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임오
일식(日食)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이어서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구식(救食)056) 을 행하였다. 일찍이 임술년057) 에 일식하였을 때 임금이 친히 구식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이를 행한 것이었다. 관상감 제조 남태제(南泰齊)·일관(日官) 안국빈(安國賓)은 모두 나이 70세가 넘었는데, 임금이 기이하게 여겨 특별히 호피(虎皮)와 궁자(弓子)를 내려 주었다.
5월 2일 계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친히 문신과 무신에게 강경(講經)을 시험 보였다.
5월 4일 을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랑(月廊)에 나아가 승지를 종묘(宗廟) 및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에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하고, 태묘 각 능전(陵殿)의 단오제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당시에 차출받은 여러 헌관(獻官) 가운에 미처 오지 않은 자가 있었으므로, 임금이 친히 채워서 차출하고 묻기를,
"문신이 어찌하여 이와 같이 구간(苟簡)한가?"
하니, 승지가 대답하기를,
"향리(鄕里)에 있는 자와 외임(外任)에 있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록(國祿)을 먹으면서 향관(享官)을 피하는 것이 옳은가? 시종(侍從)으로 출재(出宰)058) 한 자들을 아울러 해임시켜 배도(倍道)하여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친히 정사를 행하여 모두 무신으로 대신 차출하니, 수령으로 체차된 자가 무릇 59인이었다.
5월 5일 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특별히 형조 참판 서명응(徐命膺)에게 충청 수사를 제수하였는데, 서명응이 강교(江郊)에 있으면서 명을 받들지 않은 까닭에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명응으로 하여금 당일에 사조(辭朝)하고 삼배도(三倍道)하여 부임하게 하였다. 홍낙인(洪樂仁)의 비국(備局) 유사(有司)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였으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부자(父子)가 한 관사(官司)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말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다른 대신들에게 물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법에 있어서는 응당 피혐(避嫌)한 전례가 없지만 수상이 이미 아뢰었으니, 정식(定式)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홍낙인을 체차하도록 명하고, 아비가 상직(相職)에 있으면 체차를 허락한다는 것으로써 드러나게 법령(法令)을 삼게 하였다. 집의 이육(李堉)·사간 이정오(李正吾)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관경대(觀耕臺)에 나아가 보리 베는 것을 살펴보고, 친히 맥상(麥箱)을 받아 돌아와서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바치고, 밤이 되어 환궁(還宮)하였다.
5월 6일 정해
임금이 반유(泮儒)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십잠(十箴)을 강하였다.
윤동섬(尹東暹)을 도승지로 삼았다.
5월 7일 무자
임금이 유신을 불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정관정요》로 인하여 강개(慷慨)해졌으니, 어떻게 감히 노쇠하다 하여 면려(勉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일 빈대(賓對)를 행할 것이니, 입시하는 사람들은 옛 사신(史臣)이 왕명(王命)을 대양(對揚)할 것을 생각하여 상홀(象笏)에 써 올렸던 뜻을 본받아 각각 수차(袖箚)를 써 가지고 와서 염희(恬嬉)하는 습관을 시원스럽게 씻음으로써 당(唐)나라 위징(魏徵)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진신(搢紳)들을 비웃지 않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위징의 십점소(十漸疏)059) 는 비록 지나친 듯하나, 성실한 것이었다. 옛날에 경강(敬姜)이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옥토(沃土)에 거주하는 백성이 재주가 없음은 음란하여 그러하고 척토(瘠土)에 거주하는 백성으로 의로움을 향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수고하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백성들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임금이겠는가? 아! 태종(太宗)은 나이 겨우 18세에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며 간난(艱難)함을 갖추 겪었고 29세에 제위(帝位)에 올랐는데, 나는 비록 태종이 친히 시석을 무릅쓴 것과 다르겠으나, 무신년060) 에 난적(亂賊)을 징토(懲討)한 것은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아! 당나라 태종은 그 신하들이 훌륭했는데, 아! 부덕(否德)한 내가 또한 어떻게 이에 견주겠는가? 몇 년 동안 고심(苦心)하여 다스리고자 해도 뜻에 따르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이 모두 직무에 게을리하여 모든 법도가 해이(解弛)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마음속으로 항상 두려워하는 바이다. 아! 대소 신공(臣工)들은 부효(浮囂)함을 씻어 조경(躁競)을 억제하며,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여 나의 모정(暮政)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5월 8일 기축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임금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모두 수차(袖箚)를 가지고 왔는가?"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노쇠하나 마땅히 더욱 면려(勉勵)할 것인데, 내가 만약 실천하지 못하면 고굉(股肱)의 신하들이 부족함을 도와 주고, 경들이 만약 미치지 못하면 내가 마땅히 면칙(勉飭)할 것이니, 오늘 수작(酬酌)한 것은 상세히 기주(記注)에 실어 일세(一世)의 귀감(龜鑑)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맨 먼저 말하기를,
"백성이 곤췌(困瘁)한 것은 오로지 방채(放債)로 말미암았으니, 청컨대 공채(公債)·사채(私債)는 이식을 제한해서 10분의 1, 2로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도성 안의 도랑[川渠]은 돌을 쌓아 무너지는 것을 막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어렵게 여겨 내버려 두도록 명하였다. 또 말하기를,
"도성을 지키는 방책은 소금을 축적하고 숯[炭]을 묻어 두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마땅히 각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힘에 따라 조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수상이 차자로서 모두 진달하였으니, 경들도 또한 말하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수상이 이미 죄다 진달하였으므로, 신들은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도 또한 아울러 들어왔는데, 정언 임해(任瑎)가 말하기를,
"무안 현감(務安縣監) 정택수(鄭宅洙)는 사람됨이 광망(狂妄)하여 가는 곳마다 탐람(貪婪)하였으며, 일찍이 어사의 계사(啓辭)에도 들었으니, 개차(改差)함 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5월 9일 경인
임금이 헌릉(獻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하였다.
5월 10일 신묘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황단(皇壇)에 망배(望拜)하였다. 시임·원임 대신들에게 말을 하사하고, 그 나머지 종신(從臣)들에게 차등 있게 물건을 하사하였다.
엄인(嚴璘)·김광국(金光國)·이의철(李宜哲)·이한풍(李漢豊)·어석정(魚錫定)·서명선(徐命善)을 승지로 삼았다.
영남(嶺南)의 유생 1천 8백 인이 진소(陳疏)하여 《유곤록(裕昆錄)》을 훼파(毁破)하기를 청하고, 또 후원(喉院)에서 즉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배척하니, 여러 승지들이 진소하고 경출(徑出)하였다. 임금이 진소한 유생들은 10년을 한정해서 정거(停擧)시키고, 모두 즉일로 한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5월 11일 임진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하황은명(荷皇恩銘)을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응제(應製)하여 사각(史閣)에 소장하도록 명하였다.
5월 12일 계사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에게 윤강(輪講)하도록 명하였다.
송형중(宋瑩中)을 대사헌으로, 신사운(申思運)을 사간으로, 장지풍(張志豊)을 경기 수사로, 김상옥(金相玉)을 전라 좌수사로, 이방일(李邦一)을 경상 우병사로, 이한풍(李漢豊)을 경상 좌수사로, 윤동승(尹東昇)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3일 갑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어제(御製) 《속유곤록(續裕昆錄)》을 운각(芸閣)에 명하여 간인(刊印)해서 사고(史庫) 및 정원·홍문관·예문관·춘방(春坊)에 소장하게 하였다. 장령 성윤검(成胤儉)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어석정(魚錫定)·남현로(南玄老)·이보관(李普觀)을 승지로 삼았다.
조완(趙)을 경기 수사로, 이관하(李觀夏)를 경상 좌수사로 삼았는데, 장지풍(張志豊)·이한풍(李漢豊)이 정세(情勢)로 정체(呈遞)061) 한 때문이었다.
5월 14일 을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이어서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향민(鄕民)을 불러 보리 농사의 형편을 물어 보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근일에 대신이 아뢴 외에 모두 묵묵히 말이 없고, 대신(臺臣)들은 단지 고지(故紙)만 아뢰고 있으니, 한심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 임금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끌어대어 이미 여러 신하들을 책면(責勉)하였었는데, 이날 또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장령 성윤검(成胤儉), 헌납 조중명(趙重明)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석강에 나아갔다. 유신과 승지·사관에게 명하여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강하게 하였다.
전광훈(田光勳)에게 특별히 경상 우병사를 제수하였다.
5월 15일 병신
임금이 효장묘(孝章廟)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였다. 임금이 반행(班行)을 돌아보고 하교하기를,
"임금이 동가(動駕)하였는데, 백관(百官)이 편한 것만 취하여 오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 거안(擧案)062) 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효장묘(孝章廟)와 의소묘(懿昭廟)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이어서 경숙(經宿)하였다.
5월 16일 정유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5월 17일 무술
임금이 저경궁(儲慶宮)과 육상궁(毓祥宮)의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서 친히 전하였다. 각도의 승호 포수(陞戶砲手)를 불러들여 농사 형편을 물었다.
5월 19일 경자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대관(大官)·소관(小官)을 막론하고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은 80세에 가까운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로써 스스로 면려해야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생민(生民)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매어 있으니, 전최(殿最)063) 를 엄중히 밝히는 뜻을 신칙(申飭)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수령으로서 하등(下等)에 있는 자는 비록 사전(赦典)을 거쳤다 하더라도 외임(外任)에 복직(復職)하는 데 이르러서는 2년으로 준기(準期)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참찬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중외(中外)의 두곡(斗斛)이 크고 작기가 각각 다르니, 신칙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남태회(南泰會)가 말하기를,
"외방의 살옥(殺獄)에 대해서는 매월 세 번씩 동추(同推)064) 하는 법을 거행하도록 신칙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훈련 대장 이장오(李章吾)가 말하기를,
"각도의 환곡(還穀) 수만 석을 도성에 옮겨서 들여놓고, 그 모곡(耗穀)의 남는 것을 취하여 군문에서 넉넉하게 쓰는 방도로 삼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대신들에게 두루 물어 보고 소요(騷擾)스러운 데 이르기 쉽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과 경재(卿宰)들이 아뢰기를 마치자, 임금이 또 동반(東班)·서반(西班)에 명하기를,
"소회(所懷)가 있는 자는 나와서 아뢰도록 하라. 아뢰지 않으면 마땅히 죄주겠다."
하였다. 이에 무관(武官)·음관(蔭官)의 여러 사람들이 각각 앞으로 나와 일을 아뢰었는데, 자질구레한 말이 많았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단양 군수(丹陽郡守) 조정세(趙靖世)는 오로지 탐람(貪婪)만 일삼고 있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돌아온 동지 정사(冬至正使)가 방편에 따라 응접(應接)하지 못하여 피중(彼中)의 군졸들이 와서 좌교(坐轎)를 범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정사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烜)을 파직하소서."
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교리 서유량(徐有良)이 산버들로 참외를 싼다는 뜻065) 을 생각하여 상하가 교태(交泰)하는 도리에 더욱 힘씀으로써 초야(草野)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남는 탄식이 없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체(大體)는 옳다."
하였다. 중관(中官) 김수현(金壽賢)을 잡아다 처치하도록 명하였다. 김수현은 용동궁(龍洞宮)을 주관하는 내시로서, 간사한 백성과 간계(奸計)를 부려 부평부(富平府)에 폐기된 제언(堤堰)이 있다고 거짓 일컬어 계달(啓達)해서 절수(折受)한 다음 기경(起耕)하여 이익을 노리는 계책을 삼으려 하였는데, 제언 아래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 일제히 비국에 호소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른바 물이 마른 제언이라고 일컬은 것은 모리배(牟利輩)의 간사한 말이다. 진고(陳告)한 사람을 당일에 엄중히 형신(刑訊)하여 해도(海島)에 정배하고, 경향(京鄕)에서 화응(和應)한 사람들을 추조(秋曹)로 하여금 곤장을 쳐서 태거(汰去)하도록 하라. 그리고 차지 중관(次知中官)을 잡아다 처치하되, 이후 만약 다시 이런 명이 있을 경우 중관은 장배(杖配)하는 율(律)을 시행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심욱지(沈勗之)를 승지로 삼았다.
5월 20일 신축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삭사(朔射)를 행하였다.
홍양한(洪良漢)을 대사간으로, 신광리(申光履)를 장령으로, 임희간(任希簡)을 정언으로, 심이지(沈頤之)를 수찬으로, 조종현(趙宗鉉)을 교리로, 홍낙성(洪樂性)을 우참찬으로, 구윤옥(具允鈺)을 우윤으로 삼았다.
5월 21일 임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영광 군수(靈光郡守) 권급(權伋)은 물의(物議)가 합당치 못하게 여기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민백상(閔百祥)은 관서(關西)의 도신이 되었을 때 감영(監營)에 칙고(勅庫)를 설치하였는데, 규모가 고르고 가지런하여 관민(官民)이 모두 힘을 입었습니다. 해서(海西)에도 또한 계속해서 행한다면, 그 이로움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본도의 도신이 이미 요량하여 청한 바가 있으니, 청컨대 관서에 의거해서 하되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정홍순(鄭弘淳)과 비국 당상 이담(李潭)이 내외(內外)를 소상하게 알고 있으니, 속히 성취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용호영 대장(龍虎營大將) 이은춘(李殷春)을 잡아들이게 하고 삭직하였으며, 병조 판서 구윤명(具允明)과 입직한 유신을 파직하게 하였다. 당시에 궐직(闕直)하는 금군(禁軍)이 많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모두 곤장(棍杖)을 쳐서 충군(充軍)하게 하고, 금군장은 절도(絶島)에 충군시켰으며, 이은춘과 구윤명은 검칙(檢飭)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별히 파직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신은 여러 사람에게 군율(軍律)을 청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하게 한 것이었다.
민백흥(閔百興)을 대사헌으로, 정운유(鄭運維)를 대사간으로, 이사조(李思祚)를 정언으로, 이치중(李致中)을 교리로, 이택수(李澤遂)를 수찬으로 삼았다.
김시묵(金時默)에게 병조 판서를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5월 22일 계묘
임금이 덕유당(德游堂) 남쪽 뜰에 나아가 봉조하 홍상한(洪象漢)의 치사 교서(致仕敎書)를 선포하였다. 홍상한의 병세가 심하자, 임금이 그 아들 홍낙성(洪樂性)을 불러 물어 보았고 종제(從弟) 홍봉한(洪鳳漢)이 또 그를 위해 휴치(休致)를 청하니, 임금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이날 선마(宣麻)066) 는 홍낙성으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였다.
이세연(李世演)을 승지로 삼았다.
5월 23일 갑진
임금이 건원릉(健元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에서 지영하였다. 이어서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금려(禁旅)를 위문하고, 각도의 승호군(陞戶軍)을 불러 농사 형편을 물어 본 다음 내전으로 돌아와, 유신을 불러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읽었다.
5월 24일 을사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의 영수각(靈壽閣)에 전배(展拜)하였다. 기신(耆臣)들을 소견하고 어제(御製) 칠언시(七言詩) 1구(句)를 편액(扁額)을 만들어 걸게 하였다.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가 밤이 되어 환궁하였다.
5월 25일 병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기로(耆老)에게 문과·무과를 설행하여 문과에서 윤득성(尹得聖) 등 5인을 뽑고, 무과에서 김태상(金泰尙) 등을 뽑은 다음, 즉일로 방방(放榜)하게 하였다. 그리고 윤득성에게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제수하고, 김태상에게 첨지를 제수하였다. 80세 이상 된 사람들에게 표리(表裏) 1습을 하사하고, 70세 이상 된 사람에게 명주[紬] 1필을 하사하였으며, 80세가 된 사람들에게도 또한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좌승지 이의철(李宜哲)을 승진시켜 행 도승지(行都承旨)를 삼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의철은 승지가 되었는데, 임금이 홍봉한에게 이르기를,
"이의철은 고서(古書)를 많이 읽었고, 성품이 또 조용하고 담박한데, 침체(沈滯)된 지 오래 되었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독서한 사람으로서 독서에 대한 보답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기로과(耆老科)를 설행하고 이의철을 시소 승지(試所承旨)를 삼으라 명하고 이미 방방(放榜)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과거는 마땅히 특이(特異)한 은전(恩典)이 있어야 한다."
하고, 마침내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또 좌통례 신광리(申光履)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신대현(申大顯)을 경상 좌병사로, 안종규(安宗奎)를 황해 병사로 삼았다.
5월 26일 정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갔다. 기로과(耆老科)의 사은(謝恩)하는 자리에 친림(親臨)하여 칠언시(七言詩) 1구를 짓고, 문과 5인으로 하여금 화답(和答)하여 올리게 한 다음 내전으로 돌아왔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또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연화방(蓮花坊)의 기민(耆民)을 소견하여 쌀을 차등 있게 내려 주고, 말하기를,
"국초(國初)에 도읍을 세웠을 때 연화방에 머무셨는데, 이것은 감구(感舊)하는 뜻이다."
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7일 무신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친히 명나라 사람들의 자손에게 사예(射藝)를 시험 보이고 차등 있게 상을 나누어 주었다.
5월 28일 기유
제주 목사(濟州牧使) 남익상(南益祥)을 특별히 파직하게 하였다. 남익상이 밀·보리가 흉년이 든 실상을 아뢰고, 또 진곡(賑穀)을 구획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올해는 보리 농사가 크게 풍년이 들었는데, 본주가 이와 같다고 하니 만약 외람되게 사치함이 없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였다면, 반드시 민울(悶鬱)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하고, 판부사 김치인(金致仁)을 소견하여 계본을 보이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보리농사가 비록 흉년이 들었다 하나, 조금 대풍(大豊)을 거쳤으니, 살년(殺年)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듯합니다. 또 인구를 계산(計算)하여 곡식을 청하였는데, 그사이에 어찌 빈부(貧富)에 대해 말할 것이 없겠습니까? 보고한 것은 진실로 지나칩니다."
하니, 이에 특별히 남익상을 파직한 것이다. 어사 박사륜(朴師崙)을 보내어 본주를 염탐(廉探)하게 하였으며, 9월 이전에는 공헌(貢獻)하는 물건들을 일체 아울러 정봉(停封)하도록 명하였다. 그 후에 대신이 공마(貢馬)는 군병이 타는 것에 관계된다 하여 전례에 의거하여 진헌(進獻)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다시 기로과(耆老科)를 설행하였다. 당초에 기로과를 과차(科次)하였을 때 황준(黃晙)이라는 자가 나이 76세로서 격식에 어긋나므로 뽑아버렸는데, 임금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다시 기로과를 설행하도록 명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황준이 수위를 차지하니, 그 지차(之次)와 아울러 두 사람에게 급제를 내려 주었다.
신이 살펴보건대, 세도(世道)가 어긋나고 무너진 것은 오로지 과거가 빈번하게 설행된 것으로 말미암는데, 심지어 이틀 동안 잇달아 기로과를 설행하게 되었으니, 더욱 탄식할 만한 일이다.
5월 29일 경술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기로 문신(耆老文臣) 당상관·당하관에게 제술(製述)을 설행하고 ‘노인성(老人星)’으로 명제(命題)를 삼았는데, 과차(科次)를 매겨 수위를 차지한 허우(許宇)에게 가자(加資)하여 동중추를 제수하게 하였고, 지차에게는 말을 주게 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경묘(肇慶廟)의 전최(殿最)는 청컨대 전라 감사로 하여금 다른 능전(陵殿)의 예에 의거하여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특별히 호피(虎皮)를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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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실록112권, 영조 45년 1769년 6월 (0) | 2025.10.14 |
| 영조실록112권, 영조 45년 1769년 4월 (0) | 2025.10.14 |
| 영조실록112권, 영조 45년 1769년 3월 (1) | 2025.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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