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기묘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갔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각(臺閣)에 나온 대신(臺臣)들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임덕제(林德躋)를 체직(遞職)하였다. 이때에 대신(臺臣)과 사관(史官)으로서 외방(外方)에 있다 하여 곧 출사(出仕)하지 않다가 견벌(譴罰)을 받은 자들이 많았는데, 임덕제가 아뢰기를,
"위벌(威罰)을 갑자기 가하시니, 경색(景色)이 창황(蒼黃)합니다. 이러한데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선왕의 법도를 준수하여 허물이 되지 않는다[遵先未過]’는 말이 고훈(古訓)에 실려 있습니다. 청컨대 세 번 더 생각하셔서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준선미과(遵先未過)’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묻자, 임덕제가 《맹자(孟子)》〈이루장구(離婁章句) 상(上)의〉 문구(文句)를 들어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의 법도를 준수하여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오늘날에 견줄 수가 있는가?"
하자, 임덕제가 피혐(避嫌)하여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가 곧 다른 뜻이 없음을 깨닫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임덕제의 지나간 해의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때에는 곧 궁관(宮官)인 것이겠는가?"
하였다.
11월 2일 경진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맹자(孟子)》·《논어(論語)》 몇 장(章)을 외고, 하교하기를,
"성조(聖祖)께서 병자년118) 에 〈난리를 겪고〉 환도(還都)하신 후 이 전(殿)에서 《맹자》를 주강하셨으니, 오늘의 일은 선조(先祖)를 추념하는 뜻과 선조를 추념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이에서 그치겠는가? 여러 신하들 가운데 성조(聖祖) 때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의 후손들이 많이 있을 것인데, 이제 내가 대우하여 임용하는 것은 성조의 뜻을 본받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황화방(皇華坊)·명례궁(明禮宮)에 거둥하였다. 명례궁은 곧 인조(仁祖)가 계해년119) 에 즉위한 곳으로, 본래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다. 임금이 《실록(實錄)》을 상고하도록 명하여 이를 알고 마침내 거둥하여 살펴본 것인데, ‘양조에서 모두 거둥하셨다[兩朝皆御]’는 네 글자와 ‘계해년에 즉위하신 당[癸亥卽阼堂]’이라는 다섯 글자를 친히 쓰고, 게판(揭板)하도록 명하였으니, 대개 선묘(宣廟)께서도 또한 임진년120) 이후에 이 궁에서 거처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당(堂)에서 내려가 북면(北面)하여 전배(展拜)하고, 내당(內堂)에 들어가서 유신을 불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궁 옆에 사는 백성들 가운데 나이 70세가 넘은 사람들을 불러 쌀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또 정관(政官)을 불러 정사(政事)를 행하며 말하기를,
"오늘은 마땅히 계해년을 뒤좇아 생각하여 이 당에서 친히 정사를 행하겠다."
하고, 마침내 모두 계해년 공신(功臣)의 자손들로 비의(備擬)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미 하비(下批)한 다음 궁문 밖에서 아울러 사은(謝恩)하게 하였는데, 이날 제배(除拜)된 자가 14인이었다.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심이지(沈頤之)를 교리로, 여선형(呂善亨)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3일 신사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어제 관직을 제수한 사람들을 소견하였는데, 유독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의 자손만 보임(補任)받지 못하였으므로, 특별히 전조(銓曹)에 명하여 작과(作窠)해서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이어서 승문원(承文院)에 나아가 명례궁(明禮宮)에 걸 두 현판(懸板)을 지영(祗迎)하고, 감동관(監董官)에게 말을 내려 주거나 혹은 승서(陞敍)하게 하였으며, 공장(工匠)과 하인(下人)들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베풀었다.
포장(捕將) 장지풍(張志豊)을 삭직(削職)하였다. 장령 신상권(申尙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가을 초기에 상소하여 포장이 헌리(憲吏)를 가둔 일에 대해 논했었는데, 그때에 포장 장지풍은 헌리에게 노여움을 옮겨 억지로 죄명(罪名)을 이루고는 또 다시 잡아 가두고 악형(惡刑)을 가했습니다. 악형은 바로 도둑을 다스리는 도구인데, 어떻게 언관(言官)에게 발노(發怒)하여 헌리에게 해독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 방자하여 거리낌없이 체통을 손상시킴이 심합니다. 이와 같이 흉포하고 강퍅한 사람은 의관(衣冠)의 반열에 둘 수 없습니다. 신은 빨리 삭출(削黜)의 형률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장지풍을 잡아다 추문(推問)하여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였다. 대관(臺官)이 무신에게 능멸당한 것이 비록 평소에 중망(重望)을 받지 못한 데에서 나왔다 하나, 장지풍의 패망(悖妄)함이 극도에 달하였는데도 죄벌이 삭직에 그쳤으니, 오히려 형벌을 잘못 베풀어 가볍게 한 것이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4일 임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경재(卿宰)들은 아뢴 바가 없고 대신(臺臣)들은 단지 전계만 거듭 아뢰니,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태평 세계(太平世界)라 이를 만하겠다."
하였다.
이명식(李命植)을 승지로 삼았다.
이담(李潭)을 이조 참판으로, 강시현(姜始顯)을 장령으로, 박상덕(朴相德)을 형조 판서로, 서유린(徐有隣)을 수찬으로, 윤양후(尹良厚)를 겸 필선으로, 심이지(沈頤之)를 수원 시재 어사(水原試才御史)로 삼았다.
11월 5일 계미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가 졸하였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말하기를,
"나는 국구(國舅) 때문만이 아니라, 국사(國事)를 위해서도 잃은 것이 있는 것 같다."
하였는데,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국구의 아우가 있으니, 국구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김한기(金漢耆)가 바야흐로 영남백(嶺南伯)이 되었는데, 임금이 이러한 때에 외방에 있을 수 없다 하여 즉시 그를 체차(遞差)하라 명하고, 이미(李瀰)로 대신하게 하여 즉일로 사조(辭朝)하게 하였다. 김한구는 어영 대장으로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국에서 천망(薦望)을 올리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차마 단망(單望)을 볼 수 없다."
하고, 성복(成服)한 후에 들이도록 명하였다.
박상덕(朴相德)을 예조 판서로, 이미(李瀰)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승문원(承文院)에 나아가 국구를 위해 거애(擧哀)할 때 익선관(翼善冠)·천담복(淺淡服)을 갖추었는데, 상방(尙方)이 포대(布帶)를 바치었다. 백관(百官)이 따라서 곡(哭)하며 함께 울었는데, 대개 구례(舊例)이었다. 거애하기를 마치자, 종친·문무 백관이 문후(問候)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이어(移御)하였는데, 대개 국구의 상(喪) 때문에 상례(常例)를 바꾸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국구가 어찌 단지 군신(君臣)의 의리 뿐이었겠는가? 때로 사사롭게 보면 소년과 수작(酬酌)하는 것보다 나았는데, 이제부터 이후로는 더불어 수작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다.
11월 6일 갑신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구가 11년 동안 나라를 위해 충성한 것을 알고 있는데, 어찌 단지 나만 아는 것이겠는가? 곧 시호(諡號)를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에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충헌(忠憲)’이라고 의논하였다.
서호수(徐浩修)를 사인(舍人)으로, 홍양한(洪良漢)·이성원(李性源)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7일 을유
유성(流星)이 삼기성(參旗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여춘문(麗春門) 밖에 나아가 흑포립(黑布笠)·백포 포대(白袍布帶)를 갖추고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였다. 포대를 벗고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世孫)은 복이 없는가?"
하니, 승지가 말하기를,
"비록 사가(私家)에서도 복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혜경궁(惠慶宮)은 복이 없는가?"
하니, 승지가 말하기를,
"예조의 의주(儀註)에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상고하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의거할 만한 것이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외조(外祖)를 위해 5일 만에 복(服)을 벗고 국구를 위해 3일 만에 복을 벗으니, 높이고 내리는 절도를 볼 수 있다."
하니, 좌부승지 이명식(李命植)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방례(邦禮)인데, 복을 벗는 것이 성복(成服)하기 이전에 있으니, 그것은 정복(正服)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강시현(姜始顯)과 여러 승지들을 파직하였다가, 도로 정침(停寢)하였다. 이날 감찰 다시(監察茶時)121) 를 아뢰자, 임금이 3일의 제도가 미진(未盡)한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평상시와 같이 여김을 엄지(嚴旨)를 내려 꾸짖고, 아울러 파직하도록 명했다가, 잠시 후에 후회하여 모두 도로 정침하도록 명하였으며, 기타 이로 인하여 견벌(譴罰)을 받은 여러 신하들도 또한 정침하도록 명하였다.
김응순(金應淳)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정언 여선형(呂善亨)이 상소하여 일을 논하였는데,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비국 당상 민백흥(閔百興)이 한 사람의 역사(歷辭)122) 하는 수령을 보고, 그 사람됨을 가볍게 여겨 부임(赴任)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임금이 수령이 역사(歷辭)에서 정지당하는 것은 폐단(弊端)이 있다 하여 새로 금령(禁令)을 내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민백흥을 옥(獄)에 가두어 율(律)을 의논하게 하고, 그 고신(告身)을 죄다 빼앗았다. 여선형이 상소하여 그것이 불가(不可)함을 진달하니, 임금이 그 소장을 돌려 주고, 마침내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11월 8일 병술
평안 감사 이경호(李景祜)에게 특별히 병조 판서를 제수하고, 김시묵(金時默)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이경호는 국구(國舅)의 이종 형제(姨從兄弟)인데, 새로 국구의 상(喪)을 당하였으므로, 이경호를 내직(內職)에 옮겨 본병(本兵)을 주장하게 한 것이었다.
11월 9일 정해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여러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조정에 의뢰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김귀주(金龜柱)·김한기(金漢耆)를 먼저 승자(陞資)시켜 장임(將任)의 계제를 삼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 김귀주를 주사(籌司)의 부제거로 삼았을 때 내전(內殿)에서 근심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있었으니, 참으로 어질다. 성만(盛滿)한 경계를 보존시키는 것이 마땅하고 김귀주 숙질(叔姪)은 해조(該曹)의 좌이(佐貳)로 족하니, 우선 내버려 두도록 하라."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본래 공의(公議)가 있으므로, 비록 버리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9일 정해
임금이 귀 안에 긴 털이 났다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보도록 명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손으로 만져 보고 모두 말하기를,
"기이합니다. 이것은 장수하실 징조이니, 막대한 경사(慶事)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이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경들은 매번 잔치를 베풀기를 청하여 나를 피곤하게 하는데, 지금 내전(內殿)에서 어버이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으니, 명년(明年)은 의논할 수가 없다."
하니, 홍봉한(洪鳳漢)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은 단지 명년만 알 뿐이니, 헛되이 보낼 수 없습니다."
하였다.
11월 10일 무자
중궁전(中宮殿)의 탄일(誕日)이므로 백관(百官)이 문후(問候)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을 소견하였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안종규(安宗奎)가 섬 안에 기근(饑饉)이 들었다 하여 호남 연해의 곡식 1만 4천 9백여 석을 주기를 장청(狀請)하였는데, 대신(大臣)들이 이를 어렵게 여겨 감하여 8천 석을 주고자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민(島民)들이 근심하여 떠드는 모양이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하다."
하고, 1만 석을 주도록 명하였다.
민백흥(閔百興)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11월 11일 기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황주(黃州)에 포흠곡(逋欠穀) 4천 석이 있었는데, 임금이 탕감(蕩減)하고자 하여 대신(大臣)과 경재(卿宰)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 불가(不可)하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여 모두 탕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지금부터 장죄(贓罪)로 금고(禁錮)된 자는 비록 사유(赦宥)를 만나 석방된 자라 하더라도 다시 수령에 의망(擬望)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동지(冬至)의 진하(陳賀)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국구(國舅)의 상사가 빈전(殯殿)에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들이 억울한 뜻을 일제히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였다.
특별히 정관(政官)을 불러 친정(親政)을 행하였다. 당초에 명례궁(明禮宮)에서 친정하였을 때 원경순(元景淳)의 아들이 계해년123) 훈신(勳臣)의 후예(後裔)로서 마침 부모의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제(服制)를 마쳤으므로, 비로소 초사(初仕)를 제수하였으니, 원경순은 중궁(中宮)의 외삼촌이었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고지(故紙)를 베껴서 전한 것 때문에 대사간 안표(安杓)에게 서용하지 않는 율(律)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헌부 【장령 정언섬(鄭彦暹)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성 판관(鏡城判官) 박수익(朴壽益)은 탐학(貪虐)이 매우 심하여 원망과 비방이 길에 가득하며, 자인 현감(慈仁縣監) 김양후(金養厚)는 형장(刑杖)을 함부로 쓰고, 징렴(徵斂)으로 원망을 사고 있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과연 이와 같다면 불쌍한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하여 감당하겠는가?"
하고, 아울러 금오(金吾)로 하여금 잡아다 추문(推問)하게 하였다.
정운유(鄭運維)를 대사간으로, 이항조(李恒祚)를 헌납으로, 임해(任瑎)를 장령으로, 이계(李溎)를 정언으로, 서호수(徐浩修)를 응교로, 원인손(元仁孫)을 형조 판서로, 이최중(李最中)을 홍문 제학으로, 이사관(李思觀)을 좌윤으로, 김응순(金應淳)을 동경연으로 삼았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간행하되, 단지 3건만 인쇄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1건은 곧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보내어 판본(板本)을 새기게 하고, 다섯 군데 사고(史庫)에 간직할 것도 또한 남한산성에서 인쇄해 가지고 오게 하였다.
11월 13일 신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대신과 형조 당상을 소견하고, 사수(死囚)를 친히 처결(處決)하였다. 당초에 장흥(長興)의 세선(稅船)이 취재(臭載)하였는데,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정홍순(鄭弘淳)이 고의로 파선(破船)시킨 것이라고 하여 엄중히 다스려 뒷사람을 징계(懲戒)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임금이 섭이중(聶夷中)의 시(詩)의 ‘곡식 한 알마다 모두 백성들의 고생이 담겨 있다.[粒粒皆辛苦]’는 것을 외우며 말하기를,
"도둑질하는 것은 그래도 할 말이 있겠지만, 고의로 파선시킨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금부(禁府)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부사 이동태(李東泰)를 찬배하였다. 또 형조로 하여금 선리(船吏)와 뱃사공[梢工]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모두 도둑질하였다고 죄상을 자백하였고, 법이 참형(斬刑)에 해당되었다. 이에 임금이 마침내 연화문에 임어하여 본율(本律)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이미 실토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둑질한 물건은 오히려 백성들이 먹을 수 있지만, 고의로 파선시킨 것은 비록 혹시 건져낸다 하더라도 물에 잠겼던 쌀을 백성에게 주었다가, 다시 〈정곡(精穀)을〉 징수(徵收)하는 것은 어찌 잔인하지 않겠는가?"
하고, 세 죄인은 특별히 죽음을 면해 주되, 단지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무겁게 곤장을 쳐서 흑산도(黑山島)의 종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제주(濟州)의 공인(貢人)을 소견하고, 선혜청(宣惠廳)에 명하여 양식을 주어서 보내게 한 다음 말하기를,
"이들은 옛날 선조(先朝)께서 애휼(愛恤)하던 백성들이다. 자성(慈聖)께서 신축년124) 에 명정전(明政殿)에서 쌀과 음식을 내려 주시던 일을 내가 친히 보았고, 정축년125) 의 능역(陵役) 때 도민(島民)들의 지극한 정성은 나도 또한 눈으로 보았던 일이었다. 지금 온 공인들에게 어떻게 단지 전례만 끌어대겠는가?"
하고, 전례 외에 쌀을 더 내려 주게 하였다.
11월 14일 임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조강(朝講)을 행하고, 수령(守令)과 찰방(察訪)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소회(所懷)를 진달하고, 왕세손으로 하여금 수은묘(垂恩廟)에 가서 절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신(臺臣)이 마땅히 청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각(臺閣)에서 말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자, 정운유가 인피(引避)하고 체차(遞差)시켜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비답을 내리는 즈음에 대신(大臣)이 대간(臺諫)의 말을 배척하는 것은 또한 사체(事體)를 손상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홍봉한이 또 정운유의 말을 불가(不可)하게 여기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세손이 이미 나이가 장성하였는데, 어찌 가서 절하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아직껏 휘령전(徽寧殿)에 전배(展拜)하지 않았으므로, 수은묘에 먼저 절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대개 정운유가 소원(疏遠)한 자취로써 다른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과감하게 말한 것은 뜻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였는데, 시험에 나아간 자는 단지 두 사람 뿐이었다. 이미 시권(試券)을 바쳤는데, 고관(考官)이 모두 격식을 어겼다 하여 장차 아울러 낙과(落科)에 두려 하자, 임금이 한 사람만 뽑도록 명하니, 고관이 말하기를,
"그 글은 다 입격(入格)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므로, 마침내 뽑지 말도록 명하였다.
11월 15일 계사
하교하기를,
"동향(冬享)이 가까워졌으니, 명일(明日)에 마땅히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회가(回駕)할 때 창의궁(彰義宮)에 들어가서 효장묘(孝章廟)·의소묘(懿昭廟)에 전작(奠酌)하고 오겠다."
하고, 인하여 양묘(兩廟)의 제문(祭文)을 친히 지었다.
11월 16일 갑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계체(繼體)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니, 종통(宗統)을 정한 후 원량(元良)은 마땅히 이날에 효장묘(孝章廟)에 전배(展拜)해야 할 것이며, 백관(百官)도 또한 전례에 의거하여 예(禮)를 행해야 할 것이다."
하고, 임금이 왕세손과 육상묘(毓祥廟)에 전배한 후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효장묘(孝章廟)와 의소묘(懿昭廟)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양성헌(養性軒)에 나아가 《대학(大學)》 경(經) 1장(章)을 강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19세에 이 양성헌에서 사부(師傅) 이현익(李顯益)에게 《대학(大學)》을 배웠는데, 59년 후에 이 양성헌에 올라 이 책을 강하게 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고, 경연관에게 녹비[鹿皮]를, 사관에게 현궁(弦弓)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세손과 의열궁(義烈宮)에 들어갔다가, 회란(回鑾)하여 연화문(延和門)에 이르러, 만회문(萬懷文)을 짓고 승지에게 명하여 인경궁(仁慶宮)의 옛터를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이는 대개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인목 왕후(仁穆王后)가 인경궁에서 승하(昇遐)하였다는 글이 있었으므로, 옛터를 찾아보도록 명한 것이었다. 승지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노인에게 물어 보았더니, 인왕산(仁王山) 아래 사직단(社稷壇)의 왼쪽에 있었던 듯한데, 상세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11월 17일 을미
승지에게 명하여 승보시(陞補試)의 방목(榜目)을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11월 18일 병신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육상궁(毓祥宮)에 동가(動駕)하였을 때 호위한 장교와 군병 및 인경궁(仁慶宮) 옛터의 무사(武士)들을 불러 시사(試射)하고, 사관에게 명하여 인경궁의 시말(始末)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대개 인경궁은 광해조(光海朝) 때 경희궁(慶熙宮)과 함께 세웠는데, 갑자년126)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창덕궁(昌德宮)이 많이 불타자, 정신(廷臣)의 청으로 인하여 인경궁을 철거(撤去)하고 그 재목을 가지고 창덕궁을 수선하였다고 한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한광근(韓光近)·홍낙항(洪樂恒) 등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한광근 등이 이미 찬배(竄配)되자 사간 이정오(李正吾)가 상소하기를,
"한림(翰林)은 비록 새로 진출한 소관(小官)이라 하나, 사필(史筆)을 잡은 근시(近侍)로서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죄가 있으면 유배(流配)의 벌을 베푸는 것은 진실로 불가(不可)할 것이 없겠지만, 군오(軍伍)의 율(律)은 마땅히 시행할 바가 아닙니다. 아침에는 향안(香案)의 관리를 삼았다가 저녁에 주사(舟師)의 군적(軍籍)에 편입(編入)시키는 것이 어찌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하고,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경주 부윤(慶州府尹) 정여증(鄭汝曾)은 용렬하고 마음이 흐려서 구도(舊都)의 중지(重地)에 둘 수 없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19일 정유
약방에서 중궁전(中宮殿)에 상선(常膳)을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안복준(安復駿)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무덕문(武德門)에 나아가 악좌(幄坐)를 설치하게 하고 선전관을 보내어 인경궁(仁慶宮)의 옛터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의주인(義州人)으로 수문장(守門將)이 된 자가 있었다. 하교하기를,
"1백 38년이 되어 임신년127) 6월을 뒤좇아 생각하며 몸소 이 문을 넘어 멀리 목릉(穆陵)을 바라보니,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매우 깊으며, 또한 용만(龍灣)128) 을 생각하니, 나의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다."
하고, 수문장을 현주 조용(懸註調用)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친히 ‘임신년 6월 28일129) 을 뒤좇아 생각하며 문 안에 비석을 세운다.[追憶壬申六月二十八日 立石于門內]’는 15자를 쓰고, 도승지 채제공(蔡濟恭)에게 명하기를,
"후면의 어서(御書)를 새기는 것을 감독해서 무덕문 안 남쪽 가장자리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인목 왕후께서 인경궁(仁慶宮)에서 승하(昇遐)하시니, 즉일로 빈전(殯殿)을 경희궁(慶熙宮)에 옮겨 양전(兩殿)·양궁(兩宮)에 모두 병장(屛障)을 설치하고 걸어서 무덕문을 통해 들어갔다.’는 일이 《인묘실록(仁廟實錄)》에 있다는 것을 임금이 듣고 감동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내전에 돌아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영부사 김치인(金致仁)이 장차 후처(後妻)를 맞아들인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여폐(儷幣)를 내려 주었다. 처음에 김치인이 고 판서 이기익(李箕翊)의 집안에 구혼(求婚)하였는데, 그 집안에서 이를 어렵게 여기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임금에게 권하여 여자 집안에 쌀과 비단을 주어서 성혼(成婚)하도록 권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어렵게 여겨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 보았는데,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마땅히 영상의 말과 같이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여자 집안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과 약혼(約婚)하였으니, 판부사 한익모(韓翼謨)는 여자 집안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임금이 여러 번 물어 보았으나, 끝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고 홍봉한은 임금의 명으로 억지로 혼인을 성사시키고자 하였다. 창관(倉官)인 호조 낭청이 채백(采帛)을 가지고, 임금의 분부라고 칭탁하여 싣고 가기에 미쳤으나 여자 집안에서 받지 않았고 그 모녀(母女)는 죽기를 맹세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김치인이 부득이 차자(箚子)를 올려 스스로 그만두고자 하니, 임금이 몹시 후회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을 줄 알았다면 내가 어찌 혼인하기를 권하였겠는가? 국체(國體)를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가 처녀의 마음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도 편치 않다."
하고, 마침내 혼인을 권하여 내려 주었던 물건들을 환수(還收)하도록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시사(試射)한 사람들에게 상(賞)을 나누어 주었다. 인경궁(仁慶宮) 옛터에 사는 노인을 소견하여 추모기(追慕記)를 쓰도록 명하고는, 감회(感懷)를 어제(御製)하였다.
11월 20일 무술
약방에서 중궁전(中宮殿)에 상선(常膳)을 회복하기를 청하니, 언서(諺書)로 비답을 내려 그대로 따랐다.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승지 김화택(金和澤)에게 85세 된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듣고 외방 고을의 수령을 제수하여 양로(養老)하도록 명하였는데,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 사람뿐만 아니라 문신 가운데 부모가 늙고 집이 가난한 자가 많으니, 마땅히 불쌍히 생각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시종(侍從) 가운데 늙은 부모가 있고 집안이 가난한 자는 외방 고을의 수령에 검의(檢擬)하도록 특별히 허락하였다. 일찍이 문관이 시종신(侍從臣)은 외직(外職)에 다시 주의(注擬)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청이 있었던 것이다.
11월 21일 기해
임금이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무덕문(武德門)에 세운 비석을 보고,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낸 당상·낭관과 음기 서사 감동관(陰記書寫監董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나누어 주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주강을 행하였다. 수령·찰방으로 상경(上京)한 자들을 인견하였다.
11월 21일 기해
박대유(朴大有)·민숙(閔塾)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22일 경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하직하는 수령을 인견하고 칙유(飭諭)하여 보내었다.
이보관(李普觀)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22일 경자
호삼(胡蔘)의 매매(賣買)를 금하였다. 이때에 인삼값이 올라서 북경(北京)에서 호삼(胡蔘)을 사 오는 자가 많이 있었는데, 그 실상은 진삼(眞蔘)이 아니었다. 약방 도제조 한익모(韓翼謨)가 이것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스스로 복용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만, 만약 부모의 병에 잘못 쓴다면, 효자의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중외(中外)에 엄중히 금하도록 유시하고, 또 사신에게 신칙해서 사오지 못하게 하였다.
11월 23일 신축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 각 능전(陵殿)의 동지제(冬至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여러 도(道)의 진상물(進上物)을 압령(押領)해 온 사람을 소견하여 농사에 대해 물어 보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에 관동(關東)에 여역(癘疫)이 바야흐로 치성(熾盛)하였는데, 대신이 말하기를,
"상번군(上番軍) 가운데 전염시키는 자가 있을까 두려우니 관동의 군인은 금중(禁中)에 직숙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관동 군인은 입번(入番)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궁음(窮陰)130) 은 오히려 다음달에 있으나, 일양(一陽)은 〈동짓날인〉 명일(明日)에 처음 생기게 된다. 옛날에 선왕(先王)께서 양(陽)을 부지(扶持)하고 음(陰)을 억제하신 도리가 지극하고도 극진하였는데, 아! 부덕(否德)한 몸으로 임어(臨御)한 지 4기(四紀)131) 가 되었으나 무슨 일이 양을 부지하고 무슨 일이 음을 억제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양을 부지하였다면, 조정이 청명(淸明)해지고 백성들이 즐거이 생업(生業)에 종사한 그런 일이 있었으며, 그 실상이 있었는가? 스스로 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하다. 만약 음을 억제하였다면, 어찌하여 인심의 부박(浮薄)함이 점점 심해지고 어찌하여 기강(紀綱)은 날로 실추되는 것인가? 스스로 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하다. 이는 부덕한 임금이 날로 노쇠해져서 그러한 것이다. 모름지기 오막살이에 사는 백성들을 보건대, 적정(糴政)이 바야흐로 벌어져 사나운 차사(差使)가 향촌(鄕村)에 두루 퍼졌고, 곤궁한 백성들은 저축한 재물이 탕진(蕩盡)되었다. 아! 부덕한 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혜정(惠政)도 미치게 한 것이 없었고, 전조(銓曹)에서도 또한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관원을 삼지 않았으니, 아! 소민(小民)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명일에 적정(糴政)을 특별히 우선 정지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휴식하게 하려 하니, 정원에서는 팔도에 하유(下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홍인한(洪麟漢)이 경비(經費)가 부족하다 하여 관서(關西)의 세미(稅未) 1만 석과, 군향 포목(軍餉布木) 2백 동(同)과, 돈 1만 냥을 가져다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은 자봉(自奉)함이 매우 검약(儉約)하여 전고(前古)에 견줄 바가 없었으나 자질구레한 비용이 점점 많아져서 경용(經用)이 간혹 1년을 지탱하지 못하니, 변방의 불우(不虞)에 대비한 것을 끌어다 쓰고도 오히려 부족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용호영 대장(龍虎營大將) 장지항(張志恒)을 잡아들여 죄를 묻고, 병판에게 명하여 곤장(棍杖)을 때려 조리돌림[回示]을 하게 하였다. 장지항은 성질이 패려(悖戾)하고 교만하여 주장(主將)에게 기꺼이 예를 갖추어 보기를 즐겨하지 않았는데, 병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이 이를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의 교만한 습성을 조장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친림(親臨)하여 엄중히 추문한 것이었다.
동지일(冬至日)에는 적곡(糴穀)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드러나게 영식(令式)을 삼게 하였다. 임금이 동지(冬至)가 명일에 있다 하여 제도(諸道)에 하유(下諭)하여, 서명(西銘)132) 의 뜻을 본받아 백성들을 어린애와 같이 무애(撫愛)하라고 하고, 이어서 이렇게 하교한 것이었다.
11월 24일 임인
이날 임금이 조회(朝會)를 폐(廢)하였으니, 동지일(冬至日)에는 관문(關門)을 닫는다는 뜻을 적용한 것이었다.
11월 25일 계묘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입직(入直)한 군병들을 불러들여 죽(粥)을 내려 주고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월대에서 소견한 뜻을 본받은 것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하교하기를,
"오늘은 날씨가 이와 같이 추우니, 개양문(開陽門)을 유문(留門)133) 하고, 선전관은 종가(鍾街)에 나아가 유랑하는 거지들을 모아 선혜청(宣惠廳)에 보내어 죽을 베풀어 먹이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이계(李溎)가 상소하여 군덕(君德)에 대해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1. 한결같이 하늘의 경계에 삼가소서. 근래에 재이(災異)가 잇달아 이르고, 대낮에 도성에 호랑이가 나오며, 서방에서 혜성이 하늘에 뻗친 것은 이미 비상(非常)이 극도에 달한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겨울이 마치 봄과 같아서 복숭아·오얏나무가 다시 꽃피고 역질(疫疾)로 요절(夭折)한다는 보고가 날마다 사방에서 들리고 있으니, 군신(君臣) 상하는 재이(災異)를 없앨 도리를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5일 만에 행하는 빈대(賓對)는 비록 매번 앞당겨 정한다 하지만, 잠시 진접(晉接)하여 실제로 결말을 짓는 일이 없습니다. 조정에 가득한 진신(搢紳)들은 위엄이 있어 위풍을 떨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전당(殿堂)에 올라서는 찬양(贊揚)하고 전당에서 내려가서는 직무를 게을리하여 백성과 나라의 근심에 대해서는 소가 닭 보듯이 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매번 의뢰할 신하가 없다는 탄식을 하심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조정이 올바르지 못한 것도 또한 반드시 군심(君心)에 근원(根源)이 있는 것이니, 성심(聖心)이 은미(隱微)한 사이에 혹시 털끝만큼이라도 순수하지 않아서 천지(天地)와 더불어 그 뜻을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입니까? 천지는 지성(至誠)으로 운행(運行)하는 것이니 잠시라도 허위(虛僞)가 있으면, 천지의 운행을 본받지 않는 것이요, 천지는 무위(無爲)로서 덕을 삼는 것이니 스스로 총명(聰明)한 체하면 천지의 덕을 본받지 않는 것이며, 천지는 광대(廣大)함으로 도량(度量)을 삼는 것이니 자만하여 다른 사람들을 좁게 여긴다면 천지의 도량을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천심(天心)에 합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풀게 하는 것은, 진실로 다른 데에서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재이(災異)를 만나 구언(求言)하시자, 연신(筵臣) 이경여(李敬輿)가 진언(進言)하기를, ‘하늘은 진실한 도리가 있으니, 이에 응하는 것은 마땅히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피전(避殿)은 궁위(宮闈)를 엄중히 하여 사경(私逕)을 막는 것만 못하고, 감선(減膳)은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는 것만 못하며, 구언(求言)은 실정(實政)을 행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효묘(孝廟)께서 가납(嘉納)하셨습니다. 이 말은 수성(修省)하는 근본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니, 오직 전하께서는 유념하시고 유념하소서.
2. 편벽된 데에 얽매임을 단절하소서.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여러 해 동안 항상 학문에 힘쓰셔서 의리와 인애(仁愛)를 베푸시는 데 정통하고 익숙하시니, 마땅히 털끝만큼이라도 편벽된 데에 얽매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 성질(聖質)이 고명(高明)하고 예지(睿智)가 뭇 사람들 가운데 뛰어나셔서 받들어 보필하고 계옥(啓沃)하는 신하들이 성심(聖心)의 만분의 일도 감당할 수 없으므로 매양 일세(一世)를 경시(輕視)하며 스스로 성지(聖智)가 많다고 여기는 뜻을 두어 저 여러 신하들을 스스로 더욱 보잘것없게 여겨 허물을 구제하기에 넉넉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사이에 편벽되게 주장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군정(群情)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 돌아보며 감히 말하지 못하고, 단지 ‘지당(至當)’ 두 글자로 미봉(彌縫)하는 도리를 삼고 있습니다. 이에 군도(君道)는 날로 위에서 높아지고, 신도(臣道)는 날로 아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가끔 한두 사람의 소원(疏遠)한 신하가 있어서 대략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뜻을 본받아 조금이나마 성려(聖慮)를 거느리면, 위노(威怒)를 갑자기 떨쳐서 찬적(竄謫)이 서로 잇따르는데, 때로는 더러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위세(威勢)와 존엄성(尊嚴性)을 떨어뜨려 심지어는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이끌어 죄를 청하게 되니, 한 생각의 편벽되게 매인 허물이 성덕(聖德)을 손상시키고 치도(治道)를 해롭게 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자기를 극복(克服)하는 것은 반드시 성품이 편벽되어 극복해 나가기 어려운 부분을 극복해 가는 데에 있다.’ 하였으니, 오직 전하께서는 유념하시고 유념하소서.
3. 언동(言動)을 간략하게 해야 합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모년(暮年)에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셔서 마음을 쓰시는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사교(辭敎)는 너무 번다(繁多)하고 동지(動止)는 절도(節度)가 없으므로, 일을 지음이 날카로워 간혹 급히 재촉하는 병통이 있고, 응접(應接)하는 번거로움은 매번 보색(保嗇)에 방해되는 바가 있습니다. 비록 일이 미세(微細)하다 하더라도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 않고, 간혹 격뇌(激惱)하여 비상한 거조(擧措)가 있어서, 성기(聲氣)를 지나치게 허비하시니 뭇 신료(臣僚)들이 두려워하여 떨며, 동가(動駕)를 갑작스럽게 하시니 군졸들이 엎어지고 쓰러지는 데에 이릅니다. 이러한 일들은 치세(治世)의 기상(氣像)이 아니니, 그 보양(保養)하는 방도에 있어서 어찌 손상이 없겠습니까? 정자(程子)는 이르기를 ‘활동과 휴식을 적당히 조절하여 양생(養生)해야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흡취(翕聚)하지 않으면 발산(發散)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오직 전하께서는 유념하시고 유념하소서.
4. 사정(事情)에 순종해야 합니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명철(明哲)하셔서 너무 살피시는 데 가깝고 슬기로우셔서 독단(獨斷)하시는 데 치우칩니다. 무릇 성심(聖心)에 먼저 정하신 일이 있으면 결연하게 반드시 행하시어 매번 뭇 신료들의 계책을 굽혀 성지(聖志)를 따르게 함은 있고 일찍이 성의(聖意)를 버려 군정(群情)을 따르신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옛 성인(聖人)의 허심 탄회(虛心坦懷)하여 자신을 잊어버리는 도리이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의 일을 말하는 소장에 이르러서는, 그 말의 깊고 얕음을 물론(勿論)하고 모두 나라를 근심하며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본받은 것이니, 진실로 쓸 만한 것은 쓰고 쓸 수 없는 것은 버려 두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무릇 소장의 사이에 혹시라도 성심(聖心)에 걸맞지 않음이 있으면, 조금도 가차없이 거절하여 배척하는 뜻을 드러나게 보이시고, 또 잇달아 일어날 것을 염려하셔서 후사(喉司)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시니, 이것이 어찌 조종(祖宗)께서 관원을 설치하신 뜻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또한 성세(聖世)에서 편안함을 물려 주는 계모(計謨)가 아닌 듯합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인(天人)의 뜻을 따르면, 천하의 인사들이 쓰임받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하였으니, 오직 전하께서는 유념하시고 유념하소서.
5. 신공(臣工)에 깊이 유념하셔야 합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신린(臣隣)을 총애하여 일을 맡기시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유독 동칙(董飭)하심이 너무 지나치고 예대(禮待)하심이 아주 부족합니다. 대신(大臣)은 존귀하게 여겨야 하는데도 잠깐 물리쳤다가 곧 회복시키고, 육경(六卿)은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도 작은 죄로서 잡아들이게 하시니, 대소 신료들이 한번 제지(除旨)를 받으면 몸을 돌이키고 머리를 돌리지 못합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조종(祖宗)께서 공경(公卿)과 보필하는 관원을 설치한 것은 어찌 일찍이 구책(驅策)하며 부려먹는 편리함을 취한 것이겠습니까? 비록 세급(世級)이 점점 낮아지고 인재가 따라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 관직을 돌아보면 옛날과 같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붙들어 세워서 격려하고 용동(聳動)시켜 그 풍절(風節)과 염의(廉義)를 면려(勉勵)시키지 않고서 도리어 최절(摧折)하고 속박(束縛)하여 그들로 하여금 날로 쇠잔해지고 쇠퇴하게 하여 돌보시지 않는단 말입니까? 대저 인신(人臣)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도 각각 그 의리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아가 의리의 마땅한 자가 있고 물러가서 의리에 마땅한 자가 있으며, 명을 받드는 것으로써 충성을 하는 자가 있고 바른 것은 올리며 그른 것을 물리침으로 써 충성을 하는 자가 있으니 진실로 일찍이 추주(趨走)하여 승순(承順)하는 것으로써 제일의 의리를 삼지는 않았습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작록(爵祿)을 사랑하면 그 임금을 사랑할 수 없다.’ 하였고, 선정신 이이(李珥)는 말하기를 ‘위로 대신(大臣)으로부터 아래로 일명(一命)에 이르기까지 모두 물러가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국사(國事)는 오히려 다스려질 수 있다.’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조정의 위에서 ‘진퇴(進退)’ 두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하고, 오직 작록(爵祿)으로써 잡아매고 위벌(威罰)로써 독책(督責)하여, 단지 위의 명령만 따르게 한다면, 장차 환득 환실(患得患失)134) 의 무리들이 연줄을 타서 함부로 나아가게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어 충성스럽고 지혜가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해체(解體)되게 함에 따라 명절(名節)이 날로 쇠퇴해지고, 기강(紀綱)이 날로 실추될 것이니, 세도(世道)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 일찍이 이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여. 내 곁에서 보좌하는 자는 신하이다.’ 하였으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고 유념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보고 가상하게 여겨 비답을 내렸는데, 이르기를,
"아! 일양(一陽)이 겨우 회복되었으나, 그 임금은 날로 쇠약해지고 있으니, ‘강개(慷慨)’ 두 글자는 또한 헐후(歇後)한 말이다. 아! 이러한 때에 그대의 소장이 마침 이르렀는데, 다섯 조목 가운데 절실(切實)한 것이 있고, 임금을 위해 허물을 말한 것이 있으며, 숨김 없이 직간(直諫)한 것이 있고, 시사(時事)에 대해 강개(慷慨)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며, 독서(讀書)에 대해 자현(自現)한 것이 있었다. 비록 혹시라도 사세(事勢)가 그렇지 않은 것이 있고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대체를 말한다면 임금을 사랑한 것이다. 근래에 경알(傾軋)하고 협잡(挾雜)하는 것이 아니면, 온 세상이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이것은 장차 나라가 망할 조짐이라고 하겠다. 지금 양(陽)이 회복되는 때를 당하여 이 다섯 조목의 소장을 보게 되었는데, 아! 임금은 비록 노쇠해지고 있으나 오히려 과감하게 말하는 대신(臺臣)이 있으니, 나라가 부흥할 조짐이 아니겠는가? 그대는 비록 이와 같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국세(國勢)를 보건대 나는 그러함을 믿지 않는다. 비록 그렇지만 정문 일침(頂門一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어떻게 차마 노쇠하다 하여 두려워하며 힘껏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무(職務)를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였는데, 이때에 유신(儒臣)들이 이계(李溎)의 소장에 ‘계옥(啓沃)하는 신하들이 상심(上心)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 까닭에, 상소하여 인혐(引嫌)하고 경출(徑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범연히 일컬을 것인데, 조금만 사단(事端)이 있어도 문득 모두 시애(撕捱)하고 가 버리니, 조선에 어찌 유신이 있다고 하겠는가?"
하고, 아울러 패초(牌招)하여 참강(參講)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기백(畿伯) 김화진(金華鎭)을 인견하고 동지일(冬至日)에 적곡(糴穀) 받아들이는 정사를 정지하였는지에 대해 물어 보았다.
11월 26일 갑진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각사(各司)의 구임 낭청과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인견하고 직장(職掌)과 적정(糴政)에 대해 물어 보았다. 숙위군(宿衛軍)에게 죽을 나누어 주도록 명하고, 금위장(禁衛將)에게 선교(宣敎)하기를,
"날씨가 이와 같이 추운데, 잘 입직(入直)하는가?"
하고, 임금이 죽을 진어(進御)하고, 또 군사들에게 죽을 나누어 주게 한 것이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것은 임금이 내려 주신 것이니, 여러 신하들도 차례로 나아가 먹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서유녕(徐有寧)을 승지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정언 이계(李溎)에게 다시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때에 거리낌없이 바른말을 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오늘 들어왔기 때문에 반드시 고지(故紙)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으로 여겼는데 끝내 말한 바가 없었으니 내가 이를 개연(慨然)하게 여긴다."
하였는데, 이계가 아뢰기를,
"근래에 전최(殿最)의 법은 일체 종핵(綜核)이 부족합니다. 잔폐(殘廢)하고 작은 고을은 더러 하고(下考)에 두지만, 거목 웅부(巨牧雄府)는 번번이 상고(上考)를 차지하니, 공법(公法)이 행해지지 않고 인심이 따르지 않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여러 도신(道臣)들에게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진실로 옳다. 각별히 여러 도신들에게 신칙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대각(臺閣)에서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으로서 고치(高致)를 삼고 있으니, 마음 쓰는 것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오늘 지평 이숭호(李崇祜)가 소명(召命)을 어긴 것은 지극히 마땅하지 못한 일이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27일 을사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충자(冲子)를 경계하는 글을 입으로 부르고 승지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아! 시헌력(時憲曆) 신서(新書)가 이미 나왔는데, 너의 할아비 나이가 이미 77세가 되었다. 올해가 저물어 가고 나이도 또한 저물었으니, 이제 와서 유시(諭示)하지 않고 다시 어느 시기를 기다리겠는가? 내가 비록 노쇠하지만, 나의 손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익숙하니, 깊고도 침착한 도량과 분수(分數)를 아는 명철함은 네가 할아비보다 낫다. 그러나 오히려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으니, 성탕(成湯)135) 의 성덕(聖德)도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졌으며, 문왕의 성덕으로도 저녁에도 쉴 겨를이 없었다. 성인(聖人)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겠는가? 정관(貞觀)의 다스림136) 은 처음과 같지 못하였고, 개원(開元)·천보(天寶)의 〈정사(政事)는〉 두 사람같이 판이(判異)하였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사리(私利)와 이욕(利欲)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물욕이 가려졌다고 말할 것이 아니니, 혼미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마원(馬援)이 엄돈(嚴敦)을 경계한 글과 범질(范質)이 종자(從子)를 경계한 말은 천고에 격언(格言)이라 할 수 있다. 마원과 범질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3백 년의 종국(宗國)이겠는가? 오직 내가 너와 더불어 손자는 할아비를 의뢰하고 할아비는 손자를 의뢰하기를 바라는 바가 어찌 마원과 범질에 그치겠는가? 아! 누군들 성현(聖賢)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그 가로막는 것은 바록 사욕이니, 누가 능히 거경(居敬)하는 것을 크게 하고 궁리(窮理)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 사욕을 물리치고 그 덕을 해처럼 밝게 할 수 있겠는가? 네 할아비가 시행하는 정령(政令)의 옳고 그른 것이 모두 일기(日記)에 실려있으니, 그 그른 것은 씻어 버리고 그 옳은 것은 따를 것을 어린 손자에게 깊이 바라는 바이다. 아! 순(舜)임금이 성인이 된 것은 사람을 잘 뽑아서 쓴 데 불과하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묻기를 좋아하면 넉넉해지고, 자기의 뜻만 쓰면 좁고 막히게 된다.’ 하였으니, 사람이 어떻게 자족(自足)하여 자만(自滿)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역(周易)》 겸괘(謙卦)는 육효(六爻)가 모두 길(吉)하며, 주공(周公)의 삼토 삼토 삼악(三吐三握)137) 도 또한 이 뜻인 것이다. 너의 할아비가 비록 부덕(否德)하나, 일찍이 이 뜻을 알고 항상 마음속으로 포의(布衣)처럼 여겨 이러한 마음으로서 위로 동조(東朝)를 받들고 아래로 신린(臣隣)를 접견하였는데, 지금까지 이 마음은 한결같다. 무릇 마음에 해롭고 정사에 해로운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교만이고, 하나는 쾌락(快樂)이니, 그 유폐(流弊)는 홍수(洪水)와 맹수(猛獸)보다 심한 것으로서, 이것은 너의 할아비가 밤낮으로 경계하던 것이었다. 《제자직(弟子職)》에 이르기를, ‘온순하고 공손하여 스스로 겸허(謙虛)해야 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삼가는 마음으로 공경해야 한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충자(冲子)가 더 힘써야 할 부분이다. 대저 중인(中人) 이상은 그 작은 재주를 믿고 일세(一世)를 흘겨보는 자가 많은데, 이는 도량이 좁은 데 지나지 않는다. 제왕(帝王)에게 있어서 이러한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충자는 명심(銘心)하고 명심하라."
하였다. 쓰기를 마치자, 홍문관으로 하여금 정서(正書)하여 여러 대신들에게 두루 보이게 하였으며, 운각(芸閣)으로 하여금 간인(刊印)하여 동궁(東宮)에 들여보내고, 사고(史庫)에 간직하게 하였다.
11월 28일 병오
주강을 행하였다.
11월 29일 정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신이 삼가 어제의 어제문(御製文)을 보건대, 진실로 천고(千古)의 격언(格言)이었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상복(金相福)은 말하기를,
"일전에 대신(臺臣)에게 내리신 비답을 보고 신 등은 흠앙(欽仰)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제 이 어제(御製)는 더욱 절실하게 흠탄(欽歎)하고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계(李溎)의 소장은 진실로 혼후(渾厚)하여 귀에 거슬리는 바가 없었다. 비록 정리(情理)에 벗어난 말이 있었으나 이는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또한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이러한 부분은 내가 이른바 지금은 옳지만, 어제는 옳지 않았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또한 혹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상께서 용서하신다면, 더욱 성덕(聖德)이 빛날 것입니다."
하였고, 한익모(韓翼謨)는 말하기를,
"이에서 성학의 조예(造詣)가 깊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계의 소장을 가납(嘉納)한 것은 나도 또한 뜻이 있어서이다. 지금 이 훈계(訓戒)는 세손(世孫)에게 효험이 있을 듯하다."
하니, 영상이 말하기를,
"어찌 다만 세손 뿐이겠습니까? 진실로 백 대(代)의 가훈(嘉訓)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언 이계(李溎)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울릉도(鬱陵島)는 지역이 왜인의 지경과 가깝기 때문에, 물산(物産)을 사사롭게 취하는 것을 금하는 법의(法意)가 매우 엄중한데, 근래에 듣건대 본도(本島)의 삼화(蔘貨)가 근처 고을에서 두루 통행되다가 현발(現發)되어 속공(屬公)한 것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지방관이 어두워서 살피지 못한 것이니 지극히 해연(駭然)합니다. 청컨대 삼척 부사(三陟府使) 서노수(徐魯修)를 잡아다 추문해서 엄중하게 조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이명운(李明運)은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 오로지 탐학(貪虐)만 일삼고 진휼(賑恤)할 것은 생각지 않았으므로, 허다한 도민(島民)들로 하여금 구렁에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그 죄상을 논하면 폐고(廢錮)해도 오히려 가벼운데, 가볍게 찬배(竄配)하였다가 곧 용서하였으며, 다시 북쪽 변방의 직임(職任)을 주었으니, 성조(聖朝)의 탐욕을 징벌(懲罰)하는 정사에 결흠(缺欠)이 있습니다. 청컨대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명운을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북백(前北伯) 유한소(兪漢簫)가 순행하다가 길주(吉州)에 이르러 갑자기 죽기에 이르렀는데, 길주 목사 김재(金梓)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괄시(恝視)하여 심지어는 반구(返柩)할 방책이 없었으니, 그가 조금이나마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다만 이에서 그칠 수 있겠는가?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 분수를 편안하게 지키지 않는다[不安分]’는 세 글자는 진실로 오늘날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사대부들이 모두 그러하고, 소민(小民)들이 더욱 심하며, 이서(吏胥)의 처녀(妻女)들에 이르러서는 감히 교자(轎子)를 타고 다니며, 상역(象譯)의 자제(子弟)들이 심지어 예건(禮巾)을 착용하였으니, 명분(名分)의 실추됨이 진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청컨대 법사(法司)에 신칙(申飭)해서 규찰(糾察)하여 엄중히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진달한 것도 또한 말세(末世)를 면려(勉勵)시킬 하나의 단서이다. 그러나 만약 전례에 따라 아뢴 바에 의거하게 한다면 장차 삼사(三司)의 간사한 아전들이 제 주머니를 채우려 하여 도하(都下)의 중서(中庶)들이 반드시 그 폐해(弊害)를 받게 될 것이니, 단지 본서(本署)의 제조로 하여금 엄중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김상익(金相翊)을 이조 참의로, 정광한(鄭光漢)을 대사헌으로, 조정(趙晸)을 대사간으로, 황최언(黃最彦)을 집의로, 최광벽(崔光璧)·송영(宋鍈)을 장령으로, 조환(趙換)·노서국(盧瑞國)을 지평으로, 이진형(李鎭衡)을 사간으로 삼았다.
기생(妓生)을 데리고 살다가 죄를 받아 편배(編配)되었던 자들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세초(歲抄)를 보고 문관·무관·유생·음관을 논하지 말고 아울러 특별히 석방하게 하였으니, 대개 지난날의 처분(處分)이 너무 지나쳤음을 뒤좇아 후회한 때문이었다.
11월 30일 무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다시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조강을 행하고, 하직하는 수령(守令)을 소견하였다. 또 승보시(陞補試)에 뽑힌 사람들을 불러 그들이 지은 글을 외어 아뢰게 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유생은 곧 고 부제학 이병태(李秉泰)의 손자이었다. 하교하기를,
"그 할아비가 무신년138) 에 승지가 되었었는데, 그 손자가 이제 무신일(戊申日)에 전중(殿中)에 입시하였다. 아! 그 할아비의 청백(淸白)함을 내가 항상 감탄하여 상주었었는데, 그 할아비가 오히려 청빈하였거늘 더욱이 그 손자이겠는가? 그 조모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하는데, 해가 장차 저물어 가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세찬(歲饌)을 내려 주게 하여 그 조모를 봉양하게 하라."
하였다. 정언 이계(李溎)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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