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3권, 영조 45년 1769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14.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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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경술

혜성(彗星)이 필수(畢宿)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크기는 필성(畢星)만하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혜성(彗星) 때문에 근심하여 유신(儒臣) 5인을 측후관(測候官)으로 삼아 관상감(觀象監)에서 윤직(輪直)하게 하였다.

 

8월 2일 신해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측후관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약방 도제조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혜성(彗星)은 분야(分野)가 비록 다르다 하나, 수성(修省)하는 방도에 더욱 힘쓰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8월 3일 임자

사경에 혜성이 나타났다.

 

봉상시(奉常寺)에서 전라도의 조계산(曹溪山)·백운산(白雲山)을 율목 봉산(栗木封山)으로 삼기를 계청(啓請)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일에 명릉(明陵)에 전알(展謁)하고, 15일 창덕궁(昌德宮)에 전례(展禮)할 것을 명하였다.

 

8월 4일 계축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측후관(測候官)을 소견하고 성체(星體)의 증감에 대해 물어 보았다.

 

8월 5일 갑인

혜성이 삼수(參宿)에 나타났는데, 형체와 꼬리의 길이가 전과같았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경재관(慶再觀)·노서국(盧瑞國)을 지평으로, 윤양후(尹養厚)를 응교로, 서유린(徐有隣)을 수찬으로, 홍지해(洪趾海)를 대사헌으로, 심관지(沈觀之)를 사간으로, 이보온(李普溫)을 집의로, 서유원(徐有元)·이석구(李碩九)를 장령으로, 노성중(盧聖中)을 헌납으로, 남주관(南胄寬)·홍빈(洪彬)을 정언으로 삼았다.

 

전라 병사 서유대(徐有大)를 파직하였다. 서유대가 부임하는 도중에 일로 인하여 순영(巡營) 소속의 종에게 곤장(棍杖)을 베풀어 다스렸는데, 감사 김상익(金相翊)이 발노(發怒)하여 또한 병사의 비장(裨將)을 다스리니, 이로 인하여 서로 다투었다. 이에 서유대가 비국에 사장(辭狀)을 올리고, 김상익이 또 조정에 장문(狀聞)하였는데, 대신이 서유대를 파직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민지열(閔趾烈)로 대신하게 하였다.

 

제도(諸道)에 명하여 육조(陸操)를 정지하고, 다만 영장(營將)이 순행하여 점검(點檢)하게 하였으며, 서북(西北) 두 도는 병사(兵使)로 하여금 전례에 의거하여 조련을 행하게 하였다.

 

경상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함경도의 물에 빠져 죽거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8월 6일 을묘

혜성(彗星)이 나타났는데, 형체와 꼬리의 자취가 희미하였다.

 

능(陵)에 거둥할 때 왕세손(王世孫)에게 어가(御駕)를 수종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장차 명릉(明陵)에 나아가고자 하였는데, 세손이 수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동패(同牌) 가운데에서 어가를 수행하도록 명하였다.

 

8월 7일 병진

혜성이 나타났다.

 

이휘지(李徽之)를 대사헌으로, 정방(鄭枋)을 집의로, 정창순(鄭昌順)을 사간으로, 임희간(任希簡)을 정언으로, 이석재(李碩載)를 교리로, 김기대(金基大)를 겸 사서로, 정광한(鄭光漢)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능(陵)에 거둥하였을 때 어가를 수종(隨從)한 무사들에게 시사(試射)하도록 명하고, 혹 가자(加資)하거나 혹은 급제를 내려 주었다.

 

전 승지 이기경(李基敬)을 특별히 승진시켜 동중추(同中樞)로 삼았다. 이기경은 고 상신(故相臣) 이상진(李尙眞)의 방손(傍孫)인데, 대대로 호남(湖南)의 전주(全州)에 살았고,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를 스승으로 섬겼다. 임금이 권장하여 임용하려고 여러 번 천전(遷轉)시켜 미원(薇垣)081)  의 장(長)에 이르렀는데, 호서(湖西)와 관동(關東) 두 도의 감사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하교하기를,
"광무제(光武帝)가 포덕후(褒德候)082)  를 봉한 것은 곧 동한(東漢)을 중흥(中興)한 기틀이 되었다. 이기경은 글을 읽은 사람인데, 전주에 있으면서 한번도 명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전약수(錢若水)083)  와 어찌 다르겠는가? 중요한 직임(職任)으로 승자(陞資)하는 것은 그 사람을 아는 도리가 아니니, 특별히 동중추(同中樞)를 제수하여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8월 8일 정사

혜성(彗星)이 정수(井宿)의 도내(度內)에 옮겨서 나타났는데, 모양과 빛깔은 전과 같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예방 승지에게 명하여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희생(犧牲)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사직단에 쓸 향을 지영하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하고 마침내 하교하기를,
"임금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모든 일에 허물을 바로잡아 고친 후에야 마음이 느슨해졌으니, 어찌 누워서 날을 보낼 수 있겠는가?"
하고, 곧 문에 나아가 승지가 복명(復命)하기를 기다렸다가 제물 단자(祭物單子)와 집사관(執事官)의 거안(擧案)을 읽도록 명하고 부복(俯伏)하여 들었다. 충자문(冲子文)을 지어서 써서 보이고 승지로 하여금 정서(淨書)하게 하였다. 또 유신(儒臣)에게 《문헌통고(文獻通考)》 교사권(郊社券)을 독주(讀奏)하게 하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8월 9일 무오

탐라(耽羅)에서 진공(進貢)하는 녹미(鹿尾)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꼬리[尾]가 60조(條)이면 몸통도 또한 60인데 만약 1년에 두 번 진공할 경우 사슴[鹿]은 장차 1백 20필이 될 것이니, 알지 못하겠지만 본도(本島)에 전례가 있었는가? 비록 전례가 있더라도 상고하건대,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불에 구운 양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전사(前史)에서 이를 아름답게 여겼거늘, 지금 진공을 정지한 것은 송나라 인종에 견주어 자못 성대함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재숙(齋宿)하였는데, 명릉(明陵)에 거둥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8월 10일 기미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갔는데, 세손(世孫)이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였다. 임금이 능소(陵所)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기를 마치고, 국궁(鞠躬)한 채 빠른걸음으로 상설(象設) 왼쪽에 나아가 이슬 맺힌 풀에 부복(俯伏)하여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여러 신하들이 옥체(玉體)가 손상된다고 번갈아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일어나서 의식에 따라 제사를 행한 다음 승지에게 명하여 종이를 가져오게 하였다. 임금이 향(香)을 싸서 손수 참봉(參奉) 정화순(鄭華淳)에게 내리고 말하기를,
"분향(焚香)한 나머지이니, 정성껏 불사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어서 익릉(翼陵)과 경릉(敬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각능에 대신을 나누어 보내어 제사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친히 제사를 행하였을 때의 헌관(獻官)에게 구마(廐馬)를 면대해서 주고, 예방 승지에게 가자하였으며, 능사(陵司)를 승륙(陞六)시키고, 집사(執事)한 사람들에게 차등있게 말을 내려준 다음 어가(御駕)를 돌렸다. 기백(畿伯)에게 명하여 기고(旗鼓)로써 맞이하게 하고, 특별히 마필(馬匹)을 내려 주었다.

 

김광국(金光國)을 도승지로, 이미(李瀰)를 우승지로 삼았다.

 

8월 11일 경신

혜성(彗星)이 나타났는데, 형체와 빛깔이 희미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판윤 서명응(徐命膺)이 사행(使行) 때 쇄마 구인(刷馬驅人)084)  은 일일이 대오(隊伍)를 지어 그들로 하여금 명령하여 행하는 바가 있고 금지하여 그치는 바가 있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 보고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집의 정방(鄭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특별히 우참찬 심수(沈鏽)를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심수가 길에서 대사헌 이은(李溵)을 만났는데, 이은이 회피(回避)하지 않았다 하여 노하여 그 종리(從吏)를 잡아가자, 이은도 또한 노하여 상소하기를,
"대각(臺閣)에서 공복(公服)을 입고 나가면 비록 대신을 만나더라도 회피(回避)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인혐(引嫌)하며 체차(遞差)해 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과 경재(卿宰)들에게 묻자, 모두 심수가 그르다고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고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태학 유생(太學儒生)들에게 제술(製述)과 강경(講經)을 시험 보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능(陵)에 나아갔을 때 태학 유생들이 길에서 지영(祗迎)하자, 임금이 이를 어여삐 여겨 마침내 과거를 설행(設行)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친히 시험을 보여 제술에서 수위를 차지한 진사(進士) 남강로(南絳老)와 강경에서 순통(純通)085)  한 김광현(金光鉉)·변득한(邊得翰)에게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차등을 두어 급분(給分)086)  하게 하였다.

 

8월 12일 신유

김응순(金應淳)을 도승지로, 박필규(朴弼逵)·조정(趙晸)을 승지로 삼았다.

 

전라도 광주(光州)의 유생 유적(柳迪) 등이 상소하여 박세채(朴世采)의 문묘 종향(文廟從享)을 출방(黜放)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그 소장을 가져오게 하고는 유적은 영구히 청금안(靑衿案)에서 지워버리고, 삼수부(三水府)의 백성들로 하여금 사흘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押送)하게 하였으며, 소하(疏下)의 사람들은 아울러 청금안에 부첨(付籤)하고 방축(放逐)하여 서민을 만들도록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호남(湖南)의 유생으로 무릇 관학(館學)과 경성(京城)에 있는 자들도 또한 모두 방축하게 하였다. 대사성 이의철(李宜哲)이 상소하기를,
"금령(禁令)을 내렸는데도 향유(鄕儒)의 무리들이 지레 한 소장을 올려 엄중한 견벌(譴罰)을 자초(自招)하였지만 조가(朝家)의 처분도 너무 엄중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죄줄 만하지만 그 이름은 유생이고, 그 사람은 비록 미천하지만 관계되는 바가 있는데, 지금 수천 명의 유생들을 부첨(付籤)하여 병축(屛逐)하였으니, 서로 돌아보며 도모할 바를 잃은 채 반드시 말하기를 ‘말 때문에 죄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방에 유전(流傳)되어 혹시라도 성조(聖朝)에 누를 끼치게 될까 두려우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아!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열조(列朝) 이래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전고(前古)에 우뚝 뛰어났습니다. 우리 선묘(宣廟)께서는 일찍이 뭇 신하들에게 조유(詔諭)하시기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여러 유생들이 상소한 바가 하나만이 아니었으니, 어찌 강직하게 들추어내어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일찍이 한번도 기뻐하지 않는 빛을 보이지 않고 반드시 온화한 말로 위유(慰諭)하였으니, 국가의 원기(元氣)를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말이 위대하십니다. 어찌 만세(萬世)에 본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셔서 성덕(聖德)을 빛내소서."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유중(留中)087)  하게 하였다.

 

8월 13일 임술

혜성(彗星)이 귀수(鬼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빛깔은 하얗고, 꼬리의 길이가 5∼6척(尺)이었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이어서 돈의문(敦義門)에 나갔다가, 인현 왕후의 구기(舊基)에 있는 비각(碑閣) 앞에 나아가 부복(俯伏)하여 눈물을 흘려 울면서 추모하는 뜻을 입으로 아뢰었다. 이어서 고 대사헌 민시중(閔蓍重)의 집에 들어가서 민성(閔姓)의 여러 사람들을 소견하고, 벼슬이 있는 한 사람에게 가자(加資)하였으며, 벼슬이 없는 두 사람에게 벼슬을 제수하고, 한 사람에게 책을 내려 주었으며, 외예(外裔)인 동몽(童蒙) 두 사람에게도 또한 책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부원군 민유중(閔維重)과 민시중에게 치제(致祭)하고 환궁(還宮)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상소한 유생의 일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오늘 감선(減膳)하고자 하였는데, 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좌상 김양택(金陽澤)과 우상 김상철(金相喆)이 상소한 유생들에 대한 처분이 지나침을 말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며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8월 14일 계해

혜성(彗星)이 유수(柳宿)에 나타났는데, 형체와 빛깔이 전과 같았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서 각 능전(陵殿)의 추석제(秋夕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그리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088)  의 묘(墓)에 치제(致祭)하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홍술해(洪述海)를 승지로 삼았다.

 

도승지 김응순(金應淳)이 성변(星變) 때문에 반복해서 면계(勉戒)를 진달하였는데,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였으므로 임금이 가상하게 여겼다. 이때에 혜성이 여러 번 나타났으나, 대신과 삼사(三司)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으나, 오직 김응순만이 등대(登對)로 인하여 언급했던 것이다.

 

8월 15일 갑자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황단(皇檀)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으며, 환궁할 때 육상궁(毓祥宮)에 두루 들러 전배하였다.

 

8월 16일 을축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대사성 이의철(李宜哲)을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였는데,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이의철의 소장을 독주(讀奏)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문묘(文廟)의 조두(俎豆)는 사체(事體)가 얼마나 소중하며, 철식(腏食)한 것이 여러 해가 되어 그 근본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사유(師儒)의 장(長)089)  으로서 당(堂) 안에서 ‘사습을 바로 잡으라[正士習]’는 세 글자의 칙교(飭敎)는 본받지 않은 채 양도(兩道)의 유생들을 편들어 이와 같이 소장을 올려 진달하였으니, 저 이의철은 곧 조선 사람이면서 어떻게 감히 이에 대해 이의(異議)를 할 수 있는 것인가? 지금 혜성은 괴이한 한 단서를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러한 명이 있었다.

 

8월 17일 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숭릉(崇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입은 흑단령포(黑團領袍)는 곧 18세 때 입었던 것인데, 예(禮)를 행할 때마다 반드시 이것을 입었다. 겉으로는 비록 해어지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좀먹은 부분이 있다."
하였는데,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이를 입으신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세 번 빨아 입는다[三澣]’는 말이 있었으니, 무슨 해로운 것이 있겠는가?"
하고,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이의로(李宜老)·김이장(金履長)을 방면(放免)해 주도록 명하였다. 이의로·김이장은 기생에 대한 일로 인하여 이미 찬배(竄配)되었는데, 영상 홍봉한(洪鳳漢)이 조용히 그들을 위해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두 사람에 대해 그 할아비들을 생각하여 임용하겠다."
하고, 특별히 방면하여 직첩(職牒)을 주도록 명하였다.

 

고 중신(重臣) 김진상(金鎭商) 및 김동필(金東弼)의 아들을 전조(銓曹)로 하여금 현주(懸註)하여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김진상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자신을 숨긴 자이고, 김 동필은 신축년090)  에 수립한 공이 있다 하여 이러한 명이 있었다.

 

전라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8월 18일 정묘

약방에서 두 번째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금위 대장 구선복(具善復)을 인견하였다. 이때에 명릉(明陵)의 보토(補土) 역사를 장차 마치게 되었는데, 명릉의 능관이 또 화소(火巢)091)   밖에도 마땅히 보토해야 할 곳이 있다고 말하였다. 영상 홍봉한(洪鳳漢)이 이를 말하자, 임금이 구선복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구선복이 돌아와서 형지(形止)를 아뢰니 임금이 구선복에 명하여 품군을 모집해서 역사를 추진하게 하였다.

 

신라(新羅)의 여러 왕(王)들의 묘(墓)를 수호(守護)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신라 왕들의 묘를 일찍이 신칙(申飭)하여 수호하게 하였었는데, 그 해이함을 염려하여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홍중일(洪重一)을 대사헌으로, 윤득맹(尹得孟)을 대사간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사간으로, 김서응(金瑞應)·임해(任瑎)를 장령으로, 이동현(李東顯)·이중해(李重海)를 지평으로, 이병정(李秉鼎)을 헌납으로, 이숭호(李崇祜)를 정언으로, 조영순(趙榮順)을 동의금으로 삼았다.

 

8월 19일 무진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명릉(明陵)을 보토(補土)한 데 대한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였으며, 내전으로 돌아왔다.

 

신광리(申光履)·서유대(徐有大)를 승지로 삼았다.

 

향민(鄕民)을 소견하고 친히 농사 형편을 물어 보았다.

 

이진항(李鎭恒)을 사간으로, 구익(具㢞)·나충좌(羅忠佐)를 장령으로, 김광악(金光岳)을 지평으로, 남주로(南柱老)를 정언으로, 홍검(洪檢)을 부수찬으로, 홍낙임(洪樂任)을 문학으로, 이경옥(李敬玉)을 집의로, 김낙수(金樂洙)를 헌납으로 삼았다.

 

황해도 유생 이봉원(李逢源) 등이 상소하여 박세채(朴世采)의 종향(從享)을 출방(黜放)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노하여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소두(疏頭) 이하를 불러들이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오늘날 조정에서도 또한 붕당(朋黨)이 없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하고, 그 소장을 가져다 찢어서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이봉원은 흑산도(黑山島)에 서민(庶民)을 만들고 가쇄(枷鎖)를 씌워서 사흘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게 하였으며, 소색(疏色) 안 경렴(安景濂)은 가쇄를 씌워 해남(海南)에 수군(水軍)으로 충정(充定)하게 하고, 소장을 읽은 신대순(申大順)은 좌수영(左水營)의 능로군(能櫓軍)으로 충정(充定)해서 이봉원의 예에 의거하여 압송하게 하였으며, 태학(太學)과 사학(四學)에 해서(海西)의 사람으로 거재(居齋)하는 자들을 아울러 쫓아 보내게 하였다. 또 영남과 호남의 두 도(道) 유생들은 모두 온 도를 정거(停擧)시키도록 명하였으니, 또한 일찍이 박세채를 출향(黜享)하기를 상소한 때문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근본은 이의철(李宜哲) 때문이다."
하고, 진도군(珍島郡)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날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 가운데 이의철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면, 어떻게 감히 북면(北面)하여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해서(海西)·호남(湖南)·영남(嶺南)의 문관들은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간삭(刊削)하도록 명하다. 정관(政官)을 패초(牌招)해서 개정(開政)하여 그들을 대신할 사람을 뽑아 보충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약을 물리치고 들지 않았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여러 승지와 옥당(玉堂)에서 아울러 청대(請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좌상 김양택(金陽澤)이 금오(金吾)에 나아가 명(命)을 기다렸다.

 

8월 20일 기사

채제공(蔡濟恭)을 도승지로, 홍재(洪梓)·민홍렬(閔弘烈)·박필규(朴弼逵)·서명선(徐命善)·김치공(金致恭)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입시하도록 명하니, 여러 대신들이 바야흐로 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아울러 모두 들어가서 보고 약을 올리기를 청하자, 마침내 일어나서 내전으로 돌아갔다.

 

영원군(寧遠郡)의 표몰(漂沒)한 20호(戶)에 당년의 환자[還上]092)  을 탕감해 주고, 물에 빠져 죽은 16구(口)에게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는데, 평안 감사의 장문(狀聞)으로 인한 것이었다.

 

8월 21일 경오

특별히 좌상 김양택(金陽澤)을 체차시키도록 명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잇달아 약을 물리친 것 때문에 청대(請對)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조로 하여금 박세채(朴世采)를 치제(致祭)하였을 때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고핵(考覈)하게 하였는데, 좌상이 그 가운데에 들어있으므로, 특별히 상직(相職)을 해면하고 김상복(金相福)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서 하교하기를,
"신축년093)  에 나와 뜻이 같았던 사람은 곧 조 풍릉(趙豊陵)094)  과 송 좌상(宋左相)095)  이었다."
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는 말하기를,
"두 상신(相臣)은 탕평(蕩平)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곤고(困苦)를 받은 것이 많았다."
하였다. 특별히 이휘지(李徽之)에게 대사성을 제수하고, 김상복(金相福)을 좌상에 제배(除拜)하였다.

 

윤동승(尹東昇)을 이조 참의로, 성천주(成天柱)를 대사헌으로, 정만순(鄭晩淳)을 대사간으로, 서유린(徐有隣)을 교리로, 홍낙신(洪樂信)을 부교리로, 윤사국(尹師國)을 수찬으로, 홍검(洪檢)을 부수찬으로, 김종수(金鍾秀)를 응교로, 서유량(徐有良)을 필선으로, 김종정(金鍾正)을 형조 참판으로, 서명응(徐命膺)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은(李溵)을 형조 판서로, 원인손(元仁孫)을 판윤으로, 홍지해(洪趾海)를 동의금으로, 정후겸(鄭厚謙)을 사옹원 제조로 삼았다. 이은과 원인손을 승진하여 정경(正卿)에 주의한 것은 대신이 천거한 때문이었다.

 

8월 22일 신미

고 사직(司直) 윤봉오(尹鳳五)에게 치제(致祭)하라 명하고, 임금이 친히 제문(祭文)을 지었으며,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또 곧 시호(諡號)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저위(儲位)를 받았을 때 계방(桂坊)096)  이었기 때문이다.

 

8월 23일 임신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서 육상궁(毓祥宮)의 중삭제(仲朔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홍술해(洪述海)를 승지로 삼았다.

 

정후겸(鄭厚謙)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이은춘(李殷春)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이때에 정 후겸은 나이 겨우 20세였는데, 대신이 비위를 맞추어 의논하여 천거한 때문이었다.

 

8월 24일 계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의릉(懿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8월 26일 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특별히 북병사(北兵使) 장지항(張志恒)을 삭직(削職)하게 하였다. 장지항이 본래 교만하여 사조(辭朝)할 때 단지 대신과 장신(將臣)만 보고 비국의 여러 재신(宰臣)들은 보지 않았으니, 여러 재신들이 노하여 그 하례(下隷)를 가두었었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그 일을 아뢰자, 임금이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였는데, 영상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이 때문에 임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 처분한 후에 다시 사조(辭朝)하게 하여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여러 재신들이 모두 불가(不可)하게 여기니, 마침내 삭직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8월 27일 병자

이방수(李邦綏)를 북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이방수를 소견하여 범월(犯越)에 대한 일로 칙려(飭勵)하여 보냈다.

 

동중추 이기경(李基敬)이 상소하여 사면(辭免)하고, 또 전에 대사간이 되어 상소하여 이정렬(李鼎烈)·김이희(金履禧) 등을 처분한 것은 지나치다는 것을 진달하였으나, 후원(喉院)에서 물리침으로 인하여 상철(上撤)할 수 없었던 까닭을 말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심지어 ‘겨울이 추운 연후에야 송백(松柏)을 알아보고, 모년(暮年)에 경직(勁直)함을 나타낸다’는 것을 들어 하교하여 사명(謝命)을 재촉하였다.

 

함경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8월 28일 정축

이심원(李心源)을 대사헌으로, 이보온(李普溫)을 집의로, 이진복(李鎭復)을 장령으로, 이득화(李得華)를 지평으로, 안성빈(安聖彬)·여선형(呂善亨)을 정언으로, 홍용한(洪龍漢)을 부응교로, 윤양후(尹養厚)를 교리로, 윤승렬(尹承烈)을 부교리로, 이치중(李致中)을 수찬으로, 서유원(徐有元)을 부수찬으로, 조엄(趙曮)을 호조 참판으로, 이섭원(李燮元)을 동의금으로, 김양택(金陽澤)을 판중추로 삼았다.

 

8월 29일 무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호남 도신의 향현사(鄕賢祠)에 추향(追享)하였다는 계본(啓本)을 보고, 수령과 유생들을 아울러 논죄(論罪)하고, 위판(位版)을 파묻어 거듭 금령(禁令)을 엄중히 하도록 명하였다.

 

박사형(朴師亨)을 지평으로, 이득일(李得一)을 교리로, 윤홍렬(尹弘烈)을 수찬으로, 서호수(徐浩修)를 겸보덕(兼輔德)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형조 판서로, 이최중(李最中)을 예조 참판으로, 안정대(安鼎大)를 지평으로, 이항조(李恒祚)를 헌납으로, 이육(李堉)을 사간으로, 이원(李遠)을 정언으로, 원계영(元啓英)을 장령으로, 박필규(朴弼逵)를 대사간으로, 정상순(鄭尙淳)·김광국(金光國)을 동의금으로, 유수(柳脩)를 좌윤으로, 허우(許宇)를 동돈녕(同敦寧)으로 삼았다.

 

8월 30일 기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예조 판서 이은(李溵)을 소견하고 명릉(明陵)의 보토(補土)하는 역사에 대해 물어 보았다.

 

임금이 세손(世孫)을 데리고 도총부(都摠府)에 나아가 선생안(先生案)097)  을 보고 차등있게 상을 나누어 주었다.

 

장령 이진복(李鎭復)을 삭직(削職)시켰다. 이진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해서(海西)의 유생에게 가쇄를 씌워서 발배(發配)하라는 명(命)에 대해 개석(慨惜)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중대한 옥사(獄事)에 관계된다 하더라도 일찍이 가쇄를 씌워 발배한 전례가 없었는데, 더욱이 저 유생들은 열성(列聖)께서 배양하여 전하께 진언(進言)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삼도(三道)의 문관들에 이르러서는 상소한 유생들에게 관계되지 않았는데, 한결같이 아울러 방축(放逐)하였으니 원근(遠近)에서 놀라 의혹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성명(成命)을 정침(停寢)하소서. 상소한 유생들이 배소(配所)로 나아갈 때 과천 현감(果川縣監) 유언숙(兪彦肅)은 그 고마(雇馬)를 빼앗고 몰아서 앞서 가게 하였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당개(唐介)를 폄출(貶黜)하고는 길에서 죽지 않도록 하라고 경계하였는데, 더욱이 우리 전하께서는 지극히 인자하신 성심(聖心)으로 어찌 위협하는 마음을 품고 몰아서 욕보이고자 하여 저와 같이 하셨겠습니까? 청컨대 유언숙을 삭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엄지(嚴旨)를 내려 꾸짖고,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간삭(刊削)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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