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3권, 영조 45년 1769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1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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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신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하직하는 수령(守令)들을 소견(召見)하고 농사 형편에 대해 물었는데, 귀성 부사(龜城府使) 이정묵(李廷默)이 흉년(凶年)을 면하였다고 대답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너무 데면데면하다."
하고, 태거(汰去)하도록 명하였다. 이정묵이 이미 물러가자, 또 하교하기를,
"금년 농사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큰 풍년이 들었다.’고 하는데, 대답하는 것이 무상(無狀)하다."
하고, 특별히 서용(敍用)하지 않는 형률(刑律)을 시행하게 하였다. 당시에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수해(水害)와 한재(旱災), 바람과 서리의 재해에 대해 아뢰어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정묵이 죄를 입은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었다.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서지수(徐志修)의 시장(諡狀)을 잘 찬술(撰述)하지 못하였다 하여 상소하여 인죄(引罪)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개석(開釋)하였다.

 

7월 2일 임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증후(症候)가 점차 차도가 있으니, 약원에 명하여 윤직(輪直)하게 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예관(禮官)을 데리고 청대(請對)하니, 인견(引見)한다고 명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들과 예판(禮判)이 잇달아 칭경(稱慶)하기를 주청(奏請)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창의(李昌誼)는 성후(聖候)가 미처 평복(平復)되지 않았다 하여 윤직(輪直)하라는 명을 정침(停寢)하고 그전대로 아울러 직숙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신 등은 칭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창의의 말에 따라 인하여 아울러 직숙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구선행(具善行)은 모년(暮年)에 내가 의뢰하는 사람인데, 비록 옛날 명장(名將)에 견주더라도 또한 어찌 밑돌겠는가? 일찍이 남당(南塘) 및 좌현(左峴)에 〈축성(築城)할 때〉 2년 안에 〈완공(完工)한다고〉 복명(復命)하였었는데, 이제 몇 달 만에 두 성의 역사를 거의 마치게 되었으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4일 갑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갔는데,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정(趙晸)을 파직(罷職)하고 민홍렬(閔弘烈)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대신(大臣)이 그 정세(情勢) 때문에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마침내 홍억(洪檍)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잠상(潛商)의 일로 인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이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완결(完結)을 짓지 못하자 임금이 변문(邊門)은 일이 중대하다 하여 특별히 파직하게 하였으며, 다른 수령도 연좌되어 파직된 자가 또한 수명이었다.

 

7월 5일 을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여러 도(道)에서 조련(操鍊)하기를 청한 정상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힐융(詰戎)이 비록 중요하다 하지만, 민사(民事)가 어찌 가볍겠는가? 진휼(賑恤)을 베푼 나머지 겨우 소생한 백성들이 어느 겨를에 조련에 나아가고 어느 겨를에 가을 수확을 하겠는가? 가을 조련을 특별히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전라도 법성창(法聖倉)은 이미 명무(名武)의 이력(履歷)으로서 첨사(僉使)를 차송(差送)하여 그로 하여금 조선(漕船)에 타고 운송(運送)하게 하였으니, 규모는 아산창(牙山倉)의 예에 의거하였습니다. 도사(都事)가 해운(海運)을 겸대(兼帶)하는 것은 지금 우선 감하(減下)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전라 감사 김상익(金相翊)이 상소하여 병으로 인해 해면(解免)해 주기를 청하자, 체차(遞差)하도록 명하고, 대신들에게 문의(問議)하여 대신할 사람을 차출하게 하였다. 정언 김치구(金致九)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이 작년에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마침 승선(承宣)의 궐원(闕員)이 있음을 보았는데, 성상께서 하순(下詢)하시자, 그 당시 승지 정창성(鄭昌聖)·홍양한(洪良漢)이 각각 한 사람씩 쉽사리 우러러 대답하였으니, 극도로 외람된 데 관계됩니다. 청컨대 아울러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각 고을에서 혹 편액(扁額)을 하사한 서원에 추배(追配)하거나 혹은 향현사(鄕賢祠)를 창설하고 있다고 하니, 청문(聽聞)이 미치는 바에 극도로 해연(駭然)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본도로 하여금 특별히 엄중히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는 체모를 얻었다. 서원(書院)과 위판(位板)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즉시 철거하게 하고, 창건한 해당 수령은 5년 동안 금고(禁錮)075)  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당초에 추배(追配)를 금하지 않은 수령은 3년 동안 한정해서 금고시키고, 수창(首倡)한 유생은 영구히 청금안(靑衿案)에서 삭제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향선생(鄕先生)이 죽어서 사우(祠宇)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리이다. 군덕(君德)의 궐유(闕遺)와 생민(生民)이 피로하여 병들 것에 대해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그런데 이 한 가지 일이 마땅히 급무(急務)에 속한다는 것인가? 진실로 한심하게 여길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76책 11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2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병법(兵法) / 재정-창고(倉庫) / 교통-수운(水運)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075] 금고(禁錮) : 죄를 지은 사람이나 그 자손이 벼슬길에 나오는 것을 금지하던 형벌.
사신(史臣)은 말한다. "향선생(鄕先生)이 죽어서 사우(祠宇)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리이다. 군덕(君德)의 궐유(闕遺)와 생민(生民)이 피로하여 병들 것에 대해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그런데 이 한 가지 일이 마땅히 급무(急務)에 속한다는 것인가? 진실로 한심하게 여길 만하다."

 

김상익(金相翊)을 대사간으로, 홍중효(洪重孝)를 형조 판서로, 심수(沈鏽)를 판윤으로, 김치양(金致讓)을 전라 감사로, 박지원(朴志源)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7일 정해

사문(四門)에서 영제(禜祭)076)  를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장마가 졌기 때문이었다.

 

원점 유생(圓點儒生)077)  에게 제술(製述)을 시험 보이도록 명하고, 수위를 차지한 진사 유운우(柳雲羽)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7월 10일 경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봉상 제조(奉常提調)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제향(祭享)에 쓰이는 비자(榧子)·표고(蔈古)는 제주(濟州)에서 봉진(封進)하던 것인데, 정봉(停封)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마땅히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공가(貢價)를 주어 진배(進排)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헌(貢獻)은 비록 정지하였으나, 제물(祭物)을 어떻게 이와 같이 하겠는가?"
하고, 정봉하지 말라는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형조 판서 홍중효(洪重孝)를 파직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는데, 홍중효가 외방에 있으면서 후반(候班)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7월 11일 신묘

임금의 환후(患候)가 평복(平復)되었으므로, 약원(藥院)에서 직숙(直宿)을 철수하였다. 명하여 도제조 이창의(李昌誼)에게 안구마(鞍具馬)를, 한익모(韓翼謨)에게 구마(廐馬)를, 국구(國舅)에게 구마를 상으로 면급(面給)하고, 제조 한광회(韓光會)에게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자하였으며, 도승지 구윤옥(具允鈺)에게 가의 대부(嘉義大夫)를 가자하고, 한림(翰林)·주서(注書)를 승륙(陞六)시켰으며, 의관(醫官)에게 가자하고, 그 나머지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이창수(李昌壽)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하교하기를,
"모년(暮年)에 세 번이나 병이 나았으니 이미 뜻밖의 일이며, 어제 갑오 일기(甲午日記)를 듣고 일어나는 감회가 매우 절실하였다. 이미 은연중에 도와주심을 받았으니, 어찌 초기(草記)를 기다릴 것인가? 고묘(告廟)하고 반교(頒敎)하는 것을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기청제(祈晴祭)와 보사제(報謝祭)를 행하도록 명하였으니, 계미일(癸未日)부터 비가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날씨가 개인 때문이었다.

 

7월 13일 계사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갔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14일 갑오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다.

 

장지항(張志恒)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와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걸어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갔는데, 성후(聖候)가 평소와 같이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뭇신하들이 모두 기뻐하며 경하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번의 사전(赦典)은 어떻게 날짜를 지체할 수 있겠는가? 경외(京外)의 도년(徒年) 이하는 가까운 예(例)에 의거하여 먼저 석방한 후 계문(啓聞)해서 사일(赦日)을 넘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해남(海南)에 투비(投畀)한 죄인 이득복(李得福), 영암(靈巖)에 투비한 죄인 박상로(朴相老), 횡성(橫城)에 투비한 죄인 홍수보(洪秀輔), 금성(金城)에 투비한 죄인 조재준(趙載俊), 단천(端川)에 투비한 죄인 홍경안(洪景顔), 결성(結城)에 투비한 죄인 홍찬해(洪纘海)를 아울러 풀어 주고, 추조(秋曹)의 가벼운 죄수들도 또한 석방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집의 이육(李堉)과 정언 김치구(金致九)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5일 을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고 친히 교문(敎文)을 지어 반사(頒赦)하였으며, 백관에게 가자(加資)하고 자궁(資窮)078)  인 자는 대가(代加)하도록 하였다. 예(禮)를 마치고 월대(月臺)에 나아가 뜰에 들어온 문신(文臣)과 전문(箋文)을 봉진(封進)한 태학 유생들에게 제술(製述)을 시험 보이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흥화문(興化門)에 거둥하여 곤궁한 백성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고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다. 제술의 과차(科次)에서 유생 가운데 수위를 차지한 이언일(李彦一)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고, 문신의 제술에서 수위를 차지한 이진항(李鎭恒)과 그 차위를 차지한 4인에게 아울러 말을 주었다.

 

조종현(趙宗鉉)을 사간으로, 윤석렬(尹錫烈)을 헌납으로, 최민(崔)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6일 병신

특별히 전 교리 이득복(李得福)에게 직첩(職牒)을 주고 부의(賻儀)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이득복이 일을 말하다가 찬배(竄配)되어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세초(歲抄)079)  를 보다가 이득복의 이름에 이르러 그가 죽은 것을 듣고는 매우 가엾게 여겨 마침내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7월 17일 정유

특별히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기청제(祈晴祭)와 보사제(報謝祭)를 지낸 후 다시 비가 내리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박덕(薄德)한 때문이다."
하고, 마침내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었다.

 

7월 18일 무술

박지원(朴志源)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이때에 장지항(張志恒)이 광주 부윤으로 있다가 북곤(北閫)에 이배(移拜)되었는데, 임금이 그 대신할 사람을 어렵게 여기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박지원을 천거하여 임금에게 특별히 제수할 것을 청한 때문이었다.

 

윤동승(尹東昇)·민홍렬(閔弘烈)·서명선(徐命善)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9일 기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도승지 구윤옥(具允鈺)이 세초(歲抄) 외의 시종안(侍從案)을 독주(讀奏)하니, 홍수보(洪秀輔)·박상로(朴相老)·홍경안(洪景顔)·조재준(趙載俊)·홍찬해(洪纘海)·박취원(朴取源)·이명훈(李命勳)·심관지(沈觀之)·송재경(宋載經)·신광집(申光緝)·황간(黃榦)·이홍제(李弘濟)·강지환(姜趾煥)·신대수(申大脩)·이태정(李台鼎)·주형질(朱炯質) 등을 아울러 분간(分揀)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정경서(鄭景瑞), 정언 김치구(金致九)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김치구가 또 아뢰기를,
"김상묵(金尙默)·이겸빈(李謙彬)은 이미 벌(罰)을 행하였으며 또 대사령(大赦令)을 당하였으니, 아울러 거두어 서용(敍用)해서 언로(言路)를 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엄중한 비답을 내리고 따르지 않았다.

 

좌승지 윤동승(尹東昇)을 삭직(削職)하고, 여러 승지들을 아울러 체차(遞差)하였다. 이때에 중관(中官) 신덕룡(申德龍)이 정원(政院)의 서리(書吏)와 서로 다투어 사사로이 곤벌(棍罰)을 썼는데, 정원에서 품계(稟啓)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자,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해당 승지를 삭직하고, 여러 승지들을 아울러 체차하도록 명하였으며, 말하지 않은 대신(臺臣)은 서용하지 않는 형률(刑律)을 베풀게 하였다. 이로부터 신덕룡이 더욱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게 되었다.

 

윤득우(尹得雨)·김광국(金光國)·구상(具庠)·어석정(魚錫定)·이세연(李世演)·신광리(申光履)를 승지로 삼았다.

 

7월 21일 신축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기신일(忌辰日)이었기 때문이었다.

 

7월 22일 임인

각도의 전문 차사원(箋文差使員)들을 소견(召見)하고, 농사 형편을 물어 보았다.

 

7월 23일 계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제릉(齊陵)을 수개(修改)한 데 대한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의철(李宜哲)을 대사헌으로, 정택(鄭擇)을 장령으로, 유운익(柳雲翼)을 정언으로, 이택수(李澤遂)를 필선(弼善)으로, 이석재(李碩載)를 사간으로, 이형원(李亨元)을 헌납으로 삼았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특별히 전 정평 부사(定平府使) 이광택(李光宅)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북도(北道)의 도신이, 이광택이 이미 체차(遞差)된 후, 유치(留置)해 놓은 자비곡(自備穀) 1천 5백 석을 진휼(賑恤)하는 데 보충하였다 하여 포계(褒啓)하니, 마침내 이런 명이 있을 것이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 듣건대, 내금위 장(內禁衛將)이 과궐(窠闕)이 있다고 하니, 즉시 거행하여 내가 백성들을 위해 포가(褒嘉)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당시에 영상 홍봉한(洪鳳漢)이 차자(箚子)를 올려 병을 칭탁하여 해면(解免)되기를 원하자,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고, 또 별유(別諭)를 내려 불러들였다. 임금이 형조 판서 이창수(李昌壽)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항양(桁楊)의 아래에서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더욱이 한 사람이 범법(犯法)하면 좌(左)로 잡아당기고 우(右)로 끌어들여 죄안(罪案)이 줄달아, 경향(京鄕)에서 붙잡아 가둔 죄인들이 옥(獄)에 가득하니, 이것이 어찌 감상(感傷)할 것이 아니겠는가? 큰 것은 이미 결단하였으니, 오늘부터 매일 부좌(赴坐)하여 상세하게 조사해서 결단하되, 석방할 만한 자는 먼저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4일 갑진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명(明)나라 사람 후손들에게 시사(試射)하고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7월 25일 을사

장령 신상권(申尙權)이 상소하기를,
"북도(北道) 길주(吉州)에서 돈을 사용하고 있으니, 거듭 금령(禁令)을 엄중히 하고 그 수령을 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적간(摘奸)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크게 바람이 부니, 임금이 또 이달을 한정해서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7월 27일 정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수도안(囚徒案)080)  을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임희교(任希敎)를 집의로, 이홍제(李弘濟)를 장령으로, 이동현(李東顯)을 지평으로, 이득신(李得臣)을 헌납으로, 김서구(金敍九)·안정현(安廷鉉)을 정언으로, 서명응(徐命膺)을 판윤으로 삼았다.

 

7월 29일 기유

유성(流星)이 필수(畢宿)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혜성(彗星)과 같았다.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연화문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사옹원(司饔院)에 역림(歷臨)하였다.

 

연일 큰 비가 내려 날씨가 개지 않으니, 사문(四門)에서 영제(禜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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