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5권, 영조 46년 1770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1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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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계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최익남(崔益男) 등 여러 죄수를 국문하고, 이만식(李萬軾)을 진도군(珍島郡)으로, 윤광빈(尹光賓)을 남포현(藍浦縣)으로 정배(定配)하고, 최백남(崔百男)은 향리(鄕里)로 내쫓았다. 대신(臺臣) 김치공(金致恭)·홍검(洪檢)이 최익남을 결안(結案)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한 명의 최익남을 아껴서이겠는가? 와주(窩主)를 끝까지 캐어 물을 것을 청함이 마땅함에도 서둘러 결안을 청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고, 모두 파직시켰다.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작년 정운유(鄭運維)의 소회(所懷)가 갑자기 나오게 되자 사람들이 괴이쩍어 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이번에 최익남의 공초(供招)에서 그의 소회를 본 바 그의 뜻과 서로 대개 비슷하기 때문에 그처럼 망측한 소를 올린 것이라고 하였으니, 정운유의 소회는 실로 최익남이 올린 소의 효시(嚆矢)이므로, 그냥 두고 논죄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신은 정운유를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효시(嚆矢)’라는 두 글자는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최익남의 공초가 이같은 이상 집법관의 소청은 진실로 옳은 처사이므로 특별히 소청에 윤허하여 제방(隄防)을 엄중히 하겠다."
하더니, 이어 하교하기를,
"정운유의 소회가 무심결에 나온 것이다."
하였다.

 

응교 정이환(鄭履煥)이 현도 진소(縣道陳疏)하여 최익남이 임금을 속인 음흉한 죄를 극력 말하고, 이어 대각신(臺閣臣)이 토죄를 청하지 않는 것과 대신(大臣)이 입을 다문 채 말은 하지 않고 교묘히 사정을 두어 편의만 취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개탄스럽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정을 두었다면 좌상(左相)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그 소본을 불사르고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향리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는데, 도승지 구상(具庠)이 말하기를,
"이번 최익남의 상소는 하도 망측하니, 의리에 관계됨이 어떠합니까? 진신(搢紳)에게도 화(禍)를 떠넘기는 것은 다만 그 여사(餘事)일 뿐입니다. 대신(臺臣)의 논계(論啓)도 오히려 충분히 분석할 수는 없으나, 정이환(鄭履煥)의 상소는 후세에 명분을 남길 만합니다. 그럼에도 처분이 이처럼 과중하다면 앞으로는 그 의리를 다시 누가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로서는 와주(窩主)를 알고 싶어서 비록 끝까지 캐어 물었지만, 오늘날 신하로서 어떻게 그것을 글로 써서 마치 송변(訟辨)을 하듯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하교하기를,
"전 영상(領相)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앞장서 나아가 토죄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 일로써 살펴본다면 이처럼 제방을 엄중히 하고 있는 때에 할말을 하지 않은 것을 전적으로 대신(臺臣)만을 신칙하고 그치겠는가? 전 영상 외에 시임·원임 대신 모두에게 서용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구상(具庠)·김상묵(金尙默)·임정원(林鼎遠)을 모두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는데, 뒤에 대신(大臣)의 아룀으로 인하여 정이환에 대한 처분의 명은 그만두고 구상도 직첩을 내주어 서용하라고 하였다.

 

12월 2일 갑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최익남을 국문하며 말하기를,
"이봉환(李鳳煥)이 너에게 이 소를 올리라고 권유하던가?"
하니, 최익남이 공술하기를,
"이봉환이 과연 권유하여 신의 신세를 그르쳤습니다만, 그가 권유한 의도는 필시 제가 문장에 능하면서도 벼슬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태에 격분한 나머지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내가 요량하고 있던 대로구나. 다시 바른대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최 익남이 말하기를,
"이봉환이 매번 유자광(柳子光)으로 자처하며 말할 때마다, ‘바람이 불어서 풀이 흔들린다면 마땅히 일을 하여서 영의정과 대제학도 모두 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자광의 일을 공모한 자를 다시 바른대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최익남이 말하기를,
"재작년 9월 이봉환이 박경행(朴敬行)과 같이 술을 마시고 나서 취중에 이런 수작을 한 바, 신이 그때 들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경행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최익남이 말하기를,
"흥해(興海) 임소에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곧 우선 천리의 길을 왕래하는 동안의 시일을 늦추어 보자는 계획이다."
하고, 박경행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12월 3일 을해

임금이 근정전 옛터에 나아가 경과 정시(慶科庭試)를 설행하여 신대승(申大升) 등 15인을 선발하였다.

 

12월 4일 병자

죄인 최익남이 물고되었다.

 

12월 5일 정축

윤득우(尹得雨)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귤을 내려 주고 시사(試士)하여, 수석을 차지한 이연상(李衍祥)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급분(給分)233)  을 하였다.

 

윤방(尹坊)을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여선응(呂善應)을 사간으로, 한광근(韓光近)·이범제(李範濟)를 정언으로, 이석구(李碩九)·김시구(金蓍耉)를 장령으로, 홍상성(洪相聖)·송덕기(宋德基)를 지평으로, 김화중(金和中)을 헌납으로, 송재경(宋載經)을 부교리로, 박상로(朴相老)를 수찬으로, 박상덕(朴相德)을 예조 판서로, 이유수(李惟秀)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다시 김치인(金致仁)을 제배(除拜)하여 영의정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좌의정으로 삼았다.

 

12월 6일 무인

임금이 조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시험에 나아간 여러 도(道)의 수령(守令)들을 불러 본 다음, 환곡(還穀) 수납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물어보고 이어 칠사(七事)234)  를 잘 이행하라고 신칙하였다. 대사간 윤방(尹坊)이 이만식(李萬軾)과 최백남(崔百男)을 엄중히 국문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7일 기묘

주강을 행하였다.

 

송재경(宋載經)·구상(具庠)·김상묵(金尙默)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으니, 최익남을 일찍이 탄핵하였기 때문이다.

 

12월 9일 신사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박경행(朴敬行)을 국문하였는데, 여러 방면으로 캐물어 보았으나 끝내 그런 사실이 없으므로 단천(端川)으로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0일 임오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납향 대제(臘享大祭)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또 석강을 행하였다.

 

12월 11일 계미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근정전 옛터에 나아가 문무과(文武科)의 창방(唱榜)을 하였다.

 

12월 12일 갑신

임금이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새로 급제한 문무 관원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민백분(閔百奮)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13일 을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태묘(太廟) 망제(望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2월 14일 병술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성수(李性遂)를 대사간으로, 박사형(朴思亨)을 정언으로, 정상인(鄭象仁)을 응교로, 이양수(李養遂)를 교리로, 조창규(趙昌逵)를 부교리로, 신광집(申光緝)을 수찬으로, 홍경안(洪景顔)을 부교리로, 신회(申晦)를 예조 판서로, 구윤옥(具允鈺)을 판윤으로 삼았다.

 

부제학 김종정(金鍾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만식(李萬軾)이 나라로부터 받은 후한 은전이야말로 어찌 여느 사람에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음흉하고 사특한 무리들과 패를 이룬 사실이 국초(鞫招)에 누차 나와서 평소 치밀한 행적을 숨길 수 없고 보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지레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은 아주 옥사의 체통을 존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다시금 엄중한 국문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최익남(崔益男)의 흉참하고 망측한 행위는 전고에 없는 일인 만큼 대각(臺閣)에 있는 자로서는 의당 피를 흘리며 눈을 부릅뜨고서 살펴야 함에도 애당초 양사(兩司)의 신하들이 대개가 머뭇거리고만 있었으니, 이보다 더 놀랍고 분통터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까닭없이 패초(牌招)를 어기었거나 서울에 있으면서도 외방에 가 있었다고 핑계댄 자에게는 모두 삭직하는 율을 시행하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만식에게 참작하여 처리한 것은 의도가 있어서이다. 또한 무엇하러 다시 묻겠는가? 그 밖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의열궁(義烈宮)에 거둥하였다가 환궁할 적에 인하여 김영빈(金寧嬪)의 옛집에 들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가에 전에 없던 큰 경사가 있어 은택이 널리 미침에 따라 이를테면 ‘영간 시종(永刊侍從)235)  ’·‘부첨 시종(付籤侍從)’·‘영간 대망(永刊臺望)’ 등의 죄명을 아예 해조(該曹)의 세초(歲抄) 중에 넣지를 않아서 가벼운 죄인데도 아직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의당 처분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써 들이라."
하고, 이어 명하기를,
"전 교리 이헌경(李獻慶)을 서인(庶人)으로 삼으라고 한 명령을 특별히 탕척하라."
하였다.

 

12월 15일 정해

지평 홍상성(洪相聖)이 상소하여 이만식(李萬軾)을 다시 국문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근일 도하(都下)에 밀도살이 낭자하여 신이 있는 의금부에서 어제 패장(牌將)이 붙잡아다가 막 감률(勘律)하려고 하는데, 흥은 부위(興恩副尉) 정재화(鄭在和)가 남의 청탁을 받고 많은 궁노(宮奴)를 풀어서 옥문(獄門)으로 보내어 금리(禁吏)를 구타하고 형구(刑具)를 부순 다음 죄수를 빼앗아 갔으니, 이는 참으로 전에 없었던 해괴한 일로서 당당한 국법이 이 나이 젊은 한 명 귀근(貴近)으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파괴되었으니, 정재화에게 삭직의 율을 시행하여야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정재화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2월 16일 무자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한림 권점(翰林圈點)236)  의 사람들을 불러다 시험을 보여 이재학(李在學) 등 세 사람을 뽑았다.

 

12월 17일 기축

홍문록(弘文錄)을 시행하여 윤면승(尹勉升)을 수찬(修撰)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호조 판서로, 남태저(南泰著)를 대사헌으로, 이항조(李恒祚)를 헌납으로, 이창임(李昌任)을 부교리로, 이득일(李得一)을 보덕으로, 민종렬(閔鍾烈)을 문학으로, 김화진(金華鎭)을 우윤으로, 윤동승(尹東昇)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전 이조 판서 이최중(李最中)을 서용하도록 명한 다음, 다시 전임(前任)을 제수하였다.

 

12월 18일 경인

임금이 육상궁에 나아갔다.

 

12월 20일 임진

오현주(吳鉉胄)를 지평으로, 김하재(金夏材)를 교리로, 조환(趙瑍)을 수찬으로, 정호인(鄭好仁)을 부수찬으로, 이언형(李彦衡)을 형조 참판으로, 정후겸(鄭厚謙)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의정부·관각(館閣)·이조의 여러 당상관을 불러서 도당록237)  에 회권(會圈)을 하여 신응현(申應顯) 등 21인을 뽑았다.

 

12월 21일 계사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대사헌 남태저(南泰著)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최백남(崔百男)은 최익남(崔益男)의 아우로서 누차 형신(刑訊)을 받았는데도 끝내 온전히 석방한 것은 형정(刑政)이 너무 너그러운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3일 을미

홍낙임(洪樂任)을 교리로, 김제행(金齊行)을 수찬으로, 조영진(趙英鎭)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2월 24일 병신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과실을 바치러 올라온 제주도의 백성을 불러 보고 위로한 다음, 동옷[襦衣]과 양식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대신 및 예조 당상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세수(歲首)의 하례를 거행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5일 정유

임금이 내병조(內兵曹)에 나아가 친히 도목 정사(都目政事)238)  를 행하여, 이갑(李𡊠)을 교리로, 김보순(金普淳)을 부교리로, 신응현(申應顯)을 부수찬으로, 이숭호(李崇祜)·김재인(金載人)을 수찬으로 삼았으니, 이조 판서 이최중(李最中)과 병조 판서 이경호(李景祜)의 정사(政事)이었다.

 

12월 26일 무술

임금이 창의궁에 거둥하였다.

 

12월 27일 기해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세수(歲首)의 하례를 거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시임·원임 대신을 모두 면직시키라고 명한 다음, 이어 육상궁으로 거둥하였는데, 왕세손 역시 따라가서 하룻밤을 지냈다.

 

12월 28일 경자

임금이 육상궁에서 떠나 의열궁을 거쳐서 돌아왔다.

 

하교하기를,
"지금 나의 마음은 추모하는 마음뿐이다. 처음엔 이곳에 머물렀다가 정월 초하룻날에 바로 창덕궁으로 나아가려 하였던 것인데, 어린 세손이 따라와서 하는 말이 ‘지난번 평복 수하(平復受賀) 때에 이미 선왕께 우러러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보산(寶算)을 더하신 것 역시 선왕께서 주신 복을 받으신 것인데, 어찌 처음에는 사례하시고서 지금에는 아니하신다 하십니까?’ 한다. 어린 세손이 늘 침묵만 지켜왔으나 이번에 진달한 말을 들어 보니 기질이 영특함을 알 수 있다. 이미 선왕의 은혜를 받았다고 한 이상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월정(月正)에 창덕궁에서 행례를 마치고 이어 인정전에 앉아서 하례를 받겠다. 그러나 하례를 받는 데는 반드시 명분이 정당하여야 되는 만큼 명칭은 ‘가년하(加年賀)’로 하도록 예조에게 알리라."
하고, 드디어 여러 대신을 처분하라고 한 명령을 특별히 정지하였다.

 

12월 29일 신축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간 여선응(呂善應)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간지(干支)에 대한 추모가 상도(常度)에 벗어나고, 대신을 아침에 체직시켰다가 저녁에 다시 유임시키는 것은 신하를 예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으니, 이때에 임금이 아무 날짜의 간지(干支)가 아무 해의 간지와 똑같다는 이유로 감회를 일으켜서 거둥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한 말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간원 【정언 박사형(朴思亨)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최백남(崔百男)의 일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사헌부에 하유하였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2월 30일 임인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정조(正朝)에 올릴 각릉(各陵)·전(殿)의 향을 지영한 다음, 하교하기를,
"내일 하례를 받게 되었으니, 세손의 효도를 팔방(八方)에 알리고 싶다."
하고, 이어 모든 도의 정조 호장(正朝戶長)239)  을 소견하고, 농사의 풍년·흉년을 물은 다음, 하교하기를,
"너희들을 소견하고 민사(民事)를 묻는 것은 세손이 마침 곁에 앉아 있어서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도록 하고 싶어서이니, 너희들은 부디 돌아가는 대로 이 말을 민간에게 알려서 내가 노년에 백성을 생각하는 뜻을 다함께 알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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