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5권, 영조 46년 1770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1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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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술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어의동(於義洞)·여경방(餘慶坊)·경운궁방(慶運宮坊)·사재감계(司宰監契)·연추문계(延秋門契)의 서민(庶民)으로 나이 60세 이상인 자를 소견하고 찬거리와 쌀을 내려 주고, 74세인 사람에게는 벼슬을 한 급수씩 주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젯밤 꿈속에서 장동(壯洞) 연추문(延秋門) 옛동네의 사람을 만나보았는데, 이 일이 마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남양(南陽)202)  을 찾아간 고사(故事)와 같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찬거리를 내려 주어 나의 회포를 푸는 것이니, 너희들은 그것을 잘 알아두라."
하였다.

 

8월 3일 병자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문묘(文廟)의 석전 대제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엄인(嚴璘)을 대사간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집의로, 정상인(鄭象仁)을 사간으로, 이만육(李萬育)·정언섬(鄭彦暹)을 장령으로, 이장로(李長老)·여선형(呂善亨)을 지평으로, 박상악(朴相岳)을 헌납으로, 이세석(李世奭)·이갑(李𡊠)을 정언으로, 민종렬(閔鍾烈)·이득신(李得臣)을 교리로, 이계(李溎)를 문학으로, 이창수(李昌壽)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8월 4일 정축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사직단·저경궁·육상궁의 추향 대제에 쓸 향과 축문을 지영하였다.

 

8월 5일 무인

주강을 행하였다.

 

편집청의 당상과 낭청이 새로 간행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40권을 배종(陪從)하여 올리니,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섬돌 밑으로 내려서서 친히 받은 다음, 감인 당상(監印堂上) 홍명한(洪名漢)·이담(李潭)에게는 아울러 가자(加資)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윤득우(尹得雨)를 승지로 삼았다.

 

8월 7일 경진

임금이 조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 장마가 열흘간 계속되니, 사문(四門)에다 영제(禜祭)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8월 8일 신사

주강을 행하였다.

 

8월 9일 임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나의 한결같은 마음은 상공(常貢)은 비록 받더라도 그밖에는 한 마리의 새, 한 마리의 짐승도 오히려 깊이 경계한다. 지금 내국(內局)의 양(羊)은 이것이 과연 상공으로 받아들인 것인가? 새벽까지 이를 생각하다가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지금 강론한 소학 제사(小學題辭)는 역시 인(仁)의 단서의 만분의 일이다. 어공(御貢)의 세 마리 노루를 세 마리의 양으로 대체하라."
하였다.

 

전경 문신(專經文臣) 및 음관(蔭官)으로서 응당 수령강(守令講)을 받아야 할 자를 불러다 친히 임하여 시강(試講)하였다.

 

영희전(永禧殿) 북쪽 벽 밑에 작은 틈새가 생겨서 연기가 스며들었는데,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당장 어가를 움직이도록 명하여 나아가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는데, 제4실(第四室)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부복한 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여러 신하들의 감독으로 보수가 끝나고 나서야 임금이 재실(齋室)로 나가서 하룻밤을 지냈다.

 

8월 10일 계미

임금이 영희전에서 저경궁으로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본궁의 외손(外孫) 및 여러 도위(都尉)에게 명하여 내정(內庭)에서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환궁할 적에는 혜민서(惠民署)에 들러서 생도(生徒) 몇 사람을 불러 시강(試講)을 하고, 또 혜정교(惠政橋)에 잠시 어가를 머물러서 전옥서(典獄署)의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8월 11일 갑신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석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적보(李迪輔)를 사간으로, 홍경안(洪景顔)을 헌납으로, 임희간(任希簡)을 정언으로, 심관지(沈觀之)를 보덕으로 삼았다.

 

간원 【대사간 엄인(嚴璘)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옛날의 대각(臺閣)은 군상(君上)의 거둥을 보았을 때 지켜야 할 예절을 조금만 벗어난 데가 있어도 그때마다 모두 쟁집(爭執)을 하였는데, 이러한 기풍을 다시 찾아볼 수 없은 지가 오랩니다. 근래 성상께서 매양 거둥하실 적마다 다른 곳에 들러서 더러는 흥감(興感)하시기도 하고 더러는 중요한 일을 하시기도 하기 때문에 감히 간하여 만류할 생각을 내지 못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벌써 예전의 예도에 큰 수치를 남겼다 하겠습니다. 혜민서의 생도에게 시강하신 일만 하여도 무슨 부득이한 일이 있기에 그러한 거조를 취하십니까? 유사(有司)에게 있어서도 아주 미세한 일이라 하겠는데, 우리 전하께서 행하셨으니 국가 체통의 손상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이최중(李最中)을 파직하였으니, 이날의 정사(政事)에 이규위(李奎緯)를 대망(臺望)에 의망하였기 때문이다.

 

윤동섬(尹東暹)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8월 12일 을유

영중추부사 김상복(金相福)을 춘천부(春川府)로 부처(付處)203)  하였으니, 임금이 저경궁을 전배할 적에 여러 신하 중 본궁의 외손된 자는 내정(內庭)에 들어와서 참례하도록 명하였을 때 임금이 이미 자리에 나아가서 예를 행하면서 창졸간에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오직 서명신(徐命臣) 한 사람 이외에 외정(外庭)에 있던 사람들이 미처 들어가지를 못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마땅히 참례하여야 될 사람으로서 참례하지 않은 사람을 조사하여 3등의 고신(告身)을 삭탈하도록 명하고, 서 명신에게는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이에 김상복은 직계의 외손이 되면서 자신이 대관(大官)인데도 참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임금이 연화문 안에 한데서 엎드려 진노하여 떨면서 돈녕부에 명하여 보첩(譜牒)을 상고하도록 하니, 판부사 김양택(金陽澤)·이창의(李昌誼)도 모두 외손이 되어 지레 나와서 대명(待命)하였는데, 서용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도록 명하고, 또 김시묵(金時默) 등 일곱 사람도 모두 감률(勘律)하였다가, 곧바로 대신의 아룀으로 인하여 모두 정침하였다.

 

임금의 몸이 편찮아서 내국(內局)에서 숙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3일 병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명릉(明陵)의 기신제 및 광릉(光陵)·장릉(長陵)의 추석제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8월 14일 정해

임금이 광달문(廣達門)에 나아가 묘전(廟殿)과 각릉(各陵)의 추석제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8월 15일 무자

임금이 종묘에 나아가 전알하고, 이어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을 알현한 다음, 또 육상궁에 나아갔다가 밤이 깊어서 환궁하였다.

 

8월 16일 기축

정의 현감(旌義縣監) 이윤급(李胤伋)이 부임 중에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전염병을 얻어 마침내 배 안에서 죽으니,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스물 두 사람이 모두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관가의 사람으로서 살아남은 세 사람이 모든 시체를 물속에 던져버렸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가엾게 여겨, 본고을에 명하여 이윤급에게 사제(賜祭)하도록 하고, 그의 아들과 아우는 상복(喪服)을 마치기를 기다려 조용(調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온 자는 시체를 내버린 죄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전 판서 이지억(李之億)이 졸(卒)하였다. 부고가 전하여지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군은(君恩)에 감격하여 단충(丹忠)을 바친 사실은 내가 평소에 알고 있는 바이다. 슬픔과 안타까움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제문을 지어 내려서 성복날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이지억의 아들이 없다니 입후(立後)204)  를 명령하여 예사(禮斜)205)  를 즉시 작성하여 주라."
하였다.

 

8월 17일 경인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숭릉(崇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이날 임금이 전설사(典設司)에 재숙(齋宿)하였다.

 

8월 18일 신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8월 20일 계사

주강을 행하였다.

 

박사해(朴師海)를 대사간으로, 이병정(李秉鼎)을 헌납으로, 한후락(韓後樂)·김복휴(金復休)를 정언으로, 홍검(洪檢)을 부교리로, 홍상간(洪相簡)을 수찬으로, 홍경안(洪景顔)을 필선으로, 이득신(李得臣)을 문학으로, 홍낙임(洪樂任)을 사서로, 유한근(兪漢謹)을 설서로, 원인손(元仁孫)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8월 21일 갑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선릉(宣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하고, 이어 숭정전 동쪽 월대로 나아가 대신 및 비국 당상들을 입시시켰다. 임금이 선혜청에서 쌀을 무역하는 것은 이윤을 보려는 데 가깝다는 이유로 난처해 하며 그 편의 여부를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백성에게서 취하여 백성에게 내어주는 것은 바로 상평(常平)의 뜻이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입번(入番)한 군인 및 성안의 기로(耆老)를 불러다 편의 여부를 묻도록 명한 바, 모두가 대답하기를,
"백성의 곡식을 거두어다 관고(官庫)에 바쳐서 서울로 수송한다면, 그 불편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기에서 쌀을 무역하여 간다면 쌀값이 뛸 것입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런 이유로써 불편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의 실정을 잘 알겠다."
하고, 드디어 무역을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8월 22일 을미

주강을 행하였다.

 

8월 23일 병신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태학 유생을 불러다 시강(試講)하고, 종이와 붓·먹으로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8월 24일 정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의릉(懿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8월 25일 무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휘릉(徽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하고, 전설사(典設司)에 재숙하였다.

 

8월 27일 경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김복휴(金復休)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과장(科場)의 사체(事體)가 그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마는, 그러나 근래 기강이 점차 해이하면서 법령이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감시(監試)로서 말하더라도 두 곳의 금란관(禁亂官)이 애당초에 엄중히 계칙하지 못하고, 아직 시관이 입장하기도 전에 거자(擧子)들이 들러막은 것을 허물고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여 두었습니다. 시관이 된 자로서는 의당 준례에 의거하여 엄중히 꾸짖고 다 쫓아낸 다음에 다시 문을 열어서 입장을 허락하여야 하는데도,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선비들의 소란 속을 비집고 간신히 뚫고 들어가는 등, 시관의 체통을 전혀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뒷날의 폐단을 생각할 때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당 금란관은 종중 감처(從重勘處)하고, 시관 역시 파직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8일 신축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어석정(魚錫定)을 승지로 삼았다.

 

용동궁(龍洞宮)의 종이 저승전(儲承殿) 행각(行閣)에 몰래 들어가서 소장된 서책(書冊)을 훔쳐 가지고 나오다가 수문장에게 붙잡혔는데, 곤장을 친 다음 섬으로 유배시켜 종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8월 29일 임인

천둥하였다.

 

능행(陵幸)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유신 심이지(沈頤之)를 보내어 고양(高陽)으로 암행(暗行)시켜 횃불 설치와 도로 청소 과정에서 발생되는 민폐를 염찰(廉察)하여 오도록 하였다.

 

8월 30일 계묘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천둥이 치며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팥알 만하였다.

 

김상묵(金尙默)을 문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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