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5권, 영조 46년 1770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1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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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무인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고, 이어 상참(常參)을 행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신대수(申大脩)를 집의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이익선(李益烍)을 지평으로, 송영(宋鍈)을 헌납으로, 홍찬해(洪纘海)를 필선으로, 이형규(李亨逵)를 겸 보덕으로 삼았다.

 

6월 6일 경진

임금이 자정문으로 걸어서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명릉(明陵) 기신제에 쓸 향(香)과 축문을 친히 전하고, 이어 어가(御駕)로 창덕궁에 나아가 재전(齋殿)에서 유숙하였다.

 

6월 8일 임오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6월 9일 계미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어석정(魚錫定)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0일 갑신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이어 승문원으로 나아가 《시경(詩經)》의 비풍장(匪風章)과 하천장(下泉章)을 왼 다음 삼학사(三學士)181)   및 여러 충신의 자손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6월 11일 을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영녕전(永寧殿) 위안제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내전(內殿)으로 돌아와서 주강을 행하였다.

 

6월 12일 병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사직(社稷) 위안제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6월 13일 정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집의 신대수(申大脩)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의 정망(政望)에서 부의(副擬)로써 표지를 붙여 놓고서는 수의(首擬)를 잘못 불러서, 제배된 자가 사은 숙배(謝恩肅拜)를 지체하였으니, 청컨대 전조(銓曹)의 당상을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홍문관의 정상인(鄭象仁)이 말하기를,
"정망을 잘못 부른 것은 그 죄가 하리(下吏)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조 당상을 파직하라고 청한 것은 일을 너무 뒤흔드는 듯합니다. 헌신(憲臣)을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임금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학교배향록(學校配享錄)》을 읽어 아뢰게 하고 말하기를,
"육현(六賢)182)  이 승전(陞殿)되었는데, 두 분이 빠져 있으니 의아스러운 일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태학(太學)에서는 육현을 받들고 향교에서는 사현(四賢)을 받들었으니, 장재(張載)·소옹(邵雍) 양현(兩賢)이 애당초 승무(陞廡)되지 않은 일은 역시 이상하다."
하고, 편집 낭청 조준(趙㻐)에게 명하여 《문헌비고(文獻備考)》의 학교고(學校考)를 읽어 아뢰게 하고, 하교하기를,
"현(縣)에 이미 십철(十哲)183)  은 없고 사현만 승배(陞配)된 것은 바로 《대전속록(大典續錄)》의 뜻을 따른 것이나, 주(州)·부(府)·군(郡)에 이미 십철이 있는 이상, 양현을 어떻게 빼놓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금년 가을 석전(釋奠) 때부터 육현을 같이 승배할 것을 여러 도에 분부하라고 명하였다.

 

6월 14일 무자

홍세태(洪世泰)의 아들 홍광서(洪光緖)를 입시하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인재를 아끼는 마음은 지금도 아직 시들지 않았다.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세태는 신분은 미천하지만 시(詩)에 능하여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자이다. 약방 도제조 김상복(金相福)이 인하여 아뢰기를,
" 증 지평 송익필(宋翼弼)의 지처(地處)도 홍세태와 다를 것이 없는 바,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선정 이이(李珥)가 벗을 삼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의 손자를 방문(訪問)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6월 15일 기축

임금이 숭정문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음악을 회복하기를 명하였는데, 음악을 폐지한 지 반년 만에 풍악의 소리를 처음 듣자 여러 신하들이 앞다투어 기뻐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송징계(宋徵啓)가 하는 말이, ‘오늘에 한 가지 어려운 일을 시행하고 내일에 또 한 가지 어려운 일을 시행한다면, 뜻이 있는 일은 끝내 이루어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불쌍히 여겨 온 일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선무군(選武軍)의 보포(保布)이다. 절반으로 감축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는데, 김치인 역시 이를 찬성하자, 이어 하교하기를,
"오늘 숭정문에 임하여 이미 〈선왕께서 임하였던〉 그 자리에 올랐으니, 성덕(盛德)을 본받지 않는다면 어찌 효도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러 도의 선무군 보포를 특별히 반으로 감축하라. 살아 있는 자에게 이미 보포를 감하라 명하였으니, 해골을 묻어 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인정(仁政)도 마땅히 오늘에 베풀어야 한다. 여러 도에 신칙하여 해골을 묻어 주어야 할 대상을 일체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응교 정상인(鄭象仁)이 아뢰기를,
"오늘 숭정문에 임어하시어 조참을 받고 나서 시위(侍衛)에게까지 곧은 말을 구하는 하교를 내리신 일은 마음을 비우고 듣기를 좋아하는 대성인의 미덕입니다. 신은 삼가 감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형정(刑政)에 있어서는 우러러 진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주례(周禮)》에 조언지형(造言之刑)이 있기는 하나, 향팔형(鄕八刑)184)  은 본시 조정에 쓰는 형벌이 아닙니다.가의(賈誼)185)  의 말에도 이르기를, ‘작위가 높은 근신(近臣)에게는 진실로 죄가 있다면 파면을 하거나 죽이는 것은 가하지만, 이를테면 구속을 하여 감옥에 가두어 놓고서 형조(刑曹)의 소리(小吏)들이 욕설을 하고 형장을 치게 하는 일은 뭇사람들에게 보일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날 여러 서인(庶人)을 엄중히 처단한 데는 참으로 성상의 의도가 있었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일찍이 근밀지(近密地)의 시임(時任) 시종신을 지낸 사람이므로, 지금에 형신(刑訊)을 가한다면 이는 후세에 본받게 하는 것이 아니니, 바라건대 신중을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강개한 때문이겠으나,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방·병방 승지에게 입시(入侍)를 명하여 경외(京外)의 전최(殿最)를 개탁하였다.

 

전 판서 이철보(李喆輔)가 졸(卒)하였다. 이철보가 임인년186)  에 등과하여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헐뜯음도 많이 받았으나, 청렴 개결하고 태연 자상하여 임금의 신임이 가장 두터웠다. 이때에 죽게 되자 임금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하교하기를,
"형제가 기사(耆社)에 들었었으나, 지금 어찌 한 사람을 빼놓을 수 있겠는가? 그 아들이 상복(喪服)을 마치려면 아직 멀었으니, 그의 손자를 특별히 조용(調用)하여 구원(九原)의 영혼을 위로하고 널감도 가려서 내주어 나의 뜻을 표시하라."
하고, 제문을 지어 내려서 성복(成服)날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6월 16일 경인

하교하기를,
"옛날 정승으로서 방달(房闥) 【방관 문병(門屛).】 에 풍우(風雨)를 가리지 못하여, 방안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있으면서 하는 말이, ‘우산이 없는 백성은 어떻게 견딜까?’ 하여, 지금까지 아름다운 고사로 전하여 오고 있다. 지금 같은 한여름을 당해서는 높은 집 두꺼운 방석에서도 이렇게 더운데, 더구나 감옥이겠는가? 이 뒤로는 계하(季夏)와 계동(季冬)에는 어쩔 수 없는 데 관계된 것이 아니면, 용패(用牌)하는 것을 일체 엄금할 것을 팔도와 양도(兩都)에 모두 분부하라."
하였다.

 

이계(李溎)를 지평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어제 숭정문에 나갔을 때 울린 주악[鐘鼓管籥]의 소리를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도 들을 수 있었겠는가? 승지는 감옥으로 달려가서 가벼운 죄수를 곧장 석방하여 아뢰고 경기의 하룻길 이내 지역은 도신(道臣)을 시켜서 일체 거행토록 하라."
하고, 특별히 선전관을 보내어 종로 거리의 걸인들을 찾아내게 한 다음,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쌀을 주도록 하였다.

 

서호수(徐浩修)를 승지로 삼았다.

 

6월 17일 신묘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공시인(貢市人)을 불러들여 고충을 물었는데, 임금이 의정부에서 빚을 놓는다는 말을 듣고는 하교하기를,
"당당한 천승지국(千乘之國)에서, 정부가 관속의 늠료(廩料)를 주기 위하여 백성과 이익을 다툴 수야 있겠는가?"
하고, 그 문권들을 불사르라고 명하였다.

 

6월 18일 임진

하교하기를,
"여든이 가까운 늙은 나이에 와서 한결같이 폐단을 줄이고자 한다. 시임·원임의 비국 당상과 서울에 있는 시종신은 모두 입시하고, 사간원과 사헌부도 패초(牌招)하라."
하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난장(亂杖)으로 도둑을 다스리는 형정(刑政)은 우리 나라만이 있는 것으로, 하도 참독(慘毒)하여 내가 제거하고자 하는 바이니, 그것을 각기 개진하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똑같은 말로 우러러 찬성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공자(孔子)의 말씀에, ‘정령(政令)으로 인도하고 형벌로써 바로잡으면 백성이 죄를 면하되 죄를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하였고, 《주례(周禮)》에 오형(五刑)이 있으나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육형(肉刑)을 제거하였으며,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명당도(明堂圖)를 보고서 태배(笞背)187)  를 제거하였으니, 난장에 있어서는 오형에도 없고 한(漢)·당(唐) 이후에도 없었던 것이다. 아! 압슬(壓膝)188)  과 낙형(烙刑)189)  을 차례로 제거하였고, 중신(重臣)의 아룀으로 인하여 주장 당문(朱杖撞問)190)  도 또 제거하였는데, 더구나 난장이겠는가? 비록 난장이 아니더라도 이미 주리[周牢]가 있어서 나름대로 엄금할 수 있다. 어찌 꼭 사람의 발가락을 끊고 나서야 법이 시행된다는 말인가? 장자(張子)의 서명(西銘)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의 동포요 만물은 나와 함께한다.[民吾同胞 物吾與也]’ 하였으니, 아무리 하천인(下賤人)이라 하더라도 이미 온전히 태어났다면 그 육신을 온전히 가지고 돌아가려 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그리고 옥석(玉石)을 가리지 못하는 처지에 죄없이 이 형벌에 걸려들어서 신체를 다치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이 마음을 억제하기가 어렵다. 아! 46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단 한 가지의 인정(仁政)도 베푼 것 없이 이제 노년(老年)에 와서 역대에 없었던 형벌을 제거하고자 하여 문에 나아와 순문(詢問)한 바, 여러 사람의 의논이 똑같으니, 오늘부터 경외(京外)의 난장형을 일체 제거하여 우리 백성들이 온전한 몸으로 제 어버이를 만나보도록 하고, 이 하교를 《문헌비고(文獻備考)》에 기재하라."
하였다. 사간 이현조(李顯祚)가 아뢰기를,
"난장은 바로 간도(奸盜)를 금지하자는 우리 나라의 형벌인데, 전하께서 연화문(延和門)에 임어하셔서 널리 자문을 구하여 곧바로 제거할 것을 명하시니, 백성을 돌보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 덕의(德意)는 신하들을 감동시키고 사책(史冊)에 빛을 낼 만합니다. 옛날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觳觫之牛]를 차마 못보겠다.’고 한 것에 대해 맹자(孟子)는 칭찬하기를, ‘그러한 마음가짐이라면 왕천하(王天下)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맹자가 오늘날에 있었다면 성덕(聖德)에 대한 찬양이 어찌 한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의 거룩한 덕의가 간악한 소민(小民)에게만 미치고 유독 진신(搢紳)과 세록지신(世祿之臣)에게는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아! 우리 전하께서 일시 칙려(飭勵)하는 성의(聖意)에서 비록 죄 있는 자를 유배시키라고 명하였으나, 기어코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를테면 제주도(濟州島)의 대정(大靜)이라든가 흑산도(黑山島)와 추자도(楸子島)는 모두 멀고 나쁜 곳으로 유배자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망망 대해에서 외로운 배에 몸을 싣고 나면, 더러는 집에 부모를 두고 와서 정리(情理)로서 아주 슬퍼하는 자가 돛에 기대어 통곡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그 실정을 살피신다면 반드시 불쌍히 여겨서 돌보아 주셔야 할 것입니다. 간악한 무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는 것도 전하께서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면서, 간언(諫言)으로 죄를 얻는 신하가 만에 하나라도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고래의 밥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덕에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이 감히 신의 이 말로 해서 해도(海島)로 유배하는 형벌을 그만 없애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사형을 감하여 적절히 처리하는 일이라면 어느 것이든 아니 될 것이 없지만, 다만 일을 논하다가 죄를 얻은 삼사(三司)191)  의 관원에 있어서는 비록 해도가 아니더라도 유배할 곳이 없다고 근심할 것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시어 참작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내용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이름을 들지 않은 점도 나 역시 옳다고 여긴다. 한번 죄고 한번 늦추는 것은 문치(文治)와 무위(武威)를 겸용하는 방법이고, 상설(霜雪)의 위엄과 우로(雨露)의 은택도 또한 왕도 정치의 한 부분이다. 김약행(金若行) 외에 해도로 처분한 자를 모두 육지로 정배 하라."
하였다.

 

6월 19일 계사

임금이 조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이명빈(李命彬)을 수찬으로 삼았다.

 

6월 20일 갑오

임금이 친히 임어하여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는데, 심관(沈鑧)을 대사간으로, 이적보(李迪輔)를 집의로, 이우철(李宇喆)을 장령으로, 여선형(呂善亨)을 지평으로, 노성중(盧聖中)을 헌납으로 삼았으니,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의 정사(政事)이었다.

 

6월 21일 을미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심관(沈鑧)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영월 부사(寧越府使)        윤광(尹珖)은 행신이 비루하고 패악하여 일찍이 경기의 어느 고을 원으로 있을 적에 이미 대간의 평판을 받았고, 현직에 제수되기에 미쳐서는 여론이 놀라워하였습니다. 청컨대 개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2일 병신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으로, 임희간(任希簡)을 지평으로, 홍용한(洪龍漢)을 부응교로, 정복환(鄭福煥)을 설서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제주도의 표류민 8명을 불러다 쌀과 베를 내려주었다. 이보다 앞서 제주도 뱃사람 부차길(夫次吉) 등이 중국 국경까지 표류하여 갔다가, 심양(瀋陽)에서 이제 비로소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6월 23일 정유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태학(太學)·사학(四學)의 향유(鄕儒)와 서북 부료 군관(西北付料軍官) 중 어버이가 있는 자를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시경(詩經)》의 육아(蓼莪)·풍천(風泉)·척호(陟岵) 장(章)을 읽어보고서 나의 마음이 이러하니, 부모를 떠나서 멀리 서울에 와 있는 너희들의 회포를 알 만하다. 〈옛말에〉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하였으니, 너희들 중 돌아가 부모를 뵙고 싶은 자는 앞에 나와서 사정을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였으나, 여러 유생들 중 한 사람도 부모를 뵙기를 청하는 자가 없었는데, 그 중 오명서(吳命瑞)가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만약 전강(殿講)에 합격만 할 수 있다면, 내일이라도 돌아가 부모를 뵙고 싶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너무 무상(無狀)하다. 너를 위하여 전강을 설행하겠는가?"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지금 육아·풍천·척호의 시를 강하고 나니 이 마음이 만 배나 더 설레이기에, 특별히 여러 유생들을 불러다 놓고 당(唐)나라 양성(陽城)의 〈태학 유생들에게 근친(覲親)을 권유한〉 뜻을 본받으려 한 것인데, 당시 양성의 말 한마디에는 그날 당장 돌아가 부모를 뵌 자가 20명에 이르렀는데, 지금 수십 명의 유생 중에서 한 사람도 가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바로 나의 잘못이다. 오명서가 아뢴 말은 윤리가 없다고 할 만하니 특별히 과거(科擧)의 응시를 정지시키고, 서북면의 무사 중에 배우도(裵友度)가 해마다 근친을 간다고 하니 오명서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를 동지중추의 자리를 만들어서 구전(口傳)으로 비의(備擬)하고, 추은(推恩)의 하비(下批)도 오늘로 시행하여 근친을 보내되, 여러 도로 하여금 쇄마(刷馬)와 양식을 차례로 대어 주도록 하여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6월 24일 무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태학에 가서 어저께의 하교를 듣고 나서 여러 유생들 중에 근친(覲親)을 간 자가 있는지를 알아다 아뢰게 하였는데, 말미를 받아서 근친을 간 자가 20여 명이었다.

 

유선양(柳善養)을 승지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지평 이계(李溎)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람에게 1백 가지의 행실이 있지만 역시 효제(孝悌)가 근본이 됩니다. 당(唐)나라 양성(陽城)이 여러 유생들을 효유하여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게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제 유생 한 명을 정거(停擧)시킨 하명은 실로 많은 선비들을 칙려하자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으로, 내리신 윤음(綸音)이 인간의 이성(理性)인 효제(孝悌)의 도리에 하도 근실하고 간절하여 온 천하의 자식된 사람을 감읍(感泣)시킬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경계하고 지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태학 안에서 《소학(小學)》의 도를 거듭 밝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국자장(國子長)192)  으로 하여금 매월 초하루에 여러 유생들을 모아 놓고 《소학》을 윤강(輪講)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사람 뽑는 방법은 오직 과목(科目)193)  으로만 하고 있는 것은 선비의 표준[準的]이 될 만한 것이 오직 과거뿐이기 때문입니다. 시골 유생들이 어버이의 곁을 떠나 멀리 나와 있으며 오랫동안 근친을 가지 못하는 것도 역시 과거의 탓입니다. 정자(程子)의 말씀에 ‘공부에 방해되는 요인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직 뜻을 빼앗기는 일을 걱정하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한 명의 유생이 대답한 말을 살펴본다면 그가 뜻을 빼앗기게 된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근일 동가(動駕) 때만 해도 지영(祇迎)하는 길가에서 손에 거안(擧案)을 들고서 과거 설행을 노렸으니, 그들의 마음이 한결같이 순수하게 임금을 사랑하고 임금을 우러러보려는 정성에서 나왔다면 참으로 좋겠으나, 만약 털끝만치라도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면 참으로 좋지 못한 습속입니다. 청컨대 동가 때에 소매 속에 받아 넣은 거안으로써 과거를 설행하라고 하신 하명을 영원히 정파(停罷)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이때 동가가 잦은 터에 언젠가 임금이 길가에 지영 나온 유생을 보고서 거안을 옷소매 속에 받아 넣어 두었다가 과거 설행을 명한 일이 있었는데, 그 뒤로부터 동가가 있을 적마다 여러 유생들이 소매 속에 거안을 넣고 길가에 둘러서서 과거 설행을 바랐으니, 선비들의 풍습이 하도 퇴패하여 다시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다. 때문에 이계가 상소에 언급한 것이다.

 

6월 25일 기해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6월 26일 경자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기신제에 쓸 향과 축문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지난날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대원군(大院君)194)  의 사당을 전배(展拜)하고 즉위한 뒤에 또 전배하였으니, 오늘 여기에 온 이상 마땅히 목묘(穆廟)195)  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야 한다. 더구나 내일과 모레는 어떠한 날인가? 그 봉사손 돈녕 도정 이양(李瀁)을 특별히 한 자급 올려 주라."하였다.

 

6월 27일 신축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기신제에 쓸 향(香)을 지영하였다.

 

이중호(李重祜)·최태형(崔台衡)·이수봉(李壽鳳)·윤동승(尹東昇)·구상(具庠)·서호수(徐浩修)를 승지로 삼았다.

 

6월 28일 임인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기신제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6월 29일 계묘

박필규(朴弼逵)를 승지로 삼았다.

 

풍후(風候)가 정상을 벗어났다하여 감선(減膳)을 명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그만둘 것을 굳이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6월 30일 갑진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주강을 행하고 이어 석강을 행하였는데, 예조에서 영희전 정전 내의 소나무와 저경궁 정당의 기와가 비바람에 꺾어지고 떨어진 일을 아뢰니, 임금이 즉시 영희전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 저경궁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환궁할 때에 육상궁에도 들러서 전배하였다.

 

조창규(趙昌逵)를 교리로, 이창임(李昌任)을 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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