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계축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을 행하였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혹 패초(牌招)를 어기거나 혹은 외방에 있다고 칭탁하기 때문에 수백 마디의 글을 내려 반복해서 책유(責諭)하기를,
"오늘 크게 유시한 이후로 당하 시종(堂下侍從)으로서 외방에 있는 자는 잡아다 추문(推問)하고, 바야흐로 대직(臺職)을 띤 자들은 체차(遞差)하여 그대로 가두었다가 석 달이 지난 후에 감률(勘律)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이현조(李顯祚) 등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구상(具庠)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조정(趙晸)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박필규(朴弼逵)·민홍렬(閔弘烈)을 승지로, 송낙(宋樂)을 검열로 삼았다.
임금이 한학강(漢學講) 및 이문 제술(吏文製述)을 친히 시험 보였다.
4월 2일 갑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사직 윤봉오(尹鳳五)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여 임금이 친히 손을 잡고 은유(恩諭)함이 간절하고 지극하였는데, 대개 임금이 저궁(儲宮)에 있었을 때 윤봉오가 계방(桂坊)의 관원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친히 문신에게 삭사(朔射)를 시험 보였다.
4월 3일 을묘
임금이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하였다.
4월 4일 병진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였다. 사현(沙峴)에 올라가 명릉(明陵)의 주산(主山)을 바라보며 사언시(四言詩)를 짓고, 시신(侍臣)들에게 화답(和答)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모화관에 나아가 각 영의 군병(軍兵)들에게 친히 총사(銃射)를 시험 보이고 밤이 되어 환궁(還宮)하였다.
응교 박지원(朴志源)을 발탁해서 동부승지로 삼았다.
4월 5일 정사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영백(嶺伯)의 장계(狀啓)를 살펴보고 하교하기를,
"영남은 곧 추로지향(鄒魯之鄕)049) 이므로, 동몽(童蒙) 허초흥(許初興) 등의 효자와 열부가 많았는데, 동어(凍魚)050) ·죽순(竹筍)051) 의 과장된 포장이 없었던 것도 또한 질실(質實)함을 볼 수 있다. 예조로 하여금 곧 서경(署經)052) 하게 하고, 그 가운데 탁이한 자는 먼저 정려(旌閭)하여 우리 나라에 그 효절(孝節)을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이현조(李顯祚)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북도(北道)의 개시(開市)에 대한 예를 정하였는데, 이이장(李彛章)이 상세히 정한 것에 의한 것이었다. 본도에서 간인(刊印)하여 준행(遵行)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4월 7일 기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군병들에게 무예를 시험 보이고 상을 나누어 주었다.
이휘지(李徽之)를 이조 참의로, 황합(黃柙)을 대사헌으로, 이의로(李宜老)를 대사간으로, 윤승렬(尹承烈)을 집의로, 정창순(鄭昌順)을 헌납으로, 서명응(徐命膺)을 형조 참판으로, 이익선(李益)을 문학으로, 정범조(丁範祖)를 지평으로, 양세현(梁世絢)을 충청 병사로, 이한창(李漢昌)을 남병사로 삼았다.
4월 8일 경신
김치양(金致讓)·송형중(宋瑩中)을 승지로 삼았다.
4월 9일 신유
임금이 사단(社壇)의 수개(修改)에 대한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하고, 내전으로 돌아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기백(箕伯)의 장문(狀聞)을 읽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채전(債錢)을 탕감한 것이 17만 냥에 이르도록 많으니, 전후의 혜택으로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다른 대신들도 또한 똑같은 소리로 찬양하였다.
황경원(黃景源)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아! 강도(江都)는 곧 보장(保障)의 중지(重地)이므로 가장 살펴서 선택하여야 마땅한데, 황경원은 한낱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비부(鄙夫)이지만, 묘당(廟堂)의 추천에 먼저 든 까닭에 마침내 이 직임(職任)을 주었으니, 오히려 윤탁(尹鐸)053) 의 호구(戶口)를 줄이는 정사와 군진(君陳)054) 의 봉토(封土)를 견고하게 하는 치적을 책임지울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관직은 반드시 갖추어지지 않아도 오직 마땅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하였으니, 애석하다.
이득일(李得一)을 응교로, 박상로(朴相老)를 부수찬으로, 홍인한(洪麟漢)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4월 12일 갑자
기사(耆社)에 새로 들어온 사람의 초상(肖像)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기사의 여러 당상들을 불러 본사(本社)의 연회(宴會) 때 영남인으로 나이 90여 세가 된 이산두(李山斗)란 자가 있었는지를 묻고, 화사(畵師)에게 그 초상을 그려 가지고 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함께 기사에 들어갔는데, 그 얼굴을 미처 보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했었다."
하였다.
지사 이익정(李益炡)이 영성단(靈星壇)에 제사지낼 것을 청하고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해 보건대, 남성 보제(南星報祭)의 제도가 있었는데, 송(宋)나라·명(明)나라로부터 우리 열성(列聖)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제사를 설행(設行)하였습니다. 더욱이 성수(聖壽)가 무궁한 오늘날에는 더욱 마땅히 구전(舊典)을 다스려 밝힘으로써 근본에 보답하는 뜻을 다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나로 하여금 남성(南星)에 아첨하게 하려 하는가?"
하였다. 영상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 의논이 한번 나오면 막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이것을 하지 않을 것이니, 경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사간 이현조(李顯祚)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서북인(西北人)을 시사(試射)하고 내전으로 돌아와서 유신을 불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어 아뢰라고 하였다.
4월 13일 을축
지사 이익정(李益炡)이 상소하기를,
"돌아보건대 이제 성수(聖壽)가 80에 가까워져서 경사는 숫가지[籌]를 첨가하는 데 넘쳤고, 현재의 복록을 오복(五福)을 누리는 데에 나누어 주니, 백성들은 요절(夭折)하는 사람이 없게 되어 노인으로서 1백 세에 찬 자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성수가 하늘에 가지런하고 성령(星靈)이 땅에 두루 가득하여 이 백성들을 인수(仁壽)의 교화에 노닐게 하는 것이 남성(南星)의 여휘(餘輝)가 청구(靑丘)의 한 지역에 두루 비쳐서 오늘날을 이룩한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마침 사대(賜對)하신 은혜로 인하여 말씀을 드려 규간(規諫)하는 데 덧붙이는 바입니다. 신이 아뢰는 것은 이미 근거할 바가 없지 않으니, 마땅히 보새(報賽)055) 의 의절(儀節)을 강구(講究)하여 기영(祈永)하는 방도를 도모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것을 무엇 때문에 청하는 것인가? 만고(萬古)에 어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장차 인국(隣國)에 수치를 끼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익정(李益炡)은 나이 70세가 넘고 지위는 팔좌(八座)에 이르러 뜻이 만족하고 권총(權寵)이 이미 넘치는데, 다시 무슨 구할 것이 있어서 별[星]에 제사하자는 말을 창도하여 이미 연석(筵席)에서 아뢰었다가, 다시 장독(章牘)에 올려서 복(福)을 희구하는 밑천으로 삼아 거듭 말하여 그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는 않지만, 홀로 마음에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인가? 당시 아첨하여 비위를 맞추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비록 평일에 조금 자호(自好)하고자 하는 자라 하더라도 면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으니, 이익정 같은 늙은이를 어떻게 깊이 비난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6책 112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23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註 055] 보새(報賽) : 신명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제사.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익정(李益炡)은 나이 70세가 넘고 지위는 팔좌(八座)에 이르러 뜻이 만족하고 권총(權寵)이 이미 넘치는데, 다시 무슨 구할 것이 있어서 별[星]에 제사하자는 말을 창도하여 이미 연석(筵席)에서 아뢰었다가, 다시 장독(章牘)에 올려서 복(福)을 희구하는 밑천으로 삼아 거듭 말하여 그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는 않지만, 홀로 마음에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인가? 당시 아첨하여 비위를 맞추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비록 평일에 조금 자호(自好)하고자 하는 자라 하더라도 면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으니, 이익정 같은 늙은이를 어떻게 깊이 비난할 수 있겠는가?"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친히 능마아강(能麽兒講)을 시험 보이고, 겸하여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였다.
4월 14일 병인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와 태릉(泰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하였다. 이어서 전설사에 나아가 향민(鄕民)을 불러 보리농사의 형편을 묻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홍중일(洪重一)을 특별히 승진시켜 동의금을 삼았다. 홍중일은 일을 말한 것으로 죄를 받아 폐기(廢棄)된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임금이 침체된 것을 불쌍히 여겨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대사간 이의로(李宜老)가 상소하기를,
"수어사(守禦使) 이사관(李思觀)은 인망(人望)이 본래 가벼워서 물정(物情)이 떠들썩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아장(亞長) 이홍직(李弘稷)은 본래 지망(地望)이 부족한데, 외람되게 이 직임에 통하였으니, 청컨대 발망(拔望)하소서."
하였는데, 엄지(嚴旨)를 내려 협잡(挾雜)한다고 꾸짖고 서용하지 않는 형률을 시행하게 하였다. 이사관은 처음에 등제(登第)하여 임금에게 미움받아 침체된 지 여러 해 되었는데, 오랜 후에 갑자기 총권(寵眷)을 얻어 졸연히 발탁되어 서용되니, 물의(物議)가 떠들썩하였으며, 모두 몰래 깊은 반련(攀緣)을 맺었다고 지목하였다.
4월 15일 정묘
유신(儒臣)을 불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講)하였다.
백금(百金)으로 진주(眞珠)와 자개를 사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미 문단(紋緞)을 금하고, 또 진주와 자개는 쓸모 없는 물건인데도 사치가 외람되어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다 하여 수백 마디의 엄지(嚴旨)를 내려 이를 금하도록 유시하였다.
4월 16일 무진
경조(京兆)에 명하여 사부(士夫) 가운데 기생을 데리고 사는 자를 수검(搜檢)해서 아뢰게 하였다. 당초에 사인(士人) 김기장(金基長)이 진연(進宴) 때를 당하여 의녀(醫女)를 그 집에 몰래 숨겨 두었는데, 혜민서 제조 정형복(鄭亨復)이 수색해서 찾아내어 가두었었다. 당시에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수안(囚案)을 가져다 보고 의녀의 이름이 있으므로 크게 놀라 마침내 하교하기를,
"선상(選上)된 기생들을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즉시 보내게 한 것은 종신(宗臣)과 무신(武臣)들의 혹란(惑亂)을 금한 것이었다. 이제 살펴보건대 유의(儒衣)를 입고 유건(儒巾)을 쓴 자도 또한 데리고 살고 있으니, 유생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진신(搢紳)이겠는가? 진신이 앞장서 길을 터놓으면 선비들이 이를 본받고, 중서(中庶)도 또한 이를 본받게 되어 혜민서·상의원·공조는 장차 사역(使役)할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 그것을 신칙하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드러난 자부터 시행해야 하니, 김기장에게는 결태(決笞)하여 도배(徒配)의 율(律)을 베풀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한성부에 명하여 기생을 데리고 사는 자를 수검(搜檢)하게 하고, 또 잇달아 칙교(飭敎)를 내려 이를 재촉하였으니, 이에 부관(部官)들이 두려워하여 사방으로 나가 수포(搜捕)하였다.
밤 삼경(三更)에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기생을 데리고 살던 조관(朝官)과 유생들을 잡아들여 혹은 삭직(削職)시키고 혹은 방축(放逐)시켰으며, 무인(武人)과 중서(中庶)는 결곤(決棍)하고 혹 가형(加刑)하였는데, 여러 군문(軍門)과 각사(各司)의 관리 및 하례(下隷)들이 이로 인해 죄를 얻은 자가 매우 많았다. 또 오부(五部)의 관원들을 남간옥(南間獄)에 가두도록 명하였는데, 대개 기생을 데리고 사는 자들을 현고(現告)한 것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또 포청(捕廳)에 명하여 범야(犯夜)한 사람들을 붙잡게 하고, 붙잡지 못한 자는 군율(軍律)을 적용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니, 이에 밤에 붙잡힌 자들이 매우 많아 형배(刑配)가 서로 잇달았다.
4월 17일 기사
무신들의 삭사(朔射)를 친히 시험하였다.
김시묵(金時默)을 병조 판서로, 신회(申晦)를 수어사로, 김효대(金孝大)를 총융사로 삼았다.
이익원(李翼元)·이성규(李聖圭)·홍지해(洪趾海)·이재간(李在簡)·김치양(金致讓)을 승지로 삼았다.
옥당(玉堂) 이득복(李得福) 등 6인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밤에 건명문에 임어하신 일은 중도에 지나친 과실이고, 남간옥에 오부의 관원들을 가둔 것은 이미 해당 율이 아니었습니다. 당당한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써 아래로 유사(有司)의 일을 행하시면서 거조(擧措)가 급작스럽고 경색(景色)이 창황(蒼黃)하였으니, 이는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뜻에 흠결(欠缺)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절선(節宣)하는 방도에 어찌 손상을 끼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근일에 윤음(綸音)을 내리실 때 공평하고 용서하시는 데 따르시는 일이 많았고, 정령(政令)의 사이에 중화(中和)에 적합하도록 힘쓰시니 보고 듣는 자들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얼마 안되어 다시 이러한 거조가 있으니, 이것은 신들이 전하를 위해 몹시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용히 심사 숙고하셔서 마음을 돌이켜 개도(改圖)하시어 오래지 않아 회복한다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처분(處分)은 지극히 온당한 것이었는데, 나에게 과실이 있었는가? 무슨 회복할 일이 있단 말인가?"
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하도록 명하고, 감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잇달아 내리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잇달아 서로 아뢰어 호소하고 또 약을 올리게 하기를 청하였다. 천위(天威)가 조금 풀리자 인하여 웃으며 묻기를,
"경들도 또한 데리고 사는 기생이 있는가?"
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있습니다."
하니, 마침내 햇수를 한정해서 금령(禁令)을 설치하고 진신(搢紳)과 조관(朝官)들은 모두 자현(自現)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무릇 경조(京兆)와 오부(五部)의 관원으로 기생의 일로 인해 죄를 받은 자들을 아울러 분간(分揀)하도록 명하였다.
경조(京兆)에 명하여 여섯 유신(儒臣)의 가노(家奴)를 잡아들여 장형(杖刑)을 베풀어 유신들이 첩을 데리고 사는지의 여부를 핵실(覈實)하게 하고, 이어서 이득복(李得福)을 찬배(竄配)하라는 명을 내렸다.
4월 18일 경오
임금이 상참을 행하였다. 기생을 데리고 살던 사람들이 자수한 경조의 초기(草記)를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박상로(朴相老)는 곧 박호원(朴好源)의 아들로서 그 아비가 바야흐로 외읍(外邑)에 있는데, 어찌 데리고 사는 기생이 없다고 하면서 감히 임금을 속인단 말인가? 먼저 투비(投畀)의 형률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박상로는 이득복(李得福)의 소하(疏下)이었다. 장령 이태정(李台鼎)·정언 안성빈(安聖彬)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상순(鄭尙淳)을 대사헌으로, 이수득(李秀得)을 대사간으로, 홍상직(洪相直)을 집의로, 신대수(申大脩)를 사간으로, 이태정(李台鼎)·주형질(朱炯質)을 장령으로, 김서구(金敍九)·이종영(李宗榮)을 지평으로, 홍응보(洪應輔)를 헌납으로, 강유(姜游)·안성빈(安聖彬)을 정언으로, 서유량(徐有良)을 교리로, 조종현(趙宗鉉)을 수찬으로, 윤석렬(尹錫烈)을 부수찬으로, 홍낙신(洪樂信)을 사서로, 홍중일(洪重一)을 좌윤으로 삼았다.
서명신(徐命臣)을 발탁해서 판윤으로 삼았는데, 임금이 그의 수염이 몹시 흰 것을 보고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4월 19일 신미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이득복(李得福)의 소하(疏下)인 네 사람 홍수보(洪秀輔)·조재준(趙載俊)·홍경안(洪景顔)·홍찬해(洪纘海)를 산배(散配)하도록 명하였다. 또 오부(五部)의 관원들을 잡아들여 각각 형신(刑訊)을 가하여 산배하도록 명하였는데, 기생을 데리고 사는 사람들을 수색해서 바친 것이 적기 때문이었다. 또 잇달아 엄지(嚴旨)를 내려 1백 인을 채워 수색해 바치게 하였다. 이에 경조(京兆)의 오부(五部)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엿보아 체포하고 듣는 대로 따라서 아뢰니, 그 이름이 조적(朝籍)에 매어 있는 자들은 절도 정배(絶島定配)하되, 배도(倍道)하여 압송하게 하였다. 판윤 서명신(徐命臣)·좌윤(左尹) 김종정(金鍾正)을 직산현(稷山縣)에 투비(投畀)하게 하였는데, 기생을 데리고 사는 사람에 대해 사핵(査覈)하는 일을 지체한 때문이었다.
사간 신대수(申大脩)를 진도군(珍島郡)에 찬배(竄配)하여 서민(庶民)을 삼게 하였다. 신대수가 상소하기를,
"유신의 종을 곤장을 때려 신문하여 없는 사실을 억지로 사핵(査覈)하게 하는 것은 바로 유신에게 곤장을 때리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신하를 예우하여 부린다는 도리를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말하기를,
"여섯 명의 옥에 가둔 신하들은 방자하고 무엄하였으므로, 비록 신문(訊問)하더라도 불가함이 없는데, 그 종을 곤장을 때려 신문한 것도 또한 참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상소하니, 이것은 사대부 집안의 가노(家奴)에게 아첨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재간(李在簡)을 제수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삼고, 이성원(李性源)·이해중(李海重)·박필규(朴弼逵)·박지원(朴志源)을 승지로 삼았다.
4월 20일 임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기생을 데리고 살던 사람들을 잡아들여 크게 처분(處分)을 가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더욱 격뇌(激惱)하여 잇달아 엄지(嚴旨)를 내려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으로서 진신(搢紳)이라고 명칭하는 자들을 대령(待令)하도록 명하고, 여러 시종(侍從)들을 금부(禁府)에 내려 자수(自首)하게 하였는데, 자수한 10여 인은 가두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미처 자수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가쇄(枷鎖)를 씌워 남간옥(南間獄)에 가둔 다음 기고(旗鼓)·전배(前排) 및 형구(刑具)를 갖추어 혹은 군법에 의거하여 조리돌림을 하였으며, 혹은 곤장을 때려 형벌을 가하고 모두 연해(沿海)와 절도(絶島)에 충군(充軍)시켰다. 그리고 범야(犯夜)한 사람들 또한 기생을 데리고 살던 사람들과 똑같이 결박(結縛)하여 가쇄를 씌웠다. 대사간 이의로(李宜老)가 여러 날 지체했다가 자수한 까닭에 임금이 승지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의로는 어떤 사람을 논했었는가?"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이사관(李思觀)을 논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사관을 욕보일 줄 알면서 군부(君父)를 알지 못하는가? 네가 금수(禽獸)가 아니라면, 근일의 광경을 보고 이제야 비로소 자수한단 말인가?"
하고, 두 차례 형신을 가하여 대정현(大靜縣)에 찬배(竄配)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장차 기생을 데리고 살던 사람들을 형신하고자 홍봉한에게 이르기를,
"경은 징토(懲討)하기를 청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마땅히 징토하기를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이의로를 형신하기에 이르러 홍봉한이 한마디 말도 없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이 과연 성실하였는가?"
하고, 갑자기 파직하도록 명하였으며, 여러 대신들도 죄가 홍봉한과 똑같다 하여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라고 하였다가, 임금이 마침내 그 명을 정침(停寢)하였다. 홍봉한과 여러 대신들이 다시 들어와 울면서 약을 올리고 진후(診候)하기를 청하며 여러 차례 간절하게 청하니, 비로소 허락하였다.
4월 21일 계유
특별히 정홍순(鄭弘淳)에게 호조 판서를 제수하고, 이창수(李昌壽)를 이조 판서로, 이미(李瀰)·이한풍(李漢豊)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광순문(光順門)에 나아가 옥에 가두었던 여러 시종들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무릇 40여 인이었다. 모두 목을 묶어 앞에 잡아다 엎드려 놓고 형장(刑杖)을 벌여 위세를 보이면서, 하교하기를,
"이는 충신과 역적을 판단하는 날이다. 자수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일어서도록 하라."
하였는데, 안성빈(安聖彬)이 일어서서 말하기를,
"신은 범한 바가 있지만, 아들이 있으므로 경조(京兆)에서 자수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집(安𠍱)은 아들이 있다."
하고, 곧 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권극(權極)이 일어서자, 임금이 말하기를,
"무상(無狀)하다. 이것이 삼백 시종(三百侍從)이라고 한 것인가? 너는 바로 역적이다. 세도(世道)를 위해 한 난적(亂賊)을 제거해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너의 정상은 만고에 소인(小人)이다. 만약 너를 살려 둔다면 언제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르니, 비록 효시(梟示)하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다. 너의 말 때문에 남병사(南兵使) 이하 몇 사람이나 죽게 되었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40명의 시종 가운데 권극의 무상함을 보고 한 사람도 징토(懲討)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이에 일제히 대답하기를,
"이와 같은 놈이 있어서 성상께서 번뇌(煩惱)하시기에 이르렀으니, 그 죄는 심상운(沈翔雲)·심악(沈)보다 더함이 있습니다. 청컨대 빨리 방형(邦刑)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안상(案床)을 치고 말하기를,
"너희 무리들이 과연 이륜(彛倫)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가? 권극을 징계삼아 삼가서 다시는 시끄럽고 떠들썩한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아울러 석방하였다. 권극을 잇달아 두 차례 형벌을 가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찬배하였는데, 며칠이 지나 권극이 길에서 죽었다. 대개 권극이 전에 대관(臺官)이 되었을 때 금주령(禁酒令)을 범하였다 하여 남병사 윤구연(尹九淵)을 죽일 것을 청하였는데, 윤구연이 죽은 후부터 세상에서 권극이 화심(禍心)을 품었다고 지목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권극이 형벌을 받아 죽으니, 비록 그 죄가 죽이는 데 해당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이를 흔쾌하게 여겨 말하기를, ‘천도(天道)가 좋게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행원(李行源)을 사간으로, 이치중(李致中)을 교리로, 서유린(徐有隣)을 수찬으로, 안윤행(安允行)을 형조 판서로, 남태회(南泰會)를 판윤으로, 신회(申晦)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하였다.
4월 22일 갑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제갈 무후(諸葛武侯)·악무목(岳武穆)·문문산(文文山)의 제문(祭文)을 짓고 말하기를,
"무릇 존경(尊敬)하는 일에 대해 내가 감히 누워서 수응(酬應)한 일이 없는데, 이 제문을 어찌 누워서 불러 쓰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관(冠)을 찾아서 쓰고 일어나 앉았다. 이어서 운관(芸館)에 명하여 《정충록(精忠錄)》을 인간해서 영유현(永柔縣) 와룡사(臥龍祠)에 보내어 간직하게 하고, 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영백(嶺伯)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고 선전관 조맹도(趙孟道)의 집에 특별히 하사한 《정충록》이 지금까지 있다는 것을 듣고, 이를 기이하게 여겨 가지고 와서 보이도록 명하고,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4월 23일 을해
특별히 구윤명(具允明)에게 병조 판서를 제배(除拜)하고, 유한소(兪漢蕭)를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정운유(鄭運維)·조덕성(趙德成)·홍양한(洪良漢)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패초(牌招)를 어긴 장령 이태정(李台鼎)을 관동(關東)에 투비(投畀)하고, 주형질(朱炯質)을 호서(湖西)에 투비하라고 명하였다. 정언 강유(姜游)가 전계를 거듭 아뢴 후 권극(權極)을 토죄(討罪)하기를 청하는 거조(擧措)가 없었다 하여 먼저 체차(遞差)시켜 영구히 서인(庶人)을 삼도록 명하고, 입시한 유신(儒臣) 이치중(李致中)에게 집의를 제수하였다. 이치중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권극(權極)이 전후에 다른 사람을 무함하고 해친 일은 하나만이 아닙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국(推鞫)하여 법을 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이미 아뢰었다. 지금 대신(臺臣)이 청한 것은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마는, 작처(酌處)한 것은 뜻한 바가 있는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집의 이치중(李致中)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사관(李思觀)을 형조 판서로, 신경준(申景濬)을 사간으로, 서병덕(徐秉德)·안정인(安正仁)을 장령으로, 홍상성(洪相聖)·신익빈(申益彬)을 정언으로, 홍낙신(洪樂信)·김기대(金基大)를 수찬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예문 제학으로, 신회(申晦)를 우참찬으로 삼았다.
4월 27일 기묘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문신은 한학(漢學)을 강(講)하고, 무신은 능마아(能麽兒)를 강하며, 유신은 《심경(心經)》을 강하도록 명하였다. 동교(東郊)·서교(西郊)의 금군과 각도의 승호 포수(陞戶砲手)를 소견하여 보리 농사의 형편에 대해 물었다.
이휘지(李徽之)를 승지로 삼았다.
4월 29일 신사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경(上京)한 수령을 소견하고 농사일이 바야흐로 한창이라 하여 신칙해서 임소(任所)에 돌아가게 하였다.
홍준해(洪準海)를 대사간으로, 이정오(李正吾)를 사간으로, 조중명(趙重明)을 헌납으로, 임해(任瑎)·조석목(趙錫穆)을 정언으로, 이육(李堉)을 집의로, 한집(韓鏶)·성윤검(成胤儉)을 장령으로, 이익선(李益烍)·김복휴(金復休)를 지평으로, 김서구(金敍九)를 사서로, 이양수(李養遂)를 교리로, 박사륜(朴師崙)을 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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