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5월 1일 병오
정운유(鄭運維)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관동 어사(關東御史) 이치중(李致中)이 복명(復命)하였다. 이원(李遠)의 상소가 있자 임금이 이치중에게 명하여 민백흥(閔百興)의 일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치중이 민 백흥의 장죄(贓罪)를 포착하여 아뢰니, 민백흥의 관직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5월 2일 정미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으로, 이적보(李迪輔)를 집의로, 여선응(呂善應)을 사간으로, 김광위(金光緯)·이태정(李台鼎)을 장령으로, 윤광례(尹光禮)·정언욱(鄭彦郁)을 지평으로, 신오청(申五淸)을 헌납으로, 정호인(鄭好仁)을 정언으로, 윤승렬(尹承烈)을 교리로, 김이소(金履素)를 부교리로, 홍수보(洪秀輔)를 수찬으로, 윤동승(尹東昇)·서호수(徐浩修)를 승지로 삼았다.
장령 강시현(姜始顯)과 김서응(金瑞應)을 영동(嶺東)으로 유배(流配)하고, 특별히 정운유(鄭運維)를 대사헌에서 파직하라 명하였으니, 어의(御衣)를 도둑질한 죄인 오득(五得)을 논계(論啓)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윤5월 3일 무신
주강을 행하였다.
김이소(金履素)를 부교리로, 임정원(林鼎遠)을 부수찬으로, 홍수보(洪秀輔)를 필선으로, 조준(趙㻐)을 문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군대의 위세(威勢)를 보이고 지난밤 양소(兩所)의 순장(巡將)과 감군(監軍)을 잡아들여서 야순(夜巡) 때에 유생(儒生)과 조사(朝士)들을 잡아 바치지 못한 죄를 꾸짖어 3차례 조리돌림[回]을 하고, 야금(夜禁)을 범한 사람은 모두 곤장(棍杖)을 가하여 군역에 충정하였다. 이때에 야금이 매우 엄하였는데, 임금이 사대부(士大夫)는 잡지 않고 다만 상한(常漢)만을 잡은 데에 노하여 야순한 군교(軍校)가 대부분 죄벌(罪罰)을 입었는데, 날이 밝은 뒤에 길을 가는 유생을 잡아 바쳐 죄를 벗어난 자도 있었다.
장령 이태정(李台鼎)은 삼수군(三水郡)에, 정언 정호인(鄭好仁)은 갑산부(甲山府)에 유배(流配)하라 명하였으니, 오득(五得)의 일로써 발계(發啓)하려 하였는데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윤5월 4일 기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5월 4일 기유
이정오(李正吾)를 집의로, 신대수(申大修)를 사간으로, 임해(任瑎), 이사증(李師曾)을 장령으로, 신응삼(辛應三)을 지평으로, 이진복(李鎭復)을 헌납으로, 홍낙항(洪樂恒)을 정언으로, 김노순(金魯淳)을 교리로, 이치중(李致中)을 부교리로, 김기대(金基大)를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내삼청(內三廳) 장관(將官)의 능마아강(能麽兒講)152) 에 친림(親臨)하였으며, 또 교관에게 동몽(童蒙)을 거느리고 입시하라 명하여 《소학(小學)》을 강(講)한 뒤에 제술(製述)에 응하게 하고, 지필묵을 차이를 두어 시상하였다.
윤5월 5일 경술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상참과 조강을 행하였다. 이정오(李正吾)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오득(五得)은 관계가 막중하니,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참작하여 처리하겠다고 답하였으나, 뜻은 윤허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사간 신대수(申大修)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고, 또 아뢰기를,
"청컨대 오득을 율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지혜가 족히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용기는 능히 담장을 돌아 다니지도 못하면서, 분수 넘치는 주병(主兵)의 자리에서 머리를 숙여 배회(徘徊)하고, 놀라운 기미가 곧 발생할 곳에 무지하게 던져져 있었으니, 신의 어리석고 몽매함은 심합니다. 대체로 신을 아끼는 자는 신을 위하여 위험하게 여겼고, 신을 사랑하는 자는 신에게 일찍이 물러나기를 권하였습니다. 신은 곧 성수(聖壽)가 현재 높으시므로 신자(臣子)가 쉬기를 고할 때가 아니요, 성은(聖恩)의 돌보심이 더욱 진지하므로 성명(聖明)의 세대(世代)에 곧 떠날 뜻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은에 보답하겠다는 뜻은 무겁고 구차하게 보전하려는 꾀는 도리어 가벼워, 잠시 조정의 반열을 더럽히고 있었으니, 곁에서 엿보는 칼날은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연(遷延)하여 5개월에 이른 것은 처음에 생각하였던 바는 아니었으니, 이원(李遠)의 상소는 오히려 늦다 하겠습니다. 아! 설령 이원이 신을 논핵한 사실이 진실로 근거가 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얼굴에 뱉은 침을 닦지 않는 것이 충후(忠厚)한 풍속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옛사람의 말을 신은 들은 바 있었으니, 어찌 차마 더불어 시비를 변론하여 조정의 체면을 손상시키겠습니까? 지금 그가 한 말은 전혀 파악할 길이 없고, 형체도 그림자도 없어 마치 술 취한 사람의 잠꼬대와 실성한 사람의 미친 소리와 같으니, 신이 비록 변명하려 하더라도 실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그의 뜻은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신의 관직에 있는데, 신이 이 직임에서 교체되게 되면 도리어 신의 소원에 적중한다는 사실을 특히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은 마땅히 다행스럽게 여김에 겨를이 없는데, 또 어찌 그들과 서로 비교하려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아! 경(卿)이 한권(翰圈)153) 에 뽑힌 뒤로부터 정경(正卿)에 이르기까지, 앞뒤로 마음쓴 일이 어찌 타인에 비기겠는가? 그러나 곤경을 두루 겪음은 경이 실로 으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구차한 태도와 두서없는 말을 어찌 족히 입술에 올릴 것이 있겠는가? 사마(司馬)154) 를 교체토록 하여 경의 염우(廉隅)를 펴도록 하겠다. 그러나 막중한 편집청(編輯廳)의 일은 올릴 날이 멀지 않았으니, 경은 지나치게 사피하지 말라."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원인손(元仁孫)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윤5월 6일 신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5월 7일 임자
객성(客星)이 천시성(天市星)의 동원(東垣) 안에 나타났는데, 형체의 크기는 목성(木星)만 하였고, 빛깔은 창백색(蒼白色)이었다.
조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윤5월 8일 계축
객성(客星)이 우수(牛宿)의 성도(星度) 안, 기성(箕星)의 위로 옮겨 나타났는데, 형체의 크기는 하고성(河鼓星)의 가운뎃 별만 하였고, 빛깔은 창백색이었다.
주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초경(初更)에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에 나아가 관상감(觀象監) 문광도(文光道)와 안국빈(安國賓)에게 입시하라 명하고, 성변(星變)을 관측하라 하였다. 문광도 등이 아뢰기를,
"오늘 객성(客星)이 천시성(天市星) 밖으로 약간 옮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부복(俯伏)하고 말하기를,
"나는 관측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저 하늘에 정성을 들여서, 저 하늘이 굽어 살피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약 나의 몸에 재앙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깊이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라를 위하여 실로 무궁한 우려가 있으니, 어찌 내 몸을 돌아보겠는가? 천문서(天文書)의 내용을 듣건대, 그 점(占)이 불길(不吉)하여 만약 병화(兵火)가 아니면 반드시 기근(饑饉)이 있다고 하였다. 피국(彼國)155) 과 우리 나라는 분야(分野)가 같으니, 저들이 만약 불안하다면 우리 나라가 먼저 그 해를 받을 것이다."
하였다. 승지 이석재(李碩載)·김종수(金鍾秀) 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한마음으로 천지 신명에 대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시니, 족히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재앙이 변하여 상서가 될 것입니다. 밤 기운이 아름답지 못하고 이슬이 옷을 적시니, 청컨대 내전(內殿)으로 돌아가소서."
하고, 한참 동안 간절히 청하니, 임금이 그제야 일어나 내전으로 돌아왔다.
윤5월 9일 갑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홍직(李弘稷)을 사간으로, 이항조(李恒祚)를 헌납으로, 이중해(李重海)·이득화(李得華)를 정언으로, 박상악(朴相岳)을 부교리로, 심수(沈鏽)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운남군(雲南君) 이진(李榗)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동서 각릉(各陵)에 비(碑)를 후일에 세운 것은, 곧 우리 성상(聖上)께서 즉위(卽位)하신 뒤에 처음으로 시행한 바인데, 사릉(思陵)156) 에 있어서는 유독 비석이 없으니, 후일 설치할 때에 어찌하여 이 일에는 미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장릉(莊陵)157) 에는 어필(御筆)의 비석이 있다고 하는데, 장릉과 사릉 두 능은 의리(義理)에 있어 다름이 없습니다. 선조(先朝)의 어제시(御製詩)에 이르기를, ‘능명(陵名)을 추상(追上)하니 곧 장릉과 사릉인데, 묘도(墓道)의 석물(石物)은 모두 후릉(厚陵)158) ·경릉(敬陵)159) 의 의식에 따랐네.[陵名追上卽莊思 象設皆從厚敬儀]’라 하였고, 어주(御註)에 이르기를, ‘석물(石物)의 체제는 후릉에 따르고, 수효는 경릉에 따랐다.’ 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우리 성고(聖考)께서 정축년160) 에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특명하신 성전(盛典)은 만세(萬世)에 내세울 만한 일이요, 그 높이 받드는 의식에 있어서도 두 능에 차이가 없음은 곧 이 어제시에서 성의(聖意)의 소재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더구나 후릉과 경릉의 비석도 성상께서 을해년161) 에 뒤따라 세우셨으나, 유독 사릉에만 지금까지 빠졌습니다. 원하건대 미처 시행하지 못한 성전을 속히 거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정릉(貞陵)162) 에 비각(碑閣)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상고하여 아뢰라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정릉에 비를 세운 사실이 없고, 지장(誌狀)에 먼저 기재하라고 특명하였다고 한다. 어찌 다만 정릉과 사릉뿐이겠는가? 공릉(恭陵)163) ·순릉(順陵)164) ·온릉(溫陵)165) 의 경우 모두 지장에는 기재되었으나, 비는 세우지 않았는데, 이것이 어찌 다만 세울 겨를이 없어서 그러하였겠는가? 일의 체통이 매우 그렇지 않으니, 의조(儀曹)166) 로 하여금 먼저 동쪽의 두 능과, 다음에 서쪽의 세 능에 곧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윤5월 10일 을묘
객성(客星)이 북쪽 하늘가에 옮겨 나타났는데, 형체는 희미하였다.
윤5월 10일 을묘
이날은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의 기신(忌辰)이었다.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다. 대체로 고황제의 승하(昇遐)가 5월의 윤달에 있었으므로, 윤달을 맞이하는 해의 경우 윤달에 예(禮)를 행하는 것으로 새로이 명령하여 규례로 정하였다. 날이 채 밝기 전에 임금이 예를 행하였는데, 예를 마치고도 이어 부복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에 비바람이 휘몰아쳐 어포(御袍)에 부리니, 여러 대신(大臣)들이 내전(內殿)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가, 해가 떠오른 뒤에 비로소 일어나 동쪽 뜰로 나아가니, 세손(世孫)이 뒤에 시립(侍立)하였다. 한인(漢人) 자손을 불러보고,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몸소 내려 주었는데, 이보다 앞서 교서관(校書館)으로 하여금 찍어 올리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숭정전의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천문 기상(天文氣象)을 관측하니, 여러 대신(大臣)들이 탕제(湯劑)를 들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 한몸으로써 만백성을 대신하는 뜻으로 이미 하늘에 고하였다.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 내 마음을 속임은 역시 저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간절히 청하니, 그제야 윤허하였다. 관상감 관원 이덕성(李德成)의 입시를 명하고, 임금이 묻기를,
"객성(客星)이 옮긴 전도(躔度)167) 가 문광도(文光道)가 말한 것과 같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북쪽 하늘가에 있으니, 수일 안에 소멸될 듯합니다."
하였다.
윤5월 11일 병진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객성이 하루에 30도(度)를 옮겼으니, 어찌 그다지도 대단히 빠른가?"
하니,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한익모(韓翼謨)가 대답하기를,
"오로지 전하께서 정성으로 천지 신명을 대하신 데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마땅히 재앙을 늦출 도리를 더욱 진념하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관상감 관원에게 남산(南山)으로 달려가 관측한 뒤에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문광도(文光道) 등이 돌아와 아뢰기를,
"객성을 다시 볼 수 없으니, 만약 땅속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반드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의 물러감이 빠르니, 혹 돌아서 다시 시작될 염려가 없지 않다."
하매, 안사일(安思一)이 대답하기를,
"혜성(彗星)의 경우 혹 돌아서 다시 나타나는 일은 있으나, 객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윤5월 12일 정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적국(敵國)이나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는 언제나 망하고 만다는 것이니, 나는 더욱 두려워하고 있다. 지금부터 뒤로는 객성(客星)이 이미 땅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유로써 임금과 신하가 안일에 빠진다면 어찌 다른 재앙이 없겠는가?"
하니,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성려(聖慮)가 이에 미치시니, 군하(群下)는 실로 그지없이 흠앙(欽仰)합니다."
하였다.
윤5월 14일 기미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내전으로 돌아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윤5월 16일 신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휘릉(徽陵)168) 과 명릉(明陵)169) 의 위안제(慰安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이때 두 능을 사초(莎草)하고 곡장(曲墻)이 무너진 것을 방금 수리하였기 때문이었다.
황최언(黃最彦)을 승지로 삼았다.
《문헌비고(文獻備考)》의 상위고(象緯考)가 이루어졌다. 임금이 몸소 숭정전에서 받고, 편집청(編輯廳)의 당상과 낭관에게 차이를 두어 상을 내렸다. 임금이 《문헌비고》가 이루어진 것은 신경준(申景濬)의 《강역지(疆域志)》에 의거한 것이라 하여 특별히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윤5월 17일 임술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장령 이사증(李師曾)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청주 영장(淸州營將) 이훤(李萱)이 전일 태안(泰安)에 임명되었을 때에, 부실한 피곡(皮穀)은 민간에 나누어 지급하고 알찬 환미(還米)는 팔아서 사복(私腹)을 채웠으며, 그 나머지 돈을 신임하는 간리(奸吏)에게 주어 여러모로 요판(料販)하여 가을에 가서 임시변통으로 얽어 마추었습니다. 찾아낸 재결(災結)은 태반을 도둑질해 먹다가 백성의 원성이 낭자해지자 약간을 내어놓아 성첩(城堞)을 석회(石灰)로 발라서 핑계댈 자료를 삼았는데, 마침내 죄가 도리어 공이 되어 부당하게 승진, 발탁되었으니, 신의 생각에는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영원히 금고(禁錮)함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결성 현감(結城縣監) 이혁(李爀)은 저치미(儲置米)를 모두 돈으로 바꾸어 사용(私用)으로 돌리고, 곡물이 지천인 가을에 좋잖은 쌀로 구차히 보충하였으며, 성천 부사(成川府使) 조제태(趙濟泰)는 종전에 이미 장죄(贓罪)를 범하여 특별히 은사(恩赦)를 입었음에도, 오히려 습성을 고치지 않고 더욱 재물을 탐하여 누관(樓觀)170) 을 개조한다는 구실로 영채(營債)를 많이 얻어 출납하여 이식(利息)을 도모하였으므로 원망이 떠들썩하였으니, 모두 사판에서 삭제함이 마땅합니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양세현(梁世絢)은 추잡스런 일을 많이 행하고, 오로지 물건을 선물받기를 일삼았으며, 군안(軍案)을 마감하여 뇌물의 문을 은밀히 열고, 신임하는 간사한 비장(裨將)을 시켜 농간(弄奸)을 조종하였으니, 견파(譴罷)의 율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훤과 이혁은 이와 같은 율을 적용하는 데에 그치게 할 수가 없고 또한 어물어물하게 처리해서도 안될 것이며, 양세현과 조제태는 은혜를 저버린 바가 어찌 다른 사람에게 비하겠는가? 모두 잡아들여 추문(推問)하라."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윤5월 18일 계해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명릉(明陵)의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임금이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모시고 앉았다. 임금이 필명(畢命)171) 의 편제(篇題)를 읽으라 명하여, 세손이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제10권에 진서(秦誓)172) 를 붙였음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시전(詩傳)》의 노송(魯頌)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노(魯)나라는 부모(父母)의 나라가 되는데, 진서(秦誓)를 붙임은 노송(魯頌)의 경우와 다른 것 같다."
하니, 대답하기를,
"그때 진(秦)나라가 매우 강성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듯싶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우선왕(左右先王)’이라 한 것은 한 몸으로서 어떻게 왼쪽과 오른쪽에 있을 수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좌우에서 돕는다는 뜻으로서, 역시 그 좌우에 있다는 뜻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 이 각(閣)은 우리 황형(皇兄)173) 께서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주연(胄筵)174) 으로 쓰던 곳인데, 오늘은 할아비와 손자가 이 각에 같이 앉았으니, 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주(周)나라 소강공(召康公)의 ‘좌우(左右)’란 말을 충자(冲子)에게 물으니, 대아(大雅)175) 의 문왕편(文王篇)을 들어서 대답하였다. 만약 이로써 확충해 나간다면, 우리 나라는 희망이 있다. 오늘 어찌 보이는 뜻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필선(弼善) 홍수보(洪秀輔)와 익찬(翊贊) 조명억(曹命億)에게 각각 대록비(大鹿皮) 1령(令)을 하사하고, 설서(說書) 조영진(趙英鎭)과 세마(洗馬) 조노진(趙潞鎭)에게는 모두 승륙(陞六)176) 시키며, 이예(吏隷)에게는 쌀과 베를 내려 주라."
하였다.
사복시(司僕寺)에서 제주(濟州)의 전 판관 한상유(韓尙裕)가 진상(進上)한 말 3필이 모두 졸렬하고 수척하므로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들여 추문하여 처리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말에게 곡물(穀物)을 먹이지 않음은 《예기(禮記)》에 기재되어 있는 바이다. 백성이 이와 같이 굶주리는데 말의 수척을 어찌 논하겠는가? 특별히 묻지 말라. ‘구마(廐馬)가 3천이라’는 비난이 또한 전사(前史)에 기재되어 있는데, 더구나 이러한 때이겠는가? 제주의 금년 세공마(稅貢馬)를 배에 싣지 않았으면 특별히 정지하도록 하라는 뜻을 비국에서 즉시 분부하라."
하였다.
윤5월 19일 갑자
임금이 석강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5월 20일 을축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한학 전강(漢學殿講)을 겸행하였다.
여선응(呂善應)을 집의로, 성윤검(成胤儉)을 장령으로, 임희증(任希曾)과 이장로(李長老)를 지평으로, 이석구(李碩九)를 정언으로, 박사륜(朴師崙)을 수찬으로, 윤희동(尹僖東)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윤5월 23일 무진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윤5월 24일 기사
새로이 세우는 봉안각(奉安閣)이 이루어졌다. 임금이 봉안각 앞으로 나아가 봉심(奉審)한 뒤에 장자(欌子)를 지영하여 새 각(閣)에 봉안하였다. 시호(諡號)와 고명(誥命)을 봉안할 때에 처음의 예절(禮節)과 같이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붙은 집이었으나 지금은 각(閣)을 이루었다. 이는 백여 년 전과 지난해를 계술(繼述)한 것이니, 어찌 뜻을 표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만회(李萬恢)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윤5월 25일 경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소녕원(昭寧園)177) 의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내전으로 돌아와 주강을 행하였다.
윤5월 26일 신미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위안제(慰安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병조 참의 신일청(申一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년에 혜성(彗星)이 비로소 천가성(天街星)에 나타났습니다. 경(經)에 이르기를, ‘천가성 남쪽은 중화(中華)요, 천가성 북쪽은 이적(夷狄)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중국(中國)에 사변(事變)이 있을 듯 싶습니다. 이번에 객성(客星)이 또 천시성(天市星)의 동원(東垣)에 나타났는데, 그 점(占)에 있어서는 병란(兵亂)을 말하였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수성(修省)하는 마음으로써 스스로 실지의 덕(德)에 응(應)하는 데로 돌이키셨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아마도 그 반응(反應)이 한 지방에 있지 않고, 중국에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변(變)이 있는 경우 곧 우리에게는 스스로 힘을 기르는 때입니다. 그 역수(曆數)를 살펴보면 백년의 운수가 이미 지나갔고, 그 시절(時節)로써 논한다면 천도(天道)에 양기(陽氣)가 회복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변란에 대비하는 계책은 마땅히 서북(西北) 두 변방에 있으니, 분발하고 격려하는 방법을 미리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봉화(烽火)의 신호가 통하느냐 막히느냐는 전적으로 돈대(墩臺)의 원근에 매여 있습니다. 돈대가 가깝고 조밀하면 후망(候望)하기에 편리하고 탐지하기가 쉬우며, 돈대가 멀고 드물면 아득해서 후망하기가 어렵고 구름에 가리기 쉽습니다. 신이 삼가 《기효신서(紀效新書)》178) 를 상고해 보건대, 중국의 경우 대략 10리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북도(北道) 봉대(烽臺)의 직로(直路) 거리는 경흥(慶興) 서수라보(西水羅堡)의 우암(牛巖)에 새로 세운 봉대로부터 성진진(城津鎭)의 기리동(岐里洞) 봉대에 이르기까지 가까운 것이 7, 8리 또는 10여 리요, 먼 것은 20리 혹은 30리입니다. 단천(端川)에서 안변(安邊)의 철령(鐵嶺)에 이르기까지는 가까운 것이 2, 30리요, 먼 것은 4, 50리이니 성진(城津) 이북에 비교한다면 봉대의 설치가 드물고 봉화 길이 아득히 먼 것이 실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북쪽의 봉화 길을 익히 아는 사람이 말하기를 ‘단천의 오라퇴(吾羅退)·마흘(亇訖乃), 이성(利城)의 성문(城門)·진조(眞鳥), 북청(北靑)의 육도(六島), 홍원(洪原)의 남산(南山), 함흥(咸興)의 성곶(城串), 정평(定平)의 비백산(鼻白山), 문천(文川)의 천불산(天佛山), 안변(安邊)의 사고개(沙古介)·철령(鐵嶺)은 봉화 길이 멀고 봉대도 드물어 후망하기가 쉽지 않으니, 만약 그 사이에 추가로 〈봉대를〉 설치한다면 반드시 후망하지 못하는 폐단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병조(兵曹)의 봉수안(烽燧案)에 기재되어 있는 거리를 상고하건대, 단천의 오라퇴에서 마흘내까지의 거리는 30리요, 이성의 성문에서 진조까지는 거리가 58리요, 북청의 육도에서 홍원의 남산까지는 거리가 50리요, 함흥의 성곶에서 정평의 비백산까지는 거리가 50리요, 문천의 천불산에서 고원(高原)의 웅망산(熊望山)까지는 거리가 30리요, 안변의 사고개에서 철령까지는 거리가 50리이니, 봉대가 멀어 후망할 수 없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천에서 안변에 이르기까지 중간이 끊긴 경우는 5, 6곳에 불과하니, 그 지형을 살펴서 편의에 따라 추가로 봉대를 설치하면 중간에 후망이 단절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변경의 경보(警報)가 통하느냐 막히느냐에 관계되는 일이니, 머뭇거려 그대로 시일(時日)만 천연(遷延)할 수는 없습니다. 구름이 침침하여 달려가 알려야 할 때에는 각 봉대의 봉군(烽軍)에게 부신(符信)으로 달려와 알린 바가 적실함을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뜻 밖의 걱정도 막을 수 있습니다. 단단한 나무로 패(牌)를 만들되 전면(前面) 가운데에 ‘운암(雲暗)이란’글자를 새기고, 후면 가운데에 ‘신(信)’ 자를 새기며, 전후면 양 곁에 각각 서로 응(應)하는 봉호(烽號)를 새기고 【우암(牛巖)과 남산(南山) 두봉대가 서로 응하는 경우 한편에는 우암을 새기고 한편에는 남산을 새긴다.】 가운데를 쪼개어 두쪽으로 만들어 그 새긴 바 봉호를 해당 봉대에 나누어 지급하고, 역시 해당 고을의 화인(火印)을 찍습니다. 【경흥부(慶興府)의 두리산(豆里山)과 구신포(仇信浦) 두 봉대가 서로 응하는 경우 모두 경흥부 경계 안에 있으니, 양 곁에 모두 경흥부의 화인을찍는다.】 만약 서로 응하는 두 봉대(烽臺)가 각각 두 경계에 있고,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아 포(砲)와 뿔피리가 서로 들리는 곳의 경우 구름이 침침한 날에 천아성(天鵝聲)179) 을 이용하거나 혹은 포를 쏘아 서로 응하면 사람이 달려가는 것보다 빠를 것입니다. 북쪽 봉대의 수효는 봉화가 시작되는 우암(牛巖)에서부터 아차산(峩嵯山)까지 1백 20대(臺)입니다. 만약 가설(加設)한다면 그 수효는 더욱 늘어나게 되어 다른 도(道)에 비하여 가장 많을 것이니, 아침 일찍이 봉화를 들어야만 어둡기 전에 아차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우암에서 처음 봉화 드는 것을 평조(平朝)를 기준으로 삼아 삼남(三南) 양서(兩西)의 봉보(烽報)보다 뒤지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고도 전과 같이 접속이 되지 않는 일이 있을 때에는 이는 소홀히 하여 거행하지 않은 결과이니, 본조(本曹)에서 봉장(烽狀)을 자세히 살펴서 공문을 보내어 사핵(査覈)하게 하고, 해당 봉수(烽燧)가 단절된 곳의 지방관(地方官) 및 수신(帥臣)을 초기(草記)하여 논단(論斷)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그 소장(疏章)을 비국에 내려 소상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윤5월 27일 임신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일원(任一源)을 장령으로, 박필순(朴弼淳)을 지평으로, 정상인(鄭象仁)을 부응교로, 조돈(趙暾)을 판윤으로, 이성원(李性源)과 어석정(魚錫定)을 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비록 노쇠하였으나 어찌 잊겠는가? 고 상신 유 봉조하(兪奉朝賀)180) 의 부인이 3년상을 겨우 끝냈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인삼과 부자(附子)를 넣어 약을 조제해 가지고 문안하여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윤5월 29일 갑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하고, 내전으로 돌아와 주강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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