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을유
명하여 초10일의 중궁전(中宮殿) 탄신 하례(誕辰賀禮)와 13일의 동지(冬至) 하례를 모두 정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수가(隨駕)하여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밤이 깊은 뒤에 환궁하였다.
11월 2일 병술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금년 10월 13일에 감선(減膳)을 명하였고, 17일에 또 감선을 명하셨는데, 10일과 20일의 기한이 오늘에 끝나니 내일부터는 전례에 의하여 다시 예전대로 봉진(封進)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의 계복(啓覆)372) 이 몇 번인가?"
하니, 좌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여러 번 심리(審理)하기를 명하셨었기 때문에 중한 죄수가 거의 없어서 계복이 거의 없습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조운규(趙雲逵)에게 명하여 본조(本曹)의 문안(文案)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자, 한익모가 말하기를,
"살옥(殺獄)은 지극히 중한 것이지만 주상으로부터 살리게 하는 의논이 많기 때문에 혹시 요행으로 면하는 자가 많으니, 마땅히 자세히 살핌을 더할 것이며 가볍게 분간(分揀)을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정익하(鄭益河) 때에는 복주(覆奏)373) 가 있어서 혹시 살아날 길이 있었으나, 그 뒤로는 이와 같은 것이 없었으니 내가 이를 개연(慨然)해 한다."
하였다. 문안(文案)을 읽고 아뢰기를 명하여 혹은 참작해 처분하도록 명하고 혹은 형(刑)을 가하도록 명하였다. 한익모가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상익(金相翊)의 재결(災結)을 더 청하는 장계(狀啓)로 인하여 4천 결(結)을 더 줄 것을 청하니, 4천 7백 결을 더 주도록 명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나처(拿處)하도록 명하니, 전례에 없는 왜서(倭書)를 처음에 물리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간 임희교(任希敎)를 체차(遞差)하도록 명하니, 중한 죄수를 작처(酌處)할 때에 그 자리에서 다투어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호위 군관(扈衛軍官) 민성상(閔聖祥) 형제가, ‘사인(士人) 이세옥(李世玉)이 그 어미를 묶어 놓고 구타한 것’으로 인하여 차비문(差備門)에 들어 와서 오고(午鼓)를 치니, 결곤(決棍)하여 정배(定配)하라 명하고 이세옥도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입직(入直)한 병조 당상 조태상(趙泰祥)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정실(鄭宲)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장령 한종제(韓宗濟)가 상소하여, ‘북도(北道)에 재해를 당한 고을의 환곡(還穀)을 구별해 정봉(停捧)하여 백성의 위급함을 풀어 줄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도헌(都憲)의 위패(違牌)로 헌리(憲吏)374) 를 대신 곤장(棍杖)을 친 것은 예(禮)로 부리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달한 일은 내 뜻도 고민스럽다. 이는 우리 백성의 종자와 양식인데, 마땅히 형세를 보아서 하교하겠다. 그러나 이 하교를 들으면 토호(土豪)와 관리는 바라보면서 머뭇거리고, 세력이 없는 소민(小民)은 치우치게 수납의 독촉을 당할 것이니, 이는 제도(諸道)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할 것이며, 도헌(都憲)의 처분은 국체(國體)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일에 따라 광구(匡救)하니 내가 이를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11월 3일 정해
햇무리에 두 고리[珥]가 있으며, 햇무리 위에 갓[冠]이 있고, 갓 위에 배(背)가 있으며,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고, 햇무리 밑에는 좌극(左戟)이 있었다.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밑에서 나와서 남쪽 하늘 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鉢]와 같고 꼬리 길이가 서너 자 가량이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열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사임을 허락하고, 전 영부사(領府事) 홍봉한(洪鳳漢)을 영의정으로 배명(拜命)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홍봉한의 제복(除服)375) 을 기다려서 곧 영의정에 배명하려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홍봉한이 담제(禫祭)376) 을 지났고 정조(政曹)377) 에서 정사를 처리할 것을 품(稟)하니, 임금이 도승지 홍명한(洪名漢)에게 말하기를,
"초정(初丁)378) 에 담제를 지낸 것으로써 그 마음을 볼 수 있다."
하였다. 도제조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일찍이 고(故) 영의정 신만(申晩)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다음달 초길(初吉)379) 에야 비로소 조정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수서(手書) 두 종이를 써서 내렸는데, 하나는 이르기를 ‘이제 정품(政稟)을 들이니 경을 보는 것과 같다. 다음달 초하루 아침으로 내가 날을 지정한다.’고 하여 홍봉한에게 주고, 하나는 이르기를 ‘공성(孔聖)이 이미 말하였는데, 내가 어찌 식언(食言)하겠는가? 안심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마지 못하여 그 청에 따른다.’고 하여 김치인에게 주었다. 또 하교하기를,
"하나는 사임을 허락하고 하나는 배명(拜命)하였으니, 비록 성심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은 창연(悵然)하여 삼청(三淸)만 바라본다. 경은 편안하겠으나 경을 대신하는 이는 괴로울 것이다. 특별히 상직(相職)을 해임하니, 경은 모름지기 체득하여 알지어다."
하였다. 이어서 좌승지 이성원(李性源)에게 명하여 전 영의정을 돈독하게 유시(諭示)하게 하고, 우승지 김치공(金致恭)에게 명하여 영의정을 돈독히 유시하게 하였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양세현(梁世絢)의 장계(狀啓)로 부안 현감(扶安縣監) 이득일(李得一)을 파면하였다. 그가 보고한 바 표류(漂流)한 사람의 일이 자세하지 아니하며, 또 더디고 늦었기 때문이었다. 관찰사 김상익(金相翊)이 파면하지 말 것을 장계로 청하니, 임금이, ‘양세현은 체면을 유지했고 김상익은 〈이득일을〉 마음을 써서 돌보아 주었다.’고 하여 김상익을 추고(推考)하고 이득일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이득종(李得宗)을 대사헌으로, 이치중(李致中)·이현영(李顯永)을 지평으로, 이인배(李仁培)를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심관지(沈觀之)를 헌납으로, 박취원(朴取源)을 응교로, 홍용한(洪龍漢)·김익(金熤)을 부교리로, 민홍렬(閔弘烈)을 수찬으로, 남현로(南玄老)를 보덕으로, 남태제(南泰齊)를 공조 판서로, 조명정(趙明鼎)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덕이 없고 무상(無狀)하며 나이가 또 늙고 쇠한데, 어찌 운관(雲觀)380) 의 보고를 기다려서만 마음이 항상 두렵겠는가? 복선(復膳)하는 날에 이 재이(災異)의 보고가 있었으니 무엇으로써 마음을 하늘에 사죄하겠는가? 내일부터 5일 동안 감선(減膳)하라. 복악(復樂)하는 것은 봄에 있었지만 이 이변이 있으니, 이것도 불효(不孝)함이다. 흉년에 장악(藏樂)하는 것은 역시 선왕(先王)의 예(禮)인데, 맥추(麥秋)381) 까지 한하여 그대로 음악을 철폐할 것을 의조(儀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전번에 천둥과 번개의 재이(災異)가 순음(純陰)이 폐장(閉藏)하는 달에 거듭 발하였고, 지금 이 음려(陰沴)382) 의 기운이 또 치양(穉陽)이 장차 맹아할 때에 또 나타나니, 어떤 모양의 화기(禍機)가 어두운 가운데 잠복해 있어서 어진 하늘의 경고가 이와 같이 정성스럽고 간절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유(儒)를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함은 바로 우리 조선의 가법(家法)인데, 암혈(巖穴) 밑에 숨어 있는 선비에게 초빙하는 일을 보이지 못하였으니, 사기(士氣)가 떨치지 못하는 탄식이 있는 것입니까? 공(公)을 넓히고 사(私)를 버리는 것은 바로 제왕(帝王)의 거룩한 일인데, 사람을 쓰는 것과 버리는 사이에 치우치게 얽매이는 근심이 없지 아니하니, 공도(公道)가 순수하지 못한 병통이 있는 것입니까? 재해와 흉년을 구제하는 방법이 지극하지 아니함이 아니지만, 실제의 은혜가 오히려 밑에 이르지 못하여 민생(民生)의 곤궁은 그대로이며, 형옥(刑獄)을 흠휼(欽恤)하는 뜻이 간절하지 아니함이 아니지만, 사형에 해당되는 죄라도 매양 너그러운 법에 붙이어서 기강(紀綱)의 해이해짐이 마땅하게 되었습니다. 교명(敎命)이 혹시 간중(簡重)함이 부족하고 정령(政令)이 간혹 빈복(頻複)함에 손상되며, 뭇 신하는 명령에 따르는 것으로 공손함을 삼고 유사(有司)는 죄를 면하는 것으로 다행함을 삼으며, 하전(廈氈)383) 에서 일을 토론하심이 비록 부지런하시나 조정 위에 바른말을 들을 수 없으니, 무릇 이 몇 가지는 어느 것이나 재이를 부르는 단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감선(減膳)을 회복하던 날에 운관(雲觀)에서 재이를 보고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바로 나의 부덕(否德)함이다. 귀를 끌어당기며 직접 명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늠척(凛愓)’ 두 글자는 또한 헐후(歇後)한 말이다. 경계하고 두려워함이 바야흐로 깊은데, 직책이 왕명을 받드는 데 있으면서 그 힘쓰게 함이 이와 같으니,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금의 존귀함으로 무엇을 이루지 못함이 있겠습니까만, 반드시 어려워하고 삼가하는 바가 있음은 바로 하늘의 명령을 두려워 함인데, 근래에 오면서는 전하께서 하시고 싶은 바를 행하지 못하신 것을 절대로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를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임금의 위엄으로 무엇을 꺾지 못하겠습니까만, 반드시 용납하여 참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말을 두려워함인데, 근래에 오면서는 전하께서 듣기 싫어하시는 바에 있어 죄를 면하는 것을 또한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도리를 얻었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형벌과 상(賞)은 크게 공정함을 보여야 하는 것인데, 대개 치우치고 사사로움에 매인 한탄이 많으니 전하께서는 세상을 제어하시는 방법에 이미 그 화평함을 잃었으며, 사교(辭敎)는 큰 믿음을 밝게 하는 바인데, 갑작스럽고 앞뒤가 뒤바뀌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시니, 전하께서는 〈임금의 미세한 말이라도〉 그것이 관인(官印)의 끈과 같이 소중한 사체에 또한 화평함을 잃으셨습니다.
심지어 법전(法殿)384) 에 임하시려 할 때는 위의(威儀)를 정돈함이 마땅한데, 명령을 임시해 급하게 내리어서 백예(百隷)가 매양 그 미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난여(鑾輿)가 출발할 적에 절주(節奏)를 갖추는 것이 마땅한데, 기한 전에 명하지 아니하여 유사(有司)가 길을 깨끗하게 할 겨를이 없으니, 이것도 거조(擧措)가 마땅하지 못하시고 체모(體貌)가 엄하지 못하신 일단(一端)입니다. 비록 당장의 일로써 말할지라도 바야흐로 재이(災異)가 일어날 때에 성상의 마음이 분발하사 교서를 선포하여 장차 아침저녁으로 진려(振勵)하시는 방도가 있는 것 같으시나, 그 뒤에 정령(政令)이 곧 다시 전과 같으시며 초선(抄選)된 유생(儒生) 전부를 소견하신 것은 일이 상례(常例)와 다른데, 마침내 번설(煩屑)한 명목으로 돌아갔고 궐(闕)에 있는 수령(守令)이 미처 입시(入侍)하지 못한 것은 실정이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닌데, 역시 준기(準期)의 벌(罰)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으시면서도 어찌 천심(天心)을 기뻐하게끔 돌이키고 재려(災沴)가 스스로 사라지기를 바라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복선(復膳)하는 날에 복악(復樂)할 때가 가까이 있는데, 이와 같은 재이(災異)의 보고가 있으니, 진실로 부덕(否德)을 옥성(玉成)하라는 것이다. 승정원의 비답에 유시(諭示)한 것을 이제 또 특별히 유시한다. 그 힘쓰게 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감히 노쇠하였다고 하면서 맹성(猛省)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재이(災異)를 즉시 아뢰지 아니하였다 하여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를 파직하고, 본감(本監)385) 의 관원을 유사(攸司)386) 로 하여금 과치(科治)하도록 명하였다.
11월 4일 무자
햇무리에 두 고리[珥]가 있었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김한기(金漢耆)를 체임하도록 명하였는데, ‘이 사람을 어찌 외임(外任)에 둘 수 있겠느냐?’는 하교가 있었다. 김한기는 김한구(金漢耉)의 동생이다.
좌부승지 정후겸(鄭厚謙)을 체임하도록 명하고, ‘3일을 입직(入直)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는 하교가 있었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이 거조(擧措)는 어찌 이기기를 좋아함이겠는가? 맥추(麥秋)까지 철악(撤樂)하라 한다고 해도 오늘날 조정 신하가 과연 안색이 변하겠는가? 여러 승지와 유신(儒臣)을 모두 해직하고 예조 당상관에게는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맥추까지 철악하라는 명을 들었으면서 움직임이 없는 것은 조선에 신하다운 신하가 없는 것이니, 시임·원임 대신의 잘못이다."
하고, 시임 두 정승을 모두 해면하라고 명하였다.
안집(安𠍱)·이재협(李在協)·박성원(朴盛源)·이한풍(李漢豊)을 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75세의 임금이 지난 역사에 어찌 있었겠는가? 한 해를 장악(藏樂)하는 것도 신하가 견디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반년(半年)을 더한 것이겠는가? 아! 〈철악(撤樂)은〉 장악과는 다름이 있으나 선왕(先王)의 제도에 따라 철악할 뿐인데, 직책이 명령을 따르는 데 있으면서 어찌 감히 거부하는가? 비록 반포하였을지라도 마땅히 곧 입대(入對)를 요구하여 한 번 청할 것인데, 그 저녁에도 잠잠하기 때문에 여러 승지를 해임하도록 명한 것이다. 유신(儒臣)도 같은 조선의 신하인데, 어찌 머리를 숙이고 입직(入直)하는가? 이미 하교하였고 해가 이미 높이 떴는데 처음부터 그 집에 누워서 아직까지 움직이는 빛이 없으니 밖에 있는 유신을 모두 체차(遞差)하여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의리’를 보인 것이다. 올 때에 만약 유시(諭示)하면 반드시 다투고 고집할 것이므로 묵묵히 와서 이제 구저(舊邸)에 이르니 내 마음을 이루었다. 초6일 새벽에 마땅히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예(禮)를 행하고 그날 마땅히 회가(回駕)하겠다. 아! 장악과 철악을 말하지 말라. 이 슬픔은 하나이다. 맥추(麥秋)에 이르면 국초(國初)의 연월(練月)이 이미 지나서 괴로운 마음이 끝난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제신(諸臣)은 협연군(挾輦軍)387) 이 아님을 또한 안다."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와 판부사(判府事) 김치인(金致仁)·김양택(金陽澤)·김상철(金尙喆)이 모두 금오(金吾)에서 서명(胥命)388) 하였다.
11월 5일 기축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왕세손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조정의 2품 이상과 육조 당상(六曹堂上)이 문안하였다.
11월 6일 경인
왕세손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조정의 2품 이상과 육조 당상(六曹堂上)이 문안하였다.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내리신 전교(傳敎)를 삼가 보건대, ‘명년 맥추(麥秋) 때까지 기한하여 철악(撤樂)하라는 교시가 계시니, 신은 놀라고 두려우며 민망스럽고 박절함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금년의 장악(藏樂)하라는 명령은 진실로 성심(聖心)의 추모(追慕)하심에서 나오셨으므로, 신이 비록 감히 복악(復樂) 시기를 우러러 청하지 못하여 속 심정의 억울함이 지극하였지만, 그래도 금년이 장차 다하고 명년이 멀지 아니하였으니 법악(法樂)의 회복은 장차 기한이 있어서 가만히 사사로운 마음으로 다행스럽게 여겼는데, 이제 또 이 명이 계십니다. 예로부터 철악의 제도에는 비록 혹 5일이나 10일의 한정이 있으나 어찌 다섯 달의 오램에 이릅니까? 신은 금년 몇 달의 오랜 기다림도 오히려 민망스럽고 답답한데, 하물며 명년 맥추(麥秋)의 이전이겠습니까? 신은 바야흐로 조리(調理)하는 중에 있으면서 충정(衷情)의 박절한 바로 번거롭게 함을 피하지 아니하고 외람되게 지극하고 간절함을 진달하오니, 삼가 빌건대 성자(聖慈)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빨리 윤허를 내리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바라고 기원하는 지극한 정성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상소로 아룁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너의 글을 살펴보니 내 뜻이 깊다. 지금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린 손자의 지극한 정성을 보고는 밤을 새우면서 스스로 양찰해 보건대 금년의 장악(藏樂)과는 다름이 있겠다. 특별히 그 청함을 허락한다."
하고, 도승지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이재간(李在簡)을 승지로 삼았다.
영돈녕(領敦寧) 김한구(金漢耉)·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진소(陳疏)하여 철악(撤樂)의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고,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 등이 또 진소하여 철악의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아울러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와 참판 이복원(李福源)이 입대(入對)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예조 당상이 오늘 입대를 청하는 것은 ‘잠 속에서 꿈을 깬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모두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오후에 비로소 환궁하였다. 협연군(挾輦軍)과 수가군(隨駕軍)에게 사방(射放)을 시험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신패(申牌) 이전에 급히 회가(回駕)하였으니, 비록 군병(軍兵)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어찌 효도하는 것이겠는가? 돌아와서 이 당(堂)에 누웠으니 이 마음이 갑절 더하다. 만약 오늘날을 물으면 단지 노쇠한 한 임금이 이 교시를 내리려고 하는데, 국구(國舅)389) 의 차자(箚子)와 도위(都尉)390) 의 상소가 잇따랐으니, 오늘날에 조선(朝鮮)이 있음을 알았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전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와 전 우의정 이창의(李昌誼)를 다시 정승으로 임명하고, 원임 대신은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홍수보(洪秀輔)·김관주(金觀柱)를 교리로, 조종현(趙宗鉉)·박취원(朴取源)을 부교리로, 정창순(鄭昌順)·이득신(李得臣)을 수찬으로, 이양수(李養遂)·홍용한(洪龍漢)을 부수찬으로, 홍낙성(洪樂性)을 형조 판서로, 정존겸(鄭存謙)을 호조 참판으로, 홍인한(洪麟漢)을 형조 참판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예조 판서로, 민백흥(閔百興)을 예조 참판으로, 김응순(金應淳)을 우윤으로 삼았다.
11월 7일 신묘
하교하기를,
"금년 섣달이 가까웠으니, 1년의 장악(藏樂)이 작은 정성을 펴겠는가? 오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은 나의 이 마음을 알아서 크게 벌이는 것은 염두(念頭)에서 사라지게 하라. 지금 나의 마음은 흉년을 보내면서 백성이 안도(安堵)하기를 크게 바라는데, 한 해가 장차 저물어 가니 백성을 구제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에 특별히 더욱 마음을 붙일 일을 팔도 도신(八道道臣)과 양도 유수(兩都留守)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이성원(李性源)·조덕성(趙德成)·홍지해(洪趾海)·정창성(鄭昌聖)을 승지로 삼았다.
좌의정 한익모와 우의정 이창의가 진소하여 견책(譴責)을 청하니, 임금이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11월 8일 임진
빈대(賓對)391) 를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좌의정 한익모(韓翼謨), 우의정 이창의(李昌誼)가 인구(引咎)하여 나오지 아니하므로 연달아 엄한 하교를 내리니, 한익모·이창의가 함께 대명하였다. 대명하지 말도록 명하니, 좌의정·우의정이 은혜를 사례한 뒤에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거느리고 입대(入對)를 요구하였다. 판부사(判府事) 김양택(金陽澤)·김상철(金尙喆)도 입대를 요구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세번 아뢰고 승정원과 홍문관에서 입대를 요구하니 ‘여대(輿儓)392) 가 괴로우니 그만두라’고 하교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은 비록 침착하나 모레 후반(候班)393) 에는 시임(時任)이 거의 모두 빠질 것이니, 하례를 청하고 경사를 치루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좌의정 한익모와 우의정 이창의에게 빨리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대저 중궁전(中宮殿)의 탄일(誕日)이 바로 초10일이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비록 밤이 깊었을지라도 정승을 갖춘 연후에 차대(次對)를 하는 것이 마땅하니, 판부사(判府事) 김양택(金陽澤)과 김상철(金尙喆)을 좌의정·우의정으로 임명하라."
하니, 김양택과 김상철이 곧 숙명(肅命)하였다.
공조 판서 남태제(南泰齊)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충재(蟲災)가 성하게 발함과 그친 것은 모두 일도(一道) 백성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니, 그 고을의 보고를 상고하여 곧 장문(狀聞)함은 진실로 직책의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네 고을의 보고가 일시에 함께 도착하였기 때문에 장문 가운데 아울러 논열(論列)하였는데, 다른 고을은 그치었다고 범연히 보고되었으나 홀로 과천현(果川縣)에서는 보고하기를, ‘가랑비가 한번 부리자 충해가 지식(止息)되어 땅 밑의 풀 뿌리에 혹은 구더기[蛆] 모양으로 화하기도 하고, 혹은 새가 쪼아먹은 바가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그 말이 매우 자세하여 눈으로 보는 것과 거의 같았으니, 신이 과연 그 재해의 소멸을 다행스러워하고 그 보고의 세밀함을 기뻐하여 장계 가운데 모두 써 넣었습니다. 이른 바 ‘벌레가 간 곳이 없다.’는 말은 바로 그 고을 이임(里任)이 보고한 것인데, 재신(宰臣)이 앞 뒤를 잘라 버리고 이 한 귀(句)만 집어 내어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은 진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지나간 일을 어찌 지나치게 시애(撕捱)하는가?’라고 비답하였다.
대신(大臣)이 입시(入侍)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동지사(冬至使)의 장계(狀啓)를 읽고 아뢰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황첨(黃籤)을 잘못 쓴 것은 3백 년 동안 없던 일이다. 간검(看檢)한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파직하라. 평양에 이르러서야 깨달았으니 만약 표문(表文)을 올릴 때에 이르렀다면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대신(大臣) 외에 모화관(慕華館)의 사대인(査對人)과 살피지 아니한 세 사신(使臣)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승문원으로 하여금 즉시 정서(正書)하게 하여 금군(禁軍)으로 하여금 사신이 도착한 곳에 내려 보내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경들은 세손(世孫)이 진달한 글을 보았는가? 처음에는 맥추(麥秋)까지 한하여 철악(撤樂)하려고 하였는데, 동궁의 청한 바를 위하여 도로 거두었다."
하니, 내국 도제조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동궁의 예효(睿孝)가 뛰어나서 능히 주상의 마음을 돌이켰으니, 신들은 머리를 모아 감탄하며 서로 축하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오직 나이 어린 동궁만 믿는다."
하였다. 김양택이 말하기를,
"신 등이 죄가 있어도 처벌하지 아니하였는데,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감히 와서 입대(入對)를 요구하였습니다."
하고, 김상철은 말하기를,
"신 등의 감죄(勘罪)를 기다리는 것은 오히려 나머지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궁(中宮)을 맡은지 10년인데, 옷감[表裏]을 올릴 때에 한 정승도 없는가? 나는 ‘조선에는 신하가 없다.’고 말하겠노라."
하니, 김양택이 말하기를,
"어찌 그렇겠습니까?"
하였다. 윤동도(尹東度)가 탕제(湯劑)를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옥당(玉堂)에서 경계하기를 진달하니, 임금의 대답이 없었다.
이의로(李宜老)를 승지로 삼았다.
판윤 구윤명(具允明)이 진소하여 새로 제수한 직질(職秩)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장령 한종제(韓宗濟)가 무지개의 변괴로써 상소하여 경계하기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당장 지금의 일로써 보면 귀를 끌어당기며 얼굴을 대해 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그 까닭을 살피면 그것 또한 나의 부덕(否德)함이다."
하였다.
11월 9일 계사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수가(隨駕)한 장교(將校)에게 시사(試射)하였다.
좌의정 김양택(金陽澤)과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진소하여 사직하니,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명하여 외방(外方) 겸춘추(兼春秋)의 월종 음청(月終陰晴)의 보고를 신칙하게 하였다. 이어서 또 차대(次對) 때에 비국 당상과 대간이 침묵하고 말하지 않은 것을 신칙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중국은 본래 제왕(帝王)의 묘(廟)가 있으니, 바로 옛날을 존중하는 도리이다. 우리 나라에도 단군사(檀君祠)·기자전(箕子殿)·삼국의 시조릉(始祖陵)이 있고, 전조(前朝)394) 에는 숭의전(崇義殿)이 있으니, 아름답고 거룩하다. 사전(祀典)에 실린 전대(前代)의 능침(陵寢)을 각각 그 고을로 하여금 수축하게 하라. 송도(松都)의 부조현(不朝峴)은 아직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에 이미 ‘전조의 충신이 말세를 경계한다.[勝國忠臣勉季世]’라는 연구(聯句)가 있었으니, 두문동(杜門洞) 사람을 조용(調用)할 일을 전조(銓曹)에 특별히 신칙하며, 사단(社壇)·선농단(先農壇)과 외방의 사단도 수축하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11월 10일 갑오
중궁(中宮)의 탄일(誕日)이다. 승정원·홍문관·조정의 2품 이상과 육조 당상(六曹堂上)이 문안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1일 을미
햇무리에 두 고리[珥]가 있었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반상(頒賞)하였다.
우윤 김응순(金應淳)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염아 충질(恬雅沖質)하다.’는 하교가 있었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장령 한종제(韓宗濟)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대사간 이인배(李仁培), 지평 이현영(李顯永), 헌납 심관지(沈觀之)에게 하유(下諭)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대신(臺臣)에게 하유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전례(前例)라 하더라도 세 사람이 연루되었으니 국체(國體)가 한심스럽다. 그 내의(內擬)로 인하여 비록 점(點)395) 을 내렸으나 첨사(僉使)와 미원장(薇垣長)396) 의 일은 어찌 3백 년에 있는 바이겠는가? 내가 비록 노쇠하였으나 80을 바라보는 늙은 나이에 한 거만한 신하를 위하여 하유하겠는가? 결코 이것을 하지 않을 것이니, 모두 체직(遞職)하라."
하였다.
명하여 세 번 지나간 무자년과 두 번 지나간 무자년의 《일기(日記)》를 가져오게 하여 읽고 아뢰기를 마치자, 하교하기를,
"본시(本寺)397) 의 제조(提調)가 팔준마(八駿馬)를 진청(陳請)함이 있었기 때문에 허락하였는데, 이제 《일기》를 읽기를 명하여 그때 유수(留守)가 아뢴 바를 보면, ‘여러 말[馬]이 백성의 곡식을 헛되게 먹는다.’고 하였으며, 옛사람도 ‘구마(廐馬) 천 필을 감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이는 짐승을 데려다가 사람을 먹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무자년의 하교에 의하여 다시 설치된 곳은 특별히 혁파하라. 그때 보음도(甫音島)에 대한 말이 있었으나, 나는 말하노라 ‘보음도의 논의 곡식도 백성의 곡식이 아닌가?’ 다시 설치하는 곳은 본시(本寺)로 하여금 차대(次對) 때에 품(稟)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병신
해에 두 고리[珥]가 있었다.
임금이 태묘(太廟)와 각릉(各陵)·전(殿)의 동지(冬至) 제사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각도의 전문 차원(箋文差員)을 소견하였다. 추조(秋曹)에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아! 75세에 또 양(陽)이 회복하는 날[冬至]을 만났으니, 참으로 대단히 뜻밖이다. 선왕(先王)은 음(陰)을 누르고 양(陽)을 부지한 뜻이 지극하고 극진하였다. 아! 덕이 얕은 나는 날마다 더욱 쇠하고 아! 세도(世道)는 날마다 더욱 떨어지는데, 다만 40년 전의 고(故) 풍원군(豊原君)398) 이 올린 춘첩자 시(春帖子詩)의 ‘동짓날에 교서를 내리니 왕의 마음을 점칠 수 있다.[至日能垂綍 王心己可占]’는 구절을 외우니, 마음이 저절로 가만히 슬퍼진다. 아! 초양(初陽)이 이미 밑에서 나왔는데, 아! 백성들도 생의(生意)가 있겠는가? 하물며 8도에서 흉년을 고하였는데, 오늘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배전 차원(陪箋差員)을 소견하였다. 아! 늙은 나이에 어찌 보이기 위해서이겠는가? 첫째도 백성이고, 둘째도 백성이다. 세전(歲前)에 설진(設賑)하는 것은 비록 금령(禁令)이 있으나 뜻을 다하여 구제해 살려서 팔십을 바라보는 그 임금의 뜻을 저버림이 없도록 승정원에서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약방에서 탕제(湯劑)를 올리니, 임금이 그 반(半)을 땅에 쏟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8도 백성을 위하여 이를 뿌려서 한결같이 젖게 하려고 하여도 얻을 수 없다. 도신(道臣)과 수령이 된 자는 이 백성을 살린 뒤에야 나의 신하가 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본주(本州)배지리(陪持吏)399) 의 말을 들으니, 공주 판관(公州判官) 이지광(李趾光)이 자목(字牧)400) 의 체통을 깊이 알았다. 3백 59주(州)가 모두 이와 같게 하면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가상(嘉尙)할 만하니, 곧 승서(陞敍)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지광이 적(糴)401) 을 받아들이는 데 이배(吏輩)와 사부(士夫)를 먼저하고 소민(小民)을 뒤에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그저께 두 번 지나간 무자년 섣달의 《일기(日記)》를 읽도록 명하였는데, 아! 양(陽)이 회복되는 날이 내일에 있으니, 늙은 나이에 이 마음을 어찌 견디겠는가? 하나의 양(陽)이 내일 장차 회복되는데, 우리 백성은 어느 때에 소생할 것인가? 하물며 양이 회복되는 날이라 하더라도 관리의 징독(徵督)이 어찌 그치겠는가? 이는 바로 한 문공(韓文公)402) 의 동생행(董生行)에, ‘문 밖에는 오직 관리가 날마다 와서 조세(租稅)를 독촉하고 또 돈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제도(諸道)의 우심(尤甚)한 고을과 우심한 면(面)은 금년 결전(結錢)을 반(半)으로 감하고, 그 다음 고을의 우심한 면(面)은 3분의 1을 감하여 백성을 위하는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장령 한종제(韓宗濟)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주태(金柱泰)는 바로 역적 김윤(金潤)의 아들인데, 정배(定配)하는 율(律)만 시행하였으니 그에게 있어서 또한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감등(減等)은 비록 ‘용서하는 은혜를 같이하는 거룩하신 뜻’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감등은 도년(徒年)이 되고 도년은 사(赦)를 만나면 곧 석방하게 되니, 이 뒤에 국가에 사전(赦典)이 있으면 응당 석방되는 차례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들로서 오히려 사고가 없는 평인(平人)이 되어 예사로이 행세(行世)하게 하면 어찌 이와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정배(定配) 죄인 김주태를 감등하는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유시(諭示)하였으니,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世孫)의 문학(文學)이 크게 진보하였고 제가 성색(聲色)을 즐김이 없으니, 내가 그 진학(進學)에는 근심하지 아니하나 보호할 것을 근심한다."
하니,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경년(頃年)의 진소(陳疏)를 보건대, 창졸간에 5월 10일과 명년 맥추(麥秋)로써 말을 내었으니, 예학(睿學)403) 의 성취함이 성(盛)함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한 바가 또한 정밀하다."
하였다. 무자년 《일기》의 강도 목장(江都牧場)의 일을 읽고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영상(領相)의 아뢴 바에 이르러 승지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상신은 경인년404) 에 계(啓)를 당하였는데, 나라를 위해 노력을 다하였다."
하매, 김상철이 말하기를,
"아홉 번 영의정에 제배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인엽(李寅燁)이 아뢴 바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와 더불어 국사를 담당하였다."
하였다. 명하여 목장 일의 본말(本末)을 상고하게 하여 처음에는 혁파할 것을 의논하였다가 마침내 정지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태묘(太廟)의 제물(祭物)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물을 줄이자는 의논이 고(故) 상신(相臣) 이종성(李宗城)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고 상신 황희(黃喜)의 설소(設素)와 같은 뜻이다. 그 뒤에 홍 영상(洪領相)405) 이 구윤명(具允明)과 더불어 상량(商量)하여 줄였는데, 김응순(金應淳)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각각 의견이 있다."
하였다.
11월 13일 정유
동지(冬至) 하례를 정지하였다.
승정원·홍문관·조정의 2품 이상과 육조 당상(六曹堂上)이 동시에 문안하였다.
11월 14일 무술
햇무리에 두 고리[珥]가 있고 햇무리 위에 갓[冠]이 있으며 갓 위에 배(背)가 있었다.
정운유(鄭運維)를 대사간으로, 신사운(申思運)을 사간으로, 송제로(宋濟魯)를 지평으로, 심이지(沈頣之)를 헌납으로, 남태회(南泰會)를 형조 판서로, 이보관(李普觀)을 겸 필선으로, 이병정(李秉鼎)을 겸 사서로, 홍낙신(洪樂信)을 겸 문학으로, 이숭호(李崇祜)를 사서로, 이한풍(李漢豊)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입직한 장관(將官)에게 능마아 강(能麽兒講)을 시험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나아가 읽기를 마치자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명하여 전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와 전 우의정 이창의(李昌誼)를 서용(敍用)하게 하였다.
승보(陞補)406) 의 계획에 입격(入格)한 유생(儒生)을 소견하였다.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갓[笠]을 올리게 하여 말하기를,
"내가 갓을 쓰고 일어나 앉아서 유생(儒生)을 보겠다. 바로 며느리로 하여금 처음 와서 보게 하는 뜻이다."
하였다. 승보시에 두 초(抄)를 더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11월 15일 기해
월식(月食)하였는데, 구름이 끼어서 보지 못하였다.
내국 도제조 윤동도(尹東度)가 병으로써 진차(陳箚)하니, 사면을 허락하고 김양택(金陽澤)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피국(彼國)407) 의 등주(登州) 사람으로 강령(康翎)에 표류(漂流)해 온 자를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양식·반찬·유의(襦衣)를 주고 그 가운데 여인(女人)의 나이가 70에 가까운 자는 더욱 가엾게 여겨 또한 본현(本縣)으로 하여금 솜·고기·유의를 주어서 늙은이를 구휼하는 뜻을 보이는 일을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거행한 뒤에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명하여 효장묘(孝章墓)408) 에 치제(致祭)하게 하니, 휘신(諱辰)이 내일이기 때문이었다. 또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두성(金斗性)에게 명하여 의소묘(懿昭墓)에 치제하게 하였는데,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서 내렸다.
명하여 바다에 표류(漂流)한 중국 영성현(榮城縣)의 사람에게 자량(資糧)과 유의(襦衣)를 주어서 보내게 하였다.
북관 어사(北關御史) 이치중(李致中)이 복명(復命)하니, 좌의정·우의정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이치중이 서계(書啓)를 읽고 아뢰기를 마치자, 명하여 〈재해가〉 우심(尤甚)한 고을과 그 다음 고을의 환자곡[還上穀]은 등급을 나누어 정봉(停捧)하고 대동포(大同布)도 등급을 나누어 탕감하며 구환자[舊還上]는 일체 모두 탕감하게 하였다. 해창(海倉)이 비어서 저장한 곡식이 없었으므로 을해년409) 이후로 법령을 지키지 않은 도신(道臣)은 일체 모두 파직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 본창(本倉)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치중이 말하기를,
"저장한 것에 축난 것이 없습니다. 도신과 수령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삼가 지키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조엄(趙曮)이 더욱 근엄(謹嚴)하였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북청(北靑)·문천(文川) 두 고을 수령을 신칙하여, 한 사람도 굶주림이 없도록 한 뒤에 그 임금을 와서 보라고 하였다. 이치중이 삼남 무곡(三南貿穀)을 금하지 말고 북도 백성의 소원에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김양택(金陽澤)이 ‘연해(沿海) 고을 대부분이 재해를 입었는데, 만약 무곡(貿穀)을 허락하면 곡물의 가격이 올라가므로 그것을 시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니, 마침내 정지하고 행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6일 경자
구선행(具善行)을 병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어젯밤 월식(月蝕) 때에 구름이 끼어서 보이지 아니하였는데, 관상감(觀象監)에서 전식(全蝕)의 모양을 그려서 올리니 교수(敎授)를 불러서 묻고, 하교하기를,
"예전에 ‘월식을 당하여 월식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비록 혹 이런 보고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측후(測候)가 상세하지 아니한 것이다.’라고 말하겠노라. 또 구름이 덮여서 보이지 않은 것을 하례함이 있었는데, 나는 일찍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 이것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니, 어찌 이같은 관상감을 쓰겠는가? 제조(提調)를 파직하라."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한익모(韓翼謨)가 상소하여 견책(譴責)을 청하니,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11월 17일 신축
내국 제조 이사관(李思觀)을 체임하도록 허락하고, 이창수(李昌壽)로 대신하게 하였다.
11월 18일 임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수찬 이득신(李得臣)에게 명하여 호남 옥사(獄事)를 가서 조사하게 하였다.
11월 19일 계묘
공조 판서의 망(望)410) 을 종2품으로 가망(加望)하도록 명하였다.
홍인한(洪麟漢)을 공조 판서로, 신회(申晦)를 우참찬으로, 안집(安𠍱)을 병조 참판으로, 홍억(洪檍)을 부응교로, 홍경안(洪景顔)을 교리로, 윤석열(尹錫烈)을 부교리로, 홍상간(洪相簡)을 수찬으로, 유한근(兪漢謹)을 설서(說書)로, 정래겸(鄭來謙)을 지평으로, 김시묵(金時默)을 동돈녕(同敦寧)으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좌참찬 윤봉오(尹鳳五)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81세의 신하가 75세의 임금을 보는 것은 전고(前古)에 드문 것이었다. 신축년411) 에 계방(桂坊)으로 입시(入侍)한 것을 능히 기억하겠는가? 내가 경과 더불어 옛 해의 고사(故事)를 행하겠다."
하고, 곧 《소학(小學)》 제사(題辭)를 친히 외다가 ‘경형(敬兄)’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서 엄억(掩抑)한다."
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경세문답(警世問答)》을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돌려 가면서 읽게 하였는데, 마치자 교리 김관주(金觀柱)가 말하기를,
"유신이 경연(經筵)에 올라와서 《문답(問答)》 두어 판(板)을 읽고 그치는 데 불과하니, 어떻게 보도(輔導)하는 도리를 맡기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고요히 조섭(調攝)하시는 가운데 오래 앉아서 강(講)에 임하시기가 어려우심을 압니다만, 예전에 주자(朱子)는 70세 후에 다리가 아픈 증세가 있어서 그 집의 제사 때에도 앉아서 참사(參祀)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로써 추측하면 노인은 근력(筋力)으로 예(禮)를 하지 아니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그 예를 간략하게 하시어 유신을 와내(臥內)412) 로 불러 접견하시어 혹은 경의(經義)를 강구(講究)하고, 혹은 치란(治亂)을 토론하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인사(人事)가 모두 사라져서 이미 알묘(謁廟)와 알릉(謁陵)도 못하였었는데, 또 어찌 능히 경연에 소대(召對)를 하겠는가? 단지 《문답》만 읽기를 명한 것은 바로 위무공(衛武公)의 억계(抑戒)413) 의 뜻이다. 옛일을 추억하니 사복(嗣服)414) 한 처음에 고(故) 상신(相臣) 조현명(趙顯命)과 고 상신 이종성(李宗城)이 신록(新錄)415) 이 되어 하루는 소대하여 고사(故事)를 진달하지 아니함으로써 내가 수서(手書)로 이를 답하매, 그때 두 신하가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었는데,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또 이 말을 들으니 내가 이를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교리 김관주에게 큰 녹비(鹿皮)한 장을 특별히 하사하여 내 뜻을 보이게 하라. 이미 그 말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그 말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 《주자어류(朱子語類)》,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 《정관정요(貞觀政要)》 가운데 마땅히 추생(抽栍)하여 읽기를 명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라."
하였다. 김 관주가 또 ‘동작(動作)을 삼가고 희노(喜怒)를 조절하라’는 등의 말로써 우러러 힘쓰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정관정요》를 가지고 들어와서 어제 서문(御製序文)을 읽어 아뢰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입시한 유신의 권면(勸勉)함이 절실하므로 어찌 이날을 넘기겠는가? 특별히 불러서 《정관정요》를 읽도록 명하였으니, 이 일이 비록 작을지라도 말이 실행을 돌아보는 뜻이다. 이를 유신에게 명하여 《옥당고사(玉堂故事)》에 싣게 하라."
하였다.
11월 20일 갑진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호서 도신(湖西道臣)의 장문(狀聞)을 읽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낙순(洪樂純)이 내 마음을 너그러이 하려고 하여 그 말이 너무 헐하다."
하니,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충청도는 조금 낫다고 합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감사에게 분부하여, 내년 봄에도 설진(設賑)할 일이 없는가를 묻게 하라고 명하였다.
윤시동(尹蓍東)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당하 문신(堂下文臣)에게 친히 책문(策問)하였는데, 서제(書題)를 내건 뒤에 하교하기를,
"지척(咫尺)에 기침하는 소리가 있으니, 이름을 알아서 들이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만약 자현(自現)416) 하면 아뢰고, 그렇지 아니하면 서제 가운데 군군 신신(君君臣臣)의 뜻을 모르는 것이니, 모두 물러가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문신의 교만함이 특히 심하여 지척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자현하게 하였는데, 감히 속이고 숨기겠는가? 이같은 문신이 어찌 제술을 하겠는가? 모두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보는 것은 어두우나 듣는 것은 전과 같은데, 지척에서 기침 소리를 듣고는 때를 넘기지 아니하고 하교하였으니, 비록 고윤(高允)과 같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감히 적흑자(翟黑子)를 배우는가? 송(宋)나라 태조(太祖)는 관대함으로써 나라를 세웠으나, 육군(六軍)이 공(功)을 다투자 모두 군법(軍法)으로 처치하였으니, 내가 비록 노쇠하였으나 어찌 구차히 하겠는가? 일체 모두 전지(傳旨) 받게 하라."
하였다.
함경 감사 채제공(蔡濟恭)이 진소(陳疏)하여 사직하니, 예사로운 비답(批答)을 내렸다.
11월 21일 을사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관주(金觀柱)는 나이가 젊어서 무엇을 알겠는가? 반드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여러 신하가 말하지 못하는 바를 능히 말하였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경서(經書)》는 성상께서 누워서 들으시기를 어려워 하시기 때문에 《사기(史記)》로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명자(名字)를 얻으려고 하는데, 팔십을 바라보는 그 임금이 어찌 능히 견디겠는가? 나를 거둥이 잦다고 하니, 내가 어찌 활 쏘고 사냥하며 말을 달리겠는가? 어제 기침 소리는 누가 한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소학(小學)》의 고윤장(高允章)을 외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에 이와 같은 신하가 있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소학》을 명제(命題)하였는데, 감히 기침하면서 고윤(高允)을 본받지 아니하니, 팔십을 바라보면서도 오히려 강(講)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나이 젊은 문신(文臣)이겠는가? 오늘 편전(便殿)에서 여러 문신에게 마땅히 《소학》을 강하여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는 도리를 신칙할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빠진 자가 있으면 영남 해변에 귀양 보낼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에게 《소학》의 강(講)을 행하였다. 옥당(玉堂)·춘방(春坊)의 불통(不通)한 사람은 본사(本司)에 입직(入直)하게 하고, 그 밖의 불통한 사람은 공해(公廨)에 모여서 송강(誦講)한 뒤에 집에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자리[窠]가 많이 있으니, 마땅히 침체(沈滯)된 자들을 들어 쓸 것이다. 정관(政官)은 입시(入侍)하여 개정(開政)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사륜(朴師崙)·김문순(金文淳)을 교리로, 신광집(申光緝)을 부교리로, 이치중(李致中)을 수찬으로, 이보관(李普觀)을 부수찬으로, 김익(金熤)을 필선으로, 민홍렬(閔弘烈)을 문학으로, 안성빈(安聖彬)을 사서로, 심이지(沈頣之)를 겸 문학으로, 홍용한(洪龍漢)을 겸 사서로, 정언충(鄭彦忠)을 형조 참판으로, 민백흥(閔百興)·김광국(金光國)을 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이름도 없고 당(黨)도 없으면서 오직 글만 읽는 자는 이세연(李世演)이다. 어찌 개정(開政)을 기다리겠는가? 특별히 응교로 제수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바탕이 곧고 마음이 맑은 자는 정언충(鄭彦忠)이다. 오늘 정사에 1품 직을 특별히 제수하라."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반가운 눈이 내리기에 ‘아침에 문을 여니 경치가 어떠한가? 수많은 나무 전체 산이 온통 눈빛일세.[朝來開戶景如何 萬樹千山一雪色]’의 시구(詩句)를 쓰려고 하다가 눈이 곧 비로 변하였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
고 하자, 도제조 김양택(金陽澤)과 부제조 이담(李潭)이 써서 내리기를 청하니, 지필묵을 들여오도록 명하여 열넉 자(字)를 써서 운각(芸閣)으로 하여금 모각(模刻)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지평 정내겸(鄭來謙)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전(大殿) 뜰에서 기침하는 것은 과연 경근(敬謹)하지 못한 것이나, 죄는 한 사람에게 있는데 벌(罰)은 수십 사람에게 미쳐서 창황(蒼黃)히 물리쳐 나갔으니, 경색(景色)이 근심으로 변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글을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처음에는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가 곧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북도 감시(北道監市) 정례(定例)의 일로써 기묘년417) 이후의 도신(道臣)·수신(帥臣)·감시 어사(監市御史)를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3일 정미
파루(罷漏) 이후에 승지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만언(萬言)의 전교를 불러 주며 쓰게 하여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 해를 장악(藏樂)하였으나 작은 정성이 통철되지 못하였다. 금년 봄에 일이 있어 능(陵)을 참배한 뒤로 서교(西郊)에 나아가지 못하여 봄·가을 전알(展謁)을 모두 궐(闕)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효(孝)이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제갈양(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보고 감동하지 아니하는 자는 충신(忠臣)이 아니고, 이밀(李密)418) 의 진정표(陳情表)를 보고 감동하지 아니하면 효자(孝子)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충(忠)을 하고 효(孝)를 하였기 때문에 능히 사람을 감동시켰는데, 나는 충이라고 하겠는가? 효라고 하겠는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였으니, 칠십도 그러한데 하물며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이겠는가? 옛 노인은 스스로 탄식한 것이 열 가지인데, 지금 나는 장차 백 가지이다. 기강(紀綱)이 문란하고 백관[百隷]이 태만하며, 우리 백성이 곤궁한데 흉년이 이와 같으니, 내가 장차 무엇을 믿으며 내가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내 자신의 보양(保養)이 염담(恬淡)함은 저 하늘이 증명할 것인데, 사치하는 풍속이 성함은 무슨 까닭인가? 말을 대단히 삼가는 것이 나의 본심인데, 부효(浮囂)와 조경(躁競)은 무슨 까닭인가?
이군행(李君行)은 자제(子弟)에게 임금을 속이지 말도록 경계하였는데, 지금의 문신(文臣)은 아침에 집에 있으면서 정목(政目)을 보고는 행장을 재촉하여 집을 떠나 강교(江郊)를 지나가서 패초(牌招)를 면하니, 교만하다고 이를 만하고 거만하다고 이를 만하다. 〈내가〉 보는 것은 비록 어두우나 듣는 것은 줄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전정(殿庭) 지척에서 기침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현(自現)할 것 같으면 이것이 무슨 큰 허물인가? 처음에는 불공(不恭)한 짓을 하였다가 끝에는 임금을 속이니, 이를 처분하지 아니하고 어찌하겠는가? 직책이 이목(耳目)에 있으면서 감히 이를 영호(營護)하니, 옛 사람에 부끄럽지 아니한가? 대저 대각(臺閣) 위에서 관사(官師)가 서로 바로잡아 주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 하는 바는 이름을 취하는 것이 아니면 경알(傾軋)하는 것이니, 어찌 개탄스럽지 아니하겠는가? 아! 요즈음 차대(次對)를 한 번도 궐(闕)함이 없었고 승선(承宣)의 입시(入侍)도 없는 날이 없으니, 자주한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융성할 때를 우러러 보건대, 예전에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 세 강이 있고 소대(召對)·야대(夜對)가 있어서 새벽이 와도 촛불을 밝히고 수응(酬應)하며, 도정(都政) 때에는 비록 친정(親政)이 아니더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정사를 열었으니, 이는 내가 일찍이 우러러 본 고사(故事)이다. 가슴에 가득히 쌓인 회포를 한 종이에 불러 주고 쓰게 하니 동쪽이 장차 밝으려 한다. 아! 대소 신공(大小臣工)은 나의 이 뜻을 알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팔도(八道)·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게 하라."
하였다.
부교리 신광집(申光緝)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까운 반열(班列)에서 기침한 것은 크게 경근(敬謹)하지 못한 것이니, 견책(譴責)하시는 하교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성명(成命)을 곧 물시(勿施)하시어 많은 사람이 함께 물리쳐 나가게 함을 입었으니, ‘일은 그 적중함을 구하고 벌(罰)은 그 마땅함을 얻었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매양 번뇌(煩惱)하실 무렵에 문득 중비(中批)의 제수가 있었습니다. 그저께 동벽(東壁)419) 의 특별 제수는 그 사람이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나, 명령이 이 무렵에 있고 일이 격식 밖에서 나왔으며, 대신(臺臣)의 간략한 한마디 말에 이르러서도 받아 들이기를 아끼시고 곧 견벌(譴罰)을 가하시니, 이것도 격뇌(激惱)하시는 한 단서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문신(文臣)의 교만함이 요즘과 같은 때가 없었다. 한 사람이 주창하면 백 사람이 호응하고 한 사람이 신칙을 당하면 백 사람이 영호하니, 이것은 이미 대단히 놀랄 만한데, 해동(海東)의 신하로서 아침에 만언(萬言)의 하교를 보고 만약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누가 감동하지 아니하겠는가? 김관주(金觀柱)의 해괴한 말을 주어 모아서 팔십을 바라보고 추모(追慕)하는 임금에게 다시 진달하니, 이는 모두 세신(世臣)이 능히 아들을 가르치지 못한 소치이다. 아버지는 비록 가르치지 못하였을지라도 임금이 어찌 신칙하지 아니하겠는가? 만약 엄하게 신칙하지 아니하면 장차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하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글을 주고 신광집을 풍기군(豊基郡)에 정배(定配)하여 배도(倍道)로 압송(押送)하라. 난(亂)의 근본은 김관주이다. 김관주를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신회(申晦)를 체차(遞差)하도록 명하고, 또 신광집을 시종안(侍從案)에서 지워버리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여러 유신(儒臣)을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전라 감사 김상익(金相翊)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사비진여첩가(私備賑餘帖價) 등 곡식 3만 석을 나누어 그것으로 진휼(賑恤)하는 자본에 분배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이방수(李邦綏)를 평안 병사로, 윤태연(尹泰淵)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11월 24일 무신
약방에서 문안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나의 심기(心氣)를 논할 겨를이 있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어필판(御筆板)을 도로 들이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나는 또 지난밤에 기운[夜氣]이 있어서 생강차를 달여서 들이게 하였는데, 대신(大臣) 이하의 거조(擧措)를 보니, 온화한 얼굴에 한가한 빛이 많구나. 여대(輿儓)로 하여금 이를 알리게 하라."
하였다. 약방이 다섯 번 계달하고 여러 승지가 입대(入對)를 요구하며 우의정 김상철(金尙喆)·판부사(判府事) 한익모(韓翼謨)·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입대를 요구하니 답하기를,
"한마음이 이미 결정되었다. 시임(時任)도 모르고 원임(原任)도 모르며, 중신(重臣)도 모르고 대신(臺臣)도 모르며, 스스로 큰 체하는 문신(文臣)도 모른다. 모두 물러가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불충(不忠)한 사람의 형(兄)이 되어 무슨 얼굴로 문후(問候)하는가?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특별히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와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두성(金斗性)은 아울러 현직을 해임시키라고 명하니, 그들이 먼저 물러갔기 때문이었다. 좌의정 김양택·우의정 김상철·판부사 한익모가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니,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시임·원임 대신이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거느리고 갓을 벗고 합(閤) 밖에서 서명(胥命)하니 하교하기를,
"구차스럽게 갓을 벗는 것은 청토(請討)하는 것만 못하다. 대신 이하에게 갓을 쓰게 하라."
하였다. 전 판의금(判義禁) 신회(申晦)를 강교(江郊)로 쫓아 보내도록 명하였다. 귀먹고 눈멀고 벙어리처럼 하였다고 하여 대사간 정운유(鄭運維)를 파직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신광집(申光緝)을 풍기군(豊基郡)에 정배(定配)한 것는 너무 가볍다고 이를 만한데, 대관(大官)과 이목(耳目)이 모두 묵묵(默默)하니, 오늘날 조선에는 임금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 여러 신하가 신광집을 청토(請討)한 연후에야 군군 신신(君君臣臣)의 의(義)가 있을 것인데, 대신(大臣) 이하가 청토할 겨를은 내지 않고 단지 갓만 벗었다가 다시 편히 앉았으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가 있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여러 차례 하교하였으나 응연(凝然)히 움직이지 아니하니, 조선에는 신하가 없다. 이것이 어찌 신광집의 나라인가? 오늘 구대(求對)한 대신(大臣)과 제신(諸臣)에게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법을 빨리 시행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을 내국 도제조로, 좌부승지 윤시동(尹蓍東)을 대사간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홍봉한·윤시동이 사은(謝恩)하고 입시(入侍)하니, 이때는 이미 오고(五鼓)420) 이었다. 임금이 홍봉한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은 나를 보라."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이 3년을 멀리하였다가 천안(天顔)을 우러러보니, 지금이 예전보다 나으십니다. 기쁨이 지극하여 슬픔이 생겨 계달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담월(禫月)에 공무를 행하였으나 근래에는 없는데, 오늘 뜻밖에 경을 보니 마음이 안정됨이 있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달 초순부터 비록 천안(天顔)을 뵐 정성은 있었으나 담월에 벼슬하지 아니함이 문득 예경(禮經)을 이루었는데, 오늘은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경을 위하여 탕제(湯劑)를 복용하겠다."
하고, 드디어 탕제를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좌의정은 너무 유(柔)하다. 윤시동(尹蓍東)을 대사간으로 삼았으니, 잠시 그 끝을 보고 차차 처리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世孫)이 어질다. 동궁(東宮)이 〈청하였기〉 때문에 다섯 달을 더 철악(撤樂)한다는 명을 특별히 정지하였다. 내가 일찍이 혜빈(惠嬪)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지가 들어오면 반드시 나를 괴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1년을 장악(藏樂)하는 것은 비록 예(禮)에 없는 예이지만 신은 성상의 마음을 압니다."
하고, 이어서 5일 동안 여가를 주기를 청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윤시동이 마음에 품은 바를 아뢰기를,
"신광집(申光緝)의 해괴한 말로 인하여 성상의 마음이 격뇌(激惱)하시어 태평한 세상에 대신(大臣) 이하가 모두 갓을 벗었으니, 사책(史冊)에 이를 기록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체통을 얻었다."
하였다. 윤시동이 또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신광집을 영호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대각(臺閣)은 임금과 옳고 그름을 다투는 직무인데, 만약 혹시 뜻을 받들어서 일을 말함이 있으면, 위에서 시키는 것은 뜻이 있는 데 가깝고, 아래에서 논한 것은 임금의 뜻에 영합함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어찌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겠으며, 또한 어찌 성세(聖世)에 이연(貽燕)421) 하는 도(道)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그렇지 아니하다. 밝은 촛불이 앞에 있는데, 내가 어찌 아첨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윤시동이 잘못이다. 나는 공의(公議)를 듣고자 한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은 다만 약원(藥院)으로써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신광집이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반일(半日)을 입시(入侍)하였으면서도 아뢰지 아니하고는 물러가서 글로 진달하였으니, 대단히 근거가 없습니다. 청컨대 먼 땅으로 정배(定配)하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대신(臺臣)은 비록 무상(無狀)하나 영의정이 오늘 입시(入侍)하였으니, 그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말을 다시 들었으니, 이미 들은 뒤에 내가 어찌 구차하겠는가? 신광집을 거제부(巨濟府)에 천극(栫棘)422)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과 제신(諸臣)에게 하교한 것을 모두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고, 신회(申晦)를 쫓아 보내라는 전교도 도로 정지하였다. 하교하기를,
"윤시동(尹蓍東)을 뽑아 쓴 뒤에 생각하기를,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더니, 전석(前席)에 올라와서는 이미 마음에 품은 바를 말하고 다시 마음에 품은 바를 〈글로〉 진달하였으니, 바로 하나의 이정렬(李廷烈)이다.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간삭(刊削)하고 전리(田里)로 방축(放逐)하라."
하였다.
이사관(李思觀)을 수어사(守禦使)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정홍순(鄭弘淳)을 내국 제조로, 안집(安集)·김노진(金魯鎭)·윤학동(尹學東)·홍지해(洪趾海)를 승지로 삼았다.
11월 25일 기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감(柑)을 반사(頒賜)하고 선비를 시험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일편 충심(一片忠心)과 윤시동(尹蓍東)의 은혜를 저버리고 임금을 배반한 것은 선악(善惡)이 서로 어긋난다고 이를 만하다. 담월(禫月)에 공무를 행함은 바로 고례(古禮)인데, 한 번에 두 아름다움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윤시동의 모발(毛髮)과 정종(頂踵)은 늙은 나이의 그 임금의 조화(造化)라고 이를 만한데, 겨우 목구멍 사이에 먼저 마음에 품은 바를 진달한 ‘영합(迎合)’ 두 글자는 대단히 무상(無狀)하다. 몸이 미원장(薇垣長)이 되어 신광집(申光緝)의 응견(鷹犬)이 되었으니, 향리(鄕里)로 방축(放逐)하는 것에 어찌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윤시동을 해남현(海南縣)에 천극(栫棘)하고, 신광집과 윤시동이 배소(配所)에 도착한 날짜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26일 경술
목성(木星)이 저성(氐星)에 들어갔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에게 《소학(小學)》의 강(講)을 시험하여 불통(不通)한 사람은 금추(禁推)하고, 입교편(立敎篇)을 음석(音釋)하여 능히 왼 뒤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내국 제조 정홍순(鄭弘淳)이 병으로 나오지 못하고 부제조 안집(安𠍱)이 홀로 문후(問候)하니, 정홍순과 안집을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이창수(李昌壽)를 내국 제조로, 조엄(趙曮)을 부제조로 삼았다.
과차(科次)를 정하여 입시(入侍)하니,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신사환(申史渙)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전 참판 한광조(韓光肇)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자리에 나아가 슬퍼하여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내렸는데, ‘아!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아직도 슬프고 애석하다.’는 교시가 있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하기를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한밤중에 초조하여 허둥지둥할 즈음에 명을 받들고서 3년을 멀리한 나머지 자리에 올랐습니다. 보살피시어 생각하심이 진지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돌보심이 정중하시니, 신이 황송하고도 감격하여 울음과 눈물이 함께 나옴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신과 같이 재주와 식견이 적은 자는 백 가지에 하나도 남과 같음이 없는데, 외람되게 융숭히 알아주심을 입어 높은 지위에 이르니, 수십 년 이래로 입은 은혜는 분수에 넘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문을 닫고서 감격함을 머금고 몸을 바쳐 보답하기를 도모함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신이 현재 탐한 직명(職名)은 종전의 시위 소찬(尸位素餐)423) 한 데에서 추졸(醜拙)함이 모두 드러나서 지금 점검(點檢)해보니 아직도 부끄럽고 뉘우침이 간절합니다. 하물며 신이 애구(哀疚)424) 한 나머지 얼굴이 여위고 정신이 쇠모하여, 비유하건대 썩은 나무가 서리를 맞아서 살아날 듯이 쓸쓸한 것과 같으니, 어찌 다시 버티기 어려운 힘을 채찍질하여 감당하지 못할 임무를 거듭 욕되게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을지라도 능히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정성이 세도(世道)를 진정시켜 편안히 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지만 소략(疎略)한 실수가 있어 사람마다 모두 기쁘게 하지 못하였고, 뜻이 비록 백성의 일을 경리(經理)하는 데 부지런했다고 하더라도 고체(固滯)한 병통이 있어서 일에 따라 적당함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을 알고 있는 자는 직무가 완전 무결하기를 요구하는 즈음에 속으로 근심하며, 신을 알지 못하는 자는 집영(執影)하는 가운데 서로 헐뜯으니, 그것은 위로 성상의 은혜를 저버리고 아래로 자신의 계책을 그르친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조정을 떠난 뒤로부터 나라 일이 더욱 해이해진 것을 보지 못하였고 민생(民生)이 더 곤궁해진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신의 경우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옛 비방이 조금 그쳤으니, 공(公)에서나 사(私)에서나 증험이 나타난 형적이 이미 저와 같다면 물러날 만하고 나아갈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전하께서는 무엇을 취하여 다시 주시며, 신 또한 무엇을 믿고 다시 받겠습니까?
전 수규(首揆)425) 는 마음을 잡음이 자상하고 온화하며 일을 함이 바르고 굳어서 명망과 실상이 추앙하는 바에 이룩한 공효(功效)가 스스로 드러났는데, 이제 갑자기 까닭없이 해면하여 한가로이 수양하게 하시고, 마침내 대신 결정한 것이 바로 이미 시험해보아도 효과가 없는 천품(賤品)426) 에게 돌아갔으니, 성조(聖朝)의 주의(注意)하시는 방법이 아마도 실수가 있는 듯합니다. 또 그 사임을 허락하심이 아랫사람의 심정을 깊이 생각하는 데에 말미암았다면, 신도 임명해 부리시던 중의 구물(舊物)인데 사람들이 곡진하게 입은 은혜를 신인들 어찌 홀로 바랄 수 없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약원(藥院)의 문후(問候)하는 반열이 신의 연고로 말미암아 오래 비원(備員)되지 못하였으니, 사심(私心)이 황공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체통으로 헤아리건대 더욱 미안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몇 해를 지난 뒤에 경을 보고서 경이 처리한 의리가 모두 옳음을 얻었기 때문에 특별히 경의 청함을 허락하였으니, 며칠을 지나지 앉아서 마땅히 경을 볼 것이다. 아! 내가 날마다 노쇠하여 의뢰하는 자는 보상(輔相)427) 인데, 경은 모름지기 내가 몇 해 뒤에 거듭 복상(卜相)한 뜻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사임하지 말 것이며, 초하루 아침에 들어와서 소자(小子)의 은근(慇懃)한 뜻에 부응(副應)하라. 내국 도제조도 어찌 사임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또한 사면하지 말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차자(箚子)를 올려 죄를 인책(引責)하니, 비답하기를,
"한 소인(小人)의 폐단이 이처럼 지극함에 이르니 그저께의 경상(景像)은 한심스럽다고 이를 만하다. 이것이 어찌 경들의 허물이겠는가? 조선의 풍습(風習)이 모두 이와 같다. 나는 말하노라. ‘이 일절(一節)은 바로 조선이 장차 망할 조짐이다.’라고 이러므로 지나간 해에 무상(無狀)한 임징하(任徵夏)를 처분하였었을 때 이병태(李秉泰)의 공청(公淸)한 마음으로도 오히려 복역(覆逆)하였으니, 지금 온 조정이 돌아보고 머뭇거리는 것도 이 폐단이다. 경의 경직(鯁直)함은 내가 이미 익히 알고 있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경에게 맞지 아니함이 있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안심하고 사면하지 말며 곧 일어나 일을 보살펴서 나의 의뢰하는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차자를 올려 하여 죄를 인책(引責)하니, 비답하기를,
"우의정에게 자세히 유시(諭示)하였으니, 내가 어찌 많이 유시하겠는가? 그날 만약 영의정이 없었으면 임금은 어느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며, 나라는 어느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경이 그때 수석(首席)에 있었으므로 비록 개연(慨然)한 뜻을 보였으나, 이것 또한 옥성(玉成)하라는 것이다. 지나간 일은 말하지 말라. 나는 개체(介滯)함이 없으니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며, 곧 일어나 일을 보살펴서 나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11월 27일 신해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고 꼬리 길이가 두세 자 가량이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하교하기를,
"백 사람을 비록 사(赦)할지라도 신광집(申光緝)은 사하기 어렵다. 더욱 헤아리지 못할 것은 윤시동(尹蓍東)이 임금을 몇 해 속인 것이다. 신광집과 윤시동이 다시 모대(帽帶)428) 를 쓰면 나라가 따라서 망할 것이다."
하였다. 윤시동의 국자장(國子長)429) 의 망(望)을 먼저 개정할 것을 명하고, 또 명하여 통청(通淸)한 전관(銓官)에게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근래에 천주(薦主)의 법을 폐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국체(國體)인가? 안상오(安相五)·김영섭(金永燮)의 천주를 전조(銓曹)에 물어서 법으로 처치하라."
하였다. 안상오와 김영섭이 모두 불법(不法)함으로써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죄를 인책(引責)하여 나오지 아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의정이 비록 능히 주선(周旋)하지는 못하였을 지라도 단단(斷斷)한 마음은 내가 안다."
하고, 김양택에게 돈독하게 유시하도록 명하니, 곧 명을 받고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수석(首席)이 되어 말을 삼가하지 아니하니, 말한들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 정실(鄭宲)이 입시하자, 임금이 관서(關西)430) 의 폐막(弊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강계(江界)의 공삼(貢蔘)에 있어 특별히 견감(蠲減)함을 입었으니, 성은(聖恩)을 감축(感祝)합니다."
하였다.
안윤행(安允行)을 대사헌으로, 조엄(趙曮)을 이조 참판으로, 정광충(鄭光忠)을 대사간으로, 이항조(李恒祚)를 장령으로, 이동현(李東顯)을 지평으로, 조중명(趙重明)을 헌납으로, 홍검(洪檢)·홍용한(洪龍漢)을 교리로, 이양수(李養遂)를 부교리로, 이명빈(李命彬)·박사륜(朴師崙)을 수찬으로, 조종현(趙宗鉉)·이치중(李致中)을 부수찬으로, 유한소(兪漢蕭)를 예조 참판으로, 민백흥(閔百興)을 공조 참판으로, 유언민(兪彦民)을 병조 참판으로, 송영중(宋瑩中)·이지회(李之晦)를 승지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고 대신(大臣)도 함께 입시하였다. 제조 이창수(李昌壽)가 문후(問候)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일체로 앞에 나왔는데, 이미 도제조(都提調)가 없으니 대신이 먼저 문후하는 것이 체례(體例)의 당연함이지만 문후의 차례가 바뀌었다. 제조를 중추(重推)하라."
하였다.
11월 28일 임자
유신(儒臣)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고 아뢰도록 하였다.
11월 29일 계축
이조 판서 정실(鄭宲)이 진소(陳疏)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다시 이 임명을 주는 것은 뜻이 대개 깊다. 저번에 좌참찬에게 경과 더불어 과세(過歲)하라는 뜻을 유시(諭示)하였으니, 경이 이 비답을 들으면 어찌 차마 사직하겠는가?"
하였다.
11월 30일 갑인
임금이 태묘(太廟)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하교하기를,
"다음달 27일 후에는 내 나이가 한 살을 더한다. 75세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한 살을 더함이겠는가? 초9일 봄 제사에도 또 섭행(攝行)을 명하였고 백성을 위하여 풍년을 비는 데에도 섭행을 명하였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이 마음을 견디기 어렵다. 지척의 창 밖에서 내수(內竪)431) 가 모두 잠자니 구양자(歐陽子)432) 의 ‘머리를 숙이고 잠자는 동자(童子)’를 어찌 족히 이르겠는가? 아! 구양자도 이르기를 ‘벌레 소리가 즉즉(喞喞)하여 나의 탄식을 돕는 듯하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백 가지 회포가 마음속에 합한 것이겠는가?
아!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나의 뜻을 체득하여 비록 내년을 만난다 하더라도 ‘장대(張大)’ 두 글자는 마음에 싹트지 말게 하라. 명년에 이르러 사신(史臣)이 대유(大有)433) 를 특서(特書)하고 8도(道)가 풍년을 보고하면 어찌 하연(賀宴)을 베푸는 것보다 낫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강원 감사 이언형(李彦衡)을 파직하고, 송영중(宋瑩中)으로 대신하라 명하니, 보고한 은결(隱結)이 영성(零星)하였기 때문이었다.
판의금(判義禁)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현재 가둔 사람을 석방하게 하였다.
김응순(金應淳)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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