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갑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구제(舊制)는 3월 3일에 반유(泮儒)에게 시험을 보이고 명칭을 삼일제(三日製)라고 하였었는데, 이때에 임금이 간혹 그 날을 기다리지 않고 미리 시험을 보이곤 하였다. 임금이 시권(試券)에 성적을 매기라 명하여 정원시(鄭元始)·정재신(鄭在信)을 뽑고,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허락하였다.
3월 2일 을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삼일제에 입격(入格)한 사람들을 소견하였다.
3월 3일 병술
문신(文臣)에게 제술(製述)을 명하고, 이어서 성적을 매겨 수위를 차지한 사람에게 말을 내려 주었다.
3월 4일 정해
홍수보(洪秀輔)를 사간(司諫)으로, 이숭호(李崇祜)를 지평으로, 민홍렬(閔弘烈)을 응교로, 박지원(朴志源)을 부응교로, 김종수(金鍾秀)·박상로(朴相老)를 부교리로, 한광회(韓光會)를 형조 판서로, 김응순(金應淳)을 공조 참판으로, 서호수(徐浩修)·이득복(李得福)을 교리로, 홍용한(洪龍漢)을 수찬으로, 김관주(金觀柱)를 부수찬으로, 신회(申晦)를 판돈녕으로, 이유수(李惟秀)를 도승지로, 김광국(金光國)을 승지로 삼았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하였다.
3월 5일 무자
태학(太學)에 명하여 도기 유생(到記儒生)에게 강경(講經)을 시험 보이게 하고, 수위를 차지한 김봉욱(金鳳郁)·신보겸(辛普謙) 두 사람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허락하였다.
3월 6일 기축
임금이 황단제(皇壇祭)에 쓸 향(香)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정운유(鄭運維)·이한풍(李漢豊)을 승지로 삼았다.
3월 8일 신묘
임금이 명릉(明陵)의 보토(補士)에 대한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갔다. 전설사(典設司)에 임어하여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 금위 대장 구선복(具善復)을 불러 두 능(陵)의 역사에 대해 물었다. 이때 명릉에 일이 있어서 여러 날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매번 불러서 물어 보고 또 사람을 시켜 그 근만(勤慢)을 감독하게 하였었다. 구윤명이 말하기를,
"모군(募軍)·요포(料布)를 마땅히 마련해야 합니다. 매일 5백 명씩 사용해야 하는데, 신사년035) 에 견줄 것이 아닐 듯하니, 마땅히 쌀 몇 석, 베 몇 동(同)을 가져다 쓰면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쌀 5백 석, 베 20동을 가져다 쓰는 것이 좋겠다."
하자, 구윤명이 말하기를,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4백 석을 가져다 쓰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모든 일은 커지기 전에 미리 방비하는 것이 귀중하니, 작은 것으로 인하여 큰 것을 이루고 적은 것으로 인하여 많은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능관(陵官)이 산을 순시할 때 비록 갈라진 조그마한 땅이 있다 하더라도 본래 오릉(五陵)의 수호군이 있으니, 뜻을 다해 보토(補土)했다면 어찌 이러한 폐단이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보토한 후에는 수시로 적간(摘奸)하되, 대수롭지 않게 여겨 간과(看過)하여 능관은 무슨 능이라고 말하지 말라. 곧 이는 한 국내(局內)이다. 오릉의 능관 가운데 작은 것은 그 직임(職任)을 태거(汰去)하고 큰 것은 금고(禁錮)시킬 것이니, 모두 자세히 알게 하라."
하였다.
제보부(祭報府)036) 를 읽도록 명하였는데, 대축(大祝) 서형수(徐逈修)에 이르러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 임금이 서형수를 명사(名士)로 대우하지 않는데, 그 신하가 명사로 대우하고 있으니, 이는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제사를 담당한 낭청은 탈고신 3등(奪告身三等)에 처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서형수가 일찍이 일을 말하여 임금의 비위를 거슬렀었는데, 후에 비록 서용하였으나 오히려 낙점(落點)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임금이 궁에 들어가서 배례(拜禮)를 행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따라 들어와서 예(禮)를 행하게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 임금을 알지 못하고 있는 지 오래 되었으니, 내가 이에 이르러 더욱 절실하게 마음이 아프다."
하고, 잇달아 엄교(嚴敎)를 내리니, 여러 신하들이 황공(惶恐)하여 물러갔다. 하교하기를,
"이와 같이 검칙(檢飭)하지 못하였으니, 오늘 입시했던 여러 승지들은 한결같이 아울러 현재의 직임을 해면(解免)하고, 송형중(宋瑩中)·홍지해(洪趾海)·박필규(朴弼逵)·이성규(李聖圭)·이휘지(李徽之) 등에게 승지를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서호수(徐浩修)·홍상성(洪相聖)이 춘방(春坊)의 관원으로서 패초(牌招)를 어겼는데, 홍상성은 한번 사면하여 체차되고자 하였으므로, 혹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니, 체차시키도록 하라. 그런데 서 호수가 시애(撕捱)한 것은 그르니, 성환 찰방(成歡察訪)을 제수하여 당일로 사조(辭朝)하게 하라."
하였다.
이득일(李得一)을 교리로, 조재준(趙載俊)·홍경안(洪景顔)을 부교리로, 김재순(金載順)을 보덕으로, 조준(趙㻐)을 필선으로, 홍상간(洪相簡)을 겸 문학으로, 서유녕(徐有寧)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이날 임금이 지숙(止宿)하고 이튿날에야 비로소 환궁(還宮)하였다.
3월 10일 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상소한 유생 이우보(李雨普)를 불러서 하문하였다. 이때 이우보가 이정렬(李鼎烈)의 상소로 인해 박세채(朴世采)를 위해 무함을 변명하였는데, 그 소장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현자(賢者)로서 바른 사람에게 해독을 끼치는 무리에게 오멸(汚衊)을 받은 것이 어찌 선정신 박세채가 받은 것만함이 있었겠습니까? 세상이 갈수록 명철(明哲)함이 쇠미해져 덕(德)을 아는 자가 드물어짐에 따라 어리석고 무식한 이정렬에게서 백지에 무함을 받게 되었는데, 그 말의 윤기(倫紀)가 없음이 지난번 김약행(金若行)의 소장보다 몇 갑절이 되었으니, 이것은 사문(斯文)의 큰 액회(厄會)이고 세도(世道)의 지극한 변괴(變怪)이었습니다. 당초에 철향(腏享)한 거조는 성대한 성상의 상덕(象德)으로 송(宋)나라 조정에서 이미 행한 전례(典禮)를 본받은 것이었으니, 누군들 성상께서 널리 감동하신 성의(盛意)를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종향(從享)한 이후로 세속(世俗)의 추향(趨向)이 갑자기 이상해져 추이(推移)했다느니 미봉(彌縫)했다느니 하는 등의 지목은 이미 극도로 사리에 어긋났으며, 왕안석(王安石)을 인용하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도로 해괴하고 요망스러웠는데, 신도 또한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니, 신은 그윽이 의혹됩니다. 신의 할아비 고(故) 지사(知事) 신 이세환(李世瑍)은 어릴 때부터 선정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여 가정(家庭) 사이의 일에 대해 조금 들어서 남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선배들이 죽은 후 선정의 본말(本末)을 아는 자로서 신만한 사람이 없을 듯한데, 신도 또한 시의(時議)를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구천지하(九泉之下)에 돌아가서 신의 할아비를 볼 면목이 없을 것이므로 이에 감히 급한 목소리로 슬피 호소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선정이 받은 무함을 통렬하게 분변(分辨)해 주소서."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이우보를 불러 묻기를,
"너는 누구의 족속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당저(當宁)의 사부(師傅)였던 고 지사 이세환의 손자이며, 전 한림 이극생(李克生)의 종숙(從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할아비가 선정을 흠앙(欽仰)하였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비와 다름없이 여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바로 네 할아비의 손자이니, 선정의 무함을 변명하여 너의 할아비 마음을 밝히는 것이 옳다."
하니, 대답하기를,
"선정은 대개 황극(皇極)을 주장하여 세도(世道)를 조정하고자 하였으나, 과연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내가 선정을 대우하는 까닭은 황극 때문이고, 세상에서 선정을 질시(嫉視)하는 것도 또한 황극 때문이다. 선정의 뜻을 네가 마땅히 알 것이고, 너의 할아비가 황극을 조술(祖述)한 것도 또한 마땅히 알 것이니, 모두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는데, 이우보(李雨普)가 대답하지 못하자,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아! 선정이 도덕을 수립한 것에 대해 진실로 내가 흠모(欽慕)하였는데, 그 가운데 건극(建極)은 선정이 고심(苦心)하던 것으로서 백대(百代)에 귀감(龜鑑)이 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내가 부덕(否德)함으로써 이러한 존호(尊號)를 받았으니, 마음에 항상 부끄러웠다. 나와 뜻이 같은 자는 오직 선정뿐이었으므로 뭇사람들의 의논을 물리치고 특별히 종향(從享)하도록 명하여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졌다. 그런데 이정렬·김약행은 환퇴(桓魋)037) 와 다름없었으니, 선정에게 어찌 누가 되겠는가? 지난번 신경(申暻)의 거조는 어찌 단지 그 할아비를 잊을 뿐이겠는가? 진실로 그 임금을 잊은 것이다. 아! 건곤(乾坤)이 비록 혼돈(混沌)하다 하더라도 선정을 종향한 것에 대해 누가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지금 너의 소장을 보건대, 곧 나의 옛날 스승이었던 이 세환의 손자인데 더욱이 신축년038) 겨울에 계방(桂坊)039) 의 관원으로서 성정각(誠正閣)에 입시했던 것이 아련히 마치 어제와 같다. 아! 사설(邪說)은 뜬구름과 같아 저절로 소멸되고, 도덕은 천년 후에 명성을 전할 것이니, 나는 유감이 없다. 너도 또한 무슨 원한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물러가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그 사람은 알기가 어렵다. 공(公)을 위한 것인가, 사(私)를 위한 것인가? 내가 속은 것이 많다."
하였다.
조영순(趙榮順)·이세연(李世演)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1일 갑오
정운유(鄭運維)·이한풍(李漢豊)·김광국(金光國)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2일 을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신에게 명하여 《숙야잠(夙夜箴)》을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홍낙명(洪樂命)을 이조 참의로, 이은(李溵)을 대사헌으로, 이상지(李商芝)를 대사간으로, 이익운(李翼運)을 정언으로, 정창순(鄭昌順)을 사서(司書)로, 윤봉오(尹鳳五)를 판돈녕으로, 이길보(李吉輔)를 공조 판서로, 유언민(兪彦民)을 대사성으로, 홍낙인(洪樂仁)·구상(具庠)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3일 병신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송낙(宋樂)·한광근(韓光近) 등 2인을 뽑았다.
임금이 영백(嶺伯)이 진휼(賑恤)을 베풀고 장문(狀聞)한 것을 보고 하교하기를,
"하전(廈氈)과 부옥(蔀屋)은 비록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나, 고락(苦樂)은 한결같이 어찌하여 상반(相反)되는 것인가? 몇 만의 기민(饑民)들이 눈앞에 있는 듯하여 이 마음을 억제하기 어렵다. 일찍이 원래 진휼하는 외에 음식을 주라는 일을 하교하였는데, 다른 도에서는 장문하였으나 본도에서는 장문한 것이 없으니, 우리 임금을 기다려야 한다는 탄식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열읍(列邑)에서 게을리하여 거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인가, 도신이 신칙(申飭)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인가? 비국에서 조사하여 물어 보고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4일 정유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지평 이동우(李東遇)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능역(陵役)을 봉심(奉審)한 승지를 소견하고 경외(京外)의 백성 가운데 스스로 와서 역사를 도운 자가 있었는지 물어 보니, 승지가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恩澤)이 백성들에게 두루 미친 까닭에 백성들이 스스로 와서 역사를 도왔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나를 저버리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보토(補土)하는 역사가 매우 컸는데 임금이 역사를 속히 마치고 싶어 하니, 일을 맡은 자가 술과 음식을 사용하여 경외(京外)의 한잡인(閑雜人)들을 모집하고는 스스로 왔다고 일컫고, 또 그 명수(名數)를 많이 속여서 아뢰었는데, 임금이 번번이 믿고 그렇게 여긴 것이었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시민(市民)을 소견하고 채폐(債弊)에 대해 물었다. 이때 임금이 시민을 불러 폐막(弊瘼)을 물을 때마다 혹 외상(外上)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외상은 곧 속언(俗言)에 값을 주지 않고 미리 빌려 쓴 것을 일컫는다. 임금이 이를 사핵(査覈)하게 하였는데, 모두 임금의 인척(姻戚)들이었다. 아울러 그들을 가두어 놓고 상환(償還)한 후에 풀어 주도록 명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물어 보니 모두 대답하기를,
"죄다 상환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가?"
하였으나, 믿지 못하는 뜻이 있었으니 대개 권귀(權貴)들의 속이는 것이 있을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3월 15일 무술
호랑이가 도성 안에 들어왔다.
3월 16일 기해
유생 김영(金寧) 등 11인이 그 스승 고(故)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을 위해 상소하여 억울함을 변명하니, 아울러 정거(停擧)시키도록 명하였다. 당초에 송명흠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기에 미쳐 상소하여 일을 논하였는데, 3백 적불(三百赤芾)040) 이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매우 노하여 그 초선(抄選)을 삭제(削除)하고 죄주었는데, 김영은 그의 제자이다.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기를,
"인용한 적불의 시(詩)는 어진 이와 간사한 자를 등용하고 물리치는 기미(幾微)를 범연(泛然)히 논하면서 단장 취의(斷章取義)한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니,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노하여 마침내 그 소장을 보지도 않은 채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수령(守令)은 통제사와 상피(相避)041) 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드러나게 법령(法令)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때 수령이 통수(統帥)와 친혐(親嫌)이 있는 자가 있었는데, 의거할 만한 법례(法例)가 없다는 것으로써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니, 임금이 절도사는 마땅히 통제사와 상피해야 하겠지만 수령은 상피할 것이 없다 하여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3월 17일 경자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성심(聖心)이 화락(和樂)하고 태평(泰平)한 후에야 영명(永命)을 하늘에 기원하는 근본을 삼을 수 있습니다. 원컨대 성심을 번뇌(煩惱)하지 마소서."
하였고, 대신(臺臣) 이동우(李東遇)도 또한 본원(本源)의 공부에 더욱 힘쓰고, 이미 노쇠하였다 하여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상악(李商岳)을 겸 사서로, 심수(沈鏽)를 판윤으로, 성천주(成天柱)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18일 신축
사간 신응현(申應顯)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근일에 시초에 경계하는 마음을 두지 않으시어, 상신(相臣)이 이로써 진계(陳戒)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이미 예질(睿疾)을 다스리기 위하여 진어(進御)하셨으니, 비록 진(晉)나라 원제(元帝)가 왕도(王導)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술잔을 엎은 것과 같이 하실 수는 없으나, 또한 어찌 참작해 헤아려 존절(撙節)하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이제까지의 과실을 여항(閭巷)에서는 그윽이 생각하기를 반드시 여기에 말미암지 않았음이 없다고 여길 것이니, 어찌 크게 민망스러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장신(將臣)을 조리돌림을 한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대사마(大司馬)는 진실로 군무(軍務)를 총지휘하는 중임(重任)이고 전하께서 일찍이 예우하던 사람이며, 훈련 대장은 삼군(三軍)을 지휘하여 전하께서 심복(心腹)으로 의탁하는 사람인데, 한 가지 작은 일로 인하여 갑자기 조리돌림을 하는 일을 가하셨으니, 혹 군법(軍法)을 희롱하는 데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승선을 잡아들이고 공조 낭청에게 곤벌(棍罰)을 시행한 데 이르러서는 유신(儒臣)이 이미 이를 말하였었는데, 얼마 안되어 이조 낭청이 또 곤벌을 받았습니다. 전하께서 그것이 과실이 됨을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이를 뉘우치어 깨달으셨는데, 바로 다시 전과 같았으니 빈복(頻復)하는 허물에 대하여 신은 진실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나에게 정문 일침(頂門一針)이라 이를 만하다. 아! 그 직언(直言)을 가상히 여기는데, 힘껏 반성하지 않는다면 장차 혼군(昏君)과 같은 투식이 될 것이니, 너의 면계(勉戒)로써 마땅히 억시(抑詩)042) 를 대신하여 스스로 힘쓰도록 하겠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 비답을 한번 내리면 일세(一世)를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장차 물러가려 하자, 임금이 다시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나의 과실을 마땅히 유시(諭示)하겠다. 만약 신응현의 한 상소가 없었다면, 거의 쇠잔한 세상의 혼군(昏君)이 될 뻔하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인하여 말하기를, "대신이 언관(言官)을 죄주도록 청하는 것은 후세에 법을 전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신은 항상 부끄럽고 두려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달갑게 이런 말을 하니, 혈기(血氣)가 쇠약해졌음을 볼 수 있다." 하였다.
3월 19일 임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였는데,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휘일(諱日)이기 때문이었다. 비풍(匪風)·하천(下泉)의 글을 지어 감회를 서술(敍述)하고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다.
3월 20일 계묘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간 신응현(申應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전후에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신하들을 거두어 서용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1일 갑진
목성(木星)이 저성(氐星)에 들어갔다.
임금이 능마아강(能麽兒講)043) 을 파하였다. 홍경(洪儆)에 이르러 대신이 무신년044) 에 충성을 다해 절개를 지킨 선비 홍임(洪霖)의 손자라고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아! 홍임의 손자가 이와 같이 영락(零落)하였는가?"
하고, 즉일로 승천(陞遷)시키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관서(關西)의 민간의 채전(債錢)을 감해 주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관서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나라돈[國錢]을 쓰고 오래 되어도 바치지 않으므로, 수신(帥臣)이 이로써 장문(狀聞)하여 약간의 수(數)를 감해 주기를 청했었다. 임금이 전액(全額)을 감해 주려 하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에는 힘이 족히 갚을 수 있는 자도 있을 것인데, 어찌 전액을 감해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관서의 재정은 저축이 있은 후에야 불우(不虞)에 대비할 수 있는데, 더욱이 지금 국용(國用)이 넉넉지 못하니 전액을 감해 주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맹상군(孟嘗君)은 오히려 채권(債券)을 찢어 버렸는데, 내가 어찌 10여 만 민(緡)을 아끼겠는가?"
하고, 이때에 이르러 그 반을 감해 주고 말하기를,
"반을 감해 주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김응순(金應淳)을 대사헌으로, 이인배(李仁培)를 대사간으로, 신대수(申大脩)를 집의로, 김시구(金蓍耉)를 장령으로, 박상로(朴相老)를 헌납으로, 홍언철(洪彦喆)을 정언으로, 조운규(趙雲逵)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3월 22일 을사
유생 심의지(沈儀之) 등이 상소하여 박세채(朴世采)를 종향(從享)하는 것의 잘못임을 논하였는데, 거의 수만 마디에 이르렀다. 정원에서 칙교(飭敎)가 있었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심의지가 다시 상소하여 논척(論斥)하니, 이에 여러 승지들이 진소(陳疏)하고 경출(徑出)하였다. 임금이 듣고 크게 노하여 죄다 정거(停擧)시키도록 명하고, 국자장(國子長)045) 으로 하여금 청금록(靑衿錄)046) 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게 하였다.
3월 23일 병오
정홍순(鄭弘淳)을 병조 판서로, 이성원(李性源)을 대사간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사간으로, 오현주(吳鉉胄)·안성빈(安聖彬)을 지평으로, 홍상간(洪相簡)을 헌납으로, 박사륜(朴師崙)을 정언으로, 심이지(沈頤之)를 부수찬으로, 이경옥(李敬玉)을 보덕으로, 김종수(金鍾秀)를 필선으로, 윤석렬(尹錫烈)을 문학으로, 임희간(任希簡)을 설서로 삼았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여러 능관(陵官)들을 태거(汰去)하고, 신대수(申大脩)를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신대수가 간관(諫官)으로서 입시하여 여러 능관들이 벌목(伐木)을 많이 한 바가 있는데도 예조 낭청이 적간(摘奸)하지 못하였음을 논하니, 임금이 정직하게 여겼다. 이에 여러 능관들을 죄다 가두어 놓고 그 사실을 사핵(査覈)하게 하였는데, 능졸(陵卒)과 예리(禮吏)들이 과연 뇌물을 거래하여 엄휘(掩諱)한 것이 많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여러 능관들을 죄다 태거시키도록 명하였으니, 무릇 40여 인이었다. 임금이 능침(陵寢)은 사체가 중대하다 하여 친히 정사를 행하여 차출(差出)하겠다고 명하고, 예조 낭청과 하리(下吏) 10여 인을 아울러 발배(發配)하게 하였으며, 신대수는 특별히 준직(準職)에 승진시켜 종부시 정을 제수하고 상을 주었다.
3월 24일 정미
군문(軍門)의 장교(將校)를 불러서 호랑이를 사냥할 것에 대해 물었다. 이때 기전(畿甸)에서 호환(虎患)이 있었는데, 호랑이가 여러 능에 많이 숨어 있으므로 여러 군문에서 사냥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능침은 사체가 중대하다 하여 특별히 불러 물어 본 것이었다.
3월 25일 무신
임금이 명릉(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친히 전하고, 전설사(典設司)에 두루 들렀다. 여러 능관들 가운데 차대(差代)하지 못한 자는 아울러 분간(分揀)하도록 명하였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모두 태거시키도록 명하였으나, 너무 많은 까닭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3월 27일 경술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지평 오현주(吳鉉胄)에게 삭판(削版)의 전형(典刑)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오현주가 상소하여 절선(節宣)하고 함양(涵養)하는 방도를 권면하고, 또 동가(動駕)하여 사저(私邸)에 거둥하는 일이 너무 빈번하여 밤낮으로 촉범(觸犯)하는 일이 많고, 문에 임어하여 선비들에게 시험 보이는 일이 잇달아 수응(酬應)하는 번거로움과 노고(勞苦)를 꺼리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며, 이어서 상소하기를,
"주연(胄筵)047) 에서 보익(輔翼)하는 방도는 반드시 경학(經學)의 선비 가운데 숙덕(宿德)을 갖춘 사람을 불러 맞아들여 나날이 진보하는 효과를 책임지우소서. 언로(言路)가 막힌 근심이 근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니, 원컨대 더욱 관대하게 용납하시어 와서 간언(諫言)하는 길을 넓히소서. 사문(斯文)의 시비(是非)는 한 사람이 스스로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오직 저 이응협(李應協)의 한 세대(世代)의 공의(公議)를 모르쇠 하고 감히 사의(私意)를 끼고 방자하게 종이 가득히 장황하게 써서 소장을 올린 것이 어찌 몹시 해연(駭然)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견삭(譴削)의 율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그 소장을 돌려주도록 명하고, 마침내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하교하기를,
"오현주가 지평(持平)·정언(正言)에 통청(通淸)한 것이 모두 외람되니, 곧 태거하여 바로잡음으로써 내가 호오(好惡)를 엄중히 한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또 유신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어 아뢰라 명하고, 임금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날도 오늘날과 같았다."
하고, 이어서 수백 마디의 전지(傳旨)를 내려 당습(黨習)의 경알(傾軋)로써 반복해서 계칙(戒飭)하기를,
"우리 나라의 신자(臣子)들은 나의 이 하교에 감동하여 나의 고심(苦心)을 몸받는다면 희망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3월 28일 신해
남학종(南鶴宗)을 사간으로, 이세석(李世奭)을 지평으로, 홍찬해(洪纘海)를 수찬으로, 유선양(柳善養)을 보덕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선공감의 공인(貢人)들의 채폐(債弊)에 대해 말하자, 임금이 탕척(蕩滌)하고자 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허다한 공채(公債)를 전부 잃을 수는 없다 하며 어렵게 여겨 햇수를 한정하고 수효를 정해서 징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명릉(明陵)의 보토(補土)에 역사한 사람들에게 상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임금이 보토의 역사가 호대(浩大)하여 곧 이루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역(工役)을 마쳤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마침내 문에 임어한 것이다. 원래 정한 역부(役夫) 외에 자원해 와서 부역(赴役)한 자가 4만 3천여 인이었고, 제주(濟州)의 백성들도 또한 온 자가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선조(先朝)의 혜택이 미친 때문이다."
하고, 이에 역사한 자들을 노문(勞問)하고 모두 쌀을 내려 주었다. 역사를 감독한 대장 구선복(具善復)에게 가자(加資)하고,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에게 구마(廐馬) 1필을 면급(面給)하였으며, 도청(都廳) 조완(趙)·김상옥(金相玉)과 역사를 보살핀 변흥서(卞興瑞)에게 아울러 가자하였고, 변흥서는 선지(善地)의 첨사로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서극제(徐克齊)·김도정(金道鼎)도 또한 가자하였고, 영역 부장(領役部將) 10인은 아울러 변장(邊將)을 제수하였으며, 전후에 간심(看審)하기 위해 왕래했던 승지들도 또한 호피[皐比]를 내려 주었다. 또 고양(高陽)에 전조(田租)의 반을 특별히 견감해 주게 하였는데, 본릉이 소재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3월 29일 임자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갔다. 제관(祭官)들이 모두 서계(誓戒)048) 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엄지(嚴旨)를 내리기를,
"서계에 대축(大祝)이 없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하고, 잇달아 엄교(嚴敎)를 내려 이조 낭관은 아울러 삭판(削版)하도록 명하고, 여러 대관(臺官)들도 또한 모두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이날 약방에서 입진하기를 청하여 무릇 세 번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또 힘껏 간청하니 이에 나아갔다.
이장오(李章吾)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이장오가 무신(武臣)의 종친이라 하여 마침내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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