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2권, 영조 45년 1769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1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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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신해

한광근(韓光近)을 검열로 삼았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숙묘(肅廟)의 기신제(忌辰祭)가 이달에 있다 하여 이날부터 탕제를 들지 않으려 하니, 내국 부제조 이의철(李宜哲)이 말하기를,
"이는 효도의 소절(疏節)입니다."
하였고,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은 말하기를,
"성궁(聖躬)을 보호하셔서 오르내리시는 영령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금에 어찌 나이 76세가 되어 이날을 당한 자가 있었는가? 경들은 그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을 소견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태묘(太廟)의 섭사(攝事) 때 작은 뱀이 지게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자, 임금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는 재변(災變)이다."
하였는데, 홍봉한이 말하기를,
"우연히 그러하였을 뿐이니, 근심하실 것이 못됩니다."
하고, 널리 고사(古事)를 이끌어 비유하여 풀이하니, 임금의 뜻이 조금 진정되었다.

 

6월 4일 갑인

특별히 이의철(李宜哲)에게 공조 참판을 제수하고, 정상순(鄭尙淳)을 도승지로, 홍중일(洪重一)을 대사헌으로, 이육(李堉)을 집의로, 정경서(鄭景瑞)를 장령으로, 이사조(李思祚)를 지평으로, 조중명(趙重明)을 헌납으로, 남주로(南柱老)·이익선(李益)을 정언으로, 김복휴(金復休)를 지평으로, 김종수(金鍾秀)를 교리로, 홍상간(洪相簡)을 수찬으로, 김문순(金文淳)을 문학으로, 송환철(宋煥喆)을 설서(說書)로, 정홍순(鄭弘淳)을 우빈객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우부빈객으로 삼았다.

 

특별히 홍지해(洪趾海)를 승진시켜 동중추를 삼았는데, 홍지해는 고 감사 홍우전(洪禹傳)의 손자이다. 임금이 바야흐로 선조(先朝)의 기월(忌月)을 추모하고 있었는데, 홍우전이 경자년067)  에 승자(陞資)된 때문에 특별히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선왕의 법은 작질(爵秩)로 덕이 있는 사람을 적재 적소에 쓰도록 하였고, 일찍이 경솔하게 사람들에게 주지는 않았었는데, 특별히 그 조부가 승자(陞資)된 해라 하여 발탁해서 경월(卿月)의 반열을 제수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옛 사람의 해진 바지도 아까워한다는 뜻068)  이겠는가? 후에 임금이 홍계희(洪啓禧)를 불러 그 까닭을 말하자, 홍계희가 그 아버지의 가자(加資)된 것은 을사년069)  에 있었다고 아뢰었으니, 대개 임금이 을사년을 경자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홍계희가 그 연유를 감히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76책 112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2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067] 경자년 : 1720 숙종 46년.[註 068] 옛 사람의 해진 바지도 아까워한다는 뜻 : 한(韓)나라 소후(昭侯)가 해진 바지를 갈무리해 두고 아무에게나 내려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공(功)이 있는 사람에게 내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함.[註 069]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선왕의 법은 작질(爵秩)로 덕이 있는 사람을 적재 적소에 쓰도록 하였고, 일찍이 경솔하게 사람들에게 주지는 않았었는데, 특별히 그 조부가 승자(陞資)된 해라 하여 발탁해서 경월(卿月)의 반열을 제수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옛 사람의 해진 바지도 아까워한다는 뜻068)  이겠는가? 후에 임금이 홍계희(洪啓禧)를 불러 그 까닭을 말하자, 홍계희가 그 아버지의 가자(加資)된 것은 을사년069)  에 있었다고 아뢰었으니, 대개 임금이 을사년을 경자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홍계희가 그 연유를 감히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6월 5일 을묘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집의 이육(李堉)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6월 7일 정사

하교하기를,
"그 임금이 50년 만에 이날을 맞이하였으면, 비록 목석(木石)이라 하더라도 조금은 마음이 움직일 것인데, 더욱이 조선의 신자(臣子)들이겠는가? 원래 외방에 있는 외에 정경(正卿)으로부터 시종(侍從)에 이르기까지 외방에 있다고 일컫는 자들은 일체 아울러 시종안(侍從案)에서 이름을 간삭(刊削)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8일 무오

임금이 선조(先朝)의 기일(忌日)이라 하여 입진(入診)과 진약(進藥)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약방에서 다섯 번 아뢰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9일 기미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 집의 이육(李堉)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백발(白髮)이 다시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니, 기이한 일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종사(宗社)의 경사입니다."
하였다. 약방에 명하여 다시 입진하게 하고, 상경한 수령을 소견하여 농사 형편을 물어 보았다.

 

6월 10일 경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대사성에게 명하여 강(講)에 능한 유생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여 《숙야잠(夙夜箴)》을 외게 하였다. 또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가르치는 동몽들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여 각각 배우는 글을 외게 하였으며, 지필묵(紙筆墨)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이성수(李性遂)를 승지로 삼았다.

 

6월 11일 신유

임금이 기사(耆社)의 고적(考績)을 행하였다. 임금이 기사신(耆社臣) 이익정(李益炡) 등 이하 모두 9인을 불러 근력(筋力)이 쇠약한지 왕성한지에 대해 물으니, 각각 진대(進對)하였다. 임금이 친히 등제(等第)를 부르고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 명하여 이를 쓰게 하였는데, 내수(內竪)가 진찬(進饌)하였다. 임금이 네 글자의 글로 각각 1구씩 지어 나누어 주고 즉시 화답하여 올리게 하자, 차례로 일어나서 절하고 다투어 붓과 벼루를 취하여 써 올렸다. 정형복(鄭亨復)이 가장 늙어 말이 간삽(艱澁)하였으나, 오히려 능히 면계(勉戒)하는 뜻을 흘흘(吃吃)하면서도 마지않으매, 임금이 말하기를,
"노인의 말이 매우 좋으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서(士庶)로서 회혼례(回婚禮)를 지낸 사람들을 소견하고 각각 주백(紬帛) 【명주와 비단.】 과 고기를 내려 주었다.

 

박필규(朴弼逵)를 승지로 삼았다.

 

6월 12일 임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제부터 다시는 송절차[松節茶]를 올리지 말라고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범질(范質)의 시(詩)에 술을 경계한 말이 절실하다. 기운이 날로 더욱 쇠약해지는데 양주(釀酒)를 금하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상저(象箸)를 만들었다가 나중에는 옥배(玉杯)를 만들게 되어 졸졸 흐르는 물이 마침내 강과 바다가 될 것이다. 오늘부터 특별히 봉진(封進)을 정침(停寢)할 것이니, 다시는 양주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이육(李堉), 헌납(獻納) 조중명(趙重明)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4일 갑자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사옹원에 나아갔다. 또 도보로 예문관에 나아가 어제 현판(御製懸板)을 살펴보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6월 15일 을축

경외(京外)의 춘하등(春夏等) 전최(殿最)를 개탁(開坼)070)  하였다.

 

6월 16일 병인

특별히 헌납 조중명(趙重明)에게 동부승지를 제수하였다. 임금이 조중명이 연로한 까닭에 특별히 승자(陞資)한 것인데, 조중명이 혼외(昏聵)하여 임금의 하교가 있었으나 문득 미소를 띤 채 대답할 바를 모르니, 보는 사람들이 해연하게 여겼다.

 

6월 17일 정묘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무신 당하관으로서 70세 이상 된 사람들을 불러 시사(試射)하고 혹 가자하거나 혹은 첨사(僉使)를 제수하였다.

 

6월 18일 무진

예문 봉교 이덕사(李德師)가 80세가 된 부모가 있다 하여 상소하여 귀양(歸養)하기를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고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주었다.

 

6월 19일 기사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는데, 친정(親政)이었다. 이조 판서 이창수(李昌壽), 참판 이담(李潭), 참의 권도(權噵), 도승지 정상순(鄭尙淳), 병조 판서 김시묵(金時默), 참판 신위(申暐), 참의 김귀주(金龜柱), 참지 박지원(朴志源), 좌부승지 심욱지(沈勗之)가 진참(進參)하였다. 정창순(鄭昌順)을 필선으로, 홍지해(洪趾海)를 형조 참판으로, 이심원(李心源)을 대사헌으로, 이항조(李恒祚)를 헌납으로, 이최중(李最中)을 부제학으로, 김치구(金致九)를 정언으로, 이동욱(李東郁)을 지평으로, 이보온(李普溫)을 사간으로, 조준(趙㻐)을 응교로, 이숭호(李崇祜)를 문학으로, 서유대(徐有大)를 전라 병사로, 한광회(韓光會)를 동지사(冬至使)로, 박도원(朴道源)을 부사(副使)로, 홍낙신(洪樂信)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한 광회·박 도원은 후에 대신의 주달로 인해 체차하도록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려 주도록 명하고, 어시(御詩) 1구를 써서 내린 다음 화답하여 올리라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80세 가까운 나이에 친정(親政)하는 것이 옛날에 어찌 있었겠는가? 이것은 생민(生民)을 위한 것이다."
하였다. 이창수가 앞으로 나아가 부복(俯伏)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뜻은 내가 과연 알고 있다."
하고, 마침내 체차하여 해면하도록 허락하고, 신회(申晦)로 대신하게 하였다.

 

6월 20일 경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친히 적전(籍田)의 서속(黍粟)을 받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빈객(賓客) 조명정(趙明鼎)이 서연(書筵) 때 문의(文義)를 잘 부주(敷奏)하였으니, 그의 여러 직임을 우선 체차(遞差)하고, 오로지 권강(勸講)하는 데에만 마음을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아경(亞卿)이 이 직임을 행하였는데, 근래에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비록 아경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문임(文任)을 거친 자는 일체로 비의(備擬)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금 전에 형조의 살옥 죄인(殺獄罪人) 손정복(孫正福)을 감사(減死)하라는 명은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의(德意)에서 나왔으나, 삼척(三尺)의 법(法)이 지극히 엄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결단코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저 살해당한 사람은 유독 무슨 죄란 말입니까? 청컨대 감사하라는 명을 도로 정침하소서."
하였다. 집의 이육(李堉)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구선복(具善復)에게 판윤(判尹)을 제수하였다.

 

윤사국(尹師國)을 필선(弼善)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좌참찬으로, 이의철(李宜哲)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경호(李景祜)·김응순(金應淳)을 비국 당상으로 차출하였다.

 

6월 21일 신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새로 제수한 수령을 소견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임오년071)  ·기묘년072)  의 가례일기(嘉禮日記)를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6월 23일 계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윤광찬(尹光纘)·조재민(趙載敏)이 좌죄(坐罪)된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직첩(職牒)을 돌려주라는 명이 비록 특은(特恩)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오히려 너무 관대하게 하신 데 실수하셨는데, 하물며 서용(敍用)하는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빨리 도로 정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광찬은 금세(今世)의 사람이 아닌데, 서용을 어떻게 베풀겠는가? 단지 그 이름만 들어도 내 마음이 긍측(矜惻)한데, 어떻게 다시 하교할 것이 있겠는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장령 정경서(鄭景瑞)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4일 갑술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는데, 임금이 서증(暑症)으로 기운이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임·원임 대신이 입시하여 서증을 맑게 하는 약을 올리게 하고, 제조로 하여금 직숙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문후(問候)하지 말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중외(中外)에서 반드시 동요할 것이다."
하였다.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서명응(徐命膺)의 춘송(春頌)을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쓰도록 하였다. 이번 봄의 진연(進宴) 때 서명응이 쫓겨나 충청 수영(忠淸水營)에 있어서 참여하지 못한 까닭에 기축(祈祝)하는 뜻으로 한 송(頌)을 지어 바치고 ‘춘송(春頌)’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이것을 생각하여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교리 임희교(任希敎)에게 특별히 응교를 제수하였다. 임금이 기묘년073)  의 《가례일기(嘉禮日記)》를 보니, 임집(任)이 그 당시 승지였었고, 임희교는 곧 임집의 아들이었으므로, 이에 특별히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6월 25일 을해

충청 수사 서명응(徐命膺)을 승진시켜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삼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정사 한광회(韓光會)가 탄핵(彈劾)을 받아 기꺼이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영상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당품(當品) 가운데 갈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서명응을 특별히 정사로 삼도록 명하였다. 대개 서명응이 평소 문형(文衡)과 전조(銓曹)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탄핵을 입었으므로, 상소하여 휴치(休致)하기를 원하여 오랫동안 출사(出仕)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임금이 노하여 비록 외임(外任)에 보직(補職)하였으나, 그를 임용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옛사람이 유민(流民)을 그려서 바친 자가 있었다. 일찍이 탐라 어사(眈羅御史) 심성희(沈聖希)가 전복[鰒] 캐는 모양을 그려서 바친 것을 보고 그 캐기 어려운 것을 알았다. 지난번에 듣건대 내국에서 바친 것도 또한 이 정자 앞에서 캤다고 하니, 전 충청 수사로 하여금 영보정(永保亭)을 그리고, 겸하여 전복을 캐는 모양을 그려서 바치게 하라."
하였다.

 

서유원(徐有元)을 교리로, 홍상간(洪相簡)을 겸 문학으로, 홍자(洪梓)를 동지 부사로, 전광훈(田光勳)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하직하는 수령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모년(暮年)에 적자(赤子)를 너희들에게 맡기니, 모름지기 소견하는 뜻을 유념하여 힘써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친히 속효제문(續孝悌文)을 짓고 하교하기를,
"내가 학문을 알지 못하지만, 사람의 아들이 되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충성할 것이니, 이와 같으면 옳다고 할 수 있다."
하니,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효(孝)에 이르고 충(忠)에 이르렀음은 문왕(文王)의 덕(德)이 순수하였으나, 어찌 이에서 더하였겠습니까?"
하였다.

 

6월 26일 병자

이득일(李得一)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고 영산군(寧山君) 이전(李恮)에게 충희(忠僖)의 시호를, 예조 판서 권자신(權自愼)에게 충장(忠莊)의 시호를,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에게 문익(文翼)의 시호를, 영의정 윤동도(尹東度)에게 정문(靖文)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6월 28일 무인

임금의 안후(安候)가 편안하지 못하여 국구(國舅), 여러 도위(都尉) 및 약방의 세 제조에게 직숙(直宿)하도록 명하였다. 2품 이상이 전정(殿庭)에서 문후(問候)하고, 시임·원임 대신이 입시하여 탕제(湯劑)를 올릴 것을 의논하였다. 유신에게 명하여 《경세문답(警世問答)》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6월 29일 기묘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김용(金容)을 사서로, 윤급(尹汲)을 좌참찬으로 삼았으며, 고 영부사 서지수(徐志修)에게 문청(文淸)의 시호를, 판부사 신계영(辛啓榮)에게 정헌(靖憲)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계미에 시호를 추증할 대신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곧 시호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고 상신 서지수(徐志修)는 성실하며 외화(外華)가 없어 자주 일컬었음으로써 홍문관에 명하여 곧 시호를 의논하게 하였다. 또 승지로 하여금 그 시장을 읽게 하였는데, 시장 가운데 간쟁(諫爭)하는 말을 실은 것이 많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시장은 누가 지었는가?"
하니, 도승지 정상순(鄭尙淳)이 말하기를,
"좌상 김양택(金陽澤)이 지었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근래에 시장이 너무 외람되어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직(稷)·설(契)074)  에게 견주니, 내가 일찍이 개연(慨然)스럽게 여긴 것이다."
하고, 마침내 여러 대신들에게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논하라는 명을 내렸다. 해질녘[日晡]까지 약을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약방에서 구대(求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도제조 김양택을 꾸짖어 해면시키고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튿날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6월 30일 경진

약방에서 입진하니, 비로소 약을 올리도록 허락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 영부사의 집, 서 영부사의 집, 이 영상의 집, 김 봉조하의 집, 신 영상의 집에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대사헌 이심원(李心源)·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구윤옥(具允鈺)·이재협(李在協)·이성원(李性源)·이수봉(李壽鳳)·이지회(李之晦)·김치공(金致恭)을 승지로 삼았다.

 

신상권(申尙權)을 장령으로, 성덕조(成德朝)를 지평으로, 정창순(鄭昌順)을 헌납으로, 이득일(李得一)을 우윤으로 삼았으며, 졸(卒)한 영의정 정호(鄭澔)에게 문경(文敬)의 시호를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에게 정희(靖僖)의 시호를 우의정 민응수(閔應洙)에게 문헌(文憲)의 시호를,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에게 효강(孝剛)의 시호를, 봉조하 김상로(金尙魯)에게 익헌(翼獻)의 시호를, 영의정 신만(申晩)에게 효정(孝正)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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