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4권, 영조 46년 1770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1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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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기묘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고, 창덕궁(昌德宮)에 들러 선원전(璿源殿)001)  과 황단(皇壇)002)  에 전배하였다. 회가(回駕)할 때에 육상궁(毓祥宮)에 전배하였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좌통례(左通禮) 구익(具㢞)과 우통례(右通禮) 유선양(柳善養)에게 근년에 능(陵)을 배알하였을 때의 예에 의하여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궁(宮)을 나설 때에, 흥화문(興化門)에 이르러 각 고을 호장(戶長)을 불러 보았다.

 

이성수(李性遂)를 특별히 제수하여 우승지(右承旨)로 삼았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기를, "나라의 근본은 곧 백성이요, 백성의 근본은 곧 농사(農事)이다. 신농씨(神農氏)는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서릉씨(西陵氏)는 밭갈고 베짜는 법[耕織]을 가르쳐, 선농신(先農神)과 선잠신(先蠶神)이 되었는데, 몇 천년 동안 공적(功績)이 만인에게 남아 있다. 3년 전에 《주례(周禮)》와 국전(國典)에 따라 선농단(先農壇)에서 친경(親耕)하였고, 구궐(舊闕)에서 친잠(親蠶)하였는데, 이는 만년(晩年)에 농사와 잠업(蠶業)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다. 대체로 우리 백성이 입고 먹는 것은 오로지 잠업과 농경(農耕)에 있다. 그러므로 국조(國朝)에서 수령(守令)들에게 선유(宣諭)함에 있어 ‘농상성(農桑盛)’ 3글자가 칠사(七事)003)  의 맨 앞에 있으니, 그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제도(制度)가 해이되어 법은 비록 갖추어 있으나 시행에는 게으르고, 문채는 비록 아름다우나 바탕이 다르니, 농사를 권장하는 하교(下敎)도 하나의 형식적인 법문(法文)일 뿐이다. 지금 늙은 나이에 또 한 살을 더하니, 이 마음은 걱정스러워 농사를 권장하고 잠업을 권장하는 뜻을 겸하여 하유(下諭)한다. 옛날 주(周)나라 8백 년 기업(基業)은 그 근본이 후직(后稷)으로부터 말미암았다. 《맹자(孟子)》의 ‘〈5묘(畝)의 집터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세 된 자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는 교훈이 있으니, 마땅히 거듭 신칙하는 뜻을 받들어 농사를 권장하고 잠업을 권장하여 해동(海東) 3백 60주(州)로 하여금 의식(衣食)이 풍족하게 하라. 진정 이와 같이 되면, 박덕한 내가 77세에 의식이 풍족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은 비록 서투르나 뜻은 실로 근본에 힘쓰는 것이니, 이 뜻을 본받아 힘쓰고 권장하라."
하였다.

 

1월 2일 경진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연화문(延和門)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서호수(徐浩修)가 글 뜻에 인하여 아뢰기를,
"정월 초하루 청묘(淸廟)004)  에 나가셨으나 백성들이 음악 소리를 듣지 못하니, 우리 임금께서 질병이 없으신 기쁨과 신(神)과 사람이 동화(同和)하는 도리를 어찌 펼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복악(復樂)하도록 하여 봄과 더불어 화평을 같이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이미 신문(神門)에 구두(口頭)로 아뢰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구익(具㢞)과 유선양(柳善養)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서울의 사민(四民)005)   및 걸인을 불러 모으고, 각각 차이를 두어 쌀을 내렸다. 호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걸인이 이와 같이 많지는 않을 것인데, 요즈음 간사한 짓이 점점 늘어 부당하게 받는 자가 있을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나의 적자(赤子)006)  이니, 비록 부당하게 받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무엇이 해로울 게 있겠는가?"
하니, 정홍순은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서 재계하며 밤을 지냈으니, 사직(社稷)의 기곡 대제(祈穀大祭)가 다음날에 있기 때문이었다.

 

1월 3일 신사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신·구번(新舊番) 입직 군병(入直軍兵)에게 호궤(犒饋)007)  하고, 이어 전정(殿庭)에서 인일제(人日製)008)  를 베풀어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1인을 선발하고, 김치묵(金峙默)과 박서량(朴瑞良)에게는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009)  하도록 하였으며, 나머지는 각각 급분(給分)하게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홍중효(洪重孝)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청인(淸人) 왕덕순(王德順) 등 16명이 전라도 임자도(荏子島)에 표류(漂流)되어 도착하니,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양식을 지급하고, 주즙(舟楫)010)  을 수선하여 본토로 호송하게 하였다.

 

1월 4일 임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각읍 환곡(還穀)의 가분(加分)011)  을 엄중히 금지하기를 청하였고, 또 각도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수영(水營) 및 읍진(邑鎭)에 군기(軍器) 수선을 엄중히 신칙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봉한이 병을 이유로 사면(辭免)을 청하고, 좌의정 김상복(金相福)과 우의정 김상철(金尙喆) 역시 사면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칠순(七旬)된 그 임금이 정사(政事)를 바로잡지 못하여 지금 새해와 더불어 함께 새롭게 하려 하는데, 어찌 고굉(股肱) 같은 신하를 버리겠는가?"
하니, 김상복 등이 말하기를, "원보(元輔)012)   한 몸으로 족히 한 세대(世代)의 사무를 처리할 수 있고, 신 등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좌상(左相)은 진실로 널리 세상을 구제할 만한 인재요, 우상(右相)은 더욱 하루도 직위에서 떠나서는 안됩니다. 신과 우상은 염매(鹽梅)013)  와 같으니, 하나가 빠지는 경우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서명선(徐命善)을 인견하였는데, 울릉도(鬱陵島)에서 삼(蔘) 캐는 일을 금지시켰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서산(眞西山)014)  은 말하기를, ‘야대가 낮에 의견을 묻는 것보다 낫다.’ 하였으니, 참으로 격언(格言)이다."
하였다. 이어 한문공(韓文公)015)  의 동생행(董生行)016)  을 외우고,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옛날 동소남(董邵南)017)  은 아침에 밭갈이하고 저녁에 글을 읽었으며,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를 잡아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부모를 봉양하였다. 지금 나는 한 나라의 부(富)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효도하려 하나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는가? 여러 도(道)로 하여금 효행이 뚜렷한 자를 추천하게 하라. 내가 장차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임용할 것이다."
하였다.

 

1월 5일 계미

임금이 태묘(太廟)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쓸 향과 축문을 연화문에서 지송(祗送)하였다.

 

1월 6일 갑신

헌납(獻納) 윤홍렬(尹弘烈)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체로 선비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하게 여김은 곧 열성조(列聖朝)의 전해 내려오는 법도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 성상께서 마음이 과격하고 처분이 정상이 아니어서, 이름이 초선(抄選)에 들어 있는 자는 대부분이 금고(禁錮)의 율(律)을 입었고,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되면 뚜렷이 배척의 뜻을 내보였습니다. 비록 다행히 그 죄적(罪籍)에서 삭제하여 대략 개석(開釋)의 뜻을 보였으나 뉘우치는 실상이 하교(下敎)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징소(徵召)하여 맞아들이는 예(禮)가 오랜 동안 초야(草野)에 내리지 않았으니, 사기(士氣)는 좌절되어 조야(朝野)가 실망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 조정의 신료(臣僚)들은 삼공(三公)에서부터 그 아래 모두를 어루만지어 성취시키지 않음이 없으나 다시 경계하고 꺼리는 뜻이 없고, 비록 산림(山林)의 높은 덕이 있는 선비일지라도 한결같이 경멸하여 조금도 어렵게 대할 생각이 없어서 모든 일을 함에 이르러서는 성상의 뜻에 지향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전례(典禮)로 말한다면 전에 없는 제도를 창설하고, 형정(刑政)으로 말한다면 정당치 못한 법을 가벼이 시행하였습니다. 작(爵)과 상(賞)이 빈번히 내려지므로 명기(名器)가 품위를 잃었고, 지나치게 몰아대므로 예의와 염치가 상실되었으니, 세도(世道)에 대한 근심이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신은 눈앞의 일에도 또한 근심과 탄식이 있으니, 이조 판서 신회(申晦)는 전후 양전(兩銓)에서 추잡하다는 비방을 많이 불러들였고, 금번의 도정(都政)018)  에서는 오로지 사사로운 뜻에 따랐으므로, 수령(守令)의 차출과 의망은 그 적임자가 아닌 것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송도(松都)의 대상(大商)을 함부로 하여 진영(鎭營)에 겸직시켰고, 기전(畿甸)의 거부(巨富)가 갑자기 큰 고을을 얻었으며, 홍로(鴻臚)019)  의 초사(初仕)가 역시 재물은 있으나 〈홀기(笏記)020)  도〉 부를 줄 모르는 시정(市井)의 천류(賤流)에게 돌아갔습니다. 기타 분배(分排)하는 데에 마음을 쓰고, 한결같이 아부하는 태도는 차마 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청컨대 사적(仕籍)에서 삭제하소서. 참의 이휘지(李徽之)는 음직(蔭職)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자질구레하다는 비난이 많았고, 이조의 삼전(三銓)021)  이 되어서는 오직 아첨으로 일을 삼아 사람에 따라 당겼다 놓았다 하며, 감심(甘心)으로 남에게 빌붙었습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기에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방종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 역시 삭직시켜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크게 화를 내어 ‘당심(黨心)이 창자에 가득하다.’ 하고, 사판(仕版)에서 영원히 삭제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거제(巨濟) 등 다섯 고을의 백성으로서 물에 빠져 죽었거나 불에 타 죽은 자에게 모두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으니, 경상 병사(慶尙兵使)의 장계(狀啓)로 인한 것이다.

 

1월 7일 을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그 임금이 80 가까이 나이를 더해 가는 것을 안다면, 어찌 윤홍렬(尹弘烈)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마음으로 어찌 문후(問候)할 수 있으며, 내가 어찌 받겠는가? 승지가 먼저 절하는 것도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고, 또 하교하기를,
"시종(侍從)들이 다 오면 곧 아뢰라. 비록 한 사람이라도 만약 오지 않는다면, 승지는 알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연화문에 나아가 여러 시종들을 불러 윤홍렬의 상소의 일을 물으니, 모두 겁을 먹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감히 가부(可否)를 말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화가 나서 힐문(詰問)하니, 모두 죄를 두려워하여 ‘당습(黨習)’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숭정전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고 강을 마치자, 임금이 중관(中官)을 불러 책을 주며 말하기를,
"이 책을 유신(儒臣)에게 전하라. 만년(晩年)의 법강(法講)을 귀신이 방해하는 것 같으니, 앞으로는 결코 다시 강하지 않겠다."
하니, 대신(大臣) 이하가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지금부터 절일제(節日製)022)  를 고례(古例)에 따라 회시(會試)에만 나가게 하고, 사제(賜第)하지 말라."
하였으니, 대체로 윤홍렬(尹弘烈)이 절일제에서 급제하였으므로, 임금이 윤홍렬의 상소에 충격을 받아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1월 8일 병술

하교하기를,
"아! 이조 판서가 몇 햇 동안 나를 섬겼으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조 참의도 음관(蔭官)으로 있을 적부터 그 사람됨이 우아하고 자상함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인(黨人)의 감심(甘心)으로 인하여 전관(銓官)의 처지가 세초(歲初)에 이와 같으니, 애석하게 여김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그들을 예(禮)로 부림에 있어 강박(强迫)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외방에 있는 도헌(都憲)023)  의 체직을 허락하여 전 판서 신회(申晦)를 도헌으로 제수하고, 전 참의 이휘지(李徽之)를 미원장(薇垣長)024)  으로 제수하며, 한광회(韓光會)를 총재(冡宰)025)  로 제수하고, 조중회(趙重晦)를 이조 참의로 제수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윤홍렬(尹弘烈)에게 죄를 주어 절도(絶島)에 천극(栫棘)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지금의 요청은 비록 늦었으나 해동(海東)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君君臣臣]’는 기강이 그래도 없어지지 않았다. 내 비록 쇠약해졌으나 어찌 이를 들었다고 해서 그대로 응할 수 있겠는가? 어제는 이 전각에서 한나절을 지냈고, 문밖에는 또 밤이 점차 깊어지는데, 몇 백의 시종(侍從) 가운데 11인 외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인가? 지금 상참(常參)의 명령을 내림으로 인하여 신시(申時)의 패초를 이미 알렸는데도, 이에 이러한 거조가 있으니, 나는 자지 않는데 신하들은 모두 자려고 하는가? 천극의 전형은 내 손에 있고, 해도(海島)에 귀양보내는 율 또한 내 손에 있으니, 어찌 응답하겠는가?"
하고, 백관들에게 물러가도록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상참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 나라에 학사(學士)가 있는가? 늙은 나이에 소일(消日)을 함은 비록 구차하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비록 한 편(篇)의 강(講)일지라도 새해 들어 철폐하였으니, 학사의 마음에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일에는 본말이 있으니 강을 철폐한 것은 말(末)이요, 약(藥)을 물리친 것은 본(本)이다. 유신(儒臣)의 도리는 마땅히 먼저 탕(湯)을 권한 뒤에 강하기를 권해야 한다. 이미 패초(牌招)를 명하였는데, 처음에는 무슨 마음으로 명령을 받들었으며, 뒤에는 무슨 마음으로 글귀를 뒤적이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윤홍렬에 대한 하교가 있은 뒤에 모두 침묵하였음은 옛날과 다름을 두려워해서이다. 이러한 거조를 한 것은 어찌 다만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할 수 없을 뿐이겠는가? 또한 기전(畿甸)에도 들리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러 유신에게 모두 삭직(削職)의 율을 시행하여 임금의 기강을 보존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어제 두려워했던 모양이 오히려 스스로 부끄러웠을 것인데, 오늘의 정청(庭請)을 그 누가 권하였던가? 듣건대 어제의 하교에 역시 전폐(殿陛)에서 머리를 조아린 사람이 없었다 하니, 그것을 정성이라 할 수 있겠는가? 탕제(湯劑)를 물리친 지 며칠이 되었는데 지금 비로소 정청하였으니, 이러한 의리는 머리가 희어졌지만 처음 보았다. 오늘의 정청에 대관(大官) 이하 비국 당상으로서 입참(入參)한 자에게 모두 삭직의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구선행(具善行)을 훈련 대장으로 제수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수보(洪秀輔)를 집의로, 이적보(李迪輔)를 사간으로, 임해(任瑎)와 최민(崔)을 장령으로, 이계(李溎)를 지평으로, 권영(權穎)을 헌납으로, 이장로(李長老)와 조진형(趙鎭衡)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9일 정해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고 밤에는 경복궁(景福宮)의 친잠단(親蠶壇) 비(碑)를 세운 곳에 나아갔다. 지난 정해년026)  의 친잠(親蠶) 때에 단(壇)을 근정전(勤政殿) 북쪽에 쌓고 오소례(五繅禮)를 행한 바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정해 친잠(丁亥親蠶)’이란 4글자를 적접 써서 돌에 새기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비음기(碑陰記)를 지어서 기록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동가(動駕)한다는 명이 있었으니, 예조 당상을 갖추어야 한다. 이조 판서 한광회(韓光會)를 예조 판서로 제수하고, 이조 참판 정상순(鄭尙淳)을 예조 참판으로 제수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남태제(南泰齊)를 이조 판서로, 윤동섬(尹東暹)을 이조 참판으로 삼으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병조 판서를 교체하도록 하였으니, 그 후임으로 판윤(判尹) 채제공(蔡濟恭)을 병조 판서로 삼으라."
하였다.

 

김한기(金漢耆)를 특별히 발탁하여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김한기는 곧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아우이다. 김한구가 죽은 뒤에 임금이 깊이 슬퍼하고 애석히 여겼는데, 얼마 안되어 그 아우를 승진 임용한 것이다.

 

1월 10일 무자

이창임(李昌任)을 특별히 제수하여 수찬으로 삼았다. 이창임은 본관록(本館錄)027)  에 들어 도당록(都堂錄)에 선발되었으므로,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하교하기를,
"엊그제의 하교는 강개(慷慨)해서 그런 것이다. 파직(罷職)하고 삭직(削職)한 사람을 모두 서용하라. 그 가운데 훈련 대장은 이미 후임을 임명하였고, 그 나머지 본직(本職)과 겸임의 모든 직임 및 비국 당상은 모두 유임하고, 남태제(南泰齊)를 특별히 판윤(判尹)으로 제수하며,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판서로 삼고, 윤동섬(尹東暹)에 대한 하교는 그만두고 이담(李潭)을 다시 이조 참판으로 제수하라."
하였다.

 

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전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및 전 판부사 김양택(金陽澤)을 모두 서용하되, 서추(西樞)028)  에 부직(付職)하라 명하고, 김치인(金致仁)과 한익모(韓翼謨)도 서용을 명하여, 이어서 김치인을 영의정으로, 한익모를 좌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홍봉한이 주천(奏薦)할 때마다 임금이 좋지 않게 생각해 그의 전천(專擅)을 의심하여 싫어하는 기색을 뚜렷하게 보였으나,홍봉한은 그래도 알지 못하고서 그 일을 아룀에 있어 대부분 밤이 깊도록 물러가지 않으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피로하지도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경우 손짓하여 가라 하여도 가지 않을 것인데, 어찌 감히 피로를 사양하겠습니까? 설령 뜻밖의 정세(情勢)가 발생하더라도 진언(進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파면(罷免)이 된 것이다.

 

정상인(鄭象仁)을 부응교로, 김노순(金魯淳)을 교리로, 이득신(李得臣)을 부교리로, 김이희(金履禧)를 부수찬으로 삼고, 홍봉한(洪鳳漢)을 영부사에 부직(付職)하고, 김상복(金相福)을 판부사에 부직하였다.

 

윤홍렬(尹弘烈)을 남해(南海)에 유배(流配)시켰다.

 

교리 김종수(金鍾秀)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즘 성상께서 마음이 과격하고 하교가 평상과 달라서 강(講)을 정지하라는 명령까지 있었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마땅히 성심(聖心)을 열어서 넓히는 말로 정성을 쌓아 약속을 받아들여 전환(轉圜)029)  의 훌륭함을 보게 된다면 강(講)을 회복하는 것은 다만 그 다음의 일일 뿐입니다. 신이 엎드려 지난 겨울에 충자(冲子)030)  에게 경계하신 글을 본즉, ‘사람이 뜻하지 않은 일로 나의 마음을 자극하여, 참지 못하다가 늦게야 지나쳤음을 생각하게 된다.’고 하셨고, 심지어 ‘어제는 그릇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옳은 것을 깨달았다.’고 하교하셨으니, 신이 두서너 번 받들어 읽으매 그지없이 흠탄(欽歎)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얼마 되지 아니하여 또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성인(聖人)이 사물에 응하는 도량이 반드시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내고 포용하기 어려운 일을 포용해야만, 천지(天地)와 더불어 같이 훌륭해질 수가 있습니다. 어찌 한 가지 괴로운 번민으로 인해 지나치게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여 시종(侍從)들이 궁문(宮門)에 임하자 대신(大臣)이 정토(庭討)를 봉행(奉行)하는지 다그쳐 묻는 데에 이르렀으니, 성덕(聖德)에 누가 되고 나라의 체통에 손상됨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전후에 괴로운 번민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일이 지나간 뒤에 곧 후회하신 적이 없지 않았고, 문자를 지어 동궁(東宮)에게 보이기까지 하셨습니다. 더구나 일이 지난 뒤에 뒤좇아 생각하면, 지난 겨울에 앞서의 일을 후회한 것과 같지 않을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원하건대 앞뒤 중도(中道)를 벗어난 하교를 도로 거두고, 이어 강을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이 차자를 본즉, 다른 것은 제외하고 ‘봉행(奉行)’ 두 자가 무엄하다. 마땅히 처분하리라."
하고, 이어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받아들인 승지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그후 수일만에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김종수(金鍾秀)는 참다운 유신(儒臣)이다. ‘정토(庭討)를 봉행하였다.’고 대신을 배척한 것은 실로 지론(至論)이다."
하였다.

 

1월 11일 기축

경연관이 강(講)의 회복을 청하고, 대신도 강력히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수찬 김이희(金履禧)를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필선 김익(金熤)을 사근 찰방(沙斤察訪)으로 차출하여 사흘 길을 하루에 걸어 부임하도록 하였으니, 모두 패초(牌招)를 어긴 데 좌죄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운유(鄭運維)를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문헌비고(文獻備考)》의 편집을 시임·원임 대신이 다같이 구관(句管)하도록 명하였으며, 이담(李潭)·김응순(金應淳)·홍명한(洪名漢)을 당상(堂上)으로 더 차정하고, 서호수(徐浩修)·홍용한(洪龍漢)·이득일(李得一)·조준(趙㻐)·김종수(金鍾秀)·황간(黃榦)을 낭청(郞廳)으로 더 차임하였다.

 

대사간 이휘지(李徽之)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관직에 있으면서 자신을 신칙하여 정성으로 임금을 섬기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미 청고(淸高)한 지조(志操)가 없으면서 가난을 위한 벼슬에 어릿거렸으니, 촌스럽고 자질구레하다는 비난을 받은 것은 창랑지수(滄浪之水)031)  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강직한 기절(氣節)도 없으면서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 아첨으로 의심받은 것은 또한 타산지석(他山之石)입니다. 옹졸한 성격에 있어서는 본래 끊고 맺는 행동을 하지 못하여 비록 속으로는 지킴이 있더라도 또한 밖으로 남들과 다툼이 없었으니, 모르는 자는 빌붙는다고 말하는 것을 신은 오히려 괴이쩍게 여기지 않으며, 모두 고핵(考覈)하여 거짓이 아님을 알 것인데, 애석하게도 이를 말한 것이 늦었습니다. 아! 신은 송구하고 불안한 자취로서 바다 같은 성조(聖朝)의 은혜에 감동하여 벼슬에 제수되면 곧 나가기를 거의 평상인과 같이 하였으니, 무엄하고 불충(不忠)함은 마침내 아비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저들이 처지(處地)를 논하고 방종함을 책한 것은 〈신의 단점을 시정하려는〉 양의(良醫)의 본마음인데. 비록 신을 아낀 데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신이 은혜를 받은 바는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1월 12일 경인

조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헌납(獻納) 권영(權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장지풍(張志豊)과 평해 군수(平海郡守) 박상순(朴尙淳)은 대신(臺臣)에게 차례로 돌아다니며 하직 인사를 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특진관(特進官) 이복원(李福源)에게 명하여 수서(手書)를 갖고 봉조하(奉朝賀)에게 가서 보인 뒤에 석강에 입시하라 하였으니, 봉조하는 곧 이복원의 아버지 이철보(李喆輔)이다.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석강을 행하였다. 동경연(同經筵) 이최중(李最中)이 글뜻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신은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의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毋自欺]’라는 3글자에 송구한 생각이 듭니다. 금번의 거조는 신에게 제 마음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며 하늘을 속인 죄가 있으니, 부끄럽고 후회함이 용서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일인가?"
하였다. 이최중이 말하기를,
"이는 곧 어제 정청(庭請)032)  한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 잘못이 아니라고 여겨 참여하였다면 좋으나, 이는 속으로 잘못임을 알고도 여러 사람을 따라 참여한 것입니다. 이런데도 하게 되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두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면 죄는 주형(誅刑)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양(豫讓)033)  이 ‘천하 후세(天下後世)에 인신(人臣)으로서 두 마음을 품는 자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말은 비록 좋으나 계교(計較)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니, 나는 취하지 않는다. 김종수(金鍾秀)의 말은 비록 개연(慨然)스러우나 생각한 바가 있어 참작하였고, 윤홍렬(尹弘烈)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는데, 경(卿)이 나의 지나친 거조라고 함은 무엇 때문인가? 강(講)을 정지하고 약(藥)을 물리쳤음에도 정신(廷臣)들이 한 사람도 머리를 부딛치면서 강력히 간(諫)하는 자가 없었으니, 진실로 개연하다."
하니, 이최중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힘써 간하고야 말 일인데, 신 또한 이를 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왕세손에게 시강(侍講)을 명하여 《논어(論語)》의 요왈편(堯曰篇)을 외우게 하였다. 임금이 반복하여 어려운 것을 물음에 있어 왕세손의 대답이 매우 자상하였으므로, 임금이 기뻐서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뜻밖에 충자(冲子)의 학문이 이토록 숙성(夙成)하니, 나로 하여금 근심을 잊게 하였다. 새해 들어 한 번 강을 하는 것이 곧 열 번 잔치를 열며 하례하는 것보다 낫다."
하였다.

 

예관(禮官)을 보내 고 집의 김창흡(金昌翕)과 고 부제학 이병태(李秉泰)에게 치제(致祭)하였다. 하교하기를, "김창흡(金昌翕)은 참으로 은자(隱者)이다. 듣건대 일찍이 사헌부의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부리(府吏)가 고명(誥命)034)  을 안고 갔으나 거주하는 곳을 몰랐다고 한다."
하였다. 대신(大臣)이 시호(諡號)를 내려서 절조(節操)를 장려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전례가 없다 하여 어렵게 여겼다.

 

임금이 전정(殿庭)으로 시민(市民)을 불러 병폐를 묻고, 군문(軍門)에 포흠(逋欠)이 있는 자는 모두 면제하도록 하였다.

 

1월 13일 신묘

주강을 행하였다.

 

대사헌 신회(申晦)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전직(銓職)과 번임(藩任)을 누군들 지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굳이 뇌물받은 것으로 조작하여 무함한다면, 남의 명예를 더럽히는 묘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장죄(贓罪)는 늘 실지(實地)에서 빠지고, 여파는 애매한 자에게 혼동되어 미치고 있으니, 지금 이 일로 하여 신의 죄안(罪案)을 성립시킨다면 신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송도(松都) 사람에게 수령(守令)을 차출한 문제는 곧 최석좌(崔錫佐)를 지적한 것인데, 그의 경력을 논하면 이미 수령에 비길 수 있고, 그 사람됨이 한번 시험해 볼 만함을 알았으며, 또 인사 행정이 있을 때마다 ‘송도 사람을 살펴서 임용하라.’고 신칙하는 하교가 계셨고, 송도 사람을 이 고을에 차출한 사실이 앞뒤에 한두 번만이 아니었으니, 이는 격식(格式)을 벗어나고 사의(私意)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기전(畿甸)의 무변(武弁)035)   수령에 있어서는 박성선(朴性善)을 말한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성선은 일찍이 부사(府使)를 지냈고, 또 치적(治績)이 있었으니, 본래 부유한 고을을 주지 않았음은 온 세상이 아는 바인데, 이를 가지고 협박을 가하면 사람들이 누가 믿겠습니까? 홍려(鴻臚)의 자리에 있어서는 중인(中人)과 서얼(庶孽)을 구분하도록 일찍부터 정하여진 규례가 있어서, 정관(政官)036)  으로서도 바꿀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시정(市井) 사람을 곧 천류(賤流)라 일컫는다면, 중로(中路)037)  의 벼슬자리를 폐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배하는데에〉 마음을 쓰고〈한결같이〉 아부하였다.[用意阿附]’는 등의 말은 사기를 구하여 현혹시켜 팔려는 꾀이므로 밖에 드러나지 않게 내비치는 말을 일부러 지어낸 것입니다. 말하는 자는 지적한 뜻이 긴밀하다 하여 교묘하게 말을 지어냈다고 생각할 것이나, 당하는 자는 도리어 당황하여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으니, 탄핵하는 곧은 기풍(氣風)이 진실로 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전 이조 판서 정실(鄭宲)이 상소하여 나이가 늙은 이유로써 치사(致仕)를 원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실(鄭宲)은 비록 의정(議政)의 재능은 없으나, 품성이 본래 이욕(利慾)이 없이 화평하고 단아(端雅)하였으며, 충주(忠州)에 물러가 있어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떠날 때에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정실에게 비록 치사(致仕)를 윤허하였으나 생각하면 애석한데, 나는 그 만년(晩年)의 절조(節操)를 이루게 하려 한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7책 114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4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실(鄭宲)은 비록 의정(議政)의 재능은 없으나, 품성이 본래 이욕(利慾)이 없이 화평하고 단아(端雅)하였으며, 충주(忠州)에 물러가 있어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떠날 때에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정실에게 비록 치사(致仕)를 윤허하였으나 생각하면 애석한데, 나는 그 만년(晩年)의 절조(節操)를 이루게 하려 한다.’ 하였다."

 

1월 14일 임진

임금이 망제(望祭)에 쓸 향과 축문을 연화문에서 지영하였다. 이어 숭정전에 나아가 봉조하 이섭원(李燮元)에게 내리는 교서(敎書)를 선포하였다. 이섭원은 전 참판(參判)으로서 나이가 늙은 이유로써 치사(致仕)를 원하므로, 임금이 윤허하고 친림하여 선마(宣麻)038)  한 뒤에 수서(手書)를 내려 매우 돈후하게 위로하였다. 이섭원이 선대(先代)의 추증(追贈)에 관하여 전조(銓曹)에서 이조(吏曹)의 직함(職銜)을 허락지 않음은 억울한 일이라고 면전에서 아뢰니, 승지(承旨)가 외람스럽다고 하여 추고(推考)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늙었으니 어찌 허물을 책망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물러가라 명하였다. 이때에 성수(聖壽)가 높아 나이를 존중하고 늙은이를 우대하는 일은 모두 거행하여 한도에 벗어난 경우도 많았다. 이섭원에게 몸소 선마(宣麻)하고 보묵(寶墨)을 내려, 은택(恩澤)을 간구(干求)함이 분수를 넘는 데에 이르렀으니, 역시 임금이 이런 일을 열어 준 것이다.

 

이익원(李翼元)을 특별히 제수하여 도승지로 삼았다. 이익원은 이섭원(李燮元)의 아우인데, 선마한 뒤에 곧 병조 참판으로 제수하였다가 곧 또 지신사(知申事)039)  로 옮겨 임명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봉조하 정실(鄭實)이 올라온 뒤에 나는 마땅히 이 문에서 선마(宣麻)하리라. 아! 한 달 안에 두 재신(宰臣)에게 모두 치사(致仕)를 윤허하니, 두 신하는 뜻을 이루었다고 하겠으나 만년(晩年)에 불현듯이 서운한 생각이 든다."
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여러 도에 하유(下諭)하여 민간으로 하여금 《소학(小學)》 및 훈민가(訓民歌)를 외워 익히게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소학》의 고강(考講)은 법의 취지가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유명 무실하게 되었으니, 실로 개탄스럽습니다. 하호 세민(下戶細民)에 있어서는 교도(敎導)할 방법이 없고, 속습(俗習)은 무지하여 윤리(倫理)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고 상신 정철(鄭澈)은 이를 염려하여 훈민가를 지었는데, 모두 18장(章)이요, 그 내용은 민생의 일용 사물(日用事物)과 평범한 윤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시골의 부녀(婦女)와 아이들로 하여금 항상 외우게 하여 감동, 분발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 이를 팔도에 신칙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외워 익히게 하면, 거의 모두 대의(大意)를 알아서 백성을 교화하여 양속(良俗)을 이루게 하는 방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소학》의 고강과 아울러서 다같이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헌납(獻納) 권영(權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일전에 외방으로 보직된 찰방이 숙사(肅謝)하러 들어옴에 있어 사알(司謁)이 구전(口傳)으로 된 상교(上敎)로 문을 열고자 하였는데, 승지가 신표(信標)가 없다 하여 불허하자 사알이 열쇠를 함부로 가지고 갔으나, 승지가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합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를 파직하고 사알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치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에 관한 일은 아뢴 바에 의하여 윤허하나, 사알의 일은 그 허물이 중관(中官)에게 있으니, 해당 중관에게 서용치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유선양(柳善養)을 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고인(古人)의 말에, ‘사자(使者)는 비록 신분은 낮으나 군명(君命)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관(中官)이 군명을 받들고 관마(官馬)를 타고 간검(看檢)을 하면 수령인 자가 어찌 감히 편복(便服)으로 대기할 수가 있겠는가? 장단 부사(長湍府使) 전익현(田翊顯)의 행위는 교만 방자하다. 이러고서 무슨 일을 삼가겠는가? 속히 서용치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이때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의 장지(葬地)를 장단(長湍)에 정하고, 호상 중사(護喪中使)가 자주 왕래하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상원일(上元日)040)  에 민간의 답교(踏橋)041)  로써 의금부에 명하여 밤에 통행 금지를 해제하게 하였으니, 백성들과 태평을 같이 즐기는 뜻을 보인 것이다.

 

1월 15일 계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도에 하유(下諭)하여 두루 여제(癘祭)를 설행하게 하였다. 이때에 여역(癘疫)이 치성 만연하여 전국에 사망이 연달았는데, 영남과 영동 및 관북이 더욱 심하여 민호(民戶)가 10에 7, 8이 텅 비었다고 하였다.

 

1월 16일 갑오

전경 문신(專經文臣)042)  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여러 도의 세궤(歲饋)에 대한 장계 가운데 1백 세 된 사람이 들어 있었으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여겨 본도(本道)로 하여금 호송(護送)하게 하였다. 광주(廣州) 사람 김해상(金海祥)을 본부(本府)에서 치송(治送)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쌀과 비단을 내렸으며, 곧 면천(免賤)하도록 하고 가자(加資)하였다. 또 각도에 명하여 듣는 대로 아뢰게 하니, 이로부터 계속 치문(馳聞)하여 백 세가 되고 백 세가 넘는 자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측근의 신하가 말하기를,
"수역(壽域)의 덕화(德化)가 이 시대에 이르러 성대합니다."
하였는데, 그 실상에 있어서는 망령되이 은전(恩典)을 바라고 태반이 나이를 속였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비웃었다.

 

이항조(李恒祚)를 헌납으로, 김상묵(金尙默)을 교리로, 김관주(金觀柱)를 부교리로 삼았다.

 

1월 17일 을미

주강을 행하였다.

 

사직(司直) 김응순(金應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 동방 문헌은 그릇된 것을 그릇 전하여 지금 고징(考徵)할 수 없습니다. 기자(箕子) 이전은 비록 있으나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자에서 기준(箕準)까지는 42세(世)가 되었으니 그 사이의 사적(事蹟)을 전하는 것이 자세해야 함에도 전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 이후로부터 연혁(沿革)과 시종(始終)에 대하여 그 학설이 한결같지 아니합니다. 조선(朝鮮)의 칭호에 있어 중국 사서(中國史書)에 나타난 것은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한다043)  .’하였고, 《동사(東史)》에 기재되어 있는 경우는 ‘동쪽에 해가 먼저 밝는다고 하여 조선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국호(國號)는 쉽사리 알 수 있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자세하지 않으니, 더구나 다른 의심스런 경우이겠습니까? 지금 이에 관한 책을 속히 이루고자 하나 그릇됨을 고증할 즈음에 정밀하냐의 여부를 모두 궁구할 수가 없으니, 반드시 1, 2년은 걸려야만 비로소 실마리가 잡힐 것입니다. 신의 생각은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은 신하를 다시 선발하여, 몇 건(件)씩 배정하고 몇 개월을 한정하여 각 산처(散處)로 하여금 전념하여 고정(攷正)하도록 한 뒤에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서로가 충분히 토의하여 한 책을 합성(合成)하면, 일이 빠르고 효과는 반드시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문헌비고(文獻備考)》의 편집하는 일이 범위가 넓고 컸었는데, 임금이 매양 그 빨리 이루어지기를 독려하였으나, 기재된 것이 소략하여 보잘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김응순이 상소하게 된 것인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여러 도에 여역(癘疫)으로 죽은 자는 뼈를 묻어 주라고 신칙하고, 시기가 지나도록 혼인지 못한 자에게는 물자(物資)를 주어 시집가고 장가들게 하라고 명하였다.

 

1월 18일 병신

임금이 조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홍지해(洪趾海)·민홍렬(閔弘烈)·김한기(金漢耆)를 비국 당상으로 차출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엄(趙曮)을 승진시켜 공조 판서로 삼고, 이최중(李最中)을 한성 판윤으로 삼았으니, 김치인이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김치인이 또 고 집의 김창흡(金昌翕)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창흡(金昌翕)은 참으로 은일(隱逸)의 선비이다. 산림(山林)에서 일생을 마쳤으니, 내가 일찍이 흠탄(欽歎)하고 있었다. 다만 시호를 내린 것은 전례가 있는가?"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화담(花潭)044)  과 토정(土亭)045)  은 모두가 수학(數學)에 밝은 선비인데, 모두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입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엄자릉(嚴子陵)046)  에게도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자릉에게는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모르겠으나, 도정절(陶靖節)047)  과 문중자(文中子)048)  의 경우는 모두 사시(私諡)049)  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음에 내키지 않아 미루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은 처음에 잘 생각해야 한다. 우선 기다려라."
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 임해(任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강동 현감(江東縣監) 구세덕(具世德)이 함부로 곤장을 때려 사람을 죽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 【정언(正言) 이장로(李長老)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성학(聖學)에 힘써 중화(中和)를 이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병은 ‘조(躁)’란 한 글자에 있는데, 이는 옛 제왕(帝王)으로부터 공통된 병통이다. 새해에 들어 면계(勉戒)한 것은 나에게 약석(藥石)이 되니, 어찌 맹성(猛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월 20일 무술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편집 당상(編輯堂上)과 낭관(郞官)에게 입시하여 각각 그 담당한 바를 아뢰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는, 기(杞)나라는 선대의 사적을 고징(考徵)할 수가 없다는 탄식050)  이 있으니, 다만 우리 나라만을 기록하되 한만(汗漫)하게 하지 말고, 반드시 간약(簡約)함을 따라 근엄(謹嚴)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월 21일 기해

임금이 도기 유생(到記儒生)051)  의 전강(殿講)을 친히 시험하여 한홍세(韓弘世)와 박성현(朴聖玹)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나머지는 각각 급분(給分)하도록 명하였다.

 

1월 22일 경자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1월 23일 신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편집 당상을 입시하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고려(高麗)와 삼한(三韓)의 사적(事蹟)에 빠뜨린 것이 없는가?"
하니, 병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삼한은 고징할 수 없고, 고려는 조금 낫습니다. 우리 나라는 예(禮)로써 나라를 세웠으므로 예부(禮部)가 가장 많고, 의장(儀章)과 복색(服色)도 추가해 넣은 것이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단(皇壇) 문제도 들어갔는가?"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황단은 천하 후세에 말할 명분이 있으니, 천하에서 반드시 의롭게 여길 것입 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예고(禮考)를 누가 담당하였는가?"
하였다. 이담(李潭)이 말하기를,
"신이 담당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보감(寶鑑)》과 같이 마땅히 별록(別錄)으로 해야 한다."
하였다. 김 치인이 아뢰기를,
"김한기(金漢耆)를 비국 당상에서 교체토록 한 것은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은 국구(國舅)로서도 오히려 비국 당상이 되었으니, 이를 혐의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찌 비국 당상이 없겠는가? 우선 그대로 두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5일 계묘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절후(節候)는 조금 이르나 봄갈이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내의원(內醫院) 및 기로소(耆老所)에서 봉진(封進)하는 타락죽(駝酪粥)을 정지하라 명하고, 그 어미소도 송아지와 함께 곧 놓아주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고 백성은 농사에 의지하는데, 농사에 가장 긴요한 것은 소이다."
하고, 이어 장면(蔣冕)052)  의 노우시(老牛詩)를 외우고, 말하기를,
"소는 사람을 위하여 일생 동안 근로(勤勞)하였음에도 사람은 그 노고는 알아주지 않고 도살(屠殺)하니, 이것이 과연 인술(仁術)인가? 일찍이 듣건대 어떤 고 상신(相臣)이 소의 도살을 금하였기 때문에 그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여러 신하에게 선온(宣醞)053)  함에 있어 쇠고기는 차리지 않았다. 내가 내반원(內班院)054)  에서 해마다 도살하는 것을 금지한 것과 봄마다 입직(入直)하는 군사에게 호궤(犒饋)함에 있어 으레 4필의 소를 잡았는데, 요즘 모두 폐지시킨 것도 이러한 뜻이다."
하고, 드디어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유수(柳脩)·윤동승(尹東昇)·구상(具庠)·어석정(魚錫定)·조정(趙晸)·김치공(金致恭)을 특별히 승지로 제수하였다.

 

1월 26일 갑진

하교하기를,
"차대(次對)할 때 명이 있었으니 이최중(李最中)을 백부장(柏府長)055)  으로 삼고, 이휘지(李徽之)를 교체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정창성(鄭昌聖)을 미원장(薇垣長)056)  으로 삼으라."
하였다.

 

1월 26일 갑진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승지 조정(趙晸)이 술기운이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강(講)하는 막중한 자리에 참찬관(參贊官)에게서 술 냄새가 나니, 서용치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에게 묻기를,
"민간에서 술로 발생하는 화(禍)가 자못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은가?"
하니, 한익모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문(下問)이 이에 미치시니, 백성들에게 다행스런 일입니다. 국가에서는 다만 사전(祀典)에 술을 사용하나, 민간의 경우 대수롭지 않은 잔치에도 모두 술에 빠져 크게 술을 빚는 일이 서로 잇따르고, 곳곳에 주정하는 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술을 즐기므로 원례(院隷)도 취하여 액속(掖屬)에게 모욕(侮辱)을 가하기까지 하는데, 나라의 기강과 관계가 되므로 엄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더욱 불량(不良)하여 개전의 정이 없는 자는 장형(杖刑)을 가하고 유배(流配)하였다. 임금이 또 대궐문에 나아가 각방(各坊)의 부로(父老)를 불러 보니, 어떤 자가 말하기를,
"술에 대한 폐단이 병자년057)   이전보다 심합니다."
하니, 형조(刑曹)로 하여금 술을 많이 빚은 자에게 장형을 가하고, 또 주등(酒燈)058)  키는 것을 금하였으나, 끝내 금할 수가 없었다.

 

1월 27일 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주례(周禮)》에는 정월에 들어 비로소 조화롭게 잘 다듬어 법을 상위(象魏)059)  에 내걸어 백성에게 법을 범하는 일이 중대함을 보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속대전(續大典)》은 금과 옥조로서 찬연히 구비되어 있으나, 맡은 신하가 능히 준수하지 못하여 법이 있는데 시행되지 않으니, 법이 없는 것만 못합니다. 민속(民俗)이 변질되고 기강이 무너짐은 오로지 이 일에 말미암은 것이니, 청컨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옛 법을 다시 밝혀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하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왕씨(王氏)의 대우를 매우 두터이 하여 군정 양역(軍丁良役)을 모두 면제시키도록 하였으니, 아! 거룩하도다. 계술(繼述)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중외(中外)에 왕씨를 찾아내어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편집 당상(編輯堂上) 한광회(韓光會)에게 숭의전(崇義殿)060)   고례(古例)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명하여 국조(國朝)에서 왕씨를 대우한 조목에 이르자, 하교하기를,
"승국(勝國)061)  이 있은 뒤에 아조(我朝)가 있게 되었다. 삼대(三代)062)  에 이미 이런 예(例)가 있었고, 한(漢)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에 있어서도 또한 그렇지 않음이 없었다. 나는 전조(前朝)에 대하여 마음에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으므로,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왕요(王瑤)가 임금 노릇을 못하였다.’고 하였으나, 내가 고쳐서 ‘공양왕(恭讓王)’이라 하였으니, 나의 뜻은 본래 이러하다. 이제 《보감(寶鑑)》의 등본(謄本)을 보니, 국초(國初) 열성(列聖)의 덕의(德意)를 황홀하게 직접 받드는 것 같다. 전각(殿閣)을 세워 향사(享祀)를 받들고 그 신하를 배식(配食)하였으니, 지극하고 극진한 일이다."
하고, 드디어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대사헌 이최중(李最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성상께서 전철(前哲)을 사모하여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니,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근래 가만히 보건대, 성의(聖意)에 거스르면 말의 시비를 논함이 없이 한결같이 꺾어버리며, 성의에 따르면 사람의 현명하고 우매함을 논함이 없이 모든 일에 사정을 두시므로, 언로(言路)가 막히어 사기(士氣)가 저하되고 사의(私意)가 멋대로 흘러 나라를 위하여 성의를 다하는 사람은 볼 수 없고, 녹(祿)을 생각하고 직위(職位)를 보전하는 것을 일찍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러고서 풍속이 어찌 크게 변할 수 있으며, 기강이 어찌 모두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비록 전하께서 중도(中道)를 벗어난 거조가 있더라도 또한 어떻게 일일이 승순(承順)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풍속을 따르고 지금의 방법에 변화가 없다면, 비록 선정(先正)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사지(四肢)를 펼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소장(疏章)이 들어갔으나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빈연(賓筵)에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최중이 인피(引避)하고 교체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유수(李惟秀)를 특별히 제수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김시묵(金時默)을 판윤으로, 정존겸(鄭存謙)을 공조 참판으로, 조운규(趙雲逵)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1월 28일 병오

2품 이상의 관원들이 문후(問候)하였는데,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 한구(金漢耉)의 장일(葬日)이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교서관의 겸교리(兼校理)를 다시 설치하여 편집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청하고, 또 중추부의 낭관 2명을 증원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자주 바꿈은 폐단이 있다 하여 따르지 않았다.

 

1월 29일 정미

임금이 종묘와 사직에 쓸 향과 축문을 연화문에서 지영하였다. 이어 탐라(耽羅) 백성을 불러 고통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여기(癘氣)가 치성하여 백성이 사망한 자가 많고, 농사는 흉년이 들어 또 생활할 수도 없습니다. 다행히 국가에서 나리포(羅里浦)의 곡물(穀物)을 나누어 주었으나, 중류(中流)에서 바람을 만나 모두 침몰하였으니, 섬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젖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듣고 매우 놀라면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곡식을 건져내게 하고, 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구제할 방법을 강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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