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5권, 영조 46년 1770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1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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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을사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영희전·저경궁 위안제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변득양(邊得讓)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일 병오

임금이 석우(石隅)에 거둥하여 농사 형편을 살펴보았다. 석우는 바로 남교(南郊)이다. 돌아오면서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절을 두 번 하고 묘문을 나올 적에,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지덕사(至德祠)196)  가 여기에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도승지 이중호(李重祜)가 말하기를,
"멀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이어 하교하기를,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태백(泰伯)은 지극히 높은 덕(德)을 지녔도다.’ 하였는데, 무릇 우리 나라의 양녕 대군(讓寧大君)은 주(周)나라의 태백이다. 때문에 지난날에 사당을 세워 지덕사라고 명명하였으니, 아! 거룩하도다. 지금 듣건대 그 위판(位版)이 후손의 임소(任所)에 있다고 한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제관을 차정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창의궁에 거둥하여 밤을 지냈다.

 

구윤옥(具允鈺)·이재간(李在簡)·유선양(柳善養)·어석정(魚錫定)·최태형(崔台衡)·이석재(李碩載)를 승지로 삼았다.

 

7월 3일 정미

돌아오는 길에 근정전에 들러서 추향 대제(秋享大祭)의 습의(習儀)를 거행하고 환궁하였다.

 

7월 4일 무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고려 충신 정몽주(鄭夢周)는 열성조(列聖朝)로 내려오면서 많은 포가(褒嘉)를 받았고 당저(當宁) 이래로도 봉사손을 녹용하라는 명령이 연이어 내려졌습니다. 지금 그 봉사손(奉祀孫)이 임기가 차서 산직(散職)으로 되었으니, 다시 기용하는 은전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포은(圃隱)의 충절은 내가 일찍이 탄모(歎慕)하였기 때문에 선죽교(善竹橋)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고 비석에 쓰기를, ‘도덕(道德)과 정충(精忠)이 만고에 뻗쳐 태산과 같이 높은 절개를 지닌 포은공[道德精忠亙萬古 泰山高節圃隱公]’이라고 하였다. 진작 녹용하라고 명하였는데, 어찌하여 그처럼 지체하고 있는가? 특별히 승륙(陞六)하여 조용(調用)하라."
하였다.

 

어영 대장 김시묵(金時默)에게 명하여 안주(安州)에 가서 성 쌓는 곳을 살펴보라고 하였으니, 김시묵이 어머니를 뵙기 위하여 평양에 가 있는 사이에 안주의 성이 장맛비에 무너졌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김시묵을 옮겨 보내어 살펴보도록 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홍빈(洪彬)을 지평으로, 심관지(沈觀之)를 부교리로, 심이지(沈頤之)를 부수찬으로, 서명응(徐命膺)을 판윤으로, 구선행(具善行)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7월 5일 기유

주강을 행하였다.

 

유생(儒生)의 전강(殿講)에 친히 임하였다.

 

윤득양(尹得養)을 이조 참판으로, 김상익(金相翊)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6일 경술

주강을 행하고 하교하기를,
"근자에 온갖 폐단은 과거(科擧)가 잦은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절제(節製)를 거친 다음에 회시(會試)를 보고, 그 뒤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으니, 아! 선비를 위하는 뜻이 참으로 거룩하였다. 옛법을 준수하여 문란한 일을 억제하는 것 역시 시의(時宜)에 맞추는 의리이니, 지금 이후로는 삼일제(三日製)·구일제(九日製)·황감제(黃柑製)는 일체 지난날의 준례에 따라 사제(賜第)하고, 인일제(人日製)·칠석제(七夕製)는 모두 회시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주되, 증광시·별시에 함께 부치고, 강경생(講經生)의 봄·가을 도기(到記)는 친림(親臨)·명관(命官)을 막론하고 구례(舊例)에 따라 모두 전시에 응할 수 있도록 하되, 수석을 차지 한 자가 많으면 비교를 하여 보아서 아주 뛰어난 한 사람씩을 일차(日次)로 전강을 보인 다음 모두 회시의 응시를 허락하되, 여기에서는 수석이 비록 많더라도 비교를 시키지 말라. 그리고 회시·급분(給分) 등의 모든 사항들은 식년(式年)의 구례대로 거행하여, 만년에나마 늦추었다 죄었다 하는 나의 뜻을 보여 주라."
하였다.

 

7월 7일 신해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칠석제(七夕製)를 설행하여, 수석을 차지 한 이혁주(李赫胄)에게는 직부 회시(直赴會試)의 자격을 주고 나머지는 각각 급분하였다.

 

7월 8일 임자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편집 당상 서명응(徐命膺)에게 입시를 명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전번에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라 생황(笙簧)을 진열하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생황과 민악(民樂)이 모두 조화를 잘 이루고 있습니다. 청컨대 전정(殿庭)의 헌가(軒架)에 진열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서명응이 말하기를,
"전후부(前後部)의 고취(鼓吹)인즉 《악학궤범》에는 생황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그만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모든 일이 다 연습에서 이루어지는 법인데, 장악원(掌樂院)의 2·6일의 개좌(開坐)가 더러 사고로 인하여 시행되지 못할 경우, 일찍이 추후 시행한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심지어 한 달 동안 전혀 시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혹 2·6일에 시행하지 못할 경우 반드시 그 다음날에 추후 시행하여 한 달의 여섯 번 숫자를 빠뜨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음악의 소중함은 춤에 있다. 때문에 《서경(書經)》에 ‘간무(干舞)와 우무(羽舞)를 양계(兩堦)에서 추다.[舞干羽于兩堦]’라고 한 것이 아닌가? 춤이 절도에 맞지 않는다면, 음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찍이 일무(佾舞)197)  를 추는 사람들을 보니, 몸을 굽혔다가 펴고 옆으로 도는 자세가 절주(節奏)에 전혀 맞지 않았는데, 2·6일의 개좌 때에도 전정에서 연습을 하여 절주에 맞게 힘쓰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이진규(李晉圭)를 사간으로, 임해(任瑎)를 장령으로, 송덕기(宋德基)를 지평으로, 이득신(李得臣)을 교리로, 심이지(沈頤之)를 부교리로, 조재준(趙載俊)을 수찬으로 삼았다.

 

7월 9일 계축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헌릉(獻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무신(武臣) 장지항(張志恒)에게 명하여 북도에 가서 남병사·북병사와 함께 봉수(烽燧)를 살펴보고 오도록 하였는데, 이때 북병사 이방수(李邦綏)와 남병사 이한창(李漢昌)이 봉수를 살펴보고 나서, 급히 계문(啓聞)하기를, "북관(北關)에는 삼삼파보(森森坡堡)의 동봉(東峰)·모덕(牟德) 두 간봉(間烽)을 혁파하고 송봉(松峰)에다 하나의 새 봉수를 옮겨 설치하는 것이 목표에 전달하는 데 편리하겠습니다. 남관(南關)에는 안변(安邊)의 사고개(沙古介)·철령(鐵嶺) 두 봉수의 사이는 거리가 너무 멀므로, 노구봉(老嫗峰)에다 하나의 봉수를 따로 설치하여야 되겠고, 철령과 회양(淮陽)의 마주 있는 봉수 사이에도 하나의 봉수를 더 설치하여야 되겠으며, 이성(利城)의 성문봉(城門烽)은 지형으로 보아 단천(端川)으로 이속(移屬)하고 무사(武士)와 무기(武器)는 입응치(立應峙)의 새 봉수로 옮겨 설치하고, 단천의 사기일언(沙器日彦) 봉화대를 혁파하고 역시 무사와 무기는 성문봉으로 옮겨서 두 고을의 증설에 따른 폐단을 덜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흥(永興)의 성황(城隍) 봉화대는 터전이 푹 빠져 있으니 또한 혁파하고 덕치(德峙)로 하여금 봉수로 하여금 바로 웅망산(熊望山) 봉화에다 목표를 삼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또 봉화를 올리는 시한(時限)이 매번 저물녘이 되어서 천리길의 거리에 계속 전달을 하다 보면 형편상 시한 안에 서울의 봉화대에까지 미치지 못하므로, 맨 처음에 봉화를 올리는 시각을 조금 앞당겨서 연기를 올려 목표에 전달을 하되, 날이 저문 뒤에는 불을 올려서 서로 전달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청컨대 무신 장지항(張志恒)을 보내어 형편을 살펴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연기를 올리도록 하는 것과 무신을 보내어 형편을 살피도록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편리한지의 여부를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의논이 모두 일치하지 않자, 임금이 말하기를,
"연기는 사변이 발생할 때에 쓰는 것인데, 평상시에 연기로써 한다면 사변이 발생할 때는 또 무엇으로 서로 응하겠는가? 이 일은 논할 필요도 없다."
하였는데, 김치인의 소청을 따라서 마침내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올 가을에 거둥하실 때에는 모든 일을 병술년198)  의 전례에 따라 거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만, 그 때에는 수라간이 주정소(晝停所)에 대기하지를 않았습니다. 사체(事體)가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해 온천 거둥 때에는 모든 도(道)의 다담(茶啖)을 다 그만두고 소채(蔬菜)까지도 모두 폐지하였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년에 어찌 민폐를 끼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경자년199)   6월 거려(居廬)200)   때에 공조(工曹)에서 붓 두 자루와 먹 한 장을 올렸기에, 내가 지금까지 싸 두고서 이것으로 거려 때의 일을 잊지 않으려고 하였다. 중관(中官)이 이러한 일로써 으레 향리(鄕里)에다 구하니 너무도 해괴한 일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성상의 생각은 하찮은 것에까지 미치지 않은 데가 없으시나 그에 따른 폐단이 참으로 그러합니다."
하였다.

 

이동현(李東顯)을 지평으로, 이양수(李養遂)를 부수찬으로, 정상인(鄭象仁)을 보덕으로, 이명빈(李命彬)을 필선으로 삼았다.

 

7월 10일 갑인

조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7월 11일 을묘

임금이 경운궁(慶運宮)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여 술잔을 올리고 대신과 기로 당상(耆老堂上)도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임금이 전임 평안도 관찰사 및 영유 현령(永柔縣令)과 본현 출신의 문관·음관·유신·무신으로서 현재 서울에 있는 자와 본궁(本宮) 동구(洞口)의 나이 70세 이상 된 사람을 불러 보고 찬거리와 비단을 내려 주었다. 이보다 앞서 전 영유 현령 조환(趙瑍)에게 입시를 명하고 게판(揭板)이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는데, 조환이 ‘「이화정(梨花亭)」 세 글자를 써서 내린 것을 지금까지 삼충사(三忠祠)에 보관하여 두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임금이 선묘(宣廟)께서 영유현에서 돌아올 적에 김새(金璽) 등이 올린 원류소(願留疏) 및 그것에 대한 비답을 읽도록 명하더니, ‘언젠가 다시 순행을 나가서 기필코 이 도의 부로(父老)들과 함께 한잔술을 들며 회포를 풀리라.’ 한 전교에 이르자, 임금이 억제하는 것을 이루 다 가리울 수가 없어,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김새의 손자를 방문(訪問)하여 아뢰도록 하고 드디어 이 예를 행한 것이다.

 

7월 12일 병진

임금이 중일청(中日廳)201)  에 나아가 무사(武士)들에게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는데, 왕세손도 나아가 모시고 앉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옥당(玉堂)의 옥등(玉燈)은 고사(故事)에 기재되어 있는가?"
하니, 승지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한 개를 더 주라고 명하고, 또 승정원과 옥당에 있는 어사(御賜)의 은배(銀盃) 중 선왕의 어제(御製)가 있는 것만을 가져오게 명한 다음, 임금이 손수 네 글귀의 어제를 써서 그것을 잔대에 새기라고 명하였다. 이어 홍문관에 들러서 임금이 《시경(詩經)》 비풍(匪風)·하천(下泉)·척호(陟岵) 편을 외고 세손에게 명하여 비풍장을 읽도록 하였다. 이어 야대(夜對)를 행하였는데, 임금이 세손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순제(舜帝)는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였는데, 범인(凡人)들이 순제가 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범인들은 입지(立志)가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에 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려운 때문이다. 여러 신하들도 다 너의 이 답변을 들었으니, 부디 오늘의 대답을 깊이 유념하여 입지를 반드시 굳건히 해야 한다."
하였다. 이어 입시한 유신(儒臣)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훗날에도 부디 충자(冲子)를 잘 보필하여 오늘의 뜻을 저버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7월 13일 정사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 등이 상소하여 진연(進宴)을 청하였으나, 그 소장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봉조하 정실(鄭實)과 예조 판서 이경호(李景祜)를 파직하라 명하였으니, 두 사람은 관찰사로 있을 적에 감독하여 평양(平壤)의 중성(中城)을 쌓았는데, 금년 장마에 그 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임금이 대신과 장신(將臣) 및 비국 당상들에게 중성을 다시 쌓는 것이 좋을지의 여부를 물으니, 어떤 이는 쌓는 것이 좋다고 하고, 어떤 이는 재력이 고갈되어 어렵다고 하자, 대신이 아뢰기를,
"김시묵(金時默)이 지금 평양에 가 있으므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7월 15일 기미

주강을 행하였다.

 

송문재(宋文載)를 대사간으로, 홍검(洪檢)을 사간으로, 송제로(宋濟魯)를 장령으로, 정경인(鄭景仁)을 지평으로, 김낙수(金樂洙)를 헌납으로, 한후락(韓後樂)을 정언으로, 김상묵(金尙默)을 수찬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 홍양한(洪良漢)이 연안(延安)의 남대지(南大池)를 준설하고 나서 장계를 올려 계문하니, 임금이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못이 오랫동안 메워져 있던 것을 이제서야 준설을 하였다 하여, 전교를 내려서 포장하고 가상하게 여겼다.

 

7월 16일 경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이어 숭정전으로 나아가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김시묵(金時默)을 호조 판서로,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임희증(任希曾)을 지평으로, 박상로(朴相老)를 필선으로, 이중호(李重祜)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7월 17일 신유

서명응(徐命膺)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7월 18일 임술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여러 종신(宗臣)들은 함부로 진연(進宴)을 청하지 말라는 뜻으로 널리 하유(下諭)하였다.

 

7월 19일 계해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응순(金應淳)을 이조 참판으로, 윤동승(尹東昇)을 대사성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우참찬으로, 이은(李溵)을 판윤으로, 박상악(朴相岳)을 수찬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성원(李性源)을 대사간으로, 이정수(李廷壽)를 남병사로 삼았다.

 

서호수(徐浩修)·이석재(李碩載)를 승지로 삼았다.

 

7월 21일 을축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서 망배례를 행하고, 이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봉심한 다음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조선이 오늘날까지 있게 된 것은 우리 황제가 준 은혜 아닌 것이 없다."
하고, 한인(漢人) 자손들을 덕유당(德游堂)에서 소견하고, 쌀과 베를 내려 주었다. 이어 임금이 《시경(詩經)》의 비풍(匪風)·하천(下泉) 장과 척호(陟岵)장을 외었다.

 

7월 24일 무진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 【장령 임해(任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며칠 전에 신대수(申大脩)가 의금부 나졸만을 탄핵하여 논박하고 해부(該府)의 당상관과 낭청은 감히 논핵하지 못한 것은 일이 몹시 피로하고 괴로웠으며 대각(臺閣)에 수치를 끼쳤습니다. 청컨대 대각의 의망에서 영원히 빼버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광회(韓光會)를 대사헌으로, 이득배(李得培)를 대사간으로, 이형규(李亨逵)를 집의로, 이시정(李蓍廷)을 사간으로, 노성중(盧聖中)·이정렬(李廷烈)을 장령으로, 곽진순(郭鎭純)을 헌납으로, 임덕제(林德躋)·이우규(李羽逵)를 정언으로, 조창규(趙昌逵)를 수찬으로, 이명빈(李命彬)을 부수찬으로, 김익(金熤)을 보덕으로, 송재경(宋載經)을 필선으로, 이상주(李商舟)를 사서로 삼았다.

 

7월 28일 임신

임금이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 기사(耆社)의 여러 당상을 인견한 다음, 오부(五部)의 90세 이상 백성을 불러 보고 쌀을 내려 주었다.

 

7월 29일 계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유선양(柳善養)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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