을 하면 제방(隄防)이 과연 무너지는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을해년268)   이후로 없어져서 한 색(色)이 된 지 지금 십수 년인데, 만약 변경하여 다시 시끄러움이 생기면 어찌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좌는 무신년의 공이 많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비록 공이 있을지라도 그 죄를 보상하기에 부족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이어서 진달하고,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신이 전에 판윤으로 임명되었을 때에 홀로 차자(箚子)를 올려 징토(懲討)하여 충(忠)과 역(逆)을 분변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신의 집[臣家]의 계책입니다."
하고, 내국 도제조 윤동도(尹東度)도 그 불가함을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좌가 제방(隄防)이 되는가? 이것이 어찌 반드시 근본이 되겠는가?"
하였다. 조금 있다가 또 하교하기를,
"경 등이 세도(世道)를 염려하는데, 내가 어찌 고집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내린 전교를 환수하도록 명하고, 민홍렬을 귀양 보내는 것도 시행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때 처분이 갑자기 내려서 비록 환수하라고 하였으나 중외(中外)의 듣는 이가 놀라고 의혹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정운유(鄭運維)·이재협(李在協)·김광국(金光國)·홍낙인(洪樂仁)·조태명(趙台命)을 승지로 제수하였다.

 

8월 19일 갑술

번개가 쳤다.

 

정언 이지승(李祉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의 서단(逝單)269)  을 상문(上聞)하였는데, 아직 졸(卒)함을 슬퍼하는 윤음(綸音)이 없으셨습니다. 예전에 현묘조(顯廟朝)에 있어 송명흠의 선조(先祖)인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이 일로 인하여 뜻을 거슬려서 임금의 노여움이 풀어지지 않으셨으나 부음(訃音)을 듣자 특별히 애도하는 교서를 내려 급히 조제(吊祭)의 전(典)을 거행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오늘날에 마땅히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명흠의 종래의 은견(恩譴)은 비록 한 번 말함의 잘못으로 인하였으나, 그 처음에 초빙해 왔을 적에 은근히 뜻이 합하는 거룩함은 성조(聖祖)와 부합하였으며, 지금에 와서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 만사(萬事)가 이미 식어진 뒤에 어찌 한 마디 말의 은택(恩澤)으로 시종(始終)을 온전히 하는 의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너의 말이 공정(公正)하다. 들으니 몹시 슬프다. 그 사람이 이미 작고하였으니, 내가 어찌 마음에 두겠는가? 전에 윤봉구(尹鳳九)에게서 나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치부(致賻) 등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명흠(宋明欽)의 일은 측연(惻然)하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작년 봄에 성상께서 특별히 고 찬선 송명흠의 몇 해 전의 처분을 정지하셨으니, 신은 그 입은 죄명(罪名)이 마땅히 특별히 정지하신 가운데 아울러 들어갈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요즘 혹은 말하기를, ‘초선(抄選)270)  에서 뽑아 버리라는 하교인즉, 아울러 넣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니 대저 그때 전교를 각각 내렸기 때문에 이런 의심스러운 의혹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대신(臺臣)의 비답에 사지(辭旨)가 측연(惻然)하여 성상의 뜻을 깊이 보이셨으니 흠앙(欽仰)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만, 당초에 도로 정지하신 것은 이미 특교(特敎)에서 나온 것인즉, 초선의 하교도 그 가운데 같이 들어가야 할 듯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0일 을해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이성원(李性源)을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이육(李堉)을 사간으로, 조중명(趙重明)·홍수보(洪秀輔)를 장령으로, 이동현(李東顯)·박대유(朴大有)를 지평으로, 홍상성(洪相聖)을 정언으로, 구익(具㢞)을 헌납으로, 조창규(趙昌逵)를 부수찬으로, 김기대(金基大)를 문학으로, 김재순(金載順)을 겸 보덕으로, 윤사국(尹師國)을 겸 문학으로, 구윤옥(具允玉)을 호조 참판으로, 유언민(兪彦民)을 동경연으로 삼았다.

 

부수찬 서유녕(徐有寧)의 상소에 ‘부제학 이담(李潭)과 부교리 정창순(鄭昌順)은 혐의(嫌疑)가 있으니 바꾸기를 청한다’고 말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에 따라 위패(違牌)하는 것은 옳지만 어찌 감히 금령(禁令)을 어기면서 상소로 말하는가? 그 글을 주고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악(樂)을 회복하는 하나의 일을 신 등이 여러번 청하였으나, 아직 들어 주지 않으셨으므로 내일 글로써 우러러 청하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만약 정청(庭請)하면 내가 마땅히 사저(私邸)에 돌아가서 누워 있겠다. 사관(史官)이 반드시 내가 고집한다고 기록할 것이나 나는 마땅히 굳게 지키겠다."
하였다.

 

8월 21일 병자

번개가 쳤다.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 엷은 구름 사이로 나와 곤방(坤方)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서너 자(尺) 가량이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승지가 입시(入侍)하니, 명하여 신축년271) 승저(承儲)272)   때의 일기(日記)를 읽고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형(皇兄)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그때에 합(閤)에 나가려고 하였음은 단지 황형만 믿었기 때문이었다. 조태구(趙泰耉)는 진실로 만고의 역적이다. 또 목호룡(睦號龍)을 꾸며 내었으니 심하다. 오늘날에 내 마음을 모두 폈으니 사관(史官)은 이를 기록하라."
하였다.

 

이담(李潭)을 승지로 삼았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영부사(領府事) 홍봉한(洪鳳漢)에게 전유(傳諭)하였다. 홍봉한이 바야흐로 초토(草土)273)  에 있었는데, 임금이 ‘밤낮으로 경을 생각하니 밤 꿈에 두 번이나 보았고 다섯 달이 5년과 같다.’는 하교가 있었다. 대저 홍봉한이 상제(喪制)를 마침이 다섯 달 뒤였기 때문이었다.

 

금년 동지(冬至)의 하례(賀禮)와 명년 정조(正朝)의 하례를 모두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8월 22일 정축

번개가 치고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8월 23일 무인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둘렀다.

 

헌납 구익(具㢞)이 상소하여 일전의 처분을 논하였는데, 예사로운 비답(批答)을 내렸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명하여 탐라(眈羅)의 공마(貢馬)를 정지하고 북도(北道)의 공선(貢膳)과 명년 공선(貢扇)의 반(半)을 감하며, 유둔(油芚)·목물(木物)도 명년까지 한하여 수납을 정지하게 하였다. 또 제도(諸道)의 사사로운 궤유(饋遺)를 금하게 하였다.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서울 군문(軍門) 각사(各司)와 외방 영곤(外方營閫)274)  의 방채(放債)와 식리(殖利)를 엄금할 것’을 청하고, 또 ‘금년 농사가 실패하였으니 먹고 살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무릇 곡물과 비용을 마땅히 십분 절약하고, 공사 수용(公私需用)은 모두 전포(錢布)로 하고 곡식으로 하지 말아서 널리 곡식을 저축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미천으로 보충하게 하라.’고 말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8월 24일 기묘

임금이 의릉(懿陵)275)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명하여 전 지사 윤봉오(尹鳳五)에게 가자(加資)하고,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과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각각 구마(廐馬) 한 필을 내려 주었으며, 고 상신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과 고 판서 윤순(尹淳)·박사익(朴師益)의 자손을 아울러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대저 신축년 세제(世弟)에 오를 때 윤봉오는 바로 계방관(桂坊官)276)  이고, 박명원의 아버지 박사정(朴師正)과 황인점의 아버지 황재(黃梓)와 송인명·조현명·윤순·박사익은 모두 춘방관(春坊官)277)  이었었는데, 임금이 옛일을 추감(追感)하여 여(輿)를 멈추고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 이 교시가 있었다.

 

남태저(南泰著)를 대사헌으로, 안표(安杓)를 대사간으로, 이정오(李正吾)를 집의로, 신경준(申景濬)을 사간으로, 윤석주(尹錫周)를 장령으로, 김둔(金鈍)을 지평으로, 홍경안(洪景顔)을 헌납으로, 송제로(宋濟魯)를 정언으로, 조준(趙㻐)을 수찬으로, 박사륜(朴師崙)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8월 25일 경진

번개가 쳤다.

 

임금이 휘릉(徽陵)278)   기신제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8월 27일 임오

부사직(副司直) 이인배(李仁培)가 상소하여, 삼남(三南)의 교제곡(交濟穀)을 옮겨서 북도 백성을 구제하기를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제 너의 글을 보니, ‘목을 매고 자식을 묻는다.’는 말은 매우 참혹하고 슬프게 들린다. 북도에 삼창(三倉)을 설치한 것이 어찌 남도 백성을 위한 것이었겠는가? 본도(本道)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어사(御史)에게 명하여 적간(摘奸)하는 뜻이 대개 이것이다. 본도에 삼창이 있으니,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영남도 또한 풍년이 든 것이겠는가? 나도 알고 있다."
하였다.

 

부수찬 조창규(趙昌逵)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논핵(論劾)을 입고서 도리어 말한 사람을 욕하는 것도 오히려 조정의 수치가 되는데, 하물며 어떤 사실도 없이 거짓으로 꾸며서 도리어 말한 자의 아비를 욕하는 것이겠습니까? 서명응(徐命膺)이 그 아들을 조종하여 신의 아비를 무고(誣告)하니, 진실로 이는 3백 년 동안 없었던 변괴(變怪)입니다. 신은 진실로 놀라고 통분(痛憤)하며 박절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죽어 없어지고 싶어도 그럴수 없었습니다. 신의 아버지가 해번(海藩)을 다스린 지가 두어 달이 지나지 않아 자리가 따뜻할 겨를도 없이 문득 갈려서 돌아가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일용(日用)을 절약하여 머물러서 전전 도신(前前道臣)의 기축(記縮)을 보충하였으니, 관에 있으면서 몸을 검약(儉約)하게 하였음을 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공문(公門)의 재용(財用)은 나가고 들어온 숫자가 있고 문부(文簿)가 매우 밝으니 상고해 밝히면 서명응이 아무리 속이려고 하더라도 되겠습니까? ‘〈벼슬길을〉 지색(枳塞)하고 통망(通擬)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그때의 전관(銓官)이 서명응 하나 뿐만이 아닌데, 다른 당상(堂上)은 말하지도 않고 듣지도 못한 것을 서명응은 누구와 수작(酬酢)하여 어디를 좇아 지색하는 것입니까? 이조 관료[銓僚]가 함께 있고 온 세상이 모두 알고 있으니, 허실(虛實)의 유무(有無)가 어찌 신의 말함을 기다리겠습니까? 신이 서명응에게는 본래 은혜나 원망이 없었는데, 전의 하나의 상소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오직 몰래 기정(機穽)을 설치하여 차례로 배격하고 전병(銓柄)279)  과 문형(文衡)280)  을 반드시 자기가 맡아서 갑자기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세도(世道)의 깊은 근심이 되기에 신이 진실로 여론을 채택하여 간략하게 논열(論列)함이 있었던 바, 정상(情狀)이 모두 드러나서 변명할 방법이 없게 되자, 거짓을 꾸미고 없는 것을 날조하여 천청(天聽)을 현혹하려고 하여 ‘협감(挾憾)’이라고 하고, 또 ‘부추김을 받았다.’고 하면서 신의 상소 중에 죄를 성토한 것은 결국 한마디도 감히 스스로 밝히지 못하면서, 윤리가 없고 이치에 거슬리는 거조를 내어 신의 몸을 욕하는 것이 분(憤)을 풀기에 부족하여 신의 아비를 욕하여야 뜻이 개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는 책임을 받아서 관리의 부정(不正)을 규탄하는 자는 한없이 많겠으나 어찌 신과 같이 욕을 당한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같은 일을 마음으로 항상 해괴히 여기는 것은 말이 가고 오는 것이 풍화(風化)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조창규(趙昌逵)를 현직에서 해임시키고 그 글을 돌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형조 판서 홍중효(洪重孝)가 말하기를,
"이달 20일에 사노(私奴) 종동(種同)이란 놈이 그 아비 만질(萬質)을 발로 찬 일이 있어, 세 당상관(堂上官)이 합좌(合坐)하여 자복을 받아 곧 계목(啓目)을 들였습니다. 즉시 고복(考覆)281)  함이 마땅하나 연달아 청재(淸齋)282)  를 만나 개좌(開坐)하지 못하였는데, 22일에 그 아비가 마침내 목숨을 구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아비를 죽인 죄인에 관계되어 발로 찬 상처는 이미 친히 살펴 보았으나 지금 시체를 검험(檢驗)한 일이 없는데, 고복이 매우 급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필욱(全弼郁)의 뒤에 또 이러한 일이 있는가?"
하고, 문안(文案)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누이동생이 고발한 것은 진실로 어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오 당상(金吾堂上)이 비원(備員)이 되었는가?"
하니,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신과 구윤명(具允明)이 방금 입시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전필욱(全弼郁)의 예(例)에 의해 결안(結案)하여 거행하라."
하니, 신회가 말하기를,
"위관(委官)이 마땅히 품정(稟定)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의정으로 하게 하라. 이같은 죄인이 어찌 고복을 기다릴 것인가?"
하니, 대사헌 남태저(南泰著)가 말하기를,
"성국(省鞫)283)   죄인은 반드시 형조(刑曹)에서 고복하고 취조한 뒤에야 옥체(獄體)가 비로소 완전히 갖추어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이는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니, 즉시 거행할 뜻을 분부하라."
하였다. 남태저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중묘(中廟)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한 여러 신하 가운데 장릉 묘호(章陵廟號)284)  와 같은 자가 있으니, 청컨대 유사에게 명하여 그 배향한 신하의 신위(神位)의 글씨를 빨리 고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계해년285)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말이 없었는데, 이미 작고한 신하를 임금이 어찌 이름을 고치겠는가? 이는 연계(連啓)할 것이 아니니,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헌납 홍경안(洪景顔)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성(三省) 죄인 종동(種同)을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286)  하였다.

 

8월 29일 갑신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 얇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남쪽 하늘 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서너 자 가량이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고 대신·구관 당상(勾管堂上)이 함께 입시하였다.
함경도 구관 당상 조엄(趙曮)이 한전(旱田)의 수세(收稅)를 답세(畓稅)와 동일하게 한다면서 대신에게 물어 처리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전재(全災)한 곳을 정밀하게 살펴서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사관(李思觀)을 도총관(都摠管)으로 체부(遞付)하도록 명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충청 수사로 삼았다.

 

8월 30일 을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제조 한광회(韓光會)의 체임(遞任)을 허락하고 정홍순(鄭弘淳)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중용(中庸)’ 두 글자로써 전교(傳敎)를 불러 주고 쓰게 하여 뭇 신하를 독려하고 신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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