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을유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창덕궁(昌德宮)의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였으며, 다음에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수가(隨駕)하였다. 어가(御駕)가 태묘의 동구(洞口)에 이르러 다시 음악을 연주하도록 명하고, 전부·후부의 악공(樂工)들에게 상을 베풀었다. 이보다 앞서 무자년001) 에 태조(太祖)의 휘년(諱年)이라 하여 음악을 정지하도록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회복한 것이다. 지영(祗迎)한 유생(儒生)들의 명첩(名帖)을 거두도록 명하고, 회란(回鑾)할 때 궁문(宮門)에 주필(駐蹕)하여 칠언 팔구(七言八句)와 사언 사구(四言四句)를 지어 내리고 아울러 ‘강(康)’ 자로 운(韻)을 삼았으니, 대개 당풍(唐風)의 태강(太康)을 경계하는 뜻을 취한 것이었는데, 왕세손(王世孫)과 근신(近臣)에게 화답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우승지 엄인(嚴璘)에게 가자(加資)하고, 도승지 이담(李潭), 우부승지 정후겸(鄭厚謙)에게 말을 내려 주었으며, 부사과 이보관(李普觀)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고, 어가 앞에서 사은(謝恩)하도록 명하였으며, 친히 ‘금(金)’ 자와 ‘옥(玉)’ 자를 엄인과 이보관의 옷깃에 써 주었다. 또 가주서 윤면승(尹勉升)을 승륙(陞六)시키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1년여 만에 음악을 회복하고 근열(近列)을 추은(推恩)한 것이었다.
1월 2일 병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지영(祗迎)했던 유생들을 어제 어제시(御製詩) 가운데, ‘1년 동안 음악을 정지하였다가 원조(元朝)에 연주했노라.[一年藏樂元朝奏]’라는 한 구절(句節)로써 명제(命題)를 삼아 시험하여, 유학(幼學) 이영목(李永穆)·조상진(趙尙鎭)에게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002) 하도록 명하였다. 하룻밤을 지내지 않고 동가(動駕)하면 반유(泮儒)들이 지영하는 전례가 없었는데, 중년(中年) 이래로 임금이 많은 선비들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기 위해 때로 지영한 유생들의 명첩(名帖)을 받아 시취(試取)하라는 명이 있었다. 그리하여 비록 도성(都城) 안을 거둥할 때에도 문득 반드시 분주하게 영후(迎候)하여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요행을 바라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사습(士習)이 크게 무너졌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초8일에 사직(社稷)의 기곡제(祈穀祭)에 쓸 향(香)의 지영(祗迎)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下敎)하기를,
"한결같이 마음이 불안한 것은 추모(追慕)와 백성들 때문인데, 그날 어떻게 감히 따뜻한 방에서 지낼 수 있겠는가? 마땅히 덕유당(德游堂)에서 밤을 보낼 것이니, 이는 옛날 새해에 풍년이 들기를 축원하는 어제시(御製詩)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 임금이 연달아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있었으므로, 장차 기곡제를 친히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소소(簫韶)003) 를 아홉 번 연주한다.’ 하였는데, 아홉 번 연주하는 음악은 지극한 이치가 있는 것이다. 무릇 대제(大祭)를 친향(親享)할 때와 섭행(攝行)할 때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의 느리고 빠르기가 아주 다른데, 느리고 빠른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만약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감통(感通)될 이치가 있겠는가? 아악(雅樂)·속악(俗樂)에 대해 한결같이 아울러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팔도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에게 하유(下諭)하여 권농(勸農)하게 하였다.
우참찬 윤봉오(尹鳳五)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그 형 윤봉구(尹鳳九)는 곧 옛날에 사부(師傅)이었는데, 이미 작고(作故)하였다. 그 아우 윤봉오는 신축년004) 에 내가 저사(儲嗣)를 이어받았을 때 계방(桂坊)005) 에 있었는데, 그 형에게 베풀지 못한 것은 그 아우에게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또 선조(先朝)를 섬긴 사람으로서 나이 70이 된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들에게 아울러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1월 3일 정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니, 왕세손(王世孫)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다. 임금이 시(詩) 8구를 친히 썼으니, 모두 새해를 맞이하여 추모(追慕)하는 뜻이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보령(寶齡)이 삼대(三代) 후에 처음 있는 일이라 하여 번갈아 경축하는 뜻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무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매, 홍봉한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비록 너무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경계하셨으나, 응당 행해야 할 예(禮)를 어떻게 너무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정조(正朝)의 하례를 받았는데, 경들은 거듭 경하(慶賀)를 올리려 하는 것인가? 나는 두거(杜擧)006) 의 뜻으로 3월 이전에는 기필코 받지 않겠다."
하였는데, 이때 대신 윤동도(尹東度)가 죽어 빈소(殯所)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箋文)을 올린 태학생 안역(安櫟)에게 과궐(窠闕)을 기다려 벼슬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는데, 태학(太學)에서도 또한 전문을 올려 칭하(稱賀)하는 것은 요즘 생긴 규례이었다. 또 선조(先朝)를 모셨던 중관(中官)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아울러 가자하도록 명하였고, 종신(宗臣) 종1품에게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하례 받기를 마치고 월대(月臺)에 이어(移御)하여 원일(元日)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했던 군사들을 뜰에서 호궤(犒饋)007) 하였다. 임금도 또한 진찬(進饌)하고 뭇 신하들에게 헌수(獻壽)하도록 명하였는데, 홍봉한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홍봉한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들이 모두 있으니, 청컨대 수라상에 남아 있는 음식물을 얻어서 함께 맛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음식물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홍봉한이 헌수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이를 허락하니, 홍봉한이 술을 따라 축수(祝壽)하기를,
"남산(南山)이 영구하듯이 장수하시고, 북두(北斗)가 하늘에서 빛나듯이 영구히 존귀(尊貴)함을 누리소서."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헌축(獻祝)하였다. 제주(濟州)의 공과인(貢果人)을 불러들이도록 명하여, 혜청(惠廳)으로 하여금 쌀을 내려 주게 하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는 면포(綿布) 1필을 내려 주게 하였으며, 선전관에게 명하여 길거리에서 떠돌며 걸식(乞食)하는 사람들을 가서 살펴보게 하고, 혜청으로 하여금 양식을 주게 하였다. 또 양주(楊州)에 달려가서 진휼(賑恤)을 베풀고 창고를 열어 재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등의 일을 살펴보게 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을 대사헌으로, 이휘지(李徽之)를 대사간으로, 임해(任瑎)를 장령으로, 김문순(金文淳)을 지평으로, 정내겸(鄭來謙)을 정언으로, 심이지(沈頤之)를 교리로, 이득신(李得臣)을 부교리로, 심관지(沈觀之)를 필선(弼善)으로, 이득일(李得一)을 겸 필선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1월 4일 무자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세초(歲初)에 한번 법강(法講)을 행하고자 하였다."
하고, 전례에 의거하여 《소학(小學)》의 제사(題辭)를 외어 강하게 하였다. 각각 문의(文義)를 진술하기를 마치자, 검토관(檢討官) 이병정(李秉鼎)이 말하기를,
"성상의 4기(四紀) 동안의 치화(治化)가 이 한 부의 책에 있었습니다. 성인(聖人)의 지기(志氣)는 비록 말할 만한 성쇠(盛衰)가 없지만, 제왕(帝王)의 치법(治法)은 더러 초년(初年)과 만년(晩年)이 똑같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거리낌없이 직간(直諫)하는 문을 환히 열어 놓음으로써 초년과 만년이 같지 않은 것을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하교하기를,
"나의 기력(氣力)과 나의 안력(眼力)으로서 봄 날씨가 비록 화창하다고 하지만 강독(講讀)이 진실로 묘연(杳然)한데, 세초에 한번 강한 것은 진실로 뜻밖의 일이다. 어찌 강독만 하고 말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도록 명하고, 본관 서리(書吏)에게 쌀과 무명을 내려 주게 하였다. 사간 신경준(申景濬)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이휘지(李徽之)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미령(靡寧)하신 일이 있을 때마다 문득 비상(非常)한 전교를 내리시니, 진신(搢紳)들이 민박(悶迫)스럽게 여기고 여대(輿儓)들이 두려워하여 의혹하는데, 비록 곧 환수(還收)는 하였지만 애초에 없었던 것만 못합니다. 국가의 모든 일은 진실로 동궁(東宮)의 보도(輔導)에 달려 있는데, 보도하는 방도는 먼 곳에서 구할 필요가 없고, 또한 전하께서 몸소 실천하시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동정(動靜)과 언행(言行)에 있어 선왕(先王)의 법을 보이셔서 우리 동궁으로 하여금 이를 따르고 이를 본받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강원도의 올해 춘조(春操)와울릉도(鬱陵島)수토(搜討)를 정지하고, 세 진(鎭)의 권무 도시(勸武都試)는 전례에 의거하여 설행(設行)하도록 명하였으니, 도신 송형중(宋瑩中)이 장청(狀請)한 때문이었다. 양도(兩都)의 유수도 또한 춘조를 정지하기를 장청하니 윤허하고, 인하여 제도(諸道)에 일체 춘조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선혜청 당상 정홍순(鄭弘淳)이 선혜청에서 구관(句管)하는 군작미(軍作米)로 삼남(三南)에 있는 것은 제도(諸道)로 하여금 연해(沿海)의 각 고을에 산군(山郡)에 있는 쌀을 전이(轉移)해서 고루 수송하는 데 편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대신(大臣)들에게 하순(下詢)하고 윤허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삼남(三南)의 제민창(濟民倉)에 있어서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에는 모두 실곡(實穀)을 저축하고 있으나, 오로지 호남(湖南)만은 밀과 보리가 대부분인데, 3년 동안 10분의 1은 썩어서 상하고 있으니, 청컨대 도신으로 하여금 쌀과 벼[租]로 헤아려 환작(換作)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조적(糶糴)이 고르지 못하여 산군(山郡)에서는 곡식이 많아서 도리어 백성들에게 병폐가 되고, 연해(沿海)에서는 곡식이 적어서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대개 이는 안으로 호조와 진청에서, 밖으로는 제도(諸道)의 영문(營門)에서 무릇 발매(發賣)할 때에는 비싼 값을 취하여 반드시 해읍(海邑)에서만 이러한 폐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청컨대 경외(京外)에 특별히 신칙(申飭)하여 만약 묘당(廟堂)에서 허락한 것이 아니면, 연해에서는 적곡(糴穀)을 흩어 쓸 수 없게 하고 차례차례 전이(轉移)해서 편한 데 따라 남는 것은 덜어내고 모자란 것은 보태게 하소서."
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또 이번의 사전(赦典)에서 누락된 자들을 특별히 고루 베푸는 은전(恩典)을 미루어 시행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두루 들어서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찬적(竄謫)에서 풀어 주어 서용한 자가 무릇 22인이었다.
1월 5일 기축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진연(進宴)을 행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봄 날씨가 화창하지마는 오막살이에 사는 백성들은 오히려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판부사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휼(賑恤)을 베풀고 있으니, 이 예(禮)에 어찌 구애되는 점이 있겠습니까?"
하였고,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은 말하기를,
"이제 만약 유음(兪音)을 내리신다면, 백료(百僚)가 기뻐하여 화창한 기운이 저절로 피어나서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 것을 점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우선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적정(糴政)이 고르지 못하다 하여 여러 고을로 하여금 민호(民戶)의 크고 작은 것과 누락(漏落)된 것을 조사하게 하되,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할 것을 청하였고, 또 안으로 진휼청과 밖으로 각 고을에 분부해서 혼례(婚禮)와 장례(葬禮)를 시기가 지나도록 치르지 못한 곤궁한 백성들을 도와 주게 할 것을 청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대제(大祭)의 의식을 연습할 때 나온 승지를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였으니, 대개 섭행(攝行)할 때에는 의식을 연습하는 데 승지가 와서 참여하는 것이 전례가 아니지만, 지난번에 특교(特敎)로 인하여 승지에게 가서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특교가 없는데도 나온 때문이었다.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외방의 동몽(童蒙)에게 《소학(小學)》을 고강(考講)하는 법을 신칙(申飭)하고, 수령들로 하여금 친히 그 우열(優劣)을 상고해서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마땅함을 헤아려 상(賞)과 벌(罰)을 줌으로써 권면하고 징계하는 효험이 있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집의 홍검(洪檢), 지평 박사륜(朴師崙)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소회(所懷)를 아뢰기를,
"지금 모든 일 가운데 성궁(聖躬)을 보색(保嗇)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그 요체(要諦)를 말하면 희로(喜怒)를 중도에 맞게 조절하는 것과 동작(動作)을 반드시 신중히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일용(日用)과 사위(事爲)의 사이에 혹 사기(辭氣)를 허비하여 번뇌(煩惱)한 데에 이른다면, 매우 절선(節宣)하고 함양(涵養)하는 도리가 아니며, 또한 대성인(大聖人)의 중정(中正)과 화평(和平)의 공부에 결흠(缺欠)이 됩니다."
하고, 잇달아 실정(實政)에 힘쓰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는 도리를 진계(陳啓)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하교하기를,
"올해 오늘부터 인순(因循)하여 지회(遲回)하는 마음을 씻고 정백(精白)한 일심(一心)으로 곧은 것을 들고 굽은 것을 바로잡아 나의 모정(暮政)을 도와주고 여러 신하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헌납 이시건(李蓍建), 정언 이익선(李益)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소회를 아뢰어 성궁(聖躬)을 보색(保嗇)하고 곤궁한 백성을 진휼(軫恤)하는 요체(要諦)를 권면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은 진실로 옳다. 그러나 관리들이 서로 경계하여 바로잡아 주지는 않고 단지 그 임금만 권면하니, 원조(元朝)에 대신(臺臣)들이 이와 같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개연(慨然)스럽게 여긴다."
하였는데, 양사(兩司)에서 인피(引避)하니, 아울러 아뢴 바에 의거하게 하였다.
동부승지 이보관(李普觀)을 체차(遞差)하고 이조의 세 당상을 모두 금오(金吾)에 내려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조참(朝參)을 파한 후에 개정(開政)하도록 명하였는데, 판서 신회(申晦), 참판 정존겸(鄭存謙), 참의 홍지해(洪趾海) 등이 궐중(闕中)에 있으면서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정원(政院)에서 패초(牌招)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그런데 임금이 의심하여 하순(下詢)하자, 이보관의 대답이 모호한 까닭에 엄교(嚴敎)를 내려 특별히 체차하게 한 것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그 지위에 나아가 그 예(禮)를 행하고 그 음악을 연주한다.’ 하였는데, 내가 부덕(否德)한 몸으로 그 지위에 나아가고, 내가 부덕한 몸으로 그 예를 행하며, 내가 부덕한 몸으로 그 음악을 연주하였으니, 어찌 한갓 남면(南面)한 것을 부끄러워할 뿐이겠는가?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을 우러러보고 두려워하는 바이다. 기강(紀綱)이 날로 실추되고 국세(國勢)가 날로 위태로워지며 생민(生民)이 날로 곤궁해지는 것이 오늘날 같은 때가 없었다. 옛날에 여상(呂尙)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에게 사민(四民)에게 은혜를 행할 것을 권면하였고, 추성(鄒聖)은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백성들을 보호하여 왕노릇을 한다면 막을 자가 없다고 말하였다. 모레에 마땅히 흥화문(興化門)에 임어(臨御)하여 주나라 문왕의 뜻을 본받아 사민을 구휼(救恤)하는 정사를 행하려 하니, 한성부(漢城府)의 오부(五部)로 하여금 특별히 정초(精抄)를 더하여 난잡한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1월 6일 경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도승지 엄인(嚴璘)이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대죄(待罪)하는 장계(狀啓)를 독주(讀奏)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을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사정이 매우 난처합니다."
하고, 엄인은 말하기를,
"예전부터 조정의 명령이 저들에게 간혹 시행되지 않으면, 조정에서 동래 부사와 임역(任譯)을 죄주어 책망함으로써 저들을 경동(驚動)시키는 방책을 삼았었습니다. 그러나 동래 부사와 임역이 한번 죄를 받았는데도 저들이 전과 같이 함부로 날뛴다면, 조정에서는 또한 후에 온 변신(邊臣)에게 다시 죄벌(罪罰)을 가할 수가 없으므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따라 주어서 구차하게 눈앞의 무사(無事)함을 바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에게 있어서는 간사한 계모(計謀)를 적중시키게 되고,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한갓 국체(國體)만 손상시키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피중(彼中)의 일이 설혹 난처하고 동래 부사의 일이 설령 죄줄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체파(遞罷)하지 말고, 단지 엄중히 신칙(申飭)하여 현재 재임하고 있는 관원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 일을 완료하게 한 후에야 그 계모를 단절시키고 그 정상(情狀)을 징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또 저들이 바친 물건이 없고 우리 또한 주는 것이 없으므로, 진상(進上)을 지체하는 것이 비록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이것은 해로움이 저들에게 있는 것이니 독촉하여 징구(徵求)할 필요는 없으며, 천천히 동정을 살펴보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매, 홍봉한이 말하기를,
"지신사(知申事)008) 가 아뢴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중하게 신칙하도록 명을 내렸다. 임금이 정관(政官)의 일로써 대신에게 하순(下詢)하니,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참(朝參)을 마치자마자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이 거조(擧措)는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처음 보는 일이다. 소하(蕭何)009) 도 옥(獄)에 갇혔었는데, 더욱이 총재(冢宰)010) 이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나 숭품(崇品)의 경대부(卿大夫) 반열에 있는 사람은 무거운 과실이 아니면 참작함이 마땅하다. 세 당상을 아울러 석방하고,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즉시 함문(緘問)011) 하여 함사(緘辭)를 가지고 아뢰게 하라."
하였다. 우승지 구상(具庠)이 신회(申晦) 등의 함사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자 함사를 읽으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오로지 참판으로 인한 것이다."
하고, 하교하기를,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그 문에 임어하여 개정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는데, 오늘날 신하된 자가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묻지 않았으면 그만이겠지만, 어떻게 차마 구차스럽게 미봉(彌縫)하겠는가? 지금 세 사람의 함답(緘答)을 살펴보건대, 내가 비록 노쇠하다 하나 어떻게 감히 나에게서 도피할 수 있겠는가? 곧 정존겸(鄭存謙)은 극도로 놀랄 만하니, 이 함답은 시행하지 말고 다시 글을 써서 바치게 하라."
하였다. 구상이 말하기를,
"만약 다시 묻고자 한다면 국체(國體)가 손상될 것입니다. 함답을 살펴보건대, 이것은 정주(政注)의 사이에 언의(言議)가 어긋난 일에 불과하고, 이미 사람들의 성명(姓名)도 나오지 않았으니, 특별히 거듭 물을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이와 같이 하신다면, 한갓 사람만 손상시킬 염려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노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승지를 추고(推考)하고 속히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상이 신회 등의 함사를 가지고 다시 입시하자, 그것을 읽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공사(供辭)를 살펴보건대, 통색(通塞)에 관한 것이 아니고, 바로 통청(通淸)의 조만(早晩)에 관한 것이다."
하고, 이조의 세 당상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여 한마음으로 나를 섬겨야 할 것인데, 개정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대궐 안에 있으면서도 패초(牌招)를 어겼으니, 이는 진실로 꿈 밖의 일이었다. 경들이 나를 섬김은 마땅히 노친(老親)과 같이 여겨야 하는데, 이제 개정하지 않는다면, 조선에 어찌 신하의 분의(分義)가 있겠는가?"
하니, 신회 등이 마침내 개정하였다. 김한기(金漢耆)를 대사성으로, 홍낙명(洪樂命)을 부제학으로, 홍수보(洪秀輔)를 사간으로, 강시현(姜始顯)·이항조(李恒祚)를 장령으로, 이양수(李養遂)를 헌납으로, 이지승(李祉承)·정언섬(鄭彦暹)을 정언(正言)으로, 김광묵(金光默)을 대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이때에 정후겸(鄭厚謙)은 나이 겨우 20세로 아직 어려서 어리석고 식견(識見)이 없었는데, 이조 판서 신회가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장차 정후겸을 간장(諫長)에 통의(通擬)하려 하자, 참판 정존겸이 고집하여 기꺼이 따르지 않으니, 신회가 노하여 정사를 파하는 바람에 세 당상이 마침내 대궐 안에 있으면서 패초를 어겼던 것이다. 임금이 이를 깨달아 알고 입시하여 개정하게 하니, 정후겸은 마침내 통의(通擬)되기에 이르렀다.
1월 7일 신묘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내려 주고, 공시인(貢市人)들의 질고(疾苦)를 물어 보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를 행하고, 수위를 차지한 진사(進士) 이기(李夔)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1월 8일 임진
임금이 사단(社壇)의 기곡제(祈穀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사옹원(司饔院)에 나아가 입직한 낭관을 승륙(陞六)시키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옛날 내가 16세에 이 원(院)의 제거(提擧)가 되었는데, 이제 회갑(回甲)을 맞아 이 원에 앉았으니, 어찌 뜻을 드러내는 일이 없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1월 9일 계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경기 감사 김화진(金華鎭)이 함께 들어왔다. 김화진이 주청(奏請)하기를,
"진휼을 베풀고 있는 고을에 저축한 곡식이 없는 경우 그 고을의 창고에 유치해 둔 곡식이라 하더라도 옮겨 쓰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대신에게 묻고 허락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관서(關西)의 작은 진(鎭) 가운데 조적(糶糴)이 가장 많은 곳에는 마땅함을 헤아려 환감(換減)할 것을 청하였는데,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환곡(換穀)012) 이 반드시 축날 것이라 하여 어렵게 여기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산에서 줄면 바다에서 펴질 것이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혹시라도 백성을 동요시킬까 두려우니, 힘써 순편(順便)한 데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철이 또 상직(相職)을 해면시켜 주기를 청하고 말하기를,
"신이 이창수(李昌壽)와 탄핵(彈劾)을 받고 종사(從仕)하였는데, 대신(臺臣)은 아직도 버려 두고 있으니, 신은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면려(勉勵)하였다. 장령 강시현(姜始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조 낭청으로서 집필(執筆)한 자가 배정(排定)하여 의망(擬望)한 것을 어찌 알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척(咫尺)에서 순문(詢問)할 때 끝내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해당 낭청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윤광찬(尹光纘)·조재민(趙載敏)을 서용하였을 때 입시했던 승선(承宣)이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청컨대 그날의 승선을 파직하소서. 전 대사간 박성원(朴盛源)이 이조 판서를 논열(論列)할 때 일곱 자로써 지목한 것은 더욱 합당하지 못하여 억지로 모욕한 것과 같음이 있으니, 청컨대 전 대사간 박성원을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안 병사 이방수(李邦綏)는 일찍이 해곤(海閫)에 재임하였을 때 순행하여 군졸(軍卒)을 조련(操鍊)시키고 으레 주는 상을 줄여서 주었으며, 특별히 마병(馬兵)을 징발(徵發)하고 말을 점고(點考)할 때 돈을 뇌물로 받았습니다. 또 병영(兵營)에 저축한 별비은(別備銀)으로써 빚[債]을 놓았으니, 청컨대 파직한 후에 조사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선전관을 보내어 실정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돈을 징수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곤수(閫帥)의 신분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비루하고 잗단 일을 한단 말인가?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물을 만한 일이 아니다."
하고, 인하여 묻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신회(申晦), 참판 정존겸(鄭存謙), 참의 홍지해(洪趾海)의 체직(遞職)을 허락하도록 명하고, 한차례 염우(廉隅)를 펴도록 한다는 하교가 있었다. 남태제(南泰齊)를 이조 판서로, 이담(李潭)을 참판으로, 권도(權噵)를 참의로 삼았다.
1월 10일 갑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1일 을미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의 당상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을 소결(疏決)하게 하였는데, 도배(島配)되었던 자가 혹은 육지로 나오게 되었고, 도년(徒年) 이상은 혹은 방면하거나 혹은 그대로 두었으며, 금고(禁錮) 이하는 탕척(蕩滌)하였고, 죄가 무거운 자는 그대로 두었다. 임관주(任觀周)는 친상(親喪)을 만남으로 놓아 주었고, 이겸빈(李謙彬)은 감등(減等)하여 육지로 내보냈으며, 이세택(李世澤)은 감등되었다. 장령 강시현(姜始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한풍(李漢豊)을 승지로 삼았다.
1월 12일 병신
1백 세 이상 된 사람들에게 아울러 한 자급(資級)을 더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노인들에게 세찬(歲饌)을 보냈다는 기백(畿伯)013) 의 계본(啓本)을 보았는데, 1백 4세 된 사람이 1인이요, 1백 2세 된 사람이 1인이며, 1백 세 된 사람은 3인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임금이 잇달아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내렸는데, 이에 제도(諸道)에서 힘써 나이 많은 사람을 들어 계문(啓聞)하니, 간사한 백성 가운데 나이를 늘려서 군보(軍保)를 피하려고 꾀한 자들이 대부분 참여하였다.
이정철(李廷喆)을 대사간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집의로, 조재준(趙載俊)을 지평으로, 정환유(鄭煥猷)를 헌납으로, 서유녕(徐有寧)을 장령으로, 정범조(丁範祖)를 정언으로, 김기대(金基大)를 교리로, 홍낙인(洪樂仁)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특별히 안주(安州)의 채전(債錢) 2만 3천 냥을 견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안주(安州)에 해가 오래 된 채전(債錢)이 있음을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장문(狀聞)하자,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 보고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명한 다음 말하기를,
"이것이 혜택이 될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한결같은 말로 찬양(贊揚)하였다. 인하여 제도에 신칙하여 무릇 빚을 흩어 놓고 이익을 늘리는 일을 일절 엄중히 막도록 명하였다. 또 응교 민홍렬(閔弘烈)을 안주 사정 어사(安州査正御史)로 삼고 본주에 빨리 달려가서 채안(債案)을 조사하여 바로잡고 오도록 하였다.
1월 13일 정유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판부사 한익모(韓翼謨)에게 서용(敍用)하지 않는 전형(典刑)을 특별히 시행하도록 명하였는데, 한익모가 도제거(都提擧)로서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원임(原任)으로서 반드시 상참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근례(近例)가 없다고 진달(陳達)함으로 인하여 임금이 곧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구선행(具善行)을 평안 병사로 삼고, 시임 병사 이주국(李柱國)에게 삭판(削版)의 율을 시행하였다. 이때 바야흐로 안주(安州)에 성을 쌓는 일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이주국이 입시하여 응대(應對)한 것이 임금의 뜻에 맞지 않으니, 마침내 삭판하도록 명하고, 구선행으로 이를 대신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대신이 병조 판서는 중임(重任)이기 때문에 어렵게 여기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나라에서 미리 위험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다."
하고, 특별히 구선행을 평안 병사에 제수하고, 특별히 홍인한(洪麟漢)을 병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대사간 이정철(李廷喆)과 집의 임희교(任希敎)가 전계를 거듭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신(儒臣)을 불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하였다.
1월 14일 무술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걸어서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갔다. 또 전설사(典設司)에 두루 임어하여 입직한 향군(鄕軍)을 부르라 명하고, 농사의 형편을 물어 보았으며, 문금(門禁)이 엄중하지 못하다 하여 수문장(守門將)을 태거(汰去)시키도록 명하였다. 또 《무경칠서(武經七書)》에 순통(純通)하지 못한 자는 장망(將望)에 통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고, 드디어 대궐로 돌아왔다.
민백흥(閔百興)을 승지로 삼았다.
1월 15일 기해
임금이 대사성 김한기(金漢耆)에게 유생을 거느리고 입시하여 십잠(十箴)을 강하도록 명하고, 유생으로서 응대(應對)가 정밀하고 상세한 자에게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내려 주었으며, 김한기에게 고비(皐比)014) 를 내려 주었다.
1월 16일 경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재신(宰臣) 김기대(金器大)는 정밀하고 검약하여 임용할 만하니, 묘당에서 우모(訏謨)를 의논하는 데 참여시킴이 마땅하다.’고 성대히 말하였는데, 비국 당상으로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강시현(姜始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7일 신축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평안 병사 구선행(具善行)이 함께 들어왔다. 성을 쌓는 방략(方略)을 하순(下詢)하고, 쌀 1만 석, 면포 1만 필을 획급(劃給)하여 공비(功費)를 돕게 하였다.
겸 이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를 특별히 파직하였으니, 특교(特敎)로 신칙하였으나 곧 사명(謝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기대(金器大)·조정(趙晸)을 승지로,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으로, 주형질(朱炯質)을 장령으로, 홍경안(洪景顔)을 수찬으로, 신회(申晦)를 형조 판서로, 엄인(嚴璘)을 병조 참판으로, 한익모(韓翼謨)를 판중추로 삼았다.
1월 20일 갑진
중학 유생(中學儒生) 이정렬(李鼎烈)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덕(德)이 하늘을 덮고 땅을 포용(包容)하며, 사람을 쓰는 데 모난 데가 없어 탕평(蕩平)의 치화(治化)를 넓히시고 매번 편사(偏私)한 버릇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산림(山林)의 선비들을 표방(標榜)할 것이 있다 하여 이연(貽燕)의 교훈에 실었고, 거짓을 꾸미는 사람들을 능각(稜角)이 없다 하여 조두(俎豆)의 반열(班列)에 올렸습니다. 아! 전하께서 원자(元子)에게 넉넉한 교훈을 남기는 것과 원자가 전하의 뜻을 받들고 사업을 계승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한때 격뇌(激惱)한 하교로써 도리어 훗날 감계(鑑戒)하여 본받을 책을 만드시니, 진실로 이미 옛날의 성인(聖人)이 주고받던 체제(體制)에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르기를, ‘아!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은 어찌하여 한 당파(黨派)에서 나뉘었는가? 만약 그 근본을 묻는다면 곧 사문(斯文)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자칭 도학(道學)이라 하면서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것이 홍수(洪水)나 맹수(猛獸)보다 심하다.’ 하여 마치 세도(世道)가 부효(浮囂)한 것이 오로지 사문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하였으며, 심지어는 도학으로써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는 과목에 두었으니, 신은 그윽이 전하를 위해 개연(慨然)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 강업(講業)과 독서(讀書)는 뭇사람들과 착한 일을 함께 하는 것이니, 진실로 사문(斯文)의 즐거워하는 바입니다. 저 스승을 배반하고 나라를 어지럽힌 한두 역적이 불행하게도 무기를 잡고 사설(邪說)을 창도(倡導)하여 지금까지 분주하게 횡류(橫流)하다가 저절로 나뉘어져 각각 따로 갈라서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어찌 일찍이 사문이 그들로 하여금 나뉘어지게 해서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대저 산림의 선비들이 읽는 것은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이고 강하는 것은 임금을 보필(輔弼)하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입히는 것이니, 그들이 나온다면 좋은 말을 아뢰어 사설(邪說)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물러가 있는다면 세속(世俗)을 바로잡아 권계(勸戒)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혹 정밀하고 거친 것과 깊고 얕음이 같지 않다 하더라도, 경술(經術)과 행의(行誼)가 세교(世敎)에 도움되는 바가 있음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에 견줄 수 없을 것이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배식(培埴)하고 정초(旌招)하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홍수·맹수라는 지목을 가하시고, 심지어는 이들이 장차 나라를 망하게 만들 것이라고 하였으니, 신은 알지 못하겠지만 고금의 사첩(史牒)에 도학(道學)을 진용(進用)하여 그 나라를 망하게 한 경우가 있었습니까? 송(宋)나라에서는 간사한 당류(黨類)라고 배척하고 위학(僞學)015) 이라고 금지하여 당시에 육침(陸沈)의 기틀을 만들었으니, 전감(前鑑)이 명백합니다. 돌아보건대 오늘날 경계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빈번하게 찾아 구하고 은근히 돈면(敦勉)하더라도 오히려 얻기 어려울까 근심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이를 간책(簡策)에 써서 온 나라에서 크게 금하도록 만들었으니, 유식(有識)한 선비들은 반드시 장차 도망하여 숨고는 감히 나와서 벼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도(道)를 논하고 치화(治化)를 강구하시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내리신 《유곤록(裕昆錄)》을 거두셔서 그 장판(藏板)과 아울러 훼파(毁破)하시고, 또 춘저(春邸)에 하유(下諭)하여 이 책이 한때 격뇌(激惱)하신 데에서 나온 것으로 성상의 본뜻이 아니었음을 알게 하소서.
아! 세상에는 진실로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는 자가 있는데, 곧 신경(申暻)이니, 그가 부합(附合)하는 정상은 진실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그 외조(外祖) 고 상신 박세채(朴世采)는 다행히 궐사(闕事)가 없는 때를 만나 아주 마음을 굳세게 지니고 흔들리지 않았다는 이름이 조금 있었는데, 종횡(縱橫)한 논의는 극도로 충후(忠厚)한 듯하나, 박잡(駁雜)한 학문은 오로지 사력(詐力)을 써서 사곡(邪曲)과 정직(正直)의 사이에 추이(推移)하고 맑고 흐린 가운데에서 교묘하게 미봉(彌縫)하였으니, 그 학문과 심술은 마침내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더러 장주(章奏)와 예설(禮說)이 사론(士論)에 부합한 것이 있었다 하나, 그 평생(平生)을 가릴 수 없었으니, 이것은 모두 신경이 조술(祖述)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경과 같은 자를 또 어찌 족히 책망할 것이나 있겠습니까? 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자별하므로 반드시 경학(經學)이 매우 바르고 덕행(德行)이 본래 드러나서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된 후에야 임금이 나라 사람들의 말을 채택해서 비로소 제향(躋享)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서는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아름다움이 있고 아래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과실이 없어야 하며, 이에 해당되는 자도 또한 그 자리에 알맞아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박세채는 이미 학행(學行)이 바르지 못하고 공의(公議)도 또 협종하지 않는데, 곧바로 출향(黜享)하는 것을 난처하게 여겨 우선 내버려 둔다면, 박세채에게도 또한 편안하겠습니까, 편안하지 못하겠습니까? 송(宋)나라 영종(寧宗) 3년에 왕안석(王安石)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였는데, 귀산(龜山) 양시(楊時)가 한번 상소하자, 즉시 출향하게 했었습니다. 신의 언론(言論)이 비록 감히 양귀산을 바랄 수는 없지마는 박세채를 종향(從享)한 잘못이 왕안석보다 심하니, 당당한 성조(聖朝)에서 어떻게 출향하는 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원에서 물리치고 받지 않은 지 무릇 3일 동안 궐하(闕下)에 엎드려 있었는데, 이에 소장의 말미에 정원에서 옹폐(壅蔽)하는 실상을 논척(論斥)하여 올렸다. 이에 여러 승지들이 그 소장을 받아들이고 인혐(引嫌)하여 물러갔다. 임금이 그 소장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선정(先正)을 욕보인 것이다."
하고, 이정렬의 유적(儒籍)을 삭거(削去)하고, 흑산도(黑山島)에 보내어 서민(庶民)을 삼도록 명하였다.
엄인(嚴璘)·권도(權噵)·이성원(李性源)·홍지해(洪趾海)·이재간(李在簡)·홍윤(洪鑰)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삼청(三廳)의 권무 군관(勸武軍官)을 시사(試射)하고 상을 나누어 주었다. 또 한학강(漢學講)과 이문 제술(吏文製述)을 시험하도록 명하고, 과차(科次)를 매겨 고등(高等)인 1인과 준직(準職)한 2인에게는 말을 내려 주었다.
1월 21일 을사
약방에서 입시하였다. 개정본(改正本)인 《대훈(大訓)》을 간포(刊布)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대훈(大訓)》을 개정(改定)하고 간포하지 않았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룀으로 인하여 마침내 반포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권도(權噵)에게 대사성(大司成)을 제수하고, 유생들을 거느리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유생에게 이르기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한 사람이 뜻밖에 무함을 당하였는데, 너희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남궁철(南宮徹)이란 자가 대답하기를,
"연소한 유생의 과격한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유생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은가?"
하고, 방축 향리(放逐鄕里)016) 하도록 명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구잠(九箴)을 외도록 명하고, 지필(紙筆)을 내리며 말하기를,
"《유곤록(裕昆錄)》을 삭제하도록 청한 자가 난신(亂臣)이 아니란 말인가? 이후로 사학(四學)의 재임(齋任)은 서울의 유생으로 삼지 말아서 어지러운 근본을 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양한(洪良漢)·최태형(崔台衡)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2일 병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들이 함께 들어왔다. 지사(知事) 이익정(李益炡) 등이 진연(進宴)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소찬(小饌)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대신(大臣)·국구(國舅)·도위(都尉)·종신(宗臣)을 거느리고 진작(進爵)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년(數年) 동안에 이 예(禮)를 두 번 행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지나친 일이다."
하였다.
1월 23일 정미
김한구(金漢耉)·조운규(趙雲逵)·구윤명(具允明)을 진연청 당상(進宴廳堂上)으로, 송익언(宋翼彦)·이경륜(李敬倫)·이제만(李濟萬)을 낭청으로, 이해중(李海重)을 이조 참의로, 홍낙인(洪樂仁)을 대사헌으로, 이정오(李正吾)를 집의로, 노성중(盧聖中)·서병덕(徐秉德)을 장령으로, 이사조(李思祚)·김용(金容)을 지평으로, 이득복(李得福)을 헌납으로, 이득일(李得一)을 부응교로, 임희교(任希敎)를 부교리로, 윤양후(尹養厚)를 겸 보덕으로, 이창수(李昌壽)를 판돈녕으로, 민백흥(閔百興)을 호조 참판으로, 이담(李潭)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24일 무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집의 이정오(李正吾)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5일 기유
부수찬 김이희(金履禧)를 해면(解免)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정의(旌義)에 찬배(竄配)하도록 명하였다. 김이희가 상소하여 이정렬(李鼎烈)을 힘써 구원하고, 성명(成命)을 거두어 언로(言路)를 열 것을 원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진연(進宴)을 허락한 후에 이와 같으니, 어찌 조선의 신자(臣子)라 하겠는가? 징토(懲討)하기를 청한 후에야 마땅히 수응(酬應)하겠다."
하고, 잇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렸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대명(待命)하니, 하교하기를,
"김이희의 마음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알 것이다."
하였다.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사학 유생들에게 모두 와서 기다리라고 명하였는데, 유생들이 미처 대명(待命)하지 못하니, 승지와 대사성을 파직하고 유생들을 정거(停擧)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주저하여 머뭇거린 삼사(三司)의 관원들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성밖으로 내쫓고,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를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연화문(延和門) 안의 사약방(司鑰房)에 나아갔는데, 여러 대신들이 청대하여 또 진연하기를 힘껏 청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임금의 뜻이 조금 풀리어 파직한 사람들을 모두 잉임(仍任)시키고 유생들을 정거시키게 했던 명도 또한 정침(停寢)하였다.
홍낙인(洪樂仁)·정창성(鄭昌聖)·구상(具庠)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6일 경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봉조하(奉朝賀)·제도(諸道) 구관 당상(句管堂上)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그 임금은 잔치를 받고 그 백성들에겐 진휼을 베풀고 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매 음식이 어떻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제도(諸道)와 양도(兩都)에서는 나의 이러한 뜻을 본받아 전(殿)에 올라 헌상(獻觴)하는 것같이 하도록 하라."
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하유(下諭)하게 하였다.
1월 27일 신해
선전관에게 명하여 기내(畿內)의 진휼(賑恤)을 베풀고 있는 고을에 달려가서 진정(賑政)을 살펴보고 오게 하였다.
최태형(崔台衡)을 승지로, 김응순(金應淳)을 대사헌으로, 이수훈(李壽勛)을 집의로, 서호수(徐浩修)를 응교로, 김관주(金觀柱)를 교리로, 홍상간(洪相簡)을 부교리로, 이득신(李得臣)·이택수(李澤遂)를 부수찬으로, 홍용한(洪龍漢)을 필선으로, 이휘지(李徽之)를 대사성으로, 김시묵(金時默)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1월 29일 계축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이시정(李蓍廷)을 사간으로, 김익(金熤)을 응교로, 민홍렬(閔弘烈)을 부응교로, 이치중(李致中)을 수찬으로, 신광리(申光履)를 겸 필선으로, 홍상성(洪相聖)을 문학(文學)으로, 조명정(趙明鼎)을 판윤으로, 이창수(李昌壽)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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