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5권, 영조 46년 1770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1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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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일 갑진

이행원(李行源)을 사간으로, 임희우(任希雨)를 정언으로, 임정원(林鼎遠)을 수찬으로, 장지항(張志恒)을 통제사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옛날 성탕(成湯)은 은혜가 나는 새에까지도 미치었는데218)  ,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마는 제(齊)나라 선왕(宣王)보다 못할 수야 있겠는가!219)   지금 좌상의 아룀을 듣고 나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세시(歲時)에 금패(禁牌)를 하는데도 초봄이면 벌써 금하는 고기가 가도(街道)에 가득히 찬다고 하니, 저 제나라 선왕은 한 마리의 소도 불쌍히 여겼는데, 더구나 이처럼 많은 소이겠는가? 오부(五部)로 하여금 도살을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이는 일전에 금패(禁牌)를 내려 마을에 하교하였는데도 도살을 범한 자가 하도 많았기 때문에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이 일을 상주하였던 것이다.

 

11월 4일 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어 제주 목사(濟州牧使)의 진휼을 청하는 장계(狀啓)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아! 이들은 바로 예전에 무휼(撫恤)하여 준 백성이다. 경자년220)   이후 제주도 백성들에게 고맙게 여김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그때 자성(慈聖)께서 이 소식을 듣고 나서 데리고 온 사람을 특별히 전정(殿庭)으로 불러들여 쌀과 반찬거리를 내려 주는 것을 내가 거상(居喪) 중에 이미 보았고, 정축년221) 인산(因山)222)   때에 광중(壙中)을 물리고 흙을 쌓은 일 역시 내가 직접 보았으므로, 지난해의 제주도 백성에게 고맙게 여기는 마음을 생각할 때 감회가 한결 더 깊다. 본 제주도가 흉년을 거듭 만난 것은 바로 내가 덕이 없는 탓이니, 나리포(羅里舖)에 비축하여 둔 쌀 5천 석을 갈라 주고 내년 치의 공마(貢馬)도 특별히 봉진(封進)을 정지하도록 하라."
하고, 조금 후에 또 명하기를,
"삼명일(三名日)223)  의 방물(方物)도 내년까지 봉진(封進)을 정지하고 삭선(朔膳) 역시 내년까지 절반으로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백성들과 경사를 함께 누린다는 뜻에서 피편(皮鞭)과 태장(笞杖)을 금지하되, 다만 중죄에 관계되어 추핵(推覈)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및 외방의 동추(同推)에 있어서는 이 예에 구애하지 말고 종전대로 처리하라고 명하였으니, 형조 판서 심수(沈鏽)의 품정(稟定) 때문이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5일 정미

내국의 숙직을 철수시켰다.

 

11월 6일 무신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환궁하는 길에 여경방(餘慶坊)에 들러서 나이 60세 이상 되는 본방 백성을 불러오도록 한 다음 노상(路上)에서 쌀을 내려 주고, 또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종로 거리의 걸인들을 데려오도록 한 다음 팥죽을 먹여 주었으니, 이날이 바로 동지일(冬至日)이기 때문이다.

 

11월 7일 기유

조종현(趙宗鉉)을 응교로, 심이지(沈頤之)를 부응교로, 이치중(李致中)을 부교리로, 심관지(沈觀之)를 보덕으로 삼았다.

 

11월 8일 경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예식에 따라 하례를 받고 친히 사문(赦文)224)  을 지어 중외에 반포하였다.

 

11월 9일 신해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고 찬선 신경(申暻)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니, 경축을 같이 나누자는 뜻에서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득종(李得宗)을 대사헌으로, 이휘지(李徽之)를 대사간으로, 정범조(丁範祖)·김복휴(金復休)를 지평으로, 김용(金容)·이상건(李商建)을 정언으로, 이치중(李致中)을 필선으로 삼았다.

 

11월 10일 임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수어사 김한기(金漢耆)가 비국 당상에 행공(行公)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아뢰기를,
"이를테면 김한기가 끝내 이 직임에 행공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는 잘한 일이겠으나, 국사를 익히어 힘을 합하여 서로 도우려는 뜻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생각이 중요할 뿐 아니라, 내전(內殿)의 생각도 역시 그러하다."
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하반(賀班)에 입참(入參)한 무사들에게 시사(試射)를 시행하였다.

 

최익남(崔益男)이 전 이조 낭관으로서 소를 올렸는데, 상단에는 동궁이 사도 세자의 묘사(墓祠)에 대한 성묘와 전알을 오래도록 폐지한 일을 말하면서,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고 나서야 할아버지에게도 효도를 하며, 아버지에게 정성을 바치고 나서야 할아버지에게도 정성을 바쳐야 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10리 밖의 중포(中浦)에는 무덤가의 나무가 이미 한아름이 넘고 동쪽 성(城) 한구석에는 사당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하였으며, 하단에는 김치인의 죄상을 남김없이 말하면서, ‘이를 협찬하여 조제(調劑)한 자로는 조·송·김·정(趙宋金鄭)만한 자가 없으나, 이를테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오래도록 김치인을 종주로 삼았으며, 김치인의 아들이 균축(勻軸)225)  을 이어 맡아서 조제한 사람을 엄중히 배척하며 기어코 그 허물을 덮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는 공론을 저버린 행위이고 하나는 나라를 저버린 행위로서, 임금을 사랑하려는 성의는 전혀 없이 다만 임금을 속이려는 술책만이 있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족객(族客)이 종용하고 의자(義子)가 우익(羽翼)이 되어 도당들이 사방으로 날뛰고 소굴이 점점 깊어 가고 있다.’고 하고, 또 ‘간원의 공해(公廨)에 있어 마음대로 넓게 점령하고 선혜청의 관미(官米)를 모두 사용(私用)으로 돌렸다.’는 등의 말을 하며 죄다 늘어놓았는데, 임금이 내국에 입시를 명하여 최익남의 상소를 읽으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이상의 사건은 오늘날 신하로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말의 내용이 음험하고 흉악하다."
하고, 또 입직(入直)한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에게 입시(入侍)를 명한 다음, 임금이 말하기를,
"이상의 사건에 대하여 묻고자 하는 것이니, 모두 통쾌히 진달하라."
하니, 교리 박사륜(朴師崙)과 수찬 김기대(金基大)가 말하기를,
"이는 신자(臣子)로서 글에다 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고, 겸 보덕 심이지(沈頤之)는 말하기를,
"그는 폐기(廢棄)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국사에 대하여 말참견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오늘날 신자로서 감히 입을 벌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고, 보덕 심관지(沈觀之)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동궁을 보호 개도하려는 뜻이 하도 지극하여 결점을 지적할 수가 없는데, 신이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상소에 나에게 협찬한 사람을 열서(列書)하여 놓고서는 이어 영상(領相)을 모욕하여 도리어 제 아버지의 뜻을 저버렸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어린 세손의 효성이 할아버지에게도 차별이 없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바인데, 무신년226)   이후에도 또 이런 말을 듣게 되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하고, 처음 최익남의 입시(入侍)를 명한 다음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괴이한 말이 나올 것이니, 오직 마땅히 엄중히 처단만 할 뿐이다."
하고, 전교하기를,
"영상을 이 일에 구함(構陷)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하겠다. 아! 문답에서 이미 나의 뜻을 보였는데 오늘날 조선에서 어찌 감히 그 일에 대하여 말참견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 역시 떳떳한 본성이 있다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는가? 그 몇 마디의 말은 엄중히 신문하여 엄중히 처치함이 옳으나, 이일에 만약 신문을 한다면 이는 난(亂)을 부르는 것이다. 간특한 무리는 국중(國中)에 함께 두지 않는다는 성인(聖人)의 뜻을 본받아서, 최익남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하여 영원히 서민을 삼되, 하루에 사흘 길을 걸어서 압송할 것이며, 상소문은 즉각 불살라버리고 전하여 보인 자도 엄중히 감죄(勘罪)하라."
하였다.

 

11월 11일 계축

임금이 시임·원임의 대신(大臣)·구경(九卿)·유신(儒臣)·사헌부·사간원을 불러 보고, 승지에게 명하여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주석을 읽힌 다음,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이것을 강론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몇 년 동안이나 임어(臨御)하면서 만약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제도가 잘 정립되어 있었다면 어찌 최익남 같은 자가 있었겠는가? 국가의 흥망이 이 한 사건에 달려 있다. 지난날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이 최익남을 하도 칭찬하였기 때문에 언젠가 그를 배척하는 구상(具庠)의 상소를 지나치다고 하였더니, 이제서야 비로소 구상의 선견지명에 부끄럽고 승복이 된다. 오륜(五倫) 중에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가장 중요하므로 내가 비록 부모에게 효도는 못하였지마는 자식에게 자애는 있어 볼까 싶어서, 그때 제주(題主)를 하면서 이미 어린 세손을 타일러 그 도리를 다하였거니와, 나의 잘못이 아니라 사세(事勢)가 그렇게 된 것이다. 박치륭(朴致隆)은 홍 봉조하를 모욕하더니 지금 최익남은 또 영상을 모욕하였는데, 이는 영상을 모욕하려고 한 말이 아니다. 내가 왕위에 있는데도 이와 같으니, 뒷날에 또 몇 명의 박치륭과 최익남이 더 나올지 모르겠다."
하니,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미연의 일로써 성상의 심려를 번거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익남이 영상에게 무슨 혈원(血怨)이 있어서인가?"
하니, 영부사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녹용(錄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을 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헌부 【집의 이진항(李鎭恒)·장령 성윤검(成胤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최익남(崔益男)의 전체의 상소를 비록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 대략을 들어보니 묵은 원한을 마음속에 품고서 버젓이 모함을 하여 중임을 바탕으로 화(禍)를 꾸민 간사한 모략은 너무도 망측하므로, 그 예방을 하는 도리에 있어서라도 정배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즉시 그곳에다 가시울타리를 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약방에서 저녁에 입진(入診)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중포(中浦)에 비록 가고 싶기는 하나, 만약 능(陵)에 행차하는 길이라면 몰라도, 어찌 묘소(墓所)에만 가기 위하여 거둥을 할 수 있겠는가? 동궁의 경우는 더욱 교외(郊外)에 마음대로 나다니는 예가 없고, 무릇 알릉(謁陵)할 적에는 비록 상하 양릉(兩陵)의 곳을 함께 받들지라도 반드시 위에 있는 능으로써 영(令)을 내리니, 고례(古例)가 그러한 것이다. 최익남의 상소는 이러한 사체(事體)는 전혀 모르고 나와 동궁을 보고 능묘(陵墓)에 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자애와 효도가 전혀 없다는 뜻을 이른 것이다."
하였다.

 

조정(趙晸)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12일 갑인

주강을 행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도성 밖에서 대죄(待罪)하는 것을 누차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여 함께 오게 하였으나, 명에 응하지 않으므로 또 예조 판서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11월 13일 을묘

주강을 행하였다.

 

이명식(李命植)·이성원(李性源)을 승지로 삼았다.

 

임정원(林鼎遠)을 집의로, 임해(任瑎)·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송영(宋鍈)을 헌납으로, 이창임(李昌任)·김상묵(金尙默)을 부교리로, 송재경(宋載經)을 부수찬으로, 정상인(鄭象仁)을 보덕으로, 서명응(徐命膺)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1월 14일 병진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선릉(宣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조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팔도(八道)·양도(兩都)의 묵은 포흠(逋欠)을 4만 석까지 탕감하고, 공인(貢人)의 전에 남아 있는 공물 2천 석을 탕감하고, 태학 전복(太學典僕)의 현방속(懸房贖) 15일 치를 탕감하여, 노년(老年)에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엄인(嚴璘)을 대사간으로, 조종현(趙宗鉉)을 사간으로, 김재록(金載菉)을 헌납으로, 김제행(金齊行)을 정언으로, 송재경(宋載經)을 교리로, 조준(趙㻐)을 수찬으로, 이병정(李秉鼎)을 부수찬으로, 정복환(鄭福煥)을 설서로 삼았다. 조준은 이보다 앞서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특별히 탕척을 명하였다.

 

집의 임정원(林鼎遠)이 아뢰기를,
"죄인 최익남(崔益男)은 본시 요사한 성품으로서 세상의 버림을 받자, 속으로 감정대로 앙갚음할 계획을 품고 겉으로 막중한 말을 빙자하여서, 그 말이 아주 패려하고 마음씀이 너무 망측합니다. 대저 난필(鑾蹕)227)  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학가(鶴駕)228)  가 홀로 행할 수 없는 것은 바로 3백 년 이래의 전례(典禮)이고, 만일 특교(特敎)가 아니라면 아래서 감히 계청하지 못할 일이 있는데도, 그가 폐기 금고에서 풀려남으로써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 일 한 가지를 뭇 신하들이 말을 하지 않은 것에 죄를 돌리면서 화(禍)를 조정으로 떠넘기고 후세를 교란시키려는 계획을 하니, 그 정상을 캐어 볼 때 너무도 간교하고 사특합니다. 처분이 너무 관대하여 여론이 갈수록 격렬하고 있으니, 대정현(大靜縣)에 천극(栫棘)된 서민 최익남을 속히 의금부에 명하여 잡아와서 엄중히 국문하는 일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체모는 비록 얻었으나, 다만 이 일의 처분은 나의 생각이 있는 데가 있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입시할 것을 명하여, 매우 간절히 힘써 효유하였다.

 

임정원(林鼎遠)을 특별히 제수하여 응교로 삼았다.

 

11월 15일 정사

윤동섬(尹東暹)을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창의궁에 나아가 ‘양묘에 들러 옛날을 생각한다.[臨兩廟憶昔]’는 어제를 쓰도록 명하고, 이를 마친 뒤에 환궁하였다.

 

남현로(南玄老)를 대사간으로, 이치중(李致中)을 사간으로, 이항조(李恒祚)를 헌납으로, 이동현(李東顯)을 정언으로, 나충좌(羅忠佐)를 장령으로 삼았다.

 

대신(臺臣) 엄인(嚴璘)을 변방에 유배하고, 김재록(金載祿)·이치중(李致中)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밖에 나가 있다고 핑계를 대거나 또는 패초(牌招)를 어기고서 최익남의 죄를 아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필수(韓必壽)를 대사간으로, 이득일(李得一)을 사간으로, 채위하(蔡緯夏)를 헌납으로, 임희간(任希簡)·홍빈(洪彬)을 정언으로 삼았다.

 

김상익(金相翊)을 특별히 제수하여 이조 참의로 삼고, 채위하(蔡緯夏)를 승지로 삼았다.

 

11월 18일 경신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이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간원 【사간 박사륜(朴師崙)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최익남을 국문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므로, 수찬 김기대(金基大)가 말하기를,
"최익남의 상소 내용은 아주 망측합니다. 청컨대 대간의 계청을 윤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최익남을 아껴서가 아니라,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까 두려워서이다."
하였다.

 

정방(鄭枋)을 사간으로, 송제로(宋濟魯)를 장령으로, 임희증(任希曾)을 정언으로, 심관지(沈觀之)를 보덕으로, 원계영(元啓英)을 필선으로, 한광근(韓光近)을 정언으로, 정이환(鄭履煥)을 교리로, 이형규(李亨逵)·김기대(金基大)를 부교리로, 김노순(金魯淳)을 수찬으로, 박상로(朴相老)·민종렬(閔鍾烈)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19일 신유

임금이 조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경복궁에 거둥하여 근정전의 옛터에 나아가 문관·음관·무관의 모든 관원에게 뜰에 들어와서 행례(行禮)할 것을 명하였다. 차례로 앞에 나아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최익남(崔益男)의 일은 그가 스스로 처리한 것이 아니라, 대신(臺臣)이 위패(違牌)한 일로 살펴본다면, 대신이 더러는 간섭하려 하지 않고 더러는 마음속으로 최익남을 옳게 여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의 광경을 살펴본다면 반드시 최익남의 소굴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널리 묻는 것이니, 숨김없이 다 진술하라."
하니, 일제히 대답하기를,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어찌 행여라도 최익남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전적 이재휘(李載徽)가 대답하기를,
"최익남 상소의 기두(起頭)의 내용은 너무도 망측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시종(侍從)도 아닌데 소본(疏本)을 어떻게 보고 알았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전해 듣고 알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감히 말을 전하였는가?"
하고, 그의 대답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잡아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창의궁에 들렀다가 도로 건명문(建明門)으로 나아가 이재휘를 친히 국문하여 소본을 얻어 본 곳을 물으니, 이재휘가 유생 유선중(兪善中)의 집에서 보았다고 대답하였고, 승지가 그 소본을 불살라버린 다음 전의 소본이 나돌고 있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사태가 조금 누그러졌다. 이어 최익남(崔益男)의 아우 최백남(崔百男)을 잡아다 신문하라고 명하고 말에 관련하여 서로 오가며 친히 지낸 사람과 요얼(妖孽) 이봉환(李鳳煥), 그리고 이웃에 사는 유생 정석오(鄭晳吾)를 모두 당장 잡아다 국문하였는데, 최백남은 재신(宰臣) 김기대(金器大)와는 척분(戚分)이 있어서 서로 오가며 친히 지냈다고 공술하고, 이봉환은 구상(具庠)이 상소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시켜 가서 염탐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과연 최익남이 소를 올리던 날에 찾아가서 소본을 보기는 하였으나 한마디의 말도 없이 왔다고 공술하자, 임금이 두 사람을 끌어다 댄 의도가 더욱 요사스럽고 간악하다며 모두 국문을 하지 않은 채, 이재휘·이봉환·정석오는 모두 형배(刑配)하고 최백남은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11월 20일 임술

주강을 행하였다.

 

11월 21일 계해

황간(黃榦)을 사간으로, 이만육(李萬育)을 장령으로, 이상건(李商建)·이장로(李長老)를 지평으로, 이창임(李昌任)·남주로(南柱老)를 정언으로, 조준(趙㻐)을 교리로, 이형규(李亨逵)·박취원(朴取源)을 부교리로, 이병정(李秉鼎)·홍상간(洪相簡)을 수찬으로, 김이희(金履禧)를 부수찬으로, 정광한(鄭光漢)을 대사헌으로, 신사운(申思運)을 보덕으로 삼았다.

 

조운규(趙雲逵)를 판의금에 특별 제수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을 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나와 말하기를,
"신이 당한 일로 볼 때 어찌 감히 다시 궐문을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마는, 마땅히 국사를 앞세우고 사의(私義)를 뒤로 미루었기 때문에 염치를 무릅쓰고 등연(登筵)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삼사(三司)가 다같이 논쟁을 하고 있는데도 윤허를 내리시지 않으므로, 진실로 성상의 뜻을 따라야 하오나, 의란(疑亂)의 계획을 위협하여 버티는 일은 너무나도 망측하여 여정(輿情)이 일제히 분개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간의 계청을 특별히 윤허하시어 의리를 해와 별처럼 밝게 보이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마땅히 국문에 참석하겠다는 말인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윗 조항의 사안이라면 신이 당연히 참석하겠습니다. 어찌 잗단 혐의를 생각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관계가 막중하다. 어찌 서로 버티기만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최익남을 친히 국문할 터이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되, 이봉환과 정석오를 똑같이 잡아 오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아뢰기를,
"이미 수상의 하교를 받들고 난 뒤로 사안이 경중(輕重)이 있기 때문에 잠시 나오지 않을 수 없었으나, 처분이 이미 준엄히 내려지고 토죄(討罪)를 청원한 하정이 조금이나마 풀렸으니, 신의 사사로운 의리는 신이 스스로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단의 일이 이같이 처분되고 나면 하단의 일은 저절로 사라질 터인데, 어찌 다시 의리를 끌어대어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김치인이 간곡히 사직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한편으로는 토죄를 청원하고 한편으로는 사직을 간청하니, 그것이 의리를 바로잡고 나라의 기강을 세우자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사정을 보아 줄 수가 있겠는가? 영의정 김치인을 특별히 정승에서 면직시킨다."
하였다.

 

11월 22일 갑자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정석오(鄭晳吾)·최백남(崔百男), 최백남의 아들 최경손(崔景孫) 등을 국문하였는데, 정석오는 유배된 지 얼마 안되어 잡혀온 자로서 최익남과는 이웃에 살며 친밀하게 지냈으므로, 반드시 정절(情節)을 들은 것이 있을 것으로 보고 형추(刑推)를 하여 캐어 물었으나, 정석오가 공술하기를,
"수년 동안 서로 오가며 친하게 지내다가 그의 행위와 용심이 점점 좋지 못하여 가는 것을 보고는 관계를 끊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였으나, 바른대로 진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준차(準次)의 형에 처하고 최경손은 풀어 주었다.

 

문사 낭청(問事郞廳) 조준(趙㻐)·이병정(李秉鼎)을 국정(鞫庭)으로 잡아들여서,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한 다음 끌어내라고 명하고, 또 대사헌 정광한(鄭光漢)의 관직을 개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조준은 어버이의 병환이 발생했다는 이유로써 간청의 상소를 올렸고 이 병정은 또한 사정이 있어서 행공(行公)을 못하였는데, 임금이 역정을 내어 함께 잡아들이니, 정광한이 나와 말하기를,
"두 문사 낭청이 패초(牌招)를 어긴 것은 비록 잘못이지마는, 책을 끼고 경연에 나오는 유신(儒臣)을 형신(刑訊)하는 국정으로 잡아들이는 일은 듣는 이들이 두려워하고 의혹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몹시 역정을 내어서 이런 하명을 한 것이다.

 

11월 23일 을축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최백남(崔百男)·정석오(鄭晳吾)·이성보(李成普)·문희민(文喜珉)을 국문하였으니, 정석오의 경우는 와주(窩主)를 캐어 묻기 위해서이고, 이성보의 경우는 최익남과 친밀하여 소를 올리던 날 참견을 하여서이고, 문희민의 경우는 호남(湖南)에 사는 잡술인(雜術人)으로서 최익남의 집에 머무르면서 상소문을 썼기 때문이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4일 병인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이봉환(李鳳煥)을 국문하였는데, 이봉환이 공술하기를,
"종전에 비록 최익남과 친밀하기는 하였으나 서로 내왕을 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구상(具庠)이 신에게 이르기를, ‘최익남이 소를 올렸다는 소문이 낭자하니 그대가 이를 염탐하여 오라.’고 하기 때문에 그날 과연 찾아가서 소본(疏本)을 보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왔습니다. 이밖에는 별다른 정절(情節)이 없습니다."
하다가, 누차 형신을 가하여 자복(自服)하도록 하며 말이 대부분 패만하여지자, 임금이 몹시 역정을 내며 사형(死刑)에 처하려고 하다가 아직 옥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선 옥에 가두어 두라고 명하고, 이성보·정석오·문희민도 모두 형신을 가하니 문희민은 상소문을 쓴 죄를 자복하므로,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이봉환은 물고(物故)되었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5일 정묘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수를 국문하였는데, 문희민은 망측한 상소문을 써 준 죄와 장전(帳殿)에서 부도덕한 말을 한 죄로 결안(結案)하고, 정석오는 최익남(崔益男)과 서로 사귀면서 소본을 구하여 본 죄를 자복하므로, 모두 처형하였으며, 남옥(南玉)·윤광빈(尹光賓)은 이봉환(李鳳煥)과 서로 친한 사실이 정석오(鄭晳吾)의 공초(供招)에 나와서 모두 체포되었는데, 남옥은 장전에서 상소 내용의 말을 왼 죄로 형을 받게 되었고, 이만식(李萬軾)은 소본을 빌려다 본 죄로 체포되었는데, 정상을 캐어 물은 뒤에 모두 옥에 가두었다.

 

11월 26일 무진

헌부 【장령 이택징(李澤徵)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이만식이 흉소(凶疏)를 빌려다 보았고, 또 최익남의 무리와 서로 친하였다며,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곧바로 자복하기를 청하였으므로, 가뉴(枷杻)를 벗겨버리고 서간(西間)229)  에 가둔 것은 너무 가볍게 다스린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의금부로 하여금 다시 형구를 갖추어서 엄중히 가두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7일 기사

이최중(李最中)을 이조 판서로, 송영(宋鍈)을 헌납으로, 김보순(金普淳)을 교리로, 박상악(朴相岳)을 수찬으로 삼았다.

 

11월 28일 경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수를 국문하였는데, 한덕관(韓德觀)은 그냥 석방하고 최익남의 겸종(傔從)인 노자(奴子) 극명(克明)·점동(占同)은 친히 신문한 다음 의금부에 내려 보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9일 신미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최익남을 국문하여 묻기를,
"너의 상소 앞부분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최익남이 공술하기를,
"별다른 뜻은 없고 예법이 행하여지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곧 만고에 없는 역적이다. 반드시 무신년230)  ·을해년231)  의 여얼(餘孽)로 지주(指嗾)한 자가 있었을 것이니, 낱낱이 바른대로 고하라."
하니, 공술하기를,
"실로 사주한 사람은 없으나 대사간 정운유(鄭運維)의 계사(啓辭)를 본 바 소견이 대략 같기 때문에 진술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운유가 너에게 권유하던가?"
하니, 공술하기를,
"평소에 모르는 사이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와 서로 친한 자로서 비록 이봉환(李鳳煥)·정석오(鄭晳吾) 무리가 있다고는 하나, 이들이 어떻게 와주(窩主)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들 외에 반드시 누군가 있을 것이니, 바른대로 진술할 것 같으면 너는 마땅히 살게 될 것이다."
하니, 공술하기를,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만, 이것으로 자복할 뿐입니다. 본시 사주를 받은 일이 없는데 어떻게 우러러 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연거푸 형신(刑訊)을 가하자, 최익남이 말하기를,
"생각하여 보니, 과연 들은 곳이 있었습니다. 금년 정월 무렵에 이성보(李成普)가 찾아와서 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심관(沈鑧)을 만나본 바 그의 말이 「정운유의 아룀이 옳다. 그러나 이를테면 최아무개가 이같은 소를 올렸더라면 좋았을텐데」’라고 하였으나, 신은 ‘괴이쩍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관이 무엇 때문에 ‘최 아무개가 이 소를 올렸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는가?"
하니, 공술하기를,
"이성보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심관을 잡아들이라고 명한 다음,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하대부(下大夫)로서 국가가 너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이곳에 들어왔는가?"
하니, 심관이 목놓아 울며 말하기를,
"그 죄를 모르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성보를 아는가?"
하니, 공술하기를,
"압니다. 이성보가 이따금씩 찾아오던 바 8월 감시(監試) 때에 찾아와서 과장(科場)의 통정(通情)을 청탁하는 까닭에 준엄히 꾸짖어 보내었더니, 그 뒤로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문목(問目)을 읽으라고 명하자, 심관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최익남에게 권유하고 싶기로서니 애당초 서로 알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권유를 하였겠으며, 신이 비록 역모의 나쁜 마음을 먹고 있었기로서니 어찌 패악하고 허망한 이성보를 통하여 애당초 상면(相面)도 없는, 요악하기로 이름난 최익남에게 권유를 하였겠습니까? 최익남은 저에게 원노(怨怒)를 품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친지가 최익남이 끝내는 반드시 남의 집안과 나라를 해치고 말 것이라는 것으로써 그를 탄핵할 것을 신에게 적극 권유하기에, 신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갈(蛇蝎)232)  에게 어떻게 대들 수 있겠오?’ 하였더니, 나중에 최익남이 이 말을 듣고서 저에게 원노를 품은 것입니다. 친지는 바로 구상(具庠)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심관을 석방하라고 명하고, 최익남에게 묻기를,
"행중(行中)에서 읊은 한 구절 시(詩)의 내용은 그 뜻이 망측하니, 이것으로 승복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는 그의 시 내용에 ‘윤기담신(倫紀擔身)’이라는 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술하기를,
"승복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사주한 자를 다시 바른대로 말하라. 너의 경우는 비록 처형을 한다 하여도 구미호(九尾狐)에 불과하다. 국법이 어찌 세워지겠는가?"
하니, 공술하기를,
"이것 역시 승복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역적으로 승복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최익남이 공술하기를,
"모역(謀逆)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이 모역과 다르겠는가?"
하니, 공술하기를,
"만약 역적과 같다고 한다면 또한 승복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애당초에는 매우 염려하였으나, 이제 비로소 알고 보니 말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괴독(怪毒)하기로 이름났다고 하더니, 지금 본 바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 역시 세상을 속이고 분수에 넘치는 명성을 얻은 행위이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죄인 이성보(李成普)가 물고되었다.

 

11월 30일 임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최익남(崔益男)을 국문하여 와주(窩主)를 캐어 물었으나, 끝내 말한 바가 없었다.

 

죄인 남옥(南玉)이 물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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