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2권, 영조 45년 1769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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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갑인

예조 참판 유한소(兪漢蕭)가 헌릉(獻陵)의 곡장(曲墻)이 무너진 곳을 수개(修改)하고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예조 낭청과 선공감(繕工監)의 관원을 잡아들이고, 공장(工匠)에게 장형(杖刑)을 명하였는데, 전일에 잘 수개하지 못하여 이러한 폐단이 있게 한 때문이었다.

 

2월 2일 을묘

진연청(進宴廳)에서 차비 기녀(差備妓女)의 습악(習樂)할 일을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것이 어찌 즐겨서 하는 것이기에 이로 인하여 성색(聲色)을 돕겠다는 것인가? 만약 분나(紛拏)한 폐단이 있으면, 조사(朝士) 및 유생은 양사(兩司)에서 논계(論啓)하게 해 그들에게 청현직(淸顯職)을 금할 것이고 무인(武人)과 잡인(雜人)은 아울러 결곤(決棍)할 것이다. 그리고 잔치를 마친 이튿날에 제도(諸道)에서 선발한 기녀들은 포교(捕校)로 하여금 도성문 10리 밖에 압송하게 하라."
하였다.

 

2월 3일 병진

정언충(鄭彦忠)을 승지로 삼았다.

 

응교 김익(金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스스로 기약하는 바가 고상(高尙)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변하여 스스로 성스럽게 여기시는 데 이르러 방원(方圓)을 규구(規矩)에서 구하지 않고 경중(輕重)을 형석(衡石)017)  에서 살피지 않으시며, 그 가르치는 바의 사람을 신하로 삼기 좋아하고 그 가르침을 받는 바의 사람은 신하로 삼기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근년 이래로 조금이나마 과실을 바로잡으려는 논의를 들으시면, 갑자기 거슬리는 뜻을 보이시며 이를 최절(摧折)하고도 부족하게 여기셔서 견벌(譴罰)을 가하시고, 견벌을 가하시고도 부족하게 여기셔서 뜻하지 않은 전교와 중도에 지나친 전지(傳旨)가 사교(辭敎)의 사이에 진첩(震疊)되며, 처분이 마땅한 데에서 어긋나고 거조가 공평함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더러 번뇌(煩惱)가 극도에 달하여 지나치게 스스로 비박(菲薄)하게 여기셔서 스스로 위중(威重)을 떨어 뜨리십니다. 이 때문에 조정의 위에서는 감히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진계(陳啓)할 수 없고, 단지 성상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구차하게 작록(爵祿)을 보전하는 것을 현재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아서 다시 명의(名義)가 어떤 물건인지 충절(忠節)이 무슨 일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번 까다롭고도 강직한 논의가 그 사이에서 나오면, 뭇사람들이 비웃어 꾸짖으며 향암(鄕闇)이라고 지목하고 소란을 일으킨다고 의심하는데, 시의(時議)가 이와 같으니 세도(世道)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눈앞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정렬(李鼎烈)은 사문(斯文)을 존숭하며 외람된 종향(從享)을 배척하며 3일 동안 궐문(闕門)에서 울부짖어 홀로 위험한 말을 진달하였으니, 그 늠름하게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직절(直截)한 기풍(氣風)은 마땅히 가장(嘉奬)하여 채납(採納)하셨어야 하는데, 도리어 찬배(竄配)의 율(律)을 시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김이희(金履禧)는 논사(論思)하는 벼슬에 있으므로, 대략 광구(匡救)하는 말을 본받았는데, 또한 변방에 내치는 형률을 받았습니다. 삼가 더군다나 칭상(稱觴)·헌수(獻壽)하는 것은 신민(臣民)이 함께 경사스러워하여 기뻐해야 하고, 일을 당하여 진언(進言)하는 것은 삼사(三司)의 직분(職分)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연(進宴)은 스스로 진연이고, 진언(進言)은 스스로 진언이어서 사건이 각각 다르고 맥락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인데, 진언한 것에 대해 격뇌(激惱)하여 진연에 노여움을 옮겨 조정에 가득한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몹시 동요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였으니,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이 한다면 화봉인(華封人)이 성인을 축하했을 때018)  에 익(益)·직(稷)019)  의 규경(規警)하는 말이 있었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날 대소 신료들 가운데 전하를 위해 한 사람도 정론(正論)을 말하는 이가 없었고, 급급하게 미봉(彌縫)하고는 부지런히 힘써서 부지(扶持)하려는 것과 같음이 있어 임금은 있어도 신하는 없는 듯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이를 통분스럽게 여겼습니다. 작상(爵賞)이란 것은 인주(人主)가 세상을 면려(勉勵)하는 도구입니다. 삼가 보건대 근일에 크고 작은 차제(差除)가 성상의 간선(簡選)에서 많이 나오고 있으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제수하는 글이 미처 나오지 않았는데 물색(物色)이 먼저 정해지고, 성명(姓名)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중외(中外)에서 이미 알고 있으면, 천하에 제1류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불행하게도 근사(近似)합니다. 왕자(王者)는 삼무사(三無私)020)  를 받들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사람을 임용하는 즈음에 사은(私恩)으로 공도(公道)를 병들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대신(大臣)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삼사(三司)에서는 감히 논하지 못한 채 오로지 성충(聖衷)을 엿보아 헤아리고는 먼저 뜻을 받들어 비위를 맞추는 것을 장계(長計)로 여기고 있으니, 《서경(書經)》에 이른바,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한다.’는 것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하였다. 소장(疏章)을 들이자, 김익을 통청(通淸)한 전관(銓官)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두려워하여 김익을 감히 논척(論斥)하지 못한 것으로써 인구(引咎)하고, 여러 비국 당상들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나아가자 임금이 인견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김익의 소장을 읽게 하였는데, 진연(進宴)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잇달아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경들이 물러가지 않고 정청(庭請)하면,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고, 인하여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대신들이 뜰 아래 서서 인접(引接)을 허락할 것을 청하며 일제히 소리 높여 간절하게 애걸하자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다시 여러 대신들을 소견하고, 또 백관(百官)과 기민(耆民)을 소견한 다음 승지에게 명하여 백관과 기민에게 수연(受宴)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묻게 하였다. 이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김익을 병예(屛裔)하라는 일로써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절도 안치(絶島安置)하도록 청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홍봉한이 말하기를,
"마땅히 성교(聖敎)에 의거하여 하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절도에 천극(栫棘)하기를 청하니, 곧 윤허하여 제주목(濟州牧)에 천극하도록 명하고, 어련(御輦)을 타고 나가며 하교하기를,
"마땅히 구저(舊邸)에 가겠다."
하매, 여러 대신들이 허둥지둥 따르고, 왕세손도 또한 따라 나갔다. 대신이 길을 막고 장신(將臣) 구선복(具善復) 등이 또 모두 어련을 메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신이 충성스럽다."
하고, 모두 말을 내려 주었으며, 마침내 환궁(還宮)하였다. 대신 2품 이상이 입시하여 다시 진연(進宴)하기를 힘껏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맹세하였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시묵(金時默)이 말하기를,
"김익이 문자를 잘못 씀으로 인하여 이 하교가 있었으니, 어찌 국체(國體)가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 판서가 그르다."
하고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밤이 이미 5경(五更)이 되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취침(就寢)하고자 한다."
하니, 여러 대신들이 물러나 각도(閣道)021)  에 앉았다가, 날이 밝은 다음에 비로소 나갔다.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판서로, 정존겸(鄭存謙)을 참판으로, 이휘지(李徽之)를 참의로 삼았다.

 

2월 4일 정사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연(進宴)하기를 정청(庭請)하여 두 번 아뢰기에 이르니, 따라서 참여한 사람들을 일체 아울러 해임(解任)시키도록 명하였다. 정원에서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고 아뢰니, 아울러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2월 5일 무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약원에 문후(問候)하지 말도록 명하고, 탕제(湯劑)를 들여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정원에서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여러 승지들이 합문(閤門)을 지키며 청대(請對)하니,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엄인(嚴璘)·이재간(李在簡)·이성원(李性源)·이성규(李聖圭)·홍자(洪梓)·권도(權噵)에게 승지를 제수하고, 정광충(鄭光忠)에게 병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시종(侍從)은 모두 관안(官案)에 부첨(付籤)하게 하였다. 또 취타(吹打)하도록 명하고, 또 취타가 해연(駭然)하다 하여 병조 판서 홍인한(洪麟漢)과 두 군문(軍門)의 대장 이장오(李章吾)·구선복(具善復)을 잡아들여 여섯 번 조리돌림을 하였다. 왕세손이 따라 나아가 궁문(宮門)에 들어가 여(輿) 아래에서 시립(侍立)하였다가, 홀기(笏記)를 써서 바치고 말하기를,
"지금 해괴한 일로 인하여 성심(聖心)이 이미 견고하시니, 원컨대 신의 청을 들어 옛것은 씻어 없애고 새것에 따르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어질다. 네가 비록 이와 같이 하나, 이미 맹세하여 하교하였으니 어찌 하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맹세하여 하교하신 것은 신이 마땅히 대신 받겠습니다. 오늘은 신이 새로 청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손자가 어질다. 오늘은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다. 옛날에 강주 사마(江州司馬)022)  는 청삼(靑衫)이 젖었는데, 오늘 80세를 바라보는 그 임금은 홍포(紅袍)가 모두 젖는구나. 이러한 말을 듣고도 감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손자에게 의지하는 뜻이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오늘의 이 일은 우리 나라 만년(萬年)의 근본이라 할 만하니, 특별히 그 청을 허락한다. 오늘의 이 일은 나도 아니고 또한 나의 손자도 아니며, 지금 이 예(禮)를 받는 것은 곧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께서 내리신 것이고, 나의 손자가 숙성(夙成)한 것도 또한 오르내리시는 영령께서 내리신 것이다. 즉일에 하례(賀禮)를 받아 오르내리시는 영령께 우러러 답함으로써 세손(世孫)의 효성을 빛낼 것이니, 그것을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오늘 백관과 시종에게 한 하교는 일체 아울러 그만둘 것이니 모두 나와서 참여하도록 하라. 그리고 금오(金吾)와 형조의 시수(時囚)들을 아울러 석방하도록 하라."
하고, 마침내 의열궁(義烈宮)에 두루 임어하였다가, 파루(罷漏) 후에 환궁(還宮)하였다.

 

2월 6일 기미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고 하교하기를,
"노대(老大)도 할 수 없는 것을 충자(冲子)가 능히 하였으니, 우리 나라는 반석(磐石) 같은 편안함이 있게 되었다."
하였는데,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송축(頌祝)하고 또 인구(引咎)하여 감죄(勘罪)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아울러 위유(慰諭)하였다. 죄를 받은 여러 신하들은 모두 분간(分揀)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청한 때문이었다.

 

김한기(金漢耆)를 승지로 삼았다.

 

동가(動駕) 때 호종(扈從)했던 군사들에게 중일제(中日製)의 예에 의거하여 시사(試射)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무사(武士)들로 하여금 우리 세손(世孫)의 효성을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안주 사정 어사(安州査正御史) 민홍렬(閔弘烈)이 복명(復命)하였다. 채전(債錢)은 본전과 이자를 논할 것 없이 모두 탕감해 주도록 명하였으니, 어사가 청한 때문이었다.

 

약방에서 입진하고 탕제(湯劑)를 올렸다. 연일 약을 물리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허락한 것이었다.

 

2월 8일 신유

부수찬 이득신(李得臣)이 상소하기를,
"일전에 격뇌(激惱)하셨을 때에는 위노(威怒)가 중도에 지나치고 거조(擧措)가 비상(非常)하셨습니다. 연로(輦路)의 청필(淸蹕)023)  은 본래 군사들의 행진(行陣)이 아니고 금정(禁庭)의 법좌(法座)는 또 교장(郊場)과 다른 것인데, 군용(軍容)이 위세를 떨치고 진악(陣樂)이 떠들썩하여 조용하고도 신엄(宸嚴)한 지역을 문득 군사들을 다스리는 장소와 같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부신(符信)을 차고 있는 세 장신(將臣)을 기고(旗鼓)의 사이에서 머리채를 잡아 끌었고, 관모(冠帽)를 쓴 백료(百僚)가 길거리와 저자에서 분주하게 달아났습니다. 승선의 직명(職名)이 비록 체차되었다 하나 후원(喉院)으로서 죄주었을 경우 잡아들이는 일은 이전에 없던 것이며, 공조 낭청이 비록 거행을 게을리하였으나 일이 군무(軍務)가 아닐 경우 형장(刑杖)으로 다스리는 벌은 또한 너무 무겁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난필(鑾蹕)024)  을 경계하지 않고 옥여(玉輿)를 먼저 출발시켜 노상(路上)에서 오랫동안 머문 것은 실로 혼자 먼저 어디로 가겠는가? 라는 한탄이 있으며, 장신이 어련(御輦)을 메기에 이르러서는 비록 단앙(斷鞅)025)  의 뜻에서 나왔다 하나 구마(廐馬)를 세 마리 내려 주도록 한 명은 한갓 은전(恩典)이 설만(褻慢)한 데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 성덕(聖德)에 허물이 되고 편안함을 물려주는 우모(訏謨)에 흠결(欠缺)이 되는 데에야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소장을 돌려주고 그 관직을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2월 9일 임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과명(科名)을 ‘문손(文孫)이 식희(飾喜)026)  함을 위한 과목[爲文孫飾喜科]’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삼일제(三日製)를 베풀어 ‘지극한 정성이 서로 믿음직한 것을 내가 문손에게서 보았다[至誠相孚予見文孫]’는 것으로써 명제(命題)를 삼으려고 하자, 독권관(讀券官)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이것은 하례를 마친 후에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경사를 치르는 뜻입니다. 3월 3일은 이미 멀었으니, 별달리 축하한다는 것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과명을 고친 것이었다. 이어서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친림(親臨)하여 시사(試射)하였는데, 과차(科次)하여 입시하니, 홍낙임(洪樂任) 등 3인을 뽑았다.

 

수찬 이병정(李秉鼎)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득신(李得臣)을 구원하고 체차하게 한 하교를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방자(放恣)하다."
하고, 해남(海南)에 찬배(竄配)하도록 명했다가 곧 정침(停寢)하고, 단지 시종안(侍從案)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정창성(鄭昌聖)·이한풍(李漢豊)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0일 계해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시사(試射)한 사람들에게 상을 나누어 주었으며, 식희과(飾喜科)에 급제한 3인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신위(申暐)를 대사헌으로, 안집(安集)을 대사간으로, 유선양(柳善養)을 집의로, 신응현(申應顯)을 사간으로, 정언섬(鄭彦暹)·주형질(朱炯質)을 장령으로, 이지승(李祉承)·이익선(李益烍)을 지평으로, 정환유(鄭煥猷)를 헌납으로, 성윤검(成胤儉)·이종영(李宗榮)을 정언으로, 민홍렬(閔弘烈)을 부응교로, 박지원(朴志源)을 교리로, 김관주(金觀柱)를 부교리로, 조종현(趙宗鉉)을 수찬으로, 이경옥(李敬玉)을 부수찬으로, 정홍순(鄭弘淳)을 판윤으로, 김종정(金鍾正)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2월 11일 갑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갔다가 지나는 길에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집에 들렀다. 다시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의 옛터에 나아가 식희 문·무과(飾喜文武科)의 방방(放榜)을 하고, 이어서 곧 환궁하였다.

 

2월 12일 을축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의 중삭(仲朔)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고, 이어서 전(殿)에 나아가 향유(鄕儒)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임금이 식희과(飾喜科)에 나와서 참여한 향유가 없었다 하여, 다시 과거를 설행하여 함께 경축하는 뜻을 보이도록 명했는데, 과차(科次)하여 입시하니, 수위를 차지한 교관(敎官) 정지환(鄭趾煥)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2월 13일 병인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시사(試射)하니, 국구(國舅)·부마(駙馬)·종신(宗臣)·문신(文臣)이 모두 참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국구와 나란히 함께 쏘겠다."
하고, 임금이 궁시(弓矢)를 가지고 쏘려 하다가 김한구(金漢耉)에게 명하여 나란히 쏘게 하였다. 김한구가 먼저 1시(矢)를 명중시키고 임금이 쏘아서 1시를 명중시켰는데, 북을 울리며 풍악을 연주하자 시위(侍衛) 이하가 모두 기뻐하였다. 쏘기를 마치고 김한구에게 구마(廐馬) 1필을 면급(面給)하라 명하고 부마 이하가 각각 차례로 쏘자 차등 있게 상을 나누어 주었는데, 혹 말을 내려 주거나 혹은 가자(加資)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정후겸(鄭厚謙)을 승자(陞資)시키도록 명하였다.

 

임정원(林鼎遠)을 지평으로, 조중명(趙重明)을 헌납으로, 홍낙인(洪樂仁)을 부제학으로, 윤석렬(尹錫烈)을 부교리로, 심관지(沈觀之)를 부수찬으로, 김재순(金載順)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2월 14일 정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구상(具庠)·최태형(崔台衡)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5일 무진

민백흥(閔百興)을 이조 참판으로, 서유량(徐有良)을 집의로, 윤승렬(尹承烈)을 부응교로, 조엄(趙曮)을 대사성으로, 조운규(趙雲逵)를 판의금으로, 김한기(金漢耆)를 경상 감사로 삼았는데, 김 한기는 김한구(金漢耉)의 아우이다.

 

이담(李潭)·이재협(李在協)·김귀주(金龜柱)·이휘지(李徽之)·홍윤(洪錀)·홍성(洪晟)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효장묘(孝章廟)에 거둥하니,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였다. 왕세손에게 명하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게 하고, 이어서 의소묘(懿昭廟)에 거둥하여 전작례를 행하였다. 2품 이상에게 제향에 참여하도록 명하였는데, 2품이 미처 오지 않았으므로, 승지가 백관이 없어서 예(禮)를 행할 수 없다고 아뢰니, 엄교(嚴敎)를 내리고 아울러 불서(不敍)의 율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또 여러 승지들을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고 시위(侍衛)를 물리쳤다.

 

2월 16일 기사

왕세손이 구전(口傳)하여 아뢰기를,
"칭상(稱觴)하는 예(禮)를 날을 꼽아 기다렸는데, 삼가 정원에 내리신 전교를 받들건대, 먼저 퇴거(退去)하라는 명을 잇달아 내리셨으니, 하정(下情)이 지극히 초박(焦迫)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중문(中門) 밖에 나와서 감히 우러러 청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는 할아비는 손자에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 의지하니, 특별히 이를 허락한다."
하고, 비로소 환궁하였으며, 이틀 동안 여러 신하들에게 내린 처분을 아울러 도로 정침(停寢)하였다.

 

정언충(鄭彦忠)·최태형(崔台衡)·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7일 경오

임금이 조신(朝臣) 가운데 70세 이상 된 사람은 진연(進宴)을 마친 후에 모두 자손으로 하여금 헌수(獻壽)하게 하였고, 제도(諸道)와 양도(兩都)의 조신 가운데 나이 70세 이상 된 사람과 사서(士庶) 가운데 나이 80세가 된 사람들도 모두 이 예에 의거하되, 판비(辦備)할 수 없는 자는 본관(本官)이 도와 주고, 경중(京中)에서는 예조로 하여금 모두 주찬(酒饌)을 주게 하였다.

 

정언 이종영(李宗榮)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을 빈번하게 자주 체차(遞差)시키는 것은 국체(國體)를 손상시킴이 있습니다."
하고, 또 특별히 억계시(抑戒詩)를 써서 병풍을 만들어 근신들로 하여금 외게 하고, 빈연시(賓筵詩)로 진연(進宴)의 악장(樂章)을 만들어 잠경(箴警)하는 뜻에 부치기를 청하니, 승지로 하여금 읽도록 명하고, 처분을 써서 전지(傳旨)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게 하였는데, 납간편(納諫篇)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태종이 어렵게 여겼는데, 당나라 태종이 이미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내가 모년(暮年)에 어떻게 간신(諫臣)을 책망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비답을 내리기를,
"당나라 태종은 납간(納諫)을 권면하였는데, 지금 나는 대신(臺臣)을 처분하였으니, 어찌 모년에 이 책을 강한 뜻이 있겠는가? 특별히 그 명을 정침(停寢)하니 모쪼록 나의 뜻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영(李宗榮)을 처분한 하교를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보고는 고쳤는데, 독서의 효험이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당나라 태종은 봉선(封禪)을 받지 않았는데, 내가 잔치를 받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하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말하기를,
"비록 위징(魏徵)이 오늘날에 있더라도 청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징은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파직(罷職)하고 삭판(削版)했던 여러 신하들을 견서(甄敍)하여 진연(進宴)에 참여시키도록 명하였는데, 홍봉한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2월 18일 신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여러 수령들을 인견하고 민사(民事)를 신칙하고 면려하였다.

 

이미(李瀰)를 이조 참의로, 이창수(李昌壽)를 판돈녕으로, 조엄(趙曮)을 지돈녕으로, 정존겸(鄭存謙)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2월 19일 임신

한필수(韓必壽)·이한풍(李漢豊)·최태형(崔台衡)을 승지로, 정존겸(鄭存謙)을 부제학으로, 김재순(金載順)을 응교로, 박취원(朴取源)을 부응교로, 홍낙신(洪樂信)·서유녕(徐有寧)을 교리로, 이치중(李致中)·조종현(趙宗鉉)을 부교리로, 이득복(李得福)·이진복(李鎭復)을 수찬으로, 조재준(趙載俊)·홍상간(洪相簡)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20일 계유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1일 갑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영릉(寧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향민(鄕民)을 불러 농사 형편을 물어 보고 공시인(貢市人)을 불러 폐막(弊瘼)을 물어 본 다음 하교하기를,
"전인(廛人)을 불러서 물어 보았더니, 〈외상(外上)을 진 것이〉 낙창군(洛昌君)027)  이 1천 2백 냥이고, 청성위(靑城尉)028)  가 1천 1백 냥이며, 홍자(洪梓)가 2천 5백 냥이고, 송낙휴(宋樂休)가 1천 5백 냥이라고 하는데, 일의 한심스러움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나의 백성들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이익광(李益光)·홍자·송낙휴는 아울러 잡아다 처리하고, 공시 당상(貢市堂上)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며, 낭청은 태거(汰去)한 후 잡아다 추문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대청(臺廳)에 나온 대신(臺臣)들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주형질(朱炯質)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大臣)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번의 연례(宴禮)에 5촌의 친척은 입참(入參)하는 것으로 정하였습니다. 김인주(金麟柱)는 바로 곤전(坤殿)의 동기(同氣)이니, 청컨대 부직(付職)하여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동석(尹東晳)은 바로 자성(慈聖)의 동기의 아들인데, 어찌하여 유독 내 자손에게만 벼슬을 주고 자성의 동기 자손은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어제 박홍수(朴紭壽)를 체차(遞差)하고 윤광심(尹光心)에게 벼슬을 주었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하였다. 박홍수는 도위(都尉) 박명원(朴明源)의 손자이고, 윤광심은 윤동석의 아들이었다. 하교하기를,
"한결같이 마음이 불안한 것은 오로지 백성들에게 있는데, 공시인(貢市人)의 폐막(弊瘼)을 바로잡은 후 공인(貢人)·시인(市人)들은 거의 어깨를 쉴 수 있게 되었으나, 이번의 일은 한심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6천 냥을 과연 죄다 본전방(本廛房)에 갚았다고 하니, 이미 갚았다고 한다면 오래 가두어 둘 수가 없다. 더욱이 홍씨·송씨 두 집안에 대한 처분은 그 할아비와 그 아비가 뒤섞였으니, 홍씨의 가장(家長) 홍자(洪梓)는 고신(告身) 2등의 율(律)을 시행하고, 송씨의 가장 송의손(宋宜孫)과 심정지(沈鼎之)는 고신 1등의 율을 시행하며, 이익광(李益光)은 반드시 성색(聲色)의 소치이니 징속(徵贖)하지 말고 태형(笞刑) 50대를 집행하며, 유신과 무신에 대해 5년 동안 한정해서 정거(停擧)시키도록 하라. 아! 시민(市民)의 6천 냥 물화(物貨)가 죄다 세가(勢家)에 들어갔는데도 만약 엄중히 신칙하지 않는다면, 임금이 임금답고 나라가 나라답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서용하지 않는 법은 너무 가벼우니, 공시 당상 김시묵(金時默)·김종정(金鍾正)에게 빨리 삭직(削職)의 형률을 시행하도록 하라. 아! 오늘날의 대신(臺臣)들이 비록 귀가 먹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도 또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한 단서라고 할 수 있으니, 또한 어떻게 신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올 봄 이후로 이목지관(耳目之官)이 되었던 자들은 한결같이 서용하지 않는 법을 아울러 시행해서 귀머거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벙어리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하라. 이것은 해서(該署)의 낭청이 담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태거(汰去)하라는 명을 그만두고, 해서의 제조는 봉급 1등을 감하며, 세 낭청은 제서불응위공률(制書不應爲公律)로 감처(勘處)하여 내치도록 하라."
하였는데, 송의손은 곧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의 처조부(妻祖父)이고, 홍자는 곧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의 처조부이며, 심정지는 곧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의 아버지이고, 이익광은 낙창군(洛昌君)의 아들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반드시 근본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니, 만약 능광직(綾廣織)을 금한다면 사치가 감해질 듯하다. 앞으로 모단(毛緞)·한부단(漢府緞)은 금하지 말고, 능광직을 무역해 오는 자는 또한 문단(紋緞)의 예에 의거하여 서장관(書狀官)·만윤(灣尹)029)  이 엄중히 금하게 해서,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잠상(潛商)의 율(律)로 시행하는 일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이후로 국혼(國婚) 때에는 모두 면포(綿布)를 쓰고 주단(紬緞)을 금하게 해서, 영(令)을 어기는 자는 모두 무겁게 다스리는 일을 일체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조운규(趙雲逵)에게 호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2월 22일 을해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이성규(李聖圭)를 대사간으로, 이경옥(李敬玉)을 집의로, 박대유(朴大有)를 장령으로, 이혜조(李惠祚)를 정언으로, 서호수(徐浩修)를 부응교로, 박지원(朴志源)을 보덕으로, 이복원(李福源)을 병조 참판으로,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이진항(李鎭恒)을 사간으로, 홍낙임(洪樂任)을 정언으로,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윤면승(尹勉升)·윤장렬(尹長烈)을 지평으로, 기언관(奇彦觀)을 헌납으로, 정창순(鄭昌順)을 교리로, 김관주(金觀柱)를 수찬으로, 김기대(金基大)를 부교리로, 이창수(李昌壽)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2월 23일 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죄명(罪名)이 조금 무거워 미처 거두어 서용하지 못한 자들을 들어 아울러 서용하도록 허락해서 진연(進宴)에 참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2월 24일 정축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의 시수 죄인(時囚罪人)들을 석방하고, 또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명하여 죄인들을 일체 석방해 주게 하였다.

 

2월 25일 무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잔치를 받았다. 종친(宗親)·문무 백관(文武百官) 및 여러 파산(罷散)한 인원들에게 모두 군함(軍銜)을 주어 나아와 참여하게 하였는데, 각각 차례로 서립(序立)하였다. 진찬(進饌)하매 음악이 연주되고 왕세손이 진작(進爵)하였으며, 치사관(致詞官)이 대신 치사하였다. 왕세손이 자리에 나아가 네 번 절하기를 마치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진작하고 치사한 다음 위차(位次)에 나아가 네 번 절하였다. 왕세손이 잔치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며 산호 천세(山呼千歲)를 부르고 네 번 절한 다음 마침내 전내(殿內)로 들어갔다.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진작하였는데, 제9작(第九爵)을 마침에 이르러 임금이 갑자기 수심(愁心)을 띠고 말하기를,
"흉년에 잔치를 받으니,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기민(饑民)을 생각하면 이 마음을 어떻게 억제하겠는가? 이제 잔치를 마친 다음 ‘풍년이 들기를 축원한다.[祝有年]’는 세 글자를 가지고 팔도의 백성들을 위해 송축(頌祝)하고자 한다."
하니, 백관이 모두 일어나서 하례하였다. 이날 내연(內宴)을 겸하여 행했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빈청(賓廳)에 물러가서 음식 내려 주기를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마침내 잔치를 거두도록 명하고,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다.

 

2월 26일 기묘

임금이 각능의 수개(修改)에 대한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사옹원에 나아가니,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아울러 입시하였다. 임금이 송절차[松節茶]를 가져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경들이 각각 한 잔씩 나에게 권하도록 하라."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 등이 남은 것을 맛볼 수 있으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차가 홍봉한에 이르러 술잔을 들어 상수(上壽)하고, 여러 대신들과 국구 및 여러 부마들이 또 진작(進爵)하여 상수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돌아가며 취하도록 마시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비록 취해서 쓰러지더라도 허물로 삼지 않겠다."
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시종신(侍從臣)과 무신(武臣)들에게 시사(試射)하고, 임금이 친히 3시(矢)를 쏘아 명중시켰다. 이어서 술을 내려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고, 또 내찬(內饌)과 진어(進御)의 남은 것을 내려 주면서 말하기를,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德)으로 배불렀으니, 오늘의 일은 귀하게 여길 만하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즐겁고 또 귀중(貴重)합니다."
하매, 마침내 상을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이날 기로연(耆老宴)을 베풀었는데, 예조 낭청이 잔치를 주관했으니, 대개 고례(古例)인 때문이었다.

 

2월 27일 경진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시강관 김재순(金載順)이 말하기를,
"성품을 말하면서 심정을 언급하고 성정(性情)을 말하면서 성품의 다함을 언급하는데, 성인(聖人)은 그 성품을 다하지만 중인(衆人)은 그 성품을 다하지 못하고 막히므로, 학교(學校)를 세우고 스승을 맞아들여 가르치는 것이며, 《소학(小學)》·《대학(大學)》의 순서가 있으니, 명덕(明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성인이 이를 측은히 여기는 뜻을 전하께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노쇠하여 진취(進就)할 희망이 없다."
하였다. 검토관 김기대(金基大)가 말하기를,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는 것은 일이 비록 미세하다 하나, 미루어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것이 성인의 학문하는 공부가 되니, 낮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들어가고, 작은 데로부터 큰 데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게 여겼다. 참찬관(參贊官) 김귀주(金龜柱)가 ‘영가 무도(詠歌舞蹈)와 사려(思慮)가 혹시라도 한계를 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끌어대어 진면(陳勉)하기를,
"마음이 화평하면 일어나는 것이 모두 절도(節度)에 알맞고, 화평하지 못하면 일어나는 것이 절도에 맞지 못한 것입니다. 근일에 잡아들여 과실을 기록하는 일이 비록 한때의 격뇌(激惱)로 인하였다 하나, 사려가 혹시라도 한계를 넘지 않아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께 연례(宴禮)와 오늘의 강연(講筵)에 있어서 편안히 지내는 가운데에서도 전학(典學)을 잊지 않으시니, 흠앙(欽仰)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성심(聖心)이 화평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온당(穩當)한 체모를 얻었다."
하였다. 판부사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효묘(孝廟)께서 하교하시기를,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노(怒)를 제어하기가 어렵다.’ 하였으니, 왕언(王言)이 위대하십니다. 신은 승선의 말이 체통을 얻었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성인이 아닌데,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귀주(金龜柱)가 말하기를,
"성교가 진실로 지나치십니다. 정자(程子)는 대현(大賢)인데 오히려 사냥을 구경한 일이 있었고, 안자(顔子)는 아성(亞聖)인데도 석 달 뒤에는 인(仁)을 어겼으니, 사람으로 누군들 허물이 없겠습니까? 허물을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면 되지 어찌 이와 같이 겸양하여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물러가기에 미쳐서 그 말이 절실하고 지극하다 하여 특별히 호피(虎皮)를 내려 주었는데, 그를 총애한 때문이었다. 명하여 이번 진연(進宴) 때 진작(進爵)한 재신(宰臣)인 영의정·영중추·영돈녕에게 각각 안구마(鞍具馬) 1필씩을 내려 주게 하고, 금성위(錦城尉)030)  에게 구마(廐馬) 1필, 주원 도제거(廚院都提擧)에게 구마 1필을 아울러 면대하여 주었다. 그 나머지에게도 말을 내려 주었는데, 진연청 당상·낭청, 감조관(監造官), 꽃을 바친 승지와 차지(次知), 주원 제조·제거, 중관 이하와 낭청·찬의 이하에게는 모두 병술년031)  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또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들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찬품(饌品)을 내려 주었으며, 기사연(耆社宴)의 기일에 대해 물어 본 다음 갑자년032)  의 전례에 의거하여 음악을 내려 주게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기민(耆民)을 소견하였는데, 그 수(數)가 1천 2백 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많다."
하고, 음식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용호영(龍虎營)에 명하여 세악(細樂)을 주어 데리고 가도록 하였으니, 모두 기뻐하여 돌아갔다.

 

2월 28일 신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이 예(禮)는 옛 사첩(史牒)에 어찌 있었겠는가? 더욱이 이미 오늘 지영(祗迎)에 참여하였으니,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좌통례·우통례는 가자(加資)하고, 상례(相禮)는 준직(準職)을 제수하도록 하라. 그리고 어찌 특별히 이번 대례(大禮)뿐이겠는가? 서남(西南)을 봉심(奉審)한 것은 그 부지런함을 가상하게 여길 만하니, 예방 승지 한필수(韓必壽)를 가자(加資)하고, 전 통례 남현로(南玄老)·이세연(李世演)은 승지를 제수하며, 도승지 정언충(鄭彦忠)은 병조 참판을 제수하고 한 필수로 〈도승지를〉 대신하게 하라."
하였다.

 

지평 윤장렬(尹長烈)이 상소하여 진연(進宴)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하였고 은택(恩澤)이 널리 미쳤다 하여 말 때문에 죄를 얻어 오랫동안 해도(海島)에 갇혀 있는 자들을 풀어 주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일에 전로(銓路)가 기구(崎嶇)하여 촉망(屬望)이 점차 가벼워져 능이(陵夷)해지고 있으므로, 고루하고 더러우며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이 소중한 권병(權柄)을 외람히 차지하여 당연한 일처럼 여기고 있으며, 대각(臺閣)의 통선(通選)이 얼마나 어렵고도 신중한 일인데, 감히 지망이 미천하고도 보잘것없는 사람을 방자하게 이목지임(耳目之任)에 수망(首望)으로 주의(注擬)하였습니다. 정사(政事)를 맡은 지 얼마 안되어 이와 같이 방자하니, 신은 이조 판서 한광회(韓光會)와 민유(閔游)는 아울러 간삭(刊削)·체개(遞改)의 명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춘방(春坊)은 중임(重任)이고 납언(納言)은 청선(淸選)인데, 홍상성(洪相聖)·김낙수(金樂洙)는 혹은 의논할 만한 처지에 있고, 혹은 일컬을 만한 문벌(門閥)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일증(李一曾)에 이르러서는 통의(通擬)한 처음에 공의(公議)가 적합하지 않게 여겼는데, 세월이 조금 오래 되었으나 비난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일체 간삭하여 체개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겨울의 사행(使行) 때 법에 벗어난 허다한 물건들이 만상(灣上)에서 수검(搜檢)할 때 발각되기에 이르렀는데, 수많은 은자(銀子)와 초피(貂皮)를 부중(府中)에 실어 와서 저장해 놓은 다음 공법(公法)으로 묶어 두고 사물(私物)처럼 썼다는 데 대해 도로에서 서로 전하는 추악한 말이 떠들썩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해당 사신은 삭직(削職)해서 아랫사람을 검칙(檢飭)하지 못한 죄를 징치(懲治)하고, 의주 부윤 서명선(徐命善)은 잡아다 조처하여 변신(邊臣)의 재화(財貨)를 탐낸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다른 사람을 시기하여 경알(傾軋)한다고 엄중하게 비답하여 꾸짖고, 인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함문(緘問)하게 하였다.

 

형조의 당상이 윤장렬(尹長烈)의 함사(緘辭)를 가지고 입시하자, 임금이 그 사실을 물었는데, 자못 원소(原疏)와 같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주천(注薦)033)  이 너무 외람되었다 하여 한림 권점(翰林圈點)의 예에 의거하여 불러서 시험을 보였는데, 대개 윤장렬이 일찍이 주서(注書)로 있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진연(進宴)의 일로 말을 내려 주라는 명이 있음에 대해 차자(箚子)를 올려 사양하자, 임금이 읽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요(堯)임금의 성덕(聖德)과 장수(長壽)를 경은 어찌하여 나에게 견주어 말하는가? 사관이 반드시 쓸 것이다."
하였는데, 홍봉한이 말하기를,
"요순(堯舜) 이후로 성상의 수(壽)만한 이가 없었고, 치평(治平)을 구한 임금도 또한 전하의 성덕(聖德)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치평이 어찌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경의 말은 면전에서 거짓말을 하는 듯하다."
하였다.

 

2월 29일 임오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봉조하(奉朝賀) 홍계희(洪啓禧)를 소견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계축년034)  에 폐모(廢母)를 정청(庭請)하였을 때 한효순(韓孝純)이 수상(首相)으로서 비록 논계(論啓)에 참여하였으나, 연로하여 황겁(惶怯)한 소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그 후손 한종찬(韓宗纘)은 등제(登第)하여 대망(臺望)에 지색(枳塞)당하고 있으니, 이는 조정에서 한계(限界)를 지키고 울체(鬱滯)함을 소통(疏通)하는 도리에 있어서 득실(得失)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하순(下詢)하여 처리하소서."
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순문(詢問)하였는데, 모두 대답하기를,
"한종찬은 한효순에 대해 5, 6대가 됩니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유택(遺澤)이 5세가 되면 끊어지는 것이니, 재주에 따라 소통시키는 것이 성세(聖世)에서 사람을 임용하는 도리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한종찬은 구애됨이 없이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나주목(羅州牧)의 육지로 내보낸 죄인 이겸빈(李謙彬), 해남현(海南縣)에 천극(栫棘)한 죄인 윤시동(尹蓍東), 제주목(濟州牧)에 천극한 죄인 김익(金熤), 정의현(旌義縣)에 서인(庶人)을 만든 죄인 김이희(金履禧), 혹산도(黑山島)에 서인을 만든 죄인 이정렬(李鼎烈)을 아울러 석방하도록 하였으니, 윤장렬(尹長烈)의 상소로 인한 것이었는데, 김약행(金若行) 외에 해도(海島)에 찬배한 죄인들을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이득종(李得宗)을 대사헌으로, 이섭원(李燮元)을 대사간으로, 강윤(姜潤)을 집의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한집(韓鏶)을 장령으로, 이득복(李得福)·이동우(李東遇)를 지평으로, 박상로(朴相老)·강유(姜游)를 정언으로, 박취원(朴取源)을 부응교로, 신광리(申光履)·심이지(沈頤之)를 수찬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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