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1권, 영조 44년 1768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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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병술

시임·원임 대신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진계(陳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악(樂)을 회복하는 한 가지 일로써 앞뒤로 진청(陳請)한 것이 모두 몇 번입니까? 전하께서도 불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면서 사교(辭敎)가 더욱 엄하시니, 아! 금년에 장악(藏樂)하라는 명령은 예(禮)에 없는 예(禮)인데, 특별히 선왕(先王)을 사모하시는 효성으로써 한때의 의(義)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신들은 말로 감동시키지 못하고 정성이 믿음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들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신들에게 더욱 개연(慨然)함이 있는 것은 전하께서 ‘나도 지나침을 안다.’고 하교하시면서 오히려 뭇 신하의 청함을 굳게 막으시니, 어찌 반년(半年)이 지나가도 행하시지 않는 것은 남은 달이 얼마 없으니 혹시 아직 미루고 지내다가 한 해를 기준하시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예악(禮樂)은 잠시라도 몸에서 떠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지금 이 장악은 5월 이전에 이미 그 중정(中正)함을 잃었으니, 5월 이후에는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일찍이 곤룡포(袞龍袍)를 입으시고 문에 임하시어 그 달[朔]을 마치신 뜻을 보이셨는데, 아! 대정(大庭)의 하례(賀禮)를 거행하는 데에 이미 축어(柷敔)287)  의 설치를 폐하였고 난로(鑾輅)288)  를 타실 때에 관약(管籥)289)  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지금 몇 달입니까? 나라의 예(禮)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여론이 더욱 대단합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예가 아닌 것으로써 전하를 인도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악(樂)을 회복하는 명령을 내려서 위로는 천심(天心)에 보답하시고 아래로는 뭇 신하의 뜻에 따르소서. 신들이 또 요청을 얻지 못하면 감히 그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탄일(誕日)의 진하(陳賀)는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고, 열성(列聖)이 행하신 것인데, 금년 서절(瑞節)290)  에 이르러서는 국조(國朝) 4백년에 처음 있는 경사인데, 나라에 전례(典禮)가 없으면 말겠거니와 진실로 전례가 있다면 이번 탄신(誕辰)의 하례를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매번 탄생하신 달을 당하시면 문득 마땅히 행할 예식을 정지하시는 것은 추감(追感)하시는 지극하신 효성과 겸손하신 성덕(盛德)에서 나오신 것임을 압니다만, 지금 보주(寶籌)291)  가 더욱 높으시고 복록(福祿)이 이에 모여서 대덕(大德)에 부합함을 징험하니, 무강(無彊)한 복을 받는 이것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조종(祖宗)이 쌓으신 어진 덕을 이어받고 선왕의 영(靈)이 돌보시는 도움을 받으셔서 지금의 아름다움이 예전보다 빛남이 있으니, 열조(列朝)가 하례를 받는 예식에 따르고 신하의 기쁨을 바치는 정성에 답하는 것은 바로 조종의 아름다움을 밝히고 선왕들이 주신 도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금년의 하례와 아울러 한결같이 정지하실려고 하실지라도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신들의 말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바라건대 죄척(罪斥)하소서. 그렇지 않으시다면 전하께서 어찌 윤허해 따르시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빨리 세 번을 더 생각하시어 아울러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도승지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비답(批答)을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는 무슨 거조(擧措)인가? 이는 무슨 거조인가? 아! 지금 내가 참고 금년을 지내는데 오늘날을 차마 만나니, 나를 낳으시고 나를 기르신 달에 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몸은 비록 집경당(集慶堂)에 있으나 마음은 서교(西郊)292)  에 가 있다. 비록 보통의 해[年]도 그 뜻이 굳은데, 하물며 금년이며 하물며 이달이겠는가? 공성(孔聖)293)  이 길복(吉服)으로 조회하는 날에 이와 같이 나의 화를 돋우니, 경들을 위해 개연(慨然)하게 여긴다."
하고, 곧 단엄(單嚴)294)  으로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다. 궁(宮)에 나갈 때에 내국 도제조 윤동도(尹東度)가 문후(問候)하니, 임금이 엄한 소리로 말하기를,
"몸이 내국 도제조가 되어 한편으로는 하루에 세 번 탕약을 권하면서 하루아침에 2품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서 계청하니, 도제조 윤동도를 특별히 삭출(削黜)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이 대명(待命)하니,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약방(藥房)·정원(政院)·옥당(玉堂)이 청대(請對)하였다.

 

9월 2일 정해

왕세손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고, 정원·옥당·약방·조정의 2품 이상과 육조 당상(六曹堂上)이 문안하였다. 왕세손이 궁관을 보내어 와서 문후(問候)하기를 아뢰어 청하니, 답하기를, ‘지금 마땅히 환궁할 것이니 그만두라.’고 하였다. 묘시(卯時)에 회가(回駕)하여 덕유당(德游堂) 앞에 여(輿)를 멈추고 도승지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전교를 불러 주며 쓰게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나의 병은 첫째도 심기(心氣)이고, 둘째도 심기이다. 제신(諸臣)의 마음을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만, 지금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은 몇 차례의 하교가 한갓 꾸밈[文具]이 되었으니 그 이유를 물으면 바로 내 정성이 옅은 때문이다. 악(樂)을 회복하는 것이 중한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중한가? 형식적인 하례가 중한가? 성심으로 임금을 체득함이 중한가? 이미 우러러 하늘에 호소하고 또한 선왕의 영령(靈英)에게 호소하였다. 물 가운데 돌을 던지는 것은 한 번도 오히려 지나친데, 하물며 두 번이겠는가? 가마[轎]를 머물고 불러 주어 쓰게 한 것을 좌우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시정기(時政記)에 기록하여 백세(百世)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내 마음을 알게 하라."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고 시임·원임 대신이 같이 입시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신들이 죄를 범한 것이 지극히 중하여 성상의 마음에 번뇌(煩惱)를 이루게 하였으나 신들이 고집하는 것은 옳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들어주시지 않으시더라도 신들이 물러간다면 어찌 신하의 직분이겠습니까?"
하고, 여러 대신이 번갈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경들에 대해 개연히 혀를 찬다. 경들의 마음은 옳으나 나는 고집함이 있다."하였다. 윤동도(尹東度)를 삭출(削黜)하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諭示)하였다.

 

이인배(李仁培)를 대사간으로, 심관지(沈觀之)를 장령으로, 송담(宋霮)을 지평으로, 이득신(李得臣)을 정언으로, 조재준(趙載俊)을 부교리로, 이양수(李養遂)를 부수찬으로, 이현영(李顯永)을 사서로, 임희간(任希簡)을 설서로, 이복원(李福源)을 좌윤으로, 남현로(南玄老)를 사간으로, 남언욱(南彦彧)을 장령으로, 권극(權極)을 지평으로, 이사조(李思祚)를 정언으로, 김원행(金元行)을 찬선으로, 홍계능(洪啓能)을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차자(箚子)를 올려 병이 있음을 칭탁하여 사면하고 겸하여 ‘악(樂)을 회복하고 하례를 받을 것’을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남태저(南泰著)도 차자를 올려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3일 무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과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차자를 올려 견책(譴責)을 청하니,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9월 4일 기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관동(關東)295)  ·관북(關北)296)  ·영남의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을 미리 신칙하여, 완급(緩急)을 상세히 살펴서 때에 맞추어 구조하여 봄 진휼(賑恤)이 있기 전에 유산(流散)하는 근심이 없도록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장령(掌令) 남언욱(南彦彧)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송담(宋霮)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연석(筵席)에서 아뢰고 대답함은 사체가 엄중합니다. 지난번 민종렬(閔鍾烈)의 상소는 이미 언사(言事)에 관계되는 것인데, 어떤 한 승선(承宣)에게 물으시니 사면(辭免)을 청하는 글이라고 멍청하게 대답하여, ‘돌려주라’는 명령이 있게 되었으니, 일이 비록 이미 지나간 것이지만 가볍지 않은 것에 관계되므로 해당 승선을 빨리 벼슬을 깎아 바꾸도록 명하소서. 병조 판서 한광회(韓光會)는 어리석고 무식하여 경기 감영(京畿監營)의 무예(武藝) 시험에서 마음대로 사사로움을 따랐으므로, 대료(大僚)가 파직을 청하였고, 북경 시장[燕市]에서 무역하면서 친히 스스로 값을 부르자 통역이 타매(唾罵)하였으며, 좌이(佐貳)297)  를 전형(銓衡)할 적에 정망(政望)298)  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여 좌우에서 영(令)을 받았으니, 본병(本兵)299)  의 중한 임무를 어찌 이같은 사람과 의논하겠습니까? 마땅히 벼슬을 깎아 바로잡는 법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형조 판서 홍중효(洪重孝)는 크고 작은 옥송(獄訟)을 일체 자기의 사사로움에 맡겨서 청촉(請囑)이 어지럽고 부유(富裕)한 서리(胥吏)를 공갈하여 강제로 형배(刑配)를 가하였다가 곧 속방(贖放)하였으므로 거조(擧措)가 현혹하고 추한 자취가 더욱 드러났으니, 견책(譴責)과 삭직(削職)의 법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첫머리에 진달한 일은 전례에 따라 범연히 아뢰었으니, 비록 깨우치려고 할지라도 율(律)을 어찌 과중하게 하겠는가? 병조 판서는 일에 따라 경계하고 힘쓰게 하는 것이 옳겠으나, ‘용렬하고 어리석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그리 박절한가? 형조 판서는 집체(執滯)하다고 이른다면 옳으나, 지금 이 말을 나는 결코 공(公)이 아니라 여긴다. 승선의 이름을 물으니 또한 한필수(韓必壽)이다. 이 사람은 허술하고 어리석다고 이르면 옳으나, 옹폐(壅蔽)하였다고 지목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다. 이미 공(公)이 아닌데 내가 어찌 용서하겠는가? 삭직하는 것을 특별히 허락한다."
하였다가 곧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고, 단지 함사 추고(緘辭推考)300)  하게 하였다.

 

9월 5일 경인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가 상소하여 견책(譴責)을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9월 6일 신묘

통제사(統制使) 이한응(李漢膺)을 잡아다 국문하여 처치하도록 명하였다. 봉진(封進)한 전복(全鰒)의 맛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9월 7일 임진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하교하기를,
"그 숙(叔)이라고 일컫고, 그 형(兄)이라고 일컬으며 그 동생이라고 일컬으면서 서형(庶兄)으로 가칭(假稱)하여 복제(服制)하는 것은 이 폐단이 향무(鄕武)로 말미암은 것인데 중관(中官)이 이를 본받으니, 윤리(倫理)가 없고 의리(義理)를 어지럽게 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예전에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가 한번 도헌(都憲)301)  이 되자 남녀가 길을 달리하였는데, 하물며 그 임금이 된 자이겠는가? 어찌 다만 대순(大舜)이 이른바, ‘친하지 아니하고 공손하지 않는다.’는 것에 비할 뿐이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그 진시(陳試)302)  를 위하여 또한 이 폐단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이군행(李君行)이 이르기를, ‘임금 섬기기를 구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이는 그 임금을 섬기려고 하면서 먼저 윤리가 없는 자이다. 유건(儒巾)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으면서 어찌 차마 이것을 하겠는가? 이를 경·외(京外)에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명하여 병조 판서 한광회(韓光會)의 체차(遞差)를 허락하고, 우참찬 정홍순(鄭弘淳)으로 대신하며, 한 광회를 우참찬에 제수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장계(狀啓)를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바다를 건너던 역관(譯官) 이창기(李昌基)가 왕사(王事)로 인하여 바다를 건너다가 시신(屍身)으로 실려 돌아왔으니 듣기에 몹시 비참하다. 진청(賑廳)으로 하여금 처자(妻子)를 고휼(顧恤)하게 하며 포수(砲手)·사령(使令)이 이역(異域)에서 물고(物故)한 것도 역시 잔인(殘忍)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9월 8일 계사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글이 제왕(帝王)의 높음을 감동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다시 문자(文字)를 올려서 하정(下情)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오늘날 나라에 큰 근심이 없고 백성의 생활이 굶주려서 쓰러지는 데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팔도의 노인으로 말하더라도 지극히 형통하고 아름다운 운세를 만났으니, 사방에 〈근심되는〉 한 가지 일도 없다고 이를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침묵한 지 잠시 뒤에 하교하기를,
"금년 농사도 〈근심되는〉 한 가지 일도 없다고 이를 만한가?"
하였다.

 

9월 9일 갑오

형조 판서 홍중효(洪重孝)가 상소하여 대변(對辯)하기를, ‘신은 그 버릇을 통탄하여 형벌로 다스렸는데, 그는, 부(富)함을 생각하여 보복하였다고 말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원점 유생(圓點儒生)303)  에게 구일제(九日製)304)  를 시험하여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이정훈(李正薰)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9월 10일 을미

번개가 쳤다.

 

대신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입대(入對)를 요구하고 종신(宗臣)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탄일(誕日)에 진하(陳賀)하기를 청하였는데, 2품의 좌목(座目)을 읽으라 명하여 마치자, 종신도 외조(外朝)305)  를 따라 상소하였다 하여 모두 직을 파면하고, 또 약원(藥院)에 명하여 문후(問候)하지 말게 하였다. 약방과 시임·원임 대신이 입대를 요구하여 세 번 계달하니, 비로소 입시를 명하였으나 밤이 이미 이고(二鼓)가 되어 청함을 얻지 못하고 물러갔다.

 

장령 남언욱(南彦彧)이 상소하여 한광회(韓光會)가 배척을 당한 것을 송사[訟]하면서 송담(宋霮)을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기를 청하고 또 김해 부사(金海府使) 윤면동(尹冕東)의 남살(濫殺)을 논하여 본도(本道)306)  로 하여금 사문(査問)하게 하기를 청하며, 또 영광 군수(靈光郡守) 황간(黃榦)의 탐활(貪猾)과 서천 군수(舒川郡守) 유진열(柳鎭說)의 불법(不法)을 논하여 아울러 파직하기를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중신(重臣)의 일을 그 사람이 대신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니, 또한 과연 대간(臺諫)의 체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윤면동은 먼저 파면한 뒤에 잡아다 국문하고, 황간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하게 처분하게 하며, 유진열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우참찬 한광회(韓光會)가 상소하여 대변(對辯)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조제태(趙濟泰)를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9월 11일 병신

종신(宗臣)을 면직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고 뒤에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당하 문관(堂下文官)에게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수석을 차지한 이득화(李得華)에게 반숙마(半熟馬) 한 필을 내려 주었다.

 

9월 12일 정유

예조 참판 서명응(徐命膺)이 상소하여 천우 오장(天佑五章)의 시(詩)를 올렸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하늘이 덕(德)을 도우니, 덕은 수(壽)를 얻는다.
밝고 밝은 저 해와 밝고 밝은 그 북두성(北斗星)은
진실로 강건(剛健)하여 이에 유구(悠久)하다.
놓아 두고 쓰지 아니하는 지팡이가 오른쪽에 있다.
하늘이 덕을 도우시니, 덕은 녹(綠)을 얻는다.
거룩하심이 아름다움을 짝하여 온 나라에 퍼졌다.
오고 가는 큰 길에는 흰 머리가 반(半)이다.
예전에 수역(壽域)을 들었더니, 지금에야 수역을 보았다.
하늘이 덕을 도우니, 덕은 이름을 얻는다.
우리 젊은 선비를 양성하사 노성(老成)함에 이르렀다.
오히려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시니, 귀밑 머리 푸르다.
진실로 사람을 만드시니, 장수하는 주왕(周王)이시다.
덕의 근원인 효성은 끝이 없다.
순(舜)은 오십에도 부모를 생각하였는데,
우리 왕은 지금 팔십에도 사모하신다.
하늘이 내려 보시니, 도우심이 거듭한다.
도우심이 무엇인가? 긴 눈썹 천년을 수하신다.
남쪽에 남극성(南極星)이 있어, 우리 동방(東方)에 비친다.
붉은 대궐 뜰에 임하여 빛을 발하니
아름답고 빛나서 그 상서로움이 밝다.
상서로움이 무엇인가? 만수 무강(萬壽無彊)하심이다."
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평양부(平壤府)의 초시(初試)에 입격한 무사(武士)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여 삼중(三中) 이상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이 있게 상(賞)을 내렸다. 도승지 이담(李潭)이 서명응(徐命膺)이 송도(頌禱)한 진장(陳章)과 상소 끝에 올린 시(詩)를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옛 이야기다.’라고 하며 읽어 아뢰기를 명하고, ‘지척에 있는 수문(脩門)307)  에서 하나의 글로써 대신한다.’고 하여 그 직을 해임하고 그 글을 보내도록 하였다.

 

이계(李溎)를 지평으로, 송취행(宋聚行)을 정언으로, 윤양후(尹養厚)를 필선으로 삼았다.

 

9월 13일 무술

대전 탄일(大殿誕日)이다. 승정원·옥당(玉堂)·약방(藥方)·조정 2품 이상·육조 당상(六曹堂上)·대사헌·봉조하(奉朝賀)가 정후(庭候)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대신(大臣), 문(文)·음(蔭)·무(武)의 종2품 이상과 종신(宗臣) 정2품 이상을 소견하였다. 유신(儒臣)에게 《소학》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임금이 ‘제사(題辭)’를 읽기를 마치고 기사(耆社)308)  의 여러 당상관에게 차례로 나아가 읽게 하여 각각 표피(豹皮) 한 장을 하사하고, 각각 소잠(小箴)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2품 이상이 모두 앞에 나아가 성명(姓名)을 아뢰었다. 약방에 명하여 송절다(松節茶)를 올리게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전에 약방 제조를 지낸 여러 신하와 여섯 승지에게 모두 술잔을 올리도록 허락하고, 또 차례로 스스로 따라 마시게 하였다. 대신·기로소(耆老所) 당상관·승지와 사관(史官)에게는 각각 어필(御筆) 여덟 글자를 내렸다.

 

9월 14일 기해

임금이 종묘 망제(宗廟望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참찬 윤급(尹汲)을 파직하고 비국 부제조        조영순(趙榮順)을 나처(拿處)하도록 명하니, 명령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도(諸道)의 전문 차원(箋文差員)309)                  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풍년인가 흉년인가를 묻고, 또 시골 백성을 불러들여서 농사 형편과 시장 값을 물었다.

 

지평 권극(權極)이 ‘성궁(聖躬)을 보호해 아끼며 동궁(東宮)을 가르치고 지도할 것’을 상소로 진달하여 우러러 힘쓰게 하였는데, 보통 평범한 말로 비답(批答)하였다.

 

지평 이계(李溎)가 상소하여, ‘남언욱(南彦彧)이 배척을 당한 중신(重臣)310)  을 분소(分疏)하고, 사람을 논핵한 언관(言官)을 협박하였다.’는 이유로 개정(改正)하기를 청하였다. 또 ‘홍중효(洪重孝)가 도리어 꾸짖고 욕하였다.’는 이유로 견책하여 파직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글을 돌려 주고 시종안(侍從案)에서 영구히 간삭(刊削)하라고 명하였다.

 

9월 15일 경자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어제(御製) 두 글귀[句]를 써서 내리기를, ‘옛 해는 경진일311)  이고 오늘은 경자일312)  이다. 75세는 진실로 뜻 밖이다.[昔年庚辰今日庚子七十五年此誠料表]’라고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나의 탄생한 때가 바로 무인(戊寅)313)  이기 때문에 15일 간지(干支)가 경진(庚辰)이 되고, 이번은 탄생일이 무술(戊戌)314)  이기 때문에 오늘은 바로 경자(庚子)이다. 일간(日干)이 공교롭게 부합한다."
하였다. 대신(大臣)과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어제(御製)에 이어서 글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종신(宗臣)·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의 나이가 70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모두 비단을 하사하고 홍명원(洪命源)에게는 특별히 지중추(知中樞)를 제수하였다. 승지 홍성(洪晟)의 아버지이다.

 

입직(入直)한 무신(武臣)을 불러서 능마아강(能麽兒講)을 시험하였다.

 

9월 16일 신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과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차례로 《소학》을 읽게 하고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지평 권극(權極)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이인배(李仁培)를 훈융 첨사(訓戎僉使)로, 사간 남현로(南玄老)를 줄온 만호(乼溫萬戶)로, 집의 이정오(李正吾)를 문산 만호(文山萬戶)로, 교리 심관지(沈觀之)를 옥강 만호(玉江萬戶)로, 교리 박취원(朴取源)을 두모포 만호(豆毛浦萬戶)로, 수찬 민홍렬(閔弘烈)을 월송 만호(越松萬戶)로, 사서 이현영(李顯永)을 삼례 찰방(參禮察訪)으로 특보(特補)하였다. 모두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곧 이정오를 봉상 판관(奉常判官)으로, 박취원을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민홍렬을 황산 찰방(黃山察訪)으로 바꾸었다.

 

9월 17일 임인

대사성에게 명하여 강(講)에 능한 유생(儒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각각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외게 하였다.

 

김귀주(金龜柱)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당상(堂上) 무신(武臣)에게 녹사(祿射)를 시험하였다.

 

검열(檢閱) 권진(權禛)이 상소하여, ‘봉교(奉敎) 박도인(朴道仁)의 조부(祖父) 박윤동(朴胤東)은 죄를 지은 것이 예사롭지 않으니 함께 동료(同僚)가 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그 글을 돌려 주고 그의 관직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박윤동의 이름이 만약 단서(丹書)315)  에 있다면 내가 어찌 그 손자를 조용(調用)하겠는가? 이제 권진이 그 조부(祖父)의 충(忠)을 드러내려고 하여 박도인을 함정에 빠뜨리니,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어찌 완전한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권진이 그 조부 권변(權忭)의 명절(名節)316)  을 훌륭하게 일컬으면서, ‘박도인과 반열(班列)을 같이 하면 장차 선조(先祖)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여기에 미쳤다.

 

9월 19일 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대신(大臣)과 중재(重宰)는 마땅히 각각 마음에 품은 바를 진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묵묵히 말이 없으면 내일 마땅히 상참(常參)을 해야 할 것이며 내일도 침묵하면 모래에 마땅히 조참(朝參)을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휘지(李徽之)를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니,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뢴 것이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신이 수석(首席)에 있는데 이휘지의 이 제수(除授)는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이휘지는 김치인의 처남[妻弟]이다. 김치인이 또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의 아내가 작고(作故)하였음을 우러러 아뢰니, 모든 일을 그 남편의 품계에 따라 제급(題給)하도록 명하였다. 한익모가 장법(贓法)을 엄하게 할 것을 청하고, 또 과장(科場)을 신칙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본을 바르게 하는 계책은 먼저 시관(試官)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 예전에 황조(皇朝)317)  에서는 시관이 사사로움에 따르는 자는 껍질을 벗겨서 과장 가운데 걸었는데, 지금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나도 이 껍질을 보고자 한다."
하였다. 비국 부제조 조영순(趙榮順)을 석방하여 행공(行公)하도록 신칙하라고 명하니, 한 익모가 아뢴 것이다. 지평 권극(權極)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0일 을사

호남 어사(湖南御史) 서호수(徐浩修)가 복명(復命)하니,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종덕(李宗德)에게는 옷감[表裏]을 내려 주고, 장성 부사(長城府使) 홍익필(洪益弼)과 순창 군수(淳昌郡守) 신경조(申景祖)는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니, 어사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표장한 것이다.

 

9월 21일 병오

보사 공신(保社功臣)의 적장(嫡長)에게 녹(祿)을 주는 과(科)를 감하였다. 호조 판서 이 경호가 아뢴 것이다.

 

9월 22일 무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북병사(北兵使) 조제태(趙濟泰)에게 조회를 기다려서 사조(辭朝)하라고 명하였었는데, 조제태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그 거만함을 의심하여 장차 영남 해변에 귀양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좌의정 한익모(韓翼謨)·병조 판서 정홍순(鄭弘淳)·금위 대장 이장오(李章吾)가 모두 ‘조제태는 정세가 나아가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하자, 임금이 다그쳐 물으니 비로소 조영순(趙榮順)이 조제태가 강계(江界)에 있을 때의 일을 말하였다고 말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탄박(彈駁)과 다름이 없다. 무신(武臣)이 당(黨)에 있는 것은 문재(文宰) 때문이다."
하고, 둘을 모두 파면하도록 명하였다.

 

9월 25일 경술

임금이 창덕궁에 거둥하였다.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여 선원전(璿源殿)에서 예를 행하였다.

 

9월 26일 신해

해에 왼쪽 고리[左珥]가 있었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갔다. 왕세손이 모시고 앉았는데 문과(文科)·무과(武科)를 설시(設試)하여 신사찬(申思贊) 등 열 사람을 뽑았다. 신은(新恩)318)  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는데, 신사찬이 시제(試題)를 외우지 못하므로 뽑아 버리고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김처곤(金處坤)은 대신 제술한 것을 자복하니 뽑아 버리도록 명하고, 이덕사(李德師)는 권봉(券封) 가운데 그 아버지의 계함(階銜)은 있고 실직(實職)이 없으므로 뽑아 버리라고 명하였다. 을과(乙科) 홍종신(洪宗藎)을 갑과(甲科)에 권부(權付)하였다. 홍종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송절다(松節茶)를 받들어 바쳤다. 송절다는 바로 홍종신의 아버지 홍성(洪晟)이 올린 처방이다. 명하여 백관(百官)의 대가(代加)에 통덕랑(通德郞) 품계를 바로 주는 것을 금하라고 명하니, 이덕사의 아버지 이징택(李徵澤)이 통덕랑 품계로 인하여 한 자급(資級)를 얻어서 대부(大夫)가 되어 품계를 가함에 차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하(陳賀)할 때에 치사(致詞)를 읽는데, ‘현준(賢俊)을 등용(登庸)하였다.’는 글귀에 이르러 임금이 손으로 귀를 막았다.

 

홍산(鴻山) 사람 조의진(趙毅鎭)이 행문(行文)319)  으로 권(券)을 올렸는데, 말이 지극히 거짓되었으므로 금오 당상(金吾堂上)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여 친히 묻기를 마치고, 추조(秋曹)에 출부(出付)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유배시켜 종을 삼게 하였다.

 

김면행(金勉行)을 대사간으로, 강윤(姜潤)을 집의로, 한종제(韓宗濟)·한집(韓鏶)을 장령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사간으로, 이득복(李得福)을 헌납으로, 이동태(李東泰)를 보덕으로, 서형수(徐逈修)를 사서로, 윤봉오(尹鳳五)를 좌참찬으로, 이사관(李思觀)을 형조 판서로, 이복원(李福源)을 예조 참판으로, 심이지(沈履之)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9월 27일 임자

임금이 환궁(還宮)하여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다시 선비를 시험하였다. 어제 원방(原榜)320)  에서 뽑아 버린 자가 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과거를 실시하여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9월 28일 계축

과차(科次)321)  가 입시하여 진사(進士) 홍낙원(洪樂遠) 등 세 사람을 뽑고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9월 29일 갑인

임금이 종묘(宗廟)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황해 감사(黃海監司) 윤득양(尹得養)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재결(災結) 2천 5백 결(結)을 더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2천 5백 결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여 5백 결을 더 주게 하였다.

 

방(榜)에서 뽑아 버린 사람 이덕사(李德師)를 원방(原榜)의 병과(丙科)에 도로 붙여서 홍패(紅牌)를 주어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이 그 〈아버지의〉 품계는 있고 실직(實職)이 없는 사실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지평 권극(權極)이 상소하여, ‘설강령(設講令)이 있기 이전에 강(講)으로써 뽑아 버림을 당한 자와 주금령(酒禁令) 전에 술로써 율(律)을 입은 자를 참작해 용서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조중첨(趙重瞻)의 일을 나는 지금까지 애석해 하고 있는데, 이번의 청함은 조(趙)·송(宋)을 모두 청하는가?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대신(臺臣)이 청할 바가 아니다. 전번의 술을 금하는 일에 네 말은 모순(矛盾)이 없겠는가? 주금(酒禁)이 아직 풀리지 아니한 때에는 일률(一律)을 청함에 이르렀고, 주금이 이미 풀린 뒤에는 곧바로 이러한 요청이 있으니, 현위(弦韋)322)  를 겸하여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권극의 상소로 인하여 윤구연(尹九淵)이 극률(極律)을 입었고, 조중첨·송재중(宋載中)이 강(講)에 떨어져서 뽑아 버렸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여기에 미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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