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무신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전배(展拜)하고, 이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전조(前朝)의 자손 왕씨(王氏) 성 가진 사람을 불러 보고, 왕윤도(王允道) 등 4인에게 쌀과 베를 내렸으며, 군문(軍門)에 임용을 명하였고, 서울과 지방에서 천역(賤役)을 하는 자는 경조(京兆)063) 로 하여금 찾도록 하여, 인부(人夫)를 대신 지급하고 면제시키게 하였다. 임금이 한익모(韓翼謨)에게 말하기를,
"이는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읽도록 명함으로 인하여 감회가 일어나서 그런 것이다.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이 일은 실로 선조(先朝)에서 숭의전(崇義殿)의 직(職)을 제수한 뜻에 따른 것이므로, 진실로 하늘의 큰 명령을 맞이하여 이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지나치다."
하였다.
2월 2일 기유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조강과 상참을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은 사람을 쓰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왕조에서 과목(科目)을 정하여 사람을 선발함은 그 법이 근래에 와서 더욱 옛것과 같지 않아, 명경(明經)은 한갓 입으로 외우기만 하고, 제술(製述)의 경우 요행수로 차지하는 일이 많습니다. 조경(躁競)하는 것이 습속을 이루어 염치(廉恥)를 상실하였고, 외직(外職)을 구해 생계를 영위하여 해가 백성에게 미칩니다. 심지어 서울 안의 동가(動駕) 때 유생들이 지영(祗迎)하기까지 하는 것은 역시 희망(希望)에서 나왔으니, 선비의 습관에 관계됩니다. 마땅히 과거 제도(科擧制度)를 고쳐 정하여서 좋은 법을 후세에 전해 주어야 합니다. 또 재용(財用)이 고갈됨은 요즘과 같은 경우가 없는데, 나라에 3년의 비축이 없으면 반드시 멸망하는 것이니, 제때에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요체를 물으니, 조명정이 말하기를,
"과거에 대한 폐단은 드물게 시행하여 적게 선발하는 것이 시정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고, 재정을 부유하게 할 방법에 있어서는 건백(建白)할 바가 없다면서 널리 하문하기를 청하였다. 그의 말은 당시의 병폐에 대부분 적중하였으나, 귀가 어두워 잘 아뢰어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에게 가부를 말하라고 명하였는데, 대략 몇 마디의 말로 미봉(彌縫)하고, 몰래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뿐이었다.
사헌부 【장령(掌令) 정언섬(鄭彦暹)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은산 현감(殷山縣監) 서행덕(徐行德)은 용렬하고 잔약하여 간리(奸吏)들이 농간을 부리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2월 3일 경술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각(臺閣)에 나온 대신(臺臣)의 입시(入侍)를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여기(癘氣)가 점점 치성하여 진주(晉州) 등 31읍은 사망이 2천 9백 20명이요, 흥양(興陽) 등 13읍은 사망이 4백 13명이며, 수원(水原)·남양(南陽) 등 읍은 지난 겨울 이후 사망이 5백 80명이었다.
임금이 편집청(編輯廳)에서 병제고(兵制考)를 보다가 귀양편(歸養篇)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전조(前朝) 때 오연(吳延)은 어버이 나이 70인 외아들의 경우, 종군(從軍)을 면제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니, 이는 참조할 만한 것이 있다. 앞으로 부방(赴防)에 있어 이와 같은 부류가 있을 때에는 부방을 면제하고 납미(納米)도 면제하며, 한 가호(家戶) 안에서 3, 4인이 종군한 경우에는 1인을 면제시키는 것으로 규정하여 법으로 삼으라."
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講)하였다.
2월 4일 신해
안변(安邊) 등 27읍에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자가 8백 16명이었다.
2월 5일 임자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무릇 절제(節製)에서 회시(會試)에 직부(直赴)된 사람 및 급분(給分)이 된 사람은 식년시(式年試)에만 나가도록 허용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진실로 명경과(明經科)064) 의 합격이 아닌 사람은 곧 모두 헛되이 버려 쓸모 없이 됩니다. 절제는 지금 이미 정식(定式)으로 되었으니, 앞으로는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식년시를 막론하고 자원(自願)에 따라 나갈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어보(御寶)를 위조한 죄인 변세기(卞世基)·왕귀찬(王貴贊)·임우춘(林遇春) 등의 사형을 특별히 용서하여 여러 도에 나누어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여러 죄인을 가두고 형신(刑訊)을 가하여 옥안(獄案)은 이미 갖추어졌으나, 미처 완결되지 못하였는데, 변세기의 아내 연이(連伊)가 북[鼓]을 쳐 등문(登聞)하니, 임금이 형조 판서 구선복(具善復)에게 명하여 변세기의 문안(文案) 및 등문한 공술 초본(供述草本)을 갖고 들어오게 하여 읽으라 명하였다. 이에 명릉(明陵)065) 의 능역(陵役) 때에 연이가 흙을 진 내용이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인가?"
하니, 구선복이 말하기를,
"과연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그 지아비의 형을 감하여 정배할 것을 명하였으며, 왕귀찬과 임우춘은 변세기와 같은 죄로서 다르게 할 수는 없으므로 모두 사형에서 감하여 정배한 것이다. 구선복이 말하기를,
"옥사(獄事)의 체통이 지극히 중한데, 어찌 경솔히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대신(大臣)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흙을 진 여인의 지아비를 어찌 법대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비록 대신(大臣)일지라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왕씨(王氏) 자손을 한편으로 면천(免賤)하고 한편으로 사형에 처함은 마음에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곧 물러가서 비록 밤이 깊더라도 개좌(開坐)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하한장(河漢章)이란 자가 사형수로 갇혔었는데, 그의 아내가 앵봉(鶯峰)의 역사(役事)에 흙을 진 사실로 인하여 방면(放免)을 입게 되었다. 변세기의 아내가 또 본받아 행하여 마침내 그 꾀가 이루어졌으며, 왕귀찬 등은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나 이로 인하여 모두 감형이 되었으므로 간민(奸民)이 징계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2월 6일 계축
임금이 야대를 행하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였다.
2월 7일 갑인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기구강(耆舊講)을 행하였는데, 문관(文官) 시종(侍從)으로서 3품과 2품, 태학생(太學生)으로서 나이 7, 80 이상은 모두 참석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소학(小學)》의 편제(篇題)를 외우고, 여러 기신(耆臣)들은 차례로 입교편(立敎篇)을 읽었는데, 각기 표리(表裏)066) 와 비단을 내리고 파(罷)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장령 최민(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여러 신하들이 시무(時務)를 말하고 군덕(君德)을 논함에 있어 반드시 먼저 몇 마디의 좋은 말을 하다가 이리저리 굴리면서 말을 만들어 왼쪽을 보나 오른쪽을 보나 조금도 모가 나지 않게 되어야만 비로소 감히 올리게 되며, 조금이라도 말이 정상적인 투식(套式)에서 벗어나거나 뜻이 순평(順平)하지 않으면 문득 성색(聲色)을 드러내어 지나치게 견책(譴責)을 가하십니다. 처음에는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나 마침내는 뜻밖의 하교를 만나게 되니, 여러 신하들이 장차 자신과 가정에 무슨 이익이 된다고 임금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려 하겠습니까? 탕제(湯劑)를 돌보아 드릴 때면 물리치라 명하시고, 옛일을 본받아 성명(成命)을 거두기를 아뢰면 문득 책벌(責罰)을 내리시며, 사기(辭氣)의 가운데 중도(中道)에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시고, 거조(擧措)의 즈음에는 간혹 타당성을 잃으시니, 신은 가만히 천지(天地)와 같은 크신 덕(德)에 섭섭함이 없지 않습니다. 무릇 소[牛]의 도살(屠殺)과 소나무의 남벌(濫伐)은 나라에서 크게 금하는 바로서 수령(守令)들이 소를 도살하는 경우 죄가 파직에까지 이르고, 산 소나무 한 그루를 베면 죄가 전가 사변(全家徙邊)067) 의 율로 되어 있으니,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엄중함을 진실로 알 수 있을 것인데, 나라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져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소의 도살은 더욱 심하고 소나무의 벌채(伐採)는 갈수록 늘어나니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식자(識者)들이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아! 산림 천택(山林川澤)에 대한 정책은 삼대(三代) 때에 소중히 여긴 바이니, 벌채를 때에 맞추어 하게 되면 생존한 자를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송(葬送)할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근년의 충재(蟲災)를 입은 뒤부터 더욱 신칙함이 마땅합니다. 경우(耕牛)에 있어서는 곧 농사짓는 근본인데, 그 힘을 부리고 그 고기를 먹는 것은 군자(君子)가 차마 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는 ‘흉년은 소를 도살한 소치(所致)이다.’라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가엾게 여긴 간절한 말입니다. 요즈음 금패(禁牌)를 거두라는 명령이 여러 차례 내렸는데, 이는 대체로 백성들과 같이 즐기려는 성대한 뜻이며, 사포(賜酺)068) 의 전해 내려온 뜻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랫 백성들은 미련하고 무식하여 금하지 않는 데에 버릇이 되어 사사로이 도살하기를 거의 매일처럼 하게 되니, 이는 다만 경작(耕作)에 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강에도 크게 관계가 되니, 거듭 통금(痛禁)을 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아뢴 내용에서 임금을 사랑함을 알 수 있다. 방금 내국(內局)069) 에 신칙하여 낙죽(駱粥)도 정지하라 명하였음은 뜻이 대체로 이에 있다. 지금은 도살의 금지를 전과 같이 하고 있으니, 어찌 이러한 폐단이 있겠는가? 그 금송(禁松)에 있어서는 모리배(牟利輩)들을 엄금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혹시라도 이런 폐단이 있으면 엄중히 처벌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2월 8일 을묘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는데, 왕세손이 뒤를 배행(陪行)하였다. 회가(回駕) 때에 저경궁(儲慶宮)에 전배하고 이어 경복궁(景福宮)의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임금이 손수 글을 지어 하교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부덕하고 무능한 사람으로서 왕위에 오른 지 46년에 나이도 77세이다. 무슨 일을 계술(繼述)하였으며, 무슨 일을 천양(闡揚)하였겠는가? 아! 국초(國初) 홍무(洪武)임신년070) 에 황명(皇命)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대대로 이어와서 지금 이미 3백 79년이 되었으니, 아! 성대하다. 부덕하고 무능한 사람에게 이르러 살얼음을 밟는 것과 같이 조심하고 있다. 아! 세도(世道)가 이러하고 국세(國勢)는 이러하며, 우리 백성도 이러하고 인심도 이러한데, 이중에 한가지만이라도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청구(靑丘)071) 에 서로 의지함이 오직 할아비와 어린 손자뿐인데, 그 할아비는 더욱 노쇠하고 그 손자는 어린 나이이니, 한밤에 일어나 생각하면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오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은 이를 생각한다면 어찌 경계가 되고 두려운 생각이 없겠는가? 한갓 그러할 뿐만 아니라 은밀한 곳에서 강구하는 것은 곧 부황(浮荒)한 말이요, 붓[筆]을 찾아 남을 모함하는 것도 역시 벼슬길을 위한 조급한 경쟁이다. 시험삼아 주(周)나라를 들어서 말한다면 덕(德)을 쌓은 지 1천여 년에 문왕(文王)이 비로소 천명(天命)을 받아 8백 년 기업(基業)을 이루었으나, 그 말기(末期)에 와서는 시들고 허약한 탄식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망할까 망할까 하여 무더기로 난 뽕나무에 매듯 한다.072) [其亡其亡 繫于苞桑]’고 하였다. 나는 비록 부덕하나 이러한 마음을 밤낮으로 감히 늦추지 않는다. 아! 오늘의 대소 신료들도 역시 이 하교를 본받고 있는가? 손자는 그 할아비를 의지하고 할아비는 그 손자를 의지하며 앞에 앉고 뒤에서 시중들고 있다. 구궐(舊闕)의 터에서 널리 효유(曉諭)하니, 열성조(列聖祖)께서 위에서 굽어보시고 많은 백성들이 아래에서 모두 듣고 있다. 옛 습성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만약 효과가 있다면 하늘에 계신 선조(先祖)께서 아마도 반드시 기뻐하면서 ‘후손(後孫)이 있구나.’ 하실 것이며, 부덕한 나도 내세울 말이 있어, ‘어진 신하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같이 이 효유를 들어 이 효유에 어김이 없게 하라."
하고, 이어 유신(儒臣)에게 하교를 선포하고 나서 정부(政府)에 간직해 두도록 명하였다. 또 조신(朝臣)의 나이 80, 사서인(士庶人)의 나이 90 이상인 자에게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지나는 길에 편집청(編輯廳)에 들렀고, 회가(回駕)할 때에 표신(標信)을 내려 어가(御駕) 앞뒤 금군(禁軍)의 해엄(解嚴)073) 을 명하였다. 선전관(宣傳官) 김처승(金處升)이 도감군(都監軍)에게 그릇 전하니, 훈련 대장 구선행(具善行)이 곧 해엄하도록 하였다가 도로 그 그릇됨을 깨닫고, 초기(草記)074) 로 김처응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김처승에게 곤장(棍杖)을 가하여 태거(汰去)시키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구선행이 한편으로 명금(鳴金)075) 을 하고, 한편으로 초기를 함은 일이 매우 모순된다."
하고, 잡아들여 그 직(職)을 파면하라 명하고, 금위 대장 이장오(李章吾)를 후임으로 삼았으며, 구선행은 금위 대장으로 삼았다.
민홍렬(閔弘烈)을 대사헌으로, 신광리(申光履)를 대사간으로, 정방(鄭枋)을 사간으로, 김종정(金鍾正)을 이조 참판으로, 강윤(姜潤)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9일 병진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문묘(文廟)의 석전 대제(釋奠大祭)에 쓸 향과 축문을 지영하였다.
차대(次對)076) 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은 휴가를 받았고 좌의정은 차자(箚子)를 올렸으며, 우의정은 사직 상소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는, 임금이 여러 백 마디의 전지(傳旨)를 내려 돈면(敦勉)하고 도승지 김광국(金光國)에게 전유(傳諭)하여 그들과 같이 오라고 명하였다. 이어 주강을 행한다고 명하여, 강을 마치고 숭정전에 돌아가자, 김광국이 복명(復命)하기를,
"우의정이 방금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한다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또 면직(免職)을 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제주 목사(濟州牧使) 안종규(安宗奎)의 장계를 보고, 하교하기를,
"지난번 연화문에서 본고을 배지인(陪持人)077) 을 불러 보고, 진휼(賑恤)에 필요한 4천여 석을 이미 선뜻 윤허하였다. 왕언(王言)은 믿게 해야 하는데, 백성을 속일 수 있는가? 비국으로 하여금 곧 구획(區劃)할 것을 초기(草記)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진곡(賑穀)으로 구획(區劃)한 것 가운데에 씨앗으로 쓸 콩은 포함이 되지 않았습니다. 새해의 파종은 관계되는 바가 더욱 긴요하니, 청컨대 연해읍(沿海邑)에 있는 정하고 충실한 곡물을 편의에 따라 구획하여 서둘러 들여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2월 10일 정사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2월 12일 기미
주강을 행하였다.
편집청(編輯廳)의 당상과 낭관을 불러 초(抄)한 것을 읽어 아뢰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중(愼重)하고 신중하여 형(刑)받는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하였고, 한(漢)나라 문제(文帝)도 말하기를, ‘몸에 형(刑)을 가하면 다시 붙지 못한다.’고 하였다.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의 두 가지 형벌은 이미 제거하였다. 앞으로는 비록 국문(鞫問)할 죄수라 하더라도 일체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治盜之刑]을 사용해서는 안되며, 강도(强盜)가 아닌데도 난장(亂杖)이나 주리의 형벌[周牢之刑]을 사용한 경우에는, 서울은 대관(臺官)이 적발하고 지방의 경우는 도신(道臣)이 계문하여 호소할 데 없는 나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고, 이어 형고(刑考)를 맡은 낭청(郞廳)에게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 하교를 편입(編入)하라 명하였다.
2월 14일 신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에 앞서 지사(知事) 남태제(南泰齊)가 기구(耆舊)의 조참(朝參)에서 과장(科場)의 폐단을 말함으로 인하여 임금이 물러가 차자(箚子)로 아뢰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남태제가 차자를 올려서 논열(論列)하였다. 변통의 요체(要諦)를 대략 언급하였는데, 드물게 설행하여 적게 뽑자는 말이 조명정(趙明鼎)의 대답과 같았다. 이때 나라의 경사가 거듭되고 과거(科擧)가 빈번하여 사람은 많고 자리는 적어 적체됨을 소통시킬 수 없었는데, 벼슬길에 조급한 경쟁과 요행을 바라는 일이 주로 이에서 말미암았다. 남태제의 차론(箚論)은 비록 당시의 병폐에 적중하였으나, 임금이 채택에 뜻이 없어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16일 계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2월 18일 을축
한학(漢學)과 이문(吏文)에 능한 문신(文臣)을 불러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시험하였다.
2월 19일 병인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 정언섬(鄭彦暹)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관방(官方)078) 이 어지러운데 감찰(監察)에 있어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감찰은 곧 옛날의 전중 어사(殿中御史)인데, 우리 나라에서 설치한 것은 더욱 자별(自別)합니다. 그러나 전조(銓曹)에서 해당 관사(官司)와 동일시(同一視)하여 내력이나 처지는 고려하지 않고 혼동하여 차출하며, 무감찰(武監察)의 경우 더욱 심하여 서단(署單) 가운데 과거(科擧)와 벼슬을 허위 기재하는 폐단이 가끔 있으니, 전조에 신칙하여 특별히 가려 뽑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평양부(平壤府)에 불이 나서 민가(民家) 70호가 연소(延燒)되니, 대·중·소호(大中小戶)를 구분하여 회부(會付)된 모미(耗米)079) 에서 제급(題給)하도록 하고, 또 본부(本府)로 하여금 돌보게 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2월 20일 정묘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삭사(朔射)를 시험하였다.
2월 21일 무진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영릉(寧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으며, 숭정전으로 돌아와 조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편집청(編輯廳)의 8낭관(郞官)을 불러 각각 초(抄)한 바를 아뢰라 하였는데, 중종(中宗)께서 한원(翰苑)080) 에 필묵(筆墨)을 내린 일에 이르자, 임금이 한동안 차탄(嗟嘆)하다가 하교하기를,
"《문헌비고(文獻備考)》 가운데 중종께서 승정원에 내린 하교를 들으니, 아! 거룩하도다. 그 더욱 거룩한 것은 곧 예문관에 필묵을 내리신 점이니, 이는 특히 사실대로 쓰게 하는 거룩한 뜻이다. 내가 ‘대공사필(大公史筆)’ 넉 자를 써서 예문관에 붙인 경우와 우연히 서로 부합되니,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아! 사필(史筆)을 잡은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사실대로 써서 그 임금의 허물이 국사(國史)에서 빠짐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영경연사(領經筵事)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임금이 두려워하는 바는 오직 사필(史筆)에 있는데, 중종의 거룩한 일을 지금 또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사실대로 쓰더라도 나는 알지 못하겠지만, 뒷 사람은 보고 이런 사실을 안다면 마땅히 두려워하고 삼갈 것이다."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2월 22일 기사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2월 23일 경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저경궁(儲慶宮)과 육상궁(毓祥宮)의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광명전(光明殿)으로 나아갔는데, 왕세손(王世孫)이 모시고 앉았다. 임금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방금 《중용(中庸)》을 강(講)하였으니, 오늘 내가 강을 시험하리라."
하고, 궁관(宮官)에게 《중용》을 올리라 명하여 임금이 먼저 제1장(第一章)을 외우고 세손(世孫)에게 한 차례 임강(臨講)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글 읽는 소리를 들으니, 많이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문의(文義)를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무엇을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이라 하는가? 그 명한 바를 누가 듣고 보았는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만물을 화생(化生)시킴에 있어 기(氣)가 형성되고 이(理)도 부여(賦與)되는 것이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도(修道)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천성(天性)은 성인(聖人)이나 범인(凡人)이 모두 같으나, 기질(氣質)의 품부(稟賦)는 지나치고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도한 뒤에야 천성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닦는다[修]는 것은 솥을 씻고 거울을 갈고 닦는 듯하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일상 해야 할 일에 등급(等級)과 절목(節目)을 두는 것이 곧 닦는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등급과 절목을 두는 일이 과연 몇 절(節)이나 되는가?"
하매, 대답하기를,
"높은 이를 존경하고 친근한 이를 친애하는 것[尊尊親親]이 모두 그 절목입니다."하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였다. 이어 어제시(御製詩) 두 귀절을 내리니, 세손이 곧 그자리에서 화답해 올렸고, 여러 신하들도 차례로 화답해 올렸다. 이때 춘궁(春宮)081) 의 학업은 날로 진전되었고 슬기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강하는 음성이 맑고 견해가 정밀하고 투철하여 임금이 묻는 바에 대답하기를 곧 메아리 치는 듯하였으니,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목을 길게 빼고 기뻐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2월 26일 계유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과 조강을 행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혜민서(惠民署)를 설치한 것은 대개 의약(醫藥)으로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데에서 나왔으나 옛 법이 전폐되어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니, 매우 부당합니다. 더구나 지금 전염병이 치열하여 병자가 서로 이어지고 있으니, 오부(五部)로 하여금 활인서(活人署)에 필요한 약품(藥品)들을 곧 혜민서에 보고하고 구해 보내게 하여 실효(實效)가 있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각 도에 나누어 기르는 말은 금군(禁軍)으로 하여금 먼저 선택하게 한 뒤에 다른 군문(軍門)에 나누어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병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금군의 관마(官馬)가 모두 병약(病弱)하여 탈 수 없음은 다른 군문에서 먼저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아뢴 까닭이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중회(趙重晦)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윤득양(尹得養)을 대사헌으로, 안표(安杓)를 대사간으로, 강윤(姜潤)을 집의로, 홍응보(洪應輔)를 헌납으로, 홍상간(洪相簡)을 수찬으로, 이최중(李最中)을 형조 판서로, 조영진(趙榮進)을 경기 관찰사로, 홍양한(洪良漢)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고, 특별히 권도(權噵)를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2월 27일 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세제(世弟)로 있을 때에 양득중(梁得中)이 계방(桂坊)082) 에 있었으며, 즉위(卽位)한 뒤에는 남대(南臺)083) 가 되어 나에게 권하여 ‘실사 구시(實事求是)’를 전각(殿閣)에 써서 붙인 바 있는데, 지금도 생각이 난다. 전조(銓曹)로 하여금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게 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야대를 행하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講)하였다.
2월 28일 을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2월 29일 병자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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