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무신
임금이 숭정전 뜰에 나아가 문묘의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4월 2일 기유
김양심(金養心)을 장령으로, 노성중(盧聖中)을 헌납으로, 서유원(徐有元)을 교리로, 이치중(李致中)을 수찬으로, 이진형(李鎭衡)을 필선으로, 김노진(金魯鎭)을 전라도 관찰사로, 홍검(洪檢)을 부수찬으로 삼고, 전 판부사 김상복(金相福)을 영중추로 임명하고, 김양택(金陽澤)과 이창의(李昌誼)를 판중추로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한유(韓鍮)가 팔뚝에 글자를 새겼다는 말을 듣고 금군(禁軍)을 보내어 확인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군이 돌아와 아뢰기를,
"과연 숟가락 끝을 불에 달구어 살갗을 지져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나라를 바로잡는다.[死君匡國]’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태학 유생(太學儒生)을 불러 들어와 선유(宣諭)를 듣도록 하니, 유생으로서 온 사람은 약간인이었다. 임금이 심삽(沈鈒)은 곧 심의지(沈儀之)의 친족으로서 숨어 나타나지 않다가 이제 비로소 잡혔고, 심상현(沈商賢)은 비록 심삽과는 차이가 있으나 행동이 방자하다 하여 모두 형신(刑訊)을 가하였다. 심삽은 종성부(鍾城府)에 영구히 향민(鄕民)으로 삼았고, 심상현은 본고향으로 내쫓았으며, 유생들에게 혹은 3년 동안 과거(科擧)를 정지시키고 혹은 청금록(靑衿錄)111) 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익빈(申益彬)을 지평으로, 임희간(任希簡)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3일 경술
이시건(李蓍建)을 사간으로, 이태정(李台鼎)을 장령으로, 채위하(蔡緯夏)를 헌납으로, 김보순(金普淳)을 사서로, 홍상간(洪相簡)을 문학으로, 유한경(兪漢敬)을 설서로 삼았다.
대사간 서명천(徐命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유생으로서 아무 연고 없이 오지 않은 자는 진실로 죄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들음에 있어 빠르고 늦은 경우도 있고, 거주하는 곳이 멀고 가까움도 있으니, 일시에 모두 모일 수 없음은 역시 그 형편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교(辭敎)가 비상(非常)하고, 거조(擧措)가 엄급(嚴急)하므로, 나졸(羅卒)과 조례(皂隷)가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하여 길에서 구박(驅迫)하니, 수백의 많은 선비가 궐정(闕庭)에서 엎어지고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대답을 잘못하면 번번이 형장(刑杖)을 가했습니다. 저 한두 유생은 실로 안쓰러워할 것이 없으나, 우리 성상께서 평소 인재 육성을 좋아하신 뜻에 어찌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오(金吾)와 추조(秋曹)112) 낭관(郞官)이 잘 봉행하지 못한 것에 있어서는 거기에 해당하는 형률(刑律)이 있는데, 어찌 궐정에서 신문(訊問)하기까지 하십니까? 아! 형정(刑政)은 옛부터 제왕(帝王)이 신중하게 처리한 바요, 곧 우리 전하께서도 일찍이 살피고 삼가시던 바입니다. 비록 중옥(重獄)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불쌍히 여겨 지나친 형벌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처분은 중도(中道)를 벗어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뭇 신하들이 성명(聖明)께 소망하는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갑산부(甲山府)의 백성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4월 4일 신해
유성(流星)이 소미성(少微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다.
4월 4일 신해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문의(文義)를 진달하지 말라."
하니, 지경연(知經筵)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경연은 체통이 소중하니, 전과 같이 문의를 진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고, 각각 문의를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경연의 아룀은 체통을 얻었으니,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여 장려한다."
하였다. 강(講)을 마치고 이어 대신(大臣)을 인견하였다.
4월 5일 임자
심관(沈鑧)과 박필규(朴弼逵)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복궁(景福宮)의 광화문(光化門)에 나아가 유생 수천명을 모아 선유(宣諭)하기를,
"너희들 중에 만약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있어 오늘 아뢴다면, 나는 죄를 주지 않겠다. 그러나 앞으로 상소하여 직언(直言)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마땅히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
하니, 유생들은 모두 아뢸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그 명록(名錄)을 사고(史庫)에 수장(收藏)하라고 명하여 이어 동몽(童蒙)에게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 각각 《소학(小學)》의 한 대문(大文)씩을 외우게 하고, 불통(不通)인 자는 대사성에게 매를 치도록 하였다. 동몽 가운데 정주성(鄭周誠)과 유한열(兪漢悅)이란 자가 있었는데, 무변(武弁)113) 의 아들이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어찌 부조(父祖) 전래의 직업을 버리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고, 병조 판서에게 무(武)를 권장하라 명하고, 이어 창의궁(彰義宮)의 양성헌(養性軒)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였다.
4월 6일 계축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고 《소학(小學)》을 강(講)하였다.
4월 7일 갑인
유성(流星)이 심성(心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다.
주강을 행하였다.
4월 8일 을묘
주강을 행하였다.
4월 9일 병진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목릉(穆陵)114) 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이어 주강을 행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0일 정사
주강을 행하였다.
조운규(趙雲逵)를 호조 판서로, 안집(安𠍱)을 대사간으로, 신대수(申大脩)를 집의로, 권회(權恢)를 지평으로, 이일증(李一曾)을 헌납으로, 성덕조(成德朝)·이혜조(李惠祚)를 정언으로, 이명빈(李命彬)을 교리로, 우홍규(禹弘圭)를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4월 12일 기미
주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에 나아가 여러 신하의 사은(謝恩)하는 전문(箋文)을 받았다. 이에 앞서 임금이 지난 경인년115) 4월의 진연일기(進宴日記)를 보고, 느낌이 있어 그 당시 잔치에 참석한 여러 신하의 아들과 손자에게 명주와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는데, 수효가 10여 인에 이르렀다. 하사를 받은 자는 모두 전문을 올려서 사은하였기 때문이었다.
4월 12일 기미
좌승지 송문재(宋文載)를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승진시켰으니, 송문재는 내외가(內外家) 3세(世)가 모두 옛 잔치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원인손(元仁孫)을 도승지로 삼았다.
4월 13일 경신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사서인(士庶人)의 금년 회갑(回甲)인 사람을 불러 보고, 쌀을 하사하였다.
어석정(魚錫定)을 승지로 삼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4월 14일 신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순릉(順陵)116) 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이어 주강을 행하였다.
4월 15일 임술
주강을 행하였다.
4월 16일 계해
김종정(金鍾正)을 대사헌으로, 이득신(李得臣)을 헌납으로, 이병정(李秉鼎)을 교리로 삼았다.
4월 17일 갑자
임금이 대사성 이복원(李福源)에게 강(講)에 응할 유생을 거느리고 입시하라 명하여 ‘심잠(心箴)’을 외우도록 명하고, 각기 지필묵(紙筆墨)을 내려 주었다.
4월 18일 을축
이보관(李普觀)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석강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읽도록 명하여 형고(刑考)의 휼형조(恤刑條)에 이르니, 편집 당상(編輯堂上) 이최중(李最中)이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즉위한 초기에 특별히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의 두 가지 형벌을 제거하셨은즉, 요순(堯舜)에게 질정(質正)하더라도 내세울 말이 있으니, 신은 그지없이 흠앙(欽仰)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 국청(鞫廳)의 죄수를 몸소 신문함에 있어 곧 주장(朱杖)으로 가슴과 옆구리를 함부로 치니, 이는 실로 법에 없는 짓입니다. 앞으로는 제거하여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남기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이최중의 말로 인하여 감탄이 절로 나온다. 주장으로 침은 비록 낙형에 비할 일은 아니나 그 혹독한 것은 더욱 심하고, 여러 개의 주장을 일제히 쳐서 만약 목숨을 잃게 된다면 난장(亂杖)으로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앞으로는 비록 명령이 있더라도 법을 집행하는 신하는 이를 간(諫)할 것이며,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만약 겁을 먹고 억지로 받든다 하더라도 대관(臺官)이 바로잡아 탄핵할 일을 《문헌비고(文獻備考)》에 기재하고, 또한 금오(金吾)에도 큰 글자로 써서 붙이도록 하라. 아! 저 한 문제(漢文帝)와 당 태종(唐太宗)은 중등(中等)의 군주에 지나지 않으나 한가지의 선행(善行)을 들은 경우 수백 냥의 금(金)과 수백 필(疋)의 무명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다른 것에 비길 일이 아니니, 상이 있은 뒤에야 그 정직을 표창할 수 있다. 이최중에게 특별히 숙마(熟馬) 1필을 전정(殿庭)에서 내려,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4월 19일 병인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추감황은편(追感皇恩編)》을 지영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장악(藏樂)을 금하는 때라 하더라도 소중히 여기는 바가 있다."
하고, 풍악을 아뢰도록 명하였다. 이때 임금은 국조(國朝)에 일식(日食)·월식(月食)에 대하여 상고할 만한 것이 없다 하여 춘추관(春秋館)의 당상과 낭관에게 명하여 정족 산성(鼎足山城)의 《실록(實錄)》을 상고하게 하였는데, 《황은편》을 장차 가지고 가서 봉안하려는 때문이었다.
주강(晝講)을 행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헌부 【집의(執義) 신대수(申大脩) 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강릉 부사(江陵府使) 유세덕(柳世德)은 크고 작은 역(役)의 차출에 추잡한 비난이 낭자하고, 소나무의 불법 벌채에 사사로이 속전(贖錢)을 징수하였으며, 무안 현감(務安縣監) 송규환(宋奎煥)은 요사스런 첩에게 고혹(蠱惑)되어 떳떳하지 못한 길[私逕]을 열고 뇌물을 공공연히 받아들이며, 염탐을 핑계로 사삿사람을 보내어 위협을 가하여 재물을 거두었으니,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먼저 파직한 뒤에 잡아오라."
하였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알(展謁)하고, 홍문관(弘文館)에 나아가 일영석(日影石)을 보았다. 이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궁(宮)에 돌아올 때에 편집 낭청(編輯郞廳) 서호수(徐浩修)에게 입시를 명하였다. 묻기를,
"일영석을 너는 알고 있는가?"
하니, 서호수가 대답하기를,
"이는 곧 탕우양(湯盂洋)이 만든 것으로서, 그 내용이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있습니다."
하였다.
4월 22일 기사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4월 23일 경오
홍자(洪梓)를 대사간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사간으로, 이상주(李商舟)를 지평으로, 김이소(金履素)를 헌납으로 삼았다.
4월 23일 경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한광회(韓光會)가 아뢰기를,
"단종조(端宗朝)의 6신(六臣)은 일찍이 무인년117) 에 증직(贈職)·증시(贈諡)되었으나 박팽년(朴彭年) 집 외에는 모두 시호(諡號)를 내리지 못하고, 시호와 관교(官敎)118) 를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에 보내 안치(安置)시켰습니다. 하위지(河緯地)의 봉사손(奉祀孫)이 관직에 제수된 자가 있어 이제 연시(延諡)119) 하고자 하나, 관교가 영월에 있어 거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별도로 시호와 관교를 작성하여 낭관(郞官)을 보내어 시호를 내리라고 하였다. 한 광회가 또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의 경기 감사(京畿監司) 심대(沈垈)는 임진년120) 에 순절(殉節)하였습니다.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증시(贈諡)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나,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곧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내병조(內兵曹)에 나아가 몸소 정지세(鄭智世)를 신문하여 추자도(楸子島)에 정배(定配)하되 연한을 정하지 말고 금고(禁錮)하라고 명하였다. 정지세는 유원 첨사(柔遠僉使)로 있을 때 백성을 학대하여 삼(蔘)을 캐게 하였고, 창곡(倉穀)을 허위 기록하였으며, 백성들이 대부분 흩어져 도망쳤다고 감사(監司)가 장계하였기 때문이었다.
부교리 이병정(李秉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 권진(權禛)은 휴악한 권섭(權攝)의 조카요, 역적 권포(權褒)의 종형(從兄)으로서 만금 부호(萬金富豪)의 금력(金力)을 끼고 한 도(道)를 무단(武斷)으로 휘둘러서, 영예로운 벼슬을 넘보아 재물을 흩어 글을 사서 과거(科擧)를 함부로 절취하고는 일신(一身)을 번복하고 얼굴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앞뒤 전직(銓職)에 있던 신하들은 다만 그가 명조(名祖)의 후손인 줄로만 알고 춘방(春坊)121) 과 대각(臺閣)에 차례로 의망(擬望)하였으니, 물의(物議)가 해괴하게 여겨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습니다. 근년에 권진의 숙부 권확(權擴)이 외람되이 재랑(齋郞)에 제수됨에 있어, 신의 백부(伯父) 판부사(判府事) 신(臣) 이창의(李昌誼)는 당시 대관(臺官)으로 있으면서 계문(啓聞)하여 도태(淘汰)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은 바 있었는데, 더구나 지금 역적이 그의 집에서 잇달아 나왔고 시종(侍從)은 음사(蔭仕)와 절대로 다른 것입니다. 신이 만약 권진의 내력과 본말을 알았더라면 어찌 그가 하루라도 조정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만, 단지 권진이 그 부리가 드러날까 두려워하고 그 부형(父兄)의 깊은 원한을 숨기어 뻔뻔스럽게 신의 백부가 금중(禁中)에 있는 자리에서 사귀었고 신의 아비가 전조(銓曹)를 관장할 때에 글을 올려 청탁하였으며, 심지어 신과 더불어 동료로 있으면서 조금도 회피(回避)하지 않았는데 연유되었습니다. 신은 실로 그에게 속임을 당하여 진작부터 진달하여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신은 집안의 명성에 오점을 끼친 것이 실로 많습니다. 빨리 변방으로 내어쫓는 율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글을 보고 이제야 이 일을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항심(恒心)으로써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요청한 바의 의율(擬律)이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너는 비록 몰랐었다고 하나, 이미 안 뒤에도 한권(翰圈)122) 의 통청(通淸)123) 하였음은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4월 24일 신미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윤동섬(尹東暹)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4월 25일 임신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문관(文官)·음관(蔭官)·유신(儒臣)으로서 나이 61세인 자들에게 시험하여 이육(李堉) 등 5인을 선발하고 차이를 두어 상을 내렸으며, 곧 이육을 형조 참의로 승진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무인(武人)으로 61세인 자들도 다음날 시사(試射)하여 선발하였는데, 이해 이날은 곧 선조(先朝)에 진연(進宴)한 지 61년이 되는 해였다. 여러 신하들이 잔치를 베풀도록 강력히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다만 경인년에 출생한 사람에게 시험하여 선발하도록 명하였으니, 마음이 감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 26일 계유
임금이 중일청(中日廳)124) 에 나아가 나이 61세인 무사(武士)들에게 시사(試射)하여 최해수(崔海壽) 등 25인을 선발하였다.
4월 27일 갑술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이휘지(李徽之)를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홍빈(洪彬)을 지평으로, 김기대(金基大)를 헌납으로 삼았다.
특별히 제수하여 정상인(鄭象仁)을 응교로, 이진복(李鎭復)을 부교리로, 조창규(趙昌逵)·임정원(林鼎遠)을 수찬으로, 신광집(申光緝)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4월 28일 을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휘지(李徽之)를 승지로 삼았다.
4월 29일 병자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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