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3권, 영조 45년 1769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1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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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기유

혜성(彗星)이 방수(房宿) 위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흔적이 1척(尺)쯤 되고 빛깔은 창백(蒼白)하였다.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측후관 서호수(徐浩修) 등을 불러 성체(星體)에 대해 물어 보고, 서호수에게 명하여 그의 아버지 서명응(徐命膺)에게 가서 금성(金星)에 대해 질의(質疑)하여 서계(書啓)하게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제조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서평 부원군(西平府阮君)106)  의 묘(墓)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효묘(孝廟)의 어휘(御諱)가 외손(外孫)으로서 비문(碑文)에 들어 있으므로, 감히 세울 수가 없었으나 효묘께서 이것을 세우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신으로 하여금 비각(碑閣)을 세우고 묘소를 개사초(改莎草)하게 하라."
하였다.

 

한림 회권(翰林會圈)을 행하라 명하였다.

 

10월 2일 경술

한림 소시(翰林召試)107)  을 설행하여 이정운(李鼎運)·이상건(李商建)·윤필병(尹弼秉) 3인을 뽑고 이정운을 검열로 삼았다.

 

전 제주 목사(濟州牧使) 남익상(南益祥)을 옥(獄)에 가두고,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들로 하여금 엄히 추문(推問)해서 취초(取招)하도록 명하였다. 제주 어사 박사륜(朴師崙)이 아뢰기를,
"남익상이 범람하게 형장을 베풀어 사람을 죽였고, 말꼬리 7백 근(斤)과 양대(凉臺) 1천 5백 개[立]를 몰아 샀다는 남형 불법(濫刑不法)한 정상 등에 대해 아뢰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말하기를,
"남익상은 남이흥(南以興)의 손자인데,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남간(南間)에 가두어 엄중히 추문하여 구초(口招)를 받으라고 명하였다.

 

10월 3일 신해

혜성(彗星)이 심수(心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빛깔이 담박(淡泊)하였다.

 

이창수(李昌壽)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무신들에게 시사(試射)하였다.

 

기백(畿伯)의 장계(狀啓)를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방기(邦畿) 천 리 안은 백성들이 머물러 사는 곳이다.’ 하였으니, 백성을 위해 5백 결(結)을 더 주는 것이 어찌 한 모금의 물을 주는 것과 다르겠는가? 장청(狀請)한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옛날 많은 백성들을 애휼(愛恤)하던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10월 4일 임자

혜성(彗星)이 심수(心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도승지에게 명하여 남익상(南益祥)의 공사(供辭)를 독주(讀奏)하게 하고, 당률(當律)을 물어 본 다음 형벌을 가하도록 명했다가, 곧 정침(停寢)하였다. 그리고 흑산도(黑山島)에 충군(充軍)하고, 그 비장(裨將)으로서 간사한 짓을 한 자는 본도(本島)에 정배(定配)하게 하였으며, 그 아들 남정규(南正圭)는 진도군(珍島郡)에 충군시키게 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5일 계축

영의정·예조 판서·선혜청 낭관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관상감의 관원 김태서(金兌瑞)를 불러 혜성(彗星)의 형체에 대해 물어 보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고제(古制)가 궁궐 안에 있는데, 수보(修補)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김태서가 대답하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소옥형(小玉衡)과 간의판(簡儀板)을 만들어 바치도록 명하였다. 전조(銓曹)로 하여금 수령(守令)을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10월 5일 계축

홍검(洪檢)을 집의로, 구익(具㢞)을 사간으로, 박상로(朴相老)를 지평으로, 조재준(趙載俊)을 헌납으로, 이갑(李𡊠)을 정언으로, 송지연(宋志淵)을 부응교로, 서명응(徐命膺)을 형조 판서로, 송형중(宋瑩中)을 호조 참판으로, 정창성(鄭昌聖)을 형조 참판으로, 홍낙인(洪樂仁)을 대사성으로, 이득신(李得臣)·윤석렬(尹錫烈)을 교리로, 심이지(沈頤之)를 부교리로, 이석재(李碩載)·홍상간(洪相簡)을 부수찬으로, 오정원(吳鼎源)을 설서로, 박취원(朴取源)을 부응교로, 유의양(柳義養)을 사서(司書)로, 이상악(李商岳)을 겸 사서로 삼았다.

 

응교 박취원(朴取源), 수찬 홍상간(洪相簡), 겸 사서 이상악(李商岳) 등 3인을 아울러 호서(湖西)에 찬배(竄配)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옥당(玉堂)의 허다한 관원들이 문득 외방에 있음을 칭탁하여 행공(行公)하는 자가 적었으므로, 임금이 아울러 체차(遞差)하고 개정(開政)하여 그 대신할 사람을 보충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외방에 있다고 칭탁하는 자는 곧바로 투비(投畀)하는 전지를 받들도록 하라."
하였는데, 박취원 등이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아가지 않으니 마침내 모두 찬배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잇달아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노년(老年)에 더욱 쇠모해지고 있으나, 이와 같이 교만한 신하들은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곧 대신의 신구(伸救)로 인하여 임금이 후회하고, 곧 도로 정침(停寢)하도록 명하였다.

 

김재순(金載順)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6일 갑인

혜성(彗星)이 심수(心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흔적이 있는 듯 없는 듯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금년에는 호랑이가 도성에 들어온 일이 있었고, 또 혜성(彗星)이 있으니, 매우 아름다운 징조가 아니다. 무릇 재이(災異)가 응하는 것이 눈앞에 있지는 않지만,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할 만하다."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태묘(太廟)의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걸어서 흥화문(興化門) 밖에 나아가 지송(祗送)하고 내전으로 돌아오니, 영상·우상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갔다. 삼사(三司)와 춘방(春坊)에서 무단히 소명(召命)을 어겼다 하여 분부를 내려 책유(責諭)하였고, 대소 신공(大小臣工)들로 하여금 그릇된 습관을 씻어버리게 하였다. 또 흉년이 들고 날씨가 추워져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얼 염려가 있다 하여 비국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신칙해서 임금의 애휼(愛恤)하는 뜻을 알게 하도록 하였다.

 

함경도의 감시 어사(監市御史)를 혁파하고 북평사(北評事)가 어사의 일을 겸하여 행하도록 명하였다. 근년의 제도는 매년 개시(開市) 때마다 따로 어사를 보내어 감독하게 하였었는데, 임금이 그것이 폐단이 있다 하여 평사로 하여금 겸하게 하고자 하여 영의정 홍봉한에게 물으니, 홍봉한이 순편하다고 하자, 마침내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또 평사를 규피(規避)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규피하는 자는 곧 그 땅에 충군(充軍)시키는 것으로 율(律)을 정하였다.

 

유성모(柳成模)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7일 을묘

혜성(彗星)이 심수(心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달빛에 반사되어 형체·빛깔·꼬리의 흔적이 매우 분명하지 않았다.

 

10월 8일 병진

약간 천둥하였다.

 

입직(入直)한 문신에게 명하여 20운(韻)의 율시(律詩)를 지어서 바치게 하고,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으로 하여금 성적을 매기게 하였다. 임금이 또 친히 어제(御製) 1구(句)를 짓고 입시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박기채(朴起采)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9일 정사

혜성(彗星)이 심수(心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비국에서 개좌(開坐)하는 것이 너무 드물다 하여 분부를 내려 책유(責諭)하였으며, 대신(臺臣)으로 패초(牌招)를 어기는 자는 아울러 서용하지 않는 전형(典刑)을 시행하게 하였다. 다시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갔다. 주강(晝講)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건백(建白)하여 예조 참의 김귀주(金龜柱)를 비국 부제조로 삼았다가, 곧 정침(停寢)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9일 정사

전 교리 이양수(李養遂)·정창순(鄭昌順)·심관지(沈觀之)와 전 정언 이익선(李益烍)이 조참에 늦게 나아갔다 하여 아울러 북관(北關)에 찬배(竄配)하게 하였다가, 곧 용서해 주었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형조 당상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제도(諸道)에 찬배한 죄인들의 방미방(放未放)108)  에 대한 계본(啓本)을 독주(讀奏)하게 하였으며, 다시 소석(疏釋)을 더하게 하였는데, 이에 용서받은 자들이 많았다. 임금이 또 금년에 몇 사람을 계복(啓覆)109)  하였는지 물었는데, 형조 판서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형벌을 폐하여 쓰지 않는 풍습이 있다."
하였다.

 

10월 11일 기미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무사(武士)들에게 능마아강(能麽兒講)을 시험 보이고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양사(兩司)의 아장(亞長)과 홍문관 응교를 먼저 품지(稟旨)한 후에 통의(通擬)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관안(官案)을 가져다 보았는데, 아장의 통망된 자가 매우 많음을 보고 하교하기를,
"이것은 모두 등급을 뛰어넘어 외람된 것들이다. 나는 종핵(綜核)하는 도리로써 준직(準職)을 아끼는데, 전조(銓曹)에서는 외람되게 승진시키는 것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이 뒤로는 응교와 아장은 아울러 먼저 품지(稟旨)한 후에 비로소 통망(通望)하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특별히 북로(北路)의 의대포(衣襨布)를 감하도록 명하였는데, 임금이 북백(北伯)의 장계(狀啓)를 보고 기근이 겹쳐서 근심이 되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고원(高原)·북청(北靑)·문천(文川)·단천(端川)은 작년에 진휼(賑恤)을 베풀었었는데, 지금 다시 이와 같으니, 네 고을의 신공(身貢)을 특별히 감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백성을 소요(騷擾)하게 하는 정사를 일체로 엄중히 금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부예(府隷)가 조사(朝士)를 압송(押送)해 가니, 북인(北人)들이 호랑이같이 두려워한다."
하고, 마침내 이양수(李養遂) 등 3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 주게 하였다.

 

한림(翰林) 홍낙항(洪樂恒)을 북도(北道)의 권관(權管)으로 내쳤다. 홍낙항이 동료 관원과 예문관의 전례로 인하여 다투어 고집하다가 경출(經出)하고 기꺼이 들어가지 않으니, 임금이 신진(新進)의 습관을 조장(助長)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관직을 내치도록 명한 것이었다.

 

황해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10월 12일 경신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고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우의정 김상철(金相喆) 등이 일제히 아뢰기를,
"김귀주(金龜柱)는 지망(地望)과 재주가 유밀(宥密)한 지위에 시험해 봄이 합당하므로, 신 등이 비국의 부제조로 차출하기를 청했었는데, 성상께서 이미 윤허하셨다가 곧 정침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신 등이 어진이를 세워 함께 힘을 합하여 일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궁(中宮)이 이를 듣고 몹시 놀라며 기뻐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또한 깨닫고 그 명을 정침한 것이다."
하였다. 김 귀주는 중궁의 오라비로서 당시에 나이 겨우 30세였다.

 

김귀주(金龜柱)를 승지로 삼았다.

 

함경 감사 유한소(兪漢蕭)가 병들어 졸(卒)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탄식하며 슬퍼하여 친히 제문(祭文)을 지은 다음 가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북백(北伯)의 자리가 비었으니, 신 등이 네 사람을 의논하여 추천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이름을 물어 보고 마침내 조영순(趙榮順)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10월 13일 신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경연관(經筵官)을 불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대사성에게 명하여 생원·진사 각기 한 사람씩 데리고 월대(月臺)에 입시하게 하고, 생원·진사로 하여금 《논어(論語)》를 강하게 하였다. 그리고 태학(太學)의 식고(食鼓)를 옮겨 궁전의 뜰에 매달아 놓고 장차 태학의 예에 의거하여 음식을 차려 놓으려고 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이미 점심을 먹었다는 것을 듣고는 수랏간[御廚]에서 음식을 차려 유생들을 먹이게 하고, 임금도 또한 한 소반을 진어(進御)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재주 있는 선비들이 많으니 문왕(文王)께서도 마음 편하게 여기셨다. 친히 궁전 안에서 시학(視學)하고 월대(月臺)에서 함께 식사하였으니, 거의 아름답게 되었다."
하였다. 이어서 도기과(到記科)를 설행(設行)하되, 강경(講經)·제술(製述)을 나누어 시취(試取)하도록 명하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강경·제술을 시험 보이고 성적의 순위를 매겨 강경에서 수위를 차지한 진사 송상은(宋相殷)과 제술에서 수위를 차지한 생원 최우관(崔宇觀)에게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4일 임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와 선릉(宣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건명문(建明門)에 따라 나아갔다가 내전으로 돌아왔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황해 감사 윤득양(尹得養)이 연분110)  을 장주(狀奏)한 것으로써 더 재감(裁減)해 주고자 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모두 허락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도신이 장문(狀聞)한 것을 이미 모두 시행하도록 허락하였으니, 모든 일에 특별히 견휼(蠲恤)을 더함이 옳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듣건대 울릉도(鬱陵島)에서 나는 인삼(人蔘)을 상고(商賈)들이 몰래 들어가서 채취한다고 하니, 왜인(倭人)들이 만약 이를 안다면, 아마도 쟁상(爭桑)의 근심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어서 청하기를,
"우리 나라의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지금 울릉도의 일에 있어 고증(考證)할 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전후의 문적(文蹟)을 널리 채택하여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서 사대(事大)·교린(交隣)의 문자(文字)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또 아뢰기를,
"제주(濟州)에서 배가 뒤집혔을 때 군관 구협(具埉)이 어사(御史)를 안고 한 길[丈]쯤 되는 급수선(汲水船)에 뛰어내려 6, 7인이 이를 힘입어 살았는데 모두 구협의 공(功)이니, 거두어 서용(敍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간 해에는 민제장(閔濟章)이 통신사(通信使)의 군관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살린 까닭에 승자(陞資)하였었다. 또 구협이 일찍이 참군(參軍)으로서 출륙(出六)되지 않았다고 하니,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오위 장(五衛將)을 삼아 한 사람을 권장하여 백 사람을 면려(勉勵)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김귀주(金龜柱)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15일 계해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태릉(泰陵)을 수개(修改)하는 데 대한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10월 16일 갑자

임금이 제조 원인손(元仁孫)에게 명하여 일찍이 삼척 영장(三陟營將)을 지내어 사리를 잘 아는 자와 더불어 울릉도(鬱陵島)의 봉만(峰蠻)·형승(形勝)·물산(物産)을 그려 가지고 들어오게 하였다.

 

특별히 임정원(林鼎遠)에게 수찬을 제수하고, 임금이 하교하기를,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인(故人)을 생각한 것이다."
하였는데, 대개 임정원은 곧 임석헌(林錫憲)의 조카이기 때문이었다.

 

10월 16일 갑자

김종정(金鍾正)을 대사헌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집의로, 정방(鄭枋)을 사간으로, 윤정렬(尹正烈)을 지평으로, 홍경안(洪景顔)을 헌납으로, 조창규(趙昌逵)를 정언으로, 이득일(李得一)을 부응교로, 서유녕(徐有寧)을 겸 필선으로, 윤사국(尹師國)을 겸 문학으로, 민종렬(閔鍾烈)을 겸 사서로, 이중호(李重祜)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10월 17일 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전주(全州)에 대여(貸與)하도록 허락한 결전(結錢)을 탕척(蕩滌)하였다. 당초에 전주에서 불이 일어나 감사가 결전을 대여하여 백성들이 집을 짓는 데 도와 주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여하도록 허락했던 것은 대개 풍패(豊沛)111)  의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하고, 마침내 탕척하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사간 정방(鄭枋)을 체직(遞職)하였다. 임금이 빈대(賓對)하는 날 대신(臺臣)이 늦게서야 비로소 나아왔다 하여 분부를 내려 꾸짖었는데, 정방이 등연(登筵)하자 임금이 노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피혐(避嫌)하지 않는 것인가?"
하므로, 정방이 곧 피혐하여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다시 근거 없는 말로 인혐(引嫌)한다고 꾸짖고 체차시켰다.

 

유신(儒臣)을 불러 《경세문답(警世問答)》을 강하였다.

 

10월 18일 병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목릉(穆陵)의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평안도 도신에게 하유(下諭)하여 성을 쌓은 노고(勞苦)를 표창하고 표피(豹皮)를 내려 주었다. 강화 유수에게 하유하여 그 성역(城役)을 해가 오래 되도록 마치지 못한 것을 꾸짖고 내전으로 돌아와 주강을 행하였다. 승보시(陞補試)에 뽑힌 사람들을 인견하였으며 약방을 불러 입진하였다.

 

해서(海西)의 유생 오경현(吳敬賢) 등이 상소하여, 박세채(朴世采)가 무함받았음을 변명하였다. 임금이 밤에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오경현 등을 불러 회유(誨諭)하여 꾸짖고 이어서 본도에 압송하도록 명하였다. 숙묘(肅廟)경신년112)  부터 서인(西人) 가운데 두 가지 논의로 나뉘어져 서로 배척하였는데, 박세채만 홀로 양쪽 사이에 조화(調和)하여 치우치게 거슬리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갑신년113)  에 임금이 특별히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명하여 탕평(蕩平)의 표준을 삼았는데, 준론(峻論)을 주장하는 자들은 상소하여 출향(黜享)할 것을 청하고, 박세채를 존숭하는 자들은 상소하여 무함받은 것을 변명하니, 임금이 이것을 매우 병통으로 여겨 후원(喉院)에 명하여 무릇 유소(儒疏)를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말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오경현 등이 글을 올려 정원(政院)을 침척(侵斥)하자, 승지들이 모두 경출(徑出)하였다.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깊은 밤에 연화문에 임어하여 처음에는 깊이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소장을 보고 무함받은 것을 변명한 것임을 알고는 마침내 죄주지 않고 보낸 것이었다.

 

민백흥(閔百興)·윤동승(尹東昇)·서유대(徐有大)·이명식(李命植)·서명선(徐命善)·서유녕(徐有寧)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19일 정묘

혜성(彗星)이 남두성(南斗星) 위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종신(侍從臣)들은 백관(百官)이 서로 바로잡아 주는 것도 또한 부끄러워하여 하지 않고 있다. 옛날에는 조참(朝參)과 윤대(輪對) 때 모두 아뢰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으니, 한심(寒心)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나와 함께 늙어가며 함께 의지하는 것은 기구(耆舊)들이다. 마땅히 명일(明日)에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기구들의 조참을 행하여 늙은이[黃耉]들에게 걸언(乞言)하려 하니, 종친·문관·음관·무관 가운데 나이 60세·70세 된 사람들은 들어와 참여하고, 대관(大官) 외에 여러 관원들은 아울러 참여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0일 무진

혜성(彗星)이 남두성(南斗星) 위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이성수(李性遂)·정상순(鄭尙淳)·이인배(李仁培)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기구들의 조참을 행하였는데, 70세 이상을 전대(前隊)로 삼고, 60세 이상을 후대(後隊)로 삼았으며, 2품 및 당상·당하는 직차(職次)로 하지 않고 나이로 순서를 매겨 서게 하였다. 지사 이익정(李益炡)을 노인록(老人錄)에 올렸는데, 70세부터 90세까지 1백 80여 인이 되었다. 임금이 걸언(乞言)하는 뜻으로 온 뜰안의 늙은이[黃耉]들로 하여금 각각 소회(所懷)를 진달하게 하였는데, 지사 남태제(南泰齊)가 아뢰기를,
"근래에 과거(科擧)가 너무 빈번해서 1년 동안 뽑는 것이 4, 50인이 되니, 형편상 일일이 엄체(淹滯)된 사람들을 소통(疏通)시키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백수(白首)에 홍패(紅牌)를 받고도 일명(一命)을 받지 못하는 자가 거의 반이 넘으니, 널리 뽑아서 위로하여 기쁘게 한다는 것은 다만 화기(和氣)를 감상(感傷)시키는 데로 돌아가기에 족합니다. 또 고시(考試)하는 법이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7, 8천 명의 시권(試券)을 처리해야 하므로, 정밀하게 가릴 겨를이 없습니다. 따라서 손이 가는 대로 입락(立落)을 결정하니, 요행히 급제하는 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글도 모르고 쓰지도 못하는 자들이 휩쓸려 어지럽게 움직이니, 과장(科場)이 난잡하여 이미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었습니다. 요행히 과거에 한번 급제하면 모두 분수에 벗어난 바람을 품고 조경(躁競)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세도(世道)가 날로 퇴폐해지고 있으니, 과거를 드물게 설행하고 그 제도를 조금 변개(變改)하는 것이 지금 제일의 급선무입니다."
하니, 임금이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 등대(等對)해서 다시 아뢰도록 명하였다. 심성진(沈星鎭)·변치명(邊致明) 등이 아뢰기를,
"근일에 시행하고 조처하는 사이에 천둥이 치고 폭풍(暴風)이 일듯 갑작스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원컨대 정신(精神)을 아끼시고 더욱 보색(保嗇)을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참의 홍자(洪梓)가 아뢰기를,
"인재를 수습하여 미리 융정(戎政)을 강구하시고, 갑병(甲兵)·성지(城池)를 수선(修繕)하여 변방을 견고하게 하는 방책을 다하도록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아울러 우악하게 답하였다.

 

10월 21일 기사

임금이 인조(仁祖)의 구저(舊邸)에 나아가 봉안각(奉安閣)에 전배(展拜)하였다. 인하여 봉안각을 친히 써서 판자(板子)에 새겨 문미(門楣)에 걸게 하고, 말하기를,
"올해는 곧 옛날 사복(嗣服)하신 해이다."
하였는데, 효묘(孝廟)가 기축년114)  에 즉위한 때문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아! 50세가 되던 계해년115)  에 봉안각을 우러러보며 절했었는데, 이것은 곧 옛날 의리를 들어 발란 반정(撥亂反正)한 해였다. 그러므로 송현(松峴) 구궁(舊宮)의 전례에 의거하여 네 글자를 써서 걸게 하였는데, 천만 뜻밖에 다시 이 해를 보게 되었다."
하고, 이어서 뜰 가운데에서 절하고 말하기를,
"조금이나마 작은 정성을 폈으니, 본궁의 궁임(宮任) 이하에서 쌀·베를 상주도록 하라. 그리고 이문(里門)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명일에 융무당(隆武堂)에서 마땅히 시사(試射)하겠다."
하였다. 또 지나는 길에 일성위(日城尉)의 집에 들렀으며 또 영수각(靈壽閣)에 들러 전배(展拜)하였다.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을 불러 《소학(小學)》을 강하고, 각각 문의(文義)를 진달하게 하였다.

 

10월 22일 경오

세 동지 사신(冬至使臣)을 인견하였다. 이어서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지평 경재관(慶再觀)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계해년116)  의 훈신(勳臣) 자손들과 어의궁(於義宮)의 이문(里門) 안에 사는 사람들을 불러 시사(試射)하여 혹은 급제를 내려 주고, 혹은 궁시(弓矢)와 마첩(馬帖)을 주었다. 이홍규(李弘逵)라는 자가 있었는데, 완풍군(完豊君) 이서(李曙)의 5세손이었다. 특별히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고, 또 병조로 하여금 차례를 밟지 않고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이현영(李顯永)을 지평으로, 박상덕(朴相德)을 대사헌으로, 이진항(李鎭恒)을 집의로, 임희교(任希敎)·조준(趙㻐)을 부교리로, 서유원(徐有元)을 수찬으로, 홍수보(洪秀輔)를 사간으로, 김익(金熤)을 겸 필선으로, 윤홍렬(尹弘烈)을 필선으로, 조재준(趙載俊)을 수찬으로, 홍찬해(洪纘海)를 부수찬으로, 남태회(南泰會)를 동의금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좌윤으로 삼았다.

 

10월 23일 신미

토성(土星)이 귀성(鬼星)으로 들어갔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민홍렬(閔弘烈)·서유량(徐有良)·윤득우(尹得雨)·김노진(金魯鎭)·구상(具庠)·홍술해(洪述海)를 승지로 삼았다.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문의(文義)를 진달하게 하자, 특진관 이장오(李章吾)가 말하기를,
"신은 무신이므로, 문의를 알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활로써 말하는 것이 옳다. 근래에 무신들이 활을 가지기를 싫어하고 있는데, 경은 이것을 타이르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시종신(侍從臣)들이 매번 외방(外方)에 있음을 칭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임금이 날마다 법강(法講)에 나아가고 있는데, 그 신하들은 모두 외방에 있음을 칭탁하고 있다. 임금이 신하를 가르치지 않고 어떻게 면려(勉勵)하겠는가?"
하고, 책망하는 뜻으로 하유하였다. 또 개정(開政)하여 서울에 있는 사람을 차출(差出)하도록 명하였다.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으로, 안표(安杓)를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이태정(李台鼎)·주형질(朱炯質)을 장령으로, 유훈(柳薰)을 지평으로, 안성빈(安聖彬)·신익빈(申益彬)을 정언으로, 박사륜(朴師崙)을 헌납으로, 이택수(李澤遂)를 부교리로, 이명빈(李命彬)·이석재(李碩載)를 부수찬으로, 심이지(沈履之)를 겸 문학으로, 원인손(元仁孫)을 동경연으로 삼았다.

 

헌납 박사륜(朴師崙)·정언 신익빈(申益彬)이 패초(牌招)를 어기고 나아가지 않으니, 찬배(竄配)하도록 명하였다. 옥당(玉堂)·춘방(春坊)에서 정사(呈辭)117)  하니,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였으며, 외방에 있어서 하유(下諭)했던 사람들은 곧 그 지역에 정배(定配)하게 하였다.

 

10월 24일 임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집의 이진항(李鎭恒)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안표(安杓)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유한근(兪漢謹) 한 사람을 뽑았다. 정복환(鄭福煥)은 미처 부시(赴試)하지 않았다 하여 도착한 향리(鄕里)에 투비(投畀)하도록 명하였다.

 

어석정(魚錫定)·최태형(崔台衡)·박기채(朴起采)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25일 계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익릉(翼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한림(翰林) 유악주(兪岳柱)·한광근(韓光近)·홍낙항(洪樂恒)·이정운(李鼎運) 등이 패초(牌招)하였는데도 곧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금부의 남간(南間)에 가두도록 명했다가 곧 정침하고, 모두 관동(關東) 연해의 여러 군(郡)에 충군(充軍)하게 하였다.

 

평안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아울러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한필수(韓必壽)·홍양한(洪良漢)·이미(李瀰)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26일 갑술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대신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동몽(童蒙)을 불러 강경(講經)을 시험 보였다. 당초에 동몽들이 반중(泮中)의 과시(課試)에 나아가서 서로 모여 소동을 일으키고, 국자장(國子長)에게 돌을 던졌다. 임금이 듣고 해괴하게 여겨 마침내 그 동몽들을 불러 《소학(小學)》으로 시강(試講)을 하고, 말하기를,
"만약 스승을 존숭(尊崇)하는 도리를 안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이처럼 해괴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반복하여 계칙(戒飭)하였다.

 

경상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춘추관 영사(春秋館領事) 이하에게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권점을 행하라는 명이 있는데 일찍이 한림을 지낸 사람들이 바로 이를 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그것이 지체되는 데 노하여 이미 유악주(兪岳柱) 등을 찬배(竄配)하고, 이어서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유신(儒臣)을 불러 《경세문답(警世問答)》을 강하였다.

 

민홍렬(閔弘烈)을 승지로 삼았다.

 

소과(小科) 후에는 《소학(小學)》을 면강(面講)으로 시험 보이고, 대과(大科) 후에는 세 경서(經書) 가운데 한 경서를 면강으로 시험 보임으로써 영식(令式)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과·소과에 참방(參榜)된 사람들이 독서(讀書)하지 않음을 근심하여 면강의 법을 행하고자 대신 홍봉한(洪鳳漢)에게 물었는데, 홍봉한이 매우 좋다고 하니, 마침내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10월 27일 을해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집의 이진항(李鎭恒), 장령 주형질(朱炯質), 지평 경재관(慶再觀) 등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안성빈(安聖彬)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7일 을해

임금이 여러 신하들이 일찍 대궐에 나오지 않는다 하여 분부를 내려 책유(責諭)하고, 대신(臺臣)들을 아울러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김하재(金夏材)·오정원(吳鼎源)·유의(柳誼) 등 3인을 뽑았다.

 

10월 28일 병자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전 감역(監役) 이의업(李宜業)이 상소하여 수천 자(字)의 말로 시폐(時弊) 13조(條)를 논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경재(卿宰)에게 물었는데, 모두 잗달고 오활(迂闊)하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유독 그의 능히 진언(進言)하였음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옷 1습(襲)을 내려 주었다.

 

10월 29일 정축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소회(所懷)를 물어 보았는데, 모두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하니, 물러가도록 명하였다.

 

10월 30일 무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이어서 상참·주강을 행하였다. 예조 판서 이은(李溵)이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친히 《소학(小學)》을 강하시고 또 칙교(飭敎)를 내리셔서 몽매한 선비들을 교훈(敎訓)하시는 데 부지런히 힘쓰시니, 이것은 진실로 사방을 고동(鼓動)시키는 하나의 큰 기회입니다. 외방의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의 생도 및 동몽(童蒙)의 강(講)을 거듭 권징(勸懲)하셔서 실효(實效)가 있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대사간 안표(安杓), 정언 안성빈(安聖彬)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전(正殿)에서 조회(朝會)를 받고 법연(法筵)에서 개강(開講)하는 것은 진실로 스스로 힘쓰며 칙려(飭勵)하는 성의(聖意)에서 나왔는데, 대신(大臣)들은 건백(建白)하는 바가 없고, 대신(臺臣)들은 또 입을 다물고 있어 그것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기에 마땅하여 족히 공경하고 꺼려함이 없었으니, 대관(大官)은 견파(譴罷)하고 삼사(三司)는 찬배(竄配)하는 일이 전후에 서로 잇달았음은 또한 뭇 신하들이 자초(自招)한 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6책 113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3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전(正殿)에서 조회(朝會)를 받고 법연(法筵)에서 개강(開講)하는 것은 진실로 스스로 힘쓰며 칙려(飭勵)하는 성의(聖意)에서 나왔는데, 대신(大臣)들은 건백(建白)하는 바가 없고, 대신(臺臣)들은 또 입을 다물고 있어 그것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기에 마땅하여 족히 공경하고 꺼려함이 없었으니, 대관(大官)은 견파(譴罷)하고 삼사(三司)는 찬배(竄配)하는 일이 전후에 서로 잇달았음은 또한 뭇 신하들이 자초(自招)한 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신위(申暐)를 대사헌으로, 윤승렬(尹承烈)을 집의로, 이정오(李正吾)를 사간으로, 정언섬(鄭彦暹)·신상권(申尙權)을 장령으로, 이익운(李翼運)·이숭호(李崇祜)를 지평으로, 이득신(李得臣)을 헌납으로, 임덕제(林德躋)를 정언으로, 박상악(朴相岳)을 교리로, 황최언(黃最彦)을 필선으로, 이유수(李惟秀)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담(李潭)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서북 부료 군관(西北付料軍官)의 사예(射藝)를 친히 시험 보이고, 혹 급제를 내려 주거나 혹은 변장과 수령으로 조용(調用)하게 하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도제조 김상철(金相喆)이 말하기를,
"신이 우러러 전하의 귓전의 긴 터럭을 보건대, 경변(慶忭)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상서(相書)에 ‘눈썹은 귓전의 긴 터럭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장수(長壽)하실 징조가 큰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수의(首醫) 이하에게 앞으로 나와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명하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축하해야 할 것인가?"
하였다. 제조 원인손(元仁孫)에게 명하여 사학(四學)의 제술 방목(製述榜目)을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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