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계유
임금이 신하로서 지난해의 탄신은 알지 못하고 그 날에 소란을 일으켰다는 전교를 내리고, 크게 번뇌하며 온종일 내국(內局)을 접하지 않으므로, 내국에서 세 번이나 계청을 하였는데, 그래도 윤허하지 않자 여러 대신들이 뒷 명령을 기다렸다.
10월 2일 갑술
여러 대신 및 승정원에서 입대(入對)를 요구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아! 지난해의 탄신을 하대부(下大夫)·시종(侍從)들이 모두 잊고 있는 것은 실로 나의 불효(不孝)이다. 연화문에 나아가 하대부 이하들에게 분명히 하유하리라."
하고, 곧바로 대령(待令)을 시키는데, 전직·현직을 물론하고 독서 문신(讀書文臣)만 대령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니,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앞에 나아왔다. 임금이 탄신을 아는가의 여부를 물었는데, 민유(閔游)에 이르러 대답을 제대로 못하자, 임금이 시종신으로서 성후(聖后)의 탄신을 모른다며 노발대발하여, 민유를 자신에 한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등과방(登科榜)에 찌를 붙임과 동시에 통청(通淸)한 전관(銓官)의 직(職)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지금의 하교는 감히 받들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바라건대 모두 거두어들이소서."
하니, 임금이 더 역정을 내어 가마를 재촉하며 하교하기를,
"오늘의 이 자리에 내가 어찌 좋아서 나왔겠는가? 일이 소중하여 민유만을 처분한 것인데, 모든 하교를 거두어들이라는 계청을 나의 앞에서 개진(開陳)하니, 국가의 체통을 보아서라도 말없이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영의정 김치인에게 속히 삭탈 관직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이때 밤이 이미 깊고 창졸간의 행차여서 시위하는 군병들이 전혀 정돈하여 대기할 수가 없어서 몇 개의 횃불로 수레를 인도하는데, 야주현(夜晝峴)에 이르러서 내국 제조 채제공(蔡濟恭)이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신들이 행차를 만류하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신들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유 같은 자를 대신이 감히 신구(伸救)하는 것인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걸어서 뒤를 따르다가 창의궁 문 앞에 이르러서 채제공이 또 수레를 끌어당기며 탕제를 들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그 심지(心志)를 내보인 사람은 채제공이다.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10월 3일 을해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밑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창의궁에 머물러 있는데, 시임·원임 2품 이상의 대신과 승정원에서 누차 입대(入對)를 요구하고, 내국(內局)에서도 세 차례 계청을 하였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정오를 지나자 승정원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여도 문이 굳게 닫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어서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 편전(便殿)의 문이 또 닫혀 있었다. 이때 마침 동궁이 따라 들어가서 곁에서 모시고 있던 중 의관(醫官)을 불러들였기 때문에 외정(外廷)에서 비로소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초경(初更)이 되어서 비로소 문을 열고 내정(內庭)으로 들어가니 임금이 함일재(咸一齋)에 있었다. 여러 대신들과 내국·승정원에서 계하(階下)에 늘어서서 번갈아가며 소리를 질러 진맥을 받고 탕제를 들 것을 청하였으나, 끝까지 하교가 없어서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밤을 새웠다.
10월 4일 병자
임금이 체후가 편하지 않아서 가교(駕轎)213) 의 창문을 닫은 채 환궁하였다. 김치인(金致仁)을 다시 영의정에 임명하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함께 오도록 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니, 임금이 졸기도 하고 혹은 앓는 소리도 내다가 말하기를,
"어제는 깜빡 잠이 들어서 경(卿)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하였다. 김치인이 받아야 할 벌은 당연히 받겠다고 죄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끝난 일이다. 더 말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5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하교하기를,
"어제 회가(回駕) 때에는 내국(內局)에서 의당 숙직을 계청하여야 됨에도 계청하지 않았고, 오늘은 승정원에서 내일의 문안을 계청하여야 됨에도 역시 계청하지 않았다. 내국 및 여러 승지를 특별히 체직하라. 현재에 계칙(戒飭)할 일이 대부분 전 고지(故紙)에 등록되었으니, 대신(臺臣)은 모두 서용(敍用)하지 않는다."
하고, 이어 내국에 윤직(輪直)을 명하였다.
2품 이상의 관원들이 임금의 안부를 물었다.
구윤옥(具允鈺)·서호수(徐浩修)·김치공(金致恭)·유선양(柳善養)·이성원(李性源)·이계(李溎)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침실 안에서 인견하였는데, 예조 판서 홍명한(洪名漢)이 아뢰기를,
"정릉(貞陵)의 표석(表石)을 세우는 일은 얼마 안 가서 마칠 것인데, 전례를 상고하여 본 바 인본 족자(印本簇子)를 모시고 갈 적에는 세장(細仗)과 고취(鼓吹)를 썼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의 범례(凡例)를 상고하여 본 바, 창릉(昌陵)의 표석 가운데에 왕후의 별세한 날짜가 또한 잘못 기록되었습니다. 앞으로 경릉(敬陵)의 표석을 개각(改刻)할 때 일체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중효(洪重孝)를 대사헌으로, 홍검(洪檢)을 집의로, 여선응(呂善應)을 사간으로, 김시구(金蓍耉)를 장령으로, 이동우(李東遇)를 지평으로, 곽진순(郭鎭純)을 헌납으로, 조준(趙㻐)·홍용한(洪龍漢)을 교리로, 심이지(沈頤之)를 수찬으로, 이치중(李致中)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0월 6일 무인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각 능전(陵殿)의 동향제(冬享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는데, 대신과 내국에서 성상의 체후가 정섭(靜攝) 중에 있다는 이유로써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7일 기묘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천둥의 재이(災異) 때문에 10일간의 감선(減膳)을 명하였다.
내국에 명하여 주원(廚院)으로 옮겨서 숙직하도록 하였다.
10월 8일 경진
하교하기를,
"예전의 풍속에 춘번(春幡)214) ·청우(靑牛)215) ·인승(人勝)216) ·애용(艾俑)217) 따위가 있었으나 옛날의 선정(先正)이 제거하기를 아뢰었기 때문에 나도 또한 내국의 3개의 붉은 비단주머니와 단오절의 쑥띠[艾帶]를 제거하도록 명하였다. 신구(新舊) 경신일(庚申日)과 과세(過歲)하는 밤에 진배(進排)하는 풍속은 그 유래를 알 길이 없었는데, 《사문유취(事文類聚)》를 지금 상고하여 보고서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올바른 말을 듣고 올바른 일을 행하는 길은 늘상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수양하여야 되지, 경신일과 제석에 앉아서 밤을 지샌다 하여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때문에 이날의 진배를 그만두라고 명한 것이다. 또 동짓날의 팥죽은 비록 양기의 회생을 위하는 뜻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문에다 뿌린다는 공공씨(共工氏)의 설(說)도 너무 정도(正道)에 어긋나기 때문에 역시 그만두라고 명하였는데, 이제 듣자니 내섬시(內贍寺)에서 아직도 진배를 한다고 하니, 이 뒤로는 문에 팥죽 뿌리는 일을 제거하여,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0일 임오
이담(李潭)을 이조 참판으로, 이득일(李得一)을 교리로, 심관지(沈觀之)를 부교리로, 홍검(洪檢)을 수찬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침실 안에서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나의 변함 없는 마음은 비록 사흘을 숙직하더라도 그것이 석 달과 같은데, 더구나 엿새이겠는가? 근래 약원(藥院)의 숙직으로 인하여 육부(六部)가 사무를 폐지하다 보니 팔도(八道)의 장문(狀聞)이 승정원에 유치(留置)되어 있다. 늘그막까지 국정을 잡고 있는 만큼 종사(宗社)와 국가를 위하여 일하여야 될 때인데, 온갖 일이 이다지 번쇄(煩瑣)하니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오늘 듣건대 제주도의 공인(貢人)이 올라온다고 하니, 승지를 시켜 금년의 농사를 물어보고 운선(運船) 실태도 역시 물어보아서 다 도착되는 대로 아뢰도록 하되, 외방(外方)의 민사(民事)에 대하여 아뢰는 일이라면 지체됨이 없이 즉시 들여보내라."
하였다.
부제학 김응순(金應淳)과 교리 조준(趙㻐) 등이 연명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여러 신하들의 진계(陳戒)가 많기도 한데, 총괄하여 말한다면 덕을 닦고, 형벌을 삼가고, 언로를 열고,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내용들입니다. 이제 이미 다 진달하였는데, 신들이 장차 무슨 말을 진달하겠습니까? 근일의 일로 말한다면 한번의 번뇌로 인하여 갈수록 격노(激怒)를 이루어 탕제를 물리치고 나서 연화문으로 임어하시고, 연화문에 임어하고 나서는 또 밤중에 배위(陪衛)도 없이 거둥을 하시어 여러 날을 구저(舊邸)에 나아가시므로 위아래가 서로 격조되어 모양이 창황하여서 듣는 이가 놀라서 당혹하고 있습니다. 성상의 심사가 이토록 불편하신데, 하늘의 마음이 어찌 화평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순일지성(純一之誠)에 더한층 힘쓰시어 존양지도(存養之道)를 다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감선(減膳)을 닷새째나 하고 있지만 두려운 마음은 첫날과 마찬가지이다. 아! 학사는 이제 무엇하러 잠을 깨우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정섭(靜攝)을 하기 위하여서는 이대로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데, 이 무슨 거조로 지금 그만 잠을 깨우는가? 차자를 올린 여러 신하들을 체차하라."
하였는데, 조준은 수창자(首倡者)이므로 시종안(侍從案)에서 이름을 삭제시켰다.
10월 12일 갑신
정릉(貞陵)의 비역(碑役)을 마치고 나서 도감(都監)에서 인본 족자(印本簇子)를 모셔 올리니, 임금이 왕세손과 더불어 연화문 밖에 나가 지영(祗迎)한 다음 친히 봉심(奉審)하였다. 이어 도감 당상 안윤행(安允行)·홍명한(洪名漢)·김시묵(金時默)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낭청과 장인(匠人)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품을 내려 주었다. 인본 족자를 모셔 올릴 적에는 행사가 중대하기 때문에 궐문 안에서 음악을 연주하기는 하였으나, 재변을 만나서 음악을 울린 것이 한결 더 두렵다는 이유로 닷새 더 감선(減膳)을 명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쟁집(爭執)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원(南原) 유생 이요팔(李堯八)은 나이 81세로 감시 초시(監試初試)에 합격하고, 정주(定州) 유생 신수채(辛受采)는 나이 84세로 강경 초시(講經初試)에 합격하였는데, 임금이 향시 방목(鄕試榜目)을 보고서 이상히 여기어 본도에 명하여 모두 올려 보내되, 연도 고을에서 호송을 하라고 한 바, 이때에 와서 두 사람이 앞뒤로 도착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이요팔에게는 목릉(穆陵) 참봉을, 신수채에게는 정릉(貞陵) 참봉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10월 13일 을유
내국에서 물러나와 본원에서 숙직하였다.
예조에서 임금의 체후가 정상을 되찾았다는 이유로 고묘(告廟)와 반사(頒赦)를 거행할 것을 계청하고 시임·원임 대신들이 또 고묘와 반사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하교하기를,
"내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막중한 태묘(太廟)에 해마다 고유(告由)로 번거롭히려 하는가? 반사문 또한 해마다 싸들고 간다면 조선에는 장차 도형(徒刑)의 죄인도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내국의 세 제조가 돌아가며 숙직하였다.
10월 14일 병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10월 16일 무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고묘(告廟)와 반사(頒赦)를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범조(丁範祖)를 정언으로, 송재경(宋載經)을 필선으로 삼았다.
10월 17일 기축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서 계사(啓辭)를 올리기를,
"성후(聖候)가 평안을 되찾았을 때 칭경(稱慶)을 하는 것은 법전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천리(天理)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성후를 정섭할 때를 당하여 척강(陟降)하는 조종(祖宗)께 걱정을 끼치었고, 평안을 되찾은 날에 와서는 척강하는 조종께 보우를 받은 만큼 반드시 경사스러움을 고유하고 나서야 조종의 신명을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엄중한 전교를 내려 완강히 물리치고, 아울러 시임·원임의 대신과 관원을 파면하였다. 또 이날 내국의 입진(入診)을 윤허하지 않아서 내국에서 누차 계청을 하자 모두 파면하였고, 승정원에서 소회를 써 올렸는데, 모두 체직시켰다가 곧바로 모두 취소하였다. 임금이 한담(寒痰)으로 해서 또 편찮아서 초위(椒熨)를 올렸다.
10월 18일 경인
이유수(李惟秀)·이재협(李在協)·구익(具熤)·이수봉(李壽鳳)·최태형(崔台衡)·이성수(李性遂)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19일 신묘
동지 정사 경흥군(慶興君) 이전(李栴)·부사 송형중(宋瑩中)·서장관 이명빈(李命彬)을 소견하고, 임금이 위유하여 보내었다.
이진항(李鎭恒)을 집의로, 정상인(鄭象仁)을 교리로, 김이소(金履素)를 부교리로, 심관지(沈觀之)를 수찬으로, 조창규(趙昌逵)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남태저(南泰著)를 특별히 제수하여 대사헌으로 삼고, 송덕상(宋德相)을 장령으로, 이적보(李迪輔)를 사간으로, 송제로(宋濟魯)를 장령으로 삼았다.
10월 20일 임진
신응현(申應顯)을 사간으로, 성윤검(成胤儉)·권영(權穎)을 장령으로, 홍상성(洪相聖)을 정언으로, 박사륜(朴師崙)을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병조 참판 정후겸(鄭厚謙)은 이력이 이미 만족하고 재주 역시 갖추어졌으므로, 비국 당상으로 차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정한들 무엇하겠는가? 이미 그에게 글을 써 준 것이 있으므로 승전(承傳)을 받들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덕상(宋德相)은 누구인가?"
하니, 김치인이 대답하기를,
"선정신의 후손으로서 초선(抄選)된 자입니다."
하니, 임금이 놀라 말하기를,
"초선된 사람인가?"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 계하로 내려가려고 하자, 임금이 승지를 불러서 하교하기를,
"외방에 있는 시종신은 모두 체직시키고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 비의(備擬)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봉조하 홍계희(洪啓禧)가 그 아들 홍지해(洪趾海)가 있는 고을로 가려고 하므로, 임금이 소견하였는데, 홍계희가 말하기를,
"주자(朱子)를 존숭하는 것은 우리 나라만한 나라가 없으나,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두 책판이 연전에 모두 소실(燒失)하였기 때문에, 신이 지금 종전의 판본에 잘못된 부분을 내다가 유의하여 교정하고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교정을 마치게 되면 양남(兩南)에 나누어 보내어서 판각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홍계희가 또 말하기를,
"선묘(宣廟) 때 유희춘(柳希春)의 교정본(校正本)이 매우 정밀하고 소상하기 때문에 신이 대략 그것을 본떠서 범례(凡例)를 만들었습니다. 바라건대 한번 살펴보소서."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읽어 아뢰라 하였다.
10월 21일 계사
내국의 세 제조에게 명하여 모두 숙직하도록 하였으니, 임금의 체후가 오랫동안 편찮기 때문이다.
10월 22일 갑오
약방에서 주원(廚院)으로 옮겨 숙직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니, 준천사(濬川司) 당상도 같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준천사에도 채전(債錢)이 있는가?"
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지난해 준천 공역을 마친 뒤에 약간의 남은 재물이 있어서, 나누어 주어 이식을 놓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오래 할 방법은 아닙니다. 그리고 앞뒤로 놓은 채전을 신칙의 하교가 있는 이상 그대로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준천사 당상이 지금 돈을 거두어 들여서 곡물을 장만하고자 한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그 돈을 진휼청이나 혹은 균역청으로 이송하여 외방 고을에 있는 상진곡(常賑穀) 및 균역청미와 서로 교환한 다음, 그것을 조적법으로 해마다 모곡(耗穀)을 받아서 쓴다면 채전을 놓는 폐단을 없앰과 동시에 준천사의 수요에도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경호(李景祜)는 말하기를,
"준천사의 남은 돈이 지금 1만 2천여 냥이나 되므로, 만약 이것을 균역청으로 이송하여 절가(折價)대로 그 액수를 쳐 준다면 곡물 4천 석은 될 것입니다. 모곡을 취하여 비용에 보태어 쓰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10월 29일 신축
임금의 체후가 회복되어 내국에서 본원으로 나와서 숙직하였다. 내국 및 시임·원임 대신이 고묘(告廟)와 반사(頒赦)를 거행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무신 장지항(張志恒)이 북도의 봉수(烽燧)를 살펴보러 갔었는데, 이때에 돌아와서 그 편의를 아뢰기를,
"이성(利城)의 진조봉(眞鳥峰)과 성문(城門) 봉수의 두 사이는 봉홧길이 단절되어 있어서 양쪽에서 바라보이는 고을의 주산(主山)과 두을(豆乙)·응치(應峙)의 세 곳에 〈간봉(間烽)을〉 설치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경성(鏡城) 삼삼파(森森坡)의 간로봉(間路烽)은 종전에 직로봉(直路烽)으로 변통한 뒤 모덕(牟德)에서 영강(永康)으로 반응하도록 하였는데, 영강에서 모덕을 바라보는 데는 사이에 여러 산봉우리들이 벌여 있어서 바라보기가 어려우므로, 동봉(東峰) 봉화를 만약 송봉(松峰)으로 옮겨서 모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주촌(朱村)에서 받도록 한다면 봉화의 길이 매우 편리하고 옮겨 설치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모덕의 것이 혁파 중에 있어서 삼수(三水)의 어면도(漁面島)는 여러 봉홧길의 가장 요긴하고 종요로운 곳일 뿐더러, 또 국경의 경비에도 긴요하므로 간로봉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함흥(咸興)의 성곶(城串)은 들판은 낮고 산은 높아서 바라보기가 불편하므로, 역시 간봉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철령(鐵嶺)의 연화(煙火)를 남북으로만 한정하는 일도 법으로 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으며, 이 밖의 일은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또 봉화대의 무사(武士)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이는 임금이 봉수군(烽燧軍)의 겸역(兼役)이 다른 사람보다 고되다는 문제를 들어 도신에게 명하여 소상히 장문하도록 한데다 장지항이 또 도사(都事) 여선덕(呂善德)이 무신을 멸시하여 전혀 고생을 돌아보고 꺼려함이 없이, 취소(吹簫)·마포(馬砲)를 마음대로 다룬다고 상주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해부(該府)로 하여금 중감(重勘)하도록 한 것이다.
밤에 승지를 불러서 하교하기를,
"이제 와서 나의 뜻이 고정(固定)되었다. 밤중에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일이 있으면 고유를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당연한 일이다. 이번 삭제(朔祭)에 고유도 겸행할 것이며 종묘와 사직(社稷)을 똑같이 오늘에 수향(受香)하겠다. 반사(頒赦)와 설과(說科)도 전례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고묘와 반사를 명하였는데, 상(賞)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제조 서명응(徐命膺)·채제공(蔡濟恭)과 부제조 구윤옥(具允鈺)·이유수(李惟秀)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그밖의 의관(醫官)과 이속들은 차등 있게 상품을 주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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