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1권, 영조 44년 1768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14. 19:51
반응형

10월 1일 을묘

지평 권극(權極)이 인피(引避)하여 체직을 청하면서, ‘저 금령 전에 술로써 율(律)을 입었던 것은 애초에 신의 헤아린 바가 아니며, 금령이 이미 풀리자 온 세상이 이를 슬퍼하여 모순(矛盾)이라고 말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10월 2일 병진

번개가 쳤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이덕사(李德師) 한 사람을 뽑았다.

 

10월 3일 정사

이의로(李宜老)·이재간(李在簡)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5일 기미

대사성 이휘지(李徽之)가 상소하여 괴원 부제조(槐院副提調)를 사임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신이 전에 사체(事體) 사이의 일로써 구선복(具善復)을 파면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아들 구이겸(具以謙)이 비국 낭관이 되어 도행(島行)에서 들어온 지 이미 며칠이 되었으나 아직 신을 보지 아니하니, 사체가 있는 바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황산 찰방(黃山察訪)        민홍렬(閔弘烈)의 보외(補外)를 시행하지 말고, 전 찰방을 유임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김면행(金勉行)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내국(內國)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천지인(天地人)’으로써 책문(策問)을 내어 승지·옥당·춘방(春坊)·한림(翰林)·주서(注書)·기조 당랑(騎曹堂郞)323)  에게 제진(製進)하도록 명하였다.

 

10월 6일 경신

임금이 태묘 동향 대제(太廟冬享大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문무 기로과(文武耆老科)의 사람을 불러 보고 각각 면(麵) 한 그릇을 내려 주었으며, 이정철(李廷喆)·고몽성(高夢聖) 및 무과(武科)의 81세인 사람에게는 명주 한 필을 더 주게 하였다.

 

박사륜(朴師崙)·홍상간(洪相簡)을 지평으로, 김낙수(金樂洙)를 헌납으로, 민종렬(閔鍾烈)을 부교리로, 신광리(申光履)를 수찬으로, 김종정(金鍾正)을 공조 참판으로, 안집(安𠍱)을 좌윤으로, 윤급(尹汲)을 좌빈객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우빈객으로 삼았다.

 

10월 7일 신유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진소(陳疏)하여 체임(遞任)할 것을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어석정(魚錫定)을 승지로 삼았다.

 

응제(應製)에 수석을 차지한 응교 홍억(洪檍)에게는 큰 녹비(鹿皮) 한 장을 하사하고 차석을 한 설서 임희간(任希簡)·수찬 임희교(任希敎)·문학 김기대(金基大)·교리 조재준(趙載俊)에게는 각각 지필묵을 내려 주었으며, 전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에게는 어필(御筆)로 삼상(三上)을 써서 호피(虎皮) 한 장을 하사하였다.

 

10월 8일 임술

찬선 김원행(金元行)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은 최하의 인품으로 산림(山林)에서 스스로 몸을 닦는 소양(素養)이 없으면서도 한갓 선음(先蔭)에 힘입어 외람되게 영화롭고 높은 자리를 절취하였으니, 성조(聖朝)의 불러온 은혜를 욕되게 한 것이 이미 오래인데, 전에 고(故) 찬선(贊善) 신(臣) 송명흠(宋明欽)이 견책(譴責)을 입은 이래로부터 엄지(嚴旨)를 여러 번 내리시어 초선(抄選)이 크게 넘침을 개탄스러워 하시니, 무릇 한 때 정초(旌招)의 반열에 있는 자가 차례로 삭출(削黜)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 참람함을 논한다면 신이 진실로 우두머리가 되는데, 돌아보건대 홀로 면한 것은 사람이 못나고 행적이 천(賤)하여 우연히 살피지 아니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쪽은 말함으로써 그러했고, 이쪽은 말이 없음으로써 그러한 것입니까?
대저 사람의 출처(出處)와 어묵(語默)은 각각 그 의리(義理)가 있는데, 신이 말하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사정(事情)이 슬프고 억울함으로 인연하여 감히 여러 사람을 따라 몸이 나아가지 못하였고, 몸이 이미 나가지 못하므로 말을 감히 홀로 내지 못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그 충성하기를 원하는 구구(區區)한 마음이야 신과 말한 자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이 항상 소중히 여기는 말은,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의 말에, ‘신이 특히 이덕형(李德馨)에게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을 이덕형은 이미 말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신은 오늘날 송명흠과 이것에서 거의 같습니다. 송명흠이 삭탈(削奪)을 당하는 날은 바로 신이 삭탈을 당하는 날입니다. 비록 성상께서 굽혀서 너그럽게 용서하심을 가하셨을지라도 신이 어찌 감히 이로써 스스로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지난번에 천심(天心)324)  이 지극히 어지셔서 끝내 버리는 물건이 없어 광탕(曠蕩)325)  의 은혜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까지 모두 미쳤으므로 중외(中外)가 서로 고하여 모두 성덕(聖德)을 칭송하였는데, 신의 부끄러움이 이에 더욱 심해졌습니다. 하물며 송명흠이 올린 말을 생각하니 곧 한결같은 진심에서 나온 정성으로, 단지 성상의 세상에서 드문 지우(知遇)를 보답하려고 충성과 사랑을 다하고자 힘쓸 뿐이었으니, 어찌 혹시 일호라도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밝은 빛이 비치지 아니하여 한(恨)을 품고 영원히 갔으니, 오늘날에 이르러 신정(宸情)326)  이 이를 추도(追悼)하여 은전(恩典)을 이미 거행하였으나, 홀로 이 사람에게는 오히려 한마디 말로 밝게 풀어서 땅 속의 넋을 위로함을 입지 못하였는데, 신은 은혜를 받음이 홀로 치우쳐서 영화로운 은총이 여전하였으므로, 바로 외람되게 받은 것 또한 송명흠 당시의 직명(職名)327)  입니다. 신이 이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며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불안한 마음이 또한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또한 본래 사의(私義)에서 벗어난 것이라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는 하나의 단서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저번에 처분하고 이번에 그대를 불렀으니, 외면은 비록 같지 아니하나 내면은 바로 괴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대는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곧 빨리 올라와서 나의 충자(冲子)를 보필하라."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니, 호남 도신(湖南道臣)의 분등 장문(分等狀聞)을 읽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만약 풍패(豊沛)를 물으면 함흥(咸興)과 전주(全州)가 한가지이다. 호남의 삼명일(三名日)328)  의 방물(方物)·물선(物膳)·삭선(朔膳)을 모두 반(半)으로 감하는 일을 분부하라."
하였다.

 

대신(大臣)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호남에 재결(災結) 1만 결을 더 주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호서 어사(湖西御史) 홍윤(洪鑰)이 복명(復命)하고 입시하였다. 영광 군수(靈光郡守) 황간(黃柙)을 그 지역에 귀양 보내고 전 이산 현감(尼山縣監) 이황중(李黃中)을 금고(禁錮)하라고 명하니, 어사의 장계로 인한 것이다.

 

10월 9일 계해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옥당 상하번(玉堂上下番)에게 명하여 《소학지남(小學指南)》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여 돌려가면서 읽기를 마치자, 수찬(修撰) 신광리(申光履)가 말하기를,
"근래에 진신(搢紳) 사이에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여 지난번 조창규(趙昌逵)의 상소에 답한 하교에서 칙려(飭勵)하는 뜻을 깊이 보이셨는데, 서호수(徐浩修)의 위에 전달되지 못한 상소에는 꾸짖고 욕함이 갖추어졌고, 조창규의 오늘 승정원에 도착한 상소도 말을 가리지 아니함이 많았으니, 마땅히 견책하여 파면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체통을 얻었으니, 모두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신광리가 또 외보(外補)한 여러 사람을 모두 분간(分揀)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또 서유린(徐有隣)의 방축(放逐)을 용서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또 송재경(宋載經)·김상묵(金尙默)을 석방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하나는 부효(浮囂)하고 하나는 조경(躁競)하니 후폐(後弊)를 이기기 어렵다. 수찬 신광리에게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교리 홍검(洪檢)이, ‘포용(包容)함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뜻으로써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영호(營護)한다 하여 체직(遞職)하도록 명하고, 조종현(趙宗鉉)을 교리로, 홍낙신(洪樂信)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10일 갑자

조석목(趙錫穆)을 정언으로, 홍윤(洪鑰)을 부수찬으로, 이택수(李澤遂)를 사서로, 조준(趙㻐)을 겸 문학으로, 유수(柳脩)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아비가 아들을 가르치지 아니하면서 무슨 얼굴로 감전(監煎)329)  하겠는가? 이창수(李昌壽)의 내국(內局)의 임명을 특별히 체차(遞差)하고 홍낙성(洪樂性)으로 이에 대신하게 하라."
하였다가, 곧 이사관(李思觀)으로 이를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형조 판서를 종(從)2품으로써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의망(擬望)하여 들이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서명응(徐命膺)·조영진(趙榮進)은 전조(銓曹)로 하여금 다시는 검의(檢擬)하지 말도록 하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조용히 그 아들을 가르치게 하라. 이창수는 이미 하교하였는데, 그 아들이 어찌 직을 가지겠는가? 그 관직을 체임하여 탁무(卓茂)330)  의 뜻을 써서 이세연(李世演)을 제수하라."
하였다. 이창수의 아들 이병정(李秉鼎)이 관직(館直)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다. 또 하교하기를,
"찬선 김원행(金元行)에 대하여 지난번에는 그 마음을 아름답게 여겼는데, 이번 상소에서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을 일컬으니, 그 마음이 저절로 드러난다. 여러 신하를 영호(營護)하는 것은 마음이 또한 구차한 것이니, 어찌 어린 세손(世孫)을 돕기를 바라겠는가? 그 직을 해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판서의 가망(加望)331)  이 얼마나 중한 것인데, 서리(書吏)로 하여금 써서 묻게 하였으니 이와 같이 편한 것을 취하면 어찌 누워서 묻지 않겠는가? 판서 조명정(趙明鼎)을 파직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병을 칭탁하여 사면하기를 청하면서 형조 판서의 가망(加望)을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호서 도신(湖西道臣)을 파직하라고 명하니, 분등(分等)의 장계를 지체(遲滯)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조 참판 황경원(黃景源)을 특별히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삼고, 특별히 홍낙순(洪樂純)을 충청 감사로 제수하였으며, 정실(鄭宲)을 이조 판서로, 정존겸(鄭存謙)을 이조 참판으로, 이미(李瀰)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대사간 김면행(金勉行)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세택(李世澤)을 단양(丹陽)에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세택이 전임(前任) 인동 부사(仁同府使) 때에 품관(品官)이 향회(鄕會)에서 사람을 죽였는데, 이세택이 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주었는데, 뒤에 단양은 땅이 가깝다고 하여 다시 종성(鍾城)에 유배(流配)하였다.

 

10월 11일 을축

채제공(蔡濟恭)·윤시동(尹蓍東)·홍지해(洪趾海)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12일 병인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콩과 같았다.

 

이익원(李翼元)을 승지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도승지 채제공(蔡濟恭)에게 명하여 어제(御製)를 편차(編次)하게 하고 이름을 《집경당편집(集慶堂編輯)》이라고 하여 운각(芸閣)332)  으로 하여금 활자로 인쇄하게 하였다. 이어서 구윤명(具允明)·이담(李潭)과 함께 편집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승보(陞補)에 초선(抄選)된 유생(儒生) 180명을 소견하고, 차례로 뜰에 올라와서 성명(姓名)을 아뢰고 각각 지은 글의 몇 구(句)를 외게 하였는데, 차례를 넘어서 계단을 오른 자가 있자, 하교하기를,
"너희들이 처음 임금을 보는 날에 감히 난잡하느냐?"
하고,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10월 13일 정묘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어저께 청대(靑臺)333)  의 보고가 어찌하여 이르렀습니까? 달은 천둥 소리를 거두는 때가 지났고 절후는 만물을 갈무리하는 시기에 속하였는데, 작은 눈이 뿌리다가 문득 많은 비가 내리며 또 천둥 소리가 우르릉거리는 이변(異變)이 있으니, 시인(詩人)이 ‘불안하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탄식이 불행하게도 이에 가깝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밤낮으로 나라를 근심하고 부지런하시며 만년(晩年)의 정사에 더욱 힘쓰시어 엄하고 공손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시면서 천도(天道)를 받들어 순응하시니, 마땅히 음양[二氣]이 순조롭고 모든 조짐이 이에 합할 것인데, 지금 이 견고(譴告)는 어찌하여 이처럼 정녕(丁寧)합니까?
신 등이 일찍이 듣건대 임금의 한 마음은 하늘과 서로 통하여 감응(感應)하는 신기(神機)가 메아리나 그림자처럼 빨라서 속일 수 없다고 합니다. 신 등의 어두운 소견으로 비록 감히 어떤 일이 반드시 어떤 응보(應報)가 된다고 명백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현재의 한두 가지 일로써 말하면 신 등의 죽을 죄는 또한 천지(天地)의 큰 은혜에 유감됨이 없을 수 없습니다. 동작(動作)에 조절이 없으시어 절선(節宣)하는 방법에 어긋남이 있으시고 연충(淵衷)334)  이 쉽게 고민하시어 문득 중화(中和)의 도[體]를 잃으시며 공심(公心)이 혹시 사심(私心)을 이기지 못하시고 갑(甲)에게 노여워하신 것을 때로는 을(乙)에게 옮기시니, 무릇 정령(政令)과 사교(辭敎)의 사이에 대개 과격하고 졸급(猝急)하심이 많습니다. 연신(筵臣)의 한마디 말이 맞지 아니함은 널리 용서함이 마땅한데, 이미 윤허한 일과 아울러서 모두 물시(勿施)를 행하시며, 옥당(玉堂)이 번차(番次)를 갖추지 못한 것은 다만 엄하게 신칙함이 가한데 곧 그 아들의 벌(罰)로써 그 아비에게까지 미치니, 이는 이미 대성인(大聖人)이 화평(和平)으로 사물에 응하는 도리에 모자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전 좨주(祭酒) 김원행(金元行)을 해직(解職)하는 명령에 있어서는 밤이 지난 뒤에 갑자기 비답(批答)을 내리시어, ‘나의 충자(冲子)를 보필하라.’는 하교는 마침내 거짓으로 돌아갔으므로 뭇 사람이 근심하고 탄식하는데, 먼저 비상(非常)한 교시를 내려서 뭇 신하가 나아가 간(諫)하는 길을 막으니, 이것이 법을 설치하고서 말을 금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성상의 마음이 오히려 이미 처분한 것으로써 매우 마땅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으실 것은 비록 신 등의 어리석음으로도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아! 고 찬선 신 송명흠(宋明欽)은 충성을 품고 의(義)를 다하다가 갑자기 영원히 서거(逝去)하자, 지난번에 성상이 마음으로 추도(追悼)하시어 은부(恩賻)를 베풀도록 허락하셨으므로 마음을 돌이키시는 아름다움을 바야흐로 흠송(欽誦)함이 간절하였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또 이 뜻밖의 엄지(嚴旨)가 있으시니, 그 성덕(聖德)에 거듭 누(累)를 더함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유학(儒學)을 존중함은 우리 조가(朝家)의 법이며 가부(可否)를 토론하는 것은 밝은 시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빨리 세 번 생각하심을 더하시어 먼저 전후의 전교(傳敎)를 도로 거두시고 이어서 그날의 처분을 아울러 도로 거두신다면, ‘한결같은 생각으로 하늘에 대하고 일에 따라 수성(修省)하는 도리’에 어찌 빛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이제부터 일동 일정(一動一靜)과 일언 일정(一言一政)에 더욱 함양(涵養)하는 공부를 더 하시고 반드시 지당(至當)한 극치에 이르기를 힘쓰시어 백 가지 법도가 궤도(軌道)에 순응하고 여러 재이(災異)가 함께 사라지게 하시면 재이를 돌려서 상서로움이 되게 함은 이에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신들은 벼슬이 근밀(近密)에 있어서 밤을 새우며 경경(耿耿)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소략한 몇 마디 말을 가지고 우러러 높이 들으심을 모독하오니, 오직 성명께서는 이에 유념(留念)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아! 부덕(不德)하고 무능(無能)하며 나이가 더욱 쇠모(衰耗)한데, 금년은 어떤 해인가? 모르는 척 참고 지나니 선왕(先王)에 불초(不肖)하여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어찌 청대(靑臺)의 보고를 기다리겠는가? 일기(日氣)가 괴상하여 두려워하고 근심함이 바야흐로 깊은데, 과연 이 보고를 들으니 이는 부덕으로 말미암았다. 전번 하교의 일은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모두 체인(體認)하였는가? 못하였는가? 이로써 보건대 높이 힘쓰고 신칙함이 또한 늦었다.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어찌 감히 이미 노쇠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하여 저 푸른 하늘에 우러러 보답하지 않을 것인가? 직책이 후원(喉院)335)  에 있으면서 그 힘쓰게 함이 절실(切實)하니, 내가 마땅히 맹성(猛省)하여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부응교 홍억(洪檍)·부교리 조종현(趙宗鉉)·수찬 임희교(任希敎)·홍낙신(洪樂信)·부수찬 홍윤(洪鑰) 등이 연명으로 올린 차자(箚子)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청대(靑臺)의 관원이 어제 또 천둥의 이변(異變)을 보고하였다고 하는데, 대체 어찌하여 성명(聖明)의 세대에 이런 재이(災異)가 없는 해가 없습니까? 천도(天道)가 깊고 멀어서 진실로 그 어떤 동기로 불러 일으킨 것과 무슨 일의 소치임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그 인애(仁愛)하는 마음과 경고(警告)하는 이치는 반드시 밝게 살피고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민(臣民) 어느 누가 다스려진 세대를 위태롭게 여기고 밝은 임금을 염려하는 뜻이 없겠습니까? 삼가 더구나 신 등은 사람이 비록 못났을지라도 직책이 논사(論思)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끝내 한마디 말하지 않고 과실을 찾아 돕는 직책을 저버리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총명(聰明)·예지(睿智)하심이 백왕(百王)에 높이 뛰어나시어 임어(臨御)하신 지 4기(紀)336)   동안에 다스림을 이루고 제도를 정하시어, 무릇 위로는 천심(天心)에 보답하고 아래로 민은(民隱)337)  을 구휼하신 것이 간책(簡策)338)  에 드리웠으니, 어찌 우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대소 신료(大小臣僚)도 모두 분주히 직무에 충실하여 은근(慇懃)하신 성상의 뜻을 우러러 체득하니 마땅히 인사(人事)의 잘못이 없을 것인데, 가만히 보건대 조정의 위에 기상(氣像)이 풀어지고 주려(州閭) 사이에 생업(生業)이 쓸쓸[蕭條]하여 기강(紀綱)이 더욱 떨어지고 재용(財用)이 더욱 줄어드니, 이같은 광경(光景)은 자못 급급(汲汲)함이 있습니다. 만일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간섭됨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밝은 하늘이 날마다 바라봄이 여기 있는데, 또한 어찌 밝게 깨우침을 보여서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는 방법을 다하도록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성스러운 임금과 총명한 왕이 하늘에 빌고 백성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은 오직 능히 공경하고 능히 부지런함에 있으며, 충신(忠臣)과 지사(志士)가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힘쓰게 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함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옛사람으로 하여금 지금 세대에 있게 할지라도 손을 써서 위에 진달하는 것은 아마도 다른 것에서 구할 수 없을 듯합니다. 순(舜)임금은 큰 성인(聖人)이면서 자기를 버리고 남의 말에 따랐으며, 성탕(成湯)은 명철한 임금으로서 간쟁하는 말에 따르고 어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언로(言路)가 막힌 지 오래인데, 신들이 재이(災異)를 당하여 말을 올리는 것은 역시 늙은 유생(儒生)의 보통 말에 지나지 아니하나 혹시 성명(聖明)께서 겸손하신 뜻으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시어 생각을 모아서 더함을 넓히시면 충성된 말과 바른 의논이 의당 날마다 앞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이 깊이 생각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아! 천하의 일이 비록 만 가지라 하더라도 공(公)과 사(私)로 갈라지고, 인정(人情)이 드러남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나 기쁨[喜]과 노여움[怒]이 가장 커서, 공·사의 나누어짐은 호리(毫釐)의 차이로 어긋남이 천리(千里)에 이르고, 기쁨과 노여움의 단서가 그 중정(中正)을 잃으면 해(害)가 백체(百體)에 미치게 되므로, 옛 성왕(聖王)은 여기에 독실하고 공을 넓히고 사를 버리며 기쁨을 조절하고 노여움을 제재하였으니, 우리 전하께서는 학문의 고명(高明)함으로써 반드시 이미 저 네 글자의 공부에 강마(講磨)하고 체인(體認)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행하고 조치할 무렵에는 혹시 크게 치우침에 실수하시고 하교와 명령할 사이에는 혹시 지나침을 이루시며, 갑(甲)에게 노여워 하심을 을(乙)에게 옮기심이 그 사이에 또한 없지 않으시니,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평한 마음가짐을 아마도 극진히 잘 하시지 못하신 듯합니다. 신들은 비록 어느 일과 어느 정사의 잘못을 하나하나 들어서 부회(傅會)할 수 없으나 성명께서 진실로 연현 확확(淵蜎濩蠖)339)  하신 가운데 성연(惺然)히 돌이켜 살피시면 반드시 뉘우침을 이기지 못하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대공 지정(大公至正)하신 마음을 넓히시고 사물(事物)이 이르면 순응하는 도량을 넓히시며, 공(公)과 사(私)에 반드시 택할 바를 살피시고 기쁨과 노여움에 그 중(中)을 얻기를 힘쓰시어 이로써 언로(言路)를 열고 이로써 치화(治化)를 개도하여 조정을 해와 달 위에 높이면, 실상으로 하늘에 응하고 재이(災異)를 돌려서 상서로움이 되게 하는 방도가 아마도 이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일로써 말할지라도 일전에 유신(儒臣)이 한 말은 굽어 양해하심이 마땅한데, 이로 인하여 성상의 마음이 번뇌(煩惱)하시어 전 찬선 김원행(金元行)을 해직(解職)하라는 명령까지 있었습니다. 대저 유현(儒賢)이 상소한 말은 스스로 허물을 끌어다 말한 것에 지나지 아니한데, 성상께서 온순한 비답을 내리신 뒤에 문득 엄명을 내려서 여러 관료(官僚)를 물리쳐 물러가게 하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처분을 내리심에 뭇 사람의 마음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지니, 이 깨우치고 두려워할 때를 당하여 마음을 돌이키시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어저께 전교의 과중(過中)한 것을 모두 환수하도록 명하여 성상이 유학을 숭상하시는 덕을 빛내시고 뭇 신하가 와서 간하는 길을 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승정원의 비답에 효유(曉諭)하였으니 맹성(猛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열흘 동안 감선(減膳)할 것을 명하였다.

 

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형조 판서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여 새로이 가자(加資)한 것을 거두기를 청하니,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강원 감사(江原監司)의 분등 장계(分等狀啓)로 인하여 재결(災結) 2백 20결(結)을 더 주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스승의 도(道)가 아래에 있음은 한(漢)·당(唐) 이후로 대개 오래이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국초부터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이 보통에 비할 바가 아닌데, 나의 덕이 박덕함으로써 이것도 능히 이어서 행하지 못하여 선비의 풍습이 날마다 변하고 인심이 날마다 떨어졌기 때문에 명륜당(明倫堂)에 세 조목(條目)을 판(板)에 새겨 걸어서 많은 선비를 신칙하여 힘쓰게 하고, 반수교(泮水橋) 곁에도 칙려(飭勵)하는 것이 있는데, 어제 근 2백 명 선비를 불러 볼 때에 거조(擧措)가 해연(駭然)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어려서 단정하지 못하고 자라서 부미(浮靡)한 소치이다. 이 뒤로 승보(陞補)할 때에 만약 떠들고 시끄러우면 한 사람을 신칙하여 백 사람을 징계할 것이니, 이를 대사성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10월 14일 무진

임금이 태묘(太廟) 망제(望製)에 쓸 향(香)을 광달문(廣達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홍낙인(洪樂仁)을 승지로 삼았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와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천둥의 재이(災異)로써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하기를 청하였으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차자를 올려 체차를 청하고, 겸하여 진달하기를,
"승정원의 계달과 홍문관의 차자(箚子)는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는데, 비지(批旨) 아래서 비록 용납해 받아들이시는 거룩함을 우러러보았으나, 그 진달해 청한 바를 채택해 시행하시는 사실은 없으시니 ‘하늘에 응하는 데에서 실상으로 하는 도리’에 모자람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모두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대신(大臣)과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북도(北道)의 환자곡[還上穀]을 분등(分等)하여 정봉(停捧)할 일을 대신 이하에게 내려 물으니, 모두 ‘백성이 실제의 혜택을 받는다.’고 우러러 대답하였는데, 홀로 병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은 말하기를,
"환자곡은 나라의 근본인데, 재년(災年)임으로써 수납을 정지하여 후일의 폐단을 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고(故) 재신(宰臣)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다."
하였다. 정홍순은 정석삼(鄭錫三)의 아들이다. 강원 감사        이언형(李彦衡)이 정봉(停捧)을 바로 청했다 하여 처음에는 파직하기를 명하였다가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진휼(賑恤)하는 일을 바야흐로 벌였는데, 진(陣)에 임하여 장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으로써 우러러 아뢰니, 함사 추고(緘辭推考)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5일 기사

호서의 분등 장계(分等狀啓)가 비로소 들어왔는데, 장계가 지체(遲滯)되었다 하여 성환 찰방(成歡察訪)을 잡아다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과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호서에 재결(災結) 5천 결을 더 주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고 또 1천 결을 더 주라고 명하였다.

 

조덕성(趙德成)·이재협(李在協)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16일 경오

이심원(李心源)을 대사간으로, 조진형(趙鎭衡)을 지평으로, 김익(金熤)을 보덕으로, 이담(李潭)을 병조 참판으로, 성천주(成天柱)를 좌윤으로, 정실(鄭宲)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삼았다.

 

영남 암행 어사(暗行御史) 김치공(金致恭)이 복명(復命)하고 입시하였다. 명하여 언양 현감(彦陽縣監) 이득준(李得駿)을 승서(陞敍)하고, 대구 판관(大丘判官) 김로(金魯)에게는 새서(璽書) 표리(表裏)를 하사하며, 양산 전 군수(梁山前郡守) 김영섭(金永燮)·현풍 현감(玄風縣監) 홍일원(洪一源)·지례 현감(知禮縣監) 이응중(李應重)·영산 현감(靈山縣監) 박사후(朴師厚)·용궁 현감(龍宮縣監) 채도공(蔡道恭)을 잡아다 국문하고 청송 부사(靑松府使) 이기덕(李基德)을 특별히 체임(遞任)하라고 명하니, 암행 어사의 장계(狀啓)로 인한 것이다. 김 영섭·홍 일원의 전최(殿最)가 엄하지 않았다 하여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은(李溵)을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이경호(李景祜)를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이창수(李昌壽)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대신(大臣)과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경상 감사의 분등 장계(分等狀啓)로 인하여 재결(災結) 1만 결(結)을 더 주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고 또 1천 결을 더 주도록 명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신회(申晦)가 김영섭(金永燮)의 구초(口招)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전교(傳敎)를 쓰도록 명하여 고윤(高允)·적흑자(翟黑子)의 일340)  을 인용하여 타이르기를, ‘만일 바르게 초사(招辭)하지 아니하면 마땅히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서울과 시골 백성을 크게 모아서 엄한 형벌로 취초(取招)하여 율(律)에 의해 법을 시행하겠다.’고 하니, 김영섭이 또 초사하기를 늙은 어미의 약이(藥餌)로써 말하였다. 형신(刑訊)하여 취초하기를 명하고 남간(南間)에 가두니 김영섭이 비로소 바로 초사하기를, ‘천여 냥(兩)은 빚을 갚고 그 나머지는 서울에 있는 가속(家屬)의 일용(日用)의 수요에 계속해 주었다.’고 하였는데 특별히 본률(本律)을 용서하고 거제부(巨濟府)에 본인에 한하여 영구히 향인(鄕人)으로 만들게 하라고 명하였다.

 

홍명한(洪名漢)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17일 신미

천둥하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콩과 같았다.

 

정광한(鄭光漢)을 대사헌으로, 윤석렬(尹錫烈)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을 보기가 부끄럽다. 황간(黃柙)과 김영섭(金永燮)이 잇따라 나오니 이는 시종(侍從)의 큰 수치이다."
하니,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탐욕스러움을 징계하고 청렴함을 권장하며 소원(疏遠)한 인재를 찾아 쓰면 풍성(風聲)이 미치는 곳은 조금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구중(九重)341)   속에 있으니 어떻게 알겠는가? 경들이 궤유(餽遺)하지 아니하는 자를 장려해 쓰면 청렴한 관리를 얻을 수 있다."
하니, 교리 홍억(洪檍)이 말하기를,
"이름난 관원은 반드시 기름진 고을을 차지하고 세력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쇠잔한 고을에 제수되니,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청컨대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힘써 수령을 고르되 관(官)을 위하여 사람을 고르고 사람을 위하여 관을 고르지 말도록 하소서."
하자, 임금이 좋다고 하여 비국(備局)에 명하여 오늘 안으로 여덟 어사(御史)를 초계(抄啓)하게 하고, 수령(守令)에게 명하여 은결(隱結)342)  을 자수(自首)하게 하였다. 영남 어사의 서계(書啓) 가운데 홍일원(洪一源)이 은결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이다. 곧 홍일원을 배도(倍道)343)  로 잡아 오도록 명하였다.
대간(臺諫)이 패초(牌招)를 어김으로써 대사헌 남태저(南泰著)를 거제 부사(巨濟府使)로 특보(特補)하여 배도로 부임(赴任)하게 하였다. 시종신(侍宗臣)의 걸군(乞郡)은 일체 엄금하고, 이미 걸군한 자는 모두 체차(遞差)하며, 새로이 제수된 수령이 미처 상참(常參)에 대령(待令)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조진형(趙鎭衡)이 대망(臺望)에 외람되게 통했다 하여 이조 참판 정존겸(鄭存謙)을 파직하고 김종정(金鍾正)을 이조 참판으로,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삼도록 명하였다. 상참(常參)을 아직 파하지 아니하였는데, 비가 쏟아지고 천둥하였다. 임금이 내전으로 돌아오다가 연화문(延和門)에 이르자 또 천둥이 소리를 내니, 임금이 연(輦)을 멈추고, 또 열흘 동안 감선(減膳)하라는 전교를 쓰도록 명하였다.

 

김치공(金致恭)·홍윤(洪鑰)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고, 또 정창성(鄭昌聖)을 승지로 삼았다.

 

이조 참판 김종정(金鍾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의 신하로 늙은 부모를 받드는 사람이 봉양(奉養)을 위하여 상소하면 문득 특별한 은혜를 내려서 고을을 주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석류(錫類)344)  의 지극한 인(仁)이며 또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 입니다. 이제 불법(不法)한 수령으로 인하여 무릇 걸군(乞郡)에 관계된 자는 치적(治績)이 어떠함을 묻지 않고서 모두 갈아 바꾸는 벌(罰)을 베푸시니, 갑(甲)의 노여움을 을(乙)에게 옮기는 데 가까우며 일이 전에 없는 바입니다. 대략 짧은 글을 올 려서 집예(執藝)345)  의 의리를 본받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앞의 명령을 정지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마음을 잡고 일을 처리하시는 사이에 혹시 작은 것은 살피시고 큰 것을 빠뜨리시며, 실상이 적고 형식이 많으시며, 은상(恩賞)이 과람(過濫)함을 면치 못하시고 위엄과 노여움이 혹시 치우침에 가까우시니, 이로써 재용(財用)이 마르고 민생(民生)이 곤궁하며, 요행(僥倖)이 점점 열리고 조경(躁競)이 풍속을 이루어서 현재의 상황이 날마다 오하(汚下)함에 나아가고 원기(元氣)가 저절로 사라짐에 이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지난날에는 단지 청대(靑臺)의 보고만 듣고도 오히려 두려워하였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들었으니, 귀를 당기고 직접 명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바로 나의 부덕(不德)하고 무능한 소치인데다가 노쇠함을 더하였는데, 기강(紀綱)이 날마다 떨어지고 인심이 타락하여 김영섭(金永燮)에게서 극도에 도달하였으니, ‘늠척(凛愓)’ 두 글자도 헐후(歇後)한 말이다. 어찌 감히 노쇠했다고 하여 스스로 맹성(猛省)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홍문관[玉堂]에서 상차(上箚)하기를,
"지금 위에서 돕기를 요구한 바가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정사를 발하고 한 가지 영(令)을 행하여 전번의 실수를 돌이키셨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아래에서 경계하는 말을 올리는 바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한 가지 실수를 논하고 한 가지 잘못을 바로잡아서 장래에 착함을 열게 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빈말과 형식만 갖추는 것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켜서 화기(和氣)가 오게 한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사사로운 뜻이 일을 해롭게 하는데, 능히 그 근원을 다스려서 확연(廓然)한 대공(大公)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사사로운 뜻의 행함이 전과 같은 것이고 관(官)의 간사함이 정치를 병들게 하는데 그 잘하고 잘못함을 분별하여 오직 인재만 쓰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관의 간사한 폐단이 전과 같은 것입니다. 홍수(紅袖)346)  가 거리에서 풍악을 벌여서 들음을 놀라게 함이 있으니,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함을 미루어 알 만하고, 내리(內吏)가 횡포하여 추핵(推劾)을 입어 벌(罰)이 법사(法司)에 미쳤으니, 기강(紀綱)이 서지 아니함은 그렇지 아니한 곳이 없습니다. 전번에 신 등의 차자(箚子)로 진달한 것은 지극히 진부(陳腐)하여 족히 성상의 마음에 합당하지 못할 것을 알았으나, 이미 ‘맹성(猛省)하겠다.’라는 하교를 내렸으나 아직 받아들이는 실적이 없으시니, ‘좋아하면서 실행하지 않는다.’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며칠 사이에 경고(警告)347)  가 이와 같으니, 그 근본을 찾으면 바로 나다. 열흘 동안 감선(減膳)을 더하였으나 어찌 우러러 사죄하겠는가? 더욱 두려움이 간절하다."
하였다.

 

10월 18일 임신

좌의정 한익모(韓翼謨),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차자(箚子)를 올려 책면(策免)348)  을 청하니,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10월 19일 계유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다가 초경(初更)에 비로소 환궁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차자를 올려 체임(遞任)하기를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20일 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와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모두 사면(辭免)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렵에 정승이 물러가기를 요구하니, 이 마음이 재이(災異)를 부르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한익모는 언어 행동[言動]을 힘써 간략하고 차분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이창의는 중화(中和)로 마음을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맹성(猛省)하겠다."
하였다. 우부승지 김치공(金致恭)이 말하기를,
"신은 서계(書啓) 외에 진달할 일이 있습니다. 거제(巨濟)·고성(固城)·사천(泗川) 등의 고을이 만약 내년을 기다려서 진휼(賑恤)을 실시하면 백성이 흩어질 근심이 있으며, 연변(沿邊) 각 고을에는 쌀이 지극히 귀하니 만약 군작미(軍作米)349)  를 발매(發賣)하도록 허락하면,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利)를 헤아리는 해(害)는 크다. 수령(守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다."
하였다.

 

조재준(趙載俊)을 헌납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사간으로, 이명빈(李命彬)·안성빈(安聖彬)을 지평으로, 서명신(徐命臣)을 공조 참판으로, 정실(鄭宲)을 홍문 제학으로 삼았다.

 

10월 21일 을해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첫 번째 정사(呈辭)350)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는 비답(批答)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아! 이때는 어느 때인가? 이 거조(擧措)는 무슨 거조인가? 그 임금이 날마다 노쇠하고 두려움이 날마다 깊어서 나랏일이 날마다 떨어지고 우리 백성이 날마다 곤궁하니, 삼공(三公)이 모두 협찬하더라도 혹시 때가 늦을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직책이 원보(元輔)351)  에 있으면서 이러한 때에 어찌 처음으로 사단(辭單)을 갑자기 만드는가? 이는 나의 정성이 옅은 것이다. 이는 나의 정성이 옅은 것이다. 지금의 날씨에 마음씀이 더욱 간절하다. 겨울 비가 밤새도록 내리고 따뜻함이 봄과 같으니, 날씨가 이와 같음은 모두 나의 덕이 박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 먹는 것이 어찌 달겠으며 그 잠이 어찌 편하겠는가? 경의 마음을 내가 이미 슬퍼하며 경의 사직하는 정성을 내가 또한 안다. 이때가 어느 때인데, 경이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는가? 예(例)에 따라 비답하는 것은 그 역시 형식을 갖추기 위한 것인데, 어찌 사신(詞臣)의 지음을 기다리겠는가? 하물며 원보를 대우하는 도리를 어찌 글로써 하겠는가? 아! 부자(父子)가 원보가 되었으니 의뢰함이 어떠한가? 비록 조정에 나오지 않더라도 믿음이 반석과 같다. 소자(小子)가 어찌 경을 버리겠는가? 소자가 어찌 경을 버리겠는가? 사직하는 것을 윤허하지 아니한다. 경은 모름지기 선경(先卿)352)  의 나라를 위함을 생각하고 소자의 의뢰함을 돌아보아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며, 조금 기다렸다가 조당(朝堂)에 나와서 함께 나랏 일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병자

임금이 동지사(冬至使) 세 사신(使臣)을 소견하고 각각 수서(手書)를 내렸다. 순제군(順悌君) 이달(李炟)을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달은 정사(正使)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烜)의 동생이다. 또 구윤명(具允明)에게 명하여 그 동생 구윤옥(具允鈺)을 가서 보게 하였다. 구윤명은 부사(副使)        구윤옥의 형인데, 이때 어제(御製)를 편집하였었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진차(陳箚)하여 은혜에 사례하고 겸하여 해임을 청하였는데, 여러 수백 마디의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23일 정축

전 부사(府使) 신구(申璆)를 거제부(巨濟府)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인동(仁同) 살인 사건에 가공(加功)353)  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평안 병사(平安兵使) 구선행(具善行)을 내의(內擬)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영남 어사(嶺南御史) 김치공(金致恭)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연일(延日)354)  의 숫돌[礪石] 별복정(別卜定)355)  을 금단(禁斷)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명하여 서명신(徐命臣)을 나처(拿處)하고 한광회(韓光會)·조운규(趙雲逵)를 중추(重推)하라고 명하니, 비국 당상으로 공무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양세현(梁世絢)을 파직하라고 명하니, 황당선(荒唐船)356)  이 와서 정박(碇泊)한 뒤에 변정 장계(邊情狀啓)가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이었다. 홍낙인(洪樂仁)을 형조 참판으로 특별히 발탁하였다. 조돈(趙暾)에게 직첩을 주어 서용(敍用)하고, 이미(李瀰)를 서용할 것을 명하니, 우의정 이창의(李昌誼)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유학(幼學) 허확(許確)의 아내 장씨(張氏)의 상언(上言)은, 그 본가(本家)를 위해 뒤를 세우는 일입니다. 말하기를 ‘그 아버지 장진엽(張震燁)은 바로 국구(國舅)인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봉사손(奉祀孫)으로 동생제(同生弟) 장진환(張震煥)의 둘째 아들인 장지복(張至復)을 취하여 사자(嗣子)로 삼았으나, 장지복에게는 단지 하나의 아들만이 있어서 겨우 성장하였으나 부처(夫妻)가 모두 죽었으므로, 그 당숙(堂叔) 장진욱(張震煜)의 셋째 아들인 장지면(張至冕)으로 그 아버지 장진엽의 뒤를 세우는 일을 품처(稟處)하도록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형이 죽고 동생이 대신하는 것은 변례(變禮)의 큰 것입니다.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내려 물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한익모가 말하기를,
"형이 죽고 동생이 대신하는 것도 오히려 변례인데, 이는 아들과 손자 두 대(代)를 끊고 별도로 뒤를 세울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더욱 예법(禮法)의 밖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처분하시는 데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 신풍(新豊)이 누구의 국구(國舅)인가? 반부(班祔)357)  하는 것이 어찌 구애되겠는가? 장지면으로 뒤를 세우도록 특별히 허락한다."
하였다. 신회가 또 말하기를,
"유학(幼學) 한상억(韓尙億)의 상언(上言)에 말하기를, ‘그 종손(宗孫) 한상유(韓尙愈)는 바로 정국 공신(靖國功臣) 서원군(西原君) 한순(韓恂)의 봉사손(奉祀孫)인데, 그 맏아들 한준(韓濬)이 일찍 죽고 사자(嗣子)가 없으니, 한상유의 다음 아들 한엄(韓儼)으로 뒤를 세워서 형이 죽고 동생이 대신하는 예(例)를 쓰기를 청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뒤를 세우도록 특별히 허락한다."
하였다. 균역 당상(均役堂上)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본청(本廳)에 공미(貢米)를 사서 바치는 예(例)가 있는데, 근래에 간세(奸細)한 무리가 있어 다른 사람의 공미를 몰래 기록하여 책을 만들어 바치고 미리 값[償錢]을 받아서 곧 도망하였는데, 그 쌀의 수량을 계산하면 거의 4천석에 가깝습니다. 처음에는 하리(下吏)가 부동(符同)358)  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실을 조사하니, 곧 낭청(郞廳)을 인연하여 몰래 받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낭청은 누구인가?"
하자, 정홍순이 말하기를,
"이성모(李聖模)·송순명(宋淳明)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엄(趙曮)도 균역청 당상관인데, 이를 아뢰라."
하니, 조엄이 기꺼이 대답하지 아니하자, 정홍순이 말하기를,
"이성모가 참으로 이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이성모를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한익모가 말하기를,
"송순명도 관(官)의 비방이 있습니다."
하니, 모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설시하여 이사렴(李師濂) 등 두 사람을 뽑았다.

 

명하여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 김양택(金陽澤)을 허부(許副)359)  하고,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로 대신하였으며, 이성원(李性源)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24일 무인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두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10월 25일 기묘

임금이 익릉(翼陵)360)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흥회(興懷)’란 어제(御製)를 쓰라고 명하였다. 교정 당상(校正堂上) 구윤명(具允明)·채제공(蔡濟恭)·이담(李潭)·조덕성(趙德成)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각각 호피(虎皮) 한 장을 하사하고, 교정관(校正官) 여귀주(呂龜周)를 승서(陞敍)하며, 창준(唱準)361)   이하에게는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10월 26일 경진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도제조 윤동도(尹東度)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경은 어제(御製)를 보았는가?"
하니, 윤동도가 말하기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꿈에 뵈었는데, 이는 내가 성의가 없기 때문에 옥성(玉成)362)  하라는 뜻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마땅히 한 통(通)을 밝게 유시하겠다. 서덕수(徐德修)는 죄적(罪籍)에서 뽑아 버렸지만, 김용택(金龍澤)은 아직 대훈(大訓)에 실렸으니, 인자(人子)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산개(刪改)할 것을 명하였는데, 스스로 뜻을 얻었다고 하면서 모두 다스리려고 하였다. 사저(私邸)에 돌아가 누운 까닭을 경은 마땅히 알 것이다. 만약 국사(國事)를 위한다면 어찌 이정소(李廷熽)로 하여금 먼저 시작하게 하겠는가? 예전에 범진(范鎭)363)  은 〈건저(建儲)의 명을 기다린 지 백여 일 만에〉 머리털이 모두 세어버렸는데, 원경하(元景夏)가 오활(迂闊)하다고 지목한 것은 그럴 듯하다. 김복택(金福澤)이 ‘복침(復寢)’ 두 글자로써 낭폐(浪斃)에 이르게 된 것은 내가 본문(本文)을 알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다. 김용택의 조부는 가복(加卜)364)  한 일로써 죄를 입었으니, 또한 오활한 듯하다. 옛날에는 이와 같았으나 내가 이를 대접하는 데는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7년 동안 시탕(侍湯)할 때 의원이 각각 보사(補瀉)365)  를 주장하였으나 주효(奏效)를 보지 못하고,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써 격뇌(激惱)하여 손상을 더하셨으니, 다시 차마 말하겠는가? 경자년366)   이후로 제관(祭官)의 차임(差任)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데, 오직 고(故) 봉조하(奉朝賀) 이태좌(李台佐)만이 능히 그 정성을 다하였다. 예전 송(宋)나라 태종(太宗)은 부자(父子)로서 말하기를, ‘짐(朕)을 어느 땅에 두겠느냐’고 하였으니, 황형(皇兄)367)  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이공윤(李公胤)의 불측(不測)함은 고금에 없는 바이다. 처음에는 광패(狂悖)할 따름이라고 하였는데, 그 흐름이 을해년368)  에 이르러 밝게 나타남이 있었다."
하였다.

 

홍낙인(洪樂仁)을 이조 참판으로 제수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세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10월 27일 신사

햇무리에 두 고리[珥]가 있었다.

 

영의정 김치인이 네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승지에게 명하여 돈독하게 효유(曉諭)하게 하였다.

 

10월 28일 임오

임금이 순강원(順康園)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익원(李翼元)을 특별히 발탁하여 형조 참판으로, 구선행(具善行)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이은춘(李殷春)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구상(具庠)을 승지로 삼았다.

 

금오 당상(金吾堂上)이 입시(入侍)하였다. 명하여 홍일원(洪一源)의 공사(供辭)를 읽게 하여 연한을 정하지 말고 추자도(楸子島)에 정배(定配)하여 종신 금고(終身禁錮)하도록 명하였다. 홍일원의 공사에 이르기를, ‘은결(隱結)을 쓴 곳을 그때의 감사(監司) 조돈(趙暾)에게 보고하였다.’고 하니, 조돈을 남해현(南海縣)에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때 서명신(徐命臣)이 일로 인하여 갇혀 있었는데, 승지가 공사(供辭)를 읽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예전에 주아부369)  는 이전(吏典)[혹은 아전]을 대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었는데, 아침에 한 나라의 경재가 되고, 저녁에 호각의 옥리를 대하니 나의 뜻이 어떠하겠는가? 어찌 그 공사(供辭)를 기다리겠는가? 특별히 분간(分揀)하라. 이 뒤로는 경재로 금추(禁推)된 자는 하교를 기다려서 공사를 받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다섯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답하기를 ‘안심하고 조리(調理)하라.’고 하였다.

 

호조 참판 홍낙인(洪樂仁)이 상소하여 신자(新資)370)  를 거두기를 청하니, ‘올려서 뽑은 것은 경을 위한 것이 아닌데,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라고 비답하였다.

 

10월 29일 계미

순강원(順康園)을 봉심(奉審)한 승지 이성원(李性源)이 복명(復命)하여, 동편 망주(望柱)가 조금 기울어진 것을 우러러 아뢰니, 예조 판서 신회(申晦)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고 수보(修補)하게 하였다.

 

장령 한집(韓鏶)이 상소하여, ‘팔도(八道) 향례(享禮)를 일체 사전(祀典)에 의해 개정하여, 폐백(幣帛)은 저포(苧布)를 쓰고 포(脯)는 중포(中脯)를 씀에 서울에서 만들어 보낼 것’을 청하였다. 비답하기를,
"부자(夫子)가 이르기를, ‘예(禮)라 이르며 예라 이른들, 옥백(玉帛)을 이르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으며,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공(貢)을 만들으면서 또한 그 토산(土産)에 맡겼는데, 하물며 만물이 같지 아니함은 문물의 정(情)이다. 어찌 같은 물색(物色)으로 한 뒤에야 신(神)을 섬길 수 있겠는가? 제도(諸道)의 수령[守宰]이 만약 제사하는 포(脯)에 정성을 다하면 어찌 불결함이 있겠는가? 그대의 상소와 같이 서울에서 장차 공(貢)을 만든다면 내가 어찌 ‘공’을 아끼겠는가? 부비(浮費)를 아끼는 것이다."
하였다.

 

예조 참의 심이지(沈履之)가 사직 상소를 올리니, 도로 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조돈(趙暾)을 석방하라고 명하니, 그 동생 조엄(趙曮)이 입시(入侍)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서이다. 구윤명(具允明)·김응순(金應淳)을 아울러 승자(陞資)하도록 명하고, 형조 판서 황경원(黃景源)을 체차(遞差)하기를 허락하여, 조운규(趙雲逵)로 이에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명하여 은결(隱結)은 다음달까지 한하여 자현(自現)하게 하되, 만약 자현하면 전관(前官)을 아울러 묻지 말고,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종신 금고(終身禁錮)할 뿐만 아니라 그 아들도 조용(調用)하지 말게 하였다.

 

10월 30일 갑신

햇무리 지었는데,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고 배 위에 갓[冠]이 있었다.

 

임금이 태묘(太廟)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능창군(綾昌君)371) 이숙(李橚)이 졸(卒)하였다. 높은 품계의 종반(宗班)이 거의 없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