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5권, 영조 46년 1770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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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갑진

임금이 수레를 타고 명릉(明陵)으로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친제(親祭)를 마치고 나서 익릉(翼陵)과 경릉(敬陵)을 배알하였는데, 그때마다 왕세손에게 명하여 능 위와 정자각(丁字閣)을 봉심하도록 하고, 순회묘(順懷墓)206)  까지 두루 참배한 다음, 명릉의 재실로 돌아와서 유숙하였다. 이날 거둥 때 누차 독촉의 전교를 내렸으나 밤이 겨우 삼고(三鼓)가 되어 출발하게 되었다. 사현(沙峴)에 이르자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횃불이 다 꺼져버려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으므로, 군병의 대오가 뒤엉켜서 향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날이 밝아서야 비로소 비가 조금 개었다.

 

9월 2일 을사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소령원(昭寧園)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능원관(陵園官)을 승륙(陞六)207)  시키고,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9월 3일 병오

대가(大駕)가 소령원에서 출발하여 정오에 고양군(高陽郡)에서 쉬는데, 이때 번개가 치며 우박이 갑자기 내려서 조금 개이는 사이를 타서 동가(動駕)하여 신원(新院)에까지 왔다. 임금이 악차(幄次)로 들어가려고 하는 참에 내국(內局)의 세 제조가 탕제(湯劑)를 올릴 것을 청하자, 내국의 장무관(掌務官)을 잡아들여서 곤장으로 다스리라고 명하였는데, 승지 윤동승(尹東昇)·이재간(李在簡)이 탕제를 올린다고 하여 장무관에게로 노여움을 옮긴 일은 아직까지 없었던 일이라고 아룀으로 해서 임금이 엄중한 명령을 내려서 모두에게 서용하지 말라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어사 홍검(洪檢)에게 명하여 고양(高陽)에 가서 계복(啓覆)에 들지 않은 죄수를 모두 석방시키라고 명하였으니, 천둥과 비가 이상한 것이 혹은 본군에 억울한 일이 있는가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날 밤을 무릅쓰고 환궁하였다.

 

김광국(金光國)·김치양(金致讓)·이정오(李正吾)·임희교(任希敎)를 승지로 삼았다.

 

9월 4일 정미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능행(陵幸) 때의 각 실무 차사원을 소견하고 민폐와 농사 작황을 물어본 다음, 양주(楊州)·고양(高陽) 두 고을 백성들의 올 가을 조세를 절반으로 견감하고 경기도의 결전(結錢)도 병술년208)                   능행 때의 준례에 따라 견감하여 주도록 명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연신(筵臣)이 결전은 논밭이 많은 백성에게만 돌아가는 것이어서 소민(小民)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아뢰자, 드디어 환자곡[還上穀]의 모곡(耗穀)을 감면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사흘 동안 감선(減膳)하였으니, 천둥의 이변 때문이었다.

 

간원 【대사간 박사해(朴師海)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과장(科場)에 책을 끼고 들어가거나 수종이 우산과 장막을 가지고 다니는 행위를 엄금하기를 청하고, 이를 범하는 자는 중률로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다만 우산만은 금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사학 시제(四學試製)209)  의 유생(儒生)으로서 갓을 쓰고 〈과장〉 밖에서 글을 짓는 행위를 엄금하되, 적발될 경우에는 교수(敎授)와 유생을 모두 논죄(論罪)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대간(臺諫)이 간혹 언어로 인하여 귀양 가는 일이 끊이지 않으므로 하나의 덫과 함정이 되어 사람들이 다 싫어하며 회피합니다. 옛날의 대간은 재상보다도 더 존중되었는데, 대간이 이처럼 천시 당한다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직언(直言)을 수용하는 아량을 넓히고 간언(諫言)이 올라올 수 있는 길을 다 하시어, 언관으로 하여금 다시 옛날처럼 존중을 받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말이 절실하다하여 특별히 합외(閤外)에서 말을 내려 주어서 포장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재이로써 면직(免職)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원에서 진계(陳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는 것은 바로 형벌과 시상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 친히 형신(刑訊)에 임하는 것은 국수(鞫囚)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금만 뜻에 거슬리는 것이 있어도 형장(刑杖)을 가하기가 일쑤이고, 작상(爵賞)과 사뢰(賜賚)는 공로에 보답하는 것인데도 만일 일이 있을 때를 만나게 된다면 지나치게 은전을 베푸는 것이 됩니다. 유림(儒林)을 장려하는 일은 우리 왕조의 가법(家法)인데도, 선비를 내쫓고 금고(禁錮)시킨 채 돌아보지 않아서 그 원기(元氣)를 손상시키고, 신료(臣僚)를 예우하는 일은 성훈(聖訓)에 담겨 있는 것인데도 그들을 좌절시키고 경멸하며 체모(體貌)를 돌아보지 않아서 자못 종을 꾸짖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성덕(聖德)에 더욱 큰 흠이 있게 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생각을 고치시어 재변(災變)을 소멸시키는 계책을 만드소서."
하니, 임금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상언(上言)을 입시한 비국 당상들에게 두루 보이라. 고금(古今)에 없을 역적 심정연(沈鼎衍)이 식주인(食主人) 전효증(全孝曾)을 10여 년 뒤에 와서 어찌 감히 제 아내를 부추기어 상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형조로 하여금 엄중히 신문하고, 글을 지어 준 자는 섬으로 유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옥당 홍검(洪檢)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형법이란 곧 간악한 행위를 금지하는 도구인데도 대부분 군무(軍務)에 관련되지 않은 자를 법정에서 형장을 치는가 하면 애초에 국수(鞫囚)의 대상이 아닌 자를 장전(帳殿)에서 형문(刑問)하고, 작상(爵賞)이란 곧 공로에 보답하고 미덕을 포장하는 자료인데도 연이어진 제수(除授)의 교지가 더러는 뜻밖에 나오는가 하면, 문득 많은 상뢰(賞賚)가 상격 외에 많이 주어져서, 사람들이 분수를 지키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상뢰가 노고에 걸맞지 않고 은전이 도리어 더럽혀져 갑니다.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일은 구경(九經)210)  의 하나인데도, 중도 부처(中途付處)하는 것이 이미 실정(實情) 외에 발생하였고, 의관(醫官)을 교체시켜 병을 치료하는 것은 예로 시키는 도리가 아닙니다. 출척·견책을 소관(小官)과 다름이 없이하므로, 대신(大臣)이 된 자 역시 감히 대신으로 자처하지 못하고 모든 신료(臣僚)들이 오직 동분 서주(東奔西走)를 일삼아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국가 체모의 손상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는데, 이는 능행(陵幸) 때에 임금이 내국 도제거 한익모(韓翼謨)에게 너무 시달린 나머지, 의관을 교체시켜 병을 치료하라고 명하여 대신들이 명을 기다리기 때문에 옥당에 차자가 이에 미치게 된 것이다.

 

9월 5일 무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복시(太僕寺) 관원 김상직(金相直)을 잡아들여 곤장을 친 다음 기장(機張)으로 유배하고, 병조 판서에게 명하여 태복시 하인 중의(仲義)를 곤문(棍問)한 다음 섬으로 보내어 종을 삼으라고 하였으니, 이는 능행(陵幸)을 마치고 돌아올 적에 세손궁의 철각(鐵刻) 달자(達字)를 내관이 중도에서 잃어버린 것을 중의가 주웠는데 임금이 그것이 옛 물건이고 또 관계가 막중하다는 이유로 찾아내어 체포하라고 명하였는데, 중의가 이를 숨겨 두었다가 현상금을 걸고 찾은 뒤에야 비로소 갖다 바쳤기 때문에 이런 지시가 있은 것이고, 또 김상직의 경우는 중의가 바로 사천(私賤)인데도 태복시의 하인으로 고용한 죄이다.

 

감선(減膳)을 사흘 더하고, 탄일(誕日)의 선물 역시 봉진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니, 천둥의 이변 때문이었다. 대신이 명령을 중지할 것을 애써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성인(聖人)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지나친 것도 모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는 것 역시 잘못이다. 대신은 이미 아뢰었는데도 유신(儒臣)과 대신(臺臣)은 어찌하여 듣지 못한 양 침묵만 지키는가? 오늘의 삼사(三司)를 모두 함께 파직하라."
하였다.

 

공시인의 오래된 유재 중 연조가 가장 오래된 것을 특별히 감해줄 것을 명하였다.

 

9월 6일 기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광릉(光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명식(李命植)을 이조 참의로, 한광회(韓光會)를 대사헌으로, 이세연(李世演)을 대사간으로, 신사운(申思運)을 집의로, 홍상직(洪相直)을 사간으로, 서병덕(徐秉德)·김시구(金蓍耉)를 장령으로, 정반(鄭槃)·노서국(盧瑞國)을 지평으로, 송영(宋鍈)을 헌납으로, 이득일(李得一)을 부교리로, 서유원(徐有元)을 부수찬으로, 김서구(金敍九)·조영진(趙英鎭)을 정언으로, 정방(鄭枋)을 필선으로, 김보순(金普淳)을 사서로 삼았다.

 

살옥 죄인(殺獄罪人) 박약대(朴若大)·김봉창(金鳳昌)과 어보(御寶) 위조 죄인 조희담(趙希聃) 등을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고 형배(刑配)하라고 명하였다.

 

김 종정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강연(講筵)에 입시한 대신(臺臣) 홍경안(洪景顔)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으니, 중의(仲義)의 사건에 의당 일률(一律)을 청하여야 되는데도 발계(發啓)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부제학 김종정(金鍾正)의 관직을 삭탈하였으니, 삼사(三司)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9월 8일 신해

임금이 금상문(金商門) 밖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여 책문(策問)으로 선비를 시험한 다음, 수석을 한 박도상(朴道翔)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주고 나머지에게는 급분(給分)을 하였다.

 

9월 9일 임자

대각(臺閣)에 나온 대신(臺臣)에게 입시(入侍)를 명하였는데, 헌납 송영(宋鍈)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종이 된 죄인 중의(仲議)가 창졸간에 그것을 습득하였기 때문에 고의범과 다르다 치더라도 현상금을 내건 뒤에 비로소 자수를 하였습니다. 청컨대 율문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0일 계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대사헌 한광회(韓光會)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외방의 민심이 영악하여져서 수령(守令)을 능멸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저께 거둥 하는 연로(輦路)에 황주(黃州)·해주(海州)의 백성이 수령에게 불만을 품고서 어가 앞에서 호소하며 교체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와 같은 백성의 버릇은 전에도 들어 보지도 못한 일입니다. 성상께서 고양군(高陽郡)에 가두어 두도록 명하셨다가 특별히 어사를 보내어 불문 곡직하고 모두 석방시키도록 하신 것은, 이 일이 비록 포용하려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본 토의 백성이 지방 장관을 모함하는 데는 나름대로 해당 율문(律文)이 있고, 또 풍화(風化)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도신(道臣) 역시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서 교화를 펴는 임무를 띠고 있는 만큼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도신을 추고(推考)하고 두 고을의 백성은 도신으로 하여금 율문을 대조하여 엄중히 처단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1일 갑인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시사(試射)를 거행하는데 능행(陵幸) 때의 수가 장관(隨駕將官) 김홍태(金弘泰)·김의달(金義達) 등이 있어 수가 충의(隨駕忠義)를 사칭하고 번갈아 들어가서 대신 활을 쏘다가 발각되어 남해현(南海縣)에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였다.

 

9월 12일 을묘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적전(籍田)의 예곡(刈穀)을 친히 받고, 금상문 밖으로 가서 봉조하 정실(鄭實)에게 선마211)  한 다음, 이어 시사(試射)를 한 군병들에게 상격(賞格)을 반사하였다.

 

9월 13일 병진

대전(大殿)의 탄일에 하례(賀禮)를 그만두었다. 이에 앞서 여러 대신들이 하례를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4일 정사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상참과 조강(朝講)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지돈녕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상평청과 진휼청 두 청을 공통으로 구관함에 따라 마치 하나의 관청이 되어 곡물의 수용(需用)에 있어 변동하는 데 구애가 없습니다. 그러나 외방의 곡물 장부에만은 아직도 구례(舊例)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출납하는 과정에 분배를 반드시 하여야 되므로, 두 관청이 이것으로 해서 도리어 혼란을 일으키고 번거로운 폐단이 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시작하여 두 관청 소속의 곡물을 하나로 통합하고 ‘상진곡(常賑穀)’이라고 이름하여 관검(管檢)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를 윤허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6일 기미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창의궁에 나아가 하룻밤을 유숙하고 환궁하였다.

 

9월 17일 경신

주강을 행하였다.

 

옥당 이득일(李得一)이 천둥의 변고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국사를 너무 걱정하고 애쓰신 나머지 사령(辭令)이 선포(宣布)될 적마다 간중(簡重)한 면이 부족하고, 기무(機務)를 단독으로 운용한 나머지 시행과 조처가 간혹 편착(偏著)한 실수가 있으며, 대각(臺閣)을 너그러이 포용하여야 함에도 봉행(奉行)함이 진실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꾸짖어서 내쫓고, 선비들을 부추겨 주어야 함에도 주대(奏對)에 조금만 실수가 있으면 잡아 가두어서 모욕을 주며, 야금(夜禁)을 하는 것은 국법에 있는 일임에도 그저께의 칙교(飭敎)로 도리어 여리(閭里)의 소요를 불러일으켰고, 잘못을 기록하는 것이 비록 군율(軍律)에 있기는 하나 근자에는 전정(殿庭)에 나아가 곤장의 형벌을 내리기가 일쑤이며, 조정이란 본시 무사하여야 됨에도 대소 신료들이 벌벌 떨며 대죄(待罪)하지 않는 날이 없고, 형법이란 상도(常道)가 있어야 함에도 경중(輕重)이 전도되어 매번 부당하다는 한탄이 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조급하고 수다스러움에 대한 계칙이 거듭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님에도 사대부들의 염치가 점차 일그러져 가고 있고, 절약과 검소의 교화를 애써 밝히지 않는 것이 아님에도 귀족들의 사치하는 버릇이 갈수록 극심하여, 안으로는 재상들의 청렴 검약한 신조가 결핍되고 밖으로는 수령들의 탐오스러운 행위가 허다하며, 국사로 말한다면 고식적으로 미봉하여 구차히 용납받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여기고 과환(科宦)으로 말한다면 분주히 쏘다니며 길을 뚫어 내는 것을 교묘한 방법으로 여깁니다. 무릇 이러한 몇몇 사항들이야말로 그 어느 하나인들 뭇 신하들의 죄가 아니겠습니까마는 못난 신의 죽을 죄는 감히 이 만화(萬化)의 근원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중용(中庸)》 중화(中和)의 교훈을 본받고 《심경(心經)》 함양(涵養)의 공부를 체득하시어 한갓 문의(文義)만 대답하는 고사(故事)만을 따르지 마시고 실심(實心)을 힘쓰는 극공(極工)에 더한층 힘쓰신다면, 천도(天道)를 감회(感回)시켜서 휴상(休祥)을 맞이할 뿐더러 참으로 《주역(周易)》에 나타난 공구 수성(恐懼修省)의 뜻에 부합할 것입니다."
하고, 대신(臺臣) 송영(宋鍈)도 또한 상소하여 진면(陳勉)하였는데, 모두 예사 비답만 내렸다.

 

9월 18일 신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안주(安州) 남당성(南塘城)의 공역은 다가오는 초봄을 기다려서 장신(將臣)을 보내어 간심(看審)한 뒤에 마땅히 다시금 품처하겠으나, 평양의 중성(中城)은 개축하는 것이 옳을지의 여부를 명백히 알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개축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9월 20일 계해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제릉(齊陵)의 기신제와 정릉(貞陵) 고유제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으니, 정자각을 세우고 표석(表石)을 세웠기 때문이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지제교(知製敎)에게 제술(製述)을 시험 보였다.

 

9월 22일 을축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9월 25일 무진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입직한 내삼청 금군(禁軍)들에게 시사(試射)하고 상품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양정재(養正齋)에 나아갔다. 양정재는 바로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외가인데, 왕후가 이 집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성모(聖母)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육상궁을 전배하는 길에 들른 것이다. 양정재는 육상궁 동편 담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술회문(述懷文)을 지어서 세손에게 명하여 벽에 걸고, 집주인 조학천(趙學天)의 부자(父子)를 모두 조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육상궁에 나아가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9월 26일 기사

임금이 환궁하는 길에 여경방(餘慶坊)에 들렀다가, 이어 서학(西學)으로 가서 거재 유생(居齋儒生)을 불러 보고 종이와 붓을 내려 주었다.

 

정광한(鄭光漢)을 대사헌으로,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으로, 신응현(申應顯)을 집의로, 이진항(李鎭恒)을 사간으로, 채위하(蔡緯夏)·이우철(李宇喆)을 장령으로, 김광악(金光岳)·오현주(吳鉉胄)를 지평으로, 이혜조(李惠祚)를 정언으로, 김응순(金應淳)을 부제학으로, 박사륜(朴師崙)을 부교리로, 김기대(金基大)를 수찬으로, 유언민(兪彦民)을 대사성으로, 이최중(李最中)을 좌참찬으로, 신회(申晦)를 판의금으로, 장지풍(張志豊)을 황해 병사로, 우홍규(禹弘圭)를 전라 수사로 삼았다.

 

부사직 김시영(金始煐)이 팔잠(八箴)을 지어 올리며 은근히 면려(勉勵)하기를 바라는 뜻을 나타내었는데,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으로 칭찬하여 주었다.

 

9월 27일 경오

임금이 조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고, 이어 문신(文臣)의 제술 시험을 거행하였다.

 

영의정·좌의정과 북도의 구관 당상을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북도의 흉년이 가장 심한 고을의 환곡을 잘 여문 곡식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고, 경외(京外)의 도류형(徒流刑)을 내년 가을까지 우선 정배하지 말고, 명천(明川) 이남 지방의 진봉(進捧)하는 아전을 정퇴(停退)시키는 일은 청컨대 도신(道臣)의 장청(狀請)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세초 봉진을 이미 중지하였는데, 더욱이 삭선(朔膳)이겠는가? 더구나 봉진하는 물건 중에는 긴요하지도 않으면서 민폐는 클 수가 있다. 그리고 금년의 흉년은 함경도가 가장 심하니, 주원(廚院)212)  으로 하여금 이 도의 삭선 물품 중 긴요하지 않은 것들은 단자로 써 올리게 한 다음, 점을 찍어 내려보내는 대로 거기에 따라 중지하거나 감면하여 주어서 고향을 걱정하는 나의 뜻을 내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정상인(鄭象仁)을 교리로, 박상로(朴相老)를 수찬으로, 신익빈(申益彬)을 문학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좌참찬으로, 조운규(趙雲逵)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9월 28일 신미

주강을 행하였다.

 

9월 29일 임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정언 이혜조(李惠祚)가 상소하여 천둥이 친 재이에 대해 아뢰고, 이어 말하기를,
"성상의 수성(修省)하는 방법은 점차 이전만 못하여 가고 신하의 충애(忠愛)의 상언(上言)은 근시(近侍)에서도 들리지 않는가 하면, 깊이 유념하여 보겠다는 비답은 매번 의례적인 데 그치고 서로 힘쓰겠다는 말씀도 형식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번에 와서는 그것마저도 형식과 함께 폐지되고 말았으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매 승지와 유신(儒臣)이 인혐(引嫌)하고 바로 나가버리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추모하느라 마음을 쓰고 있는 날에 갈등을 야기시킨 비행을 꾸짖고, 탕제도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이 날 임금이 사알(司謁)의 방에서 재숙(齋宿)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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