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계묘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먼저 선원전(璿源殿)에 배례(拜禮)하고 인정전(仁政殿)으로 출어(出御)하니, 왕세손(王世孫)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으며, 예(禮)를 마치고는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례(展禮)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임금이 하례를 받았다. 친히 교문(敎文)을 지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 겨울부터 금년 봄까지 국가의 의식이 조첩(稠疊)되었는데, 이것은 누구의 은혜이겠는가? 〈조종(祖宗)의 영령(英靈)이〉 오르내리며 내려 주신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조첩된 것이 몹시 민망하여 처음에는 굳이 거절하였지만 어린 세손[冲子]이 정성되고 간절하게 한마디로 감동시켜 돌리게 하면서 ‘우러러 내려 주신 은혜를 받으시고 사례하소서.’ 하였으니, 그 말이 이와 같은데 다시 어떻게 감히 거절하겠는가? 그것을 이미 허락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명분을 바로세워야 하며 우리 세손의 성효(誠孝)를 중외(中外)에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며, 이내 반사(頒赦)001) 하도록 영(令)을 내리고 좌통례(左通禮)·우통례(右通禮)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내려 각도(各道) 및 양도(兩都)에 신칙하였다.
이날 임금이 종가(鍾街)를 지나다가 시민(市民)을 불러 질고(疾苦)를 물었다. 대가(大駕)가 돌아올 때에 하교하기를,
"인군(人君)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바는 사전(祀典)이다."
하고, 이어 지나는 길에 봉상시(奉常寺)에 들러 승지(承旨)에게 신실(神室)을 봉심(奉審)하도록 명하고, 또 제주(祭酒)를 따라보아 품질이 어떤가를 살피도록 명하였으며, 또 서·직·도·량(黍稷稻粱)의 적은 양을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고 하교하기를,
"이 물품을 되돌려주는 것은 공경스럽지 못하며 버리는 것 또한 불가하다."
하고, 여러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밥을 지어 먹도록 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사서로, 김응순(金應淳)을 좌윤으로, 남태저(南泰著)를 우윤으로, 민백흥(閔百興)을 대사헌으로, 윤정렬(尹正烈)을 부교리로 삼았다.
방야(放夜)002) 하도록 명하였는데, 정월 초하루이기 때문이었다.
1월 2일 갑진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이내 예(禮)로써 진연(進宴)해야 함이 당연하다는 뜻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겸억(謙抑)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중외(中外)에 명하여 혼인[婚嫁]할 때가 지났거나 상(喪)을 당하여 장례 치르는 시기를 놓친 자를 찾아서 위문하고 돌보며 돕도록 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그것을 아뢰었기 때문이다.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제언(堤堰)을 수축(修築)하고 분류(分留)하는 법을 엄중히 지키도록 하여 내년[嗣歲]의 근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제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유자(儒者)나 무인(武人)을 논하지 말고 도내에 명성과 인망이 두드러진 자를 찾아내어 장문(狀聞)하여, 거두어 임용하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헌부 【집의(執義) 이현조(李顯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어 정월 초하룻날 하례하는 반열에 참석하지 않은 양사(兩司) 여러 신하들의 관직을 파면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별세초(別歲抄)003) 를 행하였다.
담양(潭陽)과 창성(昌城)을 승급시켜 부사(府使)로 하였는데, 두 고을은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인물의 태생(胎生)한 고을이라 하여 읍호(邑號)를 강등시킨 것이 이미 10년의 기한이 찼기 때문에 회복시킨 것이었다.
사간 여선응(呂善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여러 차례 청필(淸蹕)004) 을 옮긴 것은 진실로 추모(追慕)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며, 자주 한전(寒殿)005) 에 나간 것은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聖人)의 혈기(血氣)도 가끔 쇠약해질 때가 있고, 인주(人主)의 동작도 그 절도를 얻는 것이 귀중하며, 제왕(帝王)의 효도는 일반 서민들과 다르고 대질(大耋)006) 의 나이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와 달과 날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성모(聖慕)를 나타내어 지난날을 추억함이 간혹 일반적인 법도를 지나치니, 이는 바로 오늘날의 뭇 신하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걱정과 고민이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시고 스스로 너그럽게 하여 절도에 맞도록 힘쓰소서. 그리고 대신(大臣)을 예우하는 것은 국가를 높이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비록 과오(過誤)가 있을지라도 진실로 예(禮)로써 진퇴(進退)하게 하여야만 하는데, 심지어 아침에 체임시켰다가 저녁에 그대로 있게 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게 하며 간혹 잠시 명을 기다리도록 하였다가 곧바로 등연(登筵)하게 하니, 기상(氣像)이 아름답지 않으며 조정의 체모가 점차로 가벼워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으니, 그것을 마땅히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임금이 지금부터 사직단(社稷壇)의 기곡제(祈穀祭)는 비록 친행(親行)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로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1월 3일 을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정월 초하룻날 대가(大駕)를 수행한 금군(禁軍)에게 호궤(犒饋)하였다.
1월 4일 병오
승지 및 선혜청 당상에게 명하여 사민(四民)007) 을 불러 모아 흥화문(興化門) 밖에서 쌀을 내려 주게 하였다.
나충좌(羅忠佐)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아! 왕의 후설(喉舌) 구실을 하며 왕명의 출납(出納)을 성실히 하는 사람은 승지이니, 그 직책이 청환(淸宦)이면서 요직(要職)인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반드시 전조(銓曹)에서 통의(通擬)하여야 하며, 비록 참의(參議)를 거친 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사람마다 외람되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매번 특지(特旨)로 보임(補任)하게 하면서 통의를 기다리지 않으니, 이미 옛날 규례를 어김이 있으며, 더구나 또 지처(地處)의 가부(可否)와 재능과 인망이 있고 없음을 묻지도 않고 한결같이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켜 번번이 꼭 빈자리를 기다리게 하는데, 특별 임명에 나충좌 같은 자가 또한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애석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봉조하 김상익(金尙翼)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김상익의 형제(兄弟)와 숙질(叔姪)로 기사(耆社)008) 에 들어간 사람이 여섯 명이었으므로, 세상에서 복이 있는 집안이라고 일컬었다.
1월 5일 정미
임금이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조참(朝參)009) 을 행하고 훈유(訓諭)하는 글을 써서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조종(祖宗)의 영령(英靈)이〉 밝게 하늘에 계시면서 충만하게 임어(臨御)하신 듯하며 오늘날 여러 신하들의 할아비와 아비가 함께 모시고 오르내린 듯하다. 그대들의 할아비와 아비가 이를테면 ‘우리 선왕을 계승한 임금이 지금 나이가 80에 가까운데도 이 옛터에 임어하여 이 옛 문에 앉아서 몇 백년 뒤에도 이 예(禮)를 행하니 나의 자손들도 옛 뜰에서 이 예를 행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서글픈데, 경(卿)들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이 만약 이것을 생각한다면 붕당(朋黨)을 지어 아부하는 마음과 근거없이 떠드는 풍습과 불화하고 반목하는 기풍은 마땅히 봄날의 얼음같이 저절로 없어져야 한다. 아! 그것을 정말 스스로 없앤다면 참으로 조선(朝鮮)의 신자(臣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조선(祖先)의 뜻을 잊어버린 자이니, 무슨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겠는가? 해동(海東)의 신자가 어찌 심장(心腸)이 쇠와 돌 같겠는가? 지금의 이 훈유(訓諭)가 어찌 특별히 문관(文官)과 음관(蔭官)에게만 유시하는 것이겠는가? 또한 우리 종실(宗室)에도 유시하는 것이니, 그 선조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모두 시체(時體)010) 를 행한다면 〈영령이〉 오르내리며 밝게 임어할 터인데 어떻게 감히 도망하겠는가?"
하였다.
헌부 【장령 김시구(金蓍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계문하여 형식을 없애고 실상에 힘쓰기를 청하였으며, 이어서 갑자기 차례를 뛰어넘고 요행을 바라는 폐단과 근거없이 떠들어대고 조급하게 다투는 풍습을 말하였다. 교리 김보순(金普淳)이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언로(言路)를 열며, 작상(爵賞)을 신중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이정중(李廷重)이 신라(新羅)의 사공위(司空位)011) 에 대하여 아직까지 단(壇)을 설치해 시제(時祭)를 지내는 의식이 없어서 흠궐(欠闕)이 된다고 아뢰니, 임금이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여러모로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모두들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므로 감히 억측하여 대답할 수 없다고 하니, 예조에 명하여 여러 대신 및 유신(儒臣)에게 문의(問議)하고 널리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곧 사정전(思政殿) 옛터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고 돌아와 양성헌(養性軒)에 나아가 석강(夕講)을 행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1월 6일 무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함경도(咸鏡道)·경상도(慶尙道) 두 도의 방미방(放未放)에 대한 장계(狀啓) 가운데 품질(稟秩)이 많다고 하여 감사 조영순(趙榮順)과 이미(李瀰)를 파면하고 정존겸(鄭存謙)을 함경도 관찰사로, 이명식(李命植)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김노진(金魯鎭)을 대사간으로, 강윤(姜潤)을 집의로, 이적보(李迪輔)를 사간으로, 이태정(李台鼎)을 장령으로, 김서구(金敍九)·남주관(南胄寬)을 지평으로, 홍상간(洪相簡)을 헌납으로, 이진형(李鎭衡)을 교리로, 남주로(南柱老)·이시정(李蓍廷)을 부교리로, 유의양(柳義養)을 수찬으로 삼았다.
1월 7일 기유
유생(儒生)의 도기(到記)012) 를 가져오도록 명하여 아침 식당(食堂)을 숭정전(崇政殿)의 뜰에다 설치하도록 하고 시강(試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송민재(宋民載)를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1월 8일 경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춘향(春享) 및 사직단(社稷壇)의 기곡제(祈穀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이어 전설사(典設司)에서 재숙(齋宿)하였다.
1월 9일 신해
임금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가 이내 즙희당(緝熙堂)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이 당(堂)은 바로 옛날 동위(銅闈)013) 로 처음 나아간 곳이다. 내가 여기서 시강(侍講)하여 《대학(大學)》을 순통(純通)하니, 그때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이제 대과(大科)에 올랐다.’고 하셨는데, 오늘 충자(冲子)와 함께 앉았으니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하고, 친필(親筆)로 어제(御製)를 써서 내리며 세손(世孫)에게 명하여 여러 신하들과 화답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1월 10일 임자
달무리가 졌는데, 화성(火星)을 둘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정언 한광근(韓光近)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대신(大臣)에게 예모(禮貌)를 갖추는 것은 조정을 높이는 까닭인데도 관직을 내려주고 체임하기를 용이하게 하면서 화내고 꾸짖기를 빈번하게 하여 일반 관료를 부리는 것과 다름이 없고, 측근의 신하를 억재(抑裁)하는 것은 교화의 근본을 맑게 하는 것인데도 액속(掖屬)들이 사정(私情)을 이용하여 뇌물을 공공연하게 행하면서 심지어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일까지 있으며, 교만한 변방의 장수가 역사(歷辭)하기를 싫어하고 회피하려 한다면 죄벌(罪罰)을 마땅히 가해야 하는데도 친히 나아가 부임하도록 독촉하여 조정의 체모가 크게 허물어졌고, 매우 포악한 궁노(宮奴)가 법사(法司)를 어지럽혔다면 금지시키기를 마땅히 엄중하게 해야 하는데도, 대장(臺章)이 준엄하게 말하자 가볍게 처분하여 빨리 서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명령이 언제나 엄하고 성급하다고 염려하였지만 나라의 법은 더욱 해이해졌고, 우려하고 근신함이 더러는 독촉하고 책망하는 것을 지나쳤는데도 인심(人心)은 더욱 탐욕스러우니, 이와 같이 하고서 무너진 기강(紀綱)을 어떻게 세우겠습니까? 그리고 토지는 입고 먹는 근원이 되는데도 기름진 전지는 절반이 호강(豪强)과 귀족(貴族)에게 돌아가 번번이 침탈하는 근심이 많으며, 수령은 백성들의 생명과 관계되는데도 웅부(雄府)와 거읍(鉅邑)에 능력이 있는 관리를 가려 뽑지 않아 청렴하고 부지런한 지조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대가(大駕)를 움직이는 시기가 알맞지 않아 수레를 호위하는 〈군사가〉 대오를 이룰 겨를도 없으며, 물건을 하사(下賜)하는 것도 절도가 없어 국고[府帑]가 점점 줄어 거의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포련(布練)을 검소하게 하도록 분명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사치스런 풍습은 금해지지 않았으며, 경상 비용을 절약하고 줄이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탐욕스런 풍습은 더욱 성해지니, 이와 같이 하고서 백성들의 곤궁함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그리고 상전(賞典)은 당연히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도 자급(資級)을 올려 주기를 지나치고 함부로 하여 뒤섞였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며, 처음으로 벼슬시키는 것은 당연히 가려서 뽑아야 하는데도 승전(承傳)으로 산만하게 하여 도리어 넘겨다보는 마음을 열도록 하였고, 유술(儒術)을 숭상하는 것은 바로 우리 조정[朝家]의 법인데도 경학(經學)으로 스스로 수양한 인사가 진출한 것은 못 보았으며, 벼슬길을 소통(疏通)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성상(聖上)께서 고심(苦心)하는 것인데도 중외(中外)에서 재능을 지닌 부류들이 거의 엄체(淹滯)되는 경우가 많으니, 비록 과시(科試)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관절(關節)014) 로 서로 대응하는 것이 심지어 국정(鞫庭)에까지 나오며, 선비의 풍습은 이미 변하여 염치와 예방(禮防)이 날로 허물어지고 선거(選擧)가 너무 잦아 액원(額員)은 해마다 늘어났으며, 조정 관질(官秩)의 수효는 저절로 정해진 한계가 있는데도 문관·무관으로 사적(仕籍)에 오른 인사는 몇 갑절뿐만이 아니어서 얻고 잃는 데 대한 마음은 사람들 모두 중하게 여김이 분명하니, 밀치고 반목하는 풍습은 형세상 반드시 이르게 되는 것인데, 이와 같고서 조급하게 다투는 풍습을 어떻게 금지시키고 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폐단이 생기는 근원을 깊이 살피시려면 인도하고 통솔하는 방법을 철저히 궁구하여,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여 형식을 제거하고 실제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기강이 무너짐을 우려한다면 체통을 소중하게 여기고 법령을 살피기에 힘쓰며, 우리 백성들의 곤궁함을 우려한다면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지방관을 가려 뽑는 것에 힘쓰고, 조급하게 다투는 것의 심함을 우려한다면 염치와 지조를 장려하고 요행을 바라는 길을 막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오늘날의 폐단에 있어 거의 그 절반은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은 여기에 대하여 놀라움이 대단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아! 사람이 비록 미관 말직이라 하더라도 이름이 내국(內局)에 올라 있다면 그 보호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밤이나 낮이나 살피고 조심하며 근신하여 증세에 대응하고 약제(藥劑)를 논함에 나타나는 대로 아뢰어 고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곤성(坤聖)에게 올린 약제가 이미 탈이 있었다는 하교를 받았었는데도 제거(提擧)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진연(診筵)에서 아뢰지도 않으며, 한결같이 엄폐하고 숨기면서 감히 얼버무리려고 하다가 하순(下詢)을 받드는 데 이르게 되자 비로소 우러러 주달(奏達)하였으니, 그 죄상(罪狀)을 논하건대 대단히 통탄할 만한 일입니다. 그 훗날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었서 파직시키는 데에 그칠 수는 없으니, 신은 생각하기를 마땅히 해당 의관(醫官)은 모두 귀양보내는 법의 시행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처음으로 대관(大官)의 지위에 들어가 세 가지 조목을 붙여 진달하였는데, 의미가 모두 절실하여 매우 아름답게 여기니, 그것을 마땅히 스스로 힘쓰겠다. 끝부분에 언급한 것은 대관의 체통으로야 그러하겠지만 법률에 의하여 처벌하는 일은 중대한 것이니, 또한 서용하지 않는 데에서 그칠 수는 없다. 특별히 삭직(削職)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1일 계축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월 12일 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주강(晝講)과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이최중(李最中)·병조 판서 이경호(李景祜)가 여러 번 패초(牌招)를 어겼으므로 특별히 그의 관직을 파면하도록 하였다.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특별히 판윤 구윤옥(具允鈺)을 임명하여 병조 판서로 삼았다.
이장로(李長老)·정경인(鄭景仁)을 정언으로, 김노순(金魯淳)을 교리로, 이세석(李世奭)을 수찬으로, 원인손(元仁孫)을 형조 판서로, 이은(李溵)을 판윤으로 삼았다.
정언 한광근(韓光近)을 특별히 보외(補外)하여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삼았는데,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헌부 【장령 김시구(金蓍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그리고 육진(六鎭)은 서울과의 거리가 아주 멀고 무관[武弁]이 수령으로 임명되어 행정에 가혹(苛酷)함이 많으며, 인삼(人蔘)과 녹용(鹿茸)을 징수하며 거둬들이기를 한결같이 옛날 제도대로 하고 있으니, 문신(文臣)을 가끔 차임(差任)하고 인하여 구임(久任)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 【정언 박사형(朴師亨)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날씨가 아직도 추우니, 청컨대 모화관(慕華館)의 권무과(勸武科)에 친히 임어하는 날짜를 물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엄중한 전교를 내려 특별히 그를 체임하게 하고 이내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을 중추(重推)하라 명하였는데, 대개 대계(臺啓)가 권무(勸武)의 여러 무변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의심해서이다.
임금이 경기(京畿)의 세찬 계본(歲饌啓本)을 읽도록 명하고, 전 동지중추부사 이정(李瀞)에 이르자 하교하기를,
"지금까지 생존하여 있었다니, 내 마음이 아프다."
하고,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였으며 그 가운데 1백 세를 넘긴 사람 및 8, 90세가 된 사람이 많은 은자(恩資)를 받았는데, 당시 임금의 뜻은 오로지 노인을 우대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나이를 속여 자급(資級)을 얻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한번 사찬(賜饌)을 받으면 각 고을의 곡물(穀物)이 소비하는 비용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었다.
1월 13일 을묘
문신(文臣)의 한학 전강(漢學殿講)을 친시(親試)하였다.
1월 14일 병진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뜰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월 15일 정사
문신(文臣)의 제술(製述)을 친시(親試)하였다.
방야(放夜)하도록 명하였는데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답교(踏橋)015) 하는 놀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16일 무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삼군문(三軍門)의 무사(武士)를 시재(試才)하였는데, 금위영(禁衛營)에 합격한 자가 많았으므로 대장(大將)에게 호피(虎皮)를 내려 주어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모화관에서 시재하면서 대가(大駕)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모화현(慕華峴)에 올라가 명릉(明陵)을 바라보고 승지 이석재(李碩載)에게 명하여 달려가서 명릉과 홍릉(弘陵)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지나는 길에 경운궁(慶運宮)에 들러 궁호(宮號)를 친히 써서 걸도록 하였는데, 경운궁은 바로 원종(元宗)의 옛 궁(宮)이었다.
1월 17일 기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이미 사전(赦典)을 시행하였는데도 충청도(忠淸道)에서는 귀양간 죄인을 전혀 소석(疏釋)하지 않았다 하여 해당 도신(道臣) 권도(權噵)를 추고(推考)하도록 청하였다. 대체로 국가에 대사(大赦)가 있게 되면 각도의 도신이 인정과 법률을 참작하고 헤아려 더러는 석방하기도 하고 더러는 품지(稟旨)하기도 하는 것이 전례였다. 그런데 요즈음에 간혹 방질(放秩)016) 로 인해 도신으로 죄를 받은 자가 많았었기 때문에 충청도 도신의 방질이 없었음은 대개 이것을 염려해서였다. 임금이 삼남(三南)의 방미방(放未放)한 장문(狀聞)을 가져오게 하여 열람하고 대신(臺臣)으로 패초(牌招)를 어기어 귀양간 자들을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1월 18일 경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이내 문신에게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당시 시종(侍從)으로 지방에 있다고 일컫는 자가 많았으므로 20일에 금상문(金商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하도록 명하고 파산인(罷散人)을 모두 서용(敍用)하여 일제히 진참(進參)하게 하였다.
1월 20일 임술
김종정(金鍾正)을 이조 참판으로, 황갑(黃柙)을 대사헌으로, 서병덕(徐秉德)을 장령으로, 정범조(丁範祖)·이동우(李東遇)를 지평으로, 임희우(任希雨)를 정언으로, 홍낙인(洪樂仁)을 부교리로, 홍검(洪檢)을 보덕으로, 원인손(元仁孫)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이번 정사(政事)에서 이의철(李宜哲)을 도헌(都憲)017) 으로 맨 먼저 의망하고, 유지양(柳知養)을 정언으로 권진(權禛)·이병정(李秉鼎)을 춘방(春坊)으로 의망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의철이 어찌하여 도헌의 의망에 들었으며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한 유지양도 또한 어찌하여 정언의 의망에 들었는가? 이 의망은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권진·이병정을 춘방에 의망하였는데, 이는 전장(戰場)을 야기(惹起)시키는 것이다."
하고, 이내 하교하기를,
"문묘 종향(文廟從享)은 사체(事體)가 어떠한가? 또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진 뒤에 향유(鄕儒)가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하더라도 지위가 국자장(國子長)018) 으로 있으면서 감히 부정한 짓을 하여 남을 속이려 하는가? 그를 특별히 석방하도록 한 것은 참작한 의도가 있어서이며 소인(小人)의 요행으로 인해서였다. 비록 서용하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지난번의 검의(檢擬)가 이미 놀라운 데 관계되었는데, 하물며 도헌으로 〈의망한〉 것이겠는가?"
하고, 이조 판서 서명응(徐命膺)을 비로소 중추(重推)하도록 명하였으며, 조금 있다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이의철은 일찍이 국자장으로서 쫓겨난 향유를 구제하는 소(疏)를 올렸고, 유지양은 일찍이 대관(臺官)으로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모두 좌죄(坐罪)되어 여러 해 동안 벼슬길에 진출하지 못하였으며, 권진 또한 이병정의 아비를 참혹하게 탄핵한 자였다.
판윤 이은(李溵)을 특별히 제수하여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전 교리(校理) 남주로(南柱老)를 겸사서(兼司書)로 특별히 보임하고, 이양수(李養遂)를 기역 찰방(畿驛察訪)으로 삼았는데, 전날 문신 제강(文臣製講)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부 【장령 이태정(李台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즈음에 와서 기강(紀綱)이 해이해지고 과장(科場)이 엄격하지 않아, 비록 최대중(崔大中)의 방구전(防口錢)019) 에 대한 이야기와 지난 겨울 합제(合製)020) 에 난입(亂入)한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간교한 폐단의 단서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시관(試官) 및 금란관(禁亂官)021) 을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삼오(劉三吾)022) 의 피봉[皮]은 곧 황조(皇朝)의 고사(故事)인데, 비록 국청(鞫廳) 때 이봉환(李鳳煥)의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그 폐단을 알 만하다. 이 뒤로 만약 다시 이런 풍습을 계속하면 응시자[擧子] 및 시관(試官)을 일체(一體)로 충군(充軍)하는 일을 기록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겠다."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몇 해 전에 이봉환(李鳳煥)을 친국(親鞫)할 때에 주머니 속에 조그마한 책자(冊子) 하나가 있었는데, 조사(朝士) 및 귀가(貴家)의 자제(子弟)와 더불어 몰래 자표(字標)를 만들어 과장(科場)에서 간사한 짓을 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이봉한은 본래 천얼(賤孽) 출신으로 자못 문예(文藝)가 있었으므로 세력이 있는 집안과 교유(交遊)하였는데, 전후(前後)의 과장에서 간교한 일들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국옥(鞫獄)에서 드러났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여기에 이른 것이었다.
구상(具庠)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1월 22일 갑자
문신(文臣)의 이문 제술(吏文製述)에 친림(親臨)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였다.
1월 23일 을축
하교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새로 제정한 법이 옛날 법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말이 비록 천근(淺近)하기는 하지만 절실하다고 말할 만하다. 이문 제술(吏文製述)에 대해서는 건국(建國) 초기에 제도를 정한 것이 상세하게 구비되었다고 말할 만한데, 옛날 법이 없어졌음을 어제서야 크게 깨달았다. 공자[夫子]가 예(禮)를 아낀 뜻023) 을 가지고 지금 마땅히 옛날 규례(規例)를 따라야 할 것이니, 모두들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궁궐로 돌아왔다. 이문 제술(吏文製述)의 과차(科次)024) 를 매기어 수석을 차지한 김시구(金蓍耉)에게 반숙마(半熟馬) 한 필(匹)을 내려 주었다.
1월 24일 병인
주강(晝講)을 행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진형(李鎭衡)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세초(歲初)를 당하여 연달아 조참(朝參)과 상참(常參)을 행하시어 경계하고 면려하며 의견을 묻는 뜻이 금려(禁旅)025) 에까지 미치는데도, 허다한 비국 당상 가운데서 한 사람도 앞으로 나아가 일을 아뢰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청컨대 그날의 비국 당상을 모두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는 말하기를,
"소[牛]는 바로 농가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바인데, 요즈음에 와서 법으로 금지시키는 것이 해이해져 여리(閭里)에서 사사로이 도살할 뿐만 아니고, 수령(守令)이 된 자가 금지하는 법을 범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하여 청컨대 서울과 지방에 엄중히 신칙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여러 동몽들을 데리고 입시(入侍)하도록 하여 종이·붓·먹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대개 국가의 법에 교관을 설치하여 성취시키는 효과를 책임지게 하는 것은 의도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닌데, 요즈음에 와서 교관이 된 자가 애당초에 가르친 일이 없고 매번 입시하라는 명이 있으면 동서(東西)로 모집하여 어떻게 하더라도 모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교관을 설치한 뜻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석강(夕講)을 행하고, 승진 보임되거나 뽑힌 유생(儒生)을 소견(召見)하였다.
1월 25일 정묘
홍명한(洪名漢)을 형조 판서로, 한광회(韓光會)를 판윤으로, 이형규(李亨逵)를 집의로, 이시정(李蓍廷)을 사간으로, 유한근(兪漢謹)을 지평으로, 송취행(宋聚行)을 정언으로, 조준(趙㻐)을 응교로, 정호인(鄭好仁)을 헌납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각도(各道)의 구관 당상(句管堂上)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구관 당상은 예전에는 없었고 이제 두었는데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 특별히 부른 것이다. 이후로는 수령(守令)으로 간혹 휴가를 가거나 간혹 차사원(差使員)으로 서울에 올라가는 자는 반드시 구관 당상에게 가서 보도록 하며, 구관 당상은 본 고을의 폐단을 상세히 물어 〈폐단이〉 큰 것은 상신(相臣)에게 말하여 아뢰게 하고 아주 상세히 해야 할 것은 도신(道臣)에게 오고 가게 하여 내가 정해진 때가 없이 불러다 묻는 데 대답하도록 하라. 이것은 특별히 신칙하고 면려하려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3백 60고을에 대하여 늘그막에 백성을 위해서이다."
하였다.
동래(東萊)·금산(金山)·제주(濟州)에서 풍랑을 만나 떠내려온 사람에 대하여 양도(兩道)의 수령으로 하여금 의복과 식량을 헤아려 지급하여 순풍(順風)을 기다렸다가 되돌려 보내게 하고 본목사(本牧使)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1월 26일 무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공시인(貢市人)을 불러다 질고(疾苦)를 물으니, 모두들 폐단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비국(備局)에 명하여 역관(譯官)과 전인(廛人)을 엄중히 신칙하여 많은 양의 광직(廣織)을 연시(燕市)에서 무역할 수 없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몇 만 냥의 은화(銀貨)를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물가에다 흩어 버렸다. 이후로 만일 이런 폐단이 있으면 역관(譯官)을 마땅히 엄중히 다스릴 것이니, 이 또한 사치를 억제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였다.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해서(海西)의 습조(習操)026) 를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기당(騎堂)027) 을 소견(召見)하여 근수(跟隨)028) 는 한결같이 정해진 규칙을 따르게 하고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신칙하였다. 왕손(王孫)이 출입(出入)할 때에 근장 군사(近仗軍士)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 및 첨위(僉尉)가 데리고 다니는 권두(權頭)를 금지하도록 명하였으며, 취제(就第)하지 못한 왕손은 교부(敎傅)로 하여금 권과(勸課)하게 하고, 이미 취제한 왕손은 종학(宗學)029) 으로 하여금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였는데, 대개 근수에 대한 규정은 저절로 정해진 제도가 있는데도 대신(大臣) 이하가 국법(國法)을 준수하지 않고 앞뒤에서 옹호하여 국도(國都)의 성문(城門)이 시끄러운 것이 저잣거리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한광근(韓光近)을 지방관으로 보임하라는 명을 특별히 환침(還寢)하고 다시 정언으로 임명하였으며, 정언 홍상성(弘相聖)에게 큰 녹비[大鹿皮]를 내려 주었는데, 대체로 두 사람이 일찍이 궁노(宮奴)가 법사(法司)에 분란을 일으켰던 일을 논핵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그 말을 생각하여 칭찬한 것이었다. 아! 요즈음 대각(臺閣)이 말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임금이 이러한 일을 염려하여 이미 권장하고 또 상(賞)까지 주었으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충성스러운 말과 곧은 논의가 〈임금〉 앞에 번갈아가며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훌륭한 말에 공경을 표시한 융성함과 주(周)나라 신하가 천자(天子)를 보필한 기틀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1월 28일 경오
하교하기를,
"인군(人君)의 존엄함으로도 강연(講筵)에서는 오히려 앞서 배운 것을 읽는데, 더구나 왕손(王孫)이겠는가? 은전군(恩全君)〈이찬(李禶)의〉 교부(敎傅)는 관례(冠禮)하고 취제(就第)하기를 기다린 뒤에 줄이도록 하라. 그리고 또 옛날의 규정에는 비록 정1품의 종신(宗臣)이라 하더라도 감히 패(牌)를 사용하지 못하였으니, 이후로는 왕자(王子)인 연후라야 패를 사용할 수 있으며, 비록 내종(內宗)이라 하더라도 사인사(舍人司)의 예(例)에 의거하여 전첨사(典籤司)에서 패를 사용하는 경우에 맞게 하라. 이번의 이 하교가 어찌 왕손을 억제시키려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등급과 분수가 문란하면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서 교화하는 방법이 느슨해지는 것을 위해서이니, 이것은 바로 공자[孔聖]가 〈자공(子貢)에게〉 너는 조그마한 물건[小物]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고 한 의미인 것이다."
하였다.
김치양(金致讓)을 이조 참의로, 이득일(李得一)을 집의로, 이갑(李𡊠)·이익선(李益烍)을 부교리로, 이영보(李永輔)를 충청 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먼저 청하기를,
"참하관(參下官)이 군문(軍門)에서 출륙(出六)030) 하면 견복(甄復)031) 할 길이 없기 때문에 지난해에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훈련 주부(訓鍊主簿) 한 자리를 더 설치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이 무리들을 소통(疏通)시키기 위한 방법인데도 앞뒤의 정관(政官)이 천전(遷轉)시키지 아니하고 침체시키기를 예전과 같이 하니 청컨대 거듭 신칙하소서."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감시(監試)와 회시(會試)가 이제 또 멀지 않은데, 시끄러운 말들을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함부로 들어가 차술(借述)하는 그 방법이 한두 가지뿐만이 아니어서 여러 사람의 입에 떠들썩하게 전해지니, 만약 다시 그전 풍습을 따라 행한다면 선비의 풍습을 장차 어떻게 바로잡겠으며, 세상의 도덕을 장차 어떻게 힘쓰도록 하겠습니까? 마땅히 먼저 금란소(禁亂所) 및 시소(試所)를 엄중하게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유삼오(劉三吾)의 피봉을 지금 비록 쓰기는 어렵더라도 처음부터 초시 방목(初試榜目)이 있으니, 그가 어떻게 도망하겠는가? 이것으로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으며,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월 29일 신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서청군(西淸君) 이성(李煌)이 상소하기를,
"희릉(禧陵)은 능 위의 혼유석(魂遊石)이 기울어져 있으며,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은 두 능의 주맥(主脈)인 축현(杻峴)에 길이 나고 흙이 파였으니, 모두 다듬어 고치고 파인 곳을 보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혼유석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며, 축현에 대한 일은 예조 당상으로 하여금 봉심(奉審)하게 하여 이지러진 곳에 약간의 보수를 더하고 벽돌을 배치(排置)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여 하교하기를,
"아! 늘그막에 명분을 바로잡고 기강을 엄정히 하는 것을 먼저 할 일로 삼았기 때문에 근수(跟隨)에 대하여 신칙하였다. 근장군(近仗軍)이 앞에서 인도하는 것은 바로 왕자(王子)나 대신(大臣)·기당(騎堂) 외에는 없었던 바로서 이것도 오히려 의문(儀文) 사이의 일인데도 평상시에 모두들 초헌(軺軒)과 교자(轎子)를 탄다고 하는데, 옛날에 젊은 종반(宗班)은 타지 않았던 바이다. 그리고 심지어 남여(籃輿)는 곧 늙은 재상(宰相)이 타는 것인데, 어찌 10여 세가 된 사람이 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가 나이가 어려서 조심할 줄 몰랐다면 자중(自重)은 했어야 한다. 그런데 또 들으니 겸종(傔從)과 복예(僕隷)가 지나친 것이 많다고 하니, 어찌 상전을 따라다니는 하인뿐이겠는가? 근신(謹愼)을 잘못하는 것 또한 많을 터인데, 더구나 다른 종친(宗親)과 다름이 있음이겠는가? 은언군(恩彦君)·은신군(恩信君)의 자사(子師)인 두 사람과 임장(任掌) 가운데 가장 용사(用事)한 황성(黃姓)의 사람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당일(當日)로 남쪽 바닷가 지역에다 정배(定配)하며, 그 나머지 임장은 호서(湖西)에다 정배하고, 사나운 종과 교만한 하인 30여 명은 모두 방축(放逐)하여 감히 경기(京畿) 근처에서 생활하지 못하게 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에게는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16권, 영조 47년 1771년 4월 (0) | 2025.10.15 |
|---|---|
| 영조실록116권, 영조 47년 1771년 3월 (0) | 2025.10.15 |
| 영조실록115권, 영조 46년 1770년 12월 (0) | 2025.10.15 |
| 영조실록115권, 영조 46년 1770년 11월 (0) | 2025.10.15 |
| 영조실록115권, 영조 46년 1770년 10월 (0) | 2025.10.15 |