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무인
조강과 주강 및 석강을 행하였다.
숭정전의 월대에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삼일제(三日製)084) 를 앞당겨 설행하고, 진사(進士) 최치백(崔致白)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으며, 나머지는 각각 급분(給分)하였다.
3월 3일 경진
임금이 선잠제(先蠶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이어 연화문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제술(製述)을 설행하였다.
3월 4일 신사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소학(小學)》의 입교편(立敎篇)을 외우고 말하기를,
"자하장(子夏章)을 입교편 끝에 붙임은 무슨 뜻인가?"
하니, 교리 김노순(金魯淳)이 말하기를,
"편차(編次)를 정할 때에 자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여색(女色)을 좋아하듯 한다.[賢賢易色]의 대(對)는 곧 ‘악취를 싫어하듯 한다.[如惡惡臭]’는 것으로서, 상장(上章)의 ‘널리 여러 사람을 사랑하되 인(仁)한 이를 친하게 한다[泛愛衆而親仁]’는 것과 서로 표리(表裏)가 됩니다. ‘현현(賢賢)’의 한 귀절에 성의(聖意)를 두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물은 것은 무심(無心)한 데에서 나왔는데, 그대가 대답한 바는 골자(骨子)가 있으니, 이는 내가 평소에 고심하여 굳게 지킨 것이다. 처음 윤봉구(尹鳳九)의 상소에 처분한 바가 있었고, 신경(申暻)의 사건 뒤에 또한 《유곤록(裕昆錄)》을 지었는데, 이겸빈(李謙彬)을 처분한 일이 있었다."
하고, 이어 책상을 치며 말하기를,
"김 노순이 감히 ‘현현(賢賢)’으로써 비유한 것은 어찌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아닌가? 문의(文義)로 인하여 사의(私意)를 개입(介入)시켰으니,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대훈(大訓)도 장차 물 속에 던져 버릴 것인가? 마땅히 시초(始初)에 그 폐단을 막아야 하니, 교리 김노순에게 특별히 서용치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3월 5일 임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황단(皇壇)에 쓸 향을 지영하고, 이어 전설사(典設司)로 나아가 하교하기를,
"오늘 다만 풍천장(風泉章)085) 만을 외운다. 늦여름을 앞두고 있으니, 먼저 어찌 복악(復樂)하겠는가?"
하였다. 승정원(承政院)과 옥당(玉堂)086) 에서 차자(箚子)와 계주(啓奏)로써 서로 다투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밤 3경(三更)에 임금이 한데[露天] 엎드려 황단(皇壇)의 예(禮)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이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3월 6일 계미
주강을 행하고 특별히 한 달 더 장악(藏樂)한다는 명을 거두었으니, 대신(大臣)의 청에 따른 것이다. 얼마 안되어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읽다가 감회가 일어나 또 장악(藏樂)하라고 명하였으나, 대신의 아룀으로 인하여 곧 다시 정지하였다.
3월 7일 갑신
이성수(李性遂)·이석재(李碩載)·김한기(金漢耆)·이창유(李昌儒)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수레를 타고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당초 육상궁의 기신(忌辰)에 대가(大駕)가 날이 밝으면 일찍이 나가려 하였는데, 사서(司書) 권진(權禛)이 마침 입직(入直)하였다가 그 어머니의 병으로 상소를 올리고 지레 나갔었다. 임금이 상소가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그에게 비록 어버이 병은 있으나 그 임금의 오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 3일의 제도로써 일찍이 하교가 있었는데, 명령을 어기고 상소하였다."
하고, 그 관직을 삭제하라 명하고 이어 즉일로 동가(動駕)하라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편집청(編輯廳)의 낭청(郞廳) 홍찬해(洪纘海)를 불러 묻기를,
"너는 직관고(職官考)를 담당하고 있는데, 내시부(內侍府)의 관명(官名)과 정원수(定員數)도 수정하여 들인다하니,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시부는 이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들어가 있으며, 《문헌비고(文獻備考)》도 마땅히 수정하여 들여야 하는데, 중간의 연혁을 상고할 수 없으므로 하리(下吏)를 시켜 내시부에 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품의하지 않고 번번이 내시부에 물은 것은 옛사람이 온실수(溫室樹)087) 를 말하지 않은 뜻과 다르니, 외람된 짓이다."
하고, 파직하라고 명하였다가 도로 곧 정지하였다.
3월 8일 을유
임금이 육상궁에 있었다. 김노영(金魯永)을 선공감(繕工監)의 가감역(假監役)으로 삼고,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을 좌천(左遷)시켜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이때 임금이 김노영에게 관직을 제수하려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해당한 자리에 의망(擬望)해 들이도록 하였으나, 갑작스런 일이므로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심하게 화를 내어 임금의 명령을 조종한다고 여겨 박상덕은 좌천시키고, 김노영에게 들어와 숙배 사은(肅拜謝恩)하라고 독촉하였다. 대체로 감역(監役)의 제수에는 연한(年限)이 있고, 사은하는 일이 없었으니, 그 제수와 사은은 모두 고례(古例)가 아니다. 얼마 안되어 박상덕을 내직(內職)에 의망하라 명하고, 김노영은 계방(桂坊)으로 옮겨 제수하였는데, 김노영은 곧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손자로서 나이 겨우 약관(弱冠)이었다.
3월 9일 병술
임금이 궁궐로 돌아왔다.
3월 10일 정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은(李溵)을 이조 판서로, 이세연(李世演)을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이동우(李東遇)를 정언으로, 김광위(金光緯)를 장령으로, 민유(閔游)·안정현(安廷鉉)을 지평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사간으로, 박사륜(朴師崙)을 헌납으로, 신광집(申光緝)을 교리로, 김기대(金基大)·조창규(趙昌逵)를 수찬으로, 황최언(黃最彦)·조재준(趙載俊)을 부수찬으로, 이치중(李致中)을 부교리로, 유한근(兪漢謹)을 설서로, 이진형(李鎭衡)을 사서로 삼았다.
3월 11일 무자
임금이 미령(靡寧)하니, 내의원(內醫院)에서 윤번으로 입직(入直)하고, 조정(朝廷)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문후(問候)하였다.
3월 12일 기축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시임·원임 대신을 불러보았다.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각도의 묵은 환자(還上)를 묘당(廟堂)에서 당년의 재실(災實)을 구분하여 수봉(收捧)해야 할 수량을 결정하고, 공문(公文)을 보내 도신(道臣)을 행회(行會)088) 하여 이 수량을 각읍에 배정하되, 면·리(面里)의 풍흉(豊凶)을 보아 적당량을 나누어 징수하여 수봉해야 할 한도를 고르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여러 사람과 논의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모두 김상철의 말이 옳다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13일 경인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내의원의 입직 및 조정에서의 기거(起居)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3월 14일 신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김한기(金漢耆)를 수어사(守禦使)로, 조엄(趙曮)을 이조 판서로, 남현로(南玄老)를 대사간으로, 정택(鄭擇)을 장령으로, 박취원(朴取源)을 응교로, 홍수보(洪秀輔)·정창순(鄭昌順)을 부교리로, 심이지(沈頤之)를 수찬으로, 송지연(宋志淵)을 보덕으로, 조영진(趙英鎭)을 설서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내국(內局)의 3제조(提調)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임금의 환후(患候)가 미처 회복이 되지 못하였으나, 옛 경인년089) 에 숙직(宿直)하였던 일을 추모(追慕)하여 입직(入直)의 중지를 명하였는데, 도제조 홍봉한(洪鳳漢)이 입직의 중지를 간쟁(諫諍)하지 않고, 다만 지영하는 일만 정지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인(吏人) 장익표(張翼標)란 자가 어사(御史)를 사칭하고 영남(嶺南)의 울산부(蔚山府)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일이 발각되자 도신(道臣) 이미(李瀰)가 계문하니, 해조(該曹)에서 일죄(一罪)090) 로써 고율(考律)할 것을 복계(覆啓)하였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전 충청 수사(忠淸水使) 박상덕(朴相德)을 잡아들여 밀부(密符)를 대신 바치게 한 죄를 물으니, 박상덕이 군직(軍職)이 주어지지 않은 까닭이라고 대답하므로, 마침내 풀어 주었다.
3월 15일 임진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기호(畿湖)의 장문(狀聞)을 연달아 들으니 비와 햇빛이 적중(適中)하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비는 때를 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한결같은 생각을 지키고 버림이 풍흉(豊凶)에 경계가 되니, 오늘 비록 비가 오더라도 내일 비가 내리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물을 저장하고 관개(灌漑)하는 일 등을 여러 도로 하여금 각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3월 16일 계사
주강을 행하였다.
3월 17일 갑오
대사간 남현로(南玄老)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에 장악(藏樂)하라는 명령은 비록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이는 정(情)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시행한 데에 지나지 않으며, 잠시도 풍악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에는 어긋나는데, 일상적인 규례처럼 여겨서 특별한 하교를 자주 내리셨습니다. 전하의 끝이 없는 효성 때문에 중도(中道)를 지나치는 결과를 면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은 마음속으로 애석한 생각이 듭니다. 예(禮)로써 신하를 부림은 곧 우리 조정의 전해 내려오는 법인데, 엊그제 중신(重臣)을 잡아들인 일은 실로 군정(群情)이 소망하는 바가 아닙니다. 곤수(閫帥)의 밀부(密符)를 대신 바친 일은 진실로 죄가 있으니, 파직하거나 삭출(削黜)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품계가 경재(卿宰)의 지위에 있고 일이 군법(軍法)과 다른데, 전정(殿庭)으로 잡아들여 경색(景色)이 너무 조급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에서 군신(群臣)을 예우하며 후손에게 모범을 보이는 길이겠습니까?"
하였다. 소장(疏章)이 들어가자 엄히 꾸짖는 비답이 내렸다. 처음에는 관직의 삭탈을 명하였다가 곧 사적(仕籍)에서 삭제할 것을 명하였다.
3월 18일 을미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홍낙인(洪樂仁)을 이조 참판으로, 심욱지(沈勗之)를 대사간으로, 홍경안(洪景顔)·이일증(李一曾)을 장령(掌令)으로, 정경인(鄭景仁)·홍상성(洪相聖)을 지평으로, 윤양후(尹養厚)를 부응교로, 김기대(金基大)를 교리로 삼았다.
3월 19일 병신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갑신년091) 에 명(明)나라의 국운(國運)이 다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성빈(安聖彬)·여선형(呂善亨)을 지평으로, 홍언철(洪彦喆)을 장령으로, 조준(趙㻐)을 정언으로, 이명식(李命植)을 이조 참의로, 서유원(徐有元)을 헌납으로, 김노진(金魯鎭)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3월 20일 정유
여선덕(呂善德)을 지평으로, 박상로(朴相老)를 필선으로 삼았으며, 전 영부사 홍봉한(洪鳳漢)을 서용하여 도로 영중추로 임명하였다.
3월 21일 무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영릉(英陵)092) 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이어 숭정전에 나아가 병자년093) 의 충신 자손인 문관(文官)·음관(蔭官)·유생(儒生)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행하여 갑신년094) 충량과(忠良科)095) 의 예에 의해 수석(首席)에게는 회시(會試)에 나가도록 허용하고 나머지는 각각 급분(給分)하라고 명하였다.
청주(淸州) 사람 한유(韓鍮)가 도끼를 들고 궐문(闕門)에 엎드려 한 통의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그 대략은 ‘간신(奸臣) 홍봉한(洪鳳漢)을 참(斬)하소서…’라고 한 것이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은 지 한나절이었다. 홍봉한이 겨우 서용(敍用)되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이때에 마침 도성(都城) 밖에 있다가 이 사실을 듣고 곧 금오(金吾)096) 에서 대명(待命)하면서, ‘시골 유생의 상소 내용은 아주 놀랍다.’는 말을 승정원에 전하였다. 임금은 대명하면서 말한 내용이 이상함을 듣고 비로소 유생(儒生)의 상소가 있었음을 알았다. 유생(儒生)에게 입시를 명하였으나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한 유는 이미 물러나서 있는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초경(初更)에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한유를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3월 22일 기해
금오랑(金吾郞)097) 이 한유(韓鍮)를 체포하여 오니, 임금이 묻기를,
"네가 올린 것은 무슨 상소인가?"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영신(佞臣)을 탄핵한 상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그 상소를 읽으라 명하였는데, 첫째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을 팔뚝에 새기고 도끼를 짊어지고서 죽음을 맹세하였음을 말하였으며, 주운(朱雲)098) 을 끌어대어 자신에게 견주기까지 하였다. 이어 홍봉한의 부자 형제가 차례로 과시(科試)를 차지하여 모두 요로(要路)를 점거하였으며, 권력을 탐하여 마음대로 휘두르므로써 나라를 그르친 죄를 극언(極言)하고, 그 아들 홍낙인(洪樂仁)은 교활하고 광패(狂悖)하며, 그 아우 홍인한(洪麟漢)은 호번(湖藩)099) 에서 탐학하여 사람들이 그 고기를 먹으려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망국동(亡國洞)의 망정승(亡政丞)은 이미 동요(童謠)를 이루었습니다."
하였는데, 대개 홍봉한이 안국동(安國洞)에 거주하기 때문이었다. 또 말하기를,
"산림(山林)의 선비가 죄를 입고, 언관(言官)이 토죄(討罪)를 청하며, 앞뒤에 상소한 유생을 찬배(竄配)하고 과거(科擧)를 정지시킨 것은 모두 홍봉한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 상소를 올리려 한 지 오래 되었으나 홍봉한이 포도청으로 하여금 축출하게 하였고, 기성(騎省)100) 에서 금지하였습니다."
하였으며, 끝에 가서 ‘먼저 신을 처참(處斬)하고 뒤에 홍봉한을 처참하라’고 말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만고(萬古)에 없는 일이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과 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다급한 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한유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닌데 어찌 일마다 모두 잘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에 따라 논함에 있어 혹은 권간(權奸)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으나, 어찌 이와 같이 심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뼈에 맺힌 원한이 있는 것이다."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存亡)에 관계되므로 차마 서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며, 어찌 티끌만한 원한이라도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그에게 하문(下問)하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소 중에 주운(朱雲)을 일컬은 것은 네가 조선(朝鮮)에서 한 ‘직(直)’ 자를 얻으려고 이 짓을 한 것인가?"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오로지 나라를 위한 데에서 나왔습니다. 비록 몸이 곧 반쪽이 난다 하더라도 성교(聖敎)의 온당(穩當)함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장전(帳殿) 가까이에서 감히 하교가 온당치 못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자(臣子)의 도리이겠는가?"
하고, 국문(鞫問)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 상소 중에 유생을 유배시키고 과거를 정지시켰다고 한 것은 모두 임금이 명령한 것이다. 영부사(領府事)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되어 바로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40년 고심(苦心)에 다만 영부사 한 사람이 나를 협찬(協贊)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마음에 달갑게 앙갚음하려는 것은 곧 당인(黨人)들의 사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홍봉한이 한 일은 〈군주〉 협찬한 것이 아니라 모두 나라를 망치는 짓이었습니다. 만약 남의 사주를 받았다면 어찌 먼저 신을 처참하라는 말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한 차례 형추(刑推)를 한 뒤에 하교하기를,
"인심과 세도(世道)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작년에 한집(韓鏶)이 있었고, 금년에는 한유가 있다. 그들을 10촌간이라 말하지 말라. 그 마음은 하나 같다. 더구나 신경(申暻)을 처분한 일이 어찌 상신(相臣)의 아룀으로 말미암았는가? 당인을 유배한 것은 모두 임금으로부터 말미암았는데, 감히 임금에게는 분풀이를 못하고 그때의 보상(輔相)에게 마음에 달갑도록 앙갚음하려함은, 곧 길 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하고, 유생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흑산도(黑山島)로 정배(定配)하되 사흘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押送)하고, 그 상소는 불태우라 명하였다.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심욱지(沈勗之)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은 갑작스레 명소패(命召牌)를 받았으므로, 한유(韓鍮)의 상소 내용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전(帳殿)의 문목(問目)101) 내용으로 살펴본다면 전하께서 여러 해 신임한 신하가 망측한 죄에 빠졌으니, 그 조짐을 추측할 수 없습니다. 한유는 곧 시골 사람이니, 그가 어찌 스스로 알았겠습니까? 비록 그자의 공사(供辭)에 길을 가다 들은 풍문임을 말하였으나, 그가 이미 이와 같은 중대한 언동을 하였으니, 말을 전한 사람을 결코 잊어버릴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엄문(嚴問)하시는 아래에 둘러대며 승복(承服)치 않았는데,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령까지 계시니, 이는 이와 같이 허술하게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다시 왕부(王府)102) 로 하여금 신문(訊問)하게 하여 사람을 무함한 죄를 명쾌히 바루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청은 비록 체면(體面)에는 맞으나, 처분에도 뜻이 있으니, 무엇이 나쁠 게 있겠는가?"
하였다.
교리 김상묵(金尙默)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상소한 유생을 친국(親鞫)하신 일에 있어 걱정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은 그 상소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초야(草野)의 유성이 궐문(闕門)에서 부르짖는 일은 예로부터 있었습니다. 말이 쓸만하면 채택하고 쓸 수 없는 경우면 물리치는 것은, 곧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전해 내려오는 가법(家法)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다만 대신(大臣)이 대명(待命)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유생의 상소가 있음을 들으셨으나, 미처 다 보시지도 않고 갑자기 금오(金吾)에 잡아오라 명하고, 포도청으로 하여금 체포하게 하였으며, 이어서 차꼬를 씌워 유배(流配)하기를 마치 악역(惡逆)을 다스리듯 하였으니, 이는 전날에 없었던 일입니다. 팔방(八方)103) 에 전해지고 사책(史冊)에 쓰여질 때에 성덕(聖德)에 누가 되고 국맥(國脈)에 손상이 되는 일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시골 유생의 말이 조정에 미침은 비록 망령된 일이라 할 수 있으나, 만약 대신(大臣)에게 촉범(觸犯)하였다고 하여 갑자기 위노(威怒)를 가하신다면 초야(草野)에서 진언(進言)하는 길은 이로부터 단절될 것이니, 비록 위망(危亡)의 기미가 있을지라도 전하께서는 듣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명색(名色)이 상소하는 유생으로서 종일토록 궐문(闕門)에 엎드렸으나 아래에서 강력히 막아 임의로 물리쳤으니, 전에 듣지 못한 일이며 후일의 폐단에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입직(入直)한 기성(騎省)의 모든 당상과 낭관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김상묵(金尙默)의 상소는 광패(狂悖)한 사람의 언동이니, 내 어찌 회답을 하겠는가?"
하고, 서용치 않는 율을 시행하라 명하였다가 곧 그 관직을 삭탈하였다.
홍봉한(洪鳳漢)에게 특별히 치사(致仕)를 명하였다. 3대신(大臣)에게 와내(臥內)104) 로 입시하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영부사(領府事)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끝내 진중한 몸가짐에 흠이 있음을 어제의 광경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치사를 명하였는데, 이는 곧 끝까지 곡진하게 보호하는 뜻이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영부사가 10년 동안 국정을 담당함에 있어 매우 공정히 조정(調停)하였고, 사무에 숙달하였으며 나이 또한 노령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깊다."
하였다. 김치인이 물러나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성상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고 세상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아 성화(聖化)를 협찬(協贊)하고 국사(國事)에 부지런히 수고하였으니, 그 진퇴에 관계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그가 탄핵을 입은 것은 비록 망극(罔極)하다고 하겠으나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니, 어찌 다른 염려가 있어 미리 조치하십니까? 원하건대 빨리 전에 내린 하교를 거두소서."
하였고, 판부사 김상복(金相福)·김양택(金陽澤)·이창의(李昌誼)도 또한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려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김화진(金華鎭)을 대사헌으로, 임희우(任希雨)를 사서로, 이득신(李得臣)을 헌납으로, 윤면승(尹勉升)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23일 경자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유신(儒臣) 윤양후(尹養厚)와 임정원(林鼎遠)이 아뢰기를,
"전 대사간 심욱지(沈勗之)는 장전(帳殿)에서 소회(所懷)를 아뢰어 소문의 출처를 구명하기 위하여 심지어 왕부(王府)에서 신문[盤問]하기를 청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대간(臺諫)의 체모(體貌)가 있겠습니까? 뒤에 따를 폐단과 관계가 있으니, 청컨대 관직을 삭탈(削奪)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체면(體面)에 맞는다.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대신(臺臣)이 되어 소문의 출처를 신문하도록 청하였으니, 옛날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던가? 대간(臺諫)의 체모의 득실은 물론하고 미원장(薇垣長)105) 의 직임이 어떠하기에 곧 무식한 부류로 이와 같이 구차히 보충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심욱지(沈勗之)와 같은 자를 어찌 족히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7책 11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50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105] 미원장(薇垣長) : 대사간.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대신(臺臣)이 되어 소문의 출처를 신문하도록 청하였으니, 옛날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던가? 대간(臺諫)의 체모의 득실은 물론하고 미원장(薇垣長)105) 의 직임이 어떠하기에 곧 무식한 부류로 이와 같이 구차히 보충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심욱지(沈勗之)와 같은 자를 어찌 족히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윤동승(尹東昇)을 이조 참의로, 김시묵(金時默)을 호조 판서로, 김이소(金履素)를 교리로 삼았다.
홍봉한(洪鳳漢)을 봉조하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홍봉한은 재혜(才慧)가 조금 있었고,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처지로서 오랜 동안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었으며 가장 신임을 받았다. 조정의 주요 기무(機務)를 거머쥐고 소지(小智)를 많이 구사하였으며, 조정의 진퇴(進退)의 권한을 쥐고 적임이 아닌 자를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산림(山林)의 상소와 대간(臺諫)의 장계(狀啓)는 그 명의(名義)가 지극히 소중함을 모르는 바 아닐텐데, 천위(天威)를 출박(怵迫)하여 대정(大庭)에서 죄책을 묻도록 청한 것은, 실로 무궁한 폐단을 만들었고, 사류(士類)의 마음을 많이 잃었다. 더구나 부자 형제가 요직에 열 지어 있었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이권(利權)이 있는 곳에 원망이 따르게 마련이니, 식자(識者)들이 차탄(嗟嘆)하면서 반드시 실패할 것을 안 지 오래이다. 한유(韓鍮)는 초야(草野)에 있는 사람으로서 도끼를 들고 궐문(闕門)에 엎드려 한 자 남짓한 소장(疏章)으로 궐문에서 부르짖었는데, 말은 대부분이 절실하고 곧았으나,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오로지 나라를 위한 데에서 나왔다면, 화평한 마음으로 도리(道理)를 설명하여 그 죄를 분명히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팔뚝을 지져 글자를 새김은 얼마나 고통이며, 도끼를 들고 죽음을 맹세함은 무슨 용기인가? 심지어는 동요(童謠)를 끌어대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반드시 홍봉한을 죽이고야 그만두려 하였으니, 또한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홍봉한이 수상(首相)에서 파직이 된 것은 이미 임금의 마음이 싫어하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한유의 상소가 한번 들어가자 10년의 수상을 억지로 치사(致仕)시켰으니, 임금의 뜻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족히 높은 자리에 있고 권세가 성만(盛滿)한 자의 경계가 될 것이다. 처음에 한유가 도내(道內)에 글을 보내어 고 상신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서 내어쫓고, 《유곤록(裕昆錄)》에서 제거하도록 상소하겠다고 떠들었으며, 많은 재물을 모았으나 서울에 들어와서 소장을 올림에 있어서는 발문(發文)한 가운데 몇 가지는 애초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쩍게 여겼다. 그 상소의 원본은 전좌(殿座)에서 불태워졌으므로, 당시의 사첩(史牒)에 빠져 전하지 않는다."
【태백산사고본】 77책 11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50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홍봉한은 재혜(才慧)가 조금 있었고,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처지로서 오랜 동안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었으며 가장 신임을 받았다. 조정의 주요 기무(機務)를 거머쥐고 소지(小智)를 많이 구사하였으며, 조정의 진퇴(進退)의 권한을 쥐고 적임이 아닌 자를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산림(山林)의 상소와 대간(臺諫)의 장계(狀啓)는 그 명의(名義)가 지극히 소중함을 모르는 바 아닐텐데, 천위(天威)를 출박(怵迫)하여 대정(大庭)에서 죄책을 묻도록 청한 것은, 실로 무궁한 폐단을 만들었고, 사류(士類)의 마음을 많이 잃었다. 더구나 부자 형제가 요직에 열 지어 있었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이권(利權)이 있는 곳에 원망이 따르게 마련이니, 식자(識者)들이 차탄(嗟嘆)하면서 반드시 실패할 것을 안 지 오래이다. 한유(韓鍮)는 초야(草野)에 있는 사람으로서 도끼를 들고 궐문(闕門)에 엎드려 한 자 남짓한 소장(疏章)으로 궐문에서 부르짖었는데, 말은 대부분이 절실하고 곧았으나,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오로지 나라를 위한 데에서 나왔다면, 화평한 마음으로 도리(道理)를 설명하여 그 죄를 분명히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팔뚝을 지져 글자를 새김은 얼마나 고통이며, 도끼를 들고 죽음을 맹세함은 무슨 용기인가? 심지어는 동요(童謠)를 끌어대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반드시 홍봉한을 죽이고야 그만두려 하였으니, 또한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홍봉한이 수상(首相)에서 파직이 된 것은 이미 임금의 마음이 싫어하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한유의 상소가 한번 들어가자 10년의 수상을 억지로 치사(致仕)시켰으니, 임금의 뜻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족히 높은 자리에 있고 권세가 성만(盛滿)한 자의 경계가 될 것이다. 처음에 한유가 도내(道內)에 글을 보내어 고 상신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서 내어쫓고, 《유곤록(裕昆錄)》에서 제거하도록 상소하겠다고 떠들었으며, 많은 재물을 모았으나 서울에 들어와서 소장을 올림에 있어서는 발문(發文)한 가운데 몇 가지는 애초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쩍게 여겼다. 그 상소의 원본은 전좌(殿座)에서 불태워졌으므로, 당시의 사첩(史牒)에 빠져 전하지 않는다."
이성원(李性源)을 승지로 삼았다.
3월 24일 신축
임금이 봉조하 홍봉한을 와내(臥內)로 불러 보고, 혜빈(惠嬪)106) 을 위하여 치사(致仕)토록 한 것이며, 곡진히 보호하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하유(下諭)하니, 홍봉한은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정언 이익운(李翼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죄인을 신문하는 일에 전하께서 친림(親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시골 유생을 불러오는 일이 무엇이 어려워서 밤중에 문에 임하여 선뜻 체포케 하여 많은 예졸(隷卒)들이 멋대로 날뛰어 죄없는 유생들까지 섞여 잡히게 되었으며, 결박하고 구타하여 궐문(闕門) 밖에 구류(拘留)되었다가 전좌(殿座)가 파한 뒤에 아래에서 놓아보냈으니, 보기에 처참하고 길 가는 사람들이 탄식하였습니다. 신은 체포나 석방이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지를 알 지 못합니다. 아마도 전하의 정령(政令)이 엄하고 급하므로 거행하는 데에 혼란을 빚었으며, 선비 대접을 박절하게 하여 조금도 애석히 여기지 않은 소치라고 여겨지는데, 해부(該府)와 해청(該廳)에서 저지른 과오를 엄중히 처단하여 뒤에 따를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한유(韓鍮)의 사건은 통문(通文)으로 말하면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대체(大體)로 말할 때에 엄중 처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에는 비록 뒤섞여 잡힌 자도 있으나, 자질구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동(海東)107) 의 시종(侍從)이 되어 감히 이러한 무리를 두둔하였으니, 다만 무엄(無嚴)할 뿐이 아니라, 경중(輕重)이 뒤바뀌었다. 그 소장(疏章)을 도로 내어주고 이익운을 사판(仕版)에서 영구히 삭제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유생 심의지(沈儀之)가 고 상신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하라고 상소하였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한유는 심의지와 왕래하며 친밀하게 지냈다. 금오랑(金吾郞)이 한유를 심의지의 집에서 체포하였으며, 심의지도 결박되어 궐문밖에 이르렀으므로 대관(臺官)이 이를 언급한 것이었다.
3월 25일 임인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명릉(明陵)에 쓸 향과 축문을 몸소 전하고, 이어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육아편(蓼莪篇)108) 을 세 번 외우고 말하기를,
"옛사람이 실로 나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하였다.
지제교(知製敎) 윤방(尹坊)과 정창순(鄭昌順)의 관직을 삭제하라고 명하였는데,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의 선마 교문(宣麻敎文)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3월 27일 갑진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친림(親臨)하여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에게 선마(宣麻)하였는데, 홍봉한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흑두 재상(黑頭宰相)이 있었는데, 지금은 흑두 봉조하(黑頭奉朝賀)가 있다."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최태형(崔台衡)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앞서 한유(韓鍮)가 상소하여 《유곤록(裕昆錄)》을 논하고, 또 고 상신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하기를 청하는 통문(通文)을 사학(四學)에 보냈다는 말을 듣고, 이에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대사성 김노진(金魯鎭)에게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너희들은 통문(通文)을 보았느냐?"
하니, 성균관 유생들은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고, 사학 유생들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여러 유생들의 대답이 대부분 사실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여 모두 과거(科擧)를 정지시키고 내어쫓는 벌을 시행하라 하였다가 곧 철회를 명하였다.
판부사 김상복(金相福)과 김양택(金陽澤)과 이창의(李昌誼)를 특별히 파직시켰으니, 홍봉한의 치사(致仕) 때에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려서 보류(保留)를 청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얼마 안되어 모두 서용(敍用)을 명하였다.
거제(巨濟)의 고현면(古縣面) 여인 37명이 해독(海毒)을 마시고 죽게 되었는데, 본도에 명하여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이때에 해독이 여러 곳에서 발생하여 물고기·게·전복·조개를 먹은 백성은 번번이 절반쯤 죽어서, 통제사(統制使) 이국현(李國賢)이 반쯤 말린 전복을 봉진할 수 없다는 뜻으로 장계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28일 을사
주강을 행하였다.
유생 심의지(沈儀之)는 해남(海南)에, 김용갑(金龍甲)은 직산(稷山)에 유배(流配)하였으니, 심의지는 한유(韓鍮)와 친밀히 왕래한 자이며, 김용갑은 심의지의 학도(學徒)였기 때문이다.
3월 29일 병오
주강을 행하였다.
홍중효(洪重孝)를 대사헌으로, 서명천(徐命天)을 대사간으로, 홍검(洪檢)을 집의로, 이적보(李迪輔)를 사간으로, 곽진순(郭鎭純)·송제로(宋濟魯)를 장령으로, 김낙수(金樂洙)를 헌납으로, 이동현(李東顯)·한후락(韓後樂)을 정언으로, 조종현(趙宗鉉)을 부응교로, 조창규(趙昌逵)를 교리로, 김관주(金觀柱)를 부교리로, 서명응(徐命膺)을 형조 판서로, 윤득양(尹得養)을 이조 참판으로, 이상지(李商芝)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30일 정미
이수훈(李壽勛)을 집의로, 이진항(李鎭恒)을 사간으로, 송영(宋鍈)·나충좌(羅忠佐)를 장령으로, 이한일(李漢一)·박사형(朴師亨)을 지평으로, 이명훈(李明勳)을 헌납으로, 임희증(任希曾)·유훈(柳薰)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30일 정미
심의지(沈儀之)를 체포해 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내병조(內兵曹)109) 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심의지에게 묻기를,
"네가 한유(韓鍮)와 더불어 서로 친밀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본래 서로 알지는 못하였고, 상소하기 전에 두 차례 찾아와서 보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소 내용을 서로 의논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서로 의논한 사실은 없고, 소본(疏本)은 보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말리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팔뚝에 글자를 새기고 온 사람이 신의 한마디 말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므로, 처음부터 말리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 봉조하(洪奉朝賀)를 너는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한 나라의 권신(權臣)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한유의 상소를 옳다고 여기느냐, 그르다고 여기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차마 그르다고 여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옳다고 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 부자(父子)와 숙질(叔姪)이 조정에 굳게 자리를 잡고 권력을 조종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봉조하의 문제는 그래도 자질구레한 일이므로 나는 다시 물으려 하지 않지만, 《유곤록(裕昆錄)》 문제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유곤록》은 곧 전하께서 지으신 것이니, 어찌 감히 그르게 여기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先正)의 일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고 상신 박세채(朴世采) 문제는…"
하다가 말이 끝나기 전에 임금이 노하여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그 임금은 ‘선정’이라 말하는데, 너는 ‘고 상신’이라 말한단 말이냐?"
하고는 형장(刑杖)을 가하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의 종향(從享)에 대하여 네가 무엇 때문에 불만을 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평소 그의 종향을 타당치 못하게 여겼으므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을 숨기지 말고 고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작년의 상소에서 이미 아뢰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일률(一律)110) 을 시행하고자 하여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에게 하문하니, 모두 말하기를,
"죄는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하나, 원하건대 성인(聖人)의 호생지인(好生之仁)을 추급(推及)하도록 하소서."
하니, 이에 사형을 감하여 남해현(南海縣)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라고 명하고, 앞으로 한림(翰林)과 주서(注書)에게 경연(經筵)의 말을 전파하는 자는 영구히 그 몸을 금고(禁錮)한다고 명하였으니, 심의지가 경연의 말을 얻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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