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1권, 영조 44년 1768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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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을묘

하교하기를,
"영의정이 조정에 나오면 차대(次對)를 오늘로 진정(進定)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복악(復樂)을 반드시 단문(丹門)434)  에서 하려고 하는 것은 뜻이 대개 깊다. 나의 기운으로써 밤새도록 예(禮)를 행하면 어떠하겠는가? 하물며 하례(賀禮)이겠는가? 먼저 그 하례를 받는 것을 내가 어찌 하겠는가? 아! 1년을 장악(藏樂)한 나머지 세초(歲初)에 하례를 받는 이것이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이겠는가? 75세의 마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76세이겠는가?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나의 이 마음을 알아서 75세의 임금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과세(過歲)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저번 밤에 잠깐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고 지금 다시 우러러 뵈니 성체(聖體)가 더욱 강녕(康寧)하십니다. 이것은 건공(建功)의 덕입니다. 전 영의정의 근력이 신보다 갑절 나으니 삼가 원하건대 신의 직명(職名)을 도로 거두시고 다시 어질고 덕이 있는 이를 임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경의 충서(忠恕)의 도(道)가 부족한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신을 배척하지 않으셨다면 신의 말을 어찌 듣고 쓰지 아니하십니까? 금년의 철악(撤樂)은 이미 지났고, 오늘은 바로 초길(初吉)이며 곤전(坤殿)435)  이 궁에 들어오신지 11년이 되니, 하례와 연회를 아울러 행한 연후에야 신들이 항안(抗顔)할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의정은 오늘 세손(世孫)을 보았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가까스로 이미 승후(承候)하였습니다. 예교(睿敎)436)  가 먼저 이에 언급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밉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곧 마땅히 다시 청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엄(趙曮)을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으로 도로 차하(差下)하도록 명하고, 훈련 대장 정여직(鄭汝稷)을 체차하도록 명하였으며, 김시묵(金時默)을 정경(正卿)에 특별히 올리도록 명하니, 모두 홍봉한이 아뢴 바이다. 수찬 이명빈(李命彬)이 윤광찬(尹光纘)·조재민(趙載敏)의 서용(敍用)하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유시(諭示)하였으니 그만두라."
하였다. 강원 감사의 분등 장계(分等狀啓)를 읽고 아뢰기를 명하여, 인제 현감(麟蹄縣監) 이현백(李顯白)과 회양 부사(淮陽府使) 이의철(李宜哲)을 모두 체차하고, 심발(沈墢)을 회양 부사로, 홍검(洪檢)을 인제 현감으로 삼을 것을 명하니, 두 고을은 다 우심(尤甚)한 고을이기 때문이었다. 이장오(李章吾)를 훈련 대장으로, 구선복(具善復)을 금위 대장으로, 원중회(元重會)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공조 판서 홍인한(洪麟漢)이 진소(陳疏)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올려 발탁한 것이 어찌 경에게 사사로운 것이겠는가?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공심(公心)이다. 경은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조석목(趙錫穆)이 상소하여 경계하기를 진달하니, 비답을 내려 가장(嘉奬)하였다.

 

12월 2일 병진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고, 시임·원임 대신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이 같이 들어와서 연하(宴賀)의 일로써 번갈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2월 3일 정사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 등이 듣건대 ‘백성이 원하는 바를 하늘이 반드시 따르고 아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부모가 반드시 시행한다.’고 하니,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신 등의 하늘이시며 신 등의 부모이십니다. 신 등의 원하는 바를 전하께서는 어찌 하늘이 백성에 따르는 것으로써 따르지 아니하시며, 신 등의 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께서는 또한 어찌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것으로써 베풀지 아니하십니까? 하물며 그 원하는 바와 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국가의 대례(大禮)이며 대소(大小) 신민이 뜻을 같이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덕이 방훈·중화(放勛重華)437)  에 합하시고 효행은 증(曾)·민(閔)438)  과 같으시며, 하늘의 내린 복을 받으시고 조종(祖宗)의 도우심을 입으시어 보주(寶籌)가 바야흐로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오르시고 영록(靈籙)439)  이 이미 사기(四紀)에 찼습니다. 또 우리 중궁 전하께서는 곤덕(坤德)440)  이 건(乾)441)  에 짝하고 황상(黃裳)442)  이 길(吉)함에 맞아 주량(舟梁)443)  의 해가 이제 일갑(一甲)444)  이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삼대(三代) 이후로 드물게 보는 바입니다. 오늘날 신자(臣子)가 되어 이렇게 만나기 어려운 아름다운 기회를 맞이하여 기뻐서 즐거워하며 춤추고 뛰는 심정이 다할 수 없음이 있다면, 비록 달마다 남산(南山)의 축하를 드리고 날마다 북두(北斗)의 술잔을 올릴지라도 족히 그 정성을 다하고 그 성심을 펴지 못할 것인데, 다만 겸손하신 성덕(聖德)이 크게 지나치시고 추모하시는 효성이 무궁하심으로 인연하여 《오례(五禮)》에 실린 법을 여러 번 궐(闕)하면서 거행하지 아니하였고, 1년을 장악(藏樂)하는 명을 힘써 다투었으나 얻지 못하였으니, 뭇 사람의 억울한 마음과 신하의 직책을 허물어뜨림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은 묵은 해[舊歲]가 저물었고 새 양(陽)이 이미 회복되어 해옥(海屋)445)  에 영주(靈籌)를 더함이 더욱 높고 냇물처럼 경사가 연달아 이르니 종사(宗社)에 있어서는 무궁한 복이며 신서(臣庶)446)  에 있어서는 막대한 경사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국가가 당연히 거행할 떳떳한 법을 상고하고 선조(先朝) 때 이미 행한 거룩한 일을 이어서 화봉(華封)의 축복(祝福)447)  을 옮겨 삼호(三呼)를 대정(大庭)에서 행하고 초연(初筵)의 십(什)448)  을 읊어서 만수(萬壽)를 공당(公堂)에서 칭송하여, 위로는 하늘에 계시는 선령(先靈)의 돈독히 돌보심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사방에서 기뻐하는 〈신민의〉 정성을 펴게 하는 것은 천리(天理)를 찾아 보아도 그만둘 수 없으며, 백성의 떳떳한 도리로 헤아려도 폐할 수 없습니다. 예전의 명철한 임금이 하례를 받은 일이 없었으면 그만이지만 진실로 있었으니, 원조(元朝)에 거행하지 아니하고 어찌 하겠습니까? 예전부터 밝은 시대에 연회를 베푸는 의식이 없었으면 그만이지만 진실로 있었으니, 명년에 행하지 아니하고 어찌 하겠습니까? 전하의 지극히 밝으심과 지극한 덕으로써 마땅히 위에 이른 바 ‘천리(天理)로도 그만둘 수 없고, 민정(民情)으로도 폐할 수 없음’을 생각하시면 신 등의 장황하고 번거롭게 청함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반드시 굽어 허락하심이 있으실 것인데, 연일(連日) 괴롭게 청하였으나 윤허하시는 하교가 더욱 아득하니, 모두 신 등의 정성이 옅고 말이 졸렬하여, 우리 성상께서 뭇 신하의 마음을 체득[體群臣]하는 큰 도량으로 이에 도리어 신 등을 신분(臣分) 밖에 두게 하였으므로 두려워서 천지 사이에 몸을 용납할 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 신 등이 만난 때가 어떤 좋은 경회(景會)이며 주장하는 바가 어떤 성대한 예식인데, 만약 성상의 돌아보지 아니하심으로 인하여 간절히 말하고 힘써 청해 기어이 준허를 얻도록 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임금을 섬기는 데 예(禮)를 다하고 신하가 되어 충성을 다하였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전석(前席)의 남은 뜻을 가지고 감히 서로 이끌어 와서 함께 호소하는 것이니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깊이 세 번 생각하심을 더하시어 빨리 한 번 윤허하심을 내려 온 나라가 우러러 바라는 뜻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몇 번이나 경 등에게 하교하였는데, 오늘날의 거조는 대단히 지나치다. 1년을 장악(藏樂)하였으니 추모(追慕)함이 어떠하겠는가? 만약 열흘이 지나면 장차 봄을 알릴 것이니, 자정문(資政門)에서 피리[笛]를 부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어찌 효(孝)인가? 이것이 첫째이다. 갑술년449)  에 자성(慈聖)450)  께 아뢰어 오히려 면하였으니, 아! 회갑에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일흔 여섯이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심담(心膽)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이것이 둘째이다. 아! 자성을 받들고 정묘년451)  을 만나서도 한 번의 하례와 한 번의 잔치를 하지 못하였으니, 멀리 서교(西郊)를 바라보매 눈물이 자리를 적신다. 이 마음으로써 어찌 이 요청을 따르겠는가. 이것이 셋째이다. 4년 동안에 한 번 작(爵)을 받고 한 번 잔치를 받고 두 번 작주(酌酒)하였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자 오히려 지나치다. 아! 명년은 어떤 해인가? 이 잔치를 받으면 이것이 어찌 추모(追慕)하는 뜻이겠는가? 이것이 넷째이다. 하례는 하나인데 장악(藏樂)하기 전에 이미 행하였고, 복악(復樂)한 뒤에 또 행하여 두 해 안에 어찌 두번 하례를 받겠는가? 결단코 따를 수 없는 것이 다섯째이다. 아! 내 마음은 하나는 추모(追慕)하는 것이고, 하나는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경 등이 비록 만 가지로 말을 만들지라도 나는 단지 세 글자로 답할 따름이다. 대신과 경재(卿宰)는 모름지기 알지어다. 모름지기 알지어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두 번째 계달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고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가 병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계달하며 차자를 올려 견책(譴責)을 청하니,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대신(大臣)과 2품 이상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같은 소리로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2월 4일 무오

빈청의 계달에 답하기를,
"경 등의 요청과 같이하면 해마다 하례를 받고 해마다 잔치를 받아야 마땅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는가? 이제 유시(諭示)를 마쳤으니 요청을 그쳐라."
하였다. 빈청에서 두 번째 계달하니, 비답하기를,
"마음을 굳혔으니, 경 등은 이를 알지어다."
하였다. 빈청에서 세 번째 계달하니, 비답하기를,
"만약 내일을 지나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올 것이다. 백관이 어찌 털모자가 있겠는가? 나는 정해진 마음이 있다. 다음달 초3일에, 지나간 해 탄일(誕日)이었던 15일 하례에 의하여 하례를 받되, 단지 정조(正朝)의 하례만 받을 것이다. 경 등이 만약 경사를 치루려 하면 내가 어찌 하례를 받겠는가? 잔치에 이르러서는 명년 가을을 기다려서 팔도(八道)에 만약 대풍(大豊)이 들면 내가 옛 해의 ‘풍년을 비는 시(詩)’를 외면서 마땅히 하례를 받을 것이다. 경 등은 이를 알지어다."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이 입대(入對)를 청하고 종신(宗臣)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 등이 또한 진소(陳疏)하였는데, 무신(武臣)·장신(將臣) 외에는 모두 해임(解任)하고, 여러 승지의 현직을 해임하여 동소 위장(東所衛將)을 가승지(假承旨)452)  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

 

12월 5일 기미

왕세손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고 정원(政院)·옥당(玉堂), 조정 2품 이상과 육조 당상(六曹堂上)이 문안하였다.

 

왕세손이 궁관을 보내어 승후(承候)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그만 두라.’고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약방의 세 제조(提調), 삼사(三司)의 2품 이상이 입대(入對)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탄일(誕日)이 모레인데, 구저(舊邸)에 머물러 있으니 마음을 어찌 억제하겠는가?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리고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를 헌관(獻官)으로 삼아 내일 향(香)을 받아 휘령전(徽寧殿)에서 제사를 행하게 하라."
하였다.

 

명하여 시임·원임 대신에게 대명(待命)하지 말게 하고 아울러 제신(諸臣)과 여러 승선(承宣), 유신(儒臣)의 현직 해임의 명을 도로 정지하게 하였다. 여러 승지가 입대(入對)를 요구하고 시임·원임 대신이 입대를 요구하며 약방의 세 제조(提調)가 입대를 요구하니, 하교하기를,
"이와 같이 나를 괴롭게 하니, 여러 유신을 모두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약방에서 구전(口傳)으로 세 번 아뢰니, 명하여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에게 빨리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법을 시행하고, 기타 시임·원임 대신은 단지 정승과 서추(西樞)453)  만 해면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약방 도제조·제조를 모두 서용하지 아니하는 법을 시행하고 여러 승지를 체차하라."
하였다. 어제 가승지(假承旨)를 권차(權差)한 일로 인하여 전 판부사(判府事) 김치인(金致仁)·전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전 판부사 한익모(韓翼謨)·전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아울러 대명(待命)하였다.

 

12월 6일 경신

임금이 비로소 환궁(還宮)하였다. 하교하기를,
"삼군(三軍)을 위해 비록 회가(回駕)하여 집경당(集慶堂)에 와서 누웠으나 푸른 하늘이 마음을 비쳐 보는데, 이것이 어찌 효도이겠는가?"
하였다.

 

홍인한(洪麟漢)을 호조 판서로, 정홍순(鄭弘淳)을 내국 제조로, 김상중(金尙重)을 공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록 개연(慨然)하나 뜻은 임금을 위한 것이니, 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전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전 우의정 김상철(金相喆)에게 다시 전임(前任)을 주고, 전 판부사 김치인(金致仁)·한익모(韓翼謨)를 서용(敍用)하며, 서명(胥命)하지 말게 할 일을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시(諭示)를 전하라."
하였다.

 

여러 승지가 입대(入對)를 요구하고 내국 제조가 탕제(湯劑)를 가지고 예궐(詣闕)하여 입대를 요구하니, 하교하기를,
"몸은 비록 이 당(堂)454)  에 있으나 마음은 구저(舊邸)455)  에 있으니, 내일 입시(入侍)하라."
하였다.

 

이득신(李得臣)을 정언으로, 홍낙신(洪樂信)을 교리로, 홍상간(洪相簡)을 부교리로, 김기대(金基大)를 수찬으로, 홍경안(洪景顔)·홍수보(洪秀輔)를 부수찬으로, 김종정(金鍾正)을 우윤으로, 홍봉한(洪鳳漢)을 내국 제조로 삼았다.

 

12월 7일 신유

하교하기를,
"3일의 하례(賀禮)는 이름이 비록 정조(正朝)의 하례라 하더라도 실상은 망팔(望八)의 하례이다. 반사(頒赦)와 정시(庭試)는 말절(末節)이라고 이를 만하며, 임금을 위하여 정하(庭賀)456)  하는 것이 바로 그 근본이다. 이미 그 잔치를 허락하였으니, 어찌 봄과 가을로 구애되겠는가? 하교에 의하여 거행할 것을 초기(草記)한 연후에 마땅히 내국(內局)에 수응(酬應)하겠다. 이미 허락한 뒤에도 근근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신하를 어찌 믿겠는가?"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빈청 계사(賓廳啓辭)의 비지(批旨)에 의하여 진하(陳賀)하는 것은 오는 정월 초3일에 거행하고 진연(進宴)하는 것은 가을을 기다려서 거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약방에서 세 번 계달하니, 비로소 입시(入侍)를 명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예조 당상[禮堂]이 함께 들어 왔다. 도제조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구궐(舊闕)의 복주(福酒)와 기사(耆社)의 송다(松茶)도 잔치라고 이르고, 음악이 없는 하례도 예식을 이루었다고 이르면 하정(下情)이 어찌 억울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 봄에는 더욱 논할 수 없다. 대신(大臣)의 장례(葬禮) 전인데, 어떻게 잔치를 베풀겠는가? 나로 하여금 두거(杜擧)457)  의 비난을 받게 하는가?"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윤 영부사는 누구의 아들인가? 그 아버지의 아들로서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마음은 이미 알고 있는데, 근래에 강건하면서도 빈청(賓廳)의 계달에 참여하지 아니하여 내가 이미 그를 의아하게 여겼고, 차자(箚子)를 보고 비록 알았으나 어찌 이 단자(單子)의 미품(微稟)458)  을 어찌 뜻하였겠는가? 아! 2년 사이에 세 정승이 이와 같았으니, 이도 또한 국운(國運)에 관계된 바이다. 슬픔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무인년459)  에 공묵합(恭默閤)에서 부제조(副提調)가 된 일을 추억하니, 내 마음을 어찌 억제하겠는가? 구재(柩材)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골라서 보내게 하고 모든 일을 서 판부사(徐判府事)의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기를 신칙하며, 시장(諡狀)은 석 달 안에 시호를 내리고 녹봉(祿俸)은 3년을 기한하여 그대로 주며 제문(祭文)은 마땅히 지어서 내릴 것이니, 성복(成服) 날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며 그 아들은 복(服)을 마치기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라."
하였다. 윤동도의 자(字)는 경중(敬仲)인데, 고(故) 판서 윤혜교(尹惠敎)의 아들이다. 가세(家世)가 유(儒)를 본업(本業)으로 하여, 문학과 재유(才猷)로써 일컬었다.

 

하교하기를,
"아! 능창(綾昌)이 예전에는 3형제였는데, 단지 이 사람만 있다. 하물며 지나간 해에 총부(摠府)에서 반직(伴直)460)  하였는데, 지금 고인(古人)이 되었으니 슬픔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저번에 미처 하교하지 못하였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원치부(原致賻) 외에 더 주어서 나의 뜻을 표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8일 임술

하교하기를,
"오늘날 제신(諸臣)은 증자(曾子)461)  를 본받으려고 하는가? 증석(曾晳)462)  을 본받으려고 하는가? 임금과 어버이는 일반인데, 이처럼 어버이를 괴롭게 하면 비록 날마다 삼생(三牲)463)  을 이바지하더라도 어찌 족히 효(孝)라고 하겠는가? 오늘날 글을 읽는 군자(君子)가 근본을 버리고 끝을 취하니, 어찌하여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약방에서 세 번 아뢰니, 임금이 그만두라고 답하였다.

 

12월 9일 계해

전 판부사(判府事) 이창의(李昌誼)를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저번에 선전관(宣傳官)이 왕래한 뒤에 하교하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어찌 상례(常例)에 따르겠는가? 받을 만한 것은 받고 받기 어려운 것은 활협(闊狹)464)  할 것이다. 관동(關東)의 인제(麟蹄)·회양(淮陽) 등의 고을과 경기의 교동(喬桐)·풍덕(豊德)·통진(通津) 등 고을과 북도(北道)의 남북(南北)의 우심한 고을 등은 이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곧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의 혼례(婚禮)를 2월에 거행하도록 명하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다.

 

추조(秋曹)465)  ·금오(金吾)466)   수도안(囚徒案)을 들이도록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게 하였다.

 

12월 11일 을축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이조 판서 정실(鄭宲)의 체차를 허락하고, 홍인한(洪麟漢)을 이조 판서로, 조운규(趙雲逵)를 호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세택(李世澤)이 한 바가 비록 해괴할 만하나 지금 장차 변경에 정배(定配)한다고 하는데, 이제 이택주(李宅胄)의 일을 들으니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이 어찌 다르겠는가? 특별히 그 본향(本鄕)에 정배하라."
하였다. 이때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택주가 범장(犯贓)467)  하였으나, 노모(老母)가 있음으로써 감율(減律)을 명하였었는데, 이세택 또한 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직(司直) 김시묵(金時默)이 진소(陳疏)하여 새로 제수한 자급(資級)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병조 판서 구선행(具善行)과 공조 판서 김상중(金尙重)이 진소하여 사직하니, 모두 예사 비답(批答)을 내렸다.

 

이한풍(李漢豊)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12일 병인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남당(南塘) 좌현성(左峴城)을 쌓도록 명하니, 병조 판서 구선행(具善行)이 건의해 청한 바로 인한 것이다.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정조(正朝)·동지(冬至)의 하례(賀禮)를 왕세손(王世孫)이 당(堂)에 앉아서 받을 것을 우러러 품(稟)하니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중궁전(中宮殿)에 진하(陳賀)하고 표리(表裏)를 올리는 것은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전라도 어사(全羅道御史) 이득신(李得臣)이 복명(復命)하고 입시(入侍)하였다. 서계(書啓)를 읽고 아뢰기를 마치자 정읍 현감(井邑縣監) 윤광(尹晥)을 승서(陞敍)하라고 명하니, 포장(褒奬)한 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3일 정묘

빈궁(嬪宮)의 탄일(誕日)이라 승정원과 홍문관에서 문안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이조 판서 홍인한(洪麟漢)이 진소(陳疏)하여 ‘형이 상상(上相)468)  에 있는데 동생이 장전(長銓)469)  에 참여하였다.’고 말하면서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해면하도록 허락하였다.

 

지사(知事)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여러 대신(大臣)을 재차 체면(遞免)하고 여러 경재(卿宰)를 일시에 배척해 물리치신 일은 전에 없는 바이며, 보고 듣는 것이 미치는 바에 놀라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산이라도 꺾을 듯한 기세에 경계하시고 바다처럼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시어 항상 마음을 바로잡는 데에 생각을 다하시고 더욱 화평을 가지시는 도리에 힘쓰소서. 예전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하교에 ‘극기(克己)는 모름지기 성질이 치우친 데로부터 하공(下工)470)  할 것이다. 노여울 때에 처리하는 일이 매양 이치에 맞지 아니하는데, 근래에 한 가지 방법을 얻었다. 일에 옳지 못함이 있으면 반드시 밤에 노여움이 풀리기를 기다려서 처리하면 자못 지나침이 적음을 깨닫는다.’고 말씀한 것이 있으니, 이는 진실로 천고(千古)의 격언(格言)이며 백왕(百王)의 본받을 바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에 힘쓰시어 잃지 말으시며 이를 준수하시고 이를 법으로 하소서.
아! 지금 유유(悠悠)한 만사(萬事) 가운데 태상(太上)은 성궁(聖躬)을 보호하시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동작(動作)을 삼가하시고 사려(思慮)를 살피시며, 간략함으로써 번거로움을 제어하고 순함으로써 사물에 응하시어 항상 성체(聖體)를 화태(和泰)하게 하소서. 동궁을 보도하는 것은 비록 궁료(宮僚)의 책임이라 하더라도 사고가 많아서 강연(講筵)을 자주 정지하므로 항상 십한 일폭(十寒一曝)471)  의 탄식이 있으니, 그 덕성(德性)을 훈도(薰陶)함이 전하의 몸과 같지 못합니다. 전하의 일언(一言) 일동(一動)과 일정(一政) 일령(一令)을 모두 스승으로 삼고 법으로 삼게 한 연후에 곁에 모시고 친히 배우며 일에 따라 보고 느끼면 요(堯)가 되고 순(舜)이 되는 것은 오로지 이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멀리 계획하시어 우리 나라의 무궁한 큰 운명을 영구히 하소서.
신이 사가(私家)의 늙은 종[奴]을 보니 그 주인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바가 없습니다. 신도 성조(聖朝)의 한 늙은 종인지라 엄하고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마음 속에 있는 바를 문득 진달하여 가만히 ‘죽음에 이르러 충성을 마지막으로 다하는 의리[義]’에 붙이니, 오직 전하께서는 굽어살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의 나이는 비록 많을지라도 뜻은 오히려 더욱 건장하다.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몸은 비록 쇠하였어도 마음은 쇠하지 아니하였으니, 이제 진달한 글을 보고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지나간 일은 비록 나의 괴로운 마음으로 인한 것이나 일에 따라 바로잡아 구제하니, 내가 어찌 체득하지 아니하겠는가? 또 옛일을 인용하였으니, 깨닫지 못한 사이에 몸을 일으켜서 듣게 한다. 동궁을 보도하는 것도 말이 절실(切實)하니, 맹성(猛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대신(臺臣)이 공무를 집행하는 이조 판서를 개정(改正)하라는 청’을 금하도록 청하니, 조명정(趙明鼎)이 지난번에 개정하라는 탄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2월 14일 무진

하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효부(孝婦)472)  의 생일이다. 특별히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술잔을 드리게 하였으니, 그 복명(復命)을 기다려서 마땅히 차대(次對)에 수응(酬應)할 것이다. 나에게는 두 며느리가 있는데 그 효성은 한가지이다. 예전에는 감회가 일어났으나 지금은 이 며느리에게 의지하니, 팔십이 가까운 늙은 나이에, 고첩(古牒)473)  에 어찌 나와 같은 이가 있겠는가?"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고 겸하여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조재부(趙載溥)를 견복(甄復)474)  하고 조재홍(趙載洪)의 아들은 신칙하여 부거(赴擧)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좌의정·우의정에게 물은 뒤에 하교하기를,
"오늘 밤에 감회가 일어나니 어찌 표시하는 뜻이 없겠는가? 전 현감(縣監) 조재부를 특별히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조재홍의 아들이 또한 부거(赴擧)하지 아니한다고 하니, 어찌 다만 지나칠 뿐이겠는가? 분의(分義)와 사체로 보아 한심스럽다. 이 뒤로는 구애됨이 없이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충신(忠臣)을 추억함은 왕자(王者)가 먼저할 일이다. 내승(內乘) 이한창(李漢昌)에게 특별히 한 자급을 더하여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좌참찬 신회(申晦)가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옳다. 그 마음을 느낄 만하다."
하고, 명하여 신광집(申光緝)의 위리 안치(圍籬安置)를 걷게 하였다. 홍봉한이 공명첩(空名帖)을 제도(諸道)에 많이 나누어 주어 진자(賑資)에 보충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홍익돈(洪益惇)을 청근 현주(淸瑾縣主)475)  에게 장가들게 하여 당은 첨위(唐恩僉尉)의 칭호를 내렸다. 홍익돈은 홍양유(洪亮猷)의 아들이다.

 

12월 15일 기사

판부사 이창의(李昌誼)가 진소(陳疏)하여 견책(譴責)을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도승지 김응순(金應淳)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심수(沈鏽)와 강원 감사 이언형(李彦衡)의 계본(啓本) 가운데 수령(守令)·찰방(察訪)이 한 사람도 하고(下考)476)  에 든 자가 없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정여증(鄭汝曾), 김제 군수(金堤郡守) 서일수(徐日修), 곡성 부사(谷城府使) 유언술(兪彦述), 황주 목사(黃州牧使) 김이장(金履長), 재령 군수(載寧郡守) 이용중(李龍中), 안동 부사(安東府使) 한필수(韓必壽), 영천 군수(榮川郡守) 조덕호(趙德浩), 진보 현감(眞寶縣監) 박상규(朴相珪), 이성 현감(利城縣監) 남익초(南益初)는 부지런하였는데 하(下)에 점(點)하였으니, 전최(殿最)를 엄명(嚴明)하게 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청컨대 제도(諸道)의 도신을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좌부승지 이한풍(李漢豊)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상순(鄭尙淳), 통제사(統制使) 이한응(李漢膺), 남병사(南兵使) 김범로(金範魯), 황해 수사(黃海水使) 신대현(申大顯), 전라 좌수사 윤희동(尹僖東),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전득우(田得雨)의 계본(啓本) 가운데 변장(邊將)이 한 사람도 하고에 든 자가 없으니, 청컨대 추고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12월 17일 신미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기백(畿伯)477)                  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여 경기의 설진(設賑)한 고을과 환자곡[還上穀]을 받지 못한 수량을 묻고 하교하기를,
"일양(一陽)478)                  이 처음 생길 때에 이미 하교하였는데, 하물며 삼양(三陽)479)                  이 가까이 있는 때이겠는가? 제도(諸道)의 우심(尤甚)한 고을과 그에 버금가는 고을의 우심한 면(面)은 신환곡(新還穀)을 정봉(停捧)하고 제도의 구환곡은 모두 아울러 정봉하라. 아! 전에 《경직도(耕織圖)》 수장(首章)을 보니, 옛 해의 어제(御製)가 있는데, 이 도(圖)는 바로 황형(皇兄)480)                  이 춘저(春邸)481)                   때에 춘방(春坊)에서 그려 올린 것이다.
내가 신축년482)                  에 동궁에 들어간 뒤에 이 《도》가 들어 왔기 때문에 내가 하단에 공경히 어시(御詩)로 화답하였는데, 끝 구(句)에 이르기를, ‘모름지기 이 그림을 가지고 자세히 보라.[須把此圖 仔細看]’고 하였다. 지금 팔십이 가까운데 만약 백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어찌 ‘자세히 본다.’고 이르겠는가? 지금의 하교를 비국(備局)에서 삼현령(三懸鈴)으로 제도(諸道)에 분부하여 우리 소민(小民)으로 하여금 오두막 집에서 며칠 쉬게 하라. 왕자(王者)가 서울과 지방을 어찌 다르게 하겠는가? 현방(懸房)483)                  의 속(贖)을, 금패(禁牌)의 예(例)에 의하여 받지 말게 할 일을 일체로 분부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광조(韓光肇)에게 아들이 있는가?"
하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네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것이 임금과 신하이다. 임오년484)                  의 일을 추억하니 마음이 항상 슬프고 애석하다. 하물며 최마(衰麻)485)                  를 벗지 아니하였는데 이에 이르렀으니, 그 아들을 복(服)을 마치기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여 구원(九原)486)                  의 넋을 위로하라."
하고, 곧 제문(祭文)을 지어 내렸다. 한광조가 우복(憂服)487)                  중에 졸(卒)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에 언급한 것이었다.

 

12월 18일 임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어제 서울과 지방의 백성에게 이미 하교하였는데, 도하(都下)488)  의 근본이 되는 백성으로 하나는 상인[市民]이고 하나는 공인(貢人)이다. 혜청(惠廳)에서 응하(應下)489)  할 것과 기조(騎曹)490)  의 고가(雇價)를 곧 차하[上下]491)  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화진(金華鎭)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본영 중군(本營中軍)을 병조(兵曹)에서 의차(擬差)하여 곧 제역(諸驛)을 구관(勾管)하도록 병조에 분부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원조(元朝)에 복악(復樂)할 일을 우러러 품(稟)하니, 단문(丹門) 밖에서 복악(復樂)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박성원(朴盛源)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일 세초(歲抄)에 윤광찬(尹光纘)·조재민(趙載敏)을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범한 죄가 지극히 중하니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법을 집행하는 반열(班列)이 마땅히 쟁집(爭執)하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제까지 잠잠하니 신은 가만히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청컨대 윤광찬·조재민을 서용하는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그 뒤에 말하지 아니한 삼사(三司)도 신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의 하교와 이번에 점하(點下)한 것은 대개 뜻이 있는데, 지금 잠잠한 때가 비록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이미 법을 집행하면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대신(臺臣)의 청한 바가 또한 체통을 얻었다. 아뢴 바에 의할 것이며, 그날 입시(入侍)한 유신(儒臣)은 이미 복계(覆啓)하기가 어려운데 아울러 파직을 청한 것은 지나치니 윤허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박성원(朴盛源)이 말하기를,
"이명빈(李命彬)의 연청(筵請)은 이미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다만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 외의 여러 유신이 말하지 아니한 잘못은 이미 양사(兩司)와 다름이 없으니, 유신(儒臣)을 일체로 파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논한 바가 역시 옳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서명신(徐命臣)을 이조 참판으로, 이숭호(李崇祜)를 정언으로, 조종현(趙宗鉉)을 부수찬으로, 조엄(趙曮)을 동돈녕으로, 심수(沈鏽)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재차의 도목 정사에서 박성원(朴盛源)을 대사간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집의로, 이행원(李行源)을 사간으로, 정언섬(鄭彦暹)·강시현(姜始顯)을 장령으로, 유항주(兪恒柱)·송취행(宋聚行)을 지평으로, 이시건(李蓍建)을 헌납으로, 이익선(李益烍)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19일 계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제조 한광회(韓光會)의 체차를 허락하고 김지묵(金持默)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같다. 지나친 것은 금함이 마땅하며 모자라는 것도 잘못이다. 수년 이래로 호랑이를 잡은 장계(狀啓)가 전연 없으니, 제도(諸道)에 모두 호랑이가 없어서 그러한가? 혹시 참으로 호랑이를 잡은 것이 있는데도 아울러 금하였으면, 이는 목이 멤으로 인하여 음식을 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제도로 하여금 종합하여 밝히게 하라."
하였다.

 

이육(李堉)을 집의로, 박기채(朴起采)를 사간으로, 민홍렬(閔弘烈)·정창순(鄭昌順)을 교리로, 김종수(金鍾秀)·조준(趙㻐)을 부교리로, 조재준(趙載俊)·이병정(李秉鼎)을 수찬으로, 이득복(李得福)을 부수찬으로, 김익(金熤)을 필선으로, 윤석렬(尹錫烈)을 겸 사서로, 이담(李潭)·엄인(嚴璘)·조덕성(趙德成)·정창성(鄭昌聖)·구상(具庠)·박필규(朴弼逵)를 승지로 삼았다.

 

12월 21일 을해

햇무리에 두 고리[珥]가 있으며,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이조 판서 조명정(趙明鼎), 참판 서명신(徐命臣), 도승지 이담(李潭), 병조 판서 구선행(具善行), 참판 유언민(兪彦民), 참의 조정(趙晸), 참지(參知) 홍윤(洪錀), 좌부승지 정창성(鄭昌聖)이 입시(入侍)하였다. 이휘지(李徽之)를 이조 참의로, 김이희(金履禧)를 부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김기대(金器大)를 동경연으로, 성천주(成天柱)를 동춘추로, 서명응(徐命膺)을 예문 제학으로 삼고, 임성주(任聖周)·홍주해(洪疇海)를 외대(外臺)492)  에 통의(通擬)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첨위(僉尉)는 바로 3백 년 이래로 처음 설치한 것인데, 규모(規模)를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종반(宗班)은 비록 감령(監令)이라도 초모(貂帽)와 홍대(紅帶)를 착용함은 금지 옥엽(金枝玉葉)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라 임금의 손서(孫婿)이겠는가? 모두 부위(副尉)의 예(例)에 의하여 거행할 일을 분부하라."
하였다.

 

명하여 이조 참의 권도(權噵)의 체차(遞差)를 허락하고, 전교(傳敎)를 쓰도록 명하여 이르기를,
"통청(通淸)493)  한 자를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하라는 명령은 대개 관방(官方)을 중하게 함이다. 오늘 친정(親政) 때에 좌막(佐幕)494)  의 수망(首望)·부망(副望)을 모두 통청하였으니, 이와 같이하여 그치지 아니하면, 사호(四皓)495)  가 장차 여섯이 되고, 엄광(嚴光)496)  이 장차 둘이 될 것이다. 이 망(望)을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22일 병자

새로이 제수한 수령(守令)·찰방(察訪)·영장(營將)·변장(邊將)·선전관(宣傳官)을 모두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승지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여 하교하기를,
"아! 탐라(眈羅)의 봉진(封進)은 바다를 건너기 때문에 이로써 본주(本州) 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쓴다. 만약 혹시 지체(遲滯)하면 반드시 또한 탐문(探問)하는 것은 과일을 바치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백성의 목숨을 위해서이다. 이제 제주 목사(濟州牧使)의 장문(狀聞)을 보니, 이 배의 사람과 물건이 침몰하였다고 하는 것을 이제서야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이라고 이르지 말라, 역시 나의 늙은 나이의 백성이다. 그 아내와 아들에게 본주(本州)로 하여금 별도로 진휼(賑恤)을 가하여 내 뜻을 보이게 하라. 이 보고를 들으니 비록 세치[三寸]의 누른 귤(橘)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차마 먹겠는가? 하물며 그 밖에 진상(進上)한 것을 또 어찌 족히 논하겠는가? 절대로 다시 봉진(封進)하지 말게 하고, 단지 당유자(唐柚子)497)  는 천신(薦新)498)  으로 봉진하는 일을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23일 정축

대사간 박성원(朴盛源)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빈대(賓對)할 적에 대료(大僚)499)  가 ‘요즘 대각(臺閣)이 전관(銓官)을 개정(改正)하는 폐단’을 대단히 진달하면서,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워 통렬히 금단(禁斷)을 가하기를 청함에 이르렀습니다. 총재(冢宰)500)  는 중한 임무이고 개정은 지극한 벌(罰)인데, 인심은 예전과 같지 아니하여 공격하는 폐단은 진실로 대신이 진달한 바와 같으나 법을 마련한 변변치 못한 뜻은 있는데, 장차 목이 멤으로 인하여 음식을 폐하겠습니까? 지금 만약 엄한 법으로 그것을 금지하여 대각으로 하여금 감히 전관(銓官)의 일을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말로(末路)의 폐단은 돌아보고 기탄하는 바가 없어서 도리어 이보다 큼이 있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대신의 말이 어찌하여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아니합니까?
이조 판서 조명정(趙明鼎)의 이 일이 있은 이후로, 조돈(趙暾)은 이로 인연하여 문득 밝은 시대를 이별하고 죄를 입기를 기약하니, 비록 옛사람의 처의(處義)로써 헤아려 보더라도 대단히 지나치십니다. 그런데 조명정은 그 뒤에 대각의 비평을 몇 번이나 만났으나 염우(廉隅)를 버리고 요직(要職)에서 의기 양양하니, ‘남구만(南九萬)이 귀양 갔는데 허견(許堅)이 마침내 일이 없었다.’라는 것이 불행히도 이와 가깝습니다. 이번 전관(銓官)의 임명으로써 말하더라도 수상(首相)과 친 사돈[親査]의 혐의로움이 있으니, 비록 고례(古例)는 어떠한지 알지 못하지만 그에 해당한 자에 있어서는 근신(謹愼)하는 도리로 한번 진달해 드러내어서 처분을 기다리고, 조금 공의(公議)를 기다려서 조용히 나가 숙배(肅拜)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염치를 무릅쓰고 나갔으니, 물정(物情)501)  이 이미 놀랐습니다.
정주(政注)502)  의 득실을 비록 가혹하게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동벽 통청(東壁通淸)에 이르러서는 먼저 정당(停當)503)  하지 아니하고 독자적으로 배의(排擬)504)  하였으며, 설서(說書)의 초망(草望)505)  을 문득 휴지로 만들었으니, 거조(擧措)가 황홀(慌惚)하여 또한 광궤(恇憒)함에 속합니다. 신은 곧 물리쳐서 맑은 조정에 부끄러움을 끼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거조(擧條)를 냄이 혹시 연주(筵奏)와 어긋난 것이 많으니, 일이 비록 작은 것 같으나 관계되는 바는 중합니다. 신은 기주(記注)를 엄하게 신칙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한 나라 조정에 총재(冢宰)가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아침에 한 사람을 물리치고 저녁에 한 사람을 물리치니, 이와 같이 그치지 아니하면 조선에는 장차 총재가 없게 될 것이다. 원보(元輔)506)  가 아뢴 것은 대개 개탄스러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팔십을 바라보는 늙은 나이에 이같은 상소를 보니, 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어찌할 것인가? 개탄스러워짐을 깨닫지 못하겠다. ‘친사(親査)’ 두 글자가 고례(古例)에도 있었는지 억지로 찾아도 찾지 못하였는데, 이로써 비난하고 배척하니 ‘가혹하게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는 등의 말은 군색스러움이 막심하다. 흰머리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팔십을 바라보는 그 임금에게 이런 기관(機關)을 만드니, 내가 장차 무엇을 믿겠는가? 사직한 것을 시행하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이유수(李惟秀)를 대사간으로, 김시묵(金時默)을 판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신 등이 어필(御筆)의 반사(頒賜)를 받들게 되니, 황송하고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머리를 모아 받들어 보니, 필력(筆力)이 소년 때와 같으시므로 서로 흠탄(欽歎)하였습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또 말하기를,
"신은 들어와서는 안되는데 들어왔으니, 진실로 황공합니다. 일전에 개정(改正)을 시행하지 말라는 요청은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고심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이는 옛 법이 아니고 바로 근래에 창출한 것이기 때문에 진달한 것인데, 공의(公議)가 이와 같으니 지극히 황송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번 이조 판서가 되자 문득 개정하는 탄핵을 만났으니, 어렵다. 욕을 당한 자가 진실로 많으나 어찌 묵상(墨商)의 욕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 임정원(林鼎遠)의 상소는 괴이하다. 한 판부사(韓判府事)507)  가 완백(完伯)508)  이 되었을 때에 박성원(朴盛源)이 그 아버지의 전최(殿最)의 혐의로써 복물(卜物)509)  을 수색해 검사하였으니, 역시 괴이하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조 판서가 비록 신의 친사돈이지만 이번 도목 정사(都目政事)는 잘 하였습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내삼청(內三廳)510)  의 사만(仕滿)한 사람을 이조(吏曹)에서 미처 옮기기 전에 병조(兵曹)에서 먼저 대(代)를 내었고, 또 영장(營將)과 중군(中軍)을 옮긴 것이 너무 많으며 또한 삭(朔)에 준(準)하지 아니한 것이 있다.’ 하여 병조 판서를 중추(重推)하도록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또 ‘사만(仕滿)한 사람을 미처 옮기지 아니하였는데, 먼저 대(代)를 냈다.’ 하여 이조 판서를 중추(重推)하도록 청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단묘조(端廟朝)511)  의 세 대신(大臣)을 복관(復官)한 뒤에, 정분(鄭苯)의 자손 가운데 확실한 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요즘 듣건대 장흥(長興) 정성(鄭姓) 사람이 마가(馬哥)와 송사(訟事)함으로 인하여 관에서 정성 사람의 선대(先代)의 묘(墓)를 파 보니 지석(誌石) 두 조각을 찾았는데, 바로 정광로(鄭光露)의 묘이고 정광로는 바로 정분의 아들입니다. 대저 정광로가 당시의 일이 어려움을 알고 거짓으로 미쳐서 자취를 숨겼는데, 그가 죽음에 이르러 그 아들이 비록 지석(誌石)을 묻었으나 유계(遺戒)로 인하여 그 내력을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손자 이후로부터는 누구의 자손인지를 아득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수백년 뒤에 비로소 옛 정승의 혈손(血孫)임을 알았으니, 조가(朝家)에서 표이(表異)의 거조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이한 일이다. 결원을 기다려서 조용(調用)하라."
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정관정요(政觀政要)》를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12월 24일 무인

달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요전에 이헌경(李獻慶)의 해괴한 거조로 인하여 이정섭(李廷燮)이 죄를 입는 일까지 있었으며, 지금은 이미 물고(物故)되었는데, 그때의 처분으로 인하여 그 자손도 청금록(靑衿錄)512)  에 들어가지 못하니, 이것이 비록 소외된 미천한 무리라 하더라도 광탕(曠蕩)513)  하는 법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의 하교를 특별히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전 도사(都事) 조내진(趙來鎭)을 빈 자리가 나는 대로 기다려서 조용(調用)하라 명하였다.

 

12월 25일 기묘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박성원(朴盛源)의 상소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견책(譴責)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하나의 차자로 〈사직〉 하려고 할 때, 내가 중지하기를 명한 것은 경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국체(國體)를 위하는 것인데, 경은 오히려 시속을 초탈하지 못하여 반드시 두 줄[二行]의 차자로 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마지 못해 허락하여서 막중한 문후(問候)를 경이 참여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찌 두 줄의 글뿐이겠는가? 열 줄의 글에 이르니, 경을 위하여 개탄스럽다.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며 곧 일어나 나와서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조명정(趙明鼎)이 진소(陳疏)하여 대변(對辨)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 타일렀는데, ‘과연 경의 글과 같이 두 차례 논할 만한 것이 없으니 내마음이 창연(悵然)하다.’는 하교가 있었다.

 

형조 참판 정언충(鄭彦忠)이 진소(陳疏)하여 사직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한 해 동안 장악(藏樂)하고 내 마음 이루었으니, 종이에 글씨를 써서 천년에 드리운다.[一歲藏樂遂予心 臨紙弄筆垂千載]’의 글귀를 써서 내려서, 총융사(總戎使) 김시묵(金時默)에게 간인(刊印)하도록 명하여 여러 신하에게 하사하게 하였다. 옥당 상하번(玉堂上下番)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정창순(鄭昌順)은 과천(果川)에 가고, 이병정(李秉鼎)은 양주(楊州)에 가서 봉창(封倉)을 탐지(探知)하여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서 승지를 보내어 고(故) 봉조하(奉朝賀) 김흥경(金興慶)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12월 26일 경진

신회(申晦)를 이조 판서로, 정존겸(鄭存謙)을 이조 참판으로, 홍지해(洪趾海)를 이조 참의로 삼고, 김원행(金元行)을 다시 찬선으로 제수하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홍봉한이 호남 어사(湖南御史) 서호수(徐浩修)의 별단(別單)으로 인하여, ‘저치미(儲置米)는 묵은 것을 쓰고 햇 것은 저축하는 법을 신칙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김상묵(金尙默)의 상소에 한 말이 비록 옳은 것을 골라서 발언한 데는 부족하였으나, 대체는 말로써 죄를 얻었으니, 용서하는 법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홍봉한이 말하기를,
‘서유린(徐有隣)·윤승렬(尹承烈)이 죄를 입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승렬은 같이 그 율(律)을 받았으니, 지나치다. 분간(分揀)하게 하라."
하였다.

 

홍검(洪檢)을 집의로, 신경준(申景濬)을 사간으로, 신대수(申大脩)·안정인(安正仁)을 장령으로, 박사륜(朴師崙)·임정원(林鼎遠)을 지평으로, 정실(鄭宲)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전교(傳敎)를 쓰도록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포주(庖廚)를 멀리한다.’고 하였는데, 사흘 안에 또 꿩과 생선을 올리니, 이는 ‘포주’를 가까이하는 것이다. 꿩과 생선을 없애고 실과(實果)만 봉진(封進)할 일을 경기(京畿)에 분부하고 물선(物膳)도 봉진하지 말도록 할 일을 일체로 분부하라."
하였다.

 

과천 어사(果川御史) 정창순(鄭昌順)이 복명(復命)하고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포(舊逋)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정창순이 말하기를,
"정봉령(停俸令)514)  이 있기 때문에 전연 받지 못한 것이 2천여 석이나 됩니다. 만약 독촉해 받으면 장차 떠나고 흩어지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절대로 사납게 독촉하지 말게 할 일을 승정원으로부터 하유(下諭)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7일 신사

고(故) 참판 어석윤(魚錫胤)의 아내에게 원세찬(元歲饌) 외에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더 주라고 명하였는데,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하교하기를,
"지나간 해에 김 봉조하(金奉朝賀)의 아뢴 바로 인하여 찬수(鑽燧)515)  를 반사(頒賜)하도록 신칙하였는데, 바로 도하(都下)를 깨끗하게 하는 뜻이다. 하물며 입춘(立春)이겠는가? 해조(該曹)에 신칙하여 착실히 찬수를 주도록 하고 또한 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착실히 반급(頒給)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29일 계미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할 때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더욱 안정되지 못할 것이다. 경 등이 비록 복악(復樂)하기를 청하였으나, 내 마음은 백성에게 부끄러움이 있다."
하니, 도제조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도성 백성이 종(鍾)·고(鼓)·관(管)·약(籥)의 소리를 들으면 역시 즐거워할 것인데, 어찌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12월 30일 갑신

병조 판서 구선행(具善行)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이해에 경중 오부(京中五部)의 도합 원호(元戶)가 3만 8천 7백 70호이고 인구가 18만 8천 8백 84명이며 【남자가 8만 9천 8백 68명이고, 여자가 9만 9천 16명이다.】  8도(八道)의 도합 원호가 1백 64만 1천 95호이고 인구가 6백 81만 7천3백 64명이다. 【남자가 3백 36만 5천 2백 49명이고, 여자가 3백 45만 2천 1백 15명이다.】


【태백산사고본】 75책 111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1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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