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4권, 영조 46년 1770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1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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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정축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에 친림(親臨)하여 구식례(救食禮)125)  를 행하고, 복원(復圓)이 된 뒤에 비로소 내전(內殿)으로 돌아갔다.

 

세종조(世宗朝)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창덕궁(昌德宮)과 경희궁(慶熙宮)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하여 우수(雨水)의 다소를 살피도록 하고, 측우기의 척촌(尺寸)이 얼마인가를 치계(馳啓)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곧 옛날에 일풍 일우(一風一雨)를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聖意)를 본뜬 것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듣건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측우기는 석대(石臺)를 만들어 안치(安置)하였다고 하였다. 금번 두 궁궐(宮闕)과 두 서운관(書雲觀)에 모두 석대를 만들되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척이요, 넓이는 8촌이며, 석대(石臺) 위에 둥그런 구멍을 만들어 〈측우기를〉 앉히는데, 구멍의 깊이는 1촌이니, 경신년126)  의 신제척(新製尺)을 사용하라."
하였다. 대체로 〈경신년의 신제척은〉 경신년에 삼척부(三陟府)에 있는 세종조 때의 포백척을 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참고해서 자[尺]의 규식(規式)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5월 2일 무인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영릉(寧陵)127)  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다.

 

5월 3일 기묘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5월 4일 경진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 및 각릉(各陵)의 단오제(端午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황최언(黃最彦)을 승지로 삼았다.

 

5월 6일 임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장릉(長陵)128)  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이길유(李吉儒)를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이만회(李萬恢)를 승지로 삼았다.

 

5월 9일 을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헌릉(獻陵)129)  의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5월 10일 병술

주강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풍천(風泉)의 생각이 갑절이나 더하다. 듣건대 전상서(田尙書)의 손자 전치우(田致雨)가 아직도 비옥(緋玉)130)  이 못되었다 하니,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리고 영장(營將)의 자리를 기다려서 임용(任用)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제독(李提督)131)  의 손자 이면(李勉)에게 자손이 있는지 심도(沁都)132)  에 물어서, 전조(銓曹)로 하여금 임용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5월 11일 정해

임금이 무신강(武臣講)에 친림(親臨)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보관(李普觀)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옛날 제갈양(諸葛亮)은 북쪽으로 위(魏)나라를 막고, 동쪽으로 오(吳)나라를 막았다. 방금 대마도(對馬島)가 조잔(凋殘)하다고 하니, 동래부(東萊府)에서는 가장 관심을 써야 할 곳이다."
하고, 신칙하여 보냈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문헌비고(文獻備考)》의 진상(進上)할 건(件)은 마땅히 장지(壯紙)에 찍어서 올리고, 그 나머지는 백지(白紙)에 찍어서 반포해야 하는데, 만약 1백여 건을 찍으려면 그 경비가 곡식 수천 석이 된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한문제(漢文帝)는 10여 가(家)의 산업(産業)이 된다 하여 오히려 백금(百金)을 아꼈다. 더구나 곡식 수천 석은 능히 몇천 사람을 살릴 수 있잖은가? 금번의 진상(進上)과 진헌(進獻)은 모두 백지에 찍어 올리라."
하였다.

 

전 판서 남태회(南泰會)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슬퍼하는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남태기(南泰耆) 3형제가 나를 섬긴 지 몇해이던가? 두 사람은 정경(正卿)이 되었고 한 사람은 재상의 반열에 올랐었는데, 남태기는 먼저 죽었고 그 아우 남태회는 벼슬이 팔좌(八座)133)  의 반열에 이르렀다. 그 풍채(風采)를 나는 일찍이 마음에 든든히 여겼는데, 부음(訃音)이 갑자기 이를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범절(凡節)을 전례(典禮)에 의하여 거행하라. 제문(祭文)을 지어 내릴 것이니, 4일째 되는 날에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그 사위가 입시한 것을 어제 보았는데, 마음이 더욱 애석하다. 형제 가운데 나이 찬 아들이 있으면 곧 임용하여 나의 뜻을 보이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신(儒臣) 홍검(洪檢)이 주강에 입시하였는데, 홍검은 남태회(南泰會)의 사위가 되기 때문에 임금이 입직(入直)을 바꾸어 나가도록 허락하였다.

 

5월 12일 무자

지평 이한일(李漢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이병정(李秉鼎)이 권진(權禛)을 논핵한 것은 겉으로는 공분(公憤)인 듯하나 실은 앙갚음을 하려는 것입니다. 권회(權恢)가 대각(臺閣)에 들어감에 있어 이병정을 논핵하려고 정본(正本)을 써놓고 주요 내용은 이미 누출시켰는데, 권도(權噵)의 강력한 만류로 인하여 중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전해 들어 온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글장을 올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병정은 다급하게 뛰어다니면서 밤에는 권진에게 어여삐 여겨 달라고 빌다가 아침에는 권진에게 분풀이를 하니, 그 어리석고 경박함은 전혀 염치(廉恥)를 찾을 수 없습니다. 비록 족히 꾸짖을 것은 못되나 진신(搢紳)에게 부끄러움을 끼치었고, 뒷날의 폐단에 관계가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병정에게 삭직(削職)의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권회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따라서 행동하여 대각의 체면을 손상함이 극도에 달하였으니, 역시 삭직이 되어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너의 소장(疏章)을 보니, 이상한 일이다. 권회에게 과연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이병정이 어찌 권씨(權氏)를 논핵하였겠는가? 권회는 처음에 무슨 마음으로 이 소장(疏章)을 썼다가 전파된 뒤에 다시 그만두었으니, 거조(擧措)가 황당하다. 풍속을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 너의 청이 모두 옳다.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야대를 행하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講)하였다.

 

유언민(兪彦民)을 대사헌으로, 윤시동(尹蓍東)을 이조 참의로, 이세연(李世演)을 대사간으로, 여선덕(呂善德)을 장령으로, 곽진순(郭鎭純)을 헌납으로, 유의양(柳義養)을 정언으로, 심이지(沈頤之)를 부교리로, 김노순(金魯淳)을 필선으로, 이상주(李商舟)를 사서로, 이춘보(李春輔)를 설서로, 조엄(趙曮)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5월 13일 기축

병조 참지 신일청(申一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팔도 군현(郡縣)의 크고 작은 산성(山城)을 예전대로 수리하거나 새로이 계획하여 축조함에 있어, 창사(倉舍)를 그 가운데에 건축하되 백성의 거주하는 곳이 읍창(邑倉)에서 멀어 수송하기가 불편한 경우에는 산성의 창사로 실어다 바치도록 하며, 사찰(寺刹)로서 한가한 곳에 있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산성에 예속(隷屬)시키고 그 승역(僧役)을 감면해야 합니다. 그 성 쌓는 문제는 굳이 특별히 민력(民力)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우선 2, 3년 동안 조련(操鍊)을 중지하고, 산성을 쌓아야 할 만한 고을에 있어서는 농사일이 한가한 때를 기다려서 그 민정(民丁)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미 조련을 정지한다면 병사(兵使)와 영장(營將)의 주전(廚傳)134)  에 소요되는 경비와 조련을 위한 대동미(大同米)의 회감(會減)135)  한 것도 성 쌓는 일에 보조할 수 있으며, 흉년든 해에 곡물을 바치는 예에 의하여 부유한 백성으로 하여금 성 쌓는 일에 원납(願納)하도록 하되, 자급(資級)으로 상을 주면 불과 수년 동안에 국내의 험요(險要)는 모두 천험(天險)의 보장(保障)이 될 것입니다. 북도의 무산부(茂山府)는 백두산(白頭山) 바로 아래에 있어 이름은 비록 연강(沿江)이라고 하나 실은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으로서 영고탑(寧古塔)과 뭍으로 6백여 리가 연결이 되었으며, 거느리고 있는 군병 5초(哨)는 모두 절도사(節度使)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혹 뜻하지 않은 변란이 있어 병영(兵營)에 붙이게 되면 무산 한 고을은 빈손을 들고 앉았어야 할 형편입니다. 적이 만약 비밀리에 백두산(白頭山)과 연지봉(臙脂峰) 사이로 나와 거유령(車踰嶺)을 넘어 5읍(邑)의 뒤로 돌면, 곧바로 부령(富寧)과 종성(鍾城)에 다다르게 되니, 마천령(磨天嶺) 이북은 실로 심복(心腹)의 걱정이 됩니다. 지금 무산은 지역이 넓고 사람이 많아 5천여 호나 되므로, 잡색(雜色) 군액(軍額)을 제외하고 건장한 병사 3천 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산을 독진(獨鎭)으로 만들어서 병사(兵使)에게 영속(領屬)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경성(鏡城)의 5진보(鎭堡)는 장백산(長白山) 밑 가장 궁벽한 곳에 있어 변경을 지키는 자와 관계가 없으니, 합하여 한 대진(大鎭)으로 만들어 무산의 서북, 두만강(豆滿江)의 발원처(發源處)로 옮겨 설치하고, 그 진졸(鎭卒)에게 요미(料米)를 후히 주며 병기(兵器)를 보강하여 본부(本府)와 군세(軍勢)를 서로 호응하게 하면, 저들이 비록 승승 장구하는 기세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뒤를 돌아보는 데에 견제(牽制)되어 감히 경솔히 무산령(茂山嶺)을 넘어서 남쪽으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4고을은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어 평안도의 관할로 되어 있는데, 동쪽은 함경도에 접해 있고, 넓이는 4, 5백리나 되니 족히 강원(江原) 한 도에 맞먹습니다. 산천은 험준하고 토지는 비옥하며 인삼(人蔘)과 초피(貂皮)의 생산이 우리 나라에서 으뜸이므로, 하늘에서 만든 부고(府庫)의 고장입니다. 삼수(三水)의 서쪽 경계로부터 위원(渭原)의 동쪽에 이르기까지 연강(沿江) 1천여 리는 모두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언덕이요 강 북쪽 저들의 땅은 드넓은 평지이어서, 이쪽은 험준하고 저쪽은 평탄하니, 보는 자들이 천험(天險)의 요새라고 합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우항령(牛項嶺)을 경유하는데, 고갯길이 험준하여 물고기를 꿰듯이 올라가므로, 실은 한 사람이 관문(關門)을 지키면 1만 명일지라도 열지 못할 험준함이 있습니다. 저들이 만약 우리의 지리(地理)를 엿보아 한줄기 강물을 많은 군사들이 건너서 단번에 우항령의 북쪽을 점거한다면, 비록 손무(孫武)·오기(吳起)의 신기한 지략이 있을지라도 어찌 천험(天險)을 건너 축출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사군(四郡)136)  은 강계(江界)의 부고(府庫)요, 강계는 7읍의 두뇌(頭腦)이며, 7읍은 관서(關西)의 관서로서의 구실을 하는 곳입니다. 부고를 잃으면 곧 강계가 없고, 강계가 없으면 이는 7읍의 두뇌가 텅 비게 됩니다. 두뇌가 텅 비게 되면 7읍은 외로워지고 7읍이 외로워지면 이는 관서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연(閭延) 등에 군읍을 설치하고, 백성들에게 경작하여 먹도록 허용하면, 원근 백성으로서 토지와 일정한 산업(産業)이 없는 자는 반드시 시장(市場)에 돌아가듯이 와서 4, 5년 안에 호수(戶數)가 충족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쪽 변경은 실로 반석(磐石)처럼 견고해지고, 관기(官紀)도 진작시키는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봉화(烽火)를 철저히 단속하는 것은 변경의 경보(警報)를 통하게 하려는 것인데, 유독 저 함경(咸鏡) 한 도는 늘 구름이 침침하다 하여 봉화의 통신이 두절됩니다. 신이 금년 3월의 봉수장(烽燧狀)을 상고해 보건대, 단천(端川)의 증산봉(甑山峰)에서 안변(安邊)의 철령(鐵嶺)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구름이 침침하여 준거(準據)가 안되는 날이 없으나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봉도지(峰道只)까지의 봉화는 모두 구름이 침침하다고 보고하였으며, 양주(楊州)의 아차산(峩嵯山)까지는 하루도 청명하여 서로 준거할 수가 없었으니, 북쪽 봉화의 단절은 철령과 봉도지의 두 봉화가 서로 접속하는 것에 달려 있으나, 그 사이는 17리인데 어찌 그 가까운 곳에 흐리고 맑은 구분이 이와 같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유사(有司)를 보내어 그 봉수로(烽燧路)의 원근을 살펴서 봉수를 더 설치하거나 혹은 급히 달려가 알리게 하여, 전과 같이 오류를 답습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 나이 7순(七旬)이 넘었으니, 강개(慷慨)한 생각이 가슴에 뻗친다. 한낱 병조 당상으로서 몇 가지 문제를 조목조목 나열하여 뜻이 경륜(經綸)에 있고 말이 매우 절실하니, 실로 가상하다. 이 글을 주사(籌司)137)  에 내려 회계(回啓)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4일 경인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5월 15일 신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명식(李命植)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제주(濟州) 백성이 한 태(胎)에 2남 1녀를 낳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동색(同色)은 아니나 한 태에 셋을 낳았으면, 일찍이 쌀을 내린 전례가 있다. 본고을로 하여금 이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6일 임진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경복궁(景福宮)의 근정전(勤政殿) 옛터로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임금이 정릉(貞陵)138)  의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한 것을 반우(返虞)한 것은 인안전(仁安殿)에 있었고, 복위(復位)된 뒤의 제주(題主)는 강녕전(康寧殿)에서 있었으며, 현릉(顯陵)139)  의 예척(禮陟)140)  이 천추전(千秋殿)에서 있었는데, 모두가 경복궁의 구궐(舊闕)이었다. 그러므로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고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월 17일 계사

주강을 행하였다.

 

5월 18일 갑오

주강을 행하였다.

 

전 판서 홍인한(洪麟漢)을 내쳐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보직(補職)하였으니, 홍인한이 승강이를 벌이며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수(李惟秀)를 대사헌으로, 신광리(申光履)를 대사간으로, 이진형(李鎭衡)을 집의로, 이범제(李範濟)를 지평으로, 박상로(朴相老)를 헌납으로, 이치중(李致中)을 필선으로 삼았다.

 

5월 19일 을미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득배(李得培)를 이조 참의로, 윤동섬(尹東暹)을 대사헌으로, 신대수(申大脩)를 집의로, 이숭호(李崇祜)를 지평으로, 박상로(朴相老)를 교리로, 윤석렬(尹錫烈)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전 판서 윤급(尹汲)이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윤급은 근년에 와서 더욱 성실하고 정백(精白)하여, 이때문에 배척을 받아 조정에서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매우 마음에 걸렸다. 이 부음을 갑자기 접하니, 슬프고 애석함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관재(棺材)를 가려서 보내고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릴 것이니, 삼명일(三明日)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여 나의 뜻을 표하라. 듣건대 내년이 곧 회혼(回婚)이라 하니, 옷감과 식물(食物)을 그 부인(夫人)에게 보내어 한편으로 저승에 있는 혼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살아 있는 정경 부인(貞敬夫人)을 위로하게 하라."
하였다. 윤급의 자(字)는 경유(景孺)이니, 고 상신 윤두수(尹斗壽)의 5대손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 양관(兩館)141)  의 제학(提學)을 거쳐 마침내 1품에 올랐다. 사람들은 혹시 논의가 지나치게 준엄(峻嚴)하다고도 말하지만, 그러나 충역(忠逆)의 의리에 엄격하고 지조(志操)가 확고하였다.

 

5월 20일 병신

임금이 상참과 조강을 행하였다.

 

이명식(李命植)을 대사간으로, 이양수(李養遂)와 이원(李遠)을 지평으로 삼았다.

 

5월 21일 정유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보리[麥]를 받고 이어 상참과 조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송영(宋鍈)을 헌납으로, 이경옥(李敬玉)을 집의로, 심관지(沈觀之)를 사간으로, 송제로(宋濟魯)와 성윤검(成胤儉)을 장령으로, 김복휴(金復休)와 이동우(李東遇)를 지평으로, 임희증(任希曾)과 이우규(李羽逵)를 정언으로, 이익정(李益炡)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지평 이원(李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백흥(閔百興)은 어리석고 무지하며, 비열하고 품행이 좋지 못하매, 그 부형(父兄)이 내버린 자로 여겨 아들이나 동생 축에 끼지 못하였으며, 사대부(士大夫)들은 하류(下流)로 보아 동료의 반열에 끼우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평소에 경영하는 일은 다만 권문 세가(權門勢家)에 빌붙어 모리(牟利)하는 일을 청탁하고, 반생(半生)을 더불어 교유(交遊)하는 자는 무변(武弁)142)  과 상제(象鞮)143)   및 시정(市井)의 무뢰배뿐이었으며, 동래(東萊)와 의주(義州)의 거간꾼들은 모두 시판(市販)의 물주(物主)로 떠받들었습니다. 음직(蔭職)으로 나가게 되면서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역임(歷任)하였는데, 재물을 한없이 탐하여 뇌물을 받은 사람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훈신(勳臣)이나 재신(宰臣)이 사는 호화로운 집은 값이 천금(千金)이 넘는데도 처지는 돌보지 않고 기필코 사고야 말았으니, 그의 형 고 상신(相臣)144)  이 크게 책망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사위를 맞이함에 있어서는 심지어 은기(銀器)를 사용하였으니, 민씨(閔氏)가 망하게 된 것이 민백흥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 것은 곧 가정의 항담(恒談)이 되었습니다. 아! 아내를 죽였다고 사람을 무함하는 악독한 짓은 보통의 인정(人情)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데도 민백흥은 지친(至親)과 절친한 친구 사이에 차마 증언(證言)하였으며, 동영(東營)145)  에 있을 때 규방(閨房)에서의 추잡했던 일은 사람마다 전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이른바 ‘시례(詩禮)의 전통(傳統)이 한번 변하여 오랑캐가 되었다.’함은 바로 이를 가리킨 것입니다. 관동(關東)의 금송(禁松)은 도신(道臣)이 사복(私腹)을 채우는 밑천이 아님에도 속공(屬公)한다고 핑계하여 수 만냥의 재물을 철저히 찾아내어 모두 자기 주머니에 돌렸으며, 원주(原州) 영저(營底)에 경강(京江) 거부(巨富)의 비옥한 밭과 아름다운 저택(邸宅)이 있어 그 값이 수천 냥이었는데, 민백흥은 방백(方伯)으로서 버젓이 사들여서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는 기첩(妓妾)을 두고 살게 했으니, 그 탐음(貪淫)하고 방종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관(政官)146)   때의 일을 말한다면 전조(銓曹)의 법규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아들 멋대로 은인(恩人)을 돌보아 주고 원수에게 앙갚음하도록 맡겨 두었습니다. 재작년 홍문록(弘文錄)에 대한 명령이 있을 때에 그 사당(私黨)이 권점(圈點)에 들도록 하기 위하여 감히 독정(獨政)147)   때에 상피(相避)에 해당한 자를 모두 의망(擬望) 계청(啓請)하였으며, 그 아들을 옥서(玉署)148)   단 한 자리의 수망(首望)에 천망하여 낙점(落點)까지 받았는데, 결국 한 재신(宰臣)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들추어냄으로 인하여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사삿일을 위하여 임금을 기만하였으며 방자하고 무엄한 짓이 끝내 이와 같으니, 영원히 삭출(削黜)하고 금고(禁錮)를 가하여 진신(搢紳)의 반열에 섞이지 못하도록 해야만 아마도 그가 범한 죄를 조금이라도 징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 민백흥이 아비가 되었으니, 아들의 교훈을 어찌 논하겠습니까? 그런데 또 불행하게도 민홍렬(閔弘烈) 같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인생으로 전혀 교양이 없이 방종한 습성인데 도리어 준기(俊氣)라 일컬어 평소에 뉘우침이 없이 오만하게 떠들으니, 물이 든 것은 재리(財利)와 여색(女色)이며, 전하여 익힌 바는 비단옷과 준마(駿馬)입니다. 그는 동영(東營)에 따라가 아비의 정사(政事)를 어지럽힘이 한정이 없었고, 동교(東郊)의 가까운 곳에 이름 있는 전장(田庄)을 매입하고 1백 칸 가까운 저택(邸宅)을 건축하여 제도가 굉장하고 화려하였으니, 어리석고 무지함은 왕안석(王安石)의 아들 왕방(王雱)보다 심하였습니다. 집안 행실이 이러하니, 패망하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근년에 성상께서 인현 성모(仁顯聖母)의 탄강(誕降)하신 옛집에 거둥하셨을 때에, 지난날 장식(裝飾)으로 차셨던 패물을 내리신 일이 없는가를 하문하시니, 민홍렬이 곧 은비녀[銀釵]를 올리며 말하기를, ‘이는 성모(聖母)께서 일찍이 사용하시던 것으로서 내려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듣건대 이 문제는 실로 곡절이 있습니다. 대체로 경신년149)  의 내연(內宴) 때를 맞이하여 인원 성모(仁元聖母)께서 옛날 장식으로 차셨던 패물을 풍창 부부인(豊昌府夫人)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장손(長孫)인 고 장령(掌令) 신(臣) 민익수(閔翼洙)가, ‘이는 세상에 드문 보배로서 유독 종가(宗家)에만 둘 수 없다.’ 하고 이에 성모(聖母)의 동기(同氣) 및 여러 조카 가운데 생시(生時)에 섬겼던 자의 큰아들 집에 나누어 주고, 이어 또 그 시말(始末)을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하는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민홍렬 집에는 애초에 나누어 보낸 비녀가 없었는데, 저 민홍렬이 올린 것은 과연 어떠한 물건입니까? 그 한집안 친족 사이에도 아는 자들은 모두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이런 일을 오히려 차마 하였으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속히 청현직(淸顯職)에서 삭제 지색(枳塞)하여 먼 변경으로 물리치도록 해야만 세도(世道)를 깨끗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창수(李昌壽)가 지난번에 당한 바는 심상한 논박에 비길 일이 아니라서, 감히 다시 사대부(士大夫)의 반열에 끼어서는 안되는데, 전하께서 차마 버리지 못하시고 옛날과 다름없이 임용하시니, 이창수의 도리는 마땅히 묵은 허물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새로운 선(善)에 나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작년에 초사(初仕)로 나가는 허다한 수령(守令)의 자리를 차출함에 있어 사사로이 친밀한 사람이 아니면 곧 권세 있는 집의 청탁을 받은 자였으니, 이것이 어찌 다만 이창수만의 죄이겠습니까? 간사하고 경박한 이병정(李秉鼎)과 같은 아들이 있어 죄악을 함께 거들었으며, 권문 세가에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그 아비의 정권(政權)을 팔기를 마치 시장의 거간꾼이 내기를 붙여 재물을 낚듯이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들의 허물을 알지 못하고 진신(搢紳)에게 부끄러움을 끼쳤으니, 이창수의 삭직은 결코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병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은 평소의 행실이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익(公益)을 무시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생각은 오로지 기회를 노리는 데에 있으며, 제자(弟子)라 일컬으면서 어리석고 무지한 부류들을 널리 사귀어 풍조(風潮)에 붙따라 가르침을 듣게 하였으니, 경상도의 풍습이 순후(淳厚)하지 못함은 실은 이에서 말미암았습니다. 청컨대 척출(斥黜)을 가하소서."
하였다.

 

이은(李溵)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승지에게 이원(李遠)의 상소를 읽도록 명하고 은비녀[銀釵] 문제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은이 아니요, 곧 옥(玉)이다."
하고, 이원에게 입시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소장(疏章)을 네가 초(草)한 것이냐, 남한테 받은 것이냐?"
하니, 이원이 말하기를,
"밤을 새워 지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원에게 그 소장을 읽으라 명하고, 말하기를,
"어찌 모호하게 읽느냐? 네가 지은 것을 네가 잘 읽지 못하느냐?"
하고, 이어 하교하여 매우 꾸짖고, 서인(庶人)으로 삼아 향리(鄕里)로 내어 쫓고, 선파 보첩(璿派譜牒)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구익(具㢞)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한인(漢人)150)  의 자손을 불러 보고 쌀을 하사하였으며, 군문(軍門)에 임용하라고 명하였다.

 

이만회(李萬恢)를 승지로 삼았다.

 

5월 22일 무술

상참과 조강을 행하였다. 대사헌 이은(李溵)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대사간 이명식(李命植)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화진(金華鎭)·어석정(魚錫定)·이수봉(李壽鳳)·이휘지(李徽之)·최태형(崔台衡)을 승지로 삼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백흥(閔百興)을 교체하라 명하고, 조엄(趙曮)을 후임으로 삼았다.

 

민홍렬(閔弘烈)과 이병정(李秉鼎)을 파직하라 명하였으니, 근신(謹愼)하지 못하여 욕이 그 아비에게 미쳤기 때문이었다.

 

5월 23일 기해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건원릉(建元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하였다.

 

임금이 이원(李遠)의 상소 가운데 민홍렬(閔弘烈)이 비녀를 올린 문제는 외부 사람이 아는 바가 아니니, 반드시 민홍렬의 족속 가운데 말을 지어서 이원에게 전한 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하교하여 곧 자수(自首)하도록 하되 날이 어둡기까지 자수하지 않는 경우 마땅히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이원을 잡아다가 묻겠다 하고, 이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각 부관(部官)이 선포(宣布)에 태만하였다 하여 잡아들여 꾸짖었다. 이에 신회(申晦)의 아들 신광집(申光緝) 및 그 족형(族兄) 신광리(申光履)가 자수하였으니, 일찍이 비녀를 바친 일로써 이원과 수작(酬酢)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김상묵(金尙默)에게도 연루(連累)가 되었다. 신광리는 형장(刑杖)을 쳐서 흑산도(黑山島)로 유배(流配)하였고, 신광집은 형장을 쳐서 황간현(黃澗縣)에 유배하여 서민(庶民)으로 삼았다가 곧 삼수부(三水府)로 옮겨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였다. 김상묵은 답변한 바가 매우 정직하다 하여 특별히 석방하고 시종안(侍從案)에서 제명하였는데, 조금 후에 상주(尙州)로 유배시켰다가 또 거제부(巨濟府)로 옮겨 서민으로 삼았으며, 신광집의 아비 신회는 자식을 가르치지 못하였다 하여 삭직하여 도성문(都城門) 밖으로 내어 쫓았다.

 

이원(李遠)을 잡아다가 몸소 국문(鞫問)하니, 이원은 비녀 올린 문제를 신광집(申光緝)에게 들었다고 공술(供述)하였다. 이에 형장(刑杖)을 한 차례 가하고, 남해(南海)에 보내어 영원히 서민(庶民)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채제공(蔡濟恭)은 곧 외롭고 잔약한 사람이다. 봉조하(奉朝賀)가 일찍이 말하기를, ‘서명응(徐命膺)과 채제공은 문장에 값이 정해져 있다.’고 하였는데, 서명응은 먼저 욕을 당하였고, 채제공은 또 쫓겨났으니, 서글픈 일이다."
하였다. 대체로 홍봉한(洪鳳漢)이 일찍이 서명응·채제공·황경원(黃景源)의 문장(文章)이 문형(文衡)151)  을 맡을 만하다고 아뢴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5월 24일 경자

심욱지(沈勗之)를 승지로 삼았다.

 

5월 27일 계묘

어의(御衣)를 도둑질한 죄인 오득(五得)을 포도청에 명하여 곤장(棍杖) 1백 도(度)를 가하고, 흑산도(黑山島)에 보내어 종으로 삼게 하였다. 오득은 곧 중관(中官)의 고군(雇軍)으로서 차비문(差備門) 안을 왕래하는 자인데, 숭정전에 두었던 어의를 훔쳐내었다. 일이 발각되자 여러 대신(大臣)들은 모두 형률(刑律)에 의하여 처단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어리석어 어의(御衣)의 소중함을 모른다 하여 특별히 일률(一律)에서 감하여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5월 28일 갑진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5월 29일 을사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이어 소맥(小麥)을 받았다.

 

호패법(戶牌法)을 다시 엄히 밝혀서 조사(朝士)로서 호패가 없는 경우는 금고(禁錮)하고, 선비로서 호패가 없는 자는 과거(科擧)를 정지시켰다.

 

이명식(李命植)을 이조 참의로, 남태저(南泰著)를 대사헌으로, 정운유(鄭運維)를 대사간으로, 이보온(李普溫)을 사간(司諫)으로, 안성빈(安聖彬)을 정언으로, 신응현(申應顯)을 집의로, 권영(權穎)을 헌납으로, 강시현(姜始顯)·김서응(金瑞應)을 장령으로, 이세석(李世奭)·안정대(安鼎大)를 지평으로, 이득신(李得臣)을 부교리로, 홍경안(洪景顔)을 교리로, 심관지(沈觀之)를 수찬으로, 원인손(元仁孫)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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