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기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황감을 나누어 주고 선비들을 시험 보였으며, 마침내 내전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세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모쪼록 네 할아비의 이 뜻을 본받도록 하라. 만약 어진 보필을 얻는다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하고, 수위를 차지한 유학(幼學) 조재위(趙載偉)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영중추부사 김치인(金致仁)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자(臣子)의 혼인은 사사로운 일인데 위로 군부(君父)의 생각에 근로(勤勞)를 끼친 것이 오늘과 같은 경우가 옛날에도 또한 있었겠습니까? 물건을 내려주신 은혜가 비록 후하였지만 부녀(婦女)의 뜻을 빼앗기가 어려웠습니다. 설령 신이 이를 버리고 평생 동안 늙은 홀아비로 산다 하더라도 거북함이 더욱 심할 것이니, 의리로는 하지 않는 데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이로 인하여 반드시 폐륜(廢倫)이 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물어 보자, 위협해서는 안된다고 하니, 비답하여 허락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혼례(婚禮)의 일월(日月)을 임금에게 고하는 것은 남녀의 관계를 신중하게 여긴다는 뜻인데 옛날에는 있었으나 후세에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이제 중매장이를 통하여 폐백을 받는 일이 있지 않은데, 외람되게 임금에게 고하여 위로 은혜를 손상시킨 잘못이 있었고, 아래로는 은혜를 간구(干求)한 혐의에 관계되었으나, 마침내 혼인은 성사되지 않고 거조(擧措)만 전도되기에 이르렀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76책 113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4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혼례(婚禮)의 일월(日月)을 임금에게 고하는 것은 남녀의 관계를 신중하게 여긴다는 뜻인데 옛날에는 있었으나 후세에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이제 중매장이를 통하여 폐백을 받는 일이 있지 않은데, 외람되게 임금에게 고하여 위로 은혜를 손상시킨 잘못이 있었고, 아래로는 은혜를 간구(干求)한 혐의에 관계되었으나, 마침내 혼인은 성사되지 않고 거조(擧措)만 전도되기에 이르렀으니, 애석하다."
12월 2일 경술
약방에서 두 번 입진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소견하였다.
정상순(鄭尙淳)을 이조 참판으로, 이휘지(李徽之)를 이조 참의로,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으로, 엄인(嚴璘)을 대사간으로, 윤사국(尹師國)을 집의로, 이수훈(李壽勛)을 사간으로, 김양심(金養心)을 장령으로, 유훈(柳薰)을 지평으로, 이익운(李翼運)을 정언으로, 서유원(徐有元)을 필선으로 삼았다.
12월 3일 신해
평안 감사 민백흥(閔百興)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12월 3일 신해
사간 윤사국(尹師國), 집의 이수훈(李壽勛)을 연해(沿海)에 찬배하였다. 임금이 대간(臺諫)들의 규피(規避) 때문에 매번 엄지(嚴旨)를 내리고 찬배가 잇달았으나, 행공(行公)하는 자가 오히려 적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선에서는 양사(兩司)를 장차 줄여야 하는가?"
하였다. 수령의 서경(署經) 때문에 여러 대간들을 잇달아 재촉하며 잇달아 출패(出牌)하였으나, 모두 나오지 않으니, 임금이 노하여 윤사국을 해미(海美)에, 이수훈을 해남(海南)에 편배하고, 조영진(趙榮進)·엄인(嚴璘)을 어울러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며, 김양심(金養心)을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진하였다. 합제(合製)에서 뽑힌 유생들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박기채(朴起采)를 승지로, 송형중(宋瑩中)을 대사헌으로, 정운유(鄭運維)를 대사간으로, 황간(黃幹)을 사간으로, 이득일(李得一)을 집의로, 원계영(元啓英)을 장령으로 삼았다.
12월 4일 임자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숭릉(崇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조강을 행하여 《소학지남(小學指南)》을 강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소학(小學)》 일부에 대해 마음속에 깨달아 간직해 두고 몸소 행하셔서 치평(治平)의 교화를 이루었으니,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향리에는 좋은 풍속이 없고 세상에는 어진 인재가 없으니, 만약 향리에 착한 선비가 있게 하시려면, 그 명위(名位)를 빌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아뢰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찬선 김원행(金元行)을 아직 승진시켜 임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본래 출사(出仕)하려 하지 않는데, 어떻게 초래(招徠)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향리에 좋은 선비가 있게 하는 것은 옳겠지만, 향리에 진신(搢紳)이 있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만약 이러한 무리를 향용(嚮用)하면, 《유곤록(裕昆錄)》을 없애야 할 것이고, 여러 유신들이 반드시 나를 괴롭힐 것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고, 단지 묘모(廟謨)만 강하였다. 홍봉한이 또 아뢰기를,
"왜공미(倭供米)에 대해 번번이 한기(限期)를 늦추어 달라는 청은 지극히 놀라운 일이지만, 차왜(差倭)가 온 지 이제 여러 달이 되었으니, 전례가 있는 일은 빨리 허락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제주(濟州)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환곡(還穀)을 받아들이는 일을 정지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년은 크게 흉년이 들지는 않았으니,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다시 의논하여 품정(稟定)하도록 명한 후에 임금이 ‘잇달아 해마다 거듭 기근이 들었고, 또 날씨가 추운 때를 당하여 징수(徵收)하고 운송하게 할 경우 손발이 얼 것이니, 그 정경(情景)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먼 고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운송하지 못하였다면 장차 시기가 있으니, 제도(諸道)의 구환(舊還)은 곧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이 아뢰기를,
"전후에 찬적(竄謫)된 사람들이 차례로 석방되었는데, 유독 이의철(李宜哲)에게는 아직 한번도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나이가 70이 가까운데 오랫동안 장기(瘴氣)가 있는 고을에 머물러 두면 살아서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진념(軫念)을 더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그르다."
하고, 송형중을 체차(遞差)하도록 명했다가 곧 정침하였다.
임금이 승문원(承文院)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明)나라의 칙문(勅文)이 있는가?"
하자, 입직관 홍귀서(洪龜瑞)가 대답하기를,
"《풍천록(風泉錄)》이 있습니다."
하니, 가지고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좌우에 말하기를,
"경들은 책명(冊名)을 고치는 것에 대해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연은록(延恩錄)》이라고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감황은록(追感皇恩錄)》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이 옳다."
하고, 인하여 친히 책명을 썼으며, 또 흠봉각(欽奉閣)을 고쳐 친히 경봉각(敬奉閣)이라고 쓰고, 게판(揭板)하게 하였다.
김응순(金應淳)을 도승지로, 서명선(徐命善)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5일 계축
유신을 불러 서한(西漢)과 동한(東漢)의 사명(詞命)을 읽도록 명하고, 고조(高祖)와 광무제(光武帝)의 우열(優劣)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시강관 서호수(徐浩修) 등이 말하기를,
"고조의 활달한 대도(大度)는 진실로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살펴보건대, 남무(南廡)에서 두건을 벗고 이마를 내놓은 채 예모를 갖추지 않은 것을 보건대 기상이 조용하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니, 걸상에 걸터앉아 영포(英布)를 보았다는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광무제가 고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하니, 좌우에서 ‘예예’ 하며 칭찬하였다.
이성억(李聖檍)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6일 갑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온릉(溫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드디어 내전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세 시임 대신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인조(仁祖)가 승하(昇遐)한 것이 이 해에 있었다 하여 특별히 명년(明年) 5월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정지하도록 명하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예(禮)에 휘일(諱日)은 있지만 휘월(諱月)은 없는데, 더욱이 휘세(諱歲)이겠습니까? 주(周)나라 때에 제도(制度)가 크게 갖추어지고 역년(歷年)이 8백 년이나 되지만, 선왕의 휘세 때문에 음악을 정지했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음악은 잠시나마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선조(先朝) 때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려도 오히려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내가 추모(追慕)하여 음악을 정지하는 것이니, 뭇 신하들이 막을 것이 아니다."
하였다.
구윤옥(具允鈺)·윤동승(尹東昇)·구상(具庠)·김치공(金致恭)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7일 을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탕약(湯藥)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청대(請對)하여 탕약을 진어(進御)하기를 권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차라리 어선(御膳)은 빠뜨릴 수 있지만, 탕제(湯劑)를 정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잇달아 아뢰며 힘껏 청하니, 비로소 마지못해 올리도록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주례(周禮)》에 임금에게 민수(民數)를 바치면, 임금은 절하여 이를 받는다고 하였으니,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는 이 법이 매우 소홀해서 식년(式年)의 호적(戶籍)도 허실(虛實)을 상하가 서로 속이고 있다. 경조(京兆)로 하여금 식년마다 호구(戶口)의 증감(增減)을 고핵(考覈)해서 아뢰게 하고, 따라서 상법(常法)을 삼게 하라."
하였다.
12월 8일 병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사한제(司寒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다시 연화문에 돌아와 석강을 행하고, 나이 80세 이상된 부로(父老)들을 소견하여 쌀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특별히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사한제를 행하게 하였으니, 이때에 겨울이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이를 근심하여 특별히 응교 서호수(徐浩修)를 보내어 제사를 행하게 한 것이었다. 밤 3경(三更)에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의 행랑에 나아가 땅에 자리를 펴고 부복(俯伏)하였는데, 승지 김치공(金致恭) 등이 말하기를,
"밤이 오래 되어 매우 추운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스스로 경솔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춘추(春秋)》에서 얼음이 얼지 않음을 나무랐다. 내가 비록 부덕(否德)하지만, 사향(蜡享)이 멀지 않았는데 겨울이 따뜻하여 이상하다. 어제 근시(近侍)를 보내어 사한제(司寒祭)를 지내게 하였으나, 두려워서 마음이 편할 겨를이 없는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한데서 기도하는 것이다."
하였다. 누진(漏盡)139) 때에 이르러 임금이 내전으로 돌아왔는데, 동틀 무렵에 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가 살을 엘 듯이 추워져 강물이 모두 얼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12월 8일 병진
이재협(李在協)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9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여러 대신들이 먼저 음악을 회복하고 세수(歲首)에 헌수(獻壽)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요순(堯舜) 때 어진이가 잔치를 청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우상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순(舜) 임금 때에도 남훈가(南薰歌)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묘모(廟謨)의 계획을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원의손(元義孫)을 승지로 삼았다.
강원 감사 홍명한(洪名漢)을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당초에 울릉도(鬱陵島)에 인삼을 캐는 잠상(潛商)을 삼척 영장(三陟營將) 홍우보(洪雨輔)가 염탐하여 붙잡았는데, 추잡한 비방이 많이 있었다. 일이 발각되어 홍우보가 죄를 받아 폄출(貶黜)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홍명한이 서신(書信)을 왕래하여 참섭하였다는 것으로써 장령 원계영(元啓英)이 상소하여 논핵(論劾)하기를,
"울릉도에 대한 금령(禁令)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강원 감사 홍명한은 그 집안의 무신인 삼척 영장 홍우보와 몰래 서신을 왕래하여 사람들을 모아 몰래 들어가서 인삼을 채취한 것이 자그마치 수십 근에 이르렀습니다. 지방관에게 현발(現發)되기에 이르러서는 금령을 범한 백성은 도내(道內)에 형배(刑配)하고 속공(屬公)한 인삼은 돌려 주어 사사로이 팔았으며, 인하여 또 다른 일을 끌어대어 본관(本官)을 장파(狀罷)함으로써 미봉(彌縫)할 계책을 삼았으니, 이것은 이미 용서하기 어려운 죄입니다. 그 죄범(罪犯)을 논하면 진실로 영장보다 더한데, 가벼운 견벌(譴罰)이 단지 영장에게만 그치고, 주벌(誅罰)이 홍명한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국법(國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니며, 훗날의 폐단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강원 감사 홍명한에게 빨리 삭직(削職)의 율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협잡(挾雜)이라고 책유(責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대신에게 물었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홍명한이 반드시 인혐(引嫌)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체차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임금이 대신할 만한 자가 누구인지를 묻자, 홍봉한이 서명선(徐命善)을 추천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순상(巡相)140) 이 정하여졌다."
하였다.
정상인(鄭象仁)을 부응교로, 조재준(趙載俊)을 수찬으로, 김상묵(金尙默)을 보덕으로, 이최중(李最中)을 예조 참판으로, 서명선(徐命善)을 강원 감사로, 안집(安𠍱)을 동의금으로, 정상순(鄭尙淳)을 동경연으로, 이담(李潭)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지평 유훈(柳薰)이 상소하여 다섯 조목의 시폐(時弊)를 진계하였는데, 첫째 과제(科制)를 바꾸라는 것이고, 둘째 기강(紀綱)을 세우라는 것이며, 셋째 수령(守令)을 가리라는 것이고, 넷째 사치(奢侈)를 금하라는 것이며, 다섯째 옥송(獄訟)을 공평하게 하라는 것이었으니, 임금이 우납(優納)하였다.
12월 10일 무오
여러 대신들이 음악을 회복하기를 청하고, 또 원조(元朝)에 진하(陳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1일 기미
임금이 승문원에 거둥하여 황은편(皇恩編)을 경봉각(敬奉閣)에 봉안(奉安)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승문원에 나아가 옛날부터 전해진 명(明)나라의 조칙(詔勅)을 청나라의 조칙과 한 상자에 섞어 소장하고 있는지를 물어 보고, 상서원의 관원을 불러 묻기를,
"명나라의 마패(馬牌)는 그 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7백여 개입니다."
하니, 상자를 고쳐서 본원(本院)의 누각 위에 소장하도록 명하였었다. 또 본원의 입직한 관원을 불러 묻기를,
"명나라의 칙문(勅文)이 있는가?"
하였는데, 입직한 관원이 대답하기를,
"《풍천록(風泉錄)》이 있습니다."
하고, 또 청나라의 조칙을 넣어 둔 상자에 섞어 소장하고 있다고 아뢰자, 임금이 슬픈 빛을 띠고 감개(感慨)하는 마음이 일어나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명나라가 멸망된 지 이제 1백 년이 지났지만, 존주(尊周)하는 마음은 일찍이 하루도 잊지 않았었다. 이제 당당한 천자(天子)의 조칙을 오랑캐의 조칙 가운데에 섞어 두는 것이 옳겠는가?"
하고, 마침내 따로 한 책을 만들어 《추감황은편(追感皇恩編)》이라고 이름을 짓고 운관(芸館)으로 하여금 교정하여 인출(印出)하게 하였으며, 제조 원인손(元仁孫)·채제공(蔡濟恭)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공역을 마치자, 1본은 대궐의 흠봉각(欽奉閣)에 내려 소장하도록 명하고, 1본은 임금이 친히 경봉각에 간직하였다. 원인손·채제공에게 가자(賀資)하고, 감인(監印)한 여러 낭관들을 승륙(陞六)시켰으며, 장역(匠役)들에게 쌀과 베를 차등있게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12월 11일 기미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고, 제도의 구포(舊逋)를 견감해 주었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주도록 하였다.
전라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12월 12일 경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제도(諸道)에 신칙해서 속전(贖錢)을 넉넉히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당초에 장례원(掌隷院)을 혁파하고 보민사(保民司)를 설치한 다음 제도로 하여금 속전을 거두어 사(司)의 용도(用度)에 보태게 하였었는데, 제도 가운데 기꺼이 보내지 않는 곳이 많고, 보내는 것도 또한 수(數)가 적었기 때문에 홍봉한이 엄중히 신칙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풍년이 들어도 백성들은 오히려 불쌍히 여길 만한데, 더욱이 잇달아 해마다 거듭 기근이 든 나머지이겠는가? 날씨가 이와 같이 추워졌는데, 지난번 대간(臺諫)의 소장은 비록 아읍(阿邑)141) 의 뇌물을 바치는 무리도 오히려 어려울 것이거늘, 동문(董門)에서 징색(徵索)하는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이런 때를 당하여 징수하고 운송하게 할 경우 손발이 모두 얼 것이니, 그 정경(情景)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먼 고을에 이르러서는 지금까지 수봉하지 못하였으면, 장차 시기가 있으니 제도의 구환(舊還)과 구포(舊逋)는 곧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게 하고, 하유(下諭)한 후에 수령이 된 자가 버려둔 채 억지로 받아들일 경우 마땅히 무겁게 다스릴 것이니, 일체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유훈(柳薰)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수보(洪秀輔)를 집의로, 이정오(李正吾)를 사간으로, 홍경안(洪景顔)을 장령으로, 이병정(李秉鼎)을 교리로, 구선복(具善復)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12월 13일 신유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노인들의 세찬 단자(歲饌單子)를 올리게 하였는데, 모두 7백 50여 인이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수(長壽)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금 세모(歲暮)를 당해 여러 도(道)로 하여금 기구(耆舊)의 세유(歲遺)142) 를 곧 초계(抄啓)하게 하라."
하고, 또 호조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70세 이상된 명부(命婦)의 집에 쌀과 비단을 실어 보내게 하였다.
12월 14일 임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서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사옹원에 두루 들어가서 낭청안(郞廳案)을 가져다 보다가, 고 영부사 윤동도(尹東度)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승지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한 다음 내전으로 돌아왔다. 유신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심경(心經)》과 《경세문답(警世問答)》을 강하였다.
12월 15일 계해
경외(京外)의 전최(殿最)를 개탁(開坼)하였다.
12월 16일 갑자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호남(湖南)의 전최(殿最)를 읽게 하였는데, 영광 군수(靈光郡守) 이방일(李邦一)이 공문(公門)을 활짝 열어 놓아 백성들이 제 집같이 여겨 돌아간다고 지목하자, 임금이 순리(循吏)의 기풍이 있다고 칭찬하고, 전조(銓曹)로 하여금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게 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3백 고을의 수령들을 용동(聳動)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12월 17일 을축
임금이 전 평안 감사 이경호(李景祜)를 인견하고, 남당성(南塘城)의 역사에 대해 물어 보았다.
정조(正祖)의 물선(物膳)을 정지하고, 입춘(立春), 단오(端午)에는 첩자(帖子)를 바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음악을 정지한 이래로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서 매일 간지(干支)를 헤아려 만약 휘년(諱年)이나, 탄년(誕年)에 해당하면 반드시 슬퍼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새로웠다. 그래서 삭제(朔祭)·망제(望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몸소 지영(祗迎)하여 혹시라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또 지나치게 사치(奢侈)함을 경계하는 뜻으로 어선(御膳)을 정지하라는 명을 내리고, 말하기를,
"상신(相臣)이 이를 알고 있는가? 알면 반드시 와서 정침하기를 청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예관(禮官)이 청대(請對)하고, 물선을 정지하고 첩자를 정지하는 일은 오랫동안 할 수 없다고 힘써 말하니, 단지 물선만 허락하였다.
김응순(金應淳)·이수봉(李壽鳳)·김면행(金勉行)·이세연(李世演)을 승지로 삼았다.
지평 유훈(柳薰)이 상소하기를,
"전 사간 홍상직(洪相直)은 오로지 부박(浮薄)함만 일삼고 몸가짐이 비루(鄙陋)하며 권요(權要)에 아첨하고 붙달아 좌우로 날뛰었습니다. 일찍이 병조 낭청으로 있었을 때에는 탐비(貪鄙)하고 불법(不法)한 정상이 남김없이 죄다 드러났었으니, 마땅히 먼저 양사(兩司)의 망(望)을 개정(改正)하고, 인하여 삭판(削版)의 율을 시행해야 합니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이윤성(李潤成)은 의젓이 편안한 것만을 일삼아 대소의 정령(政令)에 전혀 힘을 쓰지 않으므로, 교활한 아전이 틈을 엿보아 농간을 부려 백성들이 폐해(弊害)를 입는 자가 많으니, 파직(罷職)함이 마땅합니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윤광(尹珖)은 형장(刑杖)을 매우 혹독하게 쓰고 적정(糴政)은 너무 범람하며, 대수롭지 않은 보장(報狀)을 번번이 아전의 손을 빌리고 허다한 옥송(獄訟)을 반드시 빈객의 계모(計謀)에 의뢰하고 있으니,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림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홍상직은 부박(浮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일찍이 은혜를 저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개정(改正)하는 것은 정식(定式)에 어긋남이 있으니, 단지 삭판(削版)만 시행하도록 하라. 이윤성의 일은 아뢴 바에 의거하고, 윤광은 먼저 체차(遞差)한 다음 잡아다 추문(推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8일 병인
윤득우(尹得雨)를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내병조(內兵曹)에 나아가 친히 도정(都政)을 행하니, 이조 판서 신회(申晦), 병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이 진참(進參)하였다. 하교하기를,
"모년(暮年)에 친정(親政)을 어찌 침전에서 수응(酬應)하겠는가? 특별히 내서전(內西銓)에 임어(臨御)하여 친정하기로 하였다. 지난번에는 경운궁(慶運宮)에 거둥하였었는데, 오늘 이렇게 거둥하여 서전(西銓)에 임어한 것은 또한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다. 한(漢)나라가 한나라를 이룩한 것은 오로지 양이천석(良二千石)143) 에서 말미암았으니,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모년의 친정이겠는가? 관직을 위하여 인재를 가려 백성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일체 양전(兩銓)에 칙려(飭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미 개정(開政)하여 시종(侍從)으로서 수재(守宰)에 의망(擬望)된 자가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에 80세에 가까운 임금이 있는데, 시종(侍從)을 염피(厭避)하니, 어찌 외방 고을의 수령이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그 망(望)을 발거(拔去)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전후에 시종으로 수령에 주의(注擬)받은 자들을 일체 아울러 금고(禁錮)시키도록 명하였다. 지평 유훈(柳薰)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자 하유(下諭)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홍수보(洪秀輔)는 아뢴 바에 의거하도록 하라. 이정오(李正吾)는 원래 향리(鄕里)에 있었던 자가 아니니, 곧 그 지역에 투비(投畀)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에게 서용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게 하였는데, 패초(牌招)를 어긴 때문이었다. 외방에 있는 사람과 집이 도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울러 체차(遞差)시키도록 명하였다. 상번(上番) 유신 조재준(趙載俊)을 정언으로 삼았는데, 조재준이 또 패초를 어기니 파직하고, 하번(下番) 유신 이병정(李秉鼎)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은(李溵)을 대사헌으로, 이일증(李一曾)·최민(崔)을 장령으로, 윤양후(尹養厚)를 응교(應敎)로, 이득종(李得宗)을 호조 참판으로, 이명식(李命植)을 대사성으로, 김범로(金範魯)를 경기 수사로, 임성(任珹)을 사간으로, 김노순(金魯淳)을 헌납으로, 홍용한(洪龍漢)을 겸 보덕으로 삼았다.
전 동지 유발(柳發)에게 특별히 오위 장을 제수하였다. 유발의 증조(曾祖) 유형원(柳馨遠)은 박식(博識)하고 학술(學術)이 있어서 경제(經濟)로 자부하였는데, 일찍이 《반계수록(磻溪隧錄)》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임금이 유발의 나이가 80여 세 된다는 것을 듣고 희귀하게 여겨 특별히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었다.
12월 19일 정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기 싫어하여 사교(辭敎)가 몹시 엄하니 뭇 신하들이 두려워하며 의혹해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모두 진어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는가?"
하였는데, 모두 일제히 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려는 마음을 볼 수 있다."
하고, 마침내 올리게 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유훈(柳薰)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성규(李聖圭)·이성원(李性源)·이수봉(李壽鳳)·김면행(金勉行)을 승지로 삼았다.
장령 권영(權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북청(北靑)의 죄인 이찬장(李贊長)이 이미 승복(承服)하였고, 피살된 여인도 또한 이미 정표(旌表)하였는데, 이찬장의 주살(誅殺)을 아직도 지체하고 있으니, 인심이 의혹하고 있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모으면서 벼슬을 제배(除拜)하는 것은 예로부터 전례가 있었는데, 작년에 북청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고을 사람 조계덕(趙繼德)이 소금 1백 석을 바쳤으나, 한 자급의 은혜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단천 부사(端川府使) 노훈상(盧勛相)은 분수에 넘치게 받아들여 원망을 사고 있으며, 홍원 현감(洪原縣監) 이의석(李義錫)은 광패(狂悖)하여 함부로 장형(杖刑)을 베풀고 있으니, 청컨대 아울러 먼저 파직한 후에 잡아오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찬장의 일은 복계(覆啓)를 거치지 않아서 그렇다. 조계덕의 일은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노훈상·이의석의 일은 아뢴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2월 20일 무진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에 천신할 황감을 친히 봉하여 예조 판서 이경호(李景祜)로 하여금 배진(陪進)하게 하였다. 마침내 연화문(延和門)에 전좌(殿座)하여 새로 제수한 수령들을 소견하고, 칠사(七事)144) 를 외게 하였는데, 이를 마치자 양리(良吏)가 되고 싶은지 능리(能吏)가 되고 싶은지 물으니, 모두 대답하기를,
"양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정사에서 제수한 것은 정밀하게 가렸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수령이 한때 잘 대답한 것으로 어떻게 재능이 있고 없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전당(殿堂)에 올라 주대(奏對)한 바가 비록 허물이 없었으나, 고을에 부임하고 나서 치적(治績)은 볼 만한 것이 드물었는데도 임금이 오히려 살피지 않은 채 단지 말과 용모만 취하여 가장(嘉奬)하였으니, 옛날에 명실(名實)을 종핵(綜核)한 정사는 아마도 이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6책 113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42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144] 칠사(七事) : 수령(守令)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 즉 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姦猾息)임.
사신은 말한다. "수령이 한때 잘 대답한 것으로 어떻게 재능이 있고 없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전당(殿堂)에 올라 주대(奏對)한 바가 비록 허물이 없었으나, 고을에 부임하고 나서 치적(治績)은 볼 만한 것이 드물었는데도 임금이 오히려 살피지 않은 채 단지 말과 용모만 취하여 가장(嘉奬)하였으니, 옛날에 명실(名實)을 종핵(綜核)한 정사는 아마도 이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특별히 김종수(金鍾秀)에게 수찬을 제수하였다. 이때에 김 종수가 장연 현감(長淵縣監)이 되었는데, 여러 수령들을 인견할 때 임금이 김 종수의 성음(聲音)을 듣고 그 할아버지와 똑같으므로 외임(外任)을 애석하게 여기어 특별히 수찬을 제수한 것이었으며, 또 그 어머니에게 의자(衣資)를 내려 주었다.
대사헌 이유수(李惟秀)를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패초(牌招)를 어긴 때문이었다. 정광충(鄭光忠)에게 특별히 대사헌을 제수하고, 임희교(任希敎)를 집의로, 이명빈(李命彬)을 헌납으로 삼았다. 그리고 서경(署經)을 마친 다음 임희교·이명빈은 전직(前職)인 옥당(玉堂)의 직임을 그대로 띠게 하였다.
12월 21일 기사
임금이 충자(冲子)에게 보이는 글을 지었다. 첫째 사전(祀典)을 공경하라는 것이고, 둘째 구신(舊臣)을 예우하라는 것이며, 셋째 사국(史局)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이었는데, 써서 난대(蘭臺)의 벽 위에 걸도록 명하였다.
어석정(魚錫定)·조정(趙晸)·구상(具庠)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21일 기사
의주 부윤 홍억(洪檍)이 금령(禁令)을 범한 우리 나라의 사상(私商)을 수색해 붙잡아 먼저 참(斬)한 후에 계문(啓聞)하였는데, 임금이 보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에게 말하기를,
"과연 과단성(果斷性)이 있기는 하지마는 나는 매우 불쌍하고 가엾게 여긴다."
하니,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옛날에 고요(皋陶)는 죽여야 한다고 하고 황제는 용서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과 법을 지키는 도리를 아울러 행해야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끝내 석연치 않게 여겼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빙고(氷庫)에 들어가는 재목(材木)은 허비되는 것이 매우 많은데, 만약 석빙고(石氷庫)를 만든다면 오랫동안 비용을 줄이는 계책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내빙고(內氷庫)부터 시작하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이경옥(李敬玉)을 집의로, 신경준(申景濬)을 사간으로, 홍경안(洪景顔)을 헌납으로, 주형질(朱炯質)·고유(高裕)를 장령으로, 이창임(李昌任)을 지평으로, 김보순(金普淳)·김서구(金敍九)를 정언으로, 서호수(徐浩修)를 보덕으로, 유언민(兪彦民)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유신에게 명하여 《통감찬요(通鑑纂要)》를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12월 22일 경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태묘의 납향 납향 대제(臘享大祭)145) 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전설사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12월 23일 신미
임금이 전설사에 나아갔다. 납향 대제의 헌관(獻官)을 불러 정성을 다하여 행사(行祀)할 것에 대해 물어 보고, 약방에 명하여 입진하게 한 다음 내전으로 돌아왔다.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만약 처음 춘방(春坊)·계방(桂坊)에 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서연(書筵)에서 소대(召對)하였다. 지금 비록 노쇠하다 하나, 오히려 옛날의 마음이 있어서 특별히 주강하도록 명한 것은 대개 뜻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또 납일(臘日)이므로, 옛날 계묘년146) 정월 15일 요화당(瑤華堂)에서 야대(夜對)하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여 이를 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 숙부(叔父)가 시학(視學)하며 청금(靑衿)으로서 《대학(大學)》을 강하였었는데, 지금은 《소학(小學)》을 강하고 있으니,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찌 고인(故人)만 생각할 뿐이겠는가? 이 사람을 마음속으로 항상 잊지 못하는 것이다. 듣건대 그 아들이 있다고 하니, 선부(選部)로 하여금 과궐(窠闕)을 기다려 곧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임정원(林鼎遠)이 시독관으로서 입시하였으므로, 그 조카를 보고 그의 숙부인 임석헌(林錫憲)을 생각하여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하교하기를,
"올해의 오향제(五享祭)는 섭행(攝行)을 이미 마쳤는데, 비록 기력이 쇠모한 때문이라 하나, 어찌 효(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몸은 비록 이곳에 있었지만, 찬배(贊拜)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고, 주선(周旋)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며, 마음은 제소(祭所)에 있는 듯하였다. 한 조각 정성스러운 이 마음은 45년 동안 한결같았으나 나라와 백성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이 있었는가? 부르짖고자 했으나 하늘은 높기만 하고 하소연하고자 했으나 막막하기만 하였으니, 밤낮으로 이 마음은 오로지 종국(宗國)에 있었다. 아! 충자(冲子)는 나의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보필하고 대소 신공(大小臣工)들은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협찬(協贊)한다면, 우리 나라는 번성해지고 우리 백성들도 번성해질 것이다. 경고(更鼓)가 이미 걷히고 새벽 별은 오르려 하는데,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간절한 생각을 정성을 다해 거듭 유시(諭示)하니, 마땅히 이 뜻을 본받아 무릇 사전(祀典)에 대해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영부사 김치인(金致仁)이 친영(親迎)한다는 것을 듣고 친히 열 여섯 글자를 썼는데, 이르기를,
"홍선(紅線)147) 이 정해져서 경이 이제 친영한다고 하니, 송(宋)나라 고종(高宗)을 본받아 수서(手書)로서 경을 축하한다.[紅線宜定 卿今親迎 效宋高宗 手書祝卿]"
하였으며,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나아가 사전(謝箋)을 바치게 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4일 임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각도에 은점(銀店)을 설치하는 것은 해로운 것은 있어도 이로운 점은 없습니다. 영남(嶺南)으로써 말씀드리건대, 전후에 은점을 설치한 곳이 거의 6, 7고을에 이르지만, 호조(戶曹)에서는 조금도 수세(收稅)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헛되게 은점을 설치했다는 이름만 있고 단지 민폐(民弊)만 끼치고 있으니, 일체 아울러 혁파(革罷)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그 책의 범례(凡例)는 모두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본받고, 단지 우리 나라의 일만 수집(蒐輯)하게 하였다. 그리고 문학(文學)이 있는 신하들을 뽑아 그들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공역을 동독하게 하였다.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김이희(金履禧)를 사서로, 김익(金熤)을 필선(弼善)으로, 정방(鄭枋)을 집의로, 이병정(李秉鼎)을 겸 사서로, 김기대(金器大)를 좌윤으로 삼았다.
12월 25일 계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갔는데 중추부에서 진찬(進饌)하니 여러 대신들과 예판·유신 등을 불러 함께 참여하게 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김치인에게 명하여 신혼찬(新婚饌)을 바치게 하였는데,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예(禮)가 아니라고 다투었고, 김치인도 또한 차자를 올려 사양하였으며, 중추부로부터 진찬(進饌)하도록 청하자, 하교하기를,
"오늘 전문(箋文) 받는 것을 어떻게 전례에 따를 수 있겠는가? 어제 이미 선혜청(宣惠廳)에 유시하였다. 용두(龍頭) 봉미(鳳尾)의 진찬(珍饌)과 아황(鵝黃)148) ·죽엽(竹葉)149) 의 미주(美酒)를 갖추는 옛 규례는 선혜청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대신이겠는가? 영부사로 하여금 단지 세 그릇만 준비해 오게 하라. 만약 한 그릇이라도 넘으면 내가 받지 않겠다. 이것은 여러 신하들의 뜻을 겸하여 펴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중추부에서 진찬(進饌)하는 것은 비록 구례(舊例)가 있다 하나, 혼인으로 인하여 바치는 것은 이미 그 예(禮)가 아닌데, 이날의 일은 마침내 상하가 서로 잘못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76책 113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42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註 148] 아황(鵝黃) : 한주(漢州)의 술 이름.[註 149] 죽엽(竹葉) : 술 이름.
사신은 말한다. "중추부에서 진찬(進饌)하는 것은 비록 구례(舊例)가 있다 하나, 혼인으로 인하여 바치는 것은 이미 그 예(禮)가 아닌데, 이날의 일은 마침내 상하가 서로 잘못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애석하다."
경기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불타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12월 26일 갑술
주강을 행하였다. 또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석강을 행하고, 태학생(太學生) 수십 인을 불러 육경(六經)의 장구(章句)를 뽑아 외게 한 다음 대사성으로 하여금 서로 문난(問難)하게 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단지 구송(口誦)만 능할 뿐이요, 문의(文義)를 해석하지 못하니, 임금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군사(君師)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학교가 퇴폐해진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희들을 어찌 허물하겠느냐?"
하고, 음식을 먹여 보냈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음악을 회복시킬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선왕의 제례(制禮)는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지금 전하의 예는 너무 지나쳐서 뒷사람을 넉넉하게 하는 도리가 못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년에는 성수(聖壽)가 더욱 높아지시니, 헌수(獻壽)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 까닭에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12월 27일 을해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7, 80세 된 노인들을 불러 친히 쌀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현방 속전(懸房贖錢)을 견감해 주도록 하고, 패(牌)를 사용하는 아문(衙門)은 이날부터 명년 정월 15일까지 모두 장패(藏牌)150) 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다시 음악을 회복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9일 정축
주강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여러 도(道)에 습조(習操)를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30일 무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서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신년(新年)에 배종(陪從)하는 반열(班列)에 수종(隨從)함으로써 지극한 소원을 풀기를 청하였다. 대개 임금이 원일(元日)에 태묘에 전알(展謁)하겠다는 명이 있었으므로, 대신들이 임금이 대궐에 머물러 하례(賀禮)를 받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좋다고 여기는가? 나는 좋지 않게 여기고 있다."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달에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에 여역(癘疫)이 치성(熾盛)하여 죽는 사람이 서로 잇따르니, 모두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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